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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不道早已(부도조이=도<참. 진리.하나님 >가 아니면 일찍 그만두라) 蘧然覺 본문

영성수행 비전/도마복음

不道早已(부도조이=도<참. 진리.하나님 >가 아니면 일찍 그만두라) 蘧然覺

柏道 2020. 1. 12. 16:26


不道早已(부도조이=도<참. 진리.하나님 >가

아니면 일찍 그만두라) 蘧然覺  

2014. 7. 1. 7:20


                                                                            

1.含德之厚(함덕지후)

2.比於赤子(비어적자)

3.毒蟲不螫(독충불석)

4.猛獸不據(맹수불거)

5.攫鳥不搏(확조불박)

6.骨弱筋柔而握固(골약근유이악고)

7.未知牝牡之合而䘒作(미지빈모지합이최작)

8.精之至也(정지지야)

9.終日號而不嗄(종일호이불사​)

10.和之至也(화지지야)

11.知和日常(지화왈상)

12.知常日明(지상왈명)

13.益生日​祥(익생왈상)

14.心使氣曰强(심사기왈강)

15.物壯則老(물장즉노)

16.是謂不道(시위부도)

17.不道早已(부도조이)

(풀이글)

이글은 老子(노자)님의 道德經(도덕경) 55章(장) 말씀이다.

老子(노자)님의 道德經(도덕경)은 뜻글자 漢文(한문)으로 쓰여진 하나님의 말씀으로써 하나님 말씀의 核心精髓​(핵심정수)가 凝縮(응축)된 漢文聖經(한문성경)이라 해도 毫末(호말)의 모자람도 없다 할 것이다.

道德經(도덕경) 40장에 있기를

反者道之動(반자도지동)  弱者道之用(약자도지용)이라 하였다.

비록  글자 열자에 불과하지만 예수님 가르침의 핵심인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엄청난 뜻이  고스란히 담겨진 말씀이다.

反者道之動(반자도지동)에서

反者(반자)란 돌이키는 것이란 말로 헬라어인 메타노에오와 같은 뜻의 말이다.

우리말 성경에선 메타노에오를 悔改(회개)하라는 말로 飜譯(번역) 하였지만

메타노에오의 뜻은 생각을 바꾸어 돌이킨다는 뜻이다.

悔改(회개)라 하면 罪(죄)를 뉘우치고 고친다는 말이고

메타노에오는 지금까지의 생각을 180도로 바꾸어 구습에 젖은 생각을 버리고 새로운 생각머리로 돌이켜 새롭게 다시 난다는 뜻이다.​

한마디로 몸나와 마음나인 自我(자아)가 거짓의 나임을 알고

그 몸나에 빌붙어 살던 생각을 확 바꾸어 하나님이 주신 성령 씨알의 참나로 돌이켜 하나님 아들의 삶으로 옮겼다는 것이 바로  老子(노자)님식의 反者(반자)의 뜻이고

道之動(도지동)이란  道(도)의 움직임이라는 말로

道​(도)는 老子(노자)님식 하나님의 표현이니

하나님 성령 활동의 작용을 이렇게 표현하신 것이다.

해서 反者道之動(반자도지동)이란

씨알 성령의 참나로 돌이키는 것이 하나님 성령의 운동하심이란 말이다.

弱者道之用(약자도지용)에서

弱者(약자)란 약하고 무른자를 말하는 것인데

하나님의 성령으로 거듭나면 몸삶에서 성령의 하나님 아들 삶으로 옮긴 것이니

몸삶으로 살때에 그리도 드세게 貪慾心(탐욕심)으로 날뛰던 짐승 성질이 누그러지고 약해졌으니​

짐승성질이 약해졌다는 말을 老子(노자)님은 弱者(약자)라고 하신 것이다.

道之用(도지용)은 하나님의 들어 쓰심이다.​

해서 弱者道之用(약자도지용)은

짐승 성질이 말끔히 죽어지고 누그러지고 약해져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이 하나님께 들려 쓰여진다는 말씀이다.

성경 마가복음 1장 15절 말씀에 있기를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悔改(회개)하고 福音(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하였다.

여기서

때가 찼다는 말을 교회에선 終末論(종말론) 쪽으로 말하기를 좋아하지만

이것은 그런 것이 아니고 사람마다 성령으로 거듭나야 할 때가 急迫(급박)하다는 말로 알아 들어야 할 말씀이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다는 말도 그렇다.

하나님 나라는 본디 가는 것도 오는 것도 아니고 無限宇宙(무한우주) 어느 한곳도 하나님 나라가 아닌 곳이 없고

사람의 心靈(심령) 가운데도 太初以前(태초이전)부터 있어온 것이 하나님의 나라이거늘

이것을 깨닫질 못한 自稱(자칭)사람이라 말하는  몸을 뒤집어쓴 짐승들의 無明(무명)때문에 하나님 나라가 온다느니 간다느니

예수님이 在臨(재림)한다느니 새하늘 새땅의 千年王國​(천년왕국)에서 變化(변화)된 肉身(육신)을 입어 王(왕)노릇 한다느니

불현듯 휴거가 되어 하늘 나라로 들려 올라간다느니 하는 虛荒(허황)된 헛소리를 하는 것이 다 예수님 말씀의 참뜻을 알아듣질 못하고 자신의 몸욕심으로 헛믿어서 그런 것이라 할 것이다.

悔改(회개)하고 福音(복음)을 믿으라는 말이

성령으로 거듭나 하나님 아들로 하나님 뜻을 쫓고 섬기는 삶을 살라는 말씀을 이렇게 달리 표현하신 말씀임을 알아야한다.

하나님을 온전히 믿는다면 믿음을 빌미로 무슨 報償(보상)을 받겠다는 期待(기대)나 바람이 秋毫(추호)도 없어야한다.

하나님 나라에는 무슨 報償(보상)이라는 것은 없다.

하나님 나라 그 자체가 目的(목적)이고 報償(보상)이라서 그런 것이다.​

마태복음 20장 23절 말씀에 있기를

『가라사대 너희가 果然(과연) 내 盞(잔)을 마시려니와 내 左右便(좌우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豫備(예비) 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하였다.

어느때 야곱과 요한이 예수님께 말하길 우리가 先生任(선생님)의 좌우편에 앉게 되기를 바라는 것을 우리에게 해 주시겠다고 約束(약속)해 주십시오 했을때 예수님이 對答(대답)하신 말씀이다.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하나님도 예수님 자신도 너희들이 바라고 원하는 것을 해주실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너희가 바라는 것을 이루고 못이루고는 모두 전적으로 너희 자신에게 달려 있다는 것을 이렇게 말씀을 하신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입술의 告白(고백)만으로만 되는 것도 아니고

스스로 하나님이 주신 하나님 성령 씨알의 참나인 하나님의 아들로 거듭나는 성령 거듭남으로써만이 내 스스로 하나님의 뜻에 하나가 됨으로써 저절로 이루어진다는 말씀인 것이다.

마태복음 22장 21절 말씀에 있기를

『가로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이에 가라사대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하였다.

바리새인들이 어떻게 해서라도 예수를 말의 올무로써 陷穽(함정)에 빠트리고자 유태인인 우리가 로마 황제인 가이사에게 稅金(세금)을 내는 것이 옳은지 옳지 않은지를 말해 보라고 한 것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이다.

몸으로는 지금 너희들이 가이사의 統治權下(통치권하)에 있으니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當然(당연)하고

너희들 心靈(심령) 속에 있는 하나님이 넣어주신 하나님 성령 씨알은 비록 너희 肉身(육신) 속에 있으나 너희 것도 아니고 가이사의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永生生命(영생생명)의 種子(종자) 씨앗으로 하나님의 것이니 그 것은 하나님께 바쳐야한다는 말로써

쉽게 말해 너희 靈魂(영혼)마저 가이사에게 뺏겨서는 안된다는 말씀을 이렇게 하신 것이라 하겠다.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바쳐야 한다는 말은

하나님 뜻을 섬기고 행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이다.

바리새인들이 묻는 것은 物質的(물질적)인 삶을 말하는 것이고

예수님의 말씀은 물질 중심의 삶은​ 거짓된 그림자 같은 삶이니 물질에 마음이 迷惑(미혹)되어 이럴까 저럴까 葛藤(갈등)하며 잔머릴 굴릴게 아니고 너희 심령 속에 계신 하나님 성령 씨알이 참나이고 하나님의 아들이 될 씨앗이고 사람의 아들인 人子(인자)이니 그 씨알 성령의 가르침을 쫓아 살라는 말씀이다.

物質(물질)인 몸뚱이가 物質(물질)에 迷惑(미혹)되어 사는 삶은 짐승의 삶이니 짐승의 아들이란 말이고

하나님 성령 씨알로 거듭나 하나님 아들로 살면 하나님의 아들인 동시에 참사람의 아들인 人子(인자)라는 말인 것이다.

몸뚱이 나와 마음 나의 自我(자아)를 자신의 참나로 알고 그 肉身(육신)인 몸뚱이의 所欲(소욕)을 쫓아  몸뚱이 貪慾心(탐욕심)의 부림을 받는 것을 좋다하고 몸뚱이의 종으로 사는 사람은 肉身生命(육신생명)에 주어질 損益(손익)에 따른 利害打算(이해타산) 때문에 大槪(대개) 疑心(의심)이 많고 또한  이런저런 걱정과 두려움이 많으나

하나님 성령 씨알의 나인 靈我(영아)의 참나로 깨달아 하나님 아들로 거듭난 자에겐 아무런 두려움이나 疑心(의심)이 없이

恒常(항상) 기쁘고​ 凡事(범사)에 다 感謝(감사)가 되고  늘 쉼없이 하나님을 생각하는 祈禱(기도)의 삶이 되는 것은

죽거나 살거나 오로지 하나님 뜻 順從(순종)하는 삶이 참삶임을 알아서 그런 것이다.

