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하느님-다석어록 본문
하느님
[다석어록]
하느님이 계시느냐고 물으면 나는 '없다'고 말한다. 하느님을 아느
냐고 물으면 나는 '모른다'고 말한다. 그러나 사람이 머리를 하늘로 두
고 산다는 이 사실을 알기 때문에 또 사람의 마음이 하나(절대)를 그
린다는 이 사실을 알기 떼문에 나는 하느님을 믿는다. 내 몸에 선천적
인 본능인 육욕(肉慾)이 있는 것이 이성(異性)이 있다는 증거이듯이
내 맘에 하나(절대)를 그리는 성욕(性慾)이 있는 것은 하느님이 계시
기 때문이다. 우리들이 바라고 그리는 전체의 거룩한 님을 나는 하느님
이라고 한다. (1956)
I(음은 이, 뜻은 나)가 문제이다. 하늘 아래 I(이)가 나섰다. 하늘 밑
에 이처럼 I가 나섰다. I가 일어나 이렇게 서 있다. 먼훗날에도 이렇게
곤두설 것이다.I는 이 땅을 뚫고 하늘을 뚫고 나간다. 우리의 정신이
우로 올라간다. 이 머리의 이마가 앞잡이 노릇을 하고 우로 올라간다.
이마는 내 님을 맞을 이마(님아)이다. 이 내 머리를 깔고 앉을 수 있는
님은 참이요 얼이신 절대자 하느님이시다. (1956)
[주] I의 음의 뜻은 나이다. I는 세계적으로 공통된 사람인 나(自我)를
뜻한다. 우리말에도 이이. 저이에 이는 I로 사람을 뜻한다.
조상(祖上)에게 올리는 제사는 끝내는 하느님께로 간다. 천자(天子)
는 세상을 대표하여 하느님께 제사를 지내는 것이다. 그것은 곧 백성이
제사를 지내는 것과 같다. 하느님께 제사 지낸다는 데서 개인적인 조상
제사의 우상숭배가 지양된다. 제단에 차려 놓은 제물(祭物)은 하느님
과는 상관이 없다. 음식 차리는 제사는 없어져야 한다. 그것이 있고서
우상숭배를 하지 말라는 것은 말도 안 된다. 참 제사는 성령으로 하느
님과 통해 하느님을 아는 것이다. (1956)
사람의 마음은 언제나 하느님을 생각하고 그리는 궁신(窮神)하는 자
리에 있어야 한다. 하느님을 알려는 것이 궁신이다. 하느님이란 딴 게
아니다. 우리들이 바로 신(神)인 것이다. 지금에는 신(神)의 능력을 나
타내지 못할망정 이 다음에는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것만은 사실이다.
궁극에는 내가 하느님과 하나되겠다는 것이 아닌가. 하느님의 자리에
돌아간다는 말이다 거짓나인 제나(自我)로는 죽고 참나인 하느님으로
솟나자는 것이다. (1956)
사람이 다른 동물과는 달리 곧게 일어서는 것은 우(하느님)로부터
온 까닭이라고 생각된다. 마치 모든 초목(草木)이 태양에서 왔기 때문
에 언제나 태양이 그리워 태양을 머리에 이고 태양을 찾아 하늘 높이
곧이 곧장 뻗어가며 높이 서 있듯이 사람은 하느님으로부터 왔기 때문
에 언제나 우(하늘)로 머리를 두고 언제나 하느님을 사모하며 곧이 곧
장 일어서서 하느님을 그리워하는 것이다. 사람이 하느님을 찾아가는
(窮神)은 식물의 향일성(向日性)과 같이 사람의 가장 깊은 곳에
숨겨져 있는 사람의 본성(本性)이라고 생각된다.
초목(草木)의 향일성과 같은 궁신하려는 본성 때문에 사람은
풀이 땅을 뚫고 돋아나듯이 만물을 초월하여 무한한 발전을 가능케 할
수 있으며 나무가 높이 자라 땅을 덮듯이 사람은 만물을 이기고 다스
리며 살아갈 수 있다. (1956)
하느님을 우리 머리에 이는 것이 이 세상에 나선 목적이요 이길 내
용이다. 하느님의 참빛과 거룩한 사랑을 드러내기 위해서, 하느님을 더
욱 빛나고 뚜렷하게 하기 위해서, 하느님을 우리 머리 위에 받들고 이
기 위해서 우리가 이 세상에 나온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이 세상을
이기는 것이다. (1956)
나는 가끔 이 세상에는 문제가 별로 없다고 말한다. 그것은 다만 하
나(절대)의 님만을 문제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말씀도 하나(절
대)밖에 없다. 모든 문제는 마침내 하나(一)에 연결되어 있다. 문제는
언제나 하나(전체)인데 하나(一)로 참 살고 하나(一)로 돌아가자는 것
이다. (1956)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을
자가 없느니라"(요한 14:6) 길이 되고 진리가 되고 생명이 되는 나가
참나인 하나의 님 (主)이다.
님이 되는 나는 이해(利害)에 밝고 기분을 따지고 짜증과 성을 잘
내고 오만한가 하면 좌절하는 이 제나(自我)와는 다르다. 그 참나인
님은 하나이고 하나가 님이다. 주일(主一)이다. 이러한 느낌조차도 님
이 있어서 그렇게 하는 것 같다. 님(主)되는 나는 참나(眞我)요 얼나
(靈我)인 하느님이다. 그 님되는 나가 내 속에 있다. 각자(各者)의 나
속에 있다. 이 님의 나가 과거 현재 미래 속을 제 주장을 하면서 나
가는 것이다. 이 님(主)의 나를 예수도 찾았고 석가도 찾았다. 우리가
예수와 석가를 배우고자 하는 것은 예수 석가처럼 님(主)의 나를 주
일무적(主一無適)하자는 것이다. 지금 당장은 안 될지 모르나 마침내
그 자리에 갈 것이다. 무적(無適)이란 달리 갈 데가 없다는 뜻이다. 적
(適)은 입에 맞는 음식을 배불리 먹었다는 뜻으로 무적(無適)은 입에
맞는 것이 없어서 안 간다는 뜻이다. 안 간다는 뜻은 가서 묵지 않겠다
는 뜻이다. (應無所住而) 주일(主一)하자는 것이다. (1956)
어제는 공자(孔子)가 온 세상을 구원할 사랑을 인(仁)이라고 했는데
오늘 나는 온 우주의 임자이신 하느님의 사랑을 인(仁)이라고 해본다.
기독교에서는 예수를 사랑의 화신(化身)으로 예수를 믿는다고 하고 예
수를 안다고 하지만 참으로 사랑은 알 수 없는 것이다. 사랑은 다만 화
산(火山)이 터져서 용암(마그마)이 나오듯이 흘러나오는 것이다. 어머
니가 되면 젖이 나오고 사랑이 터져나오는 것이지 젖이 무엇인지 사랑
이 무엇인지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의 사랑에서 터져나온 것이 하늘과 땅이다. 말할 수 없는 하느
님의 사랑이 밑에 깔려서 이 우주가 생겨났다. 이 사랑은 부부사이, 형
제사이, 친구사이의 그런 사랑이 아니다. 말로나 생각으로 도저히 할
수 없는 것이 사랑이다. 사람은 어떻게 이 하느님의 사랑에 참여하는
가? 사람이 얼나로는 하느님의 긋(아들)이기 때문에 아버지인 하느님
을 찾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러나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
님을 모른다. 세상을 미워하는 사람에게만 하느님이 다가오신다. 하느
님이 우리들에게 하느님을 알고 싶은 생각을 일으켜 준다(1956)
우리 인생은 한없이 작은 소자(小子)이나 생각의 긋(얼나)은 참이신
하느님을 찾아간다. 참이신 하느님(절대자)께서 우리 속에 참의 긋(얼
나)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소견(小見)은 그 참이신 하느님
을 잘 알려고 하지 않는다. 참이신 하느님은 말이 없기 때문에 우리가
참이신 하느님을 알려면 여간한 정신 가지고는 안 된다. 세상에는 참이
없다는 어리석은 사람도 있다. 이는 '우주가 참으로 있는가'라고 하는
것과 같으니 이따위 어리석은 생각이 없다고 하겠다. 참이신 하느님을
잘 인식할 때 내가 그리고 세상이 바로 된다. (1956)
참 과학은 철학이다. 언제나 마음속 욕심을 버리고 하느님 아버지의
신비 (神秘)를 찾는 궁신지화(窮神知化)하는 학문이 과학(철학)이다.
하느님 아버지의 신비를 더듬는 궁신지화의 결과가 지식의 학문이다.
참 과학(철학)은 생활의 편리화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아버
지를 찾아 궁신지화하는 것이다. 과학을 바로 하면 하느님 아버지에 대
한 신앙에 이른다. 지금 사람들이 연구하는 것이 앞으로 백 년 뒤만 되
어도 더욱 밝아질 것이다. 우주의 비밀이 밝아지고 하느님이 더 밝아지
고 하느님의 영광이 더욱 밝아질 것이다. 이런 뜻에서 모든 학문이 신
학(神學)이라고 할 수 있다. 학문에는 깊이 파고들수록 언제나 알지
못하는 신비의 세계가 남아 있다. 어떻게 하면 하느님에 대하여 더 알
수 있을까가 나의 문제요 인류의 문제이다. (1957)
하느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 통해야 한다. 이것이 바른
과학이요 신앙이다. 과학도 신통하고 수학도 신통하고 모든 학문이 신
통하다. 세상에 학문치고 신비하지 않는 것이 어디 있는가? 몰라서 그
렇지 알고 보면 신비한 것뿐이다.
