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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蘧然覺 誠全而歸之(성전이귀지) 본문

영성수행 비전/도마복음

蘧然覺 誠全而歸之(성전이귀지)

柏道 2020. 1. 12. 13:36


蘧然覺

誠全而歸之(성전이귀지)

참되고 온전히 영글어져 하나님께 돌아가리라

 

허당010ㅡ4327ㅡ2481

2014. 11. 29. 12:06

 

 

1.曲則全 枉則直(곡즉전 왕즉직)

 

2.窪則盈 敝則新(와즉영 폐​즉신)

 

3.小則得 多則惑(소즉득 다즉혹)​

 

4.是以聖人(시이성인)

 

5.抱一爲天下式(포일위천하식)

 

6.不自見故明(부자현고명)

 

7.不自是故彰(부자시고창)

 

8.不自伐故有功(부자벌고유공)

 

9.不自矜故長(부자긍고장)

 

10.夫唯不爭(부유부쟁)

 

11.故天下莫能與之爭(고천하막능여지쟁)

 

12.古之所謂曲則全者(고지소위곡즉전자)

 

13.豈虛言哉(기허언재)

 

14.誠全而歸之(성전이귀지)

 

 

(풀어쓰기)​

 

이 글은 老子(노자)님의 道德經(도덕경) 22章(장)의 말씀으로

 

自身(자신)의 몸뚱이 感覺(감각)과​ 마음의 感情(감정)의 지배를 받아 그 감정에 종질하며 사느라 極端的利己心(극단적이기심)으로 鬪爭的(투쟁적)이고 攻擊的(공격적)이고 排他的(배타적)이고 閉鎖的(폐쇄적)인 自我中心的(자아중심적)인 我執(아집)의 병든 性格(성격)으로 날이 잘 벼루어진 칼날처럼 날카로운 모서리 투성이인 自我(자아)를 거친 鑛石(광석)을 잘 다듬고 硏摩(연마)하여 둥근 寶玉(보옥)을 만들어가듯이 切磋琢磨(절차탁마)로 自我(자아)를 滅我(멸아)시켜 自我(자아)를 참나로 알고 몸뚱이에 속아 살던 迷惑(미혹)의 白日夢(백일몽)에서 깨어나 자기 자신의 心靈(심령) 밭에 감추어진 하나님의 씨인 참나를 證得(증득) 할 것을 일깨워주시는 말씀이다.

 

성경 요한복음 8장 23절에서 예수님이 말씀 하시길

 

『너희는 아래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 하였느니라』하였다.

 

너희는 아래서 났고 이 세상에 屬(속)하였단 말은

 

하나님 성령으로 거듭나질 못한 너희는 形而下(형이하)인 相對世上(상대세상)의 物質(물질)로 된 몸의 어머니 下門(하문)에서 亦是(역시) 썩어질 물질로 났다는 말이고 또한 짐승 성질인 利己的貪慾心(이기적탐욕심)의 本能(본능)인 貪.瞋.癡(탐.진.치) 三毒(삼독)의 獸性(수성)을 지닌 한마리 짐승보다도 더 못한 사람 짐승으로 살고 있다는 말이다.

 

나는 위에서 났고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는 말에서의 나는 하나님 聖靈(성령)으로 거듭난 靈性(영성)의 예수인 예수의 얼나를 말하는 것이지 죽고 썩어질 예수의 몸뚱이 나인 예수의 自我(자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 말을 바로 알아 듣질​ 못했으니까 위에서 왔다는 것을 예수의 몸뚱이도 하늘에서 온 것으로 알아 들었기에 童貞女(동정녀) 孕胎(잉태)란 駭怪(해괴)한 妄言(망언)이 거룩한 聖經(성경)에 가라지로 끼어든게 아니겠는가

 

모르면 그냥 모른다 하면 될 것을 모르는 것을 억지로 아느체를 하려니까 이런 妖說(요설)이 만들어지는 것일 것이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거듭나 하나님의 성령인 靈我(영아)로 새로 났다는 말은

 

거듭나기 전의 自我(자아)를 참나로 알고 살던 몸뚱이 중심의 物質的(물질적)이고 極端利己的(극단이기적)인 짐승 성질의 삶에서 하나님 성령의 靈我(영아)인 얼나의 精神人(정신인)으로 사는 靈的(영적)인 삶의 하나님 아들이 되었다는 말인 것이다.

 

성령으로 거듭났다는 말을

 

붓다님은 生滅滅己(생멸멸기) 見性成佛(견성성불) 寂滅爲樂​(적멸위락)이라 하여 나고 죽는 몸뚱이 나인 自我(자아)를 죽이고 본디 니르바나님으로부터 받아나온 니르바나님(하나님)의 佛性(불성=성령)을 참나로 깨쳐 알고 거듭나 니르바나님에 들어 즐거워 하리라 하였고

 

孔子(공자)님은 克己復禮(극기복례)라 하여

 

몸뚱이 나를 이기고 본디의 받아나온 禮(예)를 돌이킨다 하였고

 

老子(노자)님은 無我(무아)라 하여 나를 없애 내가 없다 하였고

 

莊子(장자)님은 縣解(현해)라 하여 몸뚱이에 매달린데서 풀려나 해방되고 자유해진다 하였다.

 

붓다님의

 

生滅滅己(생멸멸기) 見性成佛(견성성불)에

 

己(몸기)​는 몸나와 마음 나인 自我(자아=스스로 나라고 하는 나)를 말하는 것이다.

 

物質(물질)에 종질하며 맛과 멋에 貪着(탐착)하여 사는 物質(물질)인 몸뚱이의 나를 거짓나로 알고 나고 죽는 이 나를 죽이고 性(성=본래면목으로 니르바나님으로부터 받아 나온 불성)을 見(볼견​=깨침=頓悟<돈오>)하여 成(이룰성) 佛(깨칠불=buddha=깨달음)로 깨달음을 이루었다는 말이다.

 

孔子(공자)님의 克己復禮(극기복례)에서의 己(몸기)도 自我(자아)를 말하는 것으로

 

이 自我(자아)를 克(이길극)했다는 것은 내가 나를 이겼다는 말로

 

다른 말로하면 몸뚱이의 감각과 감정에 휘둘려 살지 않을만큼 몸을 넘어섰다 는말로 滅己(멸기)와 같은 말이라 할것이다.

 

​자기를 죽인다는 滅己(멸기)란

 

몸뚱이에 종질하는 마음나의 나를 말하는 것이지 몸생명의 나를 죽인다는 말이 아닌 것이다.

 

비록 몸은 얼나를 담고 있는 겉 껍데기이지만 얼나를 깨닫기까지는 몸이 성해야 하는 것은 말할 가치도 없는 것이다.

 

몸성히 맘성히가 되어야 얼나를 찾기까지 健健(건건)히 갈 수가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復禮(복례)란 예를 回復(회복=돌이킴)했다는 말로 하나님이 내게 德(덕=속알)을 낳아 주셨다는 天生德於予(천생덕어여)에서의 德禮(덕례=속알의 예)를 회복하여 하나님 아들이 되었다는 말인 것이다.

 

論語(논어) 子罕篇(자한편)에 공자님의 말씀이 있기를

 

毋意(무의).毋必(무필).毋固(무고).毋我(무아)라 하여

 

내뜻이라 한다는 것을 없애고 반드시 나라야 한다는 것을 없애고 나란 我執(아집)을 없애고 自我(자아)를 나라고 하는 나를 없이해야한다는 말씀도

 

克己復禮(극기복례)를 할 수 있는 그 방법을 풀어서 말씀을 하신 것이다.

 

짐승 성질인 貪.瞋.癡三毒(탐.진.치 삼독)의 利己的(이기적) 貪慾心(탐욕심)에 불타는 불덩어리인 自我(자아)란 個體意識(개체의식)​이 散散(산산)히 부서지고 하나님 아들인靈我(영아)인 얼나로 全體意識(전체의식)을 회복 하는 것이 예수님이 말한 성령 거듭남인 靈的復活(영적부활)이고 붓다님이 말한 견성성불의 覺道(각도)로 니르바나님(하나님)의 나라에서 寂滅爲樂(적멸위락)한다는 말인 것이다.

 

老子(노자)님은

 

塞其兌閉其門(색기태폐기문)爲道日損含德之厚(위도일손함덕지후)라 하여​

 

몸뚱이의 感覺(감각)과 感情(감정)에 취해 질척거리는 그 구멍을 막고 快樂(쾌락)의 맛을 탐하는 그 문을 닫아 道(도=진리=하나님)를 생각하면​ 나날이 自我(자아)가 덜어지고 작아져서 품은 속알(얼나)이 두터워진다 하였다.

 

이게 한마디로 無我(무아)로 나라고 내세우고 固執(고집)하던 自我(자아)가 말끔히 없어져 버렸다는 말인 것이다.

 

莊子(장자)님은​

 

知天之所爲者天而生也(지천지소위자천이생야)라 하여

 

하나님이 하는 바를 아는 사람은 하나님이 낳으신 것이다 하였고

 

知人之所爲者(지인지소위자) 以其知之所知(이기지지소지) 以養其知之所不知(이양기지지소부지) 終其天年而不中道夭者(종기천년이부중도요자)라 하여

 

사람으로써 해야 할바를 아는 사람은 그 사람은 자기가 아는 바의 앎을 가지고서 알지 못하는 바의 앎을 길러 마침내는 영원한 생명으로 사는 가운데 죽질 않는다 하였고​

 

常因自然而不益生也(상인자연이불익생야)라 하여

 

늘 한결같이 自然(자연=하나님)의​ 뜻을 좇아 사는지라 몸뚱이로 더 살려고 아둥바둥 하질 않는다 하였고

 

隳枝體(휴지체)黜聰明(출총명)離形去知(이형거지)同於大通(동어대통)此謂坐忘(차위좌망)이라 하여

 

몸뚱이가 허물어지고 내가 잘나고 똑똑하다던 그 자아가 내쳐지고 形像(형상)인 몸뚱이를 떠나고 앎이 가버리니 크게 뚫려 하나님과 하나로 같아져 대동이 되니 이를 일러 자아를 잊음이라 한다 하였고

 

縣解(현해)라 하여 몸뚱이 삶에 穿鑿(천착)하여 매어달린 것에서 풀어져 자유해지는 精神人(정신인)이 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孟子(맹자)님은

 

人人有貴於己者不思耳(인인유귀어기자불사이)라 하여

 

사람마다 各己(각기) 저 속에 귀하고 귀한 것이 있는데 그 귀한 것을​ 찾을 생각을 하질 않는다 하였고

 

人之所以異禽獸者其稀(인지소이이금수자기희) 庶民去之君子存之(서민거지군자존지)라 하여

 

사람이 짐승과 다른점은 극히 희박하리만큼 적다​ 일반 사람들은 짐승과 다른 이것을 버리지만 군자는 짐승과 다른 이 작은 차이를 보존한다 하였다.

 

孟子(맹자)님이 말씀한 그 귀하고 다른 것이 바로 하나님이 주신 聖靈(성령)의 하나님 씨를 말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예수님. 붓다님. 老子(노자)님​. 莊子(장자)님. 孔子(공자)님. 孟子(맹자)님 모든 人類 聖人聖賢(인류성인성현)들의 한결같은 말씀이 몸나와 마음나인 自我(자아)는 참나가 아니고 참나를 품고있는 한갖 껍데기로서의 그릇일뿐이고

 

그 몸이란 겉 껍질 속의 心靈(심령) 가운데 심기워있는 하나님의 씨인 성령의 靈我(영아)인 얼의 나가 참나라는 것을 밝히 드러내신 말씀으로는 하나로 같은 것이다.