肉身(육신)에 屬(속)한 삶을 사는 사람은 肉身(육신)의 利害打算(이해타산)만 하는게 아니라 믿음생활 마저도 자신의 肉的(육적) 삶에 利害打算(이해타산)의 잣대눈금을 통해 가늠하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성경 요한복음 12장 35절서 36절 말씀에 있기를

『35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직 暫時(잠시) 동안​ 빛이 너희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두움에 붙잡히지 않게하라 어두움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바를 알지 못하느니라

36절: 너희에게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 』하였다.

暫時​(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에서

빛이 사람 속에 잠시 있다고 했는데 여기서 말한 빛은 하나님이 사람의 心靈(심령)에 播種(파종) 하신 하나님의 성령 씨알을 말함이고

잠시 있다는 말은 몸 생명이 죽기전까지 저 잘났다고 우쭐대고 거드름 떨며 氣高萬丈(기고만장)하며 저 잘난 맛에 사는 동안을 말하는 것이다.

빛이 있을 동안에 다니라는 말은

하나님이 내 몸뚱이를 잠시 살리시는 동안에는 내 속에 넣어주신 하나님의 성령 씨알로 靈我(영아)인 얼나의 정신인으로 하나님의 빛을 발하고 있으니 이 빛을 찾아서 살려내어 너의 삶에 등불로 밝혀 살라는 말이고

어두움에 붙잡히지 않게 하란 말은

몸뚱이 나와 마음 나인 자아는 貪慾​心(탐욕심)인 貪.嗔.痴.(탐.진.치) 三毒(삼독)인 짐승 성질로 狂奔(광분)하며 드세게 나대는 어둠의 세력이니 그 어둠에 붙잡혀 너의 참나요 너의 빛이요 또 하나님의 빛이요 생명인 성령의 빛을 죽이지 말라는 말이다.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는 말은

내 안에 하나님 聖靈(성령) 씨알의 빛이 있는 동안은 몸뚱이가 살아 있는 동안이니

그 몸뚱이가 죽어 자빠지기 전에 그 빛인 참나요 하나님이요 하나님의 아들인 내 속의 속알인 靈我(영아)의 얼의 나를 믿으라는 말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곧 내 心靈(심령) 속에 계신 하나님 성령 씨알의 나인 영아의 얼나를 믿는다는 말인 것이다.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된다는 것은

빛이 하나님이시니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말이다.

붓다님은 요한복음 12장 35절서 36절의 예수님 말씀과 똑같은 말씀을 예수님보다 500년전에 말씀 하시기를 見性成佛(견성성불)이란 네글자로 말씀을 해 놓으셨다.

여기서 性(성)이란 니르바나님(하나님)으로부터 받아나온 佛性(불성=씨앗성령)​의 本來面木(본래면목=種子<종자>씨앗)을 말하는 것이고

해서 見性(견성)이란 니르바나님이 주신 種子(종자) 씨앗인 니르바나님의 佛性(불성) 씨앗의 나인 本來面目(본래면목)의 나를 깨쳐 알고 본다는 말이고

成佛(성불)이란

佛(불)은 梵語(범어)인 산스크리트어의 budha(붓다)​를 音譯(음역)한 것으로

budha(붓다)의 뜻이 깨닫다 .거듭나다.깨달음을 이룬이라는 뜻이니

깨달음을 이루어서 니르바나님(하나님)의 아들로 거듭났다는 말이다.

해서 見性成佛(견성성불)이란

본래면목의 나인 니르바나님의 종자 씨앗인 참나를 보는 깨달음으로​ 니르바나님의 아들로 거듭나는 重生(중생)을 이루어

니르바나님 佛性(불성)의 아들로 精神的(정신적)인 靈(영)의 아들이 되었다는 말이다.

요한복음3장 13절 말씀에 있기를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人子(인자) 外(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하였다.

하늘에서 내려온 자나   하늘에 올라간 자​란 말은 공간적으로 無限宇宙(무한우주)의 虛空(허공) 어딘가에 있을 것이란 天國(천국)으로 알아 들으면 이게 엄청난 迷信(미신)에 迷惑(미혹)되는 샤머니즘적 信仰(신앙)으로 빠져드는 誤謬(오류)로 예수님 말씀을 잘못 보는 것이다.

하늘에서 내려온 자란  하나님의 성령 씨알의 나를 참나로​ 받아들여 성령으로 거듭난 자를 말하는 것이고

하늘에 올라간 자란

몸생명을 다바쳐 하나님 뜻 행하는 삶을 사는 자를 말하는 것이다.

人子(인자)라고 하신 말씀에서 하늘에서 내려온 자, 하늘에 올라간 자란,예수님 말씀의 참뜻이​ 含縮說明(함축설명)이 담겨 있다.

여기서 人子(인자)라고 하신 말씀 속에 엄청난  含意(함의)의 眞理(진리)가 숨어있음을 알아야한다.

하늘에서 내려온 자라고 했으면 分明(분명)코 天子(천자=하나님 아들​)라 해야 옳을 것같지만 人子(인자)라 하여 사람의 아들이라 한 것이다.

그리고 人子(인자)가 하늘에 올라간다고 하였다.

몸 사람으로는 예수님도 아버지 요셉과 어머니 마리아의 몸아들로 태어났으니 분명 사람의 아들인 人子(인자)가 맞는 말이지만

人子(인자)라고 하신 말씀의 참뜻은 이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두가지로 보신 것이다.

겉貌樣(모양)은 사람이라도 다 사람이 아니라는 말이다.

사람이 아니면 뭐냐?.......

겉 貌樣(모양)은​ 비록 사람의 모양새를 하고 있지만 하나님이 사람의 心靈(심령) 속에 넣어주신 하나님 성령 씨알로 거듭나질 못하고 몸나와 마음 나인 自我(자아)를 참나로 알고 사는 자는 사람이 아니고 짐승이라는 말이다.

하기야 짐승보다 더 심하게 말씀하시길 아예 죽은자라고까지 하신 말씀이​

마태복음 8장 22절에 있기를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葬事(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하였다.

몸나와 마음 나인 自我(자아)의 짐승성질인 獸性(수성)으로 살던 거짓나를 벗어버리고 하나님 성령 씨알로 거듭난 靈我(영아)인 얼의 나가 참나임을 알아

몸사람에 붙었던 나에서 靈(영)적인 하나님의 아들로 깨어난 사람이 비로소 人子(인자)인 사람의 아들이고 사람이라는 말이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이고 

 그렇질 못하면 다 몽땅 兇惡無道(흉악무도)한 짐승의 탈을 뒤집어쓴 짐승이고

羊의 탈을 뒤집어 쓴 이리떼같은 악마구리의 짐승들이라는 말이다.

짐승이라 말한 것은 오히려 좋은말일 수도 있다 할 것이다.

實狀(실상)으론 짐승보다 몇천만배나 못한 可笑(가소)롭고 可憎(가증)스럽고陰凶(음흉)하고 邪惡(사악)한 僞善的(위선적)존재들이 우리​ 사람들이란 것이아닌가.

사람의 아들인 人子(인자)가 곧 하나님의 성령 씨알로 回復(회복)되어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씨가 사람들 心靈(심령) 속에 다 들어 있어서 씨가 들어 있는 것으로는 하나님의 아들들이지만

이 씨가 있음을 모르고 몸뚱이 욕심만으로 三毒(삼독)의 貪.嗔.癡(탐.진.치)인 利己的貪慾心(이기적탐욕심)만으로 살면 짐승이란 말이고

이 씨가 하나님의 성령 씨앗임을 알고 깨쳐서 거듭나 몸의 짐승 성질을 버리고 씨앗 성품의 가르침을 좇아 사는 것이 바로 사람이라는 말씀인 것이다.

요한복음 8장 23절 말씀에 있기를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아래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였다.

이 말씀도 앞의 말씀과 같은 脈絡(맥락)의 말씀이다.

너희는 아래서 났고에서

너희는 성령으로 거듭남이 없는 몸나와 마음 나인​ 自我(자아)를 참나로 알고 짐승 성질의 動物的(동물적)인 本能(본능)과 貪慾的(탐욕적)인 利己心(이기심)만으로 사는 몸뚱이 중심으로 맛과 멋을 좇아 사는 肉身小慾(육신소욕)의 사람들임을  말함이고

아래서 났고에서 아래란 어머니의 탯집에서 영근 몸 생명의 고깃덩이가 어머니의 下門(하문)에서 땅으로 떨어졌다는 말이다.

나는 위에서 났고에서

나는 예수님 자신만 말하는 것이 아니고 누구든 성령으로 거듭나기만 하면 위에서 난 나에 들어간다는 말이고

위에서 났다는 말은

하늘에서 툭 떨어졌다는 말이 아니고 하나님의 성령으로 거듭났다는 말이다.​

몸뚱이로는 다 너나 없이 어머니의 下門(하문)으로 땅에 떨어진 것이 몸뚱이란 肉身(육신)이지만

사람의 精神(정신)인 靈(영)은 하나님의 성령 씨앗의 靈(영)이라는 것이 이 말씀의 核心(핵심)인 것이다.

