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知人者智(지인자지=사람을 아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다) 본문
知人者智(지인자지=
사람을 아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다) 蘧然覺
2014. 6. 10. 21:23
1.知人者智(지인자지)
2.自知者明(자지자명)
3.勝人者有力(승인자유력)
4.自勝者强(자승자강)
5.知足者富(지족자부)
6.强行者有志(강행자유지)
7.不失其所者久(부실기소자구)
8.死而不亡者壽(사이불망자수)
(풀이글)
이 글은 老子(노자)님의 道德經(도덕경) 33章(장)에 있는 말씀이다.
성경 누가복음 17장 20절서 21절 말씀에 있기를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때에 臨(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對答(대답)하시길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바로 너희 안에 있느니라 』하였다.
바리새인들이 묻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時間(시간)과 空間的(공간적)으로 저들의 몸뚱이 눈으로 보고 確認(확인) 할 수 있도록 어느때 어느 곳에 어떤 모습으로 오는 것인지를 묻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거듭나질 못하고 유태교의 오랜 律法(율법)의 舊習(구습)에 물든 샤머니즘적 祭祀宗敎(제사종교)와 儀式(의식)예배만 固執(고집) 해오던 바리새인들은 오직 몸뚱이 나와 마음나의 自我(자아)를 참나로 알고 몸생명을 최고의 생명 價値(가치)로 여기고 사는 靈的(영적) 소경의 자들이라
저들이 사는 동안 하나님의 나라가 올것을 渴望(갈망)하는 慾心(욕심)과 念願(염원)을 이렇게 물은 것이라 할 수 있다 할 것이다.
마치 땅의 나라처럼 하나님의 나라도 이 땅 어딘가에 올것이라는 幼稚(유치) 하기 짝이없는 땅에붙은 생각을 하는 것이라 하겠다.
땅의 나라는 生命物質(생명물질)이 쉼없이 나고 죽고
있다가는 없어지고를 無限反復循還(무한반복순환)을 하는 변화의 循還(순환)고리인 하나님의 攝理秩序(섭리질서)의 運行(운행)에 따라 生滅(생멸)이 순환되는 相對性(상대성)의 세계로
꿈같고 물거품같고 그림자같은 幻像(환상)의 虛像世界(허상세계)임을 모르니까 썩어질 육신인 몸뚱이가 죽질 않고 몸으로 영생 할 수 있는 그런 하나님의 나라가 언제 올 것인지를 묻고 있는 것이다.
이 물음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썩어질 몸뚱이 눈으로 보기를 바라는 바리새인들이 알아듣질 못할 말씀의 대답을 하신 것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눈으로 볼 수 있는 物質(물질)의 나라가 아니고 靈(영)의 나라이라 눈으로 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여기 저기의 어떤 除限(제한)된 공간에 있는 것도 아니고 오는 것도 가는 것도 아니고 구태어 말한다면 사람의 心靈(심령)속의 속인 생각 속에 있다고 말씀을 하신 것이다.
사람의 마음이란 것은 눈으로는 볼 수 없는 것이지만 분명하게 있는 것이 마음인 것처럼
하나님의 나라도 사람의 마음인 심령처럼 눈으로 볼 수는 없지만 分明(분명)하게 있다는 것을 이렇게 말씀을 하신 것이다.
사람의 속의 속 심령 가운데 하나님 성령의 씨가 심겨져 있으니 사람의 심령 속이 곧 하나님의 至聖所(지성소)이기도 하고 또한 聖殿(성전)이며 하나님의 나라인 것인데 이 걸 모르고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언제 오느냐고 묻는다는 것은 예수님 말씀을 전혀 못알아 듣는다는 것의 反證(반증)이 아닌가
예수님은 하나님의 靈(영)인 聖靈(성령)이 이 無限宇宙虛空(무한우주허공)의 빔에 두루 꽉 차있어 하나님 나라가 아닌 곳이 없음이 太初以前(태초이전)부터의 絶對眞理(절대진리)임을 말씀 하시는데 바리새인들은 썩어질 몸뚱이란 물질의 눈으로 보고 느끼고 해야만이 하나님의 나라를 인정하겠다는 쪼의 몸뚱아리 욕심을 말하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精神(정신)이 몸뚱이의 종이되어 사는 바리새인들에겐 예수님 말씀을 알아들을 수 있는 靈(영)의 귀가 열리질 않았듯이
오늘날까지도 이런 部類(부류) 믿음의 段階(단계)를 넘어서질 못해 바른 깨달음으로 참된 믿음에 들질 못하고 있으면서도 헛된 傲慢(오만)과 我執(아집)과 驕慢(교만)으로 痼疾病(고질병)에 든줄도 모르고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그런 종교인들이 洪水(홍수)때에 狂暴(광포)하게 汎濫(범람)하는 물살처럼 넘쳐나는 것이 오늘날 종교인들의 信仰現實(신앙현실)이라 해도 그리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성경말씀 요한복음 4장 22절서 24절 말씀에 있기를
『너희는 알지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 하노니 이는 救援(구원)이 유태인에게서 남이 아니라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神靈(신령)과 眞情(진정)으로 예배 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니라
하나님은 靈(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 하였다.
여기서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한다는 말은
겉모양으로는 비록 祭祀(제사)같은 敬虔(경건)한 儀式(의식)으로 예배를 드린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바로 알질 못하고 몸뚱이 욕심 成就(성취)를 위한 바라는바인 욕심의 예배라면 이 것은 예배가 아니라 헛짓거리인 샤머니즘의 巫堂(무당) 푸닥거리 밖에 안된다는 말을 이렇게 말씀 하신 것이다.
참으로 禮拜(예배) 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 한다는 것은
聖靈(성령)으로 거듭난 자가 홀로 內密(내밀)하고 敬虔(경건)하게 하나님을 생각하고 冥想(명상)하고 默言(묵언)의 心靈祈禱(심령기도)를 드리며 하나님이 주신 씨알 성령의 靈的呼吸(영적호흡)으로 성령의 숨을 쉬는 정신적인 예배를 말씀 하시는 것이다.
비록 外飾的(외식적)이고 겉으로 드러나는 儀禮(의례)의 虛飾(허식)과 擾亂(요란)스런 形式(형식)과 祭物(제물)은 없지만 나 자신을 제물로 드린다는 生命決斷(생명결단)의 마음으로
내 속의 씨알 성령의 참나말고 또 하나의 나인 거짓나의 自我(자아)인 몸나와 마음나를 씨알 성령인 참나의 성령불로 태워 없애는 默言(묵언)의 祈禱(기도)와 冥想(명상)의기도를 神靈(신령)과 眞情(진정)으로 드리는 참예배라는 말이다.
神靈(신령)과 眞情(진정)으로 예배를 드린다는 말은
物質(물질)로된 몸뚱이 나의 본능인 貪心(탐내는 욕심의 마음)과 嗔心(진심=성내는 마음)과 癡心(치심=여색에 홀리는 음탕한 마음)의 誘惑(유혹)과 未練(미련)에 끄달려 도무지 족할 줄을 모르는 貪慾心(탐욕심) 三毒(삼독)의 불같은 불길에 쉼없이 활활 타오르고 있는 마음나와 몸나인 자아가 참나가 아니고 썩어질 물질이 因緣(인연)따라 暫時(잠시) 사람의 形像(형상)인 몸이란 껍질로 이루어진 假存(가존=거짓존재)의 물질로써 때가 다하면 또 죽고 썩어 分化(분화)된 元素(원소)로 還元(환원)되어 우주 속의 無限虛空(무한허공)인 본디의 本鄕(본향)으로 다 흩어져 버릴 거짓의 나임을 確然(확연)히 깨닫고 알아서 이 거짓의 나를 말끔히 마음에서 벗어버리고 하나님이 주신 하나님 씨알 성령의 참나인 성령의 나 얼의 나인 곧 하나님 성령이 臨在(임재)해 계신 靈我(영아= 얼의나)로 성령의 숨을 쉰다는 말이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린다는 말이다.
성령을 숨쉰다는 말은 하나님을 懇切(간절)한 마음으로 생각을 한다는 말로
사람이 코로 숨을 쉬어야 몸이 살듯이 사람의 精神(정신)도 코숨을 쉬듯이 정신도 성령의 숨을 쉬어야 한다는 말이다.
붓다님 말씀이 잡아함경에 있기를
『比丘(비구)여!
물질을 싫어하고 慾心(욕심)을 없애고 모든 煩惱(번뇌)를 일으키지 않으면 마음이 解脫(해탈)의 경지에 들게 되느니라
이 것을 이름하여 寂滅寶宮(적멸보궁=니르바나님의 나라)을 얻은 것이라 한다.』하였다.
물질로된 이 몸은 물질이라서 본디 물질과 가깝고 親(친)한 성질이 있는 것이 타고난 胎生的(태생적)인 本能的慾求(본능적욕구)라 쉼없이 물질에 끌리고 탐욕심을 일으키는 것이니
이 것을 벗어나려면 먼저 물질로된 내 몸이 참나가 아닌 거짓의 나임을 確然(확연)히 알아야만이
저절로 물질인 내몸에 내가 홀딱 빠지지도 않고 세상의 모든 어떤 물질이라 하더라도 비록 그것이 산더미같이 많은 황금덩어리라 할지라도 한점의 욕심으로도 마음이 끄달리질 않고 마음은 맑고 고요해져 본디부터 내 속의 속에 있던 완전무결한 淸靜心(청정심)의 참나를 回復(회복)하게 된다는 것을 이렇게 붓다님은 말씀 하신 것이다.
寂滅寶宮(적멸보궁)에서 寂滅(적멸)은 梵語(범어)인 산스크리트어의 니르바나(하나님)를 뜻풀이로 意譯(의역)한 말이고 소리로 의역한 말은 涅般(열반)이라고 한다.
寶宮(보궁)은 하나님나라를 보궁이라고 한 것이다.
해서 니르바나님(하나님)의 佛性(불성=성령) 씨알이 들어있는 내 심령속의 속에 씨알 佛性(불성)이 있는 심령의 마음자리가 곧 니르바나님의 나라라는 말을 붓다님은 이렇게 말씀 하신 것이다.
