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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不如兩忘而化其道(불여양망이화기도)=둘(상대성세계)을 다 잊고 道(도=절대진리인 하나님)로 거듭남만 같지 못하다 본문

마스터와 가르침/노장

不如兩忘而化其道(불여양망이화기도)=둘(상대성세계)을 다 잊고 道(도=절대진리인 하나님)로 거듭남만 같지 못하다

柏道 2020. 1. 12. 16:34



不如兩忘而化其道(불여양망이화기도)=

둘(상대성세계)을 다 잊고 道(도=절대진리인 하나님)로 거듭남만 같지 못하다

                                                                                                                                                                                      출처 蘧然覺  

2014. 8. 22. 13:24


                                                                            

1.故其好之也一(고기호지야일)

2.其不好之也一(기불호지야일)

3.其一也一(기일야일)

4.​其不一也一(기불일야일)

5.其一與天爲徒(기일여천위도)

6.其不一與人爲徒(기불일여인위도)

7.天與人不相勝也(천여인불상승야)

8.是之謂眞人(시지위진인)

9.死生命也(사생명야)

10.其有夜旦之常天也(기유야단지상천야)

11.人之有所不得與(인지유소부득여)

12.皆物之情也(개물지정야)

13.彼特以天爲父(피특이천위부)

14.而身猶愛之(이신유애지)

15.而況其卓乎(이황기탁호)

16.人特以有君爲愈乎己

17.而身猶死之(이신유사지)

18.而況其眞乎(이황기진호)

19.泉涸(천학)

20.魚相與處於陸(어상여처어육)

21.相呴以濕(상구​이습)

22.相濡以沫(상유이말)

23.불如相忘於江湖(불여상망어강호)

24.與其譽堯而非桀也(여기예요이비걸야)

15.不如兩忘而化其道(불여양망이화기도)

(풀이편)​

이 글은 莊周(장주)님의 莊子(장자) 大宗師(대종사=하나님)편 第四(제사)​에 나오는 말씀으로 無限宇宙(무한우주)의 絶對存在(절대존재)이신 하나님을 밝히신 말씀이다.

예수님보다 삼백년이나 앞서 사신 장자님이 예수님과 똑같은 말씀을 미리 해놓으신 엄청난 말씀이다.

몸의 個體(개체)로는 장자고 예수로 서로 다르지만 하나님의 성령인  성령의 씨앗 영으로 거듭난 영으로써는​ 똑같은 하나님의 영이라서 그런것이 아니겠는가.

성경 요한복음 12장 24절서 25절 에서 예수님이 말씀 하시길

『24절: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데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25절: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永生(영생)하도록 保存(보존)하리라 』하였다.

밀알은 밀알 껍질과 밀알 속 생명으로 되어 있는데​

여기서 죽지 아니하면과 죽으면 이라고 한​ 죽음은 밀알 껍질의 죽음을 말하는 것이지 밀알의 속 생명씨알의 죽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게 무슨 말인가하면 사람을 穀食(곡식)인 밀알의 씨앗을 들어 비유하신 말씀이다.

사람도 이 곡식의 씨앗처럼

사람의 참생명인 하나님의 씨생명이 사람의 몸이란 겉 껍질로 감싸져 몸뚱이 속 心靈(심령)에 있다는 말을 이렇게 비유하신 말씀인 것이다.​

곡식 씨앗이 움이 트고 싹이 나 자라려면 그 껍질이 脫却(탈각)되어 벗어지고 죽고 썩어야 하듯이

사람도 참 생명인 심령 속 하나님 씨 생명으로 거듭나 참나가 되고자하면 몸이란 겉 껍질이 벗어지고 죽어져야 된다는 말씀인 것이다.

몸이란 겉 껍질이 벗어지고 죽어져야 한다는 말은 몸이 겉 껍질인 거짓나​임을 인정하고 몸에 삶의 전목적을 두고 살던 肉身貪慾爲主(육신탐욕위주)의 삶에서 그 것을 否定(부정)하는 十字架(십자가)를 지라는 말인 것이다.

곡식 씨 껍질의 使命(사명)​이 껍질 속 씨 생명을 감싸 保護(보호)하고 씨 생명을 키워내고자 기꺼이 자신이 죽어지는데에 그 사명이 있듯이

사람의 몸이란 껍질도 이와 같은 理致(이치)라는 것이 예수님 말씀의 숨은 참뜻인 것이다.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데로 있다는 말에서 죽지 않으면이란 말은  씨 껍질이 자신의 죽어야 할 사명을 어기고 껍질 자신의 생명에 執着(집착)하여 未練(미련)의 끈을 놓아버리질 못하고 하나님의 뜻을 거역한다는 말이고

한 알 그데로 있다는 말은 씨앗이 영원히 산다는 말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신 생명기간 동안만 살다가  때가 다되면  씨 껍질도 죽고 씨 생명도 죽어 영원히 멸망하고 만다는 것을 사람에 비유하신 말씀인 것이다.​

25절 말씀에서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과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에서의 생명은

몸뚱이의 생명인 겉 껍질의 생명을 말하는 것이고

잃어버릴 것이요와 永生(영생)하도록 保存(보존)한다는 것에서의 생명은

하나님이 주신 하나님 씨 생명인 永生生命(영생생명)인 참나의 영적 생명을 말씀하신 것이다.

이 말씀만 알아 들어도 예수님 말씀을 다 안 것이라 할 수 있다 할 것이다.

같은 말씀을 듣고 보고 읽어도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과 성령으로 거듭나질 못한 사람은 서로 알아 듣는게 하늘과 땅차이로 달라지는 것이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3장 63절에서  살리는 것은 영이요 肉(육)은 無益(무익)하니라​ 하고 분명히 말씀을 하셨는데도

聖靈(성령)으로 거듭나 참나를 깨달아 안 사람은 靈(영)의 復活(부활)로 알아 듣는데

성령으로 거듭나질 못하고 몸뚱이를 참나로 아는 사람은 몸뚱이의 肉身復活(육신부활)로 알아듣고 몸을 뒤집어쓰고 새하늘 새땅의 千年王國(천년왕국)에서 王(왕)노릇하며 永生(영생)한다고 알아듣고 얼토당토않는 喇叭(나팔)을 불어대는 것이다.

성령으로 거듭나고 못나고의 差異(차이)가 이렇게 서로 다른 것이다.

몸뚱이가 罪惡(죄악)덩어리 그자체이다.

慾心(욕심)이 孕胎(잉태)한즉 罪(죄)를 날고 罪(죄)가 長成(장성)한즉 死亡(사망)을 낳는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입으로는 횡하니 잘도 외우면서도 정작 그 뜻을 전혀 못알아 듣는 것이​니 몸뚱이가 영생한다며 불쌍하리만큼 어리석게도 그리도 몸뚱이에 執着(집착)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밀알 껍질이 벗어져 죽어야 밀이 움터 속에 있는 진짜 생명이 살아 열배 백배의 열매를 맺는다는 말도 졸졸졸 잘도 외우면서 정작 그 뜻을 모르는 것이니

몸이란 겉 껍질 생명에 매달려 아둥바둥 하는 것이 참으로 惻隱(측은)하고 서글픈 일이아닌가 말이다.

原罪(원죄)가 다른 것이 아니고 慾心(욕심)이 原罪(원죄)의 씨라는 말이다.​

몸뚱이는 죽자고 난 것이지 永生(영생) 하자고 난 것이 아니라는 것이 하나님의 絶對不變眞理(절대불변진리)요 다스리는 우주의 攝理​(섭리)요 秩序(질서)인 것이다.

莊子(장자) 逍遙遊(소요유)篇(편)에 있기를

小知不及大知(소지불급대지)라 하여

작은 쫌생이 앎은 크고 시원한 말씀에 못미친다 하였다.