사람의 心靈(심령) 속에 들어와 계신 하나님 성령의 씨알 영이 비록 좁아터진 사람의 마음 속에 계시지만 그 씨알 영이 곧 나의 참나로 내 몸뚱이의 主人(주인)이요 내 몸뚱이가 惡(악)의 誘惑(유혹)과 꼬드김에 넘어가질 않더록 지켜 줄 수 있는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몸뚱이 욕심대로 질척거리며 짐승보다 못한 삶을 살던지 예수님처럼 온전하게 성령으로 거듭나시어 하나님의 참된 아들로 살던지 그것은 사람 각자의 自由意志(자유의지)에 맡기신 것이 또한 하나님의 攝理(섭리)이신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佛經(불경) 大般若經(대반야경)에 붓다님의 말씀이 있기를

『善男子(선남자)여 智慧(지혜) 있는 이는 또 觀察(관찰) 하기를 내가 至今(지금) 出家(출가) 하여 목숨이 이레 날​ 이레 밤이 된다 하더라도 나는 그 동안에 부지런히 道(도)를 닦고 戒律(계율)을 지키고 法(법=다르마)을 說(설)하여 敎化(교화)하며 衆生(중생)을 널리 利益(이익)케 하리라 한다면 이 것을 이름하여 智慧(지혜) 있는 이가 죽는다는 生覺(생각)을 닦는다고 하느니라.

다시 이레 날 이레 밤도 많다 하여​ 說使(설사) 엿새 ,닷새 ,나흘,사흘,이틀,하루. 한시간 乃至(내지) 숨을 내쉬고 들이쉬는 동안이라 해도 나는 그 동안에 부지런히 道(도)를 닦고 戒律(계율)을 지키고 法(법)을 말하며 敎化(교화)하며 衆生(중생)을 널리 利益(이익)케 하리라 한다면 이 것을 智慧(지혜)가 있는 이가 죽는다는 생각을 잘 닦는다 하느니라 』하였다.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몸나와 마음 나인 自我(자아=ego)를 참나로 알고 사는 사람은 늘 몸나의 죽음이란 恐怖感(공포감)에 짓눌려 살므로 죽음의 종이 되어 살고 있지만

實狀(실상)은 이게 顚倒夢想(전도몽상)으로써 거꾸로 뒤집힌 헛된 꿈꿍이 생각이란 것이다.

몸나는 靈我(영아)인 참나를 담고 있는 겉 包裝紙(포장지)인 겉 껍데기의 거짓나에 不過(불과)한데

이 몸나와 마음 나인 自我(자아)를 참나로 錯覺(착각)하고 살기때문에 몸뚱이 나가 죽는다는 것은 自然(자연)의 한 攝理秩序(섭리질서)임에도 불구하고 이 걸 拒否(거부)하고 死亡(사망)의 恐怖感(공포감)에 휩싸인다는 것이다.

매미가 허물을 벗듯이 우리 몸뚱이는 허물을 벗듯이 그렇게 자기 役割(역할)을 다하면 벗어야 하는 것이 自然(자연)의 攝理(섭리)이고 秩序(질서)인 것이다.

죽고 벗어지는 것은 몸뚱이란 겉 껍데기일뿐 실상 그 속알인 靈我(영아)는 몸뚱이란 監獄(감옥)에서 自由(자유)롭게 풀려나는 것일뿐만 아니라

죽음이란 본디부터 없다는 것이다.

問題(문제)는 사람의 몸뚱이 속에 하나님의 이 씨앗 성령의 영아가 있는 동안 사람이 사는 삶의 全目的(전목적)이 이 씨앗 성령의 영아가 오직 나의 참나요

몸나와 마음 나인 自我(자아)는 暫時(잠시) 있다가 없어질 겉 껍데기의 거짓나임을 깨쳐 알도록 하는 일에 몸목숨을 다 쏟아 살라는 것을 붓다님은 이렇게 말씀을 하신 것이다.

톨스토이님의 詩(시)에도 이와 같은 脈絡(맥락)의 詩(시)가 있기를

『몸뚱이 나만을 爲(위)해 산다면

나만이 有獨(유독) 所重(소중)한 存在(존재)로 여겨 살게 된다.

이렇게 혼자만 幸福(행복) 하려는 사람들로만

世上(세상)에는 득시글 거린다.

그렇지만 어느 누구도 滿足(만족) 하질 못하여

서로가 서로를 反目(반목)한다.

사람의 몸뚱이란 것은 永遠(영원) 하질 못하고

生命(생명) 때가 다하면 죽는다는 것을 안다.

이 葛藤(갈등)의 苦惱(고뇌)에서 빠져 나오는 길은

몸나가 아닌 얼나가 참나인 것을 깨닫는 것이다.

몸나로는 너와 내가 서로 다르지만

얼나로는 하나님의 성령 씨앗으로

다 같은 하나님의 아들들이다.

몸나에는 죽음이 있지만

얼나에는 죽음이 없다.

몸뚱이는 永遠(영원)한 얼이 暫時(잠시) 머물 臨時(임시) 居所(거소)일뿐

곧 쓰러져 없어질 것인 것을 알라 』

성경 요한복음 10장 30절서 31절 말씀에 있기를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 유태인들이 다시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 』하였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 하신대에서

나는 勿論(물론) 聖靈(성령)으로 거듭나신 예수님도 되지만

예수님만 아니고 우리도 우리 속에 있는 하나님 성령 씨알의 나인 靈我(영아)의 얼나로 거듭나기만 하면 그 얼의 나인 참나가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 되는 나인 것임을 예수님이 말씀 하신 것인데

유태인들은 이런 뜻의 예수님 말씀을 못 알아 듣고 하나님을 自稱(자칭)하는 僭濫(참람)한 者(자)라고 돌을  들어 치려고 덤빈 것이 아닌가!

사람의 心靈(심령) 속에 播種(파종=씨뿌림) 해주신 하나님의 성령 씨앗이 바로 하나님의 聖靈​(성령)이시니 그 씨앗 靈(영)을 나의 참나로 알아 깨쳐서 새로이 나면 내가 하나님 聖靈(성령)의 아들임을 알게 되는 것이고

해서 나의 靈我(영아)와 하나님의 聖靈(성령)은 본디 하나님의 성령 이었으니

나와 하나님은  하나인 것이다.

예수님이 이것을 말씀 하신 것이다.

요한복음 5장 26절서 28절 말씀에 있기를

『26:아버지께서 自己(자기) 속에 生命(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生命(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27:또 人子(인자) 됨을 因(인)하여 審判(심판) 하는 權勢(권세)를 주셨느니라.

28:이를 奇異(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者(자)가 다 그의 音聲(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하였다.​

아들에게도 生命(생명)을 주었다는 말은 사람의 心靈(심령) 속에 하나님 당신의 聖靈(성령) 씨앗을 넣어 주셨다는 말이고

人子(인자) 됨을 因(인) 하여란

하나님의 聖靈(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으로 거듭나기 前(전)의 짐승사람에서 참사람인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는 말이고

무덤 속에 있는 者(자)란

몸이 죽어서 땅에 묻힌 屍體(시체=송장)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몸은 살아 있지만 성령으로 거듭나질 못하면 바로 그 몸뚱이가 무덤이고 그 몸뚱이 속에도 하나님의 성령 씨앗이 있으니까 무덤 속에 있는 者(자)도 다 하나님의 音聲(음성)을 들을 때가 온다는 말이다.

一部(일부) 교회에선 이 걸 못알아 듣고 죽은 송장이 무덤 속에서 마지막 심판의 날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벌떡 일어나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다는 얼토당토 않는駭怪罔測(해괴망측)한 妖舌(요설)로 純眞(순진)한 어린 羊(양)들을 迷惑(미혹)시키느라 모가지에 잔뜩 가래 끓는 소리로 雜說(잡설)을 떠들어대는 것을 볼작시면 참으로 慨歎개탄)을 禁(금)​ 할 수가 없다 하겠다.

요한복음 5장 24절 말씀에 있는

死亡(사망)에서 生命(생명)으로 옮겼다는 말도

몸이 죽은 자가 다시 몸이 復活(부활)하여 산다는 말이 아니고​

거듭나질 못하고 몸나와 마음 나인 自我(자아)를 참나로 錯覺(착각)하고 끝까지 참나인 얼의 나로 거듭나질 못하면 永遠(영원)한 滅亡(멸망)인 死亡(사망)으로 끝나지만

聖靈(성령)으로 거듭나 참나를 찾아 하나님 아들이 되면 영원한 생명인 하나님의 永生生命(영생생명)으로 옮겨졌다는 말씀인 것이다.

論語(논어) 子罕篇(자한편)에 있기를

『苗而不秀者有矣夫(묘이불수자유의부) 秀而不實者有矣夫(수이불실자유의부)​』라 하여

싹이 났다고 다 꽃이 피는 것도 아니고

꽃이 피었다고 다 열매로 結實(결실) 되는 것은 아니다 하였다.

여기 苗(묘) 대신에 人(인)을 넣고 秀(꽃필 수. 빼어날 수)대신에 人(인)을 넣으면

사람으로 났다고 해서 다 사람인 것이 아니고

빼어 났다고 해서 다 참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로 옮길 수가 있다.

에둘러 이렇게 하질 않아도 孔子(공자)님은 이런 뜻으로 譬喩(비유)하신 말씀일 것이다.