붓다님이나 예수님이나 서로 表現(표현)만 다르지 말씀의 속알 뜻은 한치도 틀리질않는 것은 다 하나로같은 하나님의 성령으로는 같아서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예수님보다 500년이나 앞서 살다가신 석가 붓다님도 진리의 말씀을 45년동안이나 입으로 說法(설법)만 하셨지 손수 글이나 문자로 저술된 書冊(서책)을 직접 남기신 것은 하나도 없고
예수님도 말씀만 하셨지 직접 글로 써서 남기신 것이 없다.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오는 마태복음.마가복음.누가복음. 요한복음서인 4복음서도 예수의 직제자들이 쓴 것도 아니고 예수님 사후 2ㅡ3세 제자들인 디아스포라(이스라엘의 해외 유랑민)들에의해 그리스어로 쓰여진 것으로 밝혀진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다
4복음서 외에도 도마복음서를 비롯한 영성신앙을 기록한 Q복음서들은 사도바울의 贖罪敎理(속죄교리)에 어긋난다하여 다 불태워 없애버린 것도 이미 오래전에 밝혀진 역사적 사실이다.
예수님은 성령의 거듭남으로 聖靈復活(성령부활)인 靈的復活(영적부활)을 분명하게 말씀하시고 가르치셨는데
바울은 이 것을 肉身(육신)인 몸뚱이의 부활로 遁甲(둔갑)시켜 贖罪敎理(속죄교리)인 代贖信仰(대속신앙)의 贖罪宗敎(속죄종교)로 變質(변질)시켜버린 것이다.
예수님 말씀을 가장 잘 알아들은 것 같지만 바울은 엉뚱하게 알아 들었다고 말 할 수밖에 없다.
몸뚱이 나와 마음의 나인 自我(자아)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내 죄를 대신 짊어지시기 위하여 죽으셨다는 것을 믿기만 하면 다 救援 (구원) 받는다는 교리를 내세운 것이 사도바울 교리의 핵심이다.
예수님은 聖靈復活(성령부활)을 말씀 하셨지 肉身復活(육신부활)을 말씀하신 말씀은 예수님 말씀 어디에도 없다.
肉身(육신)은 無益(무익)하나 살리는 것은 靈(영)이니라 하셨는데
바울은 육신의 부활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의 代贖(대속)을 힘입어 贖罪敎理(속죄교리)로 육신이 부활받는 구워이 이루어진다는 얼토당토 않는 샤머니즘적 祈福宗敎(기복종교)를 말한 것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만이 唯一(유일)하게 하나님 나라에 들수 있는 救援(구원)의 길이라는 靈聖回復(영성회복)의 깨달음의 眞理信仰(진리신앙)을
죽으면 썩어 문드러질 몸뚱아리가 復活(부활)하여 變化(변화)된 肉身(육신)으로 하늘 나라에서 永生(영생)한다는 祈福信仰(기복신앙)인 샤머니즘 신앙으로 떨어뜨린 것이 바로 바울의 贖罪敎理(속죄교리)의 신앙이다.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의 참 알곡인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바울은 알곡과도 너무나 恰似(흡사)한 가라지라고 할 것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읽혀지고 있는 세상의 모든 성경이 바로 바울교리 一色(일색)의 성경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고 모든 교회들이 이 贖罪(속죄)와 復活(부활)의 교리에 빠지고 갇혀 自我(자아)인 몸뚱이의 生中(생중)과 死後(사후)의 복을 구하는 祈福(기복)의 祭祀宗敎(제사종교)와 儀式(의식)의 종교인 샤머니즘(미신)의 종교로 떨어져 數千數萬(수천수만)의 聖徒(성도) 모으기와 성전 불리기에만 눈알이 뒤집혀 外形的(외형적)으로만 雄壯(웅장)하고 으리번쩍하게 肥大(비대)해지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교회 모습의 현실인 것이 사실이다.
무엇이던지 지나치게 커지면 문제가 불거지는 법이다.
이것을 한마디로 한 것이 念佛(염불)엔 마음이 없고 잿밥에만 마음이 가 있다는 이 말 한마디가 切妙(절묘)한 말이라 할 것이다.
예수님 이 죽기까지 一貫(일관)되게 가르치신 말씀이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하나로 성령으로 거듭남만이 영적인 부활로 구원받아 하나님 나라에 든다는 이 한말씀인데
이 걸 바로 알아 듣질 못한 바울과 바울파의 속죄대속의 교리가
신약성경 27권이 정경으로 확정되는 공의회에서 정경편찬 위원들에게 절대적인 영향력을 끼침으로써
예수님의 가르침인 靈聖信仰(영성신앙)이 온전하게 담긴 영성주의파의 도마복음서며 나그함마디의 문서인 Q문서들은 하나같이 쏙 다 빼버리고 마태.마가.누가.요한복음인 4복음서에서도 영성에관한 文脈(문맥)은 속죄 대속의 바울교리의 文脈(문맥)으로 모조리 再編集(재편집)을 하였고 신약 27권중 바울이 쓴 서신이 14권이나 정경을 차지하게 된 것으로 이루어진 것이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一劃一點(일획일점)도 無誤謬(무오류) 하다며 盲信(맹신)하며 보고있는 성경의 실체임을 알아야한다.
基督敎(기독교)가 正式(정식)으로 公認(공인)되고 세상에 宣布(선포)된 것이 313년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에 의해서 니케아 공회를 거쳐 이루어진 것이다.
新約聖經(신약성경) 27권이 正經(정경)으로 最終確定(최종확정)되어 발표된 것은 367년 알랙산드리아 주교인 아타나시우스가 발표한 것인데
이 아타나시우스가 바로 바울의 代贖信仰(대속신앙)의 贖罪敎理(속죄교리)에 완전히 深醉(심취)해있던 바울파의 核心的(핵심적)인 인물이었다고 한다.
해서 正經(정경)에서 除外(제외)시킨 예수님의 영성깨달음의 신앙의 참말씀인 진리의 살아있는 말씀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도마복음서와 Q복음서등은 外經(외경)으로 내쳐져서 모조리 불태워 버리라는 經典焚書(경전분서)의 돌이킬 수 없는 대 慘劇(참극)이 바로 바울과 아타나시우스란 주교에 의해서 벌어진 일인 것이다.
이게 窮極的(궁극적)으로 무엇을 말하는가하면 이때 성립된 新約聖經(신약성경)의 정경이란 것이 예수님의 이름만 간판으로 걸어놓고 內容的(내용적)으로는 바울의 교리신앙을 洗腦(세뇌)시키는 그야말로 羊(양)의머리를 가게 앞에 내다 걸어놓고 막상 파는 것은 양고기가 아니라 개고기를 양고기로 속여 판다는 羊頭狗肉(양두구육)의 짓거리와 같은 것이라 할 것이다.
聖經(성경)은 一劃一點(일획일점)의 한 말씀도 誤謬(오류)가 없다는 것을 無條件(무조건) 믿으라는 말이 바로 바울의 贖罪敎理(속죄교리)에 便乘(편승)한 바울 追從派(추종파)의 말임을 알면 터무니없는 盲信(맹신)에 洗腦(세뇌)된 샤머니즘적 허수아비 신앙의 긴잠에서 깨어나게 될 것이다.
이 글을 보면서 발칵하고 버럭 血壓(혈압)이 오른다면 이들은 다 예수님의 참가르침에서 멀리 있는 자들로 자기 욕심으로 偶像(우상)을 믿는 허수아비요 바울 교리에 奴隸(노예)가된 꼭두각시들임을 스스로 自認(자인) 한다는 證票(증표)가 될 것이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고 믿는다면 내 생명도 하나님 뜻에 다 맡기신 예수님처럼 하나님 앞에 아들노릇 바로 하기만 바랄 일이지
이 것 하나말고 아무런 바람도 없어야 하나님을 섬기고 믿는 것임을 바로 알아야한다.
그런데 무슨 몸뚱이 욕심을 말끔히 벗어던지질 못하고 그 썩어질 몸뚱이 욕심을 위해 橫說竪說(횡설수설)하고 눈물 콧물 찔찔 짜다못해 千年王國(천년왕국)에서 變化(변화)된 肉身(육신)을 입고 몸뚱이로 永生(영생)까질 하겠다며 鬼神(귀신)이 방귀끼는 헛소리까질 한단 말인가.
예수님의 말씀을 한마디로 딱 줄이면 몸나와 마음나인 거짓나의 自我(자아=ego)를 이겨 없애고 無我(무아)가 되라는 말씀인데 이 걸 다 못알아 들어서 그런것이 아니겠는가
붓다님의 八萬四千(팔만사천) 法文(법문)말씀도 한마디로하면 生滅滅己(생멸멸기=나고죽는 나를 죽임)로 滅我(멸아=나를죽여 없앰)이니 예수님 말씀과 똑같은 말씀이다.
老子(노자)님의 無我(무아) . 莊子(장자)님의 無己(무기) . 孔子(공자)님의 克己復禮(극기복례)에서의 極己(극기). 孟子(맹자)님의 存其心養其性(존기심양기성)에서의 心(심)과 性(성)도 다 하나로 自我(자아)를 죽이고 克己復禮(극기복례)하여 無我(무아)가 되라는 말씀을 하신 것으로는 같은 한말씀이다.
붓다님. 예수님. 노자님. 장자님. 공자님.맹자님이 몸사람으로서의 個體(개체)인 自我(자아0로는 서로 다른 존재였지만 하나님 성령의 얼로 거듭난 靈我(영아)인 얼의 나로서는 다같은 하나님의 성령의 얼로 같은 한얼이기에 살아온 時代(시대)와 地域的空間(지역적공간)과 몸뚱이인 個體(개체)와는 關係(관계)없이 똑같은 하나님의 말씀들을 하신 것임을 알아야한다.