 

이걸 못알아 들으니까

 

肉身(육신)인 몸뚱이로 永遠(영원)히 살겠다는 쪼의 養生術(양생술)로 神仙(신선)이 된다거나

 

變化(변화)된 肉身(육신)을 입어 千年王國(천년왕국)에서永生(영생)하며 王(왕)노릇 한다느니 하는 虛荒(허황)한 헛소리들에 넘어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聖人(성인)들의 말씀은 한마디로 肉身(육신)의 어버이로부터 받아 나온​ 이 썩어질 物質(물질)의 몸뚱이가 나가 아니고 참나를 품고 있는 겉 껍데기로 거짓나란 것이다.

 

膳物(선물) 包裝紙(포장지)가 아무리 이쁘고 고급스럽고 그럴싸 해도 포장지 속 선물을 내던지고 겉 포장지를 선물로 여기는 사람도 없을 것이고

 

금방 퍼담아 흰김이 모락 모락 오르는 밥그릇 속의 희뽀얗게 潤氣(윤기)가 짜르르한 찰지고 구수한 밥을 퍼내서 버리고 밥그릇을 핥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자신의 몸뚱이가 이런 포장지나 밥그릇 같은 하잘것없는 그릇일뿐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 드문 것은 다 몸뚱이의 感覺(감각)과 感情(감정)의 捕虜(포로)가 되어서 그런 것일 것이다.

 

只今(지금) 이 地球(지구)란 흙덩이 위에 存在(존재)하는 모든 종교와 종교인들은 어쩌면 하나같이 일종의 잘못된 宗敎催眠(종교최면) 현상에 취해있다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여기에대한 세계적인 석학의 聖書硏究家(성서연구가) 바트에르만 敎授(교수)의 聖經歪曲(성경왜곡)의 歷史(역사)중의 일부를 옮겨보면

 

『나는 성경의 逐字靈感說(축자영감설)과 성경의 無誤謬說(무오류설)을 한때는 들은데로 믿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제는 성경을 그렇게 보질 않는다.

 

이제 성경은 나에게 매우 인간적인 冊(책)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筆寫者(필사자)들이 성경 본문을 베껴 쓰면서 變改(변개)시킨 것과​ 마찬가지로 처음 성경 元文(원문)을 쓴 이들도 다 어디까지나 사람 이었다는 事實(사실)이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의 손과 머리로 인해 만들어진 책인 성경은 서로 다른 必要(필요)에 附應(부응)하여 각기 다른 시기에 서로 모르는 사람들이 著作(저작)한 것이다.

 

성경을 著作(저작)한 사람들 가운데 다수는 疑心(의심) 할 여지도 없이 자신들이 하나님의 靈感(영감)을 받아 쓴다고 느꼈을 것이고 또 그렇게 썼을 것이다.

 

그런 가운데 그들 자신들의 視覺(시각)과 자신들의 믿음과 자신들의 見解(견해)와 자신들의 必要(필요)와 자신들의 所望(소망)과 자신들의 理解(이해)와 자신들만의 信仰觀(신앙관)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와같은 믿음과 견해와 필요와 소망과 이해와 신앙관은 그들이 써 나가는 모든 밑바탕에 潛在的(잠재적)으로 깔려 있었을 것이다.​

 

이런 모든 면에서​그들은 서로가 달랐을 것이고 그렇기때문에 똑같은 예수님의 말씀이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서 서로 다르게 記述(기술)이 되어져 나오고

 

마태복음과 요한복음서에서 서로 다르게 記述(기술)이 되고있는 것은 각기 著者(저자)의 意圖(의도)가 福音書(복음서) 著者(저자)마다 달라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聖經(성경)은 매우 人間的(인간적)인 冊(책)인 것이다.』하였다.

 

이 말은 성경 자체가 一點一劃(일점일획)도 無誤謬(무오류)하다며 神聖視(신성시) 해야 할 偶像​(우상)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말인 것이지 성경을 卑下(비하)하고자 한 말은 아닌 것이다.

 

바트에르만의 말처럼 저자의 의도가 隱然中(은연중)에 作用(작용)한​ 人爲(인위)가 설혹 90%라고 하더라도 나머지 10%의 靈感(영감)이 있다고 한다 하더라도 聖靈感化感動(성령감화감동) 靈感(영감)의 10%의 價値(가치)는 어떤 意味(의미)에선 人爲(인위)의 90%를 壓倒(압도)하는 無限(무한)의 絶對價値(절대가치)일 것이다.

 

決定的(결정적)인 靈感(영감)의 한마디 말씀에 하나님의 문이 열리는 것이지 新舊約(신구약) 66券(권)을 휑하니 다 꿰고 줄줄이 외운다고​ 하나님의 문이 열리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문을 열고 들이쳐 들어가기위해​ 성경을 보고 불경을 보고 모든 經典(경전)을 먹어보는 것이지 그렇지 않으면 볼일이 뭘있겠는가

 

聖經(성경)을 보고 佛經(불경)을 보고​ 人類聖人聖賢(인류성인성현)들의 모든 經典(경전)을 마음에 품고 생각으로 먹어보는 것은 한마디로 내 自我(자아)의 마음을 죽이자고 보는 것이라야지 그렇질 않다면 다 헛보는 것이라 할 것이다.

 

헨리데이빗 소로우의 일기에서 소로우가 말하길

 

『天國(천국)의 문을 여는 것보다 더 崇高(숭고)한 人生(인생)의 目的(목적)은 없다.』하였다

 

天國(천국)의 門(문)을 여는 主體(주체)가 다 각기 個個人(개개인) 자신이고​ 그 천국열쇠가 무엇인지를 말씀으로 가르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고

 

성경의 목적도 다 이 하나에 歸結(귀결)되는 것이다.

 

이것 말고는 다 엑세서리에 지나질 않는 군더더기의 가라지들로 보고 알라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임을 알아야한다.

 

天國門(천국문) 열쇠는 바로 사람의 心靈(심령) 속 생각에 숨기워 있는 하나님 씨인 聖靈(성령)의 靈我(영아)인 얼나로 거듭나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만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열쇠라는 것을 말씀으로 가르치신 분이 예수님이신 것이다.

 

몸뚱이 나와​ 마음 나인 自我(자아)의 나는 참나를 담고있는 거짓 껍데기의 나로 나고 죽는 物質(물질)의 나일뿐이니 이 물질의 나인 겉 껍데기의 몸나의 感覺(감각)과 感情(감정)에 속아서 感情(감정)의 捕虜(포로)가 되어서 살지를 말라는 것이 예수님 말씀의 뜻이신 것이다.

 

붓다님도 物質(물질)일뿐인 몸뚱이 나가 참나가 아니라는 말씀을 하시기를

 

其有見我色(기유견아색) 若以音聲聽(약이음성청) 斯爲愚邪見(사위우사견) 此人不見佛(차인불견불)이라 하여

 

누구든지 만일 내 몸뚱이를 보는 것으로 붓다를 보았다고 하거나 나의 목소리를 듣는 것으로 붓다를 보았다고 한다면 이 사람은 썩어질 내 肉身(육신)인 몸뚱이란 겉 껍데기 물질을 붓다로 잘못 보는 것이고 또 죽으면 滅(멸)하여 끊어질 내 음성을 붓다로 잘못 안것으로 어리석은 것이니 이런 사람은 붓다를 보고서도 붓다를 못본 것이다라고 하였다.

 

붓다님이 살아 있을 당시 몸뚱이 붓다가 붓다가 아니라고 붓다님이 말씀을 하셨고

 

니르바나님(하나님)의 佛性(불성=靈性)으로 見性成佛(견성성불)한 佛性(불성)의 붓다가 붓다라고 말씀을 하셨는데도

 

그당시 佛者(불자)들은 붓다님의 이 말씀을 못알아 들은 것인지 붓다가 죽고 火葬(화장)한 다음 붓다의 타고 남은 뼈조각들을 무슨 寶玉(보옥)처럼 줏어모아 眞身舍利(진신사리)라며 舍利塔(사리탑)을 만들어 安置(안치)하고 거기에 禮拜(예배)까질 至極精誠(지극정성)으로 드렸던 것이 아닌가

 

이건 지금도 달라진게 없이 마찬가지다.

 

내가 죽고난 다음 내 形像(형상)을 一切(일체) 만들지 말라는 붓다님의 遺言(유언)대로 붓다님 死後(사후) 500년 동안은 無佛像(무불상)시대가 지켜졌으나​ 간다라 美術(미술) 시대에 藝術品(예술품)으로 彫刻(조각)이 되었던 佛像(불상)이 각 寺刹(사찰)의 法堂(법당) 大雄殿(대웅전)에 坐定(좌정)되기 시작한 것이 그 嚆矢(효시)가 되어 오늘날은 巫堂(무당)의 굿방에까지 들어앉게된 것이 佛像(불상)의 實像(실상)이다.

 

이게 다 허접한 偶像崇拜信仰(우상숭배신앙)이고 붓다님이 깨달은 眞理(진리)하고는 너무나 背馳(배치)되는 샤머니즘의 迷信(미신)으로 墮落(타락) 했다고 할 것이다.

 

개신교의 예수님이 못박힌 모습의 十字架像(십자가상) 도 그렇고 캐톨릭의 마리아상도 그렇고

 

이게 다 예수님의 진리 가르침 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는 허접한 偶像崇拜信仰(우상숭배신앙)들인 것이다.

 

예수님이나 붓다님이나 이분들은 우리가 믿어야 할 믿음의 존재인 하나님이나 니르바나님이 아니고

 

우리도 예수님이나 붓다님처럼 생명바쳐 죽기까지 하나님 뜻에 順從(순종)하며 하나님 뜻 섬기며 따르는 삶을 사신 예수님과 붓다님의 삶을 내 삶 속에서 이루어내는 스승님으로 우리가 섬기고 배우고 따르기를 죽기까지 해야 할 것이란 것을 예수님과 붓다님이 가르치신 말씀임을 바로 알아 들어야 하는 것이다.

 

孟子(맹자) 盡心下篇(진심하편)에 孟子(맹자)님의 말씀이 있기를

 

盡信​書則不如無書(진신서즉불여무서)라 하여

 

經書(경서)에 있는 글을 글자 그데로 다 믿는다면 經典書籍(경전서적)이 없는 것만 같질 못하다 하였다.

 

孟子(맹자)님의 이 말은 老子(노자)님의 道可道非常道(도가도비상도)인

 

절대진리는 말이나 글로써 설명되어지는 것이 아니다라는 말씀과 같은 脈絡(맥락)의 말씀이다.​

 

聖人(성인)이 깨달은 眞理(진리)를 말로나 글로써는 說明(설명)되어지는 것이 아닌 形而上(형이상)​의 진리라서 不得已(부득이)하게 말로나 글로써 나타내려고 하다가보니 隱喩(은유)나 譬喩(비유)를 통한 方便法(방편법)의 手段(수단)으로 敍述(서술)을한 것이 經典(경전)이지만

 

그 敍述(서술)된 文字(문자)만으로는 진리의 속 고갱이를 환하게 다 알 수가 없다는 말을 孟子(맹자)님이 이렇게 말씀을 하신 것이라 할 수 있다 하겠다.

 

 

요한복음 8장 3절서 9절 말씀에

 

『書記官(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奸淫(간음)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奸淫(간음)하다가 現場(현장)에서 잡혔습니다.

 

모세는 律法(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쳐 죽이라 命(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저희가 이렇게 말함은 告訴(고소)할 條件(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試驗(시험) 함이러라...중략....예수께서 말씀하시길

 

너희중에 罪(죄)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중략...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良心(양심)의 呵責(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始作(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하였다.