孔子(공자)님의 이 말씀도 예수님의 말씀과 別般(별반) 다름이 없는 말씀이라 하겠다.

사람이면 다 사람이냐 사람이 사람 노릇을 해야 사람이지란 옛말도 있듯이

사람이 자기 자신만 알고 자기 몸뚱이와 자기 마음만을 자기로 알고 사는 自我(자아)의 사람은​ 비록 貌樣(모양)은 사람이지만 實狀(실상)은 짐승이란 말을 孔子(공자)님은 이렇게 드러내신 말씀이라 할 것이다.

콩코드 윌든 호수의 산자락 기슭 숲 속에 작은 한칸짜리 통나무 오두막 집을 손수 지어​ 自然(자연)과 하나되어 살았던

헨리 데이빗 소로우가 한 말에​ 있기를

사람짐승 一億​명에 참사람인 人子(인자)가 한명도 있을까 말까 하다 하였다.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다들 사람이라며 저 잘났다고 거들먹거리지만 이게 다 짐승들이란 것이고

그 짐승들 중에서 1억명에 겨우 하나도 있을까 말까 할 程度(정도)로 사람인 人子(인자=참사람=하나님아들)가 없다는 것이다.

이 말인즉슨 하나님의 성령 씨앗을 움을 틔워서 그 씨앗이 온전히 자라나는데에 자신의 몸뚱이와 마음을 먹거리로 삼아 자신의 살과 피를 먹으면서 靈我(영아)인 얼나를 키워 하나님 아들이 되는 人子(인자)로 거듭나는 이가 그만큼 어렵고 稀少(희소)하여 드물다는 말이다.​

그의 싯구 하나를 적어보면

【 詩(시) 한 줄을 裝飾(장식)하는 것이

나의 꿈은 아니다.​

내가 윌든 호숫가에 사는 것보다

神(신)과 天國(천국)에 더 가까이 갈 수는 없다.

나는 나의 湖水(호수)의 돌 깔린 기슭이며

그 위를 스쳐가는 산들바람이다.

내 손바닥에는

湖水(호수)의 물과 모래가 담겨 있으며

湖水(호수)의 가장 깊은 곳은

내 생각 드높은 곳에 떠있다. 】

自我(자아)가 내세우는 것이 有獨(유독) 自尊心(자존심)이란 것인데​

自尊心(자존심)이란 것이 나 아닌 다른 무엇에도 나를 굽히질 않고 내 몸과 내 마음의 나를​ 스스로 귀히 여기고 높이는 마음이 아닌가

이게 말끔히  없어지고  빵빵하던 風船(풍선)에 바람이 빠지듯이 한김도 남김없이 깡그리 흩어져 버려야지  짐승성질의 自我(자아)가​ 겨우 숨이 죽는 程度(정도)라 할 것이다.

莊周(장주)님의 莊子(장자) 齊物論(제물론)에 있기를

【 萬​世之後而一遇大聖(만세지이후일우대성) 知其解者 是旦暮遇之也(지기해자 시단모우지야) 】라 하여

30만년 후에 크신 성인을 한번 만나 내 글을 풀어 아는 이가 있다면 이것이야 말로 아침 저녘으로 만나는 것과 같다 하였다.

萬世​代(만세대)는 한 세대가 30년이니 30만년이 되는 것이다.

장자의 말로는 30만년에 聖​人(성인) 한 사람이 나오기도 힘들다는 말인 것이다.

성경 마태복음 18장 21절서 22절 말씀에 있기를

『그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犯(범)하면 몇번이나 容恕(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번이면 되겠습니까 하고 묻자

예수께서 말씀 하시길 네게 이르노니 일곱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 하여라 』 하였다.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베드로가 일곱 번까지 容恕(용서) 해주면 되겠습니까 하는 말은 상대를 사람으로 생각하여 한 말이고

예수님이 일흔 번씩을 일곱 번이라도 容恕(용서) 하라는 말은 상대는 聖靈(성령)으로 거듭나질 못한 짐승사람이니 이런 짐승에겐 끝없이 용서 하라는 말씀인 것이다.

짐승에게 무슨 仁義禮智(인의예지)를 따지고 道德(도덕)과 法律(법률)과 秩序(질서)를 論(논) 할 것이 아니니 그냥 아예 문제 삼지를 말라는 말씀인 것이다.

그런 짐승 짓거릴 하는 사람의 잘못을 당하고 보는 것을 갚겠다거나 容恕(용서) 하겠다는 생각보다 나는 저렇게 해서는 안되겠다는 마음의 工夫(공부) 꺼리로 받아 들이라는 말씀인 것이다.

이와 같은 脈絡(맥락)의 말씀이 老子(노자)님의 道德經(도덕경) 27章(장)에 있기를

【 善人者 不善人之師(선인자 불선인지사)   不善人者 善人之資(불선인자 선인지자)​  不貴其師 不愛其資(불귀기사 불애기자)   雖智大迷(수지대미) 】라 하여

착한 사람은 착하지 못한 사람의 스승이고

착하지 못한 사람은 착한 사람의 밑천이고 자본이다.

그 스승을 높이질 않고 그 밑천을 사랑하질 않는다면

비록 슬기롭다 하더라도 크게 미혹되어 헤메는 것이다. 하였다.

착하지 못한 사람 내게 잘못된 害惡(해악)을 끼치는 사람이 곧 나의 스승이고 나를 착한 사람이 되게 해줄 재료요 밑천 자본꺼리이니

이를 미워하고 싫어하고 詛呪(저주)하고 嫌惡(혐오)하여 叱咤(질타)하고 같이 헐뜯고 티각태각 치고 받고 싸우며 法庭(법정)에 까지 가는 訟事(송사)로 연결되면 그나 나나 다같은 部類(부류)에 속하는 착하지 못한 사람인 것이니 그러질 말라는 것이다.

해서 그가 나를 일깨워 주려는 스승으로 생각하고 곱게 생각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를 보듬어 和氣(화기)로 親愛(친애) 하라는 말씀인 것이다.

사랑을 하려면 속알인 얼사랑을 해야 참사랑이지

겉 껍데기에 不過(불과)한 몸을 보고 몸을 사랑하는 것은 거짓 사랑이고 자기 욕심을 채우고자 하는 本能的慾心(본능적욕심)에 뿌리를 둔 짐승의 사랑 이라는 것이다.

孔子(공자)님 말씀이 論語(논어) 里仁篇(이인편)에 있기를

【惟仁者能好人 能惡人(유인자능호인 능오인】이라 하여

오로지 仁者(인자)라야 능히 사람을 좋아하고 사랑할 수 있고​ 능히사람을 미워 할 수도 있다 하였다.

仁者無敵(인자무적)을 풀어서 구체적으로 설명한 말씀이라 할 것이다.

여기서 仁者(인자)란 天生德於予(천생덕어여)라 하신 공자님 말씀에서 하나님이 내게 속알인 德(덕)을 낳아 주셨다 하신 뜻을 살핀다면 德(덕)이라 하신 속알이 곧 하나님의 성령 씨앗을 말하는 것으로써 하나님 성령으로 거듭남을 뜻하는 것임을 斟酌(짐작)​으로 알 수가 있다 할 것이다.

仁者(인자)가 곧 하나님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임을 말하는 것으로 血緣(혈연)으로 이어진 사이만 兄弟姉妹(형제자매)가 아니고 모든 人類(인류)가 大同(대동)으로 한 형제 자매로​ 하나님의 성령 씨앗을 받아나온 하나님의 자녀임을 알고 실천하는 참사랑인 하나님의 사랑을 심령에 담고 행하는 사람을 孔子(공자)님은 仁者(인자)라고 말씀을 하신 것이다.

이제 本文(본문)을 살펴보면

1.含德之厚(함덕지후)라 하여

머금은 속알이 두텁다 하였다.

하나님의 씨인 속알을 心靈(심령) 속에 머금어 품고 있음이 넉넉하다는 말이다.

사람이 사는 目的(목적)과​ 까닭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 사람의 속의 속에 넣어주신 이 하나님의 씨앗 種子(종자)를 움틔우고 길러야 할 使命(사명)에 있음을 老子(노자)님은 이렇게 드러내신 말씀이라 할 것이다.

석가 붓다님이 말씀하신 佛性(불성)이나 예수님이 말씀하신 靈性(영성)이나 老子(노자)님이 말씀하신 德性(덕성)이 모두 하나님 아들 될 씨앗인 성령 씨알을 일컫는 것으로는 다 같은 한 말씀인 것이다.

含德之厚人(함덕지후인)의 한 사람인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求道者(구도자)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를 옮겨보면

【​ 나는 갖은 事件(사건)으로 가득 찬 世上(세상)의 목덜미를 잡아

溺死(익사)할 때까지 물속 아래로 밀어 넣었습니다.

그리고는 江(강) 아래쪽으로 떠내려 보냈습니다.

텅빈 沈默(침묵)의 空間(공간)이 사방으로 擴張(확장)되고

내 存在(존재)도 따라 커지면서 그 안을 채웠습니다.

그제야 비로소 나는 들려오는​ 소리들을 感想(감상) 할 수 있었고

어떤 소리든 音樂(음악) 소리 아닌 것이 없었습니다. 】

소로우가 세상을 얼마나 싫어하고 批判的(비판적)으로 본 것인가 하면​

그는 세상에서 불리우는 牧師(목사)니 神父(신부)니 敎皇(교황)이니 聖職者(성직자)니 하는 呼稱(호칭)마저도 별로 좋지않게 생각 했다고 한다.