이 걸 알려면 聖經(성경)도 佛經(불경)도 道德經(도덕경)도 장자도 儒敎經典(유교경전)인 四書五經(사서오경)도 진리의 단물이 나오도록 韋篇百絶(위편백절)이 되도록 먹고 또 먹어볼 일이 아니겠는가
얘수님 말씀만 유일한 絶對眞理(절대진리)가 아님을 아는 靈眼(영안)을 하나님이 내 생각속에 일깨워 주시는 때가 오는 것을 스스로 놀라 알게 될때가 있음을 저절로 아는 깨침의 瞬間(순간)이 환하게 빛으로 드러나는 성령 거듭남의 體驗(체험)을 맛보는 귀하고도 귀한 거듭남인 깸의 때가 오는 법이다.
하나님의 진리는 사람의 머리로서 하는 學問的(학문적)으로 窮究(궁구)하고 공부를 한다고 해서 다 되는 것이 아니고
工夫(공부)를 說或(설혹)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自我(자아)에 밑뿌리를 둔 공부라면 죽을때까지 공부를 한다해도 학문은 될 수가 있을진 몰라도
하나님의 참진리를 證得(증득)하는 성령 거듭남의 깨침의 체험은 그 냄새도 맡을 수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할 것이다.
알곡과 너무나도 恰似(흡사)한 가라지는 될지언정 하나님의 참아들인 알곡은 될 수가 없다는 것을 如實(여실)히 證明(증명)해주는 것이 바로 바울의 贖罪敎理(속죄교리)에 의한 代贖信仰(대속신앙)이 그 좋은 證擧(증거)라 할 수가 있다.
예수님이 예수님 당시의 살아있던 사람에서 과거에 죽었던 모든 사람과 앞으로 태어나서 살아갈 미래의 모든 人類(인류)들의 原罪(원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하나님께 代贖(대속)의 贖罪祭物(속죄제물)로 십자가에 못박혀 피와 물을 한방울 남김없이 다 쏟으시고 내죄 때문에 대신 죽어짐으로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사로 인해 현재. 과거 미래의 모든 인류의 원죄가 다 赦(사=용서)함을 받고 救援(구원)의 恩惠(은혜)를 하나님으로부터 받는다는 것이 바울의 속죄대속구원의 교리이다.
바울이 말한 이 교리데로 이 사실을 믿으면 구원을 받고 믿질 않으면 구원을 받질 못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가르침엔 무슨 교리가 있었던 것이 아니다
마태복음 5장 17절 말씀에서 예수님이 말씀 하시길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廢(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려 온 것이 아니요 完全(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하였다.
예수님은 유태교에서 행해져오던 대속제물로 무수한 짐승들이 죽임을 당하고 그 짐승의 붉은 피에 죄지은 사람의 죄를 대신 轉罪(전죄)하여 燔祭壇(번제단)에 올려 제사 지내던 형식과 의식의 가증스런 샤머니즘적 제사를 革破(혁파) 하시고 예루살렘 성전을 廓淸(확청) 하심으로서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靈聖禮拜(영성예배)를 가르치신 것으로 인하여 當時(당시) 유태교의 宗敎指導者(종교 지도자)들인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로 이루어진 대제사장과 서기관과 律法學者(율법학자)들로부터 異端(이단)으로 몰려 십자가에 못박혀 죽이심을 당하신 것임을 분명히 알아야 함이다.
하나님의 選擇(선택)받은 하나님의 유일한 子孫(자손)들로 하나님을 믿고 섬긴다는 유태인들에 의해서 예수님이 排斥(배척)을 받아 異端(이단)으로 烙印(낙인)을 찍어 죽음으로 처단한 자들이 바로 當時(당시)의 宗敎旣得權勢力(종교기득권세력)자들인 것이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고 죽기까지 목숨을 다하여 섬기신 섬김의 信仰(신앙)은 우리도 죽기까지 예수님의 신앙을 목숨 걸고 행하고 배우며 따라야 할 것이다.
또한 예수님은 그동안 祖上(조상)들이 행해오던 外飾的(외식적)인 모든 儀式(의식)과 儀禮(의례)를 갖추어 犧牲祭物(희생제물)로 華麗(화려)하고 繁雜(번잡)하게 드리던 燔祭祭祀(번제제사)의 禮拜(예배)를 假飾的(가식적)이고 可憎(가증)스럽고 外飾的(외식적)인 것이라며 이를 다 걷어치우시고 革破(혁파) 하시고 성령의 깨달음으로 靈的(영적) 거듭남인 靈性(영성)으로 드리는 神靈(신령)과 眞情(진정)의 冥想(명상)의 祈禱禮拜(기도예배)를 드리기를 따르는 愛弟子(애제자)들마저도 저만치 두신채 늘 홀로 한적한 곳에 가셔서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던 것이다.
예수님이 가르치시고 說破(설파)하신 聖靈(성령) 거듭남의 말씀에 비추어 보면
바울 자신이 정립한 贖罪代贖敎理(속죄대속교리)의 信仰敎理(신앙교리)를 正當化(정당화) 하기 위하여 예수님의 誕生說(탄생설)을 童貞女(동정녀)의 聖靈孕胎說(성령잉태설)을 假工(가공)으로 꾸민 것이나
예수님의 肉體復活說(육체부활설)을 導入(도입) 한 것이나
예수님을 하나님이라고 稱(칭) 한 것을 볼때
바울의 신앙은 예수님의 靈聖信仰(영성신앙)을 아예 내용적으로는 바울교로 변질시킨 것이고 내세운 이름만 예수님을 팔아먹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할 것이다.
해서 넓은 의미에서는 바울의 贖罪敎理信仰(속죄교리신앙)은 몸뚱이 나와 마음의 나인 自我(자아)로서의 복된 삷과 救援(구원)에 촛점이 맞추어진 祈福中心(기복중심)의 유태인들의 祭祀宗敎(제사종교)와 별반 다를 것이 없다 할 것이다.
성경 누가복음 8장 20절서 21절 말씀에 있기를
『누가 告(고)하되 당신의 모친과 동생들이 당신을 보고자 밖에 섰나이다 하니
예수께서 말씀 하시기를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이 사람들이니라 하시니라 』하였고
이 말씀과 같은 말씀이 마태복음 12장 47절서 50절에도 있기를
『한 사람이 예수께 말하길 보소서 당신의 모친과 동생들이 당신께 말하려고 밖에 섰나이다 하니
말하던 사람에게 대답 하시길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 하시고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가라사대 나의모친과 나의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兄弟(형제)요 姉妹(자매)요 母親(모친)이니라 하시더라 』하였다.
이 말씀에서 얘수님의 사람 보시는 기준이 血肉(혈육)으로 낳아준 엄마나 肉親(육친)인 동생이라 해도 몸사람에 그 基準(기준)이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사람 심령 속의 영 속에 있는 하나님의 聖靈中心(성령중심)으로 살고 있는가 아니면 몸뚱이 나와 마음나인 自我中心(자아중심)으로 살고 있는가를 가려서 본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극단적인 말씀임을 알 수가있다 하겠다.
이런 예수님의 말씀과 똑같은 말을 하신 분이 또한 석가 붓다님이시다.
붓다님이 깨달음을 이루시고 처음으로 아버지 슈도다나 정반왕을 만났을때
오 내 아들아 너는 어이하여 샤카족의 왕자로서
네 아비가 이 나라의 왕으로 있는데 어찌 너는 乞食(걸식)을 하며 거렁뱅이 짓을 하고 다닌다는 말이냐 하시는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붓다님이 하신 대답이
나는 父王(부왕)의 아들이 아니고 붓다 계통의 자손으로
우리 조상은 대대로 이처럼 托鉢(탁발)을 해왔읍니다 하여 정반왕을 깜짝 놀라게 하였던 이 말씀이 바로 예수님의 이 말씀과 같은 말씀인 것이 아닌가.
몸뚱이 血緣(혈연)으로는 내 껍질인 몸뚱이를 낳아주신 분들로서 아버지라하고 어머니라 하지만 정작 몸뚱이 거푸집의 주인인 정신의 속알갱이 靈(영)은 하나님께서 내 심령 깊은 속에 하나님 자신의 성령인 성령의 한점 씨앗을 심어 주셨기때문에
참의 아버지는 하나님이 참아버지이고
몸의 아버지는 하나님 아버지를 찾아가는 길라잡이 역할의 하나의 그림자같은 거짓의 아버지라고 하는 것이
붓다님과 예수님 말씀의 숨겨진 참뜻인 것이다.
붓다님의 이 말씀은
몸뚱이 사람인 血肉(혈육)과 血統(혈통)의 나가 참사람이 아니고 거짓나인 하나의 겉 껍데기의 입고 벗는 겉옷과 같은 것이고
그 몸뚱이 속의 속에 있는 心靈(심령)의 靈(영)인 얼정신이 곧 니르바나님(하나님)이 넣어주신 佛性(불성)의 참나로 永生(영생)하는 남도 죽음도 없는 永遠(영원)한 생명이라는 것을 말씀 하시는 것으로써
영적으로 보았을때는
몸뚱이를 낳아주신 몸의 어버이도 또한 몸을 뒤집어쓴 거짓의 아버지이고
참아버지는 니르바나님(하나님)이라는 말을 이렇게 나타내신 것이다.
이 말씀이 그렇다고 몸의 부모를 함부로 무시하고 不孝(불효)해도 된다는 말이 아님은 말할 價値(가치)조차도 없는 것이고
몸의 子息(자식)으로서 몸의 어버이를 마땅히 恭敬(공경)과 精誠(정성)을 다하여 極盡(극진)히 모시고 父母(부모)를 섬김이 子息(자식)의 마땅한 도리이듯이
내 몸뚱이의 주인인 靈魂(영혼)을 내 심령 속에 넣어주신 靈(영)의 아버지이신 하나님도 몸뚱이의 어버이를 섬기듯이 그리 섬기라는 말씀임은 三尺童子(삼척동자)도 다 알일이 아닌가
붓다님과 예수님은 오늘날 말하는 佛敎(불교)니 基督敎(기독교)니 카톨릭이니 하는 그런 어떤 宗敎組織(종교조직)이나 團體(단체)를 만드신 일도 없기에 물론 敎理(교리)도 없었고 오로지 스스로 하나님으로부터 성령 깨침으로 얻으신 眞理(진리)의 말씀을 傳播(전파) 하시는 일에만 몸생명을 다바쳐 자신들의 깨달음으로 증득한 하나님의 절대진리를 모든 사람들도 다 자신들처럼 진리를 깨치고 성령으로 거듭나기를 바라는 한마음으로 말씀을 설파하신 한알의 밀알같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아들들임을 알아야한다.