 

律法學者(율법학자)인 書記官(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陷穽(함정)에 빠트리고자 謀意(모의)하여 말에 올무를 걸어 덫을 놓았지만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저들은 스스로의 양심에 찔림을 받아 슬금슬금 모두가 가버린 것을 보면 비록 그들이 鐵面皮(철면피)로 낯가죽이 두꺼웠으나 그들에게도 一末(일말)의 양심은 있었다는 것을 이 말씀에서 알 수가 있다 하겠다.

 

마태복음 5장 27절서 29절 말씀에 예수님의 말씀이 있기를

 

『또 奸淫(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를 보고 淫慾(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奸淫(간음) 하였느니라 』하였다.

 

예수님의 이 말씀에서 眞情(진정) 자유로울 수 있는 숫놈은 過然(과연) 몇이나 이 세상에 있을 것인지? 아니면 없을 것인지 ?....

 

罪(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바리새인들의 마음을 치신 것이고 지금도 우리의 마음을 치고 계신 말씀인 것이 아닌가

 

눈이란 視覺(시각)을 통해 認知感覺(인지감각) 되어진 情報(정보)가 마음에 感情(감정)으로 淫亂心(음란심)의 波紊(파문)이 한 순간 일렁이기만 했다해도​

 

이미 정신적으로는 奸淫(간음) 한 것이라고 하셨으니 몸뚱이를 全目的(전목적)으로 알고 사는 形而下(형이하)의 物質存在(물질존재)인 自我(자아)의 사람으로서야 예수님의 이 말씀에서 빠져 나갈 길이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것이 몸사람의 피할 수 없는 현실이기도 하지만 그러나 성인들은 이를 알기를 아무리 아름다운 天下一色(천하일색)의 姚艶(요염)한 傾國之色(경국지색)의 여자라해도 뼈대로 얽은 骨組(골조)에 살과 가죽이 덧씌워진 오줌 똥 피고름 자루로 생명불이 다 타고나면 곧 들판에 나뒹구는 骸骨(해골) 바가지로 들판에 나뒹굴 것임을 如實(여실)히 그 實像(실상)을 꿰뚫어 보신지라 거기에 한점 홀림이 없으셨던 것이 아닌가.

 

성령으로 거듭나신 예수님이나 붓다님은 시퍼렇게 살아서 저 잘났다고 꺼떡거리고 뻐기며 모가지를 곧추세우고 숨 잘쉬는 건장한 몸뚱이의 사람도 다 죽은 사람이라 했으니

 

예수님이나 붓다님 같이 성령으로 거듭나질 않고서는 예수님의 이 말씀에서 예외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자신에겐 한없이 寬容的(관용적)이고 남에겐 嚴(엄)한 批判(비판)과 責望(책망) 叱責(질책)과 詰難(힐난)을 퍼붓는 것이 몸뚱이에 속한 쪽이고

 

자신에겐 칼날같이 嚴格(엄격)하고 남에겐 한없는 寬容(관용)을 베풀고 寃讐(원수)까지도 사랑하시는 쪽이 성령으로 거듭난 얼나의 쪽인 것이다.

 

예수님은 이 여인에게 나도 네 罪(죄)를 묻지 않겠다.

 

어서 돌아가라 그리고 이후론 다시는 죄짓지말라 하고 누이동생을 대하듯이 人格的(인격적)으로 대우를 해 주었다.

 

남을 誹謗(비방)하고 定罪(정죄)하기 전에 그 사람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먼저 돌아보라는 것이 예수님의 이 말씀 속에 담긴 속뜻일 것이다.

 

사람들은 너무 입방정이 甚(심)하다 싶을 程度(정도)로​ 남의 흠결을 亂刀(난도)질을 해댈만큼 저들이 그리도 無欠(무흠)하고 그리도 完璧(완벽)하단 말인가.

 

석가 붓다님 말씀에

 

『차라리 男根(남근)을 毒蛇(독사)의 입안에 넣을지언정 女人(여인)의 淫部(음부)에 넣지말라』 하였다.​

 

이게 무슨말인가 하면

 

아예 結婚(결혼)을 하질 않으면 더 좋겠지만 이미 결혼을 했다면 그나마 정혼한 여인이 아닌 다른 여인의 淫部(음부)를 곧 毒蛇(독사)의 아가리로 생각해야 한다는 말인 것이다.

 

공연히 여자만 보면 군침을 삼키고 함부로 껄떡러리질 말라는 말이다.

 

몸도 마음도 오직 하나인 자기 부인에게만 集中(집중)하라는 말인 것이다.

 

自我(자아)로써의 사람은 生死(생사)에 걸려 허우적이고 愛憎(애증)의 수렁에 빠져 할딱거리며 食色(식색)에 묶여 종노릇을 하는 것은 너나 없이 다 하나로 같다 할 것이다.

 

自我(자아)로 죽고 몸뚱이 삶에 붙은 未練(미련)과 執着(집착)을 끊어버리고 聖靈(성령)으로 거듭나 얼나로 새로나야 生死(생사)를 넘어서고 愛憎(애증)을 넘어서고 食色(식색)을 넘어서서 永遠(영원)한 大自由(대자유)에 들 수 있다는 것이 예수님과 붓다님의 가르치심이 아닌가

 

 

​요한복음 8장 31절서 32절 말씀에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는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居(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眞理(진리)를 알찌니 眞理(진리)가 너희를 自由(자유)케 하리라 』하였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이 말을 못알아듣고 말하길

 

우리가 아브라함의 ​子孫(자손)으로 남의 종이 된적이 없는데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케 되리라 하느냐고 反問(반문)을 했다.

 

自由(자유)케 된다는​ 예수님의 말 뜻은 몸뚱이 나와 마음 나인 自我(자아)인 거짓나의 겉 옷을 벗어던지고 하나님 성령으로 거듭나 靈我(영아)인 얼나로 精神人(정신인)인 靈的(영적)인 사람이되면 자기 몸뚱이에 더 이상 종노릇하며 살질 않고 靈的(영적)으로 完全(완전)히 自由(자유)한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인데 이걸 못알아 들었던 것이고 지금도 基督敎(기독교) 聖職者(성직자)나 聖徒(성도)들도 못알아 듣기는 마찬가지라 할 것이다.

 

예수님이 말씀한 眞理(진리)가 너희를 自由(자유)케 한다는 말을​

 

붓다님은 解脫(해탈)이라고 말씀을 하셨다.

 

解脫(해탈)이란 묶이고 매인 것을 벗고 풀려나 해방이 된다는 말로

 

自我​(자아)의 겉 껍데기를 벗어던지고 니르바나님(붓다식의 하나님 표현 용어의 <梵語>)의 佛性(불성=영성)으로 새로나 니르바나님의 精神人(정신인)이 되었다는 말인 것이다.

 

이리되면 貪.瞋.癡(탐.진.치) 三毒心(삼독심)인 짐승 성질의 貪慾心(탐욕심)으로 불타던 煩惱(번뇌)늬 불덩이가 꺼지고

 

血氣(혈기)로 성깔부리던 嗔心(진심)의 怒(노)한 불길도 꺼지고

 

淫慾(음욕)으로 번질거리고 끈적거리던 淫宕(음탕)한 마음으로 猛烈(맹렬)히 불타던 色慾(색욕)의 불길도 꺼지는 것이란 것을 가르치신 분이 예수님과 붓다님이 아니신가.

 

하나님을 믿고 불교를 믿느다면서 이걸 모르면 무늬만 聖徒(성도)들이지 실은 靈的(영적) 소경일뿐인 것이다.

 

겉 껍데기인 몸뚱이의 몸눈이 소경이라도 답답하고 슬픈 일일진대 거기다 靈的(영적) 소경까지 겹친다면 몸눈이 멀쩡하게 떠져 있은들 몸눈 소경보다 무엇이 더 났다 할 것인가.

 

요한복음 9장 39절서 41절 말씀에 예수님의 말씀이 있끼를

 

『39:내가 이 세상에 온 것은 보는 사람과 보지 못하는 사람을 가려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40: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가로되 우리도 소경인가?

 

41: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차라리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 』하였다.

 

보는 사람과 보지 못하는 사람을 가려 보지 못하는 자들을 보게하고 본다는 자들은 소경되게 한다는 말이 무슨 말인가 하면

 

이 말씀을 肉眼(육안)인 몸뚱이의 눈이 보고 못보는 것을 말한 것이 아니고 진리를 보는 영적인 눈인 靈眼(영안)을 두고 하신 말씀인 것이다.

 

예수 자신이 하나님을부터 받은 使命(사명)이요 또한 자신이 사는 삶의 목적이 모든 사람들에게 靈眼(영안)을 뜨게하여 하나님의 참된 아들들로 다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는데에 있다는 것을 이렇게 말씀을 하신 것이다.

 

보지 못하는 자들을 보게 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알고자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渴求(갈구)​하는 자들에게 하나님 나라 문을 열수 있는 말씀으로 그들의 靈眼(영안)이 떠지도록 성령으로 引導(인도)하시겠다는 말씀이고

 

본다는 자들을 소경되게 한다는 말은

 

當時(당시) 유대교도들인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과 레위인들로 構成(구성)된 宗敎指導者(종교지도자)들인 祭祀長(제사장)과​ 書記官(서기관). 律法學者(율법학자)들의 贖罪信仰(속죄신앙)의 宗敎(종교)인 祭祀儀式(제사의식)의 몸뚱이 복을 빌고 바라는 祈福宗敎(기복종교)의 샤머니즘에 빠진 宗敎儀式(종교의식)으로 하나님을 雜神水準(잡신수준)으로 偶像崇拜(우상숭배)의 종교로 墮落(타락)시킨 害惡(해악)에 誤導(오도)되고 宗敎催眠(종교최면)에 걸린 이스라엘 민족들의 죽은 靈魂(영혼)을 靈性(영성)으로 일깨우고자 하신 말씀으로써

 

잘못된 유대교로 因(인)해 하나님을 바르게 알질 못하면서도 스스로 저들이 하나님을 바로 안다면서 본다고 하는 자들의 잘못된 영안을 소경되어 멀게하고 성령으로 가듭난 참 영안을 뜨게 하겠다고 한 것을 이렇게 말씀을 하신 것인데

 

바리새인들은 이걸 못알아들으니까 그럼 우리도 소경인가? 하고 엉뚱하게도 되묻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차라리 하나님에 대해서 전혀 몰랐던 영적 소경이면 오히려 죄가 없을 것인데 옳게 알질 못하고 몸뚱이 욕심만으로 迷信水準(미신수준)의 하나님을 안다고 한 유대교도들의 그 驕慢(교만)과 我執(아집)으로 영적 소경이된 저들 죄의 굴레를 결코 벗어날 수가 없다고 하신 것이다.

 

몸뚱이 삶에서는 肉身(육신)의 눈인 몸눈을 번쩍 뜨고 해야 하지만

 

精神(정신)을 集中(집중)해야 하는 祈禱(기도)나 冥想(명상). 參禪(참선)을 할때는 肉身(육신)의 문인 몸눈을 닫아 지긋이 감고 세상을 닫는 것이다.

 

이것은 몸눈을 닫아 소경이 되고 정신의 눈인 영안을 떠 내 속알과 이어진 하나님 성령의 완전한 사랑에 나도 하나가 되고싶다는 靈的呼吸(영적호흡)의 懇切(간절)한 바램인 것이다.

 

마태복음 6장 22절서 23절 말씀에

 

『눈은 몸의 燈(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냐 』하였다.

 

이것은 몸눈인 肉眼(육안)과 마음 눈인 靈眼(영안)을 對比(대비)하여 하신 말씀이다.

 

몸눈은 이 세상을 살아갈 몸뚱이의 등불이고 靈眼(영안)은 마음(영혼)의 등불로 하나님 나라를 찾아갈 한줄기 聖靈(성령)의 빛이라는 말씀을 이렇게 말씀을 하신 것이다.