絶對知(절대지)와 相對知(상대지)를 말하는 것으로

작은 앎이란 被造物(피조물)인 인간들이 내가 뭘 안다고 잔뜩 아는체를 하며꺼떡거리는 相對界(상대계)의 限界(한계)에 갇힌 經驗知識​(경험지식)의 알음알이를 말하는 것이고

큰 앎이란 인간의 頭腦(두뇌)로 아는 상대적인 지식이 아니고 宇宙(우주)의 絶對主權者(절대주권자)인 全知全能(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성령과 靈通(영통)하여 證得(증득)한 靈智(영지=영적지혜)를 말하는 것이다.

앎의 次原(차원)이 다른 것이다.

知者不言 不知者多言(지자불언  부지자다언)이 뭔가

아는 자는 구태어 말이 없고 알질 못하는 자는 재재재 말이 많다는 것이다.

아는 자는 알은 것을 默默(묵묵)히​ 자기 삶에서 소리 없이 행할뿐 굳이 말이 필요가 없다는 것이고

잘 알질 못하는 사람은 뭘 터럭의 끝만큼이라도 알면 그걸 자랑하고싶어 아는체를 하느라 공연히 말만 많고 그나마 조금 아는 것마져도 자기 삶에 실천은 없고 남에게만 강요를 한다는 것이다.

행함이 없는 믿음이나 지식은 죽은 믿음이고 죽은 지식인 것이다.​

生死一如(생사일여)란 것이 무엇인가.

生(생)과 死(사)가 서로 다른게 아니라 하나로 이어진 한 줄기라는 말이다.

성령으로 거듭난 聖人(성인)들의 生死(생사)를 보는 바른見解(견해)가 이렇다는 말이다.​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몸은 一時的(일시적)인 거짓의 생명이고 靈(영)이 참 생명이라는 말이다.

몸이 죽는다는 것은 우리 靈魂(영혼)이 몸이란 監獄(감옥)의 틀에 갇혀 있던 것이 몸이 죽어짐으로 몸에서 풀려나 無限虛空(무한허공)의 하나님 나라인 無限自由(무한자유)의 틀로 틀만 바뀐 것이지 다른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틀과 內容(내용)을 混同(혼동) 해서 몸이 죽고난 다음에 올 더 크고 더 좋은 틀을 몰라서 至今(지금) 내 몸뚱이 삶이 전목적이라고 錯覺(착각)​하는 꿈같은 헛소릴 하는 것이 無明(무명)에 덮이고 눌린 衆生(중생)들이라는 것이다.

벗을건 벗어버리고 줄건 다 줘버리고 묶이고 매인건 다 남김없이 풀고 容恕(용서)하고 거룩하고 큰 사랑 하나로 영그는 것이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의 生死觀(생사관)이라는 것이다.

天國(천국)간다느니 極樂往生(극락왕생)한다느니 하는 말의 참 뜻을 알기나 하고들 하는 것인지도 모를일이다.

하나님 나라는 가거나 오는 나라가 아니다.

이 無限宇宙(무한우주)의 어느 곳 하나 하나님 나라가 아닌 곳이 없는데 뭘 가고 온다는 말인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은 몸뚱이 나가 나고 죽음과 관계없이 내 생각의 중심이 몸나와 마음 나인 自我(자아)에서 하나님 씨앗 靈(영)인 성령의 靈我(영아)로 옮기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靈我(영아)로 옮긴다는 것은 自我(자아)를 거짓의나로 알고 버렸다는 말이고

自我(자아)를 버렸다는 말은 無執着(무집착)이되어 완전한 자유에 들었다는 말이다.

이것이 석가 붓다님이 말한 껍질을 벗고 풀려났다는 解脫(해탈)이고

몸뚱이의 監獄(감옥)​에 갇혔던 拘束(구속)과 不自由(부자유)에서 풀려 眞理(진리)로 自由(자유)케 되었다는 말이 예수님의 말씀인 것이다.

예수님은 몸이 죽는 것을 여자가 새 생명을 낳는 解産(해산)의 産苦(산고)에 比喩(비유)하신 말씀을 하셨다.

아이를 낳는 産苦(산고)는 두렵고 떨리고 苦痛(고통)스럽지만 태어난 새 생명을 보는 瞬間(순간) 그 모든 고통과 두려움이 언제그랬냐는 듯이 말끔히 가셔진다는 것이다.

간디는 죽음이란 죽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가 계시는 집인 우리들의 본디 本鄕(본향)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했다.

百聞而不及一覺)백문이불급일각)이다.

백번을 들어 귀에 쟁쟁해도 한번 탁 깨닫는 것에 못미친다는 말이다.

남이 해놓은 말을 아무리 듣고 배우고 졸졸졸 다 외워 안다해도 그 것이 내 속에서 내 것으로 탁터져 내 뜻이되어야지  그렇질 못하면 죽을때까지 수박 겉핥기로 남의 뒤를 따라가며 흉내내기에만 바쁘다는 말이다.

​흉내내기로 사는 것은 혼이 없는 송장이 사는 것과 같다 할 것이다.

人類(인류)의 모든 經典(경전)의 核心(핵심)​ 알맹이가 몸나와 마음 나인 自我(자아)는 참나가 아니고 거짓의 나라는 것이다.

이 거짓의 나를 부정하여 벗어서 던져버리고 靈我(영아)의 얼의 나인 참나를 깨달아 위로 솟나라는 이 한마디인데

경전을 달달달 외우고 입술로는 靑山流水(청산유수)로 잘도 말하면서 이 핵심 진리로 깨달아 거듭난 사람을 만나기가 하늘에 별따기로 힘든 것은 다들 몸나와 마음 나에 執着(집착)한 몸뚱이 욕심으로 헛믿는 사람들이라서 그런 것일 것이다.

地球村(지구촌)에 존재하는 70억이 넘는 사람들이 박시글거리며  모두가 저가 잘났다며 거들먹거리며 살고있지만

거의 大槪(대개)가 몸나와 마음 나인 自我(자아)가 참나인 걸로 알고 진짜 참나인 靈我(영아)인 얼의 나를 모르고 살아간다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거듭나질 못한 사람은 소경이다. 죽은자다라고 까지 말씀을 하셨는데도 이 걸 못알아 듣고 몸뚱이 뒤집어 쓰고 들림받고 선택받아 14만 4천인이 사는 천년왕국의 새하늘 새땅에서 영생한다는 무슨 駭怪妄惻(해괴망측)한 헛소리를 해대면서

몸으로 永生(영생)한다는 말을 못믿으면 유황불 지옥에 떨어져 地獄餓鬼(지옥아귀)가 된다는둥 하며 詛呪(저주)와 惡談(악담)에 脅迫(협박)까질 해대는 精神(정신)줄 나간 사탄의 졸개들이 날뛰고 있는 것이 참으로 안스럽고 惻隱(측은)한 믿음의 현실임을 어찌하랴

하나님이 몸을 살리시는 동안 몸이 죽기까지 해야 할 일이 몸나와 마음 나인 거짓의 나를 벗어 던지고 하나님 성령 씨앗의 나인 참나로 거듭나라는 것이

하나님이 사람을 살게하신 뜻인데 이 것을 못알아 듣는 것이다.

佛經(불경) 金鋼經(금강경)에​ 있기를

凡所有相皆是虛妄(범소유상개시허망) 若見諸相非相則見如來(약견제상비상즉견여래) 知我說法如筏喩者(지아설법여벌유자)라 하여

무릇 相(상=형상=꼴)이 있는 모든 물질은 다 이것은 헛것이고 망령된 요망한 것이다.

만약 모든 꼴이 있는 모습의 물질을 꼴이 없는 것으로 본다면 곧 如來(여래=참나=불성의 다르마)를 볼 것이다.

내가 說法(설법)한 진리는 마치 뗏목에 비유한 것과 같음을 알아야 한다. 하였다.