그 불리우는 호칭을 하나님 뜻에 꼭 들어맞게 堪當(감당) 해가는 信仰的(신앙적) 그릇들을 찾아 볼 수가  없었다는 말일 것이다.

세상의 목덜미를 잡아 溺死(익사)할 때까지 물속 아래로 밀어 넣고

그리고 강 아래 쪽으로 떠내려 보냈다는 말​이 무슨 말인가 하면

요한복음 8장 23절의 예수님 말씀인

『너희는 이 세상에 屬(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屬(속)하지 아니 하였다 』하신 말씀을 소로우님은 이렇게 표현하신 것이라 할 것이다.

세상에 속하였다는 것은 죽고 썩어질 한때의 물질에 지나질 않는 自我(자아)의 몸뚱아리 삶이 전부인 것으로 잘못 알고 몸뚱이의 有益(유익)과 慾心(욕심)에 執着(집착)​한 나머지  자신의 몸뚱이 삶을 위해서라면 하나님 마저도 팔아 먹고말   버러지만도 못한 肉身所欲(육신소욕)의 삶이 삶의 全目的(전목적)인 줄로 알고 사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라 할 것이다.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다는 말은 몸은 비록 세상에서 살고 있지만 정신인 참나로는 하나님의 성령으로 거듭나 세상의 물질적인 삶과 自我(자아)를 다 말끔히 버렸다는 말로 하나님 뜻만 순종하고 孝道(효도) 하는 하나님의 참아들로 하나님께 속했다는 말이다.

宗敎(종교)의 目的(목적)과 價値(가치)는 좁게는 個人(개인)의 靈魂救援(영혼구원)에서 넓게는 세상의 平和(평화)와 全人類(전인류)의 救援(구원)과 幸福(행복)한 삶의 成就(성취)와 서로가  내 몸같이 서로를 사랑하는 普便的(보편적) 人類愛(인류애)의 實踐(실천)에 있음일 것인데

이런 것은 한갖 허울뿐이고 오히려 宗敎(종교)를 빌미로 서로 反目(반목)하고 嫉猜(질시)하다 못해 慘酷(참혹)한 戰爭(전쟁)과 無慈悲(무자비)한 虐殺(학살)이 地球村(지구촌) 여기 저기서 끊이질 않는 것이 그때나 지금이나 지구촌의 현실임을 생각할때 소로우의 세상 종교인들에 대한 述悔(술회)가 한편으로는 切實(절실)하게 마음에 와 닿기도 한다 할 것이다.

세상엔 종교도 많고 종교인도 전체 인류의 70%가 넘는다는데 세상이 眞理精神(진리정신)으로 거듭나기는 커녕

갈수록 惡(악)이  넘치고 罪(죄)가 漲溢(창일=넘침) 하는 것은 이름과 모양만 종교인이지 다 저들 몸 욕심에 뿌리를 둔 祈福(기복)의 샤머니즘적 믿음이라서 그런 것일 것이다.

저마다 다들 저 잘났다며 나라고 거들먹대고 내세우기를 좋아하는 그 잘난 自我(자아)의 모가지를 비틀어 十字架(십자가)에 쾅쾅 대못으로 박아 깡그리 죽여버리고 온전히 無我(무아)가 되고 無慾(무욕) 하자는 것이 모든 宗敎(종교)의 核心(핵심 )줄기의 가르침이거늘

이 걸 아는 것인지 모르는 것인지

宗敎(종교)인들이란 群像(군상)들이 오히려 自我(자아)에  더 執着(짐착)하는 二律背反(이율배반)적인 모습으로 비치는 것이 안타까운 現實(현실)임을 어쩌랴.

2.比於赤子(비어적자)라 하여

지금 바로 갓난 핏덩이 아기에게 견줄까 하였다.

하나님의 씨를 머금고 품어 心靈(심령)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두터운 사람은 곧 갓난 아기마냥 아무런 짐승적 貪慾心(탐욕심)도 없고 神靈(신령)하고 純全(순전) 하다는 것을 老子(노자)님은 이렇게 말씀 하신 것이다.

母胎(모태)의 胎盤(태반) 子宮(자궁)에 있을 동안 어미와 연결된 탯줄로 生命(생명)을 供給(공급)받고 숨을 쉬며 영글어진 생명이 胎盤自宮(태반자궁)을 버리고 떠나 世上(세상)이란 이 땅에 툭 떨어져 어머니와 이어져 있던 생명줄인 탯줄을 탁 짜르는 瞬間(순간)

아기는 우렁찬 歡喜(환희)의 첫 울음을 吐(토)해 냄으로써

비로소 코로 숨쉬는 氣息呼吸(기식호흡)의 生命世界(생명세계)로 轉換(전환)되는 새로운 삶의 문지방에 들어서게 되는 것이다.

어미의 母胎(모태) 궁창인 羊水(양수) 속에서 살던 水中生命(수중생명)이

이 세상의 땅이란 뭍에서 살 氣息呼吸(기식호흡) 生命體(생명체)로의 大轉換(대전환)이 일어나는 것이다.

새끼는 짐승의 새끼건 사람의 새끼건 내새끼 너새끼 없이 다 하나같이 神秘(신비)롭고 한없이 사랑스럽고 이쁘고 귀여운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는게 사람이 받아나온 天性(천성)이 그래서 그런 것이다.

방금 태어난 아가야는 어미 젖을 빠는 本能(본능) 말고는 어떤 짐승성질의 貪慾心(탐욕심)도 없는 참으로 純全(순전)하고 거룩한 生命(생명)이요 하나의 世界(세계)로 새로이 열린 것이라 할 것이다.

老子(노자)님은 예수님보다 300년이나 앞서 사신 분인대

예수님 말씀과 똑같은 말씀을 먼저 해놀으신 것이다.

마태복음 18장 3절에 예수님 말씀이 있기를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決斷(결단)코 天國(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였고

베드로 전서 2장 2절 말씀에 있기를

『갓난 아이들 같이 純全(순전)하고 信靈(신령)한 젖을 思慕(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救援(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하였고

마가복음 10장 15절 말씀에 있기를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였다.

純全(순전)하고 神靈(신령)한 어린아이와 같이 되어 짐승성질이 말끔히 없어져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 예수님 말씀인데

老子(노자)님은 이미 예수님 오시기 300년도 더 앞서 含德之厚比於赤子(함덕지후비어적자)라 하여 하나님의 속알을 머금은  두터움이 흡사 갓난 아기에 견줄만 하다란 말씀을 해 놓으신 것을 보면

하나님의 성령으로 一通(일통)하여 거듭난 얼사람의 말은 하나로 뚫려 통해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할 것이다.

3.毒蟲不螫(독충불석)이라 하여

毒(독)머금은 벌레도 쏘질 못하고 하였다.

갓난 아기에겐 敵意(적의)가 전혀 없어 毒蟲(독충)이 說或(설혹) 아기 가까이에 온다한들 害(해) 할 생각이 없음을 毒蟲(독충)이 먼저 알아 쏘지를 않는다는 말도 되겠지만

이 말은 얼나로 거듭난 참나의 精神人(정신인)에게는 이런 것들의 危害(위해)에 대해 전혀 마음을 쓰질 않는다는 말을 老子(노자)님은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라 하겠다.

莊周(장주)님의 莊子(장자) 齊物論(제물론)에 있기를

『 至人神矣(지인신의) 』라 하여

이른 사람은 神靈(신령)하다 하였다.

至極(지극)한 境地(경지)에 이르른 사람은 神通(신통)하여 神(신)과 通(통)하고 靈妙(영묘)하여 神(신)과 靈的交感​(영적교감)이 이루어진다는 말이다.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세상의 온갖 利害(이해)의 얽힘을 超越(초월)하여 物質(물질)로 된 肉身所慾(육신소욕)의 貪慾心(탐욕심)에 찌든 삶을 훌훌 벗어버리고 하나님이 내게 주신 씨앗 성령으로 거듭나 하나님 성령과 交感(교감)하는 얼사람이 되어 聖靈充滿(성령충만)의 바른 삶에 들면 몸나와 마음 나인 自我(자아)로 살던 삶이 저절로 비늘처럼 脫却(탈각)되어 벗어지게 되고 無慾(무욕)과 無我(무아)가 되어 靈的(영적)으로 거룩하고 神靈(신령)한 경지의 삶으로 바뀐다는 말일 것이다.

『 大澤焚而不能熱(대택분이불능열)이라 하여

큰 못이 다 불타 말라도 뜨겁게 하질 못하고

河漢沍而不能寒(하한호이불능한)이라 하여

황하의 한수가 다 얼어 붙어도 차겁게 못하고

疾雷破山(질뇌파산)이라 하여

번쩍하는 우뢰와 번갯불이 산을 깨트리고

風振海而不能驚(풍진해이불능경) 』이라 하여

바람이 바다를 뒤집어도 놀라게 못한다 하였다.​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성령으로 거듭나 큰 깨침을 이루고 영적으로 하나님의 참 아들이 된 얼사람의 삶이 그렇다는 말이다.

더워 못살겠다 ,추워 못살겠다 ,너무 뜨겁다 , 너무 차겁다​,

雷聲霹靂(뇌성벽력)이 치고 산이 무너지고 暴風(폭풍)과 太風(태풍)이 불고

海溢(해일)로 바다가 뒤집어지고 하는 것으로 걱정이 되는 것은 다 물질이요 헛껍데기인 몸사람을 참나로 알고 살때의 일들이지

얼사람으로 사는 자에겐 이런 것들이 아무런 문제가 되질 않는다는 말을 장자님은 이렇게 말씀을 하신 것이다.