 

​사람들은 몸의 등불인 몸눈의 所重(소중)함은 다들 잘 알면서 자신의 靈(영) 속에 있는 정신을 밝혀줄 눈인 靈眼(영안)에 대해선 캄캄함을 일깨워 주시는 말씀으로 몸눈이 밝거나 어두우면 物質(물질)을 보고 못보는 것으로 끝나지만 마음 눈이 어두우면 삶 전체가 暗黑(암흑)세계를 벗어날 수가 없다는 말인 것이다.몸눈이 소경이고 귀가 먹고 벙어리인채 삼중고로 肉身(육신)의 문이 닫힌채 태어난 헬렌켈러는 한평생을 못보고 못듣고 말못한채 살았지만 그의 삶은 하나님을 榮光(영광)가운데 드러내는 삶을 살았고 보고 듣고 말한다는 많은 사람들을 오히려 부끄럽게 하기도 한 인물이라 할 것이다.

 

​몸뚱이의 눈은 몸뚱이가 사는 동안 몸뚱이의 등불 役割(역할)을 하는 빛의 눈이지만 몸뚱이가 죽으면 썩어 없어질 한때의 물질로 끝나는 것이나

 

정신의 눈인 靈眼(영안)은 남도 죽음도 없는 永遠(영원)한 생명길을 비춰줄 永生(영생)의 빛인 것임을 드러내신 말씀인 것이다.​

 

몸뚱이 눈의 소중함과 그 몸뚱이 눈에서 마음의 선한 빛이 서리어 빛나는 것과 마음의 악한 모짐이 어른거리는 모습을 描寫(묘사)한 孟子(맹자) 離婁上篇(이루상편)의 말씀을 옮겨보면

 

存乎人者莫良於眸子(존호인자막량어모자)라 하여

 

사람의 몸뚱이에 있는 것으로 눈동자보다 더 어질고 善(선)한 것이 없다 하였고

 

眸子不能掩其惡(모자불는엄기악)이라 하여

 

눈동자는 그 마음 속의 惡(악)함을 가릴 수가 없다 하였고

 

胸中正則眸子瞭焉(흉중정즉모자료언)이라 하여

 

마음 속이 곧고 바르면 눈동자가 맑고 밝게 빛난다고 하였고

 

胸中不正則眸子眊焉(흉중부정즉모자모언)이라 하여

 

마음 속이 정직하질 못하면 눈동자가 흐리고 음흉해진다 하였고

 

聽其言也觀其眸子人焉廋哉(청기언야관기모자인언수재)라 하여

 

그 사람의 말을 듣고 그 사람의 눈동자를 살펴보면 사람이 어찌 자기의 속마음을 숨길 수가 있을 것인가 하였다.

 

유대교의 信仰(신앙)은 몸뚱이 눈으로 보고 마음 나인 自我(자아)로 慰勞9위로)와 安堵感(안도감)을 確認(확인)하고자 하는 贖罪代贖(속죄대속)의 祭祀宗敎信仰(제사종교신앙)으로 祭祀長(제사장)들이 그 祭祀儀式​禮拜(제사의식예배)를 執展(집전)하는데 짐승을 자기 대신으로 죽여 그 피에다 자신의 罪(죄)를 轉嫁(전가=뒤집어 씌움)하여 祭壇(제단)에 바쳐 하나님께 짐승의 피를 사람의 죄를 代身(대신)하여 받으시고 罪(죄)를 赦(사=용서)하여 주시고 몸뚱이 삶의 祝福(축복)을 주실 것을 빌고 바라는 儀式禮拜(의식예배)를 祭祀長(제사장)들이 主管(주관)하고 執展(집전)하는데

 

이게 巫堂(무당)들이 하는 굿이나 푸닥거리같은 煞(살)풀이하고 한치도 다름이 없는 샤머니즘의 儀式(의식)과 祭祀(제사)의 信仰(신앙)인 것이 아닌가

 

오늘날의 牧者(목자=교황. 추기경을 비롯한 목사나 신부)나 聖徒(성도)들이 드리는 敎會(교회)의 禮拜儀式(예배의식)도 이와 별반 달라진 것이 없다 할 것이라 할 것이다.

 

거룩의 貌樣(모양)만 있고 苛憎(가증)스런 僞善(위선)이 엎드린 그런 것은 아닌지 돌아볼 일이라 하겠다.

 

神靈(신령)과 眞情(진정)으로 마음의 골방에서 생명 걸고 하는 기도를 하나님은 하시라고 하신 것이지

 

북치고 드럼치고 전자악기로 擾亂(요란)떨고 通聲(통성)으로 개구리 울듯이 떼쓰듯 울고 부르짖으며 하는 그런 형식의 기도를 하나님이 과연 기뻐하시고 그런 祈福(기복)의 기도를 얼마나 듣기나 하실 것인지는생각해 볼 일이 아니겠는가

 

예수님은 이런 贖罪代贖(속죄대속)의 샤머니즘적 제사종교가 하나님의 眞理(진리)하고는 아무런 相關(상관)도 없는 病(병)든 信仰(신앙)이라며 서기관들과 제사장들 율법학자들인 그당시 유대교 지도자들을 灰漆(회칠)한 무덤같은 자들이다. 羊(양)을 勒脫(늑탈)하는 이리떼들이다. 毒蛇(독사)의 자식들이다라며 極端的(극단적)인 叱陀(질타)를 하셨던 것이다.

 

예수님은 유대교의 舊習(구습)에 젖은 샤머니즘적 祭祀宗敎(제사종교)의 그릇된 信仰(신앙)을 하나님이 우리 사람의 心靈(심령) 밭에 播種(파종)해주신 하나님 씨인 하나님의 성령 씨앗으로 거듭나는 것만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바른 信仰(신앙)이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섬기는 신앙이란 靈性信仰(영성신앙)으로 宗敎改革(종교개혁)을 해야 한다는 것을 十字架(십자가)에 못박혀 죽기까지 생명던져 하나님 말씀을 說破(설파)하시고 가르치셨던 하나님의 참 아들이었던 것을 알아야 하는데

 

안타깝게도 그당시 유대교 旣得權勢力(기득권세력)이었던 宗敎指導者(종교지도자)들에겐 그들의 종교 기득권의 根幹敎理(근간교리)와 敎儀(교의)를​ 뿌리채 否定(부정)하고 뒤엎어버리는 예수가 異端(이단)으로 烙印(낙인) 찍혀 갖은 迫害(박해)와 嫉猜(질시)와 謀陷(모함)과 없신여김을 받은 끝에 결국은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옆구리에 창찔린 傷處(상처)에서 흐르는 물과 피를 사신채로 한방울 남김없이 다 흘리시고 죽음을 맞게되신 것이 아닌가.

 

예수님을 이렇게 惡辣(악랄)하게 죽음으로 처단한 자들이 바로 하나님을 믿는다던 당시 유대교의 宗敎集團(종교집단)의 지도자들인 것이다.​

 

예수님이 설파하신 靈性信仰(영성신앙)의 말씀 씨앗이 오늘날 까지도 온전히 싹을 틔우고 꽃으로 활짝 피어나질 못하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예수님 靈性信仰(영성신앙)의 가르침에는 靈眼(영안)이 떠지질 않고 몸뚱이 삶에 복받고자하는 祈福信仰(기복신앙)에 轉倒(전도)된 몸뚱이 잇속눈만 다들 밝히는 짐승들이라 그런 것일 것이다.

 

요한복음 10장 7절서 10절로 말씀하시길​

 

『7: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羊(양)의 門(문)이라

 

8: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竊盜(절도)요 强盜(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9:내가 문이니 느그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救援(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10:盜賊(도적)이 오는 것은 盜賊(도적)질하고 죽이고 滅亡(멸망) 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하고 더 豊盛(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하였다.

 

이 말씀에서 예수님 자신이 이 세상에 와서 사는 목적을 밝히시고 있는 것을 알 수가 있다.

 

舊約(구약)의 유대교가 히브리민족이 自稱(자칭) 하나님의 選擇(선택)을 받은 민족으로 이스라엘 사람들만의 하나님이었고 民族神(민족​신)인 偶像的(우상적) 하나님이었던 反面(반면)에

 

예수님에게서의 하나님은 世界萬邦(세계만방) 모든 인류의 하나님으로써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먹고 살아야 할 어린 羊(양)들로 보았고 그 어린 양들이 하나같이 예수님 자신처럼 하나님 성령으로 거듭나 하나님의 참 아들이 다 되어 하나님나라 天國門(천국문)을 들어갈 수 있는 양들의 문이 되고자 양들에게 하나님 말씀인 꼴들을 먹이는 하나님의 사역자로 왔다는 것을 밝히 드러내시는 말씀이다.

 

여기서 강조하는 "나나​" "내가"란 말은 몸뚱이 예수를 指稱(지칭)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성령으로 거듭난 얼나의 예수를 말하는 것이고 사람이면 다 자기의 心靈(심령) 속에 숨기워 있는 하나님 씨앗인 성령의 얼나를 말하는 것으로 각 사람 속에 이미 스스로가 문을 열수 있는 하나님 나라의 열쇠가 자신에게 있음을 예수님이 이렇게 일깨워주시는 말씀이신 것이다.

 

먼저 왔던 나중에 오던 하나님 성령으로 거듭나질 않은 使役者(사역자)는 다 竊盜(절도=훔치는 도둑)고 强盜(강도= 강탈하는 도적)로 양들의 것을 盜賊(도적=훔치는 도둑)질하고 强奪(강탈)하고​ 끝내는 양들을 滅亡(멸망)의 길로 내모는 삯꾼 牧者(목자)인 가라지 빈쭉정이로 양의 탈을 뒤집어쓴 이리떼란 것이고

 

하나님이 주신 자신 심령 속의 하나님 성령으로 거듭나 얼나의 復活(부활)을 가르치는 使役者(사역자)만이 참된 牧者(목자)라는 것을 分明(분명)하게 가르치신 말슴인 것이다.

 

누구는 미워하고 누구는 사랑한다면

 

이것은 사랑도 아니고 사라의 감정에서 갈라지는 사람들 자신의 잣대에 따른 好惡(호오)에따른 본능적인 몸뚱이의 慾求(욕구)와 바램에 의한 利己的感情​(이기적감정)의 遊戱(유희)일뿐이지 결코 사랑일 수가 없는 것이다.

 

사람들의 사랑이란 相對的(상대적)이고 條件的(조건적)이고 自己中心的(자기중심적)이고 自我(자아)의 잣대로 裁斷(재단)된 본능적 욕구와 利己的慾心(이기적욕심)으로 얽힌 感情(감정)의 遊戱(유희)인 것이고 이걸 사랑으로 錯覺(착각)하고 속고 사는 것이지 이게 결단코 사랑은 아닌 것임을 어쩌랴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寃讐(원수)까지도 진정 사랑하고

 

나를 거꾸러뜨리려고 謀陷(모함)하고 헐뜯고 誹謗(비방)하고 逼迫(핍박)하고 詛呪(저주)하는 자들을 위해서도 懇切(간절)한 祈禱(기도)를 해줄 수 있는 믿음의 참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예수님이 가르치신 말씀인데

 

이걸 머리로마ㅣㄴ 알고 입술로만 떠들고 참된 행함이 없다면 다 헛것인 것이다.

 

孟子(맹자)님 말씀에도

 

仁者無敵於天下(인자무적어천하)라 하여

 

어진이는 천하세상에서 미워 할 적이 없다고 하였다.

 

참으로 善(선)하고 어질고 사랑을 아는 사람은 어느 누구도 미워할 자가 없고 적으로 삼을 자가 없다는 말이다.