宇宙萬有(우주만유)에 펼쳐진 모든 物質(물질)들이 다 하나같이 나고 죽는 生(생)과 死(사)의 순환고리에서 明滅(명멸)하는 變化(변화)의 秩序(질서)​를 따라가는 假存的(가존적)인 虛相(허상)들이지 참의 실체가 아니라는 말이다.

물질이라는 蜃氣樓(신기루)에 속지를 말라는 말이다.

뗏목이란 江(강)이나 바다를 건널때 타고 건너는 통나무로 엮어진 臨時方便(임시방편)의 渡江道具(도강도구)다.

45년동안 說法(설법)하신 붓다님 가르침의 모든 말씀의 알맹이는 바로 이 말씀으로써

이 세상이라는 此岸(차안)인  물질의 江(강)이요 極端的(극단적)으로 利己的(이기적)이고 排他的(배타적)인 貪慾心(탐욕심)​의 강을 건너 저 세상이라는 彼岸(피안)에 가고자 하는데에 꼭 필요한 타고 가야 할 뗏목 같은 것이라는 말이다.

江(강)을 다 건너고나면​ 뗏목의 용도는 다한 것이라는 말이다.

성경도 불경도 다 뗏목같은 것이지 그게 偶象(우상)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경전을 바로 알면 내가 참나로 거듭날 수 있는 뗏목이 되지만

이 걸 엉뚱한 자기 몸뚱이 욕심으로 알려고 들면 경전이 偶象(우상)으로 떨어지고만다는 것이다.

요한복음 6장 27절 말씀에

『썩는 糧食(양식)을 위하여 일하질 말고 永生(영생) 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하였다.

썩는 양식이란 物質(물질)인 몸뚱이와 세상 물질을 말함이고

永生(영생) 하도록 있는 糧食(양식)이란 하나님 성령 씨앗의 참나인 靈我(영아=얼의 나)를 말하는 것이다.

殺身成仁(살신성인)​이라 하여 몸을 죽여 어짐을 이룬다는 孔子(공자)님의 말씀도 예수님의 이 말씀과 똑같은 말씀이다.

몸뚱이의 탐욕심을 말끔히 죽여야 仁(인= 어짐. 하나님의 조건이 없는 사랑)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 살신성인이다.

仁(인)= 人(인)+二(둘이)로

두 사람이 하나로 된것이 仁(인)이다.

두 사람이 하나가 된 것이란 나와 너란 個體意識(개체의식)이 없어지고 하나로 全​體意識(전체의식)이 되었다는 말이다.

夫婦(부부) 사이를 普通(보통) 一心同體(일심동체)라지만​ 그런 부부를 이 땅에서 볼 수는 없을 것이고 아마 그렇게 되어야 이상적이라는 말이 아니겠는가.

남을 죽이더라도 내가 살겠다는 것이 몸뚱이를 나로 알고 사는 사람이란 짐승 성질의 법칙이라면 나는 죽더라도 너는 살리겠다는 것이 하나님 아들된 성령으로 거듭난 靈我(영아)의 사랑인 것이고 生死觀(생사관)인  것을 예수님이 보여주신 것이 십자가의 거룩하신 죽음이 아닌가.

孟子(맹자) 告子下(고자하)에서 맹자님이 말씀하시길

生於憂患(생어우환) 死於安樂也(사어안락야)라 하여

근심과 걱정에서 진리정신이 살아나고 그저 平安(평안)하고 즐겁기만 하면 죽는 것이 사람의 정신이라고 했다.

苦難(고난)이 내게 有益(유익)이라 하신 시편 119편 71절의 말씀과 같은 말씀이다.

이 세상이 통채로 苦痛(고통)과 苦惱(고뇌)의 바다인 苦海(고해)인 것은

그 고통과 고달프고 힘든 逆境(역경)을 통해 眞理精神(진리정신)으로 깨어나는 정신거듭남의  발판인 跳躍臺(도약대)로 알아 감사한 마음으로 肯定的(긍정적)으로 받아 들이라는 것이지 지레 挫絶(좌절)하고 恨歎(한탄)하고 怨望(원망)하라고 고통의 삶이 주어진 것이 아님을 알아야한다는 것이 성인들의 한결같은 말씀이신 것이다.​

이 세상이 온통 근심과​ 걱정과 苦痛(고통)과 苦惱(고뇌)와 煩惱(번뇌)로 생각키우는 것은 다 내게 몸뚱이가 있어서 그런 것이고 내 피붙이와 살붙이가 있어서 그런 것이다.

이 몸뚱이에 종질하는 마음의 나를 탁 놓아버리고 내 살붙이를 놓아버리면 모든 번뇌에서 풀려나 바로 解脫(해탈)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알면서도 다들 이게 쉬 안되는 것이​ 사람들인 것이다.

그래서 몸을 뒤집어쓰고 몸으로 永生(영생) 하겠다는 사탄마귀의 홀리는 헛소리에 귀가 솔깃해져 넘어지고 자빠지는 것이 아닌가.

사람이면 다 너나 없이 그 심령에 하나님 아들로 거듭날 하나님 씨앗 성령의 靈(영)이 들어 있지만 그 씨앗으로 움을 틔우고 깨달음의 꽃으로 피워내 하나님의 아들인 참나가 되고 못되고는 다 각 사람의 自由意志(자유의지)의 選擇(선택)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하나님도 이 것을 대신 해 줄수가 없는 것은 그것이 하나님이 인간에게 맡기신 自由選擇(자유선택)의 意志(의지)이기 때문이다.​

성령으로 거듭나 참나인 하나님 아들로 깨어나는 頓悟(돈오)를 이루는 것은 다 사람 各個人(각개인)의 몫이라는 것이다.

몸뚱이 삶은 누구 없이 늘 바쁘고 쫓기고 허겁지겁 하면서 苦惱(고뇌)와 煩惱(번뇌)와 근심과 걱정으로 뒤숭숭하게​ 엎치락 뒤치락 살아 가기가 바쁜 것이 一般(일반)이라 할 것이다.

緊莫緊於承綸音(긴막긴어승륜음) 急莫急於腹膺心(급막급어복응심)이란 말이 多夕(다석)님의 어록에 있다.

긴요한 것 가운데도 더없이 긴요한 것이 하나님 말씀을 이어받음이고​

하나님 말씀을 마음 속 심령에 꼭 품어 새기는 것보다 더 급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 하였다.

이것이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이 말하는 세상에 살리는동안 해야 할 가장 긴급한 일이라는 것이다.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몸나와 마음 나인 自我(자아)라는 거짓나에 붙잡혀 썩어질 物質(물질)인 몸뚱이의 慾心(욕심)과 感覺(감각)에 종노릇하며 이리 쫓기고 저리 쫓기며 苦惱(고뇌)와 煩惱(번뇌)의 수렁에 빠져 허우적이며 엎어지고 자빠지며 속아서 살질말고

하나님이 본디 내 속에 넣어주신 하나님 聖靈(성령)의 씨앗인 靈我(영아=얼나)의 참나로 탁 깨어나라는 말인 것이다.

몸은 본디 없던 것이 父母(부모)를 인해 생겨난 것이고

조금 살았는가 싶으면 이내 늙고 병들어 푸석하니 죽고 불에 태워지고 한줌의 재가되어 各種(각종) 元素(원소)로 還原(환원)되어 宇宙空間(우주공간)으로 흩어져 消滅(소멸)되고마는 것이다.