과학은 신비한 것이다. 모르면 어리석고 알면 신비하다. 이 세상에 신
비가 없다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이다. 원인과 결과만 알면 신비는 없는
것 같지만 원인도 끝이 없고 결과도 끝이 없다. 일체가 신비인 것이
다. (1957)
아들(얼나)이 아버지(하느님)를 밤낮으로 그려보아야 제 얼굴을
리는 것이다. 아버지는 참고 참고 곧잘 기다린다. 아들은 찾고 아버지
는 기다리고 그리하여 마침내 아버지와 아들의 만남이 인(仁)이다.
부자유친(父子有親)이 인(仁)이다. (1956)
요새 신비한 것, 이상한 것을 찾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것은 학문의
적 (敵)이다. 신앙은 학문 이상이지만 신앙의 결과로 학문을 낳아야 한
다. 궁신(窮神)하면서 동시에 지화(知化)가 되어야 한다. 하느님은 멀
리 밑동을 캐야(報本追遠)하고 높이면서 멀리해야 한다. (敬而遠之) 하
느님을 가까이 붙잡겠다면 안 된다. 하느님은 멀리서 찾아야 하며 그것
이 학문이 되어야 한다. 하느님은 부분이 아닌 전체(全體)이며 여럿이
아닌 하나(絶對)이기 때문이다
학문을 낳지 못하는 신앙은 미신이다. 하느님 아버지의 신비를 찾는
일은 그것이 학문을 낳는 데 있다. 하느님 아버지를 깨달은 이는 연구
에 연구를 계속하여 학문이 그대로 기도가 되어야 한다. 기도는 보편적
이고 심오한 추리가 되어 우리의 정신생명이 최고의 활동을 해야 한다.
추리가 영감이 되어 진리를 깨닫고 법열(法悅)을 체험할 때 우리의 건
강한 육체의 맥박이 하느님을 찬미하는 반주가 되어 뛸 것이다. (1956)
하느님께로 가는 길은 제 마음속으로 들어가는 길밖에 없다. 맘속으
로 들어가는 길은 세상을 부정하고(눈을 감고) 제나(自我)출 초월히
(나를 잊고) 지성(至誠)을 다하여 깊이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속알(德)이 밝아져 하느님의 얼나를 깨달으면 아무리 캄캄한 밤중
은 세상을 걸어갈지라도 길을 잃어버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1956)
나는 하느님을 찾는데 무엇을 바라고 찾는 것은 아니다. 하느님에
복종하는 나다. '내가 이쯤하면 하느님께서 은혜를 주시겠지' 이것이
아니다. 무조건 하느님에게 복종하는 것이다 하느님을 향하여 무엇을
바라며 믿는 것은 하느님을섬기는 것이 안 된다. 이 나를 죽이고 살리
고는 하느님께서 하실 일이고 이 나는 죽든지 살든지 간에 하느님의
뜻을 따라가는 것이 하늘에 머리를 두고 사는 사람의 할 일이다. (1956)
우리는 이미 정신세계에서 하느님과 연락이 끊어진 지 오래이다. 그
리하여 사람들이 이승의 짐승이 되었다. 우리들이 산다고 하는 몸뚱이
는 혈육(血肉)의 짐승이다. 질척질척 지저분하게 먹고 싸기만 하는 짐
승이다. 하느님으로부터 성령을 받아 몸나에서 얼나로 솟날 때 비로소
사람이 회복된다. 예수가 말한 인자(人子)는 짐승에서 사람으로 회꼭
된 것이다. 예수가 말한 인자(人子)는 짐승에서 사람으로 회복된 이를
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의 아들이 곧 사람인 것이다. (1956)
하늘이란 무한한 허공에 무수한 별들이 가득 차 있다. 이 천지 자연
이 모두 하느님이 우리에게 보내주신 글월(文章 편지)이다. 옛날의 석
가와 예수, 가까이 에머슨과 간디는 이 글월을 바로 읽었다. 이 하느님
의 글월을 바로 읽으면 이승에서 익힌 먹고 싸는 짐승 버릇을 끊게 된
다. 짐승 노릇 하는 사람일지라도 매를 때려서 못된 짐승 버릇을 버리
라면 안 된다. 하느님의 글월, 하느님의 말씀을 읽고 듣게 해주면 스스
로 저절로 끊게 된다. 자연의 프로그램에는 다 방정식이 있는데 순서가
바뀌어져서 모두가 어찌할지 갈피를 못 잡고 있다. 우리가 하느님 아버
지께 아뢰을 말씀은 짐승 노릇을 내버리겠사오니 하늘(하느님)생각 이
루도록 해달라는 것이다. 이 사람도 20세 전의 일을 생각하면 참으로
짐승 노릇 했다는 것을 느낀다. (1956)
아버지! 아버지! 하느님 아버지를 부르는 것은 내가 부른다. 아버지
의 모습을 이승에서는 볼 수 없으나 아버지를 부르는 내 맘에 있다.아
무것도 없는 내 마음속에 오신다. 나의 임자(主)되시는 하느님은 과대
망상이 아닌 극기명상(克己瞑想)으로 찾아 간직할 것이다. 하느님이
참나임을 믿는 이는 이것을 계속 믿는다. 하느님 아버지를 생각하는 것
이 참 사는 것이다. 하느님 아버지는 내가 생각한다. 그러나 나만이 생
각하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께서도 생각하신다. 그리하여 나도 하느님
아버지를 생각하게 된 것이다. (1956)
상대 없는 절대자 하느님에게 아직도 너라고 말하면 불경(不敬)이라
고 할 것이다. 하느님을 '영원한 너'라고 한 이도 있다. 하느님 아버지
와 나는 나와 너 사이다. 나 속에 너를 넣어서 나가 나아진다. 예수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요한
14:11)고 했다. 우리가 하느님을 부르는 것은 잊지 않게 하기 위해서
다. 순간이라도 하느님을 잊으면 그 틈으로 다른 생각이 들어오기 때문
이다. 우리는 하느님을 잊지 않으려고 하느님을 찾아 늘 기도를 올린
다. (1956)
주일무적 (主-無適)은 내가 받들 님은 하느님뿐이라 찾아갈 다른
님이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 주일(主一)의 하나(一)에는 큰 하나(一
작은 하나(一)가 있다. 큰 하나(一)는 전체의 하나인 하느님을 말한다.
전체의 하나(一)는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무엇이냐고 물어도 대답하
지 못한다.
상대세계의 원점(原點)을 찾아 '좇아가겠다는 것이 주일무적(主一無
適)이다. 작은 하나(一)는 젊어서 집 한 채 없다가 부모님 살아 계실
때 집 한 채 마련해서 부모님 섬기겠다는 것이 작은 주일(主一)이다.
이 주일(主一)이 없으면 자수성가(自手成家)를 못 한다.
얌전한 사람도 대성(大成)을 하지 못한다. 작은 주일(主一)만 아는
사람은 관(官)에 가서는 얌전한 사무원이 될 것이다. 전체(하느님)를
위하여 그리고 나라를 위하여 봉사하겠다는 주일(主一) 정신을 마지믹
까지 가지고 나갈 사람은 극히 드물다. 큰 님의 주일(主一)을 하자는
목사 스님도 적다. 다른 것은 몰라도 자기 아내나 자식에게 주일(主
一)하자는 이들이 거의 모두 다인 것 같다. 하느님의 하나(一)를 알아
야 한다. 얌전만 하여 작은 주일(主一)에만 힘써도 못쓴다. 우리나라
젊은이는 데릴사윗감밖에 안 된다. 큰 님인 하느님을 찾아야 한
다. (1956)
사람이 정말 모른다고 하는 하느님의 영원한 영성(靈性)과 연결되어
하느님을 사랑하여 하느님이 무엇인지 모르는 일은 끝내야 한다. 하느
님하고 사랑을 해야 한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정신이 나와야 참으로 진
리의 불꽃 말씀의 불꽃이 살리어 나온다. 값어치 있는 것은 생각의 불
꽃밖에 없다. 사상(思想)은 나를 생각의 불꽃으로 태울 때 하느님이
나에게 생각을 살리어 준다. 생각이 잘 피어나도록 살리어 주신다.이
생각의 불꽃이 때로는 강렬하게 피어날 때도 있다. (1956)
정의(正義)가 최후의 승리를 한다는 것은 똑 바른 것이 맨 마지막에
이긴다는 사실이다. 최후의 승리를 한다는 그 정의를 세상 사람들이 아
직 모르고 있다. 정의를 바로 아는 사람, 바로 아는 나라가 없다고 할
수 있다. 누가 정의를 가지고 있느냐고 하면 하느님이 정의를 가지고
있다. 궁극적인 최후의 승리는 하느님이 하는 것이다. 하느님이 곧 정
의이다. 그래서 정의를 좀 알고 싶어하면 하느님을 즘 생각해 보라는
것이다.