 

여기서 仁者(인자)는 小我(소아)인 個體(개체)의 自我(자아)를 滅己(멸기)하고

 

나와 너의 나뉨과 差別(차별)이 없는 大我(대아)인 靈我(영아)의 얼사람으로 거듭난 大同(대동)의 精神人(정신인)을 말하는 것으로 聖人(성인). 君子(군자)와 같은 말인 것이다.

 

석가 붓다님이 말한 法身(법신)이나 예수님이 말한 아들이란 말은 같은 뜻의 말로 하나님의 永遠(영원)한 生命(생명)인 얼나를 말하는 것으로 大我(대아)와 같은 말인 것이다.

 

요한복음 10장 17절서 18절 말씀에

 

『17: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18: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權勢(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하였다.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에서

 

목숨을 얻기 위한다는 목숨은 永生(영생)의 목숨을 말하는 것이고

 

목숨을 버린다는 목숨은 肉身(육신)의 목숨인 몸 생명의 목숨을 말하는 것인데

 

이게 무슨말인가 하면

 

하나님 聖靈(성령)으로 거듭나 참나의 靈我(영아)인 얼나가 되면 하나님의 아들로 하나님의 永遠(영원)한 根源生命(근원생명)인 永生(영생)의 生命(생명)을 얻는다는 말이고

 

하나님은 이런 얼나로 거듭난 사람이 신령과 眞情(진정)으로 마음과 뜻과 생명을 다하여 하나님을 찾는 사람을 찾고 사랑 하신다는 것이고

 

버린다는 목숨은 참나를 담고 있는 겉 껍데기인 몸뚱이 나의 몸 목숨의 自我(자아)가 버려야하고 내가 져야 할 十字架(십자가)로 거짓의 나임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람 各者(각자)에게 自由意志(자유의지)로 選擇​(선택) 할 수 있도록 사람에게 맡기신 일이지 하나님이 審判(심판)해서 뺏거나 주고 하는일이 아니라는 것을 밝히신 말씀이다.

 

하나님의 聖靈(성령)으로 거듭나​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 하나님 나라에 드느냐 아니면 몸뚱이의 感覺(감각)과 感情(감정)에 捕虜(포로)가 되어 몸뚱이에 종질하며 살다가 영원히 몸도 영도 滅亡(멸망)의 奈落(나락)으로 떨어지는냐 하는 것이 다 사람 個個人(개개인)의 自由意志選擇(자유의지선택)에 맡기신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씀을 이렇게 밝히신 말씀이다.

 

宗敎(종교)와 信仰(신앙)에서 知性(지성)과 靈性(영성)이 시들어버리면 남는 것은 죽으면 썩어 없어질 物質(물질)인 몸뚱이의 福(복)을 빌고 바라고 貪着(탐착)하는 祈福信仰(기복신앙)의 샤머니즘으로 墮落(타락)하여 저만 옳다는 獨善(독선)과 盲目的(맹목적)인 狂信​(광신)만 남게되는 것일뿐임을 우리는 이 세상에서 흔치않게 目睹(목도=봄)하는 일들이 아닌가 말이다.

 

 

요한복음 10장 30절에서 예수님 말씀이 있기를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 』하였고

 

38절에는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네 있음을깨달아 알라 』하였다.

 

이 말씀을 보고 예수가 聖肉身(성육신)하신 하나님이고​ 하나님이 곧 예수님이라고 생각한다면 이거야말로 예수님 말씀을 엉뚱하게 잘못 알아 듣는 것이요 바로 이런 사람들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靈的(영적)으로 소경인 사람인 것이다.

 

當時(당시) 유대인들은 이 말을 듣자 예수가 僭濫(참람)하게도 自稱(자칭) 자기가 하나님임을 稱(칭)한다면서 예수를 돌로 쳐 죽이려고 벌떼처럼 대들었다고 한다.

 

여기서 나와. 내 . 내가란 당시 하나님 말씀을 전파하던 예수님 자신을 指稱(지칭)하는 대명사이기도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몸뚱이 예수의 自我(자아)로써의 예수를 나라고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 성령으로 거듭나 깨달음으로 새로난 靈我(영아)인 얼나의 예수를 말하는 것으로

 

예수님 心靈(심령) 속에 본디 하나님께서 심어두었던 하나님 성령 씨가 하나님 성령의 영의 나로 참나이고 얼의 나이며 하나님 성령 줄고ㅓ 하나로 이어진 하나님 아들의 나임을 이렇게 말씀을 하신 것이다.

 

또한 예수님만 나와 아버지는 하나라는 것이 아니고

 

사람이면 누구든지 다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성령으로 거듭나 靈我(영아)인 얼나의 精神人(정신인)이 되기만 한다면 본디부터 나와 하나님이 하난라는 진리를 깨닫게 된다는 것이 예수님의 이 말씀 속에 감추어진 숨은 뜻인 것이다.

 

해서 사람의 心靈(심령) 속에 하나님의 씨인 聖靈(성령)의 씨가 있으니 하나님이 내 속에 있다고 하신 것이고

 

無限宇宙(무한우주)의 하나님 품 속에 하나님의 성령으로 꽉 차있으니 내가 또한 하나님의 품 속에 있다고 말씀을 하신 것이다.

 

이 말을 당시 유대인만 못알아 들은 것이 아니고 바울도 못알아 들었기에 예수님을 성령으로 孕胎(잉태)하신분이라며 하나님자리에 동격으로 올린 것뿐만아니라 예수님을 믿어야 十字架寶血功勞(십자가보혈공로)로 救援(구원)받아 天國(천국)간다는 駭怪(해괴)한 妄言(망언)의 敎儀信仰(교의신앙)을 떠벌린 것이고 오늘날 그리스도교의 신앙이 바울의 敎儀(교의)와 敎理(교리)일색이라 예수님이 목숨바쳐 가르치신 靈性信仰(영성신앙)의 참가르침이 뒷전에 밀려나 稀微(희미​)해져버린 것이 오늘날 그리스도교의 病弊(병폐)라 할 것이다.

 

사람의 심령 속에 하나님의 씨가 播種(파종)된 것으로는 사람은 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잉태되었다는 것이 예수님 말씀의 참뜻인 것이다.

 

요한 일서 3장 9절 말씀에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 속에 거함이요 저도 犯罪(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하였다

 

이 말씀의 뜻이 사람의 심령 속에는​ 너나 없이 다 하나님의 성령 씨가 들어 있다는 말이고 이 성령 씨가 참나요 하나님의 아들될 하나님의 씨라는 것을 스스로 알고 깨달아 찾고 못찾고는 사람의 일에 속한다는 말씀인 것이다.

 

요한복음 11장 25절서 26절로 예수님이 말씀 하시길

 

『25:나는 復活(부활)이요 生命(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永遠(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하였다.

 

여기에 나오는 <나>도 몸뚱이 예수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성령으로 거듭난 하나님 聖靈​(성령)의 靈我(영아)인 얼나의 예수를 말하는 것이고

 

또한 하나님 성령으로 거듭난 모든 사람의 얼나도 여기의 <나>에 공통의 나로 들어가는 것이다.

 

自我(자아)의 나로는 各個體(각개체)의 나로 너와 나로 다르지만 靈我(영아)인 얼의 나로는 하나님 성령으로 거듭난 나로 하나의 나인 것이라서 그런 것이다.

 

내 속에 있는 하나님 씨의 나가 곧 復活(부활)의 씨요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의 씨라는 말이 25절 말씀에서 말씀하신 예수님 말씀의 참 뜻인 것이다.

 

예수님이 여기서 말한 復活​(부활)이란 肉身(육신)인 몸뚱이의 蘇生復活(소생부활)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본디부터 태어남도 죽어 없어짐도 없는 永生生命(영생생명)인 하나님의 씨로서 내 心靈(심령) 밭에 播種(파종)되어 있던 성령의 나인 영아의 나로 참나요 하나님 아들인 얼나의 나가 성령의 거듭남으로 聖靈(성령)이 恢復(회복)된 것을 復活​(부활)이라고 하신 말씀임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이걸 肉身(육신)의 부활로 알아들은 것이 그리스도교의 盲點(맹점)인 것이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란 말은

 

예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란 말이 아니고

 

자기 심령 속에 있는 하나님의 씨가 참나요 하나님의 참 생명의 씨임을 믿고 성령으로 거듭난 자는 몸뚱이가 죽어 없어져도 하나님 영으로 거듭난 영아인 얼나로는 영원히 산다는 말인 것이다.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란 말에서의 <나>도 예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고

 

사람마다 다 자기 心靈(심령) 속에 있는 하나님 씨가 참나요 하나님의 참 생명임을 믿고 성령으로 거듭난 자는 몸뚱이가 사는 동안에 자기 심령 속에 있는 얼나가 하나님 성령으로 이어진 참나임을 믿고 썩어질 肉身(육신)인 몸뚱이 나의 거짓나인 自我(자아)의 所慾(소욕)을 말끔히 버리고 하나님 아들 삶을 사는 자는 하나님의 영생생명에 들어 하나님과 하나된 영원한 삶에 동참한다는 말씀이다.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가 성경에는 主人(주인)과 종으로 譬喩(비유)하신 말씀이 나오는데

 

이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종으로 주종관계리는 말이 아니고

 

주인을 섬기는 종으로서 종의 마음에는 주인만 있고 종의 마음은 없어야 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섬기는 아들로써 아들의 마음 속엔 하나님만 있어야지 아들의 마음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말을 비유하신 말씀인 것이다.

 

漢字(한자) 怒(성낼노.노할노)자는

 

奴(종노)와 心(마음심)이 합성된 形聲文字(형성문자)로

 

血氣(혈기)를 부리고 발칵하고 火(화)를 낸다는 것이 그 뜻이다.

 

이 글자 한자가 사람이 하나님을 섬기는 深奧(심오)한 뜻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종은 자기 마음은 없고 주인 마음만 종의 마음 속에 있어야 그게 종의 마음인데

 

怒(성낼노)자 처럼 奴(종노)인 종이 心(마음심)인 마음이 生心(생심)했다는 말은 종의 마음에 자기의 마음이 또아리를 틀고 자기를 주장하게 되었고 주인에게 순종하던 것에서 이제 반기를 들게 되었다는 말인 것이다 .

 

이렇게되면 주인 알기를 우습게 알게되어 주인의 令(영)이 권위가 서질않게되고

 

종놈이 자기의 마음 잣대로 잣대질을 할테니가 지금까지 주인한테 종질한게 억울하고 鬱憤(울분)이 치밀어서 화가 날 것은 堂然(당연)할 것이다.

 

여기서 心(심)은 自我心(자아심)을 말하는 것이다.

 

해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섬기고 따르는 아들의 삶은 自我(자아)의 心(심)이 없어야 하는 것을

 

마태복음 26장 39절에서 예수님이 十字架(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하신 말씀에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盞(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願(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願(원)대로 하옵소서 』하였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섬기고 따른 것이 바로 이것이다.

 

예수님도 사람의 몸을 입었으니 어찌 사람의 마음이 없었겠는가?

 

예수님 마음이 있어서 그 죽음의 잔을 피하고 싶은 肉身(육신)의 所欲(소욕)이 있어서 아버지여 할 만 하시거든 이 盞(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 懇切(간절)한 祈禱(기도)를 했지만

 

그러나 바로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하나님 앞에서는 예수님 마음이 하나님 아버지 뜻앞에서 말끔히 비워지고 없어져 죽기까지 종의 마음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을 내 목숨보다 더 귀하게 믿는다는 우리는 果然(과연) 어떠한가?

 

머리와 입술로는 믿는다고 고백하면서도 우리 마음이 하나님 뜨을 섬김에서 自我(자아)가 말끔히 다 죽어지는가?