이러고나면 그토록 愛之重之(애지중지)하던 나란 것이 어디에 있는가

열심히 눈알을 반질거리며 쥐구멍을 들락날락하던 쥐 한마리가 죽고나자

이내 구더기가 쓸어 구더기란 다른 생명의 밥으로 그 形體(형체)가 순식간에 완전 分解(분해)가​ 되어버리는 것과 무엇이 크게 다르다 할 것인가

성령의 얼나로 깨어 거듭나 참나를 알질 못하고

몸나를 참나로 알고 짐승처럼 오로지 利己的(이기적)이고 排他的(배타적)인 貪慾心(탐욕심)만으로 살면 이런 짐승들과 다를바가 없이 영원한 滅亡(멸망)으로 끝나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老子(노자) 道德經(도덕경) 35장에 있기를

樂與餌過客止(락여이과객지) 道之出口淡乎(도지출구담호) 其無味視之不足見(기무미시지부족견) 聽之不足聞(청지부족문) 用之不可旣(용지불가기)라 하여

풍악이 울리고 먹거리가 있는 곳에는 지나가는 이들을 멈추게하고 모여들게 하지만

누가 입으로 진리를 말하는 말씀은 맛도 없고 봐도 볼 것이 없고 들어도 들을게 없다며 다들 시큰둥 하지만 실상 그 쓰임은 사람들이 몰라서 그렇지 무궁무진하다 하였다.

물질인 몸뚱이를 나로 알고 사니까 구저 쿵짝 쿵짝 귀를 즐겁게하는 음악과 풍류가 있으면 사람들이 꼬여들고 시끌벅적하니 흥에겨워 좋아한다는 것이고 거기다 무슨 먹거리라도 더해질라치면 사람들이 죽은 屍體(시체)에 구더기가 쓸듯이 떼거리로 몰려 왁자지껄 해 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령으로 거듭나야 참나요 하나님 아들이요

이 참나가 永遠(영원)히 永生(영생)하는 하나님의 참생명이요 하는 소리는 다 허접한 헛소리로 들려 사람들에게 또랑이로 무시 당하기가 십상이지만 실상은 이것이 진리임을 사람들이 몰라서 그렇다는 것이다.

마태복음 13장 45절서 46절 말씀에서 예수님이 말씀 하시길

『하늘 나라는 어떤 장사꾼이 좋은 珍珠(진주)를 찾아 다니는 것에 비길 수 있다. 그는 값진 진주를 하나 발견하면 돌아가서 있는 것을 다 팔아 그것을 산다 』 하였다.

장사꾼이란 損害得失(손해득실)에 눈에 불을 켜고 계산기를 두드리며 오로지 자신의 이익을 잣대로 자기 중심위주로 사는 몸뚱이 중심의 세상 사람들을 비유하여 말하는 것이고 좋은 진주란 하나님의 참생명인 성령 씨앗을 말하는 것이다.

진주를 발견하면 돌아가서 자신에게 있는 모든 것을 모두 다 판다는 말은

지금까지  자기가 참나로 알고 살아왔던 몸나와 마음 나인 자아의 삶이 거짓임을 알아 抛棄(포기)하여 버린다는 말이고​

그것을 산다는 말은

하나님 성령 씨앗으로 거듭나 영아인 참나를 회복하여 하나님 아들된 삶을 삶의 전목적으로 삼는다는 말이다.

진주는 하나님 성령 씨로 비유 한 것도 되지만 성령으로 거듭난 영아의 얼나를 비유 한 것도 되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다 자신이 된만큼만 알 수 밖에 없는 것이 사람의 限界(한계)라 할 것이다.

저마다 안다고 老獪(노회)한척 아는척을 하지만 실상은 모르니가 아는척을 한다는 것이다.

知者不博(지자불박) 博者不知(박자부지)란 老子(노자)님의 말씀이 이것을 말한 것이다.

아는 자라고 다 박식한 것도 아니고 박식한 자라고 해서 다 아는 것이 아니가 하였다.

이것이 相對知(상대지)의 限界(한계)라는 것이다.

老子(노자)님은 道德經(도덕경) 55장에서 말씀하시길

物將則老(물장즉노) 謂之不道(위지부도) 不道早已(부도조이)라 하여

물질인 몸뚱이는 한창인가 싶으면 곧 늙어 쇠하니 이를 일러  참이 아니라고한다. 참이 아니면 일찌감치 그만두어야한다. 하였다.

나고 죽는 몸뚱이란 물질에 속질말고 속히 정신이 깨어나라는 말이다.

佛經(불경) 法句經(법구경)에 붓다님 말씀이 있기를

『목숨이 다하고 精神(정신)이 떠나면 가을 들판에 버려진 표주박처럼 몸뚱이는 썩고 앙상한 白骨(백골)만 나뒹굴 것을 무엇을 사랑하고 즐길 것인가

내 아들이다 내 재산이다하며 어리석은 사람은 괴로워하고 煩悶(번민)한다

나란 것도 내것이 아니거늘 누구의 아들이고 누구의 재산이란 말인가​』하였다.붓다님의 이 말씀도 물질인 몸뚱이 나와 미친년 널뛰듯하듯이 온갖 邪惡(사악)한 생각과 雜念(잡념)으로 종잡을 수 없는 마음 나인 자아가 우리 사람의 참나가 아니라는 것을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참나가 아닌 물질이기 때문에 죽는 것이고 죽으니까 썩고 각종원소로 분화되어 본디 있던 우주의 본향으로 흩어져 각기 제자리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사람이란 것도 물질인 몸뚱이만으로는 짐승이지 별게 아니다.

血(혈)과 肉(육)이 여늬 짐승과 다름없는 짐승이지만

여늬 짐승과 다른게 있다면 하늘로 머리를 곧추세우고 머리로 하늘을 떠받들어 이고 直立步行​(직립보행)을 한다는 것이다.

心事(심사)가 뒤숭숭하여 속이 답답하고 실타래처럼 뭔가가 뒤엉켜 속에서 불덩어리같은 火氣(화기)가 나도모르게 치밀어 솟구칠때 문득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올려다보노라면 왠지 무한하게 펼쳐진 텅빈 밤하늘에 둥실 떠있는 하얀 달빛과 싸아하게 불어오는 虛空(허공)의 밤바람에 답답한 가슴의 火氣(화기)가 거짓말처럼 瞬息間(순식간)에 가셔지고 가슴이 뻥 뚫린 것같은 알 수 없는 느낌을 받는 경우를 經驗(경험)하는 것도 사람이란 짐승들의 여늬 짐승들과의 다른 점이라 할 것이다.

답답할때 하늘을 쳐다보는 것도

머리로 하늘을 모셔이고 걷는 것도

저 무한 허공인 절대빔의 하늘(하나님)의 神格(신격)이 사람의 心靈(심령) 속에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몸사람만으로는 분명 짐승이지만 그 짐승의 몸 속에 하나님의 참 아들로 깨어나 거듭날 수 있는 神格(신격)의 하늘 성품인 靈性(영성)의 참나가 있어서 알게 모르게 하나님을 그리워하고 찾게된다는 것이다.

몸은 짐승 성질이 그 根本(근본)이라서 틈만 나면 發動(발동)하는 貪慾心(탐욕심)을 좇아 물먹듯 罪(죄)의 바다에 빠져 허우적이면서도 해죽거리며 사는 것이 다 자신의 몸뚱이 욕심에 속아 사는 인간들인 것이다.

문제는 짐승인 이 몸옷을 벗어 던지고 神格(신격)의 참나로 깨어나고 거듭나자는 것이 모든 성인들의 한결같은 一以貫之(일이관지)의 核心(핵심) 가르침인 것인데 사람들이 이 걸 어렴풋이 알면서도 結局(결국)은 몸뚱이 종질로 얻어먹는 당장의 달콤한 快感(쾌감)의 未練(미련)에 붙잡혀서 매섭게 떨쳐 일어나질 못한다는 것이다.