해서 예수님은 자기가 가고나면 保惠師(보혜사) 성령에게 가르침을 받으라 했고
붓다님은 각기 스스로에게 있는 다르마의 法燈明(법등명). 自燈明(자등명)에 의지할 것이지 절대로 다른 것에 의지하질 말라고 하셨던 것이다.
붓다님이 말씀하신 다르마의 법등명 자등명이란 것이 곧 모든 사람의 심령 안에있는 佛性(불성)을 말하는 것으로 이는 예수님이 말씀 하신 보혜사 성령의 가르침을 받으라는 말씀과도 같은 말씀의 다른 표현인 것이다.
몸뚱이는 살만큼 살았으면 죽자고 생긴 것이
하나님이 攝理運行(섭리운행) 하시는 宇宙自然(우주자연)의 절대적인 秩序(질서)인 것을 모르니까
몸뚱이란 껍질을 뒤집어쓴채 자꾸 영생을 하고 살고싶다는게 어리석고 생각이 덜자란 蒙昧(몽매)한 인간들의 虛妄(허망)한 몸뚱이 욕심에 執着(집착)하는 그마음들이 참으로 惻隱(측은)한 일들이 아닌가
매미가 허물을 벗고
뱀이 허물을 벗을수록 그들의 몸뚱이가 자라고 커지듯이
우리 사람이란 몸이란 허물 껍질이 죽음을 맞아 강제로 벗어지기까지 몸나와 마음나인 自我(자아)에 종질하는 얼빠진 정신으로 살 것이 아니라 이 몸껍질을 하나님이 살리시는동안 내 스스로 이 몸나와 마음나인 자아의 껍질을 내 심령 속의 속에있는 하나님 씨알 성령의 영인 얼의 성령불로 나날이 태우고 태워버려 몸나의 삶을 벗어버리라는 것이 하나님이 사람을 살리시는 참뜻임을 알아야 함이다.
몸이 있고 돈이 있어 내가 잘났고 내가 잘 사는 것같지만
내가 사는 것이 한순간도 내가 사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한다.
하나님이 나를 살리시는 것임을 안다면 모든 虛勢(허세)와 慾心(욕심)과 驕慢(교만)과 我執(아집)의 헛바람이 터지는 풍선에 바람빠지듯이 한순간에 다 사라져버리고
들숨 날숨간에 늘 感謝(감사)하는 마음이 저절로 充滿(충만)한 삶이 될것이다.
털끝의 끝만큼만이라도 하나님께 바라는 것이 마음에 욕심으로 미적미적 꼬물거리는 미련이라도 남아 있다면
그것은 결국 참믿음을 무너뜨리는 災殃(재앙)과 滅亡(멸망)의 씨앗 種子(종자)를 움틔우는 것이되어 스스로가 罪(죄)의 종으로 먹히우고 말게될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 하나님 아들의 삶을 살 것인가
죄의 종이 되어도 좋으니 몸뚱이 慾心(욕심)과 快樂(쾌락)을 侄宕(질탕)하게 퍼질러지게 滿喫(만끽)하며 죄의 종으로 살 것인가 하는 것은 전적으로 다 자신의 自由選澤意志(자유선택의지)에 의해 갈리워지도록 하나님이 인간에게 許諾(허락)하신 자유의지인 것이다.
이를 바르게 하나님 뜻을 알아채시고 하나님의 참아들들이 되신 분들이 석가 붓다님이고 예수님이고 老子(노자).莊子(장자)님이고 孔子(공자), 孟子(맹자)님이고, 톨스토이님이고 간디님이고 에크하르트님이고 소로우님이고 비노바바베님이고 유영모님이 아닌가
하나님은 이 세상을 미워하는 사람에게 오시지
세상맛과 멋에 醉(취)하고 빠져 이 세상에 執着(집착)하고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절대로 오시질 않는다는 말이 깨침을 이루신분들의 한결같은 말씀이다.
한마디로 몸뚱이 삶을 참살이인 줄 알고 그 몸뚱이 맛과 욕심에 종질하며 感覺的(감각적) 맛과 快樂(쾌락)의 늪과 수렁에 흠씬하게 빠져 허우적이는 짐승살이의 삶에는 하나님이 오시질 않는게 아니라 스스로가 하나님을 찾질 않는다는 것이다.
돌짝밭과 자갈밭과 가시덩쿨 투성이인 엉겅퀴의 쑥대밭도 땀흘려 애쓰며 열심히 돌과 자갈을 캐내고 가시덩쿨을 뿌리채 뽑아내고 엉겅퀴와 쑥대도 자꾸 뽑아내며 開墾(개간)을 하다보면 귀한 沃土(옥토)로 바뀌는 날이 오듯이
우리 사람의 마음밭도 切磋琢磨(절차탁마)의 마음으로 생각의 곡괭이로 파고 또 파다보면 그 속에 심기워 숨겨두신 하나님 성령 씨알의 참나를 캐낼 때가 오질 않겠는가.
이 것을 이루신 분들이 석가붓다님이요 예수님이 아니신가
성경 로마서 8장 6절서 7절에서 바울이 말하기를
『6절:肉身(육신)의 生覺(생각)은 死亡(사망)이요 靈(영)의 생각은 生命(생명)과 平安(평안)이니라
7절: 육신의 생가은 하나님과 怨讐(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法(법)에 屈伏(굴복)치 아니할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하였다.
6절에선 예수님 말씀과 같은 말을 해놓고
7절에선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 법에 굴복칠 아니하고 굴복할 수도 없다는 이상한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그러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하신 말씀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말이 되는 것이다.
또 로마서 7장 22절서 24절에서 바울이 말하길
『22절: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3절: 내 肢體(지체) 속에서 또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도다
24절:오호라 나는 困苦(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하였다
바울 자신 속에 靈(영)의 사람과 肉(육)의 사람 이 둘이 늘 티각태각 熾熱(치열)하게 싸우고 있는데 자기는 육의 사람을 도무지 이길 수가 없어 스스로 곤고하다는 말을 이렇게 告白(고백)한 것이라 하겠다.
바울의 말처럼 사람의 心靈(심령) 속엔 하나님이 넣어주신 하나님 성령 씨알의 영적인 참나가 하나 있고
몸나와 마음나의 自我(자아)인 짐승본능 성질의 獸性(수성)의 나인 貪慾(탐욕)의 불덩어리인 거짓의 나인 또하나의 나가 동시에 사람 속에 있는 것은 사실이다.
붓다님과 예수님은 다 우리와 같이 밥먹고 오줌누고 똥을누고 잠을 자야했던 우리와같은 血肉(혈육)의 사람으로서 생각의 곡괭이로 목숨을 건 一道邁進(일도매진)으로 이 거짓의 나를 캐내서 뽑아 던져버리고 참나인 얼사람 하나님이 주신 본래면목의 하나님 성령 씨알의 정신인으로 거듭나신 것인데
바울 자기는 이게 도무지 사람으로서는 할 수도 없는 일이고 되지도 않는 일이라는 말을 이렇게 한것이다
해서 바울은 예수님을 하나님이라며 하나님의 자리에 올리려고
童貞女聖靈孕胎誕生說(동정녀성령잉태탄생설)을 조작해 예수님의 탄생설을 꾸며냈고
예수님의 肉身(육신)이 십자가에서 죽으신후 삼일만에 다시 復活(부활) 한다는 駭怪(해괴)한 肉身復活說(육신부활설)이란 자신의 헛소리를 성경에 編集(편집)해 넣어놓은 엄청난 誤謬(오류)를 저질러 놓은 것이라 할 것이다.
이 것은 예수님이 말씀하시고 가르치신 聖靈(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靈(영)의 復活(부활)에 정면으로 背馳(배치)되는 말인 것이다.
살아있는사람도 성령으로 거듭나질 못한 사람을 죽은자로 말씀하신 분이 예수님인데 몸이 또 부활한다는 바울의 이 말이야말로 바울 믿음의 核(핵)이 바로 몸뚱이 삶에 있음을 如實(여실)히 드러낸 말이라 하겠다.
성경 누가복음 12장 49절에 예수님 말씀이 있기를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 하였다.
땅에 불을 던지러 왔다는 말이 무엇인가?
여기서 불은 하나님의 성령을 譬喩(비유)로 하신 말씀이다.
세상 사람들 모두의 心靈(심령) 속에 심기워 있는 하나님 성령 씨알의 성령을 사람마다 다 찾아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겠다는 것이 예수님의 이 불을 던지러 오셨다는 말씀인 것이다.
이미 불이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란 말은
하나님 성령의 씨알 성령이 세상 사람들 심령 속에 다 하나같이 참나인 얼의 성령 씨알의 나로 들어 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일깨워 주려고 자기가 왔지만
이미 사람들이 그것의 찾는일에 마음불이 붙었다면 예수님은 더 하실 일이 없다는 것이고
또 자기 속에 있는 씨알 성령의 참나는 다 자기가 스스로 찾는 것이지 예수님이라 해도 대신 해 줄수 없는 일이란 것을 이렇게 말씀을 하신 것이다
그런데, 바울은 이 말씀의 뜻을 전혀 못알아 들었다는 것인지
오호라 이 사망의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하고 恨嘆(한탄)을 한 것이 아닌가
예수님은 하나님의 성령을 물. 불. 빛. 바람.누룩.씨앗으로 譬喩(비유)하여 말씀하신 것은 靈的(영적)귀가 열린자가 알아 들으라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임을 알아야한다.
거듭난 聖靈(성령)이 곧 말씀이고 그리스도고 우리의 참나인 것이고 하나님의 아들인 것이다.