 

아니면 하나님을 방패막이로 우리의 자아가 하나님 權能(권능)을 憑藉(빙자)하여 거짓으로 죽는 시늉을 내며 하나님을 팔아 或如(혹여) 肉身(육신)의 貪慾(탐욕)을 채우는 일에 마음 눈이 멀어 있는 것은 아닌지를 예수님의 이 말씀에서 다시 한번 우리의 信仰(신앙)을 돌아봐야 할 것이다.​

 

우리 사람들 같았으면 누구없이 아마도 이렇게 기도를 했을지도 모르겠다싶다

 

하나님 아버지 이번 한번만은 아버지 뜻대로 마옵시고 저를 불쌍히 여기시어제뜻대로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신다면 죽도록 하나님을 따르고 섬기겠아오니 한번만 모른척 눈감아주시고 저를 저들의 올무에서 제발 건져주실 줄을 믿습니다.​하고 말이다.

 

지금도 다들 이렇게 기도들을 하고 있는 것이 우리들의 기도일 것이다.

 

예수님의 기도에 비추어 보면 우리의 기도는 틀려도 너무나 엄청나게 틀린다는 것이다.

 

예수님에게 있어서의 육신의 삶모습이 어떠했던가

 

마태복음 8장 22절에 기록되어 있기를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 나는 새도 보금자리 둥지가 있지만 人子(인자)는 머리 둘곳도 없다 』하였다.

 

예수님의 육신 삶은 이처럼 가난하였고 제자들을 전도를 떠나 보내시면서도 너희는 두벌의 옷도 가져서는 안된다고​ 타이르신 분이었다.

 

오로지 유대교의 구습에 젖은 샤머니즘적 信仰(신앙)에 빠져 허우적이는 영적 소경들을 일깨우고자 하나님 말씀을 가르치는 일에 온 精神(정신)을 불태우는 일로 자신의 육신 생명을 불쏘시개 火木(화목)으로 쓰는 일이 예수님의 육신 생명의 價値觀(가치관)인 것임을 예수님의 짧은 공생애 기간을 통해서 알 수가 있는 것이다.

 

너나 없이 이 육신 생명을 성령으로 거듭나 하나님 아들로 사는 이로 정신의 불꽃을 하나님 생각으로 태우는 일에 땔깜으로 써야 할 것이 사람들이 가져야 할 육신 삶의 가치관임을 예수님이 행함으로 가르치신 것이라 할 것이다.

 

이건 붓다님도 똑 같다.​

 

 

몸뚱이 삶이 全目的(전목적)이었다면 太子(태자) 자리에 있던 華麗(화려)한 王宮(왕궁)에 父王(부왕)인 아버지와 사랑하는 아내와 내 몸처럼 사랑스런 아들 라훌라를 내팽개치고 몰래 逃亡(도망)치듯이 出宮(출궁)을 했을 것이며​

 

거지처럼 托鉢​(탁발)을 해서 빌어 먹으며 修道(수도)에 精進(정진)했을 것인가

 

釋迦(석가) 붓다님의 見性成佛(견성성불) 깨달음의 열매가 바로 苦集滅道(고집멸도)의 四聖諦(4성제)가 그것이다.

 

苦(고)와 集(집)은 몸뚱이 나와 마음 나인 自我(자아)​의 현상을 苦(고)와 集(집)이란 다른 말로 나타내신 것이다.

 

苦(고)란 몸뚱이 삶이 통채로 苦海(고해)라고 붓다님이 말씀을 하셨듯이 生老病死(생노병사)의 ①生苦(생고=태어나는 괴로움)와 ②老苦(노고=늙는 괴로움)와 ③病苦(병고=병으로 아픈 괴로움)와④死苦(사고=죽는 괴로움)인 四苦(사고)와

 

⑤愛別離苦(애별리고=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괴로움).

 

⑥怨憎會苦(원증회고=​원망하고 미워하는 사람을 만나야 하는 괴로움)

 

⑦求不得苦(구부득고=구하여도 얻지 못하는 괴로움)

 

⑧五蘊盛苦(오온성고=<色.受.想.行.識)의 다섯가지가 모인 마음이 원하는 것을 다 이루지 못하는 괴로움)까지 해서 八苦(팔고)로 몸뚱이 나의 삶이 통채로 苦痛(고통)과 苦惱(고뇌)의 바다에 빠져 허우적이는 것을 苦(고)라고 말한 것이고

 

集(집)은 <色.受.想.行.識>의 五蘊(오온=다섯 모임꾸러미)이 모인 마음 나를 말하는 것으로

 

自我(자아)의 本能的(본능적)인 利己心(이기심)으로 痼疾的(고질적)으로 굳어지고 병든 마음의 모임을 말하는 것이다.

 

해서 苦(고)와 集(집)은

 

몸나와 마음 나인 自我(자아)가 物質(물질)인 몸뚱이 나에 愛着(애착)하고 執着(집착)한 현상을 말씀 하신 것이다.

 

滅(멸)은

 

이 苦(고)와 集(집)에 貪着(탐착)한 마음이 다 참나가 아니니 이 마음을 끊어내고 죽여야 한다는 말이고

 

道(도)는

 

苦(고)와 集(집)을 滅(멸)해서 죽이고 마음이 텅 비고나면 본디부터 우리 心靈(심령) 속에 있던 니르바나님(하나님)의 佛性(불성=성령)을 보게 되어

 

니르바나님에 이르는 진리의 길에 들어선다는 말을 붓다님은 苦.集.滅.道(고.집.멸.도)의 네 段階(단계)로 말씀을 하신 것이다.

 

붓다님의 이 말씀과 같은 뜻의 예수님 말씀이 요한복음 6장 63절에 있기를

 

『살리는 것은 靈(영)이니 肉(육=몸)은 無益(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靈(영)이요 生命(생명)이라 』하였다.

 

여기서 靈(영)은 사람의 心靈(심령) 속에 있는 하나님의 씨인 聖靈(성령)을 말하는 것이고

 

바로 이 성령의 씨가 참나이고 참생명이고 하나님의 아들로 거듭날 永生生命(영생생명)의 씨앗으로 얼의 나라는 것을 말한 것이고

 

하나님의 씨를 담고 있는 肉(육)인 몸뚱이는 겉 包裝紙(포장지)로써 終當(종당)은 肉(육)의 생명불이 다 타고나면 죽고 썩어 없어질 物質(물질)로 永生(영생)에는 아무런 가치도 없는 無益(무익)하고 虛妄(허망)한 그림자같은 것이라는 것이 이 말씀의 뜻이라 할 것이다.

 

예수님이 이토록 分明(분명)하게 말씀을 하셨는데도

 

이걸 못알아 듣는 것은 다들 몸나를 참나로 알고 몸뚱이 욕심에 홀려서 몸뚱이 욕심으로 믿어서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이제 本文(본문)을 살펴보면

 

1.曲則全 枉則直(곡즉전 왕즉직)이라 하여

 

둥글어져야 옹글어 완전하고 굽어져야 곧아진다 하였다.

 

曲則全(곡즉전) 둥글어져야 옹글어져 온전해진다는 것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自我(자아)의​ 짐승 성질인 貪.瞋.癡(탐.진.치)로 삐죽 삐죽 날카롭게 利己心(이기심)의 칼날로 모서리가 진 極端的(극단적)으로 攻擊的(공격적)이고 排他的(배타적)인 銳利(예리)한 모진 성깔과 血氣(혈기)의 모서리들이 깍이고 뭉쿡해져 둥근 圓(원)처럼 圓滿(원만)해져야 한다는 말을 이렇게 표현하신 것이다.

 

한마디로 自我(자아)가 깡그리 말끔하게 죽어야 한다는 말이다.

 

圓佛敎(원불교)에서 一圓像(일원상)을 니르바나님의 상징으로 表榜(표방)하고 있는 것도 다 나름의 진리가 一圓(일원)에 含蓄(함축)되어 있는 것이라 할 것이다.

 

絶對存在(절대존재)인 하나님을 記號(기호)로 나타낸 것이 둥근 圓模樣(원모양)이고

 

숫자로 나타낼땐 一(하나일)이고

 

文字(문자)​로 나타낸 것이 절대존재로 오로지 하나뿐인 하나인 님으로 하나님인 것이다.

 

枉則直(왕즉직)이란

 

自我(자아)로써의 내가 굽혀지고 謙遜(겸손)해지고 낮아지고 죽어져야 자아에 눌려있던 참나가 꼿꼿하고 반듯하게 回復(회복)되어 일어날 수가 있다는 말이다.

 

마태복음 23장 12절 말씀에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였다.

 

내가 반듯해지려면 먼저 나를 굽히고 내가 낮아지고 내가 겸손해지고 내가 먼저 남을 섬기는 자가 되라는 말씀인 것이다.

 

老子(노자)님의 曲則全 枉則直(곡즉전왕즉직)의 말씀이나

 

예수님의 이 말씀이 같은 뜻의 다른 표현의 말씀이다.

 

이 말씀을 이해는 해도 우리 삶에 행함이 안되는 것은

 

自我(자아)를 참나로 錯覺(착각)하고 몸뚱이에 종노릇 하고 살아서 다 그런 것이다.

 

中庸(중용) 23장에 나오는 曲能有誠(곡능유성)이란 말도 老子(노자)님의 曲則全(곡즉전)과 같은 뜻의 말이다.

 

모진 것이 깍이고 없어져 둥근 曲玉(곡옥)처럼 둥글어지면 誠(참성)을 지녀 원만해질 수 있다는 말이다.

 

깍이고 없어져야 할 모가 진 것이 바로 사람이 타고난 짐승 성질인 貪瞋癡三毒(탐진치 삼독)을 말하는 것이다.

 

짐승 성질의 탐진치 삼독을 극성스레 부리는 사람을 보통 말하길 모진 놈이라고 하는 것이다.

 

탐.진.치 삼독의 모짐을 없애야 참을 지닐 수 있다는 말이 곧 자기 심령 속에 있는 하나님 씨의 참나인 하나님의 성령이 내 심령에서 부활하여 참나의 본디 자기 자리를 회복한다는 말인 것이다.

 

마태복음 5장 48절에서 예수님이 말씀 하시길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하였다.

 

온전하라는 것이 바로 몸나와 마음 나인 自我(자아)에 종노릇하며 살던 迷惑(미혹)된 삶에 執着(집착)했던 몸뚱이 나의 허망한 꿈을 깨고 하나님이 주신 하나님 씨의 성령으로 거듭나 참나를 되찾고 하나님 아들로써 새로 나는 것이 온전해진다는 말인 것이다.

 

莊子(장자)의 말에 內直而外曲(내직이외곡)이라 하였다.

 

內(안내)는 心(마음심)을 外(바깥외)는 身(몸신)을 말한 것이다

 

心直而身曲(심직이신곡)으로 곧 맘이 올곧고 바르면 몸을 굽힐 줄을 안다는 말이다.

 

맘이 올곧고 바르다는 말은 自我(자아)를 내치고 그 자리에 그동안 자아에 짓눌려 기가 죽어 痲痺(마비)되어있던 良心(양심)​이 우뚝하니 섰다는 말인 것이다.

 

 

2.窪則盈 敝則新(와즉영 폐​즉신)이라 하여

 

웅덩이가 움푹 패여야 가득 차게되고 오래 묵고 해져야 새로울 수 있다 하였다.

 

여기서 窪(와) 敝(폐)는 마음 그릇의 상태를 譬喩(비유)한 말이다.