도둑질을 해서라도 남들 하는 것 다 해보고 다 가지고싶고 질탕하게 남보란 듯이 떵떵거리며 누리고싶고 肉味(육미=살맛)에 맛을 붙여 이 몸뚱이 저 몸뚱이 닿는데로 살맛을 보겠다고 껄떡거리는 마음이

눌러도 눌러도 자꾸만 噴出(분출)되는 마그마의 시뻘건 熔巖(용암)의 巖漿(암장)처럼 내 맘데로 自制(자제)가 잘 안되는 것이 다 몸으로는 우리가 짐승이라서 그런 것이다.​

누가 어디서 바지춤을 내리고 뭘 흔들어댔다고 해서 벌떼처럼 野壇(야단)을 떨며 손가락질을 하고 비아냥거릴 것도 없고 내 속을 가만히 들여다 보는 공부거리로 삼아야 할 것이다.

짐승 중에도 食(식)과 色(색)을 病的(병적)이다싶게 貪溺(탐닉)하고 밝히는 것이 사람 짐승인 것임에랴 어느 누구도 否定 할 수 있을 것인가.

행동으로 표출만 안되었지 그 속을 털어보면 다 거기가 거기지 별거 없는 것인 것을

佛經(불경) 金剛經(금강경) 마지막 章(장)에 있기를

不取於相(불취어상)​ 如如不動(여여부동)  何以故(하이고)

一切有爲法(일체유위법)  如夢幻泡影(여몽환포영)  如露亦如電(여로역여전)  應作如是觀(응작여시관)이라 하여

相(상=모습의 꼴이 있는 모든 세상의 물질들)을 취하여 거기에 붙잡히질 말라​

한결같이 물질에 動搖(동요)​해서는 안된다.

被造(피조)된 일체의 모든 宇宙萬有(우주만유)의​ 物質(물질)들의 법칙은 꿈이요 허깨비요 물거품이요 그림자요 이슬이요 또한 번개같은 것이라.....

마땅히 이렇게 보아야 한다 하였다.

물질로된 내 몸뚱이에도 홀리질 말고 몸뚱이를 誘惑(유혹)하고 홀리는 如他(여타)한 물질에도 感情(감정)에 홀려속질 말고 正見(정견)하고 正思(정사)하라는 말이다.

끊임없이 나고 죽는 變化(변화)의 連續線上(연속선상)​에 있는 物質(물질)로된 相對世界(상대세계)에 깜빡 속아서 붙잡히질 말고 껌딱지처럼 땅이란 세상에 눌러붙질 말라는 말이다.

物質(물질)로된 몸뚱이를 비롯하여 세상 모든 물질에 貪着(탐착)하여 붙잡힘은 마치 자신의 그림자 모습에 취하여 그 그림자를 자신의 실체로 錯覺(착각)하는 것과 같다는 말이다.

사람의 몸뚱이란 것도 머지않아 벗어버릴 허물 껍데기 같은 몸옷일뿐이지 다른게 아니다.

몸뚱이가 아무리 귀하고 所重(소중)타 해도​ 때가 되면 늙고 시들고 병들고 쭈그렁 바가지처럼 저절로 허물어져 벗어질때가 오는 것이 자연의 絶對攝理(절대섭리)가 아닌가.

마침내는 벗고야 말 옷이라면

이게 분명 참나는 아닌 것이 아닌가.

사람들의 心靈(심령) 속에는 本能的(본능적)으로 하나님을 向(향)한 믿음의 神格(신격)이 潛在(잠재)되어 있는 것을 사람이라면 어느 누구도 否認(부인) 할 수가 없을 것이다.

성경 이사야 60장 19절 말씀을 보면

『다시는 낮에 해가 네 빛이 되지 아니하며 달도 네게 빛을 비취지 않을 것이요 오직 여호와가 네게 永遠(영원)한 빛이 되며 네 하나님이 네게 榮光(영광)이 되리니 』하였다.

이 말씀에서 해와 달이 나에게 더 이상 빛이 안된다는 말은 해와 달이 없어진다는 形而下(형이하)의 말이 아니고 形而上(형이상)의 엄청난 말씀이다.

이걸 모르고 교회에선 정말 해와 달이 없어지는 終末論的(종말론적) 마지막 審判(심판)의 때가 이렇다며 純眞(순진)하고 善良(선량)한 羊(양)들을 겁먹게 하는 것이다.

몸뚱이 나와 몸뚱이에 종질하는 마음으로 살때는 역시 물질인 해와 달의 빛이 몸뚱이의 생명 빛으로 소중한 것인 줄을 알았지만

이제 하나님 성령의 씨앗의 참나로 거듭나고 보니 내 심령 속에서 환한 빛으로 밝아져오는 하나님의 참광명을 체험하고나니 햇빛 달빛 같은 것은 참빛이 아님을 알았다는 말을 이렇게 비유하신 말씀​인 것이다.

太陽(태양)이라고 할때 陽(양)자가 볕양자도 되지만 동시에 거짓양자도​ 되는 것을 보면

역시 태양빛은 거짓 빛이지 참빛이 아닌 것이다.

언젠가는 저 太陽(태양)도 없어지고 말것이지 永遠不滅(영원불멸)하는 것은 아닌 것이란 것이다.

몸뚱이를 참나로 알고 살때는 햇빛이 참빛이었지만

성령으로 거듬나 거짓나인 몸나가 버려지고 하나님 聖靈(성령) 씨앗의 靈我(영아)인 참나로 하나님 아들을 回復(회복)하고나니

이젠 햇빛 또한 몸뚱이처럼 언젠가는 없어지고 말 거짓의 빛깔이지 참빛이 아니고

참빛은 내 속에서 빛나는 하나님의 빛(성령)이​ 영원한 생명의 참빛이라는 말이다.

석가 붓다님은  이 빛을 寂光(적광)이라 하셨고

莊子(장자)님은 이 빛을 葆光(보광)이라 하셨고

老子(노자)님은 이 빛을 惚光(홀광)이라 하셨다.

붓다님 장자님 노자님이 자신들이 證得(증득)한 精神的(정신적)인 빛을 적광이다 보광이다 홀광이다 서로 다른 말로 말씀 하셨지만 뜻은 하나로 하나님 성령 체험을 빛으로 표현하신 것으로는 같은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성령을 바람.물.불. 빛으로 비유하셨다.

古代(고대) 그리스의 길거리 哲人(철인)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을 했다.

자신을 알라는 말이 무엇인가?.........

나란 것이 세겹의 나로 되어 있는 것이 인간이라는 말을 이렇게 말한 것이다.

세겹이란

身我(신아)인 ①몸나 .②心我(심아)인 마음나​.靈我(영아)인  ③얼나

이렇게 나 속에 셋의 나가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몸나와 마음 나의 自我(자아)인 나는 어버이로부터 받아 나온​ 죽어질 생명의 나이고 靈我(영아)인 얼나는 몸나와 마음 나를 다스릴 수 있는 하나님 씨앗의 성령의 참나로 永遠(영원)한 生命(생명)이다.

마음 나가 몸나에 종노릇으로 살면 짐승이 되는 것이고

마음 나가 얼나인 靈我(영아)에 부림을 바고 살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고 한 말이 바로 이것을 알라는 말인 것이다.

이것을 모르면 죽을때까지 그저 남의 흉내만 내는 삶을 좇아가기만하는 헛껍데기 삶으로 바쁘기만 할뿐인 것이다.​

休靜(휴정) 西山大師(서산대사)의 入寂頌(입적송)에

生也一片浮雲起(생야일편부운기)   死也一片浮雲滅(사야일편부운멸)​

浮雲自體本無實(부운자체본무실)   生​死去來亦如然(생사거래역여연)이라 하여

태어나고 사는 것이 한조각 피어오르는 뜬구름이요

죽는다는 것도 흩어져 소멸되는 한조각 뜬구름이네

허공을 흘러가는 저 뜬구름은 본디부터  정해진 실상이 없는 것을

나고 죽고 가고 오는 것 이또한 그와 같은 것일세라  하였다.​

歲壽(세수) 85세를  사시고 殞命(운명)하시기 직전에 이같이  作詩(작시)하여  읊으시며 結跏趺坐(결가부좌) 하신체로 앉은체로 入寂(입적) 하셨다고 한다.