예수님 死後(사후) 예수님의 純全(순전)한 가르침인 하나님의 진리말씀의 靈聖(영성)의 가르침을 그데로 좇는 영성파인 아리우스파는
바울의 교리인 聖三位一體(성삼위일체)론과 代贖贖罪(대속속죄)를 주장하는 바울파의 아타나시우스파라는 두 宗派(종파)가 당시 로마 황제이던 콘스탄티누스 대제때에 極深(극심)한 葛藤(갈등)으로 서로가 正統(정통)이네 異端(이단)입네 하며 티각태각 하던 것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니케아 공의회를 소집하여 정통과 이단을 가리는 공회에서 바울파의 손을 들어줌으로써 이를 싯점으로 예수님의 영성신앙은 排斥(배척)과 彈壓(탄압)의 那落(나락)으로 떨어져버림으로
예수님이 던지러 왔다던 성령의 불길은 미쳐 불붙어 타오르지도 못하고 꺼져버린 것이라 할 수있다 하겠다.
영성파 예수파의 무리들이 다 이단으로 몰리는 宗敎彈壓(종교탄압)을 견디질 못해 地下敎會(지하교회)로 숨어들게 만든 장본인이 바로 바울임을 알아야 함이다.
성경 갈라디아서 1장 8절에서 바울이 말하길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天使(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傳(전)한 福音(복음) 외에 다른 福音(복음)을 전하면 詛呪(저주)를 받을찌어다 』하였다.
여기서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란 바울 자신이 쓴 서신을 말하는 것이고
다른 복음이란
영성파인 아리우스파의 복음을 말하는 것이다.
바울 자신이 써서 각 교회에 보낸 서신을 스스로 바른복음이라 칭하고 이를 믿어야지 된다는 말로
한마디로 예수님의 가르침 말씀인 예수님의 말씀을 전하면 詛呪(저주)를 받는다는 것이 바울의 말이다.
사실 이당시 영성파신앙인들은 영지주의의 그노시스파로 몰려 이단으로 낙인니 찍혀 엄청나게 處刑(처형)을 당했던 것이 역사적인 사실인 것으로 밝혀진 사실임을 알아야 함이다.
嚴格(엄격)히 말하면 예수님은 스스로 성령의 큰 깨달음을 이루어 거듭나신 自律的(자율적)이고 自覺的(자각적)인 깨달음을 證得成就(증득성취) 하신 것이라 영성주의이지 바울이 말한 영지주의의 그노시스파는 아닌 것이다.
성경 마태복음 10장 34절서 38절 말씀에 있기를
『34절:내가 세상에 和平(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和平(화평)이 아니라 劍(검)을 주러 왔노라
35절:내가 온 것은 아들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媤(시)어미와 不和(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36:사람의 怨讐(원수)가 자기 집안 食口(식구)리라.
37절: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合當(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38:또 자기 十字架(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않느니라 』하였다.
몸사람의 생각에서 본다면 이 말씀은 도무지 이상한 말씀으로 생각이 되겠지만
얼사람의 생각으로 본다면 참으로 옳고 시원하신 말씀임을 알게된다 할 것이다.
무슨 말인가 하면
예수님은 聖靈(성령)으로 거듭나질 못한 사람은 몸뚱이가 펄펄하게 살아 있는 사람도 아예 죽은 사람이라 하신 마태복음 8장 22절의 말씀에서 보듯이
몸사람은 살아있는 사람도 죽은 屍體(시체)와 같이 同一時(동일시)하신 것이
몸사람은 허락하신 동안만 살다가 때가 다하면 죽고 썩어 없어질 물질로된 거짓의 나이고
하나님 성령 씨알로 거듭난 얼사람인 참나의 精神(정신)인 靈我(영아)의 얼의 나가 하나님의 아들로 참나라는 말씀을 이렇게 말씀하신 것임을 알아들어야 함이다.
하나님이 사람의 心靈(심령)에 하나님 자신의 씨알 성령을 넣어주신 것을 사람들이 스스로 깨달아 찾는 일에 가장 걸림이 되는 것이 바로 내 가장 가까이에 늘 존재하는 血緣(혈연)으로 이어진 집안 食口(식구)인 피붙이 이웃이 내가 하나님이 내게 주신 하나님의 성령인 참나로 거듭나는 일에 발목을 잡아채고 세상 삶에 옭아매는 올무같다는 말씀이 이 말씀이다.
血緣(혈연)으로 이루어진 내 몸도, 내 아비도, 내 어미도,형도 姉妹(자매)도 집안 식구인 모두가 다 내게는 가장 가까눈 몸사람들이고 서로 몸사람의 본능적 짐승성질의 자아로만 보면 天倫(천륜)의 關係(관계)이지만 그러나 이 것은 몸사람인 거짓나의 관계성에 지나지 않을뿐이라는 것을 아울러 일깨워 주시는 말씀임을 생각해야한다.
사람이 몸사람으로만 살다가 죽어 끝나버린다면
얼사람인 참나의 생각에서 보면 이 것은 暫時(잠시) 잠속에서 한바탕 꿈꾸다가 깨는 꿈처럼 허망하기 그지없는 幻像(환상)같고 그림자같은 것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내게 몸 生命(생명)을 許諾(허락) 해주시는 그 생명의 시간이란 瀑泡(폭포)에서 마지막 생명의 시간이 뚝 떨어지기 전에 어서 속히 너 자신 속에 있는 참나를 찾는 일에 마음의 눈을 번쩍 뜨라는 메시지를 이렇게 네 가족이 바로 네 원수라는 極端的(극단적)인 비유의 말씀을 하신 것임을 알아야 함이다.
석가 붓다님의 出家(출가)가 바로 이 것을 證明(증명) 해주는 것이듯이
그러나 우리는 비록 家族(가족)과 더불어 사느라 心身出家(심신출가)인 맘,몸의 同時出家(동시출가)를 말끔하니 못할찌라도
마음 출가는 해야 한다는 것이 아닌가.
마음 출가가 무엇인가!........
삶의 全目的(전목적)과 價値(가치)를 세상 사랑과 몸뚱이 욕심과 마음 욕심의 삶을 살던 삶에서
하나님 성령 씨알의 靈(영)인 얼나의 精神(정신)인 참나요 하나님의 아들인 삶으로 옮기는 것이 바로 心出家(심출가)인 마음 출가인 것이다.
이 것이 하늘에 흘러가는 구름처럼 눈에 暫時(잠시) 보이다 없어질 物質(물질)에서
보이진 않으면서도 永遠(영원)한 生命(생명)으로 남도 죽음도 없이 永生(영생)하는 얼의 나인 정신의 참나요 하나님의 아들로 깨어나는 聖靈(성령)의 거듭남인 것이다.
農夫(농부)가 밭에 씨를 뿌리듯이 靈(영)이신 하나님 아버지가 이 세상에 자신의 永生生命(영생생명)인 聖靈(성령)의 씨앗 種子(종자)를 사람의 心靈(심령) 밭에 뿌려 넣어주심을 알면
밭에 뿌려진 씨앗이 땅에 먹혀 썩어질 것이 아니고 씨앗 스스로가 땅의 氣運(기운)을 먹고 자라나야 하듯이
사람도 우리 心靈(심령) 밭에 뿌려진 하나님의 씨알 성령이 몸뚱이에 먹혀 종질로 떨어져 몸뚱이의 탐욕심을 파먹는 버러지같은 존재로 살다가 끝낼게 아니고
하나님의 씨알 성령이 貪慾心(탐욕심)의 뭇雜草(잡초)와 엉겅퀴 투성이인 몸뚱이란 밭을 말끔히 다 먹고 이기어 하나님의 참아들로 다 한점 흠없이 자라나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내피를 먹고 내가 내 살을 먹는다는 懇切(간절)하고 切切(절절)한 渴急(갈급)한 목숨을 건 精眞(정진)과 祈禱(기도)로 내 마음밭을 自我滅盡(자아멸진=자아를 말끔히 죽임)이 될때까지 갈아엎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하늘에서 비를 내리실때 선한자 악한자 미운자 고운자 비가 필요한자 비가 불필요한자에 구분없이 고루 두루 그냥 다 비를 주시듯이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인 성령도 사람이면 다 그 심령밭에 씨알 성령을 播種(파종)해 주셨는데
사람이 그 주신 씨알 성령의 참나로 거듭나고 안나고는 하나님의 間涉(간섭)으로 決定(결정)되는 것이 아니고
오로지 사람 각자의 自由意志(자유의지)로 取捨選擇(취사선택) 하도록 전적으로 맡기신 것임을 생각해야한다.
우리 사람들은 다 몸뚱이가 참나인 줄 알고 살아서 몸뚱이 사는 맛과 멋에 취하고 깜빡 속아서 살아가지만
예수님은 이게 아니고 우리 사람의 몸뚱이는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인 성령의 씨앗이 播種(파종)된 밭같은 것이 사람의 몸뚱이로써
사람이라면 자신의 몸뚱이 생명을 하나님이 播種(파종) 해주신 성령 씨알을 스스로 싹을 틔우고 키워내는 거름 역할을 堪當(감당)하는 밭으로써의 삶을 살고자 스스로의 피와 살을 먹는다는 精神(정신)으로 사는 精神人(정신인)의 삶이 참 살이의 삶이고 하나님이 사람을 살게 해주신 하나님의 참뜻이며
이렇게 사는 것이 하나님 아들이 되는 삶의 길이며 또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이라는 것을 가르치신 것이 예수님 가르친 말씀의 核心(핵심)임을 알아야 한다.
人生奇一世 奄忽如飇塵(인생의일세 엄홀여표진)이란 古詩에 있거늘
사람으로 태어나서 한평생 의지하고 살아가는 이 세상의 인생 살이라는 것이
홀연히 한순간에 일었다가 흩어지는 狂風(광풍)에 흩날리는 티끌먼지와 같다 하였다.
이 것은 사람의 몸뚱이 삶이 그렇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 것을 더 極明(극명)하게 알아챈 隱逸詩人(은일시인) 陶淵明(도연명)의 詩 歸去來辭(귀거래사) 일부를 살펴보면
1.歸去來兮(귀거래혜) 田園將蕪(전원장무) 胡不歸(호불귀)라 하여
돌아가자꾸나! 전원이 荒蕪地(황무지)로 되어가고 있으니 어찌 아니 돌아갈 것인가 하였다.
