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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에게 던진 질문 : 바울은 누구입니까? 본문

마스터와 가르침/고대 비밀 가르침(密敎)

예수에게 던진 질문 : 바울은 누구입니까?

柏道 2019. 10. 26. 06:41

예수에게 던진 질문 :

바울은 누구입니까? 

  

김태항 (지은이) 하모니

 

책소개

바울 신학은 기독교 교리의 핵심인 구원론, 원죄론, 예수 신성론의 이론적 배경이 되고 있다. 그래서 만약 바울이 예수의 메시지를 왜곡하였거나 그릇되게 해석하여 자신의 신학을 정립했다면 이것은 기독교의 근간을 흔드는 엄청난 사건이 된다.

 

이 책은 이런 중대한 사안에 초점을 맞추어서, 수천 년 동안 인류의 의식을 옥죄어 온 기독교 교리의 실제 창시자인 바울을 철저히 분석하고자 했으며 또한 예수가 어떠한 생각을 하였는지를 보여주려고 했다.

 

이 책의 1편에서는 우리가 예수에게 묻고 싶었던 질문과 예수가 우리에게 꼭 알려주고 싶었던 내용을 대화 형식으로 담았으며, 2편에서는 여러 자료 분석을 통하여 바울이라는 사람이 누구이며, 그가 어떤 생각을 하였는지를 담았다.

 

기독교인들이 기존의 습관적인 사유의 틀에서 벗어나 새롭게 성경과 예수 그리고 바울을 바라보았으면 한다.

목차

서문 5

 

 

 

1편 예수에게 묻다: 바울은 누구입니까?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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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P.19

나는 갈릴리의 나사렛에서 성장하였고 12세 무렵에 이스라엘을 떠났다가 29살에 이스라엘로 돌아왔습니다. 이 기간은 복음서에 나오지 않습니다. 30살 즈음에 갈릴리와 유대?지역 등을 돌아다니면서 하느님 나라를 가르치다가 체포되어 십자가에서 처형된 기록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P.20

4복음서를 포함하여 너무도 적은 분량의 자료만으로 역사적 예수인 내가 누구이며 무엇을 전하려고 했는지는 정확히 알기가 어렵습니다. 이런 한정된 자료를 가지고, 바울과 교부들이 해석한 신격화된 예수가 아니라, 역사적 예수를 알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모두 미흡합니다. 나를 메시아로, 유대 혁명가로, 선지자로, 혹은 깨달은 스승으로 생각하는 것은 나의 전체 중에서 아주 일부분을 보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를 진실로 알려면 나의 알려지지 않은 12~29세의 행적과 내가 준비된 소수의 제자들에게 전한 영지주의 가르침을 알아야 합니다.

P.21

나는 인간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겠다는 말을 한 적이 없고, 이런 나를 믿으면 구원된다는 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 나의 가르침이라며 전해지는 4복음서에 그런 말이 있던가요? 없을 것입니다. 물론 이들 복음서도 나를 바르게 증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복음서는 내 추종자들의 신앙고백을 담은 글이라 진실과 거짓이 섞여있습니다. 구원을 위하여 내가 주장했던 것은 회개와 영지지식이었습니다.

P.26

그를 좋게 평가하면 이신칭의라는 기발한 기법을 개발하여 사람들에게 심리적 안정감을 주었다는 것이고, 비판적으로 보면 거짓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어둠속에 가두었다는 것이겠지요.

P.26

바울의 회심에 대해서는 바울의 종교적 체험(초자연적 현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있고 바울의 신체 상태나 심리적 불안 상태에서 발생한 자연적인 사건으로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P.31

나는 부정에 휩싸인 적이 없는 완전한 빛의 존재였습니다. 인간의 시각으로 불가능하게 보이는 일도 우주법칙의 작동원리를 아는 나에게는 가능했습니다. 대다수 사람들에게는 이런 일이 기적으로 보이겠지만 우주법칙에 정통한 나에게는 법칙의 운용일 뿐이었습니다.

P.34

초기기독교 시대에는 지금과 같은 체계화된 거대 교회도 없었고, 정통기독교도 없었습니다. 기독교는 처음부터 여러 분파가 분리되어 존재했습니다. 초기 기독교에는 다양한 종류의 신앙과 해석이 존재했고 그중에 여러 영지주의 단체도 있었습니다. 로마가톨릭은 그중에서 가장 큰 그룹이었습니다. 로마황제에 의하여 기독교가 공인되기 전까지는 영지주의 복음서는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여러 복음서와 함께 내 가르침을 전하는 경전이었습니다.

P.41

신앙심으로 십자군 원정대에 참가한 사람들, 사이비 종교인에게 헌금한 사람들, 폭탄 테러를 저지른 극렬한 종교인들은 이것이 선한 행동이라 생각하고 했겠지요. 그들 모두는 지혜가 없어서 저지른 일입니다. 분명한 것은 우주적 차원에서는 동기가 선하다고 하여, 무지함이 용서가 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난 믿음이 아니라 진리 즉 지혜가 사람을 자유롭게 한다고 말했습니다.