하느님이 인정할 때 그때는 진정 정의의 편이다. 다른 것은 다 어떻
든지 하느님에게 따라가겠다든지 하느님을 생각한다든지 하면 그것이
참 정의에 살려고 애쓰는 것이다. 그냥 무슨 주의(主義)나 무슨 신앙
보다는 분명한 모름(하느님)을 속의 속인 빈 맘(空心)으로 찾아가겠다
는 사람이 실제로 하느님의 편이 된다. 하느님의 편이 될 때 참으로 바
르고 옳은 것이다. (1956)
우리는 하느님 아버지의 살림살이를 받은 아들이기에 나아져야 할
것이 보다 나아져야 할 것이 아닌가?하느님 아버지에 대한 참된 생각
이 더욱 자라 하느님 아버지에게 더욱 가까워져야 한다. 이렇게 되는
것을 믿는 것이 나는 종교라고 생각한다. (1956)
내줄 것 내주고 알아야 할 것 더 알려고 하는 그것이 다 무엇인가
하면 하나(一, 절대, 하느님)와 하나되어 하나로 지내기 위해서가 아
겠는가? 그야말로 오늘과 같이 추운 날 따뜻한 집안에서 평안히 보낼
것인데 오늘도 하나(一 하느님)와 하나되고자 여기 나온 것이 아니겠
는가?그렇지 않고서는 움직이려고 해도 움직여지지 않는다. (1956)
안다는 것은 하느님과 교통이 되어서 아는 것이다. 하느님의 성령과
무엇인가 통하는 점이 있어야 바로 옳게 발달이 된다. 무슨 신앙이 아
니더라도 자주 하느님과 통해야 일이 된다. 성경에서도 자연에 성령이
충만하다고 이른 데가 있다. 동양에서는 기상천외 (奇想天外)라는 말이
있다. 참으로 발전시킨다는 것은 하느님이 일러 준 것을 안다는 말이
다. (1956)
우리가 하느님을 그리는 마음으로 하늘을 향하여 일어서지 않으면
일패도지물(一敗途地物)이 되고 만다. 이런 생각만 바로 가져도 좀 일
어선다. 한 번 땅바닥에 쓰러지면 땅에 퍼져 뭉개지고 범벅이 되어버리
고 만다. (1956)
사람으로서 사람 노릇을 하려는 사람은 마땅히 하느님을 알아야 한
다. 하느님의 뜻을 알아야 한다. 온전한 사람이라면 사람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교육하는 데도 사람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가르치는 데 그
근본을 두어야 한다. 학생들이 운동이나 잘한다고 교육한 것이 아니다.
인생의 본질을 가르치는 것을 외면 한 교육은 도둑놈의 교육에 지나지
않는다. (1956)
사물(事物)의 본연(本然)을 지성(至誠)이라고 하는데 하나(절대, 하
느님)에만 지성이 보일듯하다. 흔히 작은 것에서 지성을 찾고 있다. 작
은 물건에는 지성이 있다가도 큰 데 가서는 곧 얼나에 가서는 지성을
빼 버리는 수가 있다. 지성이라는 것은 간단한 것이 아니다. 이 사람이
말하는 지성은 이치(理致)의 지극한 곳에까지 가야 지성이다. 응당 큰
체인 얼의 나라(하느님)로 시원하게 가야 한다. 소극적으로 하면 아무
것도 안 된다. 그러므로 그치기는 참(얼나)에 가서 그쳐야 한다.
사물(事物)에 대하여는 징검다리를 디디듯이 모두를 하나하나씩 지
성으로 디뎌야 한다. 곧이 곧장하게 온전히 밀고 잘 건너가야 한다. 잘
못 디디면 허방에 빠진다. 잘못 딛지만 않으면 지성에 드는 것이다. 몇
번 곧이 밀고 가다가는 에이 이제는 소용없다고 하는 생각이 들면 못
쓴다. 미끄러져 나가면 안 된다. 미끄러지지 않고 줄곧 가서 궁극에는
지선(至善)의 자리에 딱 들어서게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미끄러지지
않는 것(失足)이 문제이다. 지어지선(至於至善)의 자리에 들어서면 저
절로 하느님과 같아지고 하느님과 하나가 된다. (1956)
우리는 으뜸으로 돌아간다. 복원(復元)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로
돌아간다. 귀일(歸-)하는 것이다. 우리는 맨 첨 나온 데로 돌아간다.
회초(回初)하는 것이다.
하느님과 하나되고자 하느님께로 돌아간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세상
의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집은 쉬기 위해 지나가다가 들르는
곳일 뿐이다. 이 세상에서는 자신에게 가까운 것은 다 버려야 한다. 집
에 대한 것은 버리고 싶다. 그러니까 이 지구(地球)도 집에 지나지 않
는다. 마침내는 집을 내버리고 나가야 한다. 지나가는 한 순간밖에 안
되는 이 세상을 버리고 간다면 섭섭하다고 한다. 그런 바보들이 어디
있는가?우리는 한 번 가면 다시 오지 못한다. 일왕불복(一往不復)이
라 한 번 가면 다시 못 오는 길을 우리가 가고 있다. (1956)
유교(儒敎)가 다신론(多神論) 같이 보이나 하느님(天) 한 분을 섬긴
다. 공자(孔子)는 "천신(天神)이 아닌데 제사 지내는 것은 아첨이다(子
曰 非鬼而祭之 ?也-논어 위정편)"라고 했다. 이렇게 자세히 살
펴보면 유교 역시 하느님 하나를 가르치고 있다. 불교 역시 니르바나
(Nirvana)님이 하느님하고 다른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석가모니 ·
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지장보살 등 많이 있는 붓다를 다 섬기는 것이
아니다. 마침내 단 하나 있는 진리(Dharma)의 니르바나님에게 돌아가
는 것이다. 그것을 이러고 저러고 해석하는 것은 사람인 자기가 주(主)
가 되어 여러 가지로 말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1956)
하느님은 우리가 다 아는 것인데 이름을 붙이는 것이 즘 이상하다.
하느님의 이름은 없다는 것이다. 모세가 백성에게 어떠한 신(神)이라
말하리까라고 하자 '나는 곧 나다' (출애굽기 3:14)라고 했다. '엘리'니
'야훼'니 하지 않았다. 이름 없는 것이 하느님이다. 일본 사람들은 성
(姓)을 부르는데 백성끼리는 성을 붙여서 부른다. 그러나 임금(천황)에
게서는 감히 누가 성을 붙여서 부를 사람이 없어 지금도 임금은 성이
없다. 세상에서는 성이 없으면 천한 대우를 받는다. 그러면 일본의 임
금은 성이 없으니 아주 천한 사람이 될 것인가. 이 세상 일이 다 그
렇다. 하느님이란 언제부터 있고 어디에 있다면 하느님이 아니다. 언제
부터 어디서 어떻게 생겨 무슨 이름으로 불려진다면 그것은 하느님이
아니다.
상대세계에서는 하나(一, 절대)라면 하느님을 말하는 것이다. 유(有)
와 무(無)를 다 합친 전체는 하나뿐이다. 하나뿐이라 절대(絶對)이다.
이 전체요 절대인 하나(一)가 하느님이다. 사람들이 유신론이라 무신
론이라 떠드는 소리가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 있다 없다가 무엇인지
알고나 하는 소리인지 모르겠다. (1956)
오늘 아침 방송을 듣는데 그냥 넘길 수 없는 말이 있었다. '소비를
넉넉하게 해야 사는 데 진보가 있다'고 했다. 이런 생각은 하지 말아야
한다. 물자를 소비하면서 산다는 것을 생각을 하면 안 된다. 하느님께
나아가는 것이 참으로 사는 것이다. 우리가 못사는 것은 하느님으로부
터 우리의 정신이 물러서서 못사는 것이지 결코 물자를 적게 써서 못
사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하면 소비를 많이 하는 나라가 잘사는 나라
라는 말로는 이 세상이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의 정신이 신앙으로 향
상하는 것이 잘사는 것이다. 내가 사느니만큼 소비는 따라 오는 것이지
만 소비가 삶의 목적이 될 수는 없다. 신앙을 반대하는 마음으로는 못
산다. 오늘보다 내일을 더 잘산다는 것은 오늘보다 내일에 더 많은 물
자를 쓴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느님께 나아가는 데 오늘보다 내일이
나아져야 하는 것이다. 예수는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먹을까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1956)
역사의 유치시대에도 하나(一, 절대)는 인정했다. 태극(太極)이 하
나(一)인데 원일(元一)이라고 했다. 하나(一)는 우주 만물의 밑둥(根
木)이다. 하나(一)는 주체로서 영(令)을 내린다. 이 이르심(令)은 우리
에게 직접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는 것이 아니지만 하느님의 뜻이
모르는 가운데에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것이 있다. 우리는 항상 이 하
느님의 이르심(元一令)을 받고 있다. 이 밑둥인 하나(一)의 태극은 왜
어떻게 있는지 알 수 없다. 아무도모르고 하느님 자신만이 안다. (1956)
태극(太極)은 하나(一)로 하느님이시다. 그런데 태극이 쪼개져 음양
(陰陽)이 되었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하느님인 태극은 하나(절대)이
다. 태극은 엄연히 하나요 영원히 하나다. 하나(一)가 쪼개지거나 벌어
졌다면 그것은 하나가 아니다. 하나(태극) 속에 이뤄진 음양으로 된 상
대세계는 좋은 것 같으나싫은 것이 상대세계다. 우리는 어떻게든지 이
상대세계를 벗어나 하나의 나라, 절대의 나라, 얼의 나라로 돌아가는
것이다. (1956)
아버지가 아들을 낳아서 아버지가 되는 것이 아니라 난 아들이 아버
지를 발견하는 것처럼 상대(相對)의 요구로써 절대자(하느님)를 인정
하게 되는 것이다. 절대자(하느님)가 우리를 아들의 자리로 끌어올리는
것이다. 절대자(하느님)께서 우리를 참여하도록 만들어 준다. 그래서
상대세계에서 상대적 존재로 사는 사람은 차마 하느님(절대자)의 사랑
에 대해서 말 못 한다. 누가 말하게 하는가 하면 하느님이 말하게 한
다. 그래서 하느님이 조물주가 된다. 만물을 있게 한 창조는 하느님이
한 일이다. 차마 말하지 못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안다는 인(認)자이
다. 차마(忍) 말하다(言)가 합하여 인(認)자가 된 것이다. 말하(言)고
소리(音)듣고 무장(戊)하면 식(識)자가 된다. 이 두 글자가 합해져서
이른바 인식(認識)이라는 말이 되었다. 우리의 인식이라는 것은 이러
한 것이다. (1956)
사람들은 알아야 할 것을 모르면 인식부족(認識不足)이라고 말한다.
