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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불교의 선과 노장 사상의 도와의 연관성 2 본문

마스터와 가르침/노장

중국불교의 선과 노장 사상의 도와의 연관성 2

柏道 2020. 1. 8. 07:13

불교상식


중국불교의 선과 노장 사상의 도와의 연관성 2

 

중국불교 선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에는 장자의 심재. 좌망, 조철에 관한 사상을 명확히 파악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심재, 좌망, 조철을 살펴보기 이전에 선의 형이상학적 배경이 된 '도덕경의 제1장과 제2장'의 내용을 먼저 살펴보기로 한다.

 

도덕경 제 1장

 

도의 본체

 

도가도(道可道)는 비상도(非常道)요, 명가명(名可名)은 비상명(非常名)이니라.

 

(도를 도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참 도가 아니고 이름을 이름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참 이름이 아니다.)

 

 

무명(無名)은 천지지시(天地之始)요, 유명(有名)은 만물지모(萬物之母)니라.

 

(무명은 천지의 시작이요, 유명은 만물의 어머니이다.)

 

고(故)로 상무(常無)로 욕이관기묘(欲以觀其妙)하고 상유(常有)로 욕이관기요(欲以觀其徼)니라.

 

(그러므로 상무로써 그 묘를 보려 하고 상유로써 그 요를 보려한다.)

 

 

차양자(此兩者)는 동출이이명(同出而異名)하니 동위지현(同謂之玄)이니라.

 

(이 양자는 같은 근본에서 나왔으나 그 이름을 달리하니 이것을 한 가지로 말할 때 현이라고 한다.)

 

현지우현(玄之又玄)하니 중묘지문(衆妙之門)이니라.

 

(현하고 현하니 중묘의 문이다.)

 

 

* 해석

 

도가 도로서의 구실을 하는 도, 즉 유교에서 말하는 인륜의 도덕 같은 것은 참 도가 아니며, 이름이 이름으로서의 구실을 하는 이름, 즉 유교의 인, 의, 예, 지 같은 것은 참 이름이 아니다.

 

 

이름이 없는 것이 도이고 이 도가 천지의 시작이며, 처음으로 이름이 생긴 것은 천지이니 천지는 만물을 낳은 어머니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참으로 없는 것, 즉 도에 있어서 그 유현기묘한 작용을 볼 수가 있고 참으로 있는 것 즉 이 천지의 현상계를 볼 수가 있는 것이다.

 

 

이들 유와 무는 같은 근본에서 나와 그 이름만 달리한 것이기 때문에 다시 그 근본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동일의 현, 즉 도에서 나온 것이다.

 

상대적인 유나 무는 다 같이 도에서 나온 것이며, 그 상대적인 유와 무와의 근원인 절대적인 무를 감정적으로 현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 현이야말로 우주의 삼라만상을 낳은 최초의 문인 것이다.

 

 

제 2장

 

무위로써 몸을 기르는 법

 

천하(天下)가 개지미지위미(皆知美之爲美)하나 사악기(斯惡己요, 개지선지위선(皆知善之爲善)하나 사불선기(斯不善己)니라.

 

(천하가 모두 미가 미임을 알지만 이는 악일 뿐이고 모두 선이 선임을 알지만 이는 불선일 뿐이다.)

 

 

고(故)로 유뮤상생(有無相生)하고 난역상성(難易相成)하고 장단상교(長短相較)하고 고하상경(高下相傾)하고 음성상화(音聲相和)하고 전후상수(前後相隨)니라.

 

(그러므로 있고 없음이 서로 생기고 어려움과 쉬움은 서로 이루고 길고 짧음은 서로 비교되고 높고 낮음은 서로 측정하고 음성은 서로 화하고 앞과 뒤는 서로 따른다.)

 

 

시이(是以)로 성인(聖人)은 처무위지사(處無爲之事)하여 행불언지교(行不言之敎)니라.

 

(이러한 관계로 성인은 무위의 일에 몸을 두고 무언의 가르침을 행한다.)

 

 

만물작언 이불사(萬物作焉 而不辭)하고 생이불유(生而不有)하고 위이불시(爲而不恃)하고 공성이불거(功成而不居)니라.

 

(만물이 일어나도 막지 않고 생겨도 갖지 않으며, 어떠한 일을 하더라도 의지하지 않고 공을 이루어도 그 자리에 앉지 않는다.)

 

 

부유불거(夫唯不居)라 시이(是以)로 불거(不去)니라.

 

(다만 앉지 않으니 이로써 떠나지도 않는 것이다.)

 

 

* 해석

 

천하의 모든 사람들이 아름다움을 아름다움이라고 인식하는 경우에는 반드시 악이 존재하며, 또 모든 사람들이 착함을 착함이라고 인식하는 경우에는 반드시 착하지 않음이 존재한다.

 

 

그런데 이것은 아름다움, 아름답지못함, 착함, 착하지않음의 경우뿐만이 아니라 있고 없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고 어려움과 쉬움에 대해서도 길고 짧고 높고 낮은 것에 대해서도 혹은 음성이나 앞, 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이 상대의 세계에서 사는 한 모든 것이 대립되는 상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 대립상 중에 살고 그 대립상만을 보고 있는 한 참이라는 것은 이것을 파악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상대의 세계에 산다는 것은 가치가 없는 일이므로 성인은 무위의 세계에 몸을 두고 가르침을 베풀 경우에도 말로 나타내지 않는 가르침을 행하는 것이다.

 

 

만물이 발홍해도 억지로 이거을 막아 그만두게 하려고 하지 않고 또 만물이 자기의 힘에 의하여 생겨도 그것이 나의 덕이라고 생각하여 스스로 보전하여 지니려고도 하지 않는다.

 

 

일을 하더라도 능력을 뽐내지 않는다.

 

그뿐만 아니라 자기의 힘에 의한 어떠한 공이 이루어져도 자신을 그 공명의 지위에 두려고 하지 않는다.

 

이러한 것들이 인간세상에 처하여 몸을 기르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모처럼 공을 이루어 놓고서도 그 지위에 앉지 았는다는 것은 언뜻 보면 부질없는 일처럼 보일지 모르나 깊이 생각해 보면 그 자리에 앉아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 자리를 떠나야 한다는 걱정도 없어지는 것이다.

 

 

* 중국에는 예부터 '글은 말을 다할 수 없고 말은 뜻을 다할 수 없다'는 말이 있다.

 

이는 곧 말로는 추상적인 생각이나 영상을 정확히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마치 불교의 '불립문자'나 '이신전심'의 경지와 같다고 하겠다.

 

 

노자와 장자의 사상중 장자는 '인식보다는 체험을 이론보다는 실제를 중시하여 도의 본체는 말로 효현할 길이 없다'라고 하였으며 이러한 표현을 노자는 도덕경 제14장과 35장에서 진정한 도으이 개념을 말하고 있다.

 

 

이는 중국불교 선종이 생겨나는 배경이 되었으며 중국불교 만의 독특한 선을 형성하는데 크게 기여를 하였다고 보아야 한다.

 

 

@, 노자의 도덕경 제 1장과 제 2장의 내용은 '흥신문화사 출판, 노태준 역해 도덕경'의 글을 참조하였음을 밝혀두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