이 것은 몸뚱이 삶에 연연하여 내키질 않는 지방의 末端(말단) 公職(공직)도 꾸역꾸역 참으며 살았던 지금까지의 헛껍데기의 삶으로 荒廢(황폐)해져가는 내 마음밭을 더이상 모른체하고 마냥 몸뚱이 살림에 종질하고 사는채로 내가 빠져서 허우적일 수가 없으니 이젠 내 본래 면목인 하나님이 주신 天性(천성)으로 돌아가겠다는 自省(자성)의 말을 도연명은 이렇게 말한 것이 아닌가한다.
여기서 田遠(전원)이란 도연명의 시골 고향에 있는 논밭과 딋동산도 되겠지만 도연명은 이 전원을 자신의 마음밭을 빗대어 말한 것임을 두번째 聯(연)을 보면 明確(명확)히 알 수가 있다.
2.旣自以心爲形役(기자이심위형역) 奚惆悵而獨悲(해추창이독비)라 하여
지금껏 살아 온 것이 이미 내 마음으로 내 정신을 몸뚱이의 종으로 부리며 살아 왔거늘 어찌 슬퍼하고 한탄하며 사는 것이 유독 나만의 슬픔 이겠는가라 하였다.
자기 정신이 자기의 몸뚱이의 부림을 받는 그런 버러지만도 못한 삶을 살았음을 스스로 깨쳐 알았다는 고백이다.
세상 모든 다른 사람들도 다 내같은 삶과 별반 다름없이 하늘이 부여한 양심에 늘 찔림과 갈등속에서 二律背反的(이율배반적)으로다들 그럭저럭 살아가는게 일반일 것이라는 말이기도 하다.
3.悟已往之不諫(오이왕지불간) 知來者之可追(지래자지가추)라 하여
이미 지나버린 내 잘못된 삶은 흘러 가버린 물같은 것이라 공연히 내 속으로 티각태각 갈등해봤자 소용 없음을 깨달아 알았으니 앞으로의 삶은 바른 삶을 추구하는 것이 옳다는 것이 가능함을 알겠노라 하였다.
4.實迷途其未遠(실미도기미원) 覺今是而昨非(각금시이작비)라 하여
사실 솔직히 말해서 내가 인생 길을 잃고 迷惑(미혹)하여 갈팡질팡 헤매기는 했지만 아직은 그렇게 돌이킬 수 없을만큼 遙遠(요원)하게 멀어진 것은 아니니 지금이라도 깨달아 迷夢(미몽)에서 깨어났으니 지난 삶이 옳지못한 헛다릴짚은 헛삶이었음을 깊이 깨닫는구나 하였다.
이시에서 보듯이 도연명이라는 詩聖(시성)이 자기 내면에 있는 造物主(조물주)가 주신 天性(천성)을 따라 아무런 욕심이 없이 사는 것이 바른 삶이고 정신이 몸뚱이에 빌붙어 종질하는 삶은 헛된 삶이라는 것을 깨우친 것임을 如實(여실)히 드러내었다고 하겠다.
그래서 귀거래라 하여 하나님이 주신 천성의 나인 본래면목의 참나인 하나님의 아들로 돌아가리한 悟道頌(오도송)이라 할 명시를 남긴 것이다.
이제 本文(본문) 말씀인 노자님의 말씀을 살펴보자
1.知人者智(지인자지)라 하여
사람을 아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라 하였다.
누구나 할 수 있는 평범한 말같지만 老子(노자)님의 이 말씀이 예수님 말씀과 한 저울에 달아도 한치도 다름이 없을 참으로 귀하고 소중한 하나님의 말씀을 노자님의 심령을 통해서 하나님이 노자에게 하게 하신 말씀이라 할 것이다.
여기서 사람을 안다는 말은 겉貌樣(모양)인 사람의 몸 껍데기 얼굴 낯짝이나 알고 그 마음 심보를 斟酌(짐작)으로 가늠해 안다거나 죽고 못살기로 친하고 사랑한다고 하는 그런 形而下(형이하)의 물질적인 지린내 나고 구린내 나는 앎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란 하나님의 영원한 生命根原(생명근원)인 하나님 성령 씨알이 심기워 있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될 씨앗의 種子(종자)라는 말이 사람을 아는 사람이란 말씀의 참뜻인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사람이란 여늬 짐승들과 마찬가지로 짐승성질의 貪婪心(탐람심)인 三毒(삼독)의 獸性(수성)이 함께 사람의 본능으로 존재하는 짐승이라는 뜻도 함께 內包(내포)된 존재라는 것을 아는 것이 사람을 아는 사람이란 말씀의 뜻이기도하다.
이게 무슨 말인가하면
사람은 胎生的(태생적)으로 몸나. 마음나. 靈我(영아)인 얼의나 이렇게 세겹의 나가 동시에 한사람 속에 존재를 한다는 말이고
다른 말로하면 몸나와 마음나인 自我(자아)의 한사람과
하나님 성령 씨알의 靈我(영아)인 정신의 얼나가 한사람 있어 동시에 한사람 속에 두겹의 나가 兩立(양립)한다는 사실이다.
해서 몸나와 마음나인 자아의 오로지 나만 고집하는 이기적인 나는 영아인 얼의 나를 담고 있는 하나의 그릇에 불과한 겉 껍데기로서 거짓의 나라는 말이고
하나님 성령 씨알의 나인 영아로 얼의 나인 정신의 나는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 씨앗의 나로 하나님의 아들인 참나라는 말이다.
이 것을 아는 것이 바로 老子(노자)님이 말씀하신 사람을 아는 사람이라는 말씀의 참뜻이라 할 것이다.
이 걸 아는 사람이 참으로 智慧(지혜)로운 사람이라는 말씀인 것이다.
나는 겉모양으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는다는 예수님의 말씀과 똑같은 말씀이 아닌가
2.自知者明(자지자명)이라 하여
자기 자신을 아는 사람이 밝은 사람이라 하였다.
내가 무슨 性氏(성씨)의 아버지 어머니의 몇째 子息(자식)이고 윗대 祖上(조상)님들의 몇대 子孫(자손)이고 뭐 이런 몸사람으로써의 血緣係譜(혈연계보)를 아는 앎을 말하는 것도 아니고
내가 무슨 무슨 학교를 나오고 마지막엔 하바드 대학에서 博士學位(박사학위)를 받은
보기드문 明晳(명석)한 頭腦(두뇌)를 가진 전인류적 寶物及(보물급) 인물이고라는 등의 그런 病的(병적)인 自負心(자부심)의 앎도 아니다.
사람도 生態學的分類(생태학적분류)에 의하면 嚴然(엄연)한 動物(동물=짐승)로 분류가 되어있다.
이런 學術的(학술적)인 앎을 말하는 것은 物論(물론) 아니다.
그렇다면 老子(노자)님의 이 말씀의 뜻은 무엇인가
이 것은 앞의 말씀인 知人者智(지인자지)를 자기 삶에서 實踐(실천)하는 행함의 앎을 말하는 것이라 할 것이다.
자신은 자기가 생각해도 짐승보다 훨씬 못한 삶을 살면서도 다른 사람이 자기더러 에이 짐승만도 못한사람 이라고 말한다면 다들 좋아 할 사람은 한사람도 없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는 다 이 짐승 部類(부류)의 한 種(종)이라는 것이고 실제 사람의 밑모르는 貪慾心(탐욕심)의 불길로 타는 利己的(이기적)인 慾心(욕심)의 마음은 說或(설혹) 세상을 통채로 다 깔고 앉는다해도 足(족)함을 모르는 것이 우리 사람이란 존재들로써 오히려 여늬 짐승들의 짐승성질은 比較自體(비교자체)가 안될만큼 엄청난 짐승성질을 부리며 살아가는 것을 결코 否定(부정) 할 수 없는 것이 우리 사람이란 짐승들인 것이라 할 것이다.
내 속에 이런 獸性(수성)의 짐승성질인 貪.嗔.痴三毒(탐.진.치삼독)이 불타고 있는 짐승몸과 짐승마음의 나인 自我(자아)의 나가 한사람 있다는 것을 認定(인정)하고 아는 것과
이런 짐승성질의 나만 있는게 아니고 동시에 하나님 성령 씨알이 심기워져 있는 靈我(영아)인 얼의 나가 한사람 또 있다는 것을 알아서
이 것을 克己復禮(그기복례)하여 몸나와 마음나인 自我(자아)인 거짓나로 살던 짐승살이를 말끔히 淸算(청산)하고
하나님 성령이 심기운 얼의 나인 精神人(정신인)의 참나를 回復(회복)하여 하나님의 아들로 올곧고 떳떳한 삶을 사는 사람으로 돌이킴을 실천 할 줄 아는 앎을 말씀하신 것이 老子(노자)의 自知者明(자지자명)이란 말씀의 뜻이라 하겠다.
明(명)이라 하여 밝다는 것은
빛의 삶을 사는 빛의 자녀의 빛같이 환하고 밝은 삶을 말하는 것이다.
장자끄 루소의 참회록에 있기를
『어떤 때는 얼음처럼 싸늘하게 冷情(냉정)하다가도 바로 다음 순간 나는 또 歡樂(환락)과 慾情(욕정)에는 불같이 뜨거운 불길에 녹아버린다.
어떤 때는 얼음 어떤 때는 불꽃
세상에 어떤 카멜레온도 나같지는 않을 것이다.
도대체 이런 나는 무엇이란 말인가
中略(중략)........
사람은 누구나 너나 없이 자신의 눈길을 밖으로 돌리기에 바빠서 자신을 돌아볼 겨를이 없다.
그러나 사람이 자기 자신을 돌아보기 시작하면 자기의 얼사람을 찾게되고 그리하면 자신을 알게되고
자기의 할 바와 안할 바를 알아서 저절로 자기가 자기를 다스리는 존재가 되어 비로소 사람으로써의 참 자유를 알게된다.』하였다.