하느님(절대자) 한 분만 계시는 것을 있느니 없느니 하고 떠드는 그야
말로 무식한 세상 사람들은 무엇이 인식부족인지도 모르고 있다. 절대
자 하느님은 계신다. 절대자 하느님밖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러므로 절
대자 하느님만은 우리가 인식하고 인식해야 한다. 절대자 하느님이 우
리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느님을 누가 아느냐고 하면 아무도 모른다. 그런데 이 세상
이 괴롭고 어떻게 할 줄 모르는 사람이 하느님을 알려고 할 때 하느님
께서 다가오신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자신이 아버지라는 것을 아들에
게 알게 하고 싶은 것 같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
님 당신을 알고 싶어하는 생각을 일으켜 준다. 말로는 할 수 없는 일이
다. (1956)
하느님 절대자는 로고스의 아들을 낳아 상대세계를 열었다. 아들을
낳지 못하면 확실히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 아버지가 아들을 낳아야 아
들이 확실히 아버지를 인식한다. 절대자 하느님을 아버지로 인정해야
할 우리들이다. 아버지가 아들을 잊을래야 잊을 수가 없다. 아들인 우
리는 아버지를 부른다. 조급한 것이 하나 없다. 아버지와 아들은 나눌
래야 나눌 수가 없고 쪼갤래야 쪼갤 수가 없다. 차별이 있는 것 같으나
떨어지지 않는다. (1956)
소자(小子)가 하느님 아버지를 사모한다. 아버지와 하나되어 아버지
가 되려고 사모한다. 그런데 하느님 아버지를 닮으려고 아버지를 그리
지만 제 모습을 그리는 것밖에 안 된다. 나는 홀로 괴로워하다 못하여
하느님밖에 다른 무엇이라도 그려볼까 여러 가지로 생각하게 된다.
바르게 생각하지 못하고 동서남북으로 방황하며 헤맨다. 말 못하는 지
경에 이르러 땅의 어버이를 모방하여 혼인한 뒤 자식을 낳고 자기 세
력을 키우려 한다. 사람들은 재력, 권력을 잡고는 하느님 아버지처럼
권위를 부리려고 한다. 무슨 자격이 있다고 사람 위에 군림하려 하는지
모르겠다. 사람들이 뭘 좀더 알아야 겠다. (1956)
작을 소(小)자는 땅에서 싹이 터 나오는 것을 그린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싹은 작은 것 같아도 영원한 님과 이어진 한 끄트머리다. 이 끝
은 영원한 님을 향해 찾아 오를 한 깃의 생명을 가졌다. 사람이란 참기
어려운 이 세상에 싹튼 인토생(忍土生)이다. 이 세상은 난삽한 땅이다.
사바 세상에 산다는 것은 살점을 도려내는 듯 아프고 쓰라린 세윌이다.
또한 나는 영원(하느님)을 향해 날아오르는 깃을 지닌 새(烏)다. 작을
소(小)는 땅 위에 나는 박을 그런 것과 같지만 또한 양쪽에 깃을 지닌
새의 모습과 같다. 나는 하느님 아버지를 향해 자라 오를 싹인 소자(小
子)이며 하느님 아버지를 향해 날아오를 새인 소자(小子)다. 나는 부
귀와 명예를 모르고 하느님 아버지만을 사모하는 소자(小子)다. (1956)
우리가 생각할 때 하나(一, 전체)가 무엇인가를 따지어 들어가야 한
다. 그런데 자꾸만 둘(상대)에서 헤아리게 된다. 본래 둘(상대)에서는
헤아릴 수 없는 것이 하나인 하느님이다. 그러나 하나도 의심하지 않고
보낼 수는 없다. 그런데 의심을 해도 이 하나(一)를 잊지 말자는 것이
다. 그래 둘에 있기 때문에 하나를 헤아릴 수 없다(兩在故不測)는 말
이 나왔다. 둘에서는 하나를 헤아리지 못한다. 둘(상대)은 참이 아니
다. 다만 밤을 새고 기도를 해도 한쪽으로 자꾸 마귀 생각이 나고 우상
생각이 난다. 이러한 것은 물론 깨뜨려 버려야 한다. 헤아리지 못하는
것은 신앙이 아니다. 둘이라는 것도 신앙이 아니다. 하나(하느님)뿐이
다 해놓고 이것을 만나 보자고 해도 안 된다. 어떻게 하나를 하여 보겠
다고 하는 것도 안 된다. 단순히 안다는 이것이 하느님이다. 하느님이
라는 것에 하나라 하는 것밖에 다른 것을 더하면 이내 그것은 하느님
이 아니다. 하나라 해놓고 또 무슨 말을 하면 하느님이 아니다. (1956)
태극(太極)은 하나(一, 전체)인 하느님이다. 무한한 공간이요 영원
한 시간이다. 저 태양은 쳐다보지 말고 오직 하나(一, 전체)인 하느님
만 보자는 것이다. (1956)
사람은 하늘과 땅 사이에 있으면서 이 우주의 창조와 조화(造化)를
주도하는 하느님을 돕는 존재이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우리가 머리를
하늘에 곳곳이 두고 다니는 일에서만 그렇게 할 수 있다. 우리가 악
(惡)으로 떨어지게 되면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에 동참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짐승과 다름없게 되고 만다. (1956)
하느님께서 혹시 악을 모르고 계시지 않나 걱정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나 하느님께서는 다 알고 계시니 조금도 걱정할 것 없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이 세상의 모든 일이 다 하느님께서 큰 뜻이 있어서
그러한 것이지 인생이나 역사는 결코 악인이 승리한 것이 아니라는 점
이다. (1957)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빈탕한데' (虛空)가 하느님의 겉모습이라는
것이다. 하느님의 속생명은 얼(성령)이시다. '빈탕한데'는 허공을 내가
순 우리말로 말해본 것이다. 백 칸짜리 집이라도 고루고루 쓸 줄 알아
야 한다. 우주 또는 그 이상의 것도 내 것으로 쓸 줄 알아야 한다.그
래서 빈탕한데인 하느님 아버지의 품에서 살아야 한다. 그리하여 늘 반
성하고 좋은 일에 전력을 다하면 마음이 슬플 때나 괴로울 때나 악해
질 리가 없으며, 악한 놈이 길지 못하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다.
오늘날 입 달린 사람들은 모두가 말하기를 사람이 너무 얌전해도 못
쓰고 정직한 사람은 못사는 세상이라고 말한다. 이 세상은 거의 세기말
적인 말세라고 하지만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하느님의 아들들이 살고
있다. 하느님의 아들들은 겉으로 나타나지 않지만 악에 무릎을 끊지 않
고서 버티고 있다. 그들이 없다면 세상은 오래 가지 못할 것이다. 악한
세상에 무슨 하느님 아들들의 시대가 오겠느냐라고 하지만 하느님 아
들들의 시대는 반드시 올 것이다. 이것을 믿지 않으면 미끄러질 위험이
많다. (1957)
목적이 삶에 있다면 그 참 삶은 하느님(하느님 나라)에게 있지 결코
이 땅에 있는 것이 아니다. (在天不在地) 삶의 참뜻은 보이지 않는 영
원한 허공인 하느님에게 있지 여기 이 환상(幻像)계에 있지 않다.땅
은 물질로 된 상대세계를 말한다. 세상 사람들은 거의 세상의 나라를
잘 다스려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하느님에게 가는 일을 잘 해야지 세
상의 나라를 잘 다스려야 한다는 것은 기어코 헛일밖에 되지 않는다.
사람들은 하느님에게 먼저 해야 할 것을 땅에 먼저 한다. 사는 목적을
하느님에게 두지 않고 이 세상에 둔다.
이 세상에는 우리가 가질 참 목적이 없다. 이 땅에서 참이라고 한것
은 상대적 참이지 온전한 참이 아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머리를 하늘에
두고 몸둥이를 곧게 하여 하늘에 가까우려고 애를 쓰는 것이다. 사람에
겐 할 수 없는 일 해서는 안 될 일이 여간 많지 않다. 사람이 할 수 있
는 일이요, 해야 할 일이란 머리를 하늘에 두고 다니는 일이다. 이것만
이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요, 해야 할 일이다. 이것은 하느님을 사모
하여 우리의 생각(사상)을 높이자는 것이다. (1957)
사람은 하느님을 마음속에 가질(모실) 때 참나(眞我)를 갖게 된다.
하느님이 참나(얼나)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마음에 하느님 모
시기를 싫어한다. 세상에는 하느님은 내게 쓸데없다고 생각한다. 그러
나 하느님의 아들인 그이(君子)는 하느님을 스스로 힘쓰는 데(自彊)
쓴다. 주역(周易)에 자강불식(自彊不息)이란 말이 있다. 자강(自彊)이
란 자기가 자기로(참나)로 산다는 말이다. 자기가 자기 (참나)로 사는
것이 곧이 곧장 사는 것이다. 곧이 곧장으로 사는 것이 가장 잘 사는
것이다. 참나인 얼나의 뜻을 좇아 사는 것이다.