아침엔 깨어나 일어나고 저녘이면 잠자리에 들어 깊이 잠이들듯

태어남은 아침에 일어나는 것과 같고

죽음은 저녘 잠자리에 드는 것과 같은 것이라 생각한다면 남도 죽음도 저 無限虛空(무한허공)의 푸른 하늘에 일고 지며 흘러가는 뜬구름을 바라보는 맘처럼 마음에 아무런 걸림이 없을 것이다.

마태복음 15장 18절서 19절에서 예수님이 말씀 하시길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다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한다.

마음에서 나오는 것들은 惡(악)한 生覺(생각)과 殺人(살인)과 奸淫(간음)과 淫亂(음란)과 盜賊(도적)질과 거짓 證據(증거)와 毁妨(훼방)이니 』라 하였다.

마음 속에는 사람이면 너나 없이 짐승 성질인 獸性(수성)이 잔뜩 毒(독)이 오른 毒蛇(독사)가 먹이를 노리며 또아리를 틀고있는 것처럼 毒(독)을 품어낼 기회만  노리며 陰險(음험)하게 웅크리고 있다는 말이다.

겉으로는 다 말끔하고 올곧은 사람처럼 보일려고 애써 태연한척을 하지만 그 속은 마치 회칠한 무덤속처럼 어둡고 컴컴한 가운데 냄새나고 썩은 것들로만 득시글거린다는 것이다.

이것이 몸뚱이를 나로 알고 사는 사람짐승들 마음의 실상이라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인 것이다.

이제 本文(본문)을 살펴보면

1.故其好之也一(고기호지야일)이라 하여

그러므로 좋아해야 할 것은 하나이다라 하였다.

좋아 해야 할 것은 하나란 말이 무슨말인가?

여기서 하나란 全體(전체)이고 온통인 이 無限宇宙(무한우주)의 絶對主權者(절대주권자)이신 하나님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마음에 걸린다면 니르바나님이라 해도 되고 알라님이라 해도 되고

道(도)라고 해도 하느님니라 해도 되고 상제님이라 해도 되고 이름이야 뭐라고 붙이던 상관이 없다  하나님은 본디 절대존재라 이름같은 것이 필요가 없는 것이라서 그렇다.

해서 장자님은 그냥  하나라는 용어를 쓰신 것이다.

하나님이 전체요 하나라는 말이다.

전체인 하나란 사람의 認識能力(인식능력)인 생각이나 말로써 설명 할 수가 없는 絶對神秘(절대신비)인 것이다.

하나가 아니고 둘이 되어버리면 相對的個體(상대적개체)인 낱동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낱동인 個體(개체)는 저마다 숫자가 너무 많아서 각기 이름이 있어야 서로 구분이 되므로 이름을 짓고 그이름으로  낱동이 통용되는 것이다.

해서 사람이 참으로 좋아 해야 할 것은 절대요 하나인 하나님을 좋아하고 사랑해야 하는 것이지 낱동인 물질에 마음이 녹아나서 몸뚱이에 종질하고 살아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

2.其不好之也一(기불호지야일)이라 하여

그 싫어해야 할 것도 하나이다 하였다.

싫어해야 할 하나란 무엇인가?......

全體(전체)인 온통에서 被造(피조)되어 相對界(상대계)로 떨어져 나온 낱동인 物質(물질)의 하나 하나로 부스러기 個體(개체)들을 말하는 것이다.

좋아해야 할 하나가 全體(전체)이고  聖靈(성령)이신 하나님이고​

싫어해야 할 하나가 全體(전체)인 하나님의 성령으로 被造(피조)되어 物化(물화)가 된 物質(물질)로 부스러기의 個體(개체)인 낱동으로 떨어져 나온 것이 相對世界(상대세계)인 有限宇宙(유한우주)의 物質(물질)들이라는 것이다.​

3.其一也一(기일야일)이라 하여

그 하나인 것도 하나이고 하였다.

4.其不一也一(기불일야일)이라 하여

그 하나 아닌 것도 하나이다 하였다.

節對無限存在(절대무한존재=하나님)의 하나는 全體(전체)의 하나이고

被造(피조)된 物質(물질)이란 낱동들도 各各(각각)의 改體(개체)인 낱동으로써는 獨立(독립)된 하나로써 全體(전체)에서 떨어져나온 부스러기들이라는 말이다.

5.其一與天爲徒(기일여천위도)라 하여

그 하나와 더불어 함께하면 하나님을 생각하는 무리이다 하였다.

하나는 全體(전체)요 絶對(절대)의 하나다.​

둘이되면 絶對(절대)에서 떨어져나온 부분의 個體(개체)로​낱동이고 相對性物質(상대성물질)로 떨어지고만다.

둘인 상대세상의 물질에 빠져 허우적이며 살질말고 오로지 전체요 하나인 절대존재의 하나님과 함께 해야 한다는 말을 이렇게 장자님은 말씀하신 것이다.

6.其不一與​人爲徒(기불일여인위도)라 하여

그 하나와 더불질 않으면 사람을 생각하는 무리다 하였다.

絶對眞理(절대진리)요 全知全能(전지전능)하시고 無所不在​(무소부재)하신 無限宇宙(무한우주)의 創造攝理權者(창조섭리권자)이신 하나님을 생각질 않는다면 이는 오로지 사람만을 생각하는 짐승의 무리라는 말이다.

神(신)을 찾고 宗敎(종교) 文化(문화)를 갖는 것은 唯一(유일)하게도 사람이란 짐승들에게서만 존재하는 精神文化(정신문화)의 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說或(설혹) 迷信的(미신적)인​ 샤머니즘이든 몸뚱이에 執着(집착)한 祈福信仰(기복신앙)이든

多樣(다양)한 形態(형태)의 믿음의 主體(주체)들이 바로 사람이란 짐승들이지 사람이 아닌 다른 짐승들에겐 아예 종교 자체가​ 존재하질 않는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信仰(신앙)이 없으면 바로 소나 개나 돼지와 같은 짐승이라는 말이다.

信仰(신앙)이란 꼭 制度圈(제도권)의 宗敎集團(종교집단) 團體(단체)나 聖殿建物(성전건물​) 안에서 이루어지는 宗敎儀式(종교의식)이나 形式(형식)을 通(통)해서만 반드시 믿음이 싹트고 자라는 것도 아니고

모든 인간의 心靈(심령)이란 마음 밭에서 먼저 싹이 움트는 것이다.

敎會(교회)를 다니고 聖堂(성당)을 나가고 法堂寺刹(법당사찰)에 나간다고 해서 다 옳고 바른 믿음이라 할 수도 없고

아무런 종교권에도 歸依(귀의)칠 않았지만 스스로의 심령 밭에서 믿음의 싹을 틔운다고 해서 옳지 않고 바르지 않은 믿음이라 할 수도 없다.

井華水​(정화수) 한 沙鉢(사발) 떠 장독대에 얹어놓고 至誠(지성)으로 두손모아 子息(자식)놈의 앞날을 보살펴 주시기만을 懇切(간절)하게 빌던 옛날 우리 어머님들의 믿음 또한 하나님이 어찌 교횔 안간다고 외면을 하시겠는가 말이다.

問題(문제)는 내 心靈(심령)의 참주인이 自我(자아)의 貪慾心(탐욕심)에 붙잡힌 믿음인가

아니면 自我(자아)를 말끔히 벗어던지고 오로지 하나인 하나님에 붙잡혔는가에 따라서 참과 거짓이 갈라지는 것이다.