루소의 이 말도 노자님의 이 말씀과 같은 脈絡(맥락)의 말씀이라 하겠다.
3.勝人者有力(승인자유력)이라 하여
다른 사람을 이기는 사람이 힘있는 사람이다 하였다.
여기서 힘이란 물론 몸뚱이 육신의 힘을 말하는 게 아니고 소년 다윗이 거인 골리앗을 돌팔매로 제압했듯이 그런 智慧(지혜)의 힘을 말한다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이기는 사람이란 말속에는
弱肉强食(약육강식)이란 짐승들의 법칙인 嗔性(진성)이 사람에게도 똑같이 작용하는 짐승本能(본능)이 있다는 것을 드러낸 말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이 세상에 나와 살게하신 참뜻은
서로 자기의 이기심을 위해 優劣(우열)을 다투며 할퀴고 물어뜯고 짓뭉개어 밟고 貶下(폄하)하여 깔보고 侮辱(모욕)하고 謨陷(모함)하고 없신여기어 깔아 뭉개고 甚至於(심지어)는 죽이기까지를 서슴칠 않으며 싸우라고 이 세상에 내놓으신 것도 결코 아니고
또 몸뚱이 욕심에 질탕하게 취하여 그 몸뚱이의 맛과 멋을 핥아먹는 맛을 즐기느라 눈알이 뒤집히도록
理性(이성)과 倫理(윤리)와 道德(도덕)은 고사하고 一末(일말)의 良心(양심)마저도 몸뚱이 맛에 쉼없이 풀무질을 해대는 感覺的快樂(감각적쾌락)의 불길에 다 타버렸는지 오로지 한마리 미친 짐승처럼 내 몸뚱이 파먹고 남의 몸뚱이까지 파먹으며 肉情(육정)의 감각과 맛의 쾌락을 즐기는 것만이 인생인 줄 알고 살으라고 이 세상에 내놓으신 것도 결코 아니다.
몸사람으로는 서로가 一面識(일면식)도 없어 모른다고 하더라도
이 지구촌의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성령 씨알이 심기워진 존재로써는 다같은 하나님의 자녀로써 한 兄弟(형제)요 姉妹(자매)인 것이다.
한 형제요 자매인데 왜 싸우고 뭘 싸우고 또 무엇을 이긴다는 말인가.
인류의 역사가 통채로 다 싸움과 戰爭(전쟁)의 역사이지 다른 것이 아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같이 사랑하라 』는 마태복음 22장 39절의 예수님 말씀의 제 1 戒命(계명)이 뜻하는 것이
바로 地球村(지구촌)의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의 자녀로 한 형제 자매라는 말로 서로 慰勞(위로)해주고 이해해주고 세워주고 아껴주고 配慮(배려)하고 보듬어주며 서로 서로 내몸 사랑하듯 형제 자매를 진정으로 가슴에서 우러나는 따스한 맘으로 사랑하라는 말씀인 것이다.
말로는 共感(공감)을 한다면서도
이 刻薄(각박)하고 險難(험난)한 세상에서 나하나 살기도 힘들고 내 가족 챙기기도 버거운데 무슨 얼어죽을 이웃까지 사랑 어쩌구 하다니 하며 혼자 속으로 중얼거린다면 이런 사람은 비록 母胎(모태) 信仰人(신앙인)으로 至今(지금)까지 信仰生活(신앙생활)을 한다고 할지라도 아직까지 몸뚱이에 붙은 사람이고 예수님의 이 말씀을 머리로만 알아들은 사람일뿐일 것이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몸뚱이란 옷을 입은 거짓나인 이 몸뚱이 나와 마음 나에 붙은 利己的(이기적)이고 貪慾的(탐욕적)인 짐승성질의 나를 벗어버리고 하나님이 주신 씨알 성령으로 거듭나면
이렇게 살 수 있다는 말씀임과 동시에
아는 것으로 滿足(만족)하질 말고 하나님의 자녀는 반드시 이렇게 행하는 행함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씀인 것이다.
4. 自勝者强(자승자강)이라 하여
자기가 자기를 이기는 사람은 굳센 사람이다 하였다.
몸나와 마음나인 自我(자아)의 거짓나를
하나님 성령 씨알의 나인 얼의 나요 참나인 정신의 나에 屈伏(굴복)시킨이가
바로 자기를 이긴 자라는 말로 이런 사람이 되어야만 굳센 사람이라는 말이다.
우리 사람이 참으로 이겨야 할 것은 내 바깥의 어떤 다른 사람들이 아니고 바로 내 안에 잔뜩 我執(아집)의 또아리를 틀고 毒氣(독기)를 뿜어낼 틈만 노리며 웅크리고 있는 毒蛇(독사)처럼 貪.嗔.癡(탐.진.치) 三毒(삼독)의 불덩이를 품고 있는 몸뚱이 나와 마음 나의 自我(자아)인 거짓나인 것이다.
몸나와 마음 나인 自我(자아)란 肉身(육신)의 겉 껍질에 貪着(탐착)한 마음 나를 훌훌히 벗어 던지고 이 걸 시원하고 말끔하게 이겨내신 분들이 바로 하나님의 성령으로 온전히 거듭나신 붓다님과 예수님임을 알아야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믿음 생활을 하는 것은
몸뚱이의 貪慾心(탐욕심)에 빌붙어 그 썩어질 몸뚱이의 썩은 쾌락의 꿀물방울을 빨아먹는 달달하고 짜릿한 맛의 未練(미련)과 慾望(욕망)으로 몸뚱이에 종질하던 그 정신의 깊은 잠에서 펄떡 깨어나
본디 주인이던 참나의 자리를 回復(회복) 하자는 것이지 몸나의 살림에 더 좋고 더 먾은 貪慾心(탐욕심)의 기름칠을 하자는 것은 아닌 것이 아닌가
사랑 그 자체이신 하나님이 자기의 사랑하는 자녀들을 마지막 날에 審判(심판) 하신다는 말은 終末論者(종말론자)들의 꾸며낸 말이지 하나님의 뜻이 담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것이다.
내 생명을 永遠(영원)한 滅亡(멸망)으로 끝내느냐
아니면 하나님이 주신 성령의 靈我(영아)인 참나로 거듭나고 솟나서 하나님의 永生生命(영생생명)으로 永遠(영원)히 하나님의 아들로 사는 救援(구원)받는 存在(존재)가 되느냐 하는 것은
하나님이 決定(결정)하고 審判(심판) 하시는게 아니고 사람 各者(각자)의 自由意志(자유의지)의 選擇(선택)에서 滅亡(멸망)과 永生(영생) ,地獄(지옥)과 天國(천국)으로 갈리우는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결정되는 것을 하나님이 사람에게 맡기신 자유의지임을 알아야한다.
지옥엘 가는 것도 내게 달렸고 천국을 가는 것도 내할 탓이라는 말이다.
『너희 중에 아비된 자 누가 아들이 生鮮(생선)을 달라는데 생선대신 뱀을 주며 알을 달라는데 全蠍(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항찌라도 좋은 것을 子息(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아버지인 하나님께서 구하는 성령을 주시질 않겠느냐 』하신 누가복음 11장 11절서13절 말씀처럼
땅에 사는 몸뚱이의 아비도 자기 자식에게 좋은 것을 줄줄 아는데
몸뚱이란 겉 껍데기의 주인인 靈(영)을 주신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몸의 아비가 자식을 몽으로 사랑하는 것은 비교도 안되는 하나님 자신이 넣어주신 하나님의 씨인 성령 씨앗을 움틔워 성령의 영아로 거듭나 하나님의 참아들이 되기를 懇切(간절)히 바라시고 宕子(탕자)가 돌아오기를 기다려 주시는 한없는 사랑을 하신다는 말씀을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그래서 너 자신 속에 있는 성령 씨알의 참나를 하나님이 몸생명의 시간을 내게 허락하시는 동안 어서 속히 구하고 찾으라는 것이다.
하나님 말씀을 몸뚱이 나와 마음 나인 자아의 몸뚱이 생각의 잣대로 알려고하면 하나님 말씀의 참뜻을 알 수가 없고 엉뚱하게 알아듣게된다
하나님은 靈(영)이시라 거듭난 성령의 영안이 뚫려 열리면 저절로 환하게 알게되는 것이다.
사람의 靈(영)이란 것이 肉身(육신)이란 貪慾心(탐욕심)의 監獄(감옥)에 갇힌바와 같아서 새장 속에 갇혀 자유를 잃어버린 새의 身勢(신세)와 같다 할 것이다.
이 육신이란 탐욕의 감옥을 破碎(파쇄)하고 하나님 성령 씨알의 나인 참나로 깨달아 하나님 아들로 거듭남만이 이 肉身(육신)이란 貪慾心(탐욕심)의 監獄(감옥)을 벗어버리고 永生(영생)의 나래짓으로 하나님께 날아 오를 수 있는 唯一(유일)한 救援(구원)의 길이라는 것이다.
5.知足者富(지족자부)라 하여
足(족)할 줄 아는 사람이 富者(부자)라 하였다.
족함을 안다는 것은 자기 분수를 알아 그칠 줄을 알고 늘 感謝(감사)함으로 滿足(만족)하여 더 무슨 바람이 없는 사람을 말함이며
이런 마음의 사람이 그 燻燻(훈훈)한 마음의 情(정)이 담긴 도움과 配慮(배려)의 손길을 알게 모르게 傳(전)해주는 사람이라 할 것이다.
富者(부자)라고 한 것은 世俗的(세속적)인 物質(물질)의 富者(부자)가 아니고 精神的(정신적)으로 늘 凡事(범사)에 感謝(감사)하며 살아가는 幸福感(행복감)으로 充滿(충만)한 聖靈充滿(성령충만)의 靈的(영적)인 부자를 말하는 것이다.