사람은 하나(전체, 절대)의 님을 찾아야 한다. 예수가 아버지를 찾는
다는 것은 하나를 찾는다는 말이다. 둘(상대)에 빠지지 말고 하나(一
전체)를 찾아 가져야 한다. 하나의 님 하느님은 관념의 지로 알고자 헤
매어서는 안 된다. 체험의 깨달음으로 실행되어야 한다. (1957)
하느님이 없다면 어떠한가. 하느님은 없이 계시는 분이다. 몬(물질)
으로는 없고 얼(성령)과 빔(허공)으로 계시기 때문에 없이 계신다. 그
러나 모든 물질을 내고 거두신다. 하느님은 없이 계시므로 언제나 시원
하다. 하느님은 물질을지녔으나 물질이 아니다. 하느님은 모든 물질을
이룬 얼이요 모든 물질을 담은 빔이다. 모든 물질을 거둘 빔이
다. ((1957)
내 정신에 하느님의 얼이 통할 때 눈에 빛이 있고 말에 힘이 있다.
하느님은 바다요 나는 샘이다. 하느님의 얼생명은 내 생각보다 아주 크
다. (1957)
죽음은 삶의 고개를 넘어선다고 본다. 죽음은 하늘나라에 도착하는
것인데 바꾸어 말하면 하느님을 만나는 것이다. 아니 하느님 나라 따로
있고 하느님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이 하느님 나라이고 하느
님 나라가 하느님이다. 나는 인생을 죽음으로부터라고 생각한다. 몸나
가 죽고서 얼나로 사는 것이다. 몸나는 얼나를 기르기 위한 도시락 같
은 것이다. 몸나가 달걀이라면 얼나는 병아리다. 병아리가 다 자라면
알껍질을 깨고 나와야 한다. (1957)
우주의 그 호대(浩大)한 흑암(黑闇)을 음미(吟味)한 가운데 하느님
을 만날 수 있지만 허영인 대낮의 광명(光明) 속에서 하느님을 찾을
수 없다. 우주의 흑암을 음미하는 가운데 우리는 하느님을 찾을 수 있
다. 그래서 나는 광명에서 하느님을 찾는다고 하는 것을 뒤집어서 흑암
에서 하느님을 본다고 한다. (1957)
경의를 표할 수 있는 인격은 하느님 아버지와 교통할 수 있는 아들
의 자격을 갖추겠다는 데 있다. 이제 이 시간에 우리는 하느님 아버지
와 얼로 교통이 되었는지 알 수 없다. 하느님과 영통(靈通)하기 위한
오늘 이 시간인 것이다. 피와 살로 된 몸은 짐승이다. 짐승인 우리가
개 돼지와 다른 것은 하느님과 교통하는 얼을 가졌다는 것밖에 없다.
거짓 빛인 태양 아래서 이 세상에 마음을 내어서 참이 될 리가 없다.
그러므로 몬(물질)에 마음이 살아나 생심(生心)하면 안 된다. 사람이란
물색(物色)해서 집어 쓰겠다고 하자는 것이 아니다. (1957)
아주 빈 절대공(絶對空·하느님)을 사모한다. 우리가 죽으면 어떻게
되나 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없는 절대의 허공이라야 참(眞, 하느님)
이 될 수 있다. 허공은 무서운 것이다. 허공이 참인 하느님이다. 허공
없이 진실이고 실존이고 어디 있는가? 허공이 없으면 우주도 존재할
수 없다. 허공 없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우주는 허공이 있기 때
문에 존재하는 것이다. (1957)
원일물(元一物, 하느님)은 있음(有)이 아니다. 불이즉무(不二卽無)
로 없음(無)이다. 유·무(有無)를 넘어선 절대무(絶對無)의 허공이다.
생·사(生死)를 넘어선 절대생(絶對生)인 영원한 생명이다. 원래(元
來)나 본래(本來)나 같은 말이지만 초목적 (草木的)인 생각을 말할 때
는 본래(本來)라 하고 인생적인 생각을 말할 때는 원래(元來)이다. 원
래(元來)는 무일물(無一物)을 말한다. 그러나 원래물불이(元來物不
二)라고 하면 같은 말로 생각되나 그렇지 않다. 본래 아무것도 없었다
는 뜻인 '원래무일물'은 소극적인 뜻이고 본래는 둘이 아니다는 뜻의
'원일물불이' 는 적극적인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
맨 으뜸의 하나(절대)는 둘이 아니다는 뜻의 원일물불이(元-物不
二) 이것이 하느님이요 니르바나(Nirvana)님이다. 나는 '원일물불이'
를 참나로 믿는다. 참나(얼나)를 제 마음속에 간직하는 진리파지를 자
성(自誠)이라고 한다. 사람은 본래 자성(自誠)에 이르려고 생겼는데
원일물불이(元一物不二, 하느님)에 까막눈이 되어 무엇이 무엇인지 분
간할 줄 모르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1957)
하느님 아들 노릇은 하느님이 주신 얼나(성령)로 하느님 아버지와
같아지고 하나되자는 것이다. 우리는 얼나로 하느님 아들 노릇을 착실
히 해야 한다. 하느님 아들 노릇을 못 하면 불초(不肖)가 되어 아버지
와 같지 않은 사람이 된다. 여래(如來)라는 말도 같지 않는 것을 같게
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얼나로 자꾸 하느님 아버지와 같아지자는 존재
이다. 예수는 아버지를 부르면서 아버지께서 온전하신 것같이 나도 온
전하겠다고 한다. 그러면 사람들은 버릇없는 자식이라고 생각한다. 그
자리가 어디라고 기어올라 가려고 하느냐고 하지만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헤아려 하느님 아버지의 뜻대로 하겠다는 것이다. (1957)
우리는 하느님을 참나로 믿음에 하느님에게 아무것도 바라는 것은
없다. 무엇을 바라게 된다면 그야말로 그것은 우상이 되고 만다. 하느
님을 보지 못하니 안타깝지만 하느님의 자리는 보자는 자리가 아니다.
영원무한에서 하느님을 만나자는 것이 우리의 믿음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1957)
사람이 맨 처음(太初)을 잘 모른다. 나서 죽는 상대적 존재인 우리
가 맨 처음으로 느끼는 하느님은 온통이요 전체요, 완전인 하나(절대)
이기 때문이다. 부분인 우리는 전체를 알 수 없고 불완전한 우리는 완
전을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우리 사람은 전체와 완전을 그리워한다. 그
것은 전체와 완전이 우리의 하느님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느
님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것이 참 삶이다. 그래서 철학자 칸트는 사람을
알 수 없는 이상한 짐승이라고 했다. (1957)
하느님 아버지와 아들은 둘이면서 하나다. 부자불이(父子不二)다.
이것이 부자유친(父子有親)이라는 것이다. 맨 첨이고 참되시는 아버지
하느님을 그리워함은 어쩔 수 없는 사람의 본성(本性)이다. 생각은 그
리움에서 나온다. 그립고 그리워서 생각을 하게 된다. 이를 사람의 참
뜻이라 하여 성의(誠意)라고 한다. 이 뜻은 꼭 이루어져야 한다. (1957)
아는 것과 깨닫는 것은 다르다. 아는 것은 과학의 세계요 깨닫는 것
은 철학의 세계다. 진리는 아는 것이 아니다. 내가 죽으면서 느끼는 것
이다. 이를 꿰뚫어본다(直觀)고 한다. 이때 비로소 우리가 하느님 아버
지를 만날 수 있다. 하느님과 얼굴을 마주할 수 있다. 이를 목샤
(moksha)라고 한다. 이는 어머니가 준 눈으로 어머니를 보듯이 하느
님이 주신 얼(靈)로 얼이신 아버지 하느님을 보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
을 깨달음(覺)이라고 한다. 거짓인 꿈을 깨어 참(하느님)에 다다르는
것이 깨달음이다. 페스탈로치는 이러한 말을 했다. "나의 본성(本性,
밑바탕)이 완성(完成·옹골차기)될 때까지 끌어올려 주는 진리(眞理,
참)여! 나는 너를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찾고야 말 것이다. "(페스탈로
치, 은자의 황흔)(1957)
예수는 하느님 아버지를 드높이는 것을 "나는 아버지께서 나에게 맡
겨주신 일을 다해 세상에서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냈습니다"(요한
17:4)라고 했다. 내가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낸다는 것은 무엇일까? 아
버지께서 나에게 주신 아버지의 본성(얼나)이 완성되었다는 것이다. 얼
나가 온전히 제나(自我)를 다스려 성숙한 인격의 사람이 되었다는 것
이다. 누구의 도움도 받을 필요가 없이 자족(自足)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다. (1957)
꽃은 하늘의 태양이요, 태양은 풀의 꽃이다. 꽃이 꽃을 보고 태양이
태양을 보는 것이 내가 나로 되는 것이다. 내가 나가 된다는 것은 얼이
신 하느님 아버지가 주신 얼로 하느님 아버지와 같은 얼나가 된다는
말이다. (1957)
우리는 하나(一, 절대, 전체, 하느님)로 시작해서 마침내 하나(一)로
돌아간다는 생각을 어쩔 수 없이 하게 된다. 또 그렇게 되어야 하겠다
는 강박한 요구가 우리에게 있다. 이러한 강박관념은 마음이 신경증에
걸린 사람보다도 건전한 사람이 앞선다. 대종교인이나 대사상가는 모
두가 이 하나(一)를 찾고, 믿고, 말했다. 성인(聖人)이나 블다(Buddha)
가 도(道)를 깨달았다, 도를 이루었다, 도를 얻었다는 것은 다 하나(절
대)를 안다는 말이다. 사람은 이처럼 하나(전체)를 찾아 마지않게 생긴
존재다.