『 若然者 乘雲氣 騎日月而遊乎四海之外(약연자 승운기 기일월이유호사해지외)​』라 하여

이같은 사람은 구름이나 바람을 탄듯이

해와 달을 말탄듯이 우주 밖에서 노닌다 하였다.

여기서 若然者(약연자)란 至人(지인)을 말하는 것으로

하나님이 내게 넣어주신 하나님의 씨앗인 성령 씨알로 거듭난 사람을 말함이다.

『 死生無變於己而況利害之端乎(사생무변어기이황이해지단호) 』라 하여​

죽음과 삶이 나를 바꿀 수가 없는대 하물며 좁쌀 알갱이만도 못한 이해의 끄트머리 이겠는가하였다.

몸나와 마음 나는 거짓의 나이니 때가 되면 내가 벗기가 싫어도 당연히 벗겨질 겉 껍데기요 우주자연의 攝理(섭리)요 秩序(질서)이니 거기에서 마음이 넘어섰으므로 몸이 죽는 것은 참 죽음도 아니고 하나의 당연한 질서라는 것이다.

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영원한 하나님의 생명이 있음에야 무슨 몸뚱이의 生死(생사)​에 울고 웃고 할 일이 있을 것이며

하물며 이득과 손실에 까탈을 부리며 좁쌀 알갱이를 세듯이 미주알 고주알 할 것이 없다는 말을 장자님은 이렇게 드러내신 말씀이라 할 것이다.

4.猛獸不據(맹수불거)라 하여

사나운 짐승도 의거 할 곳 없고 하였다.

含德至人(함덕지인)의 聖靈(성령)으로 거듭나서 하나님의 성령 씨앗을 온전히 움을 틔우고 잘 키워 속알의 참나가 두텁고 굳세어진 하나님의 아들이 된 자에게는 비록 사납고 굶주린  孟獸​(맹수)라 하더라도 함부로 雄據(웅거)하여 나대질 못하고 害惡(해악)을 끼치질 못한다는 말이다.

舊約聖經(구약성경) 다니엘서 6장에 있기를

유다 王族(왕족)의 한사람인 다니엘이 바벨론의 捕虜(포로)로 끌려 왔으나

그의 智慧(지혜)가 出衆(출중=뭇사람 중에서 빼어남)하여 느부갓네살 왕의 꿈을 解夢(해몽)하고 그 아들  벨사살 왕의 宴會(연회=잔치모임)에서 王宮(왕궁) 촛대 맞은편 粉壁(분벽=흰칠을 한 벽​)에 손가락이 나타나 쓴 글자를 풀어준 덕으로 왕들의 信任(신임)을 받아 다리오 왕때는 세명의 總理(총리)중에 首長總理(수장총리)가 되었으나

다른 총리들과 지방 方伯(방백)들의 猜忌(시기)와 謀陷(모함)을 받아 굶주린 獅子窟(사자굴)에 쳐 넣어졌으나

다니엘은 굶주린 사자들로부터 털긑 한올도 傷(상)함이 없도록 하나님이 미리 사자의 입을 封(봉)해 주었다는 말씀도 있기는 하다.

이런 것은 뱀을 집어도 물질 않고 毒(독)을 마셔도 죽질 않는다는 다른 말씀처럼 다 譬喩(비유)의 말씀으로 알아 들어야지 이 걸 실제로 알아듣는다면 잘못 알아듣는 것이다.

몸으로는 다 죽고 다치는 것이지 몸으로 그렇다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함이다.

이 걸 실제로 알아들으니까 자신의 잘못된 믿음은 생각질 못하고

죽은 屍身(시신)을 7년간이나 방안의 요위에 산사람처럼 뉘어놓고 매일 수시로 씻어주고 닦아주고 약칠을 하고 화장을 시키며 復活(부활)의 날을​ 기다린 허황된 盲信(맹신)의 事例(사례)도 있었고

실제 목사란 사람이 講臺上(강대상)에서 나는 毒蛇(독사)를 집어도 독사가 나를 물질 않는다며

독사를 집어도라는 성경 말씀을 講說(강설)타가 독사에 물려 죽은 일도 있었던 것이 아닌가

비유의 속 뜻을 읽고 알라는 말씀인데

자신의 잘못된 믿음은 모르고 문자대로 저 믿음을 보이려는 교만때문에 이런 일들이 도처에서 벌어지는 헤프닝인 것이라 할 것이다.

비유의 속 참뜻은 그럼 무엇인가?

성령으로 거듭난 얼의 정신인은 몸뚱이는 살아도 죽은자라 했고

모습은 사람이라도 다 짐승이라 했듯이

이미 몸이란 物質形像(물질형상)과​ 感覺(감각)의 보고 만져지고 느끼는 물질인 肉的(육적)의 五官感覺(오관감각) 삶인 形而下(형이하)의 삶에서

形而上(형이상)의 세계인 靈性世界(영성세계)의 靈的(영적) 삶이란 차원에서 하나님과 더불은 삶으로 옮겨 살고 있다는 말인 것이다.

코미디언의 意圖(의도)된 바보 演技(연기)도 보는 사람들의 마음을 純化(순화)시켜 웃음을 웃게 만드는 작용을 하는 것은 본디 사람의 天性(천성)이란 것이 한점 꾸밈도 없이 맑고 깨끗한 바보같은 純粹(순수)함이 그 마음 바탕에 있어서 그런 것일 것이다.​

세상에서 바보라면 다들 뭔가 모르게 덜 여물고 덜 떨어진 모자라는 사람으로 알아 無視(무시)하지만

우리나라 종교인 중에 유독 스스로 바보라고 自稱(자칭)한 金壽煥(김수환 ) 樞機卿​(추기경)이란 분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김수환 추기경님의 이 말은 자신은 세상의 利害得失(이해득실)이나 損益打算(손익타산)에서 자기는 바보란 말이고

또 하나님 앞에서도 자신은 天癡(천치) 바보같이 自我(자아)의 利害打算(이해타산)을 모르는 바보가 되고싶다는 말일 것이다.

똥덩어리에 득시글거리는 구더기 떼들마냥 오로지 자신의 有益(유익)과 利害得失(이해득실)과 損益打算(손익타산)에 미쳐서 눈알에 핏발을 세우며 부모형제도 아랑곳 없이 殺氣(살기) 등등한채 소위 저만 잘났고 똑똑하다고 나대고 설치며 저만 살겠다고 기를 쓰며 남을 짓밟아 깔아 뭉개고 죽이기 까질 서슴칠 않는 짐승보다 못한 사람들이 곰곰히 귀담아 듣고 생각해 볼 말이 아닌가한다.

5.攫鳥不搏(확조불박)이라 하여

나꿔채 가는 새도 잡아 갈 수가 없다 하였다.​

3.4.5는 다른 말이 아니고 성령으로 거듭나 天性(천성)의 性稟(성품)의 나를 참나로 알고 하나님 아들로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 뜻 順從(순종)하며 사는 精神人(정신인)의 삶에선 몸나가 살고 죽음에 마음을 쓰질 않는다는 말을 이렇게 드러내신 말씀이다.

6.骨弱筋柔而握固(골약근유이악고)라 하여

뼈는 약하고 무르고 힘줄은 부드러우나 그 움켜쥠은 단단하다 하였다.

이건 갓난 아기의 여리디 여린 몸을 말하는 것도 되지만

하나님 성령으로 거듭난 精神人(정신인)의 몸살림에 處(처)하는 立場(입장)을 드러낸 말이기도 하다 할 것이다.

갓난 아기가 꼭 보듬어 쥔​ 작은 주먹을 어른도 쉽게 펴낼 수 없다는 말도 그저 있는게 아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정신인의 진리의 움켜쥠도 몸생명을 다바쳐 지킬만큼 단단하다는 말이다.

7.未知牝牡之合而​䘒作(미지빈모지합이최작)이라 하여

암수가 짝짓기 하는 것을 알지는 못하나 陰莖(음경=자지)이 꼿꼿이 일어선다 하였다.

어린아이는 膀胱(방광=오줌통)에 오줌이 차면 자지가 저절로 빳빳하게 일어서는게 生理現狀(생리현상)이다.

성령으로 거듭나 몸삶을 버리고 영적 삶을 사는 참나의 사람도 여늬 사람처럼 몸의 감각 반응을 따라 자지가 꼿꼿이 발기되는 것도 생리현상이고 生體反應(생체반응)인 것은 당연하다.

火藥(화약)이 제 아무리 많다해도 거기에 불을 붙이질 않으면 爆發(폭발)이 일어나질 않듯이 자지가 아무리 빳빳하게 發起(발기)를 했다해도 色情(색정)의 마음을 먹질 않는다면 몸이 정신의 다스림에 저절로 順化順應(순화순응)이 되는 것이다.