 

窪(웅덩이와. 깊을와)는 웅덩이가 움쑥하니 깊어서 물을 가득히 채울 수 있는 것처럼

 

마음도 생각의 湖水(호수)가 깊어야 참을 가득히 담을 수 있다는 말이고

 

敝(해질폐​. 깨질폐)는 참나라고 생각하는 그 自我(자아)가 낡아지고 해지고 너덜 너덜해져서 散散(산산)조각으로 흩어지고 깨어져 없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해서 窪則盈(와즉영)은

 

하나님을 생각하는 생각의 호수가 깊어지면 그 마음이 하나님 성령으로 가득히 차서 聖靈充滿(성령충만)이 된다는 말이고

 

敝則新(폐​즉신)은

 

自我(자아)가 산산히 깨어져 말끔히 없어져야 心靈(심령)이 새롭게 하나님의 성령 씨로 거듭나 참나를 회복한다는 말인 것이다.

 

 

3. 小則得多則惑(소즉득다즉혹)이라 하여

 

작으면 깨달아 證得(증득)할 수 있고 많으면 迷惑(미혹)하여 홀린다 하였다.

 

여기서 小(작을소)와 多(많을다)로 작고 많다 함도 亦是(역시) 몸나와 마음 나인 自我(자아)를 참나로 생각하는 生心程度(생심정도)를 말하는 것이다.

 

自我(자아)를 참나로 생각하는 마음이 漸漸(점점) 작아지고 작아지면 참나를 見性(견성) 證得(증득)할 수 있는 기틀이 된다는 말이고

 

그렇질 않고 自我(자아)가 참나라는 생각이 점점 굳어지고 많아지면 이런 사람은 참나에서 멀어져 몸이 죽는 날까지도 迷惑(미혹)의 홀림에서 헤어나질 못하고 몸뚱이 종질로 허덕이며 살다가 몸도 영도 함께 영원한 滅亡(멸망)의 那落(나락)으로 떨어지고 만다는 것이다.​

 

大乘佛敎(대승불교)에서는 自我(자아)를 다스려 滅(멸)하고 니르바나님(하나님)께 이르는 여섯가지 주요 戒律(계율)인 六波羅密(육바라밀)로

 

布施(보시).持戒(지계). 忍辱(인욕).精進(정진).禪定(선정)​. 般若(반야)를 가르치고 있다.

 

①布施(보시)는

 

내 것을 남에게 펴 보이고 베풀어 줌으로써 자아의 貪慾心(탐욕심)을 죽이고 없애자는 행함이고

 

②持戒(지계)는

 

佛家(불가)의 五戒(오계)를 말하는 것으로

 

不殺生​(불살생).不偸盜(불투도).不邪淫(불사음). 不妄語(불망어). 不飮酒(불음주)를 實踐(실천)함으로써

 

自我(자아)의 瞋性(진성)인 血氣(혈기)와 성깔을 죽이고 貪性(탐성)인 物質(물질)인 내 몸뚱이와 남의 몸뚱이와 온갖 財物(재물)에 대한 貪慾心(탐욕심)의 불길을 끄고

 

癡性(치성)인 몸뚱이 나인 自我(자아)의 어리석은 짐승 성질의 淫慾(음욕)의 불길을 끄자는 것이다.

 

③忍辱(인욕)은

 

몸뚱이가 죽기까지 참고 忍苦(인고)하여 自我(자아)인 몸뚱이의 精力(정력) 에너지를 精神(정신)을 살리는 불길에 땔감으로 쓰는 일로 정신을 승화시키자는 것이고

 

④精進(정진)은

 

布施(보시).持戒(지계). 忍辱(인욕)으로 자아를 죽이고 니르바나님의 佛性(불성)으로 見性成佛(견성성불)하도록 니르바나님의 불성을 밝혀 나가는 수행을 말하는 것이고​

 

⑤禪定(선정)은​

 

마침내 見性成佛(견성성불=본래면목의 불성을 참나로 깨쳐 알아 보고 깨달음을 이룸​)하여 니르바님(하나님) 속으로 뛰어 들어가 니르바나님과 하나로 一體(일체)가 되는 것을 말함이고

 

⑥般若波羅密(반야바라밀)은

 

산스크릿트어인 梵語(범어)의paramita(파라미타)를 音譯(음역)한 것으로

 

니르바나님의 絶對智慧(절대지혜)를 말하는 것이다.

 

法句經(법구경)에

 

萬物如泡(만물여포) 如意野馬(여의야마)라 하여

 

宇宙萬有(우주만유)의 모든 物質(물질)이란 것들이 다 暫時(잠시) 일었다가 꺼지는 물거품 같고

 

마음에 품는 뜻이란 것도 저 들판에 일고 지는 아지랑이와 같이 덧없고

 

居世若幻(거세약환) 奈何樂此(내하락차)라 하여

 

몸뚱이로 이 세상에 산다고 하는 것도 번쩍하고마는 幻想(환상) 같은 것이거늘 어찌하여 이것을 즐길 수가 있다는 말인가 하였다.

 

법구경의 이 말씀도 몸나와 마음 나인 自我(자아)의 執着(집착)과 愛着(애착)에서 그 執着(집착)을 끊어내고 自我(자아)를 克己(극기)하고 훌쩍 넘어서라는 말인 것이다.

 

 

4. 是以聖人(시이성인)이라 하여

 

이래서 거룩한 사람은 하였다.

 

이래서란 앞에 나온 1에서 3까지의 自我滅己(자아멸기)의 絶對當爲性(절대당위성)을 말하는 것이다.

 

 

5.抱一爲天下式(포일위천하식)이라 하여

 

하나를 품어 세상 처함의 본보기로 삼는다 하였다.

 

하나를 품는다에서의 하나란

 

絶對存在(절대존재)인 하나님을 말하는 것이고 품는다는 것은 몸나와 마음 나인 自我(자아)의 거짓나를 否定(부정)하고 자신의 心靈(심령) 속에 본디부터 있던 하나님 씨인 하나님의 聖靈(성령)으로 거듭난 성령의 靈我(영아)인 나가 하나님 성령 줄로 하나로 이어진 하나님 아들될 나의 얼나이고 참나임을 깨달아 그 참나를 삶의 全目的(전목적)과 價値(가치)와 理由(이유)임을 알아서 생각으로 심령 깊이 하나(하나님)를 오로지 사랑으로 품는다는 말인 것이다

 

마태복음 6장 19절서 21절 말씀에

 

『너희를 爲(위)하여 寶物(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

 

땅에서는 좀이 먹거나 녹이 슬어 못 쓰게 되며 도둑이 뚫고 들어와 훔쳐간다.

 

그러므로 寶物(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하늘나라에서는 좀이 먹거나 녹이 슬어 못 쓰게 되는 일도 없고 도둑이 뚫고 들어와 훔쳐가지도 못한다.

 

너희보물이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하였다.

 

寶物(보물)을 땅에 쌓질 말고 하늘에 쌓으라는 譬喩(비유)로 하신 예수님의 이 말씀을 일부 삯꾼 牧者(목자)들은 정말 몰라서 그런 것인지 알면서도 그런 것인지는 모르지만 하나님의 聖殿(성전)인 敎會(교회)에 作定獻金(작정헌금)에서부터 十一租獻金(십일조헌금).各種感謝獻金(각종감사헌금=생일.개업.승진.득남.병쾌유퇴원.입학.졸업.입사.취업.결혼.이사.주일헌금 등등).特別獻金(특별헌금).

 

節期獻金(절기헌금)등을 아낌없이 감사하는 기쁜 마음으로 精誠(정성)껏 성전에 드리는 것이 하늘에 보물을 쌓는 일이라고 말씀을 한다든지

 

또 성도들도 그렇게 알아 듣는다면 이것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완전히 잘못 알아 듣는 것이라 할 것이다.

 

이 말씀의 뜻은

 

사람이 죽기까지 생명바쳐 사랑해야 할 사랑의 대상을 바르게 認識(인식)하고 참사랑을 實踐(실천)하는 躬行(궁행=몸으로 행함)의 삶을 살라는 것으로

 

땅인 이 세상과 땅에 속한 物質(물질)에 온 정신이 뺏겨 세상을 사랑하고 내 몸뚱이를 비롯하여 세상 모든 물질을 탐내고 욕심부리며 愛着(애착)하는 맛에 홀려서 땅엣 것을 사랑하는 것으로 허우적이질 말고

 

形而下(형이하)의 物質世上(물질세상)이 아닌 形而上(형이상)의 절대자이신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인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은​

 

먼저 내 心靈(심령) 속에 계신 하나님 성령이 하나님 아들로 거듭날 하나님의 씨이고 곧 하나님이시니

 

그 하나님 성령을 참나로 거듭나는 일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첫과제이고 그것이 곧 寶物(보물)을 땅에 쌓던 일에서 보물을 하늘에 쌓는 일로 좁은 문에들어서는 길임을 말씀 하신 것이다.

 

여기서 좁은 문이란 낙타가 넉끈히 빠져나갈 수 있는 바늘구멍 같이 좁디 좁은 길의 입구를 말하는 것이다.

 

이 길은 몸뚱이 나인 自我(자아)의 맘모스로는 지나갈 수 없는 길이고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내 몸생명을 오롯이 내 정신의 먹거리로 불태워 없애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정신만이 지나갈 수 있는 永生生命(영생생명)의 길인 것이다.

 

마태복음 7장 13절서 14절 말씀에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滅亡(멸망)으로 引導(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 가는 자가 많고

 

生命(생명=영생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그 길이 狹窄(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하였다.

 

滅亡(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이 크고 넓다고한 그 길이란

 

몸뚱이를 참나로 알고 물질의 맛과 멋에 貪溺(탐닉)하여 物質(물질)의 奴隸(노예)가 되어​ 물질에 종질하고 사는 自我(자아)의 삶을 말하는 것이고

 

그길 그데로 속아서 살면 끝에는 영원한 멸망으로 인도되어 가는 滅亡(멸망)의 문이라는 것이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문과 협착한 길이란

 

참나로 錯覺(착각)케하는 몸나와 마음 나인 자아가 일으키는 感覺(감각)과 感情(감정)의 아찔한 맛과 快樂感(쾌락감)이 참나를 속게 만들어 멸망으로 이끄는 거짓의 나임을 알아채고 그 거짓의 나인 자아를 던져버리고 내 속에 있는 하나님 씨 성령이 하나님과 아버지와 아들로 이어질 생명 씨앗임을 알아 하나님 성령으로 거듭나 참나를 찾아가는 自我克己(자아극기)로 몸생명을 다 불태우는 險難(험난)한 길임을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좁은 문으로 들어 가려는 길은 나라고 끔찍이도 愛之重之(애지중지)하며 생각하는 몸뚱이 自我(자아)도 버리고

 

내 것이라고 생각하는 父母兄弟(부모형제)도 親人戚(친인척)도 子息(자식)도 아내도 財物(재물)도 다 抛棄(포기)​하고 모든 貪慾心(탐욕심)과 利己心(이기심)도 말끔히 벗어버리고 던져버리고 땅엣 것을 사랑하고 애착하던 미련을 싹둑 잘라내 버리고 내 자아가 온전히 죽어야 하나님 성령으로 새로난 참나인 얼의 나가 들어 갈 수 있는 얼의 나라인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입구의 문인 것이다,

 

몸 생명의 생명불이 다 꺼지기 전애 이 문에 들어 가자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의 길이고 아들의 길이고 사람으로 나서 살아가는 삶의 본래 목적인 것임을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을 하신 것이다.

 

 

6.​不自見故明(부자현고명)이라 하여

 

自我(자아)를 나타내려 않으므로 밝다 하였다.​

 

利己的(이기적)이고 獨善的(독선적)인 自我(자아)의 主觀的(주관적)인 잣대를 버림으로써 내가 내 자신의 잘잘못을 冷徹(냉철)하게 살필 수 있는 기틀이 될 수가 있고 또 남을 나처럼 配慮(배려)할 수 있는 客觀的(객관적)인 立場(입장)이​ 될 수가 있어 易地思之(역지사지)의 크고 넓고 훈훈한 마음의 문이 활짝 열려 마음 씀씀이가 밝고도 明瞭(명료)해진다는 말이다.