사람인 우리는 하나(절대, 전체)인 님을 깨달아 가르치자는 것이다.
그러니 억지로라도 하나(一)를 설명해야 하겠는데 그렇게 하자면 까마
득하게 된다. 하나(一)를 가르친다는 것은 참으로 까마득한 일이다. 그
러나 까마득하다고 해서 하나(一)를 잊을 수는 없다. 하나(一)는 아니
그릴 수 없고 아니 찾을 수 없다. 하나(一)를 모르면 모두 까막눈이다.
하나(一)에 대해서 까막눈이라면 더욱 하나(一)를 찾아야 한다. 까막
눈이란 눈으로 글자를 보기는 하는데 글을 모르는 무식한 사람을 가리
킨다.
우리는 하나(一)를 잘 몰라서 하나는 너무 적은 것 같아 둘,셋, 넷,
다섯, 여섯을 찾고서는 그것들이 더 많고 큰 것인 줄 알고 있다. 그리
하여 하나(一)는 너무 잘 아는 것 같아서 하나(一)를 무시한다. 그러나
온 우주 전체는 하나밖에 없어 절대 하나(一)이다. 그래서 유일오유(唯
一烏有)다. 까마귀 눈은 있긴 있는데 그림으로 그리면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분명히 있으면서도 없는 것이 오유(烏有)다. 우리는 하나(一)
에 대하여 까막눈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래야 맘의 눈이 밝아진
다. 못 보면서 본다고 하면 영원히 까막눈이 되고 만다. (1957)
이렇게 말하면 말이 안 될지 모르지만 나는 '하나(절대)'라는 말 자
체도 불만이다. 우리가 만든 말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둘(二)이 아니면
하나(一)라고 할 수가 있겠는가. 하나에다 하나를 더하면 둘이 되는 하
나는 하나(一)가 아니다. 하나(절대)와 둘(상대)은 모두가 신비다. 무
엇인지 모르는 것이 상대(二)요 절대(一) 그리고 유(有)요 무(無)이다.
우리는 애당초 있다(有)는 것이 무엇인지 없다(無)는 것이 무엇인지
잘 모른다. 상대에서 보니 있다·없다이지, 있다(有) ·없다(無)가 어디
에 있느냐? 절대(絶對)에서는 있다 ·없다가 무엇인지 우리는 생각할
수가 없다. 우리는 절대적 유무(有無)를 모르고 있다. 상대적 유 무는
과학을 수단으로 해서 조금은 알고 있다고 할 수 있지만 이것도 사실
은 그렇게 느끼고 있을 뿐이다. (1957)
'참 그것이 무엇일까? '참은 하나(一)다. 이 하나는 둘이 아닌 절
대이다. 절대의 자리는 있다 없다는 말이 통하지 많는다. 절대의 자리
에서는 있고 없고는 문제가 아니다. 절대는 유·무를 내포하면서 초월
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런 절대존재인 하느님을 찾고 싶고 느끼고 싶
다. 유일불이(唯一不二)의 절대존재(하느님)를 누구보다 먼저 모시고
싶고 섬기고 싶다. 우리는 새삼스럽게 절대존재인 절대진리를 찾는 게
아니다. 본래 내가 가지고 있는 원일(元一)의 님이다. (1957)
요새처럼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시대는 없었으리라고 생각된다. 부
흥회니 뭐니 하면서 하느님이니 주(主)님이니 마구 부른다. 이것은 자
기의 몸을 하느님 앞에 갖다 놓으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은 그대로 땅
위에 있으면서 자기로서는 하기 어려운 일을 하느님에게 심부름을 시
켜먹으려는 것이다. 이름이란 이처럼 제멋대로 함부로 부르는 것이 아
니다. (1957)
삶을 가진 자는 영원히 사랑을 추구해 간다. 그 사람이 올바르게 사
느냐 못 사느냐와 이 세상이 제대로 되느냐 안 되느냐는 사랑의 님을
갖느냐 못 갖느냐에 달려 있다. 하느님은 맘과 뜻과 힘을 다하여 사랑
할 님이요 그 못지않게 사랑해 주시는 님이시다. (1957)
생멸(生滅)이 거듭되는 상대세계인 이 세상에서는 절대진리인 하느
님을 만날 수 없다. 절대진리인 하느님은 하늘 위(얼의 나라)에 계신
다. 우리는 이 절대진리인 하느님을 좇아 올라가는 것이다. 절대가 아
닌 것은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땅 위(地上)의 것은 훨훨 벗어버리고
오직 '하나(一)'의 님만을 생각해야 한다. 하느님을 찾아가는 것이 우
리 사람의 일이다. 절대진리(하느님)를 위해서는 내버릴 것은 죄다 내
버려야 한다. (1957)
사람에게 있어 제일 귀중한 것이 생명인데 그 생명은 내 것이 아니
다. 내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람은 임종에 다다라서 죽음을 피할 수 없
다. 진리도 시간도 공간도 다 내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내 맘대로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내 맘대로 할 수 없는 것을 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망상이다. 그것은 하느님의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내 것이 아니
라고 부정 (否定)해야 한다. 이것을 모르면 어리석다.
감투니 돈이니 탐욕을 부리는 것은 이것을 몰라서 하는 어릿광대다.
그러므로 내 것인 양 타고 앉아 있으려고 하지 말고 하느님께 돌리는
것이 마땅한 도리다. 권토중래(捲土重來)라고 하듯이 일단 하느님에게
돌리고 나서 다시 받아 쓰는 거다. 그렇게 하면 몸도 맘도 가볍다. 내
것이 없으니 가볍지 않을 수 없다. 아무리 올라가도 숨도 차지 않는다.
내 것이라는 소유(所有)가 없으면 무중력 상태에 머무는 것과 같
다 (1957)
하느님 아버지의 형상은 첫빛보다도 밝은 영광스런 모습일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진리라고 한다. 진리란 하느님 아버지의 모습이 드러난
것이다. 그 모습을 보고 우리도 그대로 따라사는 것이 참 삶이다. 하느
님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감탄 안 할 사람이 어디 있을까. 철학은 경탄
에서부터 시작된다고 하지만 사람이 근본 경험을 가질 때에는 깜짝 놀
라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어디로 갈 것인가? 갈 데는 뻔하다. 하느님
아버지께로 가는 것이다. (1957)
하느님은 자연계(自然界)를 다스리는데 보이지 않는다. 하느님은 일
을 하시지만 통히 나타나지 않고 저절로 되게 하신다. 하느님은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대로 우리가 높이 받드는 대로 그렇게 계신 분이 아니
다. 우리가 듣고 알 만한 일에 그의 존재를 나타내시지 않는다. 하느님
이 어떠한 분이라는 것은 결코 단언할 수 없다. 그래서 하느님은 모든
생명과 모든 사람이 머리 위로 받들어 이어야 할 분이시다. 우리가 절
대 이상(理想)으로 삼고서 모시고 싶은 이가 있다면 그 분이 곧 하느
님이시다. (1957)
상대(相對)적인 것은 일체 믿을 것이 못된다. 상대적 존재는 없다가
있어지고 있다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믿을 것은 변하지 않는 빔(허공)
과 얼(성령)인 절대 하나(一)의 님뿐이다. 그런데 하나(一)밖에 무엇이
많아 복잡하다. 그러므론 절대존재(하느님) 하나만 믿고 갈 수밖에 길
이 없다. 하나(一)를 잡으러 올라가는 것뿐이다. 그러기 위해 몸이 지
닌 탐 진 치의 수성(獸性)을 이기어 위로 올라가야 한
다. (1957)
하느님은 절대요 전체인 하나(一)이다. 무극이태극(無極而太極)이
라 오직 하느님뿐이다. 유무(有無). 생사(生死), 물심(物心), 고금(古
今), 자타(自他), 상하(上下), 내외(內外) 선악(善惡), 앙부(仰俯)가
모두 상대적이다. 시시비비(是是非非) 따지는 것은 내가 지은 망령이
요, 시(是)도 아니고 비(非)도 아니다. 하느님(절대)을 믿고 만족하면
일체(一切)의 문제가 그치고 만다. 시비의 문제는 철인(哲人)의 경지
에 가야 끝이 나고 알고 모르고는 유일신(唯一神)에 가야 넘어서게 된
다. 절대(絶對)에 서야 상대(相對)는 끊어진다. 상대에 빠져 헤매지 말
고 절대에 깨나야 한다. 자기가 무지(無知)임을 알아야 한다. 아무리
상대지(相對知)가 많아도 절대지(絶對知)에 비하면 없는 것이나 마찬
가지다. 그러니까 절대요 전체요 하나인 진리(하느님)를 깨치는 것이
가장 급선무(急先務)이다. (1957)
1956년 4월 26일은 내가 일생을 마감하기를 바란 날인데 오늘은 일
년이 지나 한 돌이 되는 날이다. 내 장례를 내가 치르고 오늘은 내 소
상(小祥)을 내가 치르는 날이다. 내년엔 내 대상(大祥)도 내가 치르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런 것이 문제가 아니다. 요는 내가 하느님
을 알고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에 사는 것이다. 그러면 삶이 단순해진
다 하나(一, 하느님)를 알고 살면 다른 것은 몰라도 괜참다. 나는 하
나밖에 모른다. 이 세기 1천9백 년대에 사는 사람들은 하나(一) 아홉
(九)을 이루어야 한다. 하느님을 아는 것이 하나(一) 아흡(九)이다. 하
나 아흡(아옴) 그것으로 족한 것이다.
