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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노자 도덕경 18장 19장 본문

마스터와 가르침/노장

노자 도덕경 18장 19장

柏道 2020. 1. 8. 00:43



노자 도덕경

도덕경 18장, 19장

무어 2018. 7. 26. 1:15

            

제18장

大道廢, 有仁義.

큰 도가 없어지니 인(仁)이니 의(義)니 하는 것이 생기고,

慧智出, 有大僞.

지혜라는 것이 나타나니 큰 거짓이 있게 되었다.

六親不和, 有孝慈.

가족이 불화하니 치사랑과 내리사랑을 말하게 되었고,

國家昏亂, 有忠臣.

국가가 혼란하니 충성스런 신하가 있게 되었다.

제19장

絶聖棄智 民利百倍

성스러운 것을 끊고 지혜를 버리면

백성은 백배나 이로워질 것이다.

絶仁棄義 民復孝慈

어짊을 끊고 의로움을 버리면

백성의 서로 사랑하게 될 것이다. (치사랑과 내리사랑)

絶巧棄利 盜賊無有

기교를 끊고 이익을 버리면 도적이 사라질 것이다.

此三者以爲文不足

허나 이 3가지는 꾸미는 것(문자,문명)에 그치니 *文: 무늬 *足 그치다

故令有所屬

고로 다른 것을 덧붙인다.

見素抱樸

순수함(素)을 깨닫고 투박함(樸)을 품어라.

少私寡欲

사사로움(이기심)을 적게 하고 욕심을 줄이라

개인감상

치사랑과 내리사랑이라던지,

인의라던지,

쓰이는 단어가 19장과 연결되어 있기에

18장과 19장은 함께 봅니다.

(개인적으로 백성들을 이리 다스리라 또는 이렇게 수행하라. 라는 말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도덕경을 수행서라고 보시는 분도 있다가 나가셨는데 저는 그런 식으로 읽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시다시피 시집 또는 가사집으로 읽고 있죠. 세상을 노래한, 진리를 음미한 시집 말입니다.)

무위자연을 말하면서 어떻게 통치하라, 어떻게 해야한다라는 등의 말을 하는 것은, 비록 그 어떻게 하라가, 인의를 끊고 온갖 억지스러움을 버리라고 한다고 하여도 '~해라' 라는 말 자체에서 모순이 생긴다고 생각합니다. 설령 그것이 자연스러움이라고 해도, 자연스럽게 해라는 자연스러움이 될 수 없죠.

그래서 그전에 죽간본을 보기 전까지는 그런부분은 후대에 첨가된 것이 아닌가, 어떤분이 말씀하신대로 제왕학이나 통치학으로 쓰이기 위한 의도로 추가된 것이 아닌가 생각을 했었습니다.

하지만 19장은 죽간본 1장에 떡하니, 거의 비슷하게 등장하죠.

그래서 저는 새삼 죽간본과 비교하면서 노자의 모순에 대해서 생각하게 됩니다.(정말로 위의 내용상으로는 할말이 없다는 것이 드러나죠.)

진리를 알게 된 노자가,

무언가를 하라고 말한 것은

분명 모순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예컨대 욕심이라는 것만 봐도,

욕심 그 자체는 인간에게 기본적으로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 나쁜 것이 아닙니다. 단지 그것이 주어진것보다 과해지고 그것만이 두드러질때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죠. 살고자하는 욕구나 잠자고자 먹고자 하는 욕구는 잘못된게 아닙니다. 그리고 어느정도가 과하고 과하지 않은지는 상황에 따라 다릅니다. 지혜 역시 마찬가지죠. 인간은 알고자함이 있기에 진리도 알 수 있습니다. 다만 그것이 과한 방향으로 뻣대어 나아갈때 문제가 되는 것이죠. 그리고 그 과함과 적당함의 경계를 쉽사리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 자체로는 나쁜 것이 아니죠. 그래서 옳지도 그르지도 않은 것입니다. 모든 것은.

헌데 그당시에도 사람들의 욕심이나 앎이나 모든 것이 너무나 과했던지 결국은 우리가 모두 아는 그 상투적인 지침서 같은 얘기를 하게 됩니다.

이는 분명 모순이지만, 제가 생각하기로, 도덕경은 노자 본인이 스스로 읽는 것이 아니라, 이 사회에 남을 인간에게 남겨주는 글이었으니 (스스로에게는) 모순이되 (타인에게는) 모순이 아닌 글을 남긴 것일수도 있겠다고 추측합니다. 인간을 어찌할 생각이 없어 정치에 뜻을 두지 않고 떠난 노자가 사람들을 어찌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것은 분명 자신에게는 모순이지만 인간사회에서 남아서 공동체로서 그들의 미래를 함께 생각해야 하는 인간들에게는 모순이 아니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덕경 내부에서 자체적으로 각장들이 모순이 발생해 충돌하는 이유는, 어떤 장에 대해서는 진리에 대해서 말했다가 어떤 장은 사람들을 위해서 말했다가 하기 때문입니다. (또는 후대에 주석을 달아 모순을 만들었을수도)

이는 인간의 길과 진리의 길이 많이 부딪혔다는 의미겠죠. 솔직히 무위를 행하라고 한다한들 진리를 알지 못하면 그 방법도 그 당위도 명확히 알지 못하죠. 그런데 행하라고 한들 무슨 효용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말하고 있죠. 그러니 현재로는 통치학보다는 도를 쫓는 사람들의 수행서정도로 여겨지는 것이죠. 마치 인의를 버리고 욕심을 버리고 꾸밈을 버리면 도를 알게 될수 있는 것처럼요.

개인적인 생각을 밝혀서 또다른 오해를 불러 일으키는 것을 저는 꺼리는 편이지만, 도덕경을 진솔하게 음미하고 싶은 마음과 오해를 불러 일으키고 싶지 않은 마음이 언제나 부딪혀 어떨때는 말하고, 어떨때는 삼가는 제가 오늘은 이런들 저런들 어떠하리라는 마음에 편승에 더욱 개인적인 이야기로 마무리를 지어보자면,

모든 건 연결되어 있으나 아무것도 연결되어 있지 않음을 알았을 때, 인간으로 태어났으나 정말로 물과 같이 된다면 그래서 극도의 자유를 얻게 된다? 모든것을 할 수 있으나 아무것도 원하지 않게 되면 모든 것은 무의미한데? 자유라는 것도 억압이라는 것이 존재할때나 존재하는 의미인데, 도를 알게 되면서 얻게 되는 것은 결국 억압도 자유도 아무것도 없음인데 인간이라는 존재로 나서 그렇게 아무것도 없어지는 것은? 물론 이런 생각조차 인간적인 것이기는 하나 그조차도 하지 않으면 그러면? 그저 소리소문 없이 머무르고 떠나는 것이겠죠. 가는 길에 누군가 알아보고 글 한수 남겨달라 하면 남겨주면 되는 것이고요. 적당히 그들을 생각하며 적당히 음미도 하면서.

18장, 19장의 내용과는 전혀 상관없는

사사로운 생각의 흐름이었습니다.

[출처] 도덕경 18장, 19장|작성자 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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