 

自我(자아)는 사람 사람마다 다 갖고있는 個體固有(개체고유)의 나로써 본능적으로 자기를 지키고 내세우려는 自己防禦的(자기방어적)이고 自己爲主(자기위주)로 利己的(이기적)이고 排他的(배타적)이고 攻擊的(공격적)인 개체만의 짐승 성질의 나이지만

 

사람마다 각기 그 心靈(심령) 속에 심기워있는 하나님 씨 성령의 나인 靈我(영아=얼나)로써의 나는 個體(개체)오써의 나가 아니고 全體(전체)로써의 나인 성령의 나로 하나님과 성령 생명으로 이어진 하나님 아들의 나이기에 거기엔 個體意識(개체의식)의 나란 없고 全體意識(전체의식)의 얼나밖에 없는 것이다.

 

조개가 자기 가슴팍에 珍珠(진주)를 품어 길어내듯이 자기 심령 속에 본디부터 있던 하나님의 씨를 잘 길러내 전체의식인 하나(하나님)에 歸一(귀일)한 사람들이​ 붓다님이고 예수님이고 노자 장자님이고 공자 맹자님이신 것이다.

 

自我(자아)는 각 個體(개체)의 나로 나고 죽는 일시적인 생명에 갇힌 몸뚱이의 나이지만

 

靈我(영아)인 얼나는 성령으로 거듭나기만 하면 전체이고 절대인 하나님의 根源的(근원적)인 생명이라 영생생명으로 영적 아들인 영아로 얼나인 것이다.

 

얼나가 되기 위해서는 사람마다 각기 자기라고 생각하는 자아가 반드시 죽어 없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몸뚱이 나와 마음 나인 자아에 덮이고 가리운 無明9무명)의 어둠을 벗어던지고 본디부터 내 속의 속에 있던 근원적인 생명 빛인 밝음을 볼 수가 있다는 말인 것이다.

 

 

7不自是故彰(부자시고창)이라 하여

 

자아를 옳고 바른 나가 아니다 하므로 빛나게 드러난다 하였다.

 

어머니가 낳아 준 몸뚱이 나와 마음 나의 自我(자아)가 참나가 아니고​ 참나를 담고 있는 겉 껍데기의 그릇이나 包裝紙(포장지 같은 거짓의 나임을 確然(확연)히 알아채야 한다는 말이다.

 

몸나와 마음 나인 自我(자아)에 홀려서 살면 그게 바로 自己自身(자기자신) 짐승 성질의 貪慾心(탐욕심)에 종질하며 肉身(육신)인 몸뚱이 感覺(감각)과 感情(감정)의 奴隸(노예=종)로 사는 無命(무명)에 갇힌 삶이라는 말인 것이고

 

붓다님 말슴처럼 貪慾(탐욕)의 불길이 뱀의 혀처럼 날름거리며 활활 타오르는 몸뚱이란 집에서 뛰쳐 나올 줄을 모르고 그래도 그게 좋다고 맛이 어떻고 쾌감이 어떻고 하며 喜喜樂樂(희희락락)하며 산다는 것이다.

 

火宅(화택=자아의 육신)에서 불태워 없애야 할 것이 바로 自我(자아)인 것이고

 

苦海(고해=탐욕심의 바다)를 건너 저 彼岸(피안)으로 갈 道具(도구​)로 타고 가는대 쓰여야 할 것이 自我(자아)란 것이 붓다님의 가르침이 아닌가

 

그런데 죽이고 없애고 도구로써서 彼岸(피안)인 얼나의 언덕을 가야 하는 데 이걸 모르고 죽이고 없애야 할 한갖 도구에 지나질 않는 헛껍데기를 참나로 알고 거기에 죽기 살기로 아둥바둥 執着(집착)을 하니 이게 거꾸로 쳐박혀 뒤집어진​ 헛꿈꿍이란 轉倒夢想(전도몽상)이라는 것이 붓다님의 말슴인 것이 아닌가.

 

 

8.不自伐故有功(부자벌고유공)이라 하여

 

자아를 스스로 자랑하지 않으므로 공이 있다 하였다.

 

사람들은 다들 말하길 저 잘난 맛에 산다고들한다.

 

저 잘남 맛이 뭔가​?......

 

저가 잘났고 학벌 좋고 똑똑하고 많이 알고 가진것이 많고 힘도 세고 뭐 자기가 最高(최고)라는 식의 自我陶醉症(자아도취증) 같은​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모가지가 빳빳해지고 얼핏 눈빛이라도 잘못 마주치면 살쾡이처럼 잔뜩 毒(독)을 품은 도끼눈으로 째려보다가 왜 쳐다보냐며 空然(공연)히 트집을 잡고 끝내는 멱살잡이로 막장 싸움까지 벌이는 일들이 일어나질 않는가 말이다.

 

이게 다 어떤면에선 重症精神疾患者(중증정신질환자)들인 甲질들의 행태라 할 것이다.

 

自我(자아)로 살면 甲(갑)의 個體(개체)가 있고 乙(을)의 個體(개체)가 있지만

 

自我(자아)가 없어지면 甲(갑)이다 乙(을_)이다하는 個體意識(개체의식)이 죽어지고 하나라는 全體意識(전체의식)으로 다시 나는 것이다.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을 感覺(감각)과 感情(감정)으로 바로 表出(표출)하는 것이 자아의 사람이라면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는 것을 다시 얼나에 품어 비추어 보고 하나님 뜻에 合(합)한지를 생각으로 곱씹어 본 다음에 易地思之(역지사지) 하는 행함으로 드러내는 것이 얼나의 사람이라 하겠다.​

 

 

9.不自矜故長(부자긍고장)이라 하여

 

自我(자아)로 저 잘났다고 거드름을 피고 잘난체를 않으므로 길고 오래다 하였다.

 

한마디로 矜高倨傲(긍고거오)로 저가 잘났다고 하늘 높은 줄을 모르고 온갖 오만과 교만에 헛바람이 부푼 風船(풍선)에 바람이 빵빵하게 들어 언제 터질지 모를 風船(풍선)마냥​ 거만의 헛바람이 잔뜩든 자아의 사람으로서는 몸뚱이가 죽고나면 바람빠진 풍선의 몰골이 된다는 말이다.

 

 

10.​夫唯不爭(부유부쟁)이라 하여

 

그저 오직 티각태각 다투질 않는다 하였다.

 

5에서 10까지는 自我(자아)가 참나가 아님을 깨쳐 알고 그 自我(자아)를 克己(극기)하고 滅己(멸기)하여 하나님 성령으로 거듭나 얼나가된 사람의 살림살이를 말한 것이다.

 

抱一(포일)로 絶對存在(절대존재)로 오직 하나인 하나님을 心靈(심령)에 꼭품고

 

不自見(부자견)으로 自我(자아)를 드러내질않아 내세우는 自我(자아)가 없고​

 

不自是(부자시)로 自我(자아)로 옳다하질 않아서 是非(시비)가 없고

 

不自伐(부자벌)로 自我(자아)로 자랑하질 않아서 공치사가 없고

 

不自矜(부자긍)으로 自我(자아)로 잘난체를 하질않아서 謙遜9겸손)하여 낮아지고

 

不唯不爭(부유부쟁)으로 오로지 다투질않아 仁者無敵(인자무적)이라는 말인 것이다.

 

 

11.故天下莫能與之爭(고천하막능여지쟁)이라 하여

 

그래서 세상도 더불어 다툴 수가 없다 하였다.

 

다툰다는 것은 個體(개체)인 몸뚱이 自我(자아)를 참나로 알고 사는 짐승 사람들이 지기가 싫어서 일마다 比較意識(비교의식)에서 優越(우월)하고자 티각태각 도토리 키재기식의 다툼을 두고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 씨를 참나로 깨쳐 거듭난 하나님 아들로 人子(인자)요 至人(지인)이되고 個體(개체)의 몸뚱이 사람인 自我(자아)를 克己(극기)하고 거짓의 나로 認識(인식)하여 버리고 하나요 全體(전체)이신 하나님 성령줄에​ 하나로 이어진 전체가된 靈我(영아)인 얼나로서는 相對性(상대성)을 超越(초월)하였기때문에 세상과 다툴일이 전혀 없다는 말인 것이다.

 

몸뚱이 自我(자아)를 참나로 알고 사는 짐승사람들은 貪瞋癡三毒(탐진치삼독)으로 이글거리는 불길이 利己心(이기심)이란 鎔鑛爐(용광로) 속에서 慾望(욕망)과 煩惱(번뇌)란 鎔巖(용암)을 쉼없이 噴出(분출)시키고 있음으로 산다는 자체가 한마디로 戰爭(전쟁)이랄 수밖에 없다 할 것이다.

 

 

12ㅡ13.古之所謂曲則全者(고지소위곡즉전자) 豈虛言哉(기허언재)라 하여

 

예로부터 이르는바 둥글어져야 옹글다는 것이 어찌 빈말이겠는가 하였다.

 

옹글다는 것은 완전하게 완성이 되었다는 말이다.

 

曲(곡)은 굽을곡이다.

 

굽은 것이 옹글어졌다는 것은 둥근 圓(원)이 되었다는 말인 것이다.

 

하나님을 圖形(도형)으로 나타낸 것이 바로 一圓(일원)이다​

 

원불교에선 nirvana(니르바나=하나님)를 一圓相(일원상)으로 나타낸다.

 

여기서 曲則全(곡즉전)이라 하여

 

굽은 것이 옹글어져 원이 되어 온전하게 되었다는 말은 比喩(비유)의 말인데

 

角(각)이진 모서리가 깍이고 쓸려서 漸漸(점점) 둥그스름해지듯이 완전한 圓形(원형)인 동그라미로 되어가는 自然現象(자연현상)을 개울가나 바닷가 海岸(해안)에서​ 찾아볼 수가있다.

 

물결에​ 오랜 세월동안 깍이고 쓸린 돌들이 표면이 潤(윤)이 나도록 매끄럽고 반질반질하고 둥그스름한 圓形(원형)에 가깝도록 둥글어진 것을 보는 것이 그것이다.

 

角(각)이지고 모서리가 졌다는 것은 몸뚱이 自我(자아)의 利己的(이기적)이고​

 

攻擊的(공격적)이고 排他的(배타적)인 貪.瞋.癡三毒(탐.진.치삼독)의 짐승 성질의 貪慾心(탐욕심)으로 성격이 모가지고 敵慨心(적개심)으로 날이선 칼날처럼 날카롭게 銳利(예리)하고 利害得失(이해득실)에 極端的(극단적)으로 銳敏(예민)하다는 말인 것이다.

 

이런 모서리가 오랜 세월을 살다보면 조금은 깍이고 닳아져 뭉툭해지고 무뎌질 수도 있겠지만 이것은 世波(세파)에 시달리고 지친나머지 自抛自棄的(자포자기​적)인 諦念(체념)의 痕迹(흔적)일뿐 근본적인 뿌리 자체가 통채로 뽀혀지는 것은 아닌 것이다.

 

角(각)이진 모서리가 통채로 깍여 둥근 원이되는 길은 오직 하나 몸뚱이 自我(자아)를 否定(부정)하고 하나님 씨를 참나로 깨쳐 거듭나 하나님 아들이요 참으로 사람의 아들인 人子(인자)가 되는 길밖에 없다는 말이 이 말인 것이다.

 

 

14.誠全而歸之(성전이귀지)라 하여

 

참되고 온전히 영글어져 하나님께 돌아가리라 하였다.​

 

 

 

 

 

 

 

 

 

 

 

 

 

 

 

 

 

 

 

 

 

 

 

 

#취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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