사람의 씨앗인 精液(정액)은 사람 인체의 活力素(활력소)인 기름이나 마찬가지라 이 기름을 함부로 몸의 快樂(쾌락)을 좇아 마구 쏟아 浪費(낭비)해 버린다면 氣(기)가 衰(쇠)하여 몸에 병이 쉬오고 壽命(수명)이 短縮(단축)되어 夭折(요절)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좋은 例(예)들이 옛날 王政時代(왕정시대) 때 數百數千(수백수천)의 宮女(궁녀)를 거느린 임금들치고 하나같이 오래 산이가 없다는 것이 그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精液(정액)은 快樂(쾌락)을 즐기는데 쏟으라고 있는 것이 아니고

生殖(생식)에 쓰임이 그 하나의 가치이고

精神高揚(정신고양)과 涵養(함양)으로 文化創造(문화창조)와 하나님 뜻을 이루는 일로 생각하고 공부하고 기도 하는데 쓰라고 旺盛(왕성)한 정력이 주어진 가치라고 생각한다면

자지가 아무리 꼿꼿이 설만큼 정력이 넘친다해도 전혀 문제가 되질 않는다는 말이라 할 것이다.

聖人(성인)은 喜怒哀樂(희노애락)이 發(발)해도 靈我(영아)인 얼정신에 의해 節制(절제)가 되는 것임을 인류의 여러 성인들을 통해서 알수가 있다.​

莊子(장자)님 말씀에 있기를

【 至人之用心若鏡(지인지용심약경)​  不將不迎應而不藏(부장불영응이부장) 故能勝物而不傷(고능승물이불상) 】이라 하여

지극한 경지에 이른 사람의 마음 씀은 거울 같아서 보내지도 맞지도 않아 응하기는 하나 마음에 담아 두질 않아서 능히 물질을 이겨 다치는 일이 없다 하였다.

이게 쉽게 말하면

정신이 참나고 몸이 겉 껍데기로 거짓의 나임을 알고 사는 사람은 물질인 몸의 소욕과 감각에 휘둘려 몸에 종질하는 삶을 살질 않고 몸을  자기 정신의 먹거리로 부리고 산다는 말을 이렇게 한 것이다.

자기의 몸나와 마음 나인 자아를 이기면 세상은 저절로 거꾸러지는 것이란 것을 장자님은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8.精之至也(정지지야)라 하여

정기의 지극함이다 하였다.

活力素(활력소)인 몸의 精氣(정기)가 자동차의 燃料桶(연료통)에 揮發油(휘발유)가 넉넉한 것마냥 몸이 어떤 일도 못 할 것이 없을만큼 준비가 잘 되어 있고 健康(건강)하다는 말이다.

우리 몸의 건강함이 貴(귀)하고 所重(소중)한 것은 物質(물질)로 된 썩어질 이 몸뚱이 속 心靈(심령) 밭에 하나님의 씨가 있고

이 씨를 움을 틔우고  꽃이 피도록 몸 생명을 다 불태우더라도 반드시 하나님의 아들로 길러내야 할 絶對的(절대적)인​ 使命(사명)이 있어서

貴(귀)하고 所重(소중)한 것이지

그렇질 않다면 한갖 고깃덩어리인 이 몸뚱이가 뭐가 그리 대수로울 것인가​

農夫(농부)가 收穫(수확)한 나락인 벼가 萬石(만석=만섬)이 있다한들

다음해 農事(농사)에 播種(파종)할 씨앗으로 쓰이는 볍씨는 겨우 몇말이면 되는 것이다

播種(파종) 씨앗을 除(제)한 대부분의 벼는 搗精(도정=볍씨의 껍질 옷을 벗겨 맨몸의 쌀을 만듬)하여 사람을 살리는 밥으로 먹히우듯이

健康(건강)한 몸뚱이에서 고이는 精氣(정기)의 液(액)인 精液(정액)이 사람의 씨앗인데

이게 사람 만드는 種子(종자) 씨앗으로 쓰이는 일엔 극히 적은 양을 써야하고 나머지는 정신을 길러내는 에너지로 써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런 生命氣運(생명기운)의 精(정)을 시궁창(臭水溝<취수구>)으로 흘려 버려서야 될일인가

9.終日號而不嗄(종일호이불사)라 하여

하루내내 울고 부르짖어도 목이 쉬질 않는다 하였다.

애기들은 정말 하루종일 울어도 목이 쉬 쉬질 않는다.

이게 왜 그런가하면 어거지가 아니라 자연스런 것이라서 그런 것일 것이다.

10.和之至也(화지지야)리 하여

화기의 지극함이다 하였다.

애기가 종일 울어도 목쉬질 않는 것은 自然發生的(자연발생적)인 生體(생체)

리듬의 和氣(화기)가 지극해서 그렇다는 말이다.

爲無爲(위무위)로 억지로 함이 없이 하는 自然順應(자연순응)적인 調和(조화)로움에서 스스로의 기쁜 마음으로 이루어지는 행위는 어거지로 하는 作爲的(작위적)이고​ 人爲的(인위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和氣(화기)의 至極(지극)함으로 疲困(피곤)함을 모른다는 말이다.

11.知和曰常(지화왈상)이라 하여

調和(조화)로움으로 自然(자연)의 攝理(섭리)에 和(화=동화)할 줄 앎을 恒常(항상)함이라 한다 하였다.

여기서 知和(지화)란

聖靈(성령)으로 거듭난 얼사람인 참나에 마음이 應(응)할 줄 아는  앎을 말하는 것이다.

내 몸뚱이의 욕심과 그 誘惑(유혹)의 이끌림대로 아무렇게나 몸뚱이에 종질로 살아 가는 것이 아니고

진리의 얼인 그 얼나의 마음을 좇아 하나님의 아들 삶을 살므로 한점 부끄럼없이 떳떳하게 사는 삶을 말하는 것이다.

12.知常曰明(지상왈명)이라 하여

항상하여 변함 없음을 아는 것을 일러 밝음이라 한다 하였다.

몸나와 마음 나의 自我(자아)는 죽 끓듯이 마음이 갈피를 못잡고 시뚝빼뚝 변덕을 부려 종잡을 수가 없지만

참나인 얼의 나는 하나님의 성령 씨알로 하나님의 성품인 하나님 아들로 영원한 진리의 靈我(영아)라

하나님 뜻 섬김 하나로 곧고 굳세어 변함없이 항상함으로 빛을 발하여 늘 밝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성령을 빛이라 하는 것도 다 이래서 그런 것이다.

莊子(장자)님은 이를 일러 保光(보광)이라 하여 숨은 빛이라 하셨고

붓다님은 이를 두고 寂光(적광)이라 하여 니르바나님(하나님)의 빛이라 하셨다.​

13.​益生曰祥(익생왈상)이라 하여

거듭남을 일러 福(복)됨이라 한다 하였다.

益生(익생)은 重生(중생=거듭남)으로 성령으로 거듭남을 말함이고

曰祥(왈상)은​ 영생에 들었으니 福(복)되다는 말이다.

성령으로 거듭난 삶이란 것은

몸뚱이 나와 마음 나인 自我(자아) 中心(중심)의 삶에서 하나님 성령 씨알의 靈我(영아)인 얼의 참나로 精神的(정신적)인 새로운 가치의 삶​으로 바뀌었다는 말이다.

한마디로 物質(물질)인 몸과 물질인 세상에 목적을 두고 정신이 물질에 종질하며 살던 삶에서 정신이 이제는 주인이 되어 몸을 부리는 영적인 삶으로 옮겼다는 말이다.

多夕(다석) 柳永模(류영모)님이 남기신 多夕語錄(다석어록)의 말을 옮겨보면

(얼나를 위해 몸뚱이를 길러야지 이 몸뚱이를 지나치게 사랑하거나 몸뚱이를 삶의 전목적으로 살아서는 안된다.

우리의 몸은 짐승이고 몸삶은 짐승살이다.

하나님의 아들인 얼나가 어째서 이런 짐승인 몸에 있는 것인지는 알 수가 없다.

우리는 우리 마음에 오신 하나님의얼을 기르기 위한 限度(한도) 內(내)에서​ 몸 건강을 생각 해야지

몸을 삶의 전목적으로 해서는 안됨을 생각해야 한다.

몸이란 짐승도 적당히 쓰기 위해서 적당히 길러야지

그래서 잡을땐 아낌없이 잡아야 하는 것이다.

항상 몸나는 얼나를 위한 것임을 알고 그리고 얼나는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것을 잊질 말아야 한다.)하였다.

여기서 얼나란 하나님 성령 씨알로 거듭난 참나를 말함이다.

多夕(다석)님의 이 말은

 自律的(자율적)으로​ 存其心(존기심)하여 하늘로부터 받아나온 하나님 성령 씨알 맘을 보존하고 養其性(양기성)하여 그 찾아낸 성령 씨알의 성품 영을 싹을 틔우고 꽃이 피도록 잘 키워 거듭나는  삶의 참 기틀을 내가 스스로 잡아야 한다는 말이다.

敎會(교회)나 牧師(목사)나 神父(신부)들의  가르침에서 洗腦(세뇌)되어가는 他律的(타율적) 겉 껍데기의 남의 信仰(신앙)이 아니라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을 내가 직접 먹고 하나님의 聖靈感化(성령감화)와 交通(교통)과 靈通(영통)으로 靈感(영감)을 얻는 내 靈魂(영혼)의 糧食(양식)으로 내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숨쉬는 生命(생명)의 말씀으로 자라나야 한다는 말이다.

飮食(음식​)도 내가 먹어 내 속에서 消化(소화)가 되어야 營養分(영양분)이 내몸에  吸收(흡수)되듯이

말씀도 내가 직접 하나님 성령과의 교감으로 서로 靈通(영통)할 때까지​ 내가 먹고 내가 깨쳐야 한다는 것이다.