참된 믿음 생활은 어떤 종교이든 몸나와 마음 나인 自我(자아)의 貪.嗔.痴(탐.진.치) 三毒(삼독)의 짐승 성질인  貪慾心(탐욕심)을 말끔히 다 죽이고 이겨 몸 생명이 죽기까지 自我(자아)를 滅我(멸아)시켜 하나님 성령 씨앗의 靈我(영아)인 精神(정신)의 나요 참나인 얼나에 屈伏(굴복)시켜 降伏(항복)을 받고 그 自我(자아)를 부리는 영원한 大自由(대자유)에 들자는 것이 하나로 같은 가르침인 것이다.

7.天與人不相勝也(천여인불상승야)라 하여

하나님과 더불어 함께한 사람들은 서로가 서로를 이기려 하질 않는다 하였다.

하나님과 더불어 함께한  사람이란

하나님 성령 씨앗의 靈我(영아)인 얼의 나로 거듭난 聖靈生命(성령생명)의 사람으로 하나님의 참 아들이 된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몸뚱이로는 서로 너와 나로 다르지만 거듭난 얼의 나로는 너와 나가  다 같은 하나님의 얼생명으로는 하나라 서로 이기려 할 일이 없다는 것이다.

성령으로 거듭나질 못한 자기 몸뚱이를  자기 주인으로 섬기고 사는 짐승 사람들은 서로 털끝만큼도 지려하질 않고​ 損害(손해)보질 않으려고 하는 일들이 통으로 티각 태각 싸움질이고 서로 못 잡아먹어 恨(한)과 憤(분)을 삭이질 못하고 갖은 權謀術數(권모술수)와 欺瞞(기만)과 謀陷(모함)과 批謗(비방)과 헐뜯음과 離間(이간)질과 거짓말과 巧言令色(교언영색)의 속임수로 陷穽(함정)을 파고 그 함정에 埋歿(매몰)시키고자 血眼(혈안)이 되어 날뛴다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겉과 속이 하나로 같아야 하는데 이게 같기는 커녕 속으로는 칼을 갈고 겉으로는 巧妙(교묘)하리만치 부드러운 微笑(미소)와 달콤한 말로 僞裝(위장)을 하고 태연한척 상대를 配慮(배려)하고 생각하는척 하는 것이 인간들의 더럽고 醜惡(추악)한 감추인 속 마음의 실상이라는 것이다.​

싸우고 이겨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나 자신이지 나 아닌 다른 사람이나 다른 어떤 무엇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걸 아는 사람이 거듭난 사람이고​

이걸 모르는 것이 거듭나질 못한 사람인 것이다.

8.是之謂眞人(시지위진인)이라 하여

이런 사람을 일러 眞人(진인= 참사람.거듭난 사람.깨친이)이라 한다 하였다.​

人知也其一不其二(인지야기일불기이)로

사람이 알아야 할 것은 하나(절대)이지 그것이 둘(상대)​이 아니라는 말이다.

하나인 絶對(절대)를 몸 생명을 다바쳐 죽기까지 찾고 알아야 할 것이지

하나에서 떨어져나온 相對界(상대계)의 수없는 物質(물질)들에 精神(정신)이 迷惑(미혹)되어 빠져서 자기 感情(감정)과 感覺(감각)에 종노릇하며 살아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하나이고 絶對(절대)이신 하나님의 성령과 이어져 그 성령으로 거듭난 精神人(정신인)인 얼나가 하나님의 아들로 하나님 성령을 참생명으로 숨쉬며 사는 얼의 사람이 바로 眞人(진인)이요 聖人(성인)이라는 말씀을 莊周(장주)님은 이렇게 말씀을 하신 것이다.

내 몸 생명을 살리시는 동안

오로지 主一無適(주일무적)해야 할 것은 하나님 한분뿐이라는 말씀이다.​

요즘 어떤 敎派(교파)에선 어머니 하나님이라고 하는 그런 교단도 있다.그리고 꼭 그렇게 어머니라 해야 옳다며 그들은 주장을 하지만

어머니든 아버지든 이런 呼稱(호칭)은 아무런 意味가 사실은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아버지도 아니고 어머니도 아니고 그저 하나이고 絶對存在(절대존재)이실뿐이다.​

그래서 무슨 호칭이 본디 없는 것이다.

상대존재인 낱동의 사람들처럼 陽性(양성​)인 남자와 陰性(음성)인 여자로서 陰陽(음양)의 존재로 나눠어진 被造物(피조물)이 아니고

오로지 하나이시며 전체이신지라 아버지라 하든 어머니라 하든 그건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는 사람들의 호칭일뿐인 것이다.

붓다님과 老子(노자)님은 하나님을 어머니에 비유 하셨고

예수님과 莊周(장주)님은 하나님을 아버지라 비유 하셨으니 아버지라 하든​ 어머니라 하든 이건 비유일뿐이니 뭐라 是非(시비)를 말할순 없는 것이다.

9.​死生命也(사생명야)라 하여

죽고 사는 것은 하나님의 명에 달린 것이다 하였다.​

오래 사는 것도 일찍 죽는 것도 이게 다 하늘로부터 받아나온 命(명)줄에 달린 것이지 사람의 능력으로 늘리고 줄일 수 있는게 아니라는 말이다.

10.其有夜旦之常天也(기유야단지상천야)라 하여

밤과 아침이 주야로 늘 있는 것이 하늘이라 하였다.

밤이 있고 또 아침이 있듯이

죽음의 밤이 있고 생명의 아침이 늘 있어 晝夜(주야)가 번갈아들듯이 生死(생사)가 번갈아들며 循還(순환)하는 것이 이 宇宙(우주)의 攝理秩序(섭리질서)라는 말이다.​

11.人之有所不得與(인지유소부득여)라 하여

사람으로서 얻어 미치지 못하는 것이 있다 하였다.

이 無限宇宙(무한우주) 自然(자연)이 神秘(신비)로운 攝理秩序(섭리질서)로 運行(운행)되는 生死(생사)고리의 秘密(비밀)을 사람의 생각으로는 헤아릴 수가 없다는 것이다.

12.皆物之情也(개물지정야)라 하여

宇宙萬有(우주만유)의 모든 物質(물질)의 實情(실정)이 이렇다 하였다.

사람을 비롯하여 無限宇宙(무한우주)에 벌려놓은 모든 物質(물질)의 實狀(실상)이 이렇다는 말이다.​

13.彼特以天爲父(피특이천위부)라 하여

저들은 특별히도 天(천=하늘 .하나님)을 아버지로 생각한다 하였다.

사람의 心靈(심령) 속엔 하나님의 씨인 神格生命(신격생명)이 들어 있어서 그런 것이다.

사람의 능력으로 도무지 어찌 해볼 수 없는 絶切絶命(절체절명)의 瞬間(순간)에 맞닥뜨렸을때 사람은 알게 모르게 하나님을 찾게되는 것이 이게 다 하나님의 神格(신격)이 우리 사람의 心靈(심령)밭에 內在(내재)되어 있어서 그런 것이다.

14.而身猶愛之(이신유애지)라 하여

그래서 오히려 내 몸보다 더 하나님을 사랑한다 하였다.

15.而況其卓乎(이황기탁호)라 하여

그러니 하물며 뚸어난 이들이야 라 하였다.

普通(보통)의 一般(일반) 무지랭이들도 하나님을 아버지로 저 몸생명보다 더욱 사랑하는데 하물며 정신적으로 뛰어난 이들이야 말해 무엇 할 것인가라는 말이다.

16.人特以有君爲愈乎己(인특이유군위유호기)라 하여

사람들은 다만 임금이 있어서 임금이 나보다는 낫다고 생각하여라 하였다.

땅의 나라 임금도 天子(천자)라 僭稱(참칭)하여며 백성들의 어버이로 君臨(군림)하며 섬김을 받던 時節(시절)이라 감히 하늘처럼 받들고 섬겼다는 말이다.