진리(하느님)인 하나(一)밖에 없다. 하나(一)로 들어가야 한다. 우리
의 마음 머리, 생각 머리, 몸 머리를 둔 곳으로 찾아 나서야 한다. 우
리의 머리가 있는 곳이 하느님이 계신 곳이다. 내가 주장하는 것은 하
나를 알고(知一) 하나로 돌아가자는(歸一) 것이다. (1957)
하느님 아버지 이 얼마나 높은 지경인지 사람으로서는 다 알은 사람
이 없었고 또 없을 것이다. 하느님 아버지의 절대이심을 그저 믿는 것
이 사람의 도리이다. (1957)
하느님께로 오르는 정신은 나이가 아무리 여든 아흔이 되어도 하느
님 앞에서는 아이들이라는 것이다. 이 사람이 오늘 이 시간까지 67살
을 살고 있지만 아직 정신적으로는 어린아이다. 내가 돌아가신 우리 집
아버지보다 벌써 15일째나 더 살고 있다. 우리 아버지는 그 나이에 이
미 이를 것 다 이루시고 가신 지는 몰라도 나는 아직 못다 이루어서
이만큼 더 살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1957)
하느님은 원대(遠大)하여 보이지 않고 근소(近小)한 것만 보인다.
제각기 살겠다는근소한 것들은 수효가 많다. 마치 구더기와 같은 존재
들이다. 단지 구더기하고 좀 다른 것은 자꾸 전체인 원대(遠大)를 찾
아 우로 올라가겠다는 정신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무리 만물의 영
장(靈長)이라 뽐내어도 우로 올라가겠다는 진리정신이 없으면 구더기
와 같은 것이다. 우리는 머리 위에 하느님을 존중(尊重)하게 이고 하
느님께로 더 가까이 올라가겠다는 일념(一念)으로 어렵고 괴로운 삶을
이겨나가야 한다. 하느님의 생명이신 얼(성령)을 찾아가는 것이 삶의
목적이다. 이것이 하느님께 바치는 효(孝)이다. 하느님의 얼이 영원한
생명인 참나이다. 역사를 보면 우리 선조들은 이를 물아가다가 도중에
그만둔 것 같다. 그러나우리는 다시 이어 끝까지 를아가야 한다. (1957)
형이하(形而下)의 물건은 고유(固有)한 것으로 확실하다고 느끼는
것과 무한우주의 허공을 허무(虛無)한 것으로 느끼는데 이 둘을 하나
로 합친 전체가 하느님이시다. 허무는 무극(無極)이요 고유(固有)는
태극(太極)이다. 무극·태극은 하나인데 하나가 하느님이시다. 무극
에 태극이라 전체로는 하나인 것이다. (1957)
무한대의 허공에 충만한 얼이 절대자 하느님이시다. 하느님은 왔다
갔다하는 상대적 존재가 아니고 상대적 존재를 포용한다. 꽃 테두리를
보는데 보통은 꽃 테두리 안의 꽃만 보지 꽃 테두리 겉인 변두리의 빈
탕(허공)에는 눈길조차 주려고 하지 않는다. 꽃을 있게 하는 것은 허공
이다. 나에게는 요새 와서 허공이야말로 가장 다정하게 느껴진다. 허공
을 모르고 하는 것은 모두가 거짓이다. 허공은 참이라 곧 하느님이시
다. (1957)
하느님하고 나하고는 무슨 관계가 있다. 삼독(三毒)이 든 몸 아닌
얼로는 나와 하느님이 하나다. 이 얼나(靈我)가 참으로 더 없는 '나'
대적할 것 없는 나다. 배타적이 아닌 공통의 나다. 빈탕한데(허공)의
하느님과 하나인 얼나를 모르기 때문에 탐·진 ·치를 지닌
나를 나로 내세운다. 이 삼독의 제나(自我)는 온 세상을 다 잡아 먹고
도 배부르다고 말하지 않는다. 죄다 잡아먹고도 그만두는 일이 없다.
이것을 통일이라고 허울좋게 말한다. 그리하여 끝내는 마른 콩 먹고
터져 죽는 소꼴이 된다. (1957)
무수한 은하 우주를 안고 있는 무한허공이 하느님이라 하느님 아닌
것이 없다. 하느님 아닌 것이 없는 것을 아는 데 이르러야 한다. 모든
것을 하느님이 주관하고 다스린다. 나는 학문이라는 학자들의 소리는
죄다가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없다. 내가 말한 것을 학자들이 무슨 소리
를 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나대로 뜻이 있다. 무시하면 무시하는 대.
나는 이것을 보고 간다 본 것이라고는 빈탕한데(虛空)밖에 없다. 참으
로 홀가분하다. (1957)
나는 영원한 당신(하느님)을 늘 쳐다보기 때문에 사람 노릇을 한다
고 생각한다. 영원한 당신(하느님)을 우러르는 것이 우리가 꼭 할 일이
다. 아래로는 이 몸과 맘을 거느리고 하느님 뜻을 좇아 이 세상을 살아
가는 것이 사람의 본연(本然)이다. (1957)
영원한 하느님께서 알아서 으레 하시리라 하고 턱 믿고 가야 한다.
이렇게 하는 것이 천명(天命)을 아는 것이다. 유교에서는 다른 것은
다 그만두더라도 지명(知命)을 해야 한다는 제목 하나는 똑똑히 알 필
요가 있다. 모든 것이 천명(天命)인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것
이 하느님의 섭리 속에서 움직인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공자(孔子)는
부지명(不知命)이면 군자(君子)가 될 수 없다고 했다. 군자란 맹자(孟
子)가 말한 대장부이다. (1957)
우리는 정신을 바짝 차려서 지나간 무지 (無知)를 바로 보고 잊은 전
체(全體)인 하나(絶對)의 님을 찾아야 한다. 하나(一) 이것을 찾아야
한다. 하나(一)는 온전한 하느님이다. 우리는 하나(一)를 얻자는 것이
다. 어떻게 하면 득일(得一)할 것인가? 큰나 속(大我中)에 이것이 있
다. 그러므로 마침내 하느님 아버지에게 매달릴 수밖에 없다. 신앙을
가진다는 것은 대아중(大我中)이다. 큰나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우
리는 '하느님 아버지' 그리고 '참나' 이런 생각을 자주 해보아야 한
다. (1957)
하느님은 잡신(雜神) 노릇은 하지 않는다. 잠깐 보이는 이적(異蹟)
기사(奇事) 같은 것을 하고자 영원한 하느님이 한 곳 사람들 보는 앞
에서 신통변화(神通變化)를 부릴 까닭이 없다. 이런 뜻에서 하느님은
우리가 바라고 생각하는 것 같은 신(神)은 아니다. 참이신 하느님은 없
이 계신다. 신통괴변은 하느님이 하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은 무한한
시간과 무한한 공간이라 큰 늘이요, 한 늘이다. 곧 무한 우주다. 우
의 머리 위에 계셔 하느님이시다. 이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아들은
큰나(大我)요 참나(眞我)라 남을 해칠 것도 없고 요구할 것도 없다.
남이란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자유(自由)이다. 남이 있으면 자유에 제
한을 받게 된다. (1957)
세상에는 두려운 것이 없어야 한다. 이 세상에는 두려운 것이 없다
고 하는 사람은 참을 꼭 잡은 사람이다. 두려운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나(一, 절대, 전체)밖에 없다. 곧 전체이신 하느님만이 두려운 것이
어야 한다. 상대의 개체에게는 절대의 전체가 뿌리요 실체이기에 두려
워하지 않을 수 없다. 참으로 무서워해야 할 것은 무서워해야 한다.무
서워해야 할 것을 무서워하지 않고 무서워하지 않아도 될 것을 무서워
하기 때문에 세상에 될 것도 되지 않는다. 내 몸을 잡아다가 죽인다 해
도 참나인 얼이야 어떻게 하겠는가? 그러니 세상에 무서워할 것은 없
다. 해를 입더라도 이 몸의 목숨밖에 더 날아가겠는가? 무서워할 것은
오직 하나이신 하느님밖에 없다.
이것을 모르니까 불가불 소극적인 의미에서 무서운 것이 없어야 한
다는 것을 첫머리에 내세웠다. 예수도 이런 말을 했다. 적극적으로 하
느님을 무서워하므로 소극적으로 세상을 무서워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 세상은 무서워하지 말고 진리는 무서워하라는 것이다. 절대이신 '하
나' 만 꽉 붙들면 무서운 것은 저절로 사라진다.
간디주의라고 하는 것은 진리파지 (眞理把持)다. 진리파지는 참(얼)
을 꽉 붙잡는다는 뜻이다. 참(얼)을 꼭 붙들어야 산다는 것이다. 참을
잡으면 참사람(眞人)이 된다. 참사람이 되어서 일해야 세상이 바로 된
다. 진리파지를 다섯 가지로 표현했으니 곧 외(畏) 진(眞)·선(善)
의(義)·논(論)이다. (1957)
우리는 여기 이 땅에 붙들려 매였으므로 영원한 하느님 나라에 가야
한다. 천원정(天遠征) 이것이 바로 우리의 실상이다. 하느님 나라로 원
정하여 가는 것이다. 영원한 하느님 나라로 가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요
사명이다. 제나에서 얼나로 솟나는 것이 하느님 나라로 가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가 하느님 나라는 들이치는 자가 들어간다고 했다. 들이쳐
야 깨닫는 단 말이다. 형이상의 얼나를 들이치는 길은 깨닫는 것이다.