『心靈(심령)이 가난한 자는 福(복)이 있나니 天國(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라고 한 마태복음 5장 3절의 예수님 말씀에서
심령이 가난한 자란 心靈(심령)이 바라는 바가 오로지 하나님 성령 씨알의 참나인 하나님의 아들로 거듭남만을 바랄뿐
썩어질 물질로된 내 몸뚱이가 바라는 貪慾心(탐욕심)의 짐승적인 獸性(수성)의 모든 짐승성질을 말끔히 성령불로 남김없이 태워버려 肉身(육신)인 自我(자아)의 마음이 타고남은 재같은 마음이 된자를 말하는 것이다.
성경 마가복음 10장 2절에 예수님 말씀이 있기를
『駱駝(낙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富者(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였다.
이건 譬喩(비유)의 말씀으로 富者(부자)가 하나님의 성령으로 거듭나기가 그만큼 어렵다는 것을 極端的(극단적)으로 강조하신 말씀이지 꼭 그렇다는 것은 아닐 것이다.
여기서의 부자는 물질적인 부자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물질적인 富(부)를 쌓아가는 맛과 그 물질의 豊饒(풍요)로움을 즐기는 속에서 자기의 영원한 생명 씨앗인 정신이 죽어가고 있음을 모르는 것이라는 말씀을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6.强行者有志(강행자유지)라 하여
굳센 意志(의지)로 行(행)하는 자가 뜻이 있는 사람이다 하였다.
뜻만 있고 행함이 없다면 뜻 없음만보다 나을 것이 없고
알기만 하고 삶에 實踐(실천)함이 없다면 죽은 앎이요 오히려 騷亂(소란)스럽기만 할뿐일 것이다.
『靈魂(영혼)이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하신 성경 야고보서 2장 26절의 말씀이 老子(노자)님의 이 말씀과 같은 脈絡(맥락)의 말씀이다.
옳고 곧음을 默默(묵묵)히 행하는 삶 그 자체가 바로 변함없는 뜻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아는체가 많고 말이 많다는 것은 제대로 아는 것이 별로 없고 뭔가 부족함을 스스로가 말많은 것으로 자신의 無知(무지)를 드러내는 것일 것이다.
얕은 물이 흐르는 소리가 시끄럽고
빈수레가 덜커덩거리는 소리가 큰것은
다 물이 얕고 짐이 가벼워서 그런 것이 아닌가
잘 익은 벼 이삭이 고개를 숙이는 것은 알곡이 온전하게 다 영글었다는 謙遜(겸손)의 모습이고
덜 익은 벼 이삭은 저만 잘난듯이 고개를 빳빳이 치켜들고 하나님과 맞서질 않는가
志在有逕(지재유경)이니 有志處有道(유지처유도)니 하여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는 말도 있듯이
惡(악)한 일에 뜻이 있으면 惡行(악행)의 열매를 맺는 길이 있을 것이고
善(선)한 일에 뜻이 있다면 善行(선행)의 열매를 맺는 길이 있을 것이다.
문제는 어떤 뜻을 마음에 두느냐에따라 행하는 삶의 길이 갈린다는 것이다.
貪慾心(탐욕심) 덩어리요 極端的(극단적)으로 利己的(이기적)인 짐승 성질의 본능을 가진 몸뚱이 나와 마음 나인 거짓나인 自我(자아)의 삶에 全目的(전목적)의 뜻을 두고 사느냐
몸나를 부정하고 하나님이 주신 성령 씨알의 靈我(영아)인 얼나의 정신적인 하나님 아들의 삶에 전목적의 뜻을 두고 사느냐에 따라서
滅亡(멸망)의 生命(생명)으로 끝나버릴 여늬 짐승삶의 길이 될 수도 있고
永生(영생)의 生命(생명)으로 靈的復活(영적부활)로 가는 하나님의 참아들이 되는 길도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問題(문제)는 이 滅亡(멸망)의 길과 永生(영생)의 길은 사람 각자의 뜻 選擇(선택)에 의해 갈리워지도록 하나님이 그 결정권을 사람의 自由意志(자유의지)에 맡기셨다는 것이다.
7.不失其所者久(부실기소자구)라 하여
그 가진바 뜻을 잃지 않는 사람이라야 오래다(영원함이다) 하였다.
여기서 잃어버리지 말아야 할 뜻이란
하나님이 주신 성령 씨알로 거듭난 영아인 얼의 나를 나의 참나요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아 하나님 뜻을 쫓아 살겠다는 행함의 생각을 말하는 것이다.
사람의 생각으로 이 생각 하나를 꼭꼭 씹고 또 씹으며 꼭 붙잡고 살아야 할 오직 한 생각이지
다른 생각은 다 바람에 나는 겨와같은 부질없는 생각임을 自覺(자각)해야 한다는 말씀이다.
몸 생명은 시간에 갇힌 除限(제한)된 생명이라 너나 없이 몸으로는 다 죽는 생명이지만
영의 생명은 時間(시간)과 空間(공간)에 걸림이 없이 영원한 생명임을 알아 성령으로 거듭나야 함을 아는 것이 참생각의 뜻인 것이다.
8.死而不亡者壽(사이불망자수)라 하여
몸은 죽어도 죽지 않는 것은 생명이다 하였다.
이 말씀과 같은 말씀이 성경 요한복음 11장 25절서 26절 말씀에 있기를
『25절:예수께서 말씀 하시길 (나)는 復活(부활)이요 生命(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절: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永遠(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하였다.
여기서 (나)라고 한 (나)를 예수로만 알아 들으면 잘못 알아 들은 것이된다.
예수님이 나라고 한 나는 사람들이 나라고 생각하고 말하는 몸뚱이 나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그 몸뚱이 속 심령에 하나님이 넣어주신 하나님 성령 씨알의 영인 靈我(영아)로 거듭난 얼의나를 말하는 것으로
이 얼의 나는 神格(신격)인 하나님 아들의 나로써 예수님께만 이런 거듭난 성령의 나가 있는 게 아니고
사람이면 너나 없이 다 하나님의 씨앗 성령이 사람들 심령 속의 속에 들어 있는 것으로는 우리도 예수님과 한점도 다름이 없다는 것을 예수님이 말씀을 하신 것이다.
모든 사람은 몸으로는 몸아버지의 아들이고
靈(영)으로는 예수님처럼 다 하나님의 아들인 것이다.
예수님은 이 걸 아시고 하나님이 주신 하나님의 씨알 성령으로 거듭나시어
몸사람의 自我(자아)가 죽고 망할 거짓의 일시적인 나임을 確然(확연)히 깨쳐 아시고
靈我(영아)인 얼의 정신나가 참나이고 영의 생명으로 영생하는 참 생명임을 알아 하나님의 참아들이 되신분이고
이 말씀을 못알아 들은 예수님 當時(당시) 바리새인들처럼 오늘날도 이 말씀을 못알아 듣기는 마찬가지라 할 것이다.
자기 속에 살아 역사하고 계시는 心靈(심령)속의 하나님을 믿고 따라야 할 것을
예수님을 믿는다는 엉뚱한 말을 할뿐만 아니라
몸뚱이 맛의 執拗(집요)한 貪着心(탐착심)의 誘惑(유혹)과 끄달림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되레 말하길
몸으로 부활하여 千年王國(천년왕국)에서 왕노릇 하고산다느니 하며 虛荒(허황)한 魔鬼(마귀)의 생각에 놀아나는 헛소릴 하는 것을 보면 참으로 寒心(한심)타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죽어도 살겠고라고 하신 말씀은
몸이 죽어도 몸이 다시 살겠고로 알아 듣는 사람은 예수님 말씀을 통채로 못알아 듣고 자기 몸생각으로 알아듣는 마구니의 알아 들음이고
몸이 죽어도 본디부터 나고 죽음이 없는 영은 성령으로 거듭나기만 하면 다시 부활하여 하나님의 영원한 生命根源(생명근원)에 하나로 이어진다는 말인 것이다.
성령으로 거듭나질 못하면 마치 씨앗이 땅속에서 썩어 죽어지는 씨앗이 있듯이 씨알 영도 몸과 더불어 멸망하고 성령으로 거듭나면 영으로 영생을 한다는 말씀이 예수님 말씀임을 알아야함이다.
마태복음 10장 39절 말씀에 있기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하였다.
이 말씀도 앞의 말씀과 같은 뜻의 다른 표현의 말씀이다.
자기 목숨에서의 목숨은 몸뚱이 목숨을 말하는 것이고
잃을 것이요 에서의 잃는다는 것은 영의 생명인 영원한 생명을 말함이다.
몸 목숨을 전목적으로만 알고 물질인 몸과 物質世上(물질세상)에 貪慾心(탐욕심)을 분수에 아랑곳 없이 부리고 살면 몸이야 번질 번질 띠룩띠룩 잘 먹고 잘 살진 몰라도
영원한 영의 생명으로 하나님이 주신 永生生命(영생생명)을 몸맛에 속아 산 無明(무명)으로 인해 잃어버리고 몸도 영도 영원한 滅亡(멸망)으로 끝나버린다는 것이고
나를 위하여에서의 나는 앞에서 말했듯이 하나님 성령 씨알의 나로 거듭난 靈我(영아)를 말하는 것으로
영아를 위하여 몸 목숨을 거짓부렁의 겉 껍대기 包裝紙(포장지)로 알아 몸삶에 붙었던 생각을 잘라서 버리고 영의 삶으로 옮기면 영원한 영의 생명을 回復(회복)한다는 말씀을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면서
몸살림이 어떻고 물질이 어떻고 세상살이가 어떻고 자식이 어떻고 하며 이런 거짓나인 몸을 둘러싼 몸생각에 붙은 생각으로 하나님을 믿네 祈禱(기도)를 합네 하는 것은 다 順序(순서)가 거꾸로 쳐박힌 헛믿음이고
하나님을 憑藉(빙자)하여 몸살림에 무슨 국물이라도 얻어먹겠다는 자기 몸뚱이 욕심의 믿음인 일종의 虛妄(허망)한 샤머니즘일뿐인 것이다.
성령으로 거듭나 하나님의 참아들이 되어 내 속의 神格(신격)으로 하나님의 성령과 교통이 일어나면 내가 바라질 않던 모든 것들도 덤으로 다 더불어 채워 주시는분이 하나님이심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임을 알아야 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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