남에게서 듣고 또 남이 먹여주는 말씀은 내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것도 아니고​ 그것은 들려주는 사람의 것이지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이 아니라는 것이다.

바람풍을 빠담풍이라고 가르쳤다면 그걸 듣고 곧이곧데로 배우는 사​람에겐 바람풍이 결국은 빠담풍이 되고마는 것처럼

내 스스로 깨쳐서 내가 하나님과 直接(직접) 獨對(독대)하겠다는 自律的(자율적)인 믿음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설혹 創世記(창세기)에서 默示錄(묵시록)까지 성경 66권을 줄줄이 다 외울 정도라 해도 성경을 아는 知識(지식)만으로써는 하나님의 생명말씀을 온전히 알았다고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알았다고 해도 내 삶에서 행함이 없다면 죽은 믿음이라 했고 또한 바람에 나는 겨와 같다고 하질 않았던가.

14.心使氣曰强(심사기왈강)이라 하여

마음이 기세를 부림을 일러 세다고 한다 하였다.

몸나와 마음 나인 自我(자아)의 물질에 붙은 剛愎(강퍅)한 마음이​ 온전히 죽어서 無慾無我(무욕무아)가 되어야 하는데

이게 주머니 속의 송곳마냥 자꾸 삐죽삐죽 시도 때도 없이 성질을 부린다는 말이다.

15.物壯則老(물장즉노)라 하여

물질이란 이제 한창인가 싶으면 벌써 늙고 시든다 하였다.

佛經(불경) 金剛經(금강경)에 있기를

『 一切有爲法 일체유위법) 如夢幻泡影(여몽환포영) 如露亦如電(여로역여전) 應作如是觀(응작여시관) 』이라 하여

無限宇宙(무한우주)의 虛空(허공) 안에 被造(피조)된 일체의 모든 물질의 攝理法則(섭리법칙)들이 마치 꿈 같고 환상 같고 물거품 같고 그림자 같고 이슬 같고 또한 번쩍하고 없어지는 번개의 閃光(섬광) 같은 것이라 實相(실상)이 없고 虛妄(허망)한 것이라 마땅히 응당 이와 같은 우주의 攝理秩序(섭리질서)를 바로 보고 바로 알아야 눈에 보이는 물질로 된 허깨비 형상의 상대세계에 執着(집착)함이 참으로 헛된 妄想(망상)임을 깨우치게 된다는 말씀이다.

꽃이 아름다운 것은 暫時(잠시)동안 華奢(화사)하게 피었다가​ 이내 그 꽃이 시들어서 떨어지기 때문에 더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일 것이다.

꽃의 죽음이 있어서 꽃이 아름다운 것은 씨앗 種子(종자) 속에 자신의 생명 遺傳因子(유전인자)를 영글게 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16.是謂不道(시위부도)라 하여

이를 일러 道(도=진리. 참.하나님)가 아니라 한다 하였다.

몸나와 마음 나인 自我(자아)로 肉身(육신)인 몸뚱이의 所慾(소욕)인 貪慾心(탐욕심)에 執着(집착)하다 못해 몸뚱이의 종노릇 하고

물질로 된 몸뚱이가 물질세상에 貪着(탐착)하여 서로 얼크러지고 물크러져 엎어지고 자빠지며 탐욕심의 奴隸(노예)가 되어 똥버러지처럼 사는 것이 참 삶이 아니라는 말이다.

붓다님은 말씀 하시길

짐승으로 사는 삶을 좋다하고 사는 사람은 땅위의 흙만큼이나 많은데

見性成佛(견성성불)하여 佛性(불성)으로 거듭난 사람은 손톱위에 얹힐 흙만큼도 없다 하였다.

世俗的(세속적)인 人生觀(인생관)으로 사는 사람들의 눈엔 다 나보다 잘났고 앞섰으며 富裕(부유)하고 幸福(행복)하게 잘 사는 사람들로 보이겠지만

佛性(불성=聖靈)으로 거듭난 精神人(정신인)인 얼나의 사람 눈에는 다 하나같이 짐승으로만 보이고 똥덩어리에 달라붙은 구더리마냥  貪慾心(탐욕심)에 미쳐 꼬물거리는 한갖 버러지 같이만 여겨진다는 말이다.

孔子(공자)님 말씀이 論語(논어) 憲問篇(헌문편)에 있기를

『子貢曰(자공왈) 何爲其莫知子也(하위기막지자야)

子曰 不怨天不尤人(자왈 불원천불우인) 下學而上達(하학이상달) 知我者其天乎(지아자기천호)라 하여

弟子(제자) 자공이 어째서 세상사람들이 선생님을 알아주질 않습니까?​

하고 묻자 공자님이 말씀 하시길

나는 그런 것을 두고 하늘도 원망칠 않고 사람은 더욱 탓하질 않는다 .

다만 아래로는 세상 사람의 도리를 배우고

위로는 天理(천리)를 通達(통달)하면 나를 알아 줄 이는 아마도 하나님이실 것임을 나는 아는 것뿐이라 하였다.

形而下(형이하)의 物質(물질)에 붙잡힌 貪慾心(탐욕심)의 진창수렁의 세상에서나마 늘 感謝(감사)한 마음으로 열심히 공부하고 精進(정진)​하여 살고

形而上(형이상)의 精神世界(정신세계)인 하나님께 靈的(영적)으로 通(통)하기만 하면 그때 하나님께서 나를 알아 주실 것을 確信(확신)한다는 말을 孔子(공자)님은 이렇게 말씀을 하신 것이다.

사람이란 존재가 여늬 짐승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자신의 人格(인격)을 高揚(고양)시키고 涵養(함양)하는 目的(목적)을 가지고 完成(완성)된 人格(인격)을 向(향)해 無限(무한)히 成熟(성숙)하고 發展(발전)해 나가고자 하는 생각하는 生命體(생명체)라는 것일 것이다.

物質(물질)인 몸나에 붙어 살던 마음나에서 精神(정신)의 나인 얼나로 거듭나기 까지 완성된 인격을 갖추고자 漸漸(점점) 인물의 價値(가치)를 깨달아 가는 것이 곧 人格(인격)인 것일 것이다.

人格(인격)이란 짐승이 짐승 성질로만 살던 몸뚱이 삶에 빌붙었던 마음을 버리고 사람의 값을 갖추어가는 것일 것이다.

多夕(다석)님의 말에 있기를

[ 몸 사람이란 好奇心(호기심)으로 肉味(육미)인 살맛을 찾아 다니는 짐승이라 몸의 本能(본능)은 惡(악)과 親(친)하려 하지만

하나님 아들인 얼사람으로는 하나님 아버지가 계신 위로 솟나 올라 가려고한다. ] 하였다.​

이런 것을 생각질 않는다면 그게 바로 짐승살이의 짐승이라는 말이 아닌가.

눈에 차고 귀에 즐겁고 입에 단믈이 돌고 맘에 흥이 돋구어지면 사람들은 죽기 살기로 얼크러지고 물크러진다.

이런 물질과 感覺(감각)에 捕虜(포로)가 되어 사는 사람들에겐 하나님의 眞理(진리) 말씀에는 馬耳東風(마이동풍)이요 牛耳讀經(우이독경)일뿐인 것은

物質(물질)인 몸뚱이의 감각적인 삶과 세상이란 수렁에 통채로 빠져 있어서 그런 것이다.

17,不道早已(부도조이)라 하여

참이 아니면 일찌감치 그만두어야 한다 하였다.

참과 거짓이 있다면 참을 택하고 거짓을 단연코 버리라는 말이다.

겉 包裝紙(포장지)가 아무리 高級(고급)스럽고 버리기가 아까울만큼 아름답다 하더라도​包裝紙(포장지) 속에 포장되어 있는 속 알맹이를 싸고 있는 겉 껍데기지

그 포장지가 알맹이가 아니라는 말인 것이다.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성경 요한복음 6장 63절의 예수님 말씀에 그 답이 들어 있다.

『살리는 것은 靈(영)이니 肉(육=몸)은 無益(무익) 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靈(영)이요 生命(생명)이니라.』

永遠(영원)히 永生(영생)하여 사는 참생명은 靈(영)이란 속알 알맹이고 肉(육)은 나고 죽는 一時的(일시적)인 物質(물질)로 속알인  靈(영)을 담고 있는 하나의 그릇일뿐이라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이다.

靈(영)이 참나이고 몸이 거짓의 나라는 말이다.

똑같이 같은 하나님을 믿고 같은 성경을 보는데도 어째서 예수님의 이 말씀의 뜻을 못 알아 듣는 것인지

이건 들을 귀가 성령으로 뚫리질 않고​ 몸뚱이의 욕심귀로만 뚫려 있어서 그런 것일 것이다.

몸나에 붙은 마음나를 거짓의 나로 바로 알고 매몰차게 미련없이 마음을 끊어내고 하나님 성령 씨알의 靈我(영아)인 얼나를 참나로 깨쳐 거듭나서 하나님 성령의 引導(인도)하심을 따라 몸생명을 다바쳐 하나님 뜻을 받들고 섬기고 행하는 삶이란 것이 참살이 인것을 모르고

하나같이 그 잘난 몸뚱이 욕심이 활짝 꽃피기만 바라고

부귀영화만 바라고 썩어질 몸뚱이가 썩지 않을 몸을 입어 무슨 천년왕국에서  산다는 둥 하며 정신분열증 환자 같은 헛소리들을 하면서도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인지 참으로 惻隱(측은)하고 안타까운 일이 아닌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