하느님 나라는 침략해도 좋다고 언제나 열려있다. 얼은 아니 계시는 곳
이 없는데 닫을 수가 없다. 우리는 앞장서서 하느님 나라로 쳐들어가야
(깨달아야)한다. 우리의 목적은 하느님 나라에 있다. 땅에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길은 영원한 하느님 나라에까지 가는 원정이다. (1957)
우리는 절대진리(하느님)를 찾고 싶다. 그런데 찾기가 어렵다. 유일
불이(唯一不二) 이것이 절대진리이고 그걸 찾을 길도 있다. 그러나 사
람들은 절대진리를 찾기보다 먼저 상대세계에서 당장 먹고살아야 한다
는 것이다. 영원한 생명인 절대 진리를 터득하기 위해 산다는 것을 모
른다. 우리는 절대진리인 원일(元一, 하느님)을 깨달아야 한다. 내가
죽을 때까지 말하고 싶은 것은 원일(元一)이다. 본래의 하나가 원일이
다. 원일은 유일불이다. (1957)
이사야 12장 13절부터 53장의 글은 하느님 여호와에 대한 충성의
노래로 하느님의 종들이 부른 노래이다. 신약성경에서는 사도들이 자
처해서 예수의 종이라고 했다. 구약에도 이같이 종이라고 자처한 사람
들이 있다. 하느님의 종은 이 같은 사람들을 말한다. 그러한 뜻에 천명
(天命)만을 두려워한 공자(孔子)도 틀림없는 하느님의 종이다. 종이란
주인의 뜻에 절대 복종하여 임자를 따르겠다는 것이다.
첫날에 있던 사람을 따르든 종들은 없어졌지만 하느님의 뜻에 절대
복종하는 종은 사람이 있는 날까지 영원토록 있을 것이다. 하느님의 종
이 되다 말다 하면 참으로 하느님의 종은 되지 못한다. 사람의 정신으
로 맘과 뜻을 다해서 하느님 아버지께까지 올라간 종이 예수라고 할
수 있다. 물질을 거슬려서 올라가는 것이 인생이다. (1957)
참(眞)을 찾으면 무엇이냐 하면 하나(一)이다. 하나(一)밖에 찾을
것은 없다. 그 밖에 많은 것은 다 거짓이다. (1957)
우리는 하느님의 무한대(無限大)에 나와서 하느님의 무한대로 돌아
간다. 사람은 생명을 받아 머리를 위로 하고 다닌다. 우리는 땅바닥의
것이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땅바닥에 붙어서는 안 된다. 하늘에 머리
를 두고 하늘로 향하여 위로 올라가려는 본성을 타고난 것이다. (1957)
무엇이든지 큰 가치를 지닌 것은 제가(개인) 가질 수 없다. 큰 보석
은 은행에 맡겨야 한다. 너무 크면 멀어진다. 하느님 아버지도 너무 크
시니까 먼 것 같다. 하느님은 종당엔 나의 참나(眞我)다. 나가 있으니
하느님도 계시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 나는 참나의 그림자와 같기 때문
이다. 참나가 없으면 이 나가 있을 수 없다. 그런데 우리는 거짓나인
제나(自我)에 사로잡혀 큰나요 참나인 하느님을 멀게 생각한다. (1960)
하느님은 없이 계시는 이다. 하느님을 보았으면 좋겠다는 것은 어림
없는 말이다. 그러므로 절대(하느님)의 아들은 빈탕한데(虛空)를 바라
야 한다. 유한우주는 빈탕한데 안에 있다. 요한복음 13장 31절에 "이제
사람의 아들이 영광을 받게 되었고 또 사람의 아들로 말미암아 하느님
께서도 영광을 받으시게 되었다"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말씀인데 이는
참으로 영원한 생명 (얼나)을 바로 잘 그려놓은 것이다. '영광' 을 뚜렷
으로 고쳐야 한다. 또 아버지를 빔 (空)으로 아들을 맘으로 고치면 불교
식 표현이 된다. 부자일치(父子一致)다. 바로 아들(얼나)이 되면 아버
지와 같다. (1960)
우리는 전체에서 나온 부분이다. 부분은 전체를 밝혀야 한다. 부분
은 어디까지나 전체의 부분이기 때문이다. 부분은 전체 앞에서는 없다.
전체만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부분은 부분의 생명인 전체를
잊어서는 안 된다. 예수는 전체를 아버지라고 했고 부분을 아들이라고
했다. (1960)
우리의 생명이 피어 한없이 넓어지면 빔(空, 절대)에 다다를 것이다.
곧 없이 계시는 얼나로 영생하는 것이다. 빔(空)은 맨 처음이 됨으로
모든 생명의 근원이요, 일체 만물의 근원이다. 곧 하느님이시다. 나도
인격적인 하느님을 생각한다. 하느님은 인격적이지만 사람 같은 인격
은 아니라 신격이다. 내가 말하는 인격적이란 '있·없(有無)' 을 초월한
신격으로 전체인 맨 처음이란 뜻이다. 하느님을 찾는데 물질에 만족하
면 안 된다. 있는(有) 것에 만족 못 하니까 없는 하느님을 찾는 것이
다. 그래서 하느님은 없이 계신다. (1960)
니르바나(열반)님이니 하느님이니 진리니 구원이니 하는 것은 이 삶
이라는 꿈을 딱 깨자는 것이다. (1960)
없는 걸로 시작해서 없다로 그친다. 있다(有)는 것도 마침내 없는
(無)거다. 우리가 이를 느껴야 한다. 느끼지 못하니까 즘 느껴보자는
것이다. 있음(有)인 이 세상이 벌려져 있지만 그만둘 것이다. 땅에서
그만은 소극적인 뜻이다. 우로 가서 그만이다는 그이(하느님)만이다.
참으로 하느님 한 분 그이만이 계신다. 그만이다. (1960)
나는 없(無)을 말하고자 한다. 수십 년 전부터 내가 말하고 싶었는
데 말머리가 맘대로 트이지 않았다. 나는 없이 계시는 하느님께로 가자
는 것이다. 없이 계시는 데까지 가야 크다. 태극(太極)에서 무극(無極)
에로 가자는 것이다. 이것이 내 철학의 결론이다. 그래서 내가 태극도
설(太極圖說)을 말한 것이다. 이걸 주렴계가 썼거나 예수가 썼거나 석
가가 썼거나 누가 썼던 문제가 안 된다. 이게 내 속에 있는 것이
다. (1960)
[주]태극: 유한 우주, 무극 무한우주
통(전체)을 걱정하는 사람이 없다. 절대(하나)를 생각하는 사람이 없
다. 모두가 중간에다 희망을 걸어 놓고 그에 맞는 진·선·미(眞善美)
를 만들어 놓고 거기에 다다르면 만족한다. 그러나 예수·석가같이 인
생을 깊숙이 본 이는 절대(하느님, 니르바나님) 밖에는 고해(苦海)요,
죄악으로 본다. 그들은 인생을 영원 절대(니르바나님, 하느님)에 비추
어 보았기 때문이다. (1960)
전지전능자(하느님)를 등힘받침(back)으로 모신다면 아무 걱정 없
다 나는 전지전능자(하느님)를 등힘받침(back)으로 두었으니 너희도
그래 보라는 것이 전도요 증거함이다. (1960)
[주] 등힘받침(back) 배경의 힘
우리는 예(여기: 상대계)에 붙은 것이 아니다. 예는 아무리 좋아도
말아야 한다. 우리는 계(거기: 절대계)에서 예(此岸)로 잠깐 출장 온
것이다. 계(彼)로 가려면 맘을 비워야 한다. 우리는 맘으로 사는데 생
각한다고 잡동사니를 끼워 둬서는 안 된다. 맘이란 또 말자는 것이다.
곧 비워두자는 것이다. 성경, 불경을 보는 이는 계(彼岸)를 생각해야
한다. "예 말고, 계 뵐 빈 맘' 이것은 다른 일과 달라 이런가 저런가
의심할 수 없는 확실한 것이다. (1960)
상대세계의 상대적 존재란 잘못이요 거짓임을 깨달을 때 영원 절대
인 하느님에게 들어가게 된다. 우리의 삶은 꿈이라 거짓이요 가짜다.
삶이란 마침내 꿈꾸고 마는 것이다. 꿈을 깨자고 하는 게 바른 생각이
다. 꿈은 깨야 한다. 예수 석가는 상대세계에 대해서는 철저한 부정
(否定)이다. 철저한 부정을 안 하려면 불교·기독교 믿지 말아야 한
다. (1960)
창세기에 적혀 있는 대로 창조주의 하느님을 믿는다, 안 믿는다는
것은 나와는 상관이 없다. 나는 하느님을 생명의 근본으로 진리의 원천
으로 믿는 것이지 창조주로서 믿는 것은 아니다. 창조는 무슨 창조인
가?창조주로서 믿는다든지 그것을 부정한다든지 하는 것은 대단한 것
은 아니다.
하느님에게 창조에 대한 시말서를 받아본 것이 창세기다. 이건 그때
에 사람들이 그렇게 해서 되었거니 하고 생각해본 거다. 그러나 이건
그때 사람의 생각이고 요새는 이걸 누가 믿나? 이것 가지고는 통하지
않는다. (1960)
하느님은 없이 계시는 이다. 하느님은 없으면서도 계신다. 사람은
있으면서 없다. 있긴 있는데 업신여긴다. 그래서 우리는 이게 슬퍼서
어떻게 우리 아버지처럼 없이 있어볼까 하고 힘쓰는 것이다. (1961)
출처:다석 류영모 어록(박영호 엮음 두레 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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