17.而身猶死之(이신유사지)라 하여

몸조차 임금을 위하여 죽기까지 한다 하였다.

王朝時代(왕조시대)엔 白性(백성)들 목숨의 生死與奪權(생사여탈권)이 임금의 말 한마디에 달렸었다는 말이다.

18. 而況其眞乎(이황기진호)라 하여

그런데 하물며 그것(임금)이 참(하나님)이겠는가 하였다.

땅의 임금도 백성들처럼 밥먹고 똥누고 오줌누고 늙고 병들어 죽어질 몸껍데기를 뒤집어쓴 물질인 몸뚱이 사람이지 그게 하나님이 아니라는 말이다.

19. ​泉涸(천학)이라 하여

샘이 말라붙었다 하였다.​

20.魚相與處於陸(어상여처어육)이라 하여

물고기가 서로 물이 말라붙은 땅에 놓이자 하였다.

21.相呴以濕(상구​이습)이라 하여

서로 젖은 습기로 숨을 쉬며 하였다.

22.相濡以沫(상유이말)이라 하여

서로 물방울로써 적셔준다 하였다.

18에서 22까지는 물고기를 비유로든 말씀이다.

샘의 水原(수원)에서 늘 쉼없이 물이 供給(공급)되어 水量(수량)이 많았을땐 서로가 서로를 잊고 알지 못한체로 살았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는데 막상 수원이 마르고 물이 말라붙어 맨바닥의 땅에 놓이게되자 서로가 머금었던 마지막 한 방울의 물방울까지 힘겹게 吐(토)해내며 서로를 적셔주고 생을 도모하고자 아둥바둥한다는 말이다.

사람도 서로 어렵고 가난할때에 서로간에 도움의 溫情(온정)을 나눌 줄을 알지

이제 살만하다싶으면 저 삶을 즐기기에 바빠 남을 돌아볼 생각이 없어지는 것이다.​

물고기는 물로써 숨을 쉬고

사람은 대기중의 산소로 숨을 쉰다.

둘다 숨을 쉬어야 사는 것이다.

들이쉰 숨을 다시 뱉어야 살고

뱉은 숨을 다시 들이 쉬어야 사는 것이다.

한번 들이 쉼은 한번의 가짐이고 한번의 뱉음은 한번의 버림인 것이다.

가졌다 버렸다 이것이 사는 것이다.

呼(내쉴호)와 吸(들이쉴흡)이 反復(반복)된 것이 사는 것이다.

숨을 내쉬고 다시 들이마시고 그래서 呼吸(호흡)이지 吸呼(흡호)가 아닌 것이다.

먼저 내쉬는 것은 들이마시기 위해서는 숨통그릇을 비워야하기 때문이다.

삶의 條件(조건)과 形便(형편)이 좋았을때건 안좋았을때건 먼저 이런 이치를 알아 생각한다면

나만의 욕심으로 먼저 채우려고만 할 것이 아니라

내게 있는 것을 먼저 숨을 뱉어 내듯이 내놓으라는 것이다.

숨을 들이쉬는 것도 살기 위한 것이고 숨을 내쉬는 것도 다 살기 위한 것이라는 말이다.

가질려고 하는 것만이 살길이 아니고

가진 것을 버리고 비울 줄 아는 것도 살길이라는 말인 것이다.

23.不如相忘於江湖(불여상망어강호)라 하여

江(강)과 湖水(호수)에서 서로의 존재를 잊고 삶만 못하다 하였다.

泉涸(천학​)으로 이미 샘이 말라붙은 상황에서 서로가 濕氣(습기)를 吐(토)해서 내주며 살아보려 애를 쓰지만 이젠 생명 때가 늦었다는 말이다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物質(물질)로써의 生命存在(생명존재)란 生命環境(생명환경)의 좋고 나쁨에 關係(관계)없이 생명때가 다하면​ 결국은 죽고 썩어질 것이 몸생명이라는 것이다.

24.與其譽堯而非桀也(여기예요이비걸야)라 하여

堯(요)임금을 기려 稱讚(칭찬)하고 暴君(​폭군) 桀(걸)을 나무라기보다는 이라 하였다.

 

檀君王儉(단군왕검)이 다스리던 古朝鮮(고조선)과 同時代(동시대)에 存在(존재)했던 漢族(한족)의 古代部族國家(고대부족국가)의 帝王(제왕)이었던 堯(요)임금과​ 夏桀殷紂(하걸은주)로 일컬어지는 暴君(폭군)으로 알려진 하나라의 걸왕과 은나라의 주왕인 桀(걸)과 紂(주)에서 桀王(걸왕)을 두고 하는 말이다.

堯帝(요제)가 統治時節(통치시절) 요임금이 얼마나 정치를 잘 하셨는지 백성들이 나라에 임금이 있다는 것을 모를 지경이었다고 한다.

白性9백성)들이 불렀다는 擊壤歌(격양가=땅을 두드리며 노래를 부름))가 傳(전)해 오기를​

日出而作(일출이작)=해가 뜨면 나가 농사짓고

日入而息(일입이식)=해지면 들어가 편히 쉬고

鑿井而飮(착정이음)= 우물 파서 물 마시고

耕田而食(경전이식)= 밭갈아 밥 먹으니

帝力于我何有哉(제력우아하유재)=임금님 권력이 내게 무슨 상관 있으랴 하였다.

夏(하)나라의 桀王(걸왕)은 暴惡無道(포악무도)하여 殷(은)나라의 마지막 임금인 紂王(주왕)과 더불어 중국 고대역사에서 전형적인 폭군으로 전해져오는 인물들이다.

 

堯舜時代​(요순시대)의 太平盛代(태평성대)를 謳歌(구가)한 德治(덕치)의 임금인 堯(요)임금을 입이 마르도록 稱讚(칭찬)하고 기리는 것이나

稀代(희대)의 暴君(폭군) 桀王(걸왕)을 나무라는 것이나 다 어떻게 보면 부질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내가 뀌는 방귀나 남이 뀌는 방귀나 냄새나긴 거기서 거기라는 말이다.​

百年世事三更夢(백년세사삼경몽)

萬里江山一局碁(만리강산일국기)라는 말이다.

백년 남짓 이쪽 저쪽을 살다가는 인생사 세상 살이가 한밤중 잠 속에서 꾸다 깨는 꿈같고

만리 강산을 두고 내것이니 니것이니 英雄豪傑(영웅호걸)이 다투는 것도 한판의 바둑 놀이와 다를바가 없다는 말이다,

稱讚(칭찬) 할 것도 나무랄 것도 딱히 없다는 말이다.

옳다 그르다 잘났다 못났다 밉다 곱다 하는 도토리 키재기식의 상대성 執着(집착)의 헛 꿈에서 탁 깨라는 말인 것이다.​

 

25.不如兩忘而化其道(불여양망이화기도)라 하여​

양쪽을 다 잊고 道(도= 참.진리.얼나)로 거듭남만 같질 못하다 하였다.

양쪽을 다 잊늠다는 말은 상대성에 갇힌 생각의 틀에서 벗어나라는 말인 것이다.

상대성에 갇힌 생각이란 말은

썩고 없어질 물질에 집착하는 마음의 욕심을 말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썩지도 않고 줄지도 않고 늘지도 않고 나지도 죽지도 않고 如如不變(여여불변)한 生命根源(생명근원)인 聖靈(성령)의 생명 佛性(불성)의 생명 그 참 생명의 근본인 靈的生命(영적생명)의 참나를 깨달아 證得(증득)하라는 말인 것이다.

그 참 생명이 바로 絶對(절대)의 하나인 聖靈生命(성령생명)으로 거듭남이라는 것을 莊子(장자)님은 이렇게 말씀을 하신 것이다.

성령으로 거듭나야 하나님 나라에 든다는 예수님의 말씀과 똑같은 뜻의 말씀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