P.46

바울은 하느님이 인간의 죄를 용서해주려고 나를 제물로 내어주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용서를 위해서는 속죄제물이 필요하다는 지극히 원시적인 생각입니다. 이 논리는 하느님의 뜻과는 전혀 무관한 것으로? 바울이 구약시대의 희생제사의 신앙전통에서 가지고 온 구약사상입니다.

P.52

난 유대인이 생각하는 그런 메시아는 아니었습니다. 유대인은 메시아가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세속적이고 민족적 지도자의 개념이었습니다. 바울에게 나는 그 어느 메시아보다 더 강력해야 했기에 그는 나를 하느님 아들이라고 불렀습니다. 나는 신의 유일한 아들이 아닙니다.

P.61

믿기만 하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생각은 자기최면이고 이러한 생각을 한다는 그 자체가 상당히 오만하고 천박한 것입니다. 그들은 신을 아주 얕잡아 보고 있습니다. 신은 그렇게 허술하게 세상을 다스리지 않습니다. 신이 부여한 이성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신의 가르침이 아니라 사탄의 가르침에 더 가깝습니다. 신은 법칙에 따라 우주를 다스립니다. 나는 대중에게 믿음이 아니라 회개와 지혜를 강조했습니다.

P.62

회개는 일생동안 계속해서 이루어지는 일이며 안에 있는 부정적 속성, 잘못된 습관이 끊어질 때까지 지속적으로 반복해서 자신을 돌이키는 일입니다. 회개를 어떻게 이해하는가의 문제겠지만 참된 의미에서 회개는 자기수련 과정이며 동양의 명상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P.64

내가 말하는 하느님 나라는 장소가 아니라 진리를 통하여 마음이 순수하게 될 때 경험하는 상태입니다. 나는 죽은 후에 가는 천국이나 지옥 대신, 살아서 가는 “하느님의 나라”를 가르쳤습니다.

P.68

거의 재앙 수준의 독특한 기독교 구원관은 바로 이 원죄설 때문입니다. 인간을 죄인으로 보기 때문에 죄 사함이라는 구원이 존재하는 것이지요. 기독교는 사람을 죄인으로 몰아붙여 신과 교회에 의지하게끔 만듭니다. 원죄를 끄집어내어 인간을 아주 초라한 신의 피조물로 만듭니다.

P.88

사람들은 그리스도만 재림하면 세상이 천국으로 변할 거란 아주 단순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다시 이 땅에 오면 기독교 교회는 과연 나를 알아볼까요. 그리고 진심으로 나를 환영할까요. 내게는 그것이 절망적으로 보입니다. 성당과 교회에서 나의 참 가르침이 전해지고 있나요? 깨달음, 신과 합일, 영지 지혜 등을 설하는 나를 이단이나 사탄으로 생각하지 않을까요? 교회 성직자들이 나의 재림을 가장 두려워하고 탄압할 것입니다.

P.90

그리스도 재림은 우리 내면에 있는 신성이 깨어나는 사건이며(깨달음), 이것은 언제든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개별적인 사건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 의식의 부활이기도 합니다.

P.96

신은 외부에서, 하늘에서 찾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 내면의 자아는 신과 연결되는 통로이므로 내면으로 들어가지 않고는 기도는 응답이 되지 않습니다.

P.100

영적 부자는 더욱 부자가 될 것이고, 무지하여 영적으로 가난한 자는 가진 것마저 뺏길 것입니다. 나에 대한 믿음은 내 가르침에 대한 믿음이어야 하고 그런 사람은 내가 전해준 진리로 자유롭게 될 것입니다.

P.104

내면의 탐구도 중요하고 무한의 존재인 근원에 대한 탐구도 중요합니다. 신을 찾고자 나선 외부의 길에서 자신을 만나고 자신을 찾고자 나선 내면의 길에서 신을 만나게 됩니다. 안이 바깥이 되고 바깥이 안이 되고, 시작과 끝이 하나가 될 때, 우리는 근원적 존재와 만나게 되며 이것은 원래 상태로 회귀이며 구원이며 그리스도 의식의 부활입니다.

P.108

기독교인들은 참다운 구원이 무엇인지 모르다 보니 외부의 힘 즉 신의 힘에 의한 죄사함을 구원으로 오해하고 있습니다. 진정한 구원은 무지에서 해방이고, 물질 집착에서 벗어남이며, 신과 단절된 통로가 다시 열리는 것이며, 자신이 누구인지 아는 것입니다. 구원은 신이 아니라 자신이 하는 것입니다. 의식의 변화로 구원을 받습니다. 내면의 신성 자각이 구원입니다.

P.115

대속의 법칙은 인간의 영적 성장에 도움이 되지 못하며 우주법칙에 위배됩니다. 대속론에 따라 내가 인류를 대신하여 죄를 받았다면 사람들에게 더 이상 무슨 문제가 남아있겠습니까? 죄가 탕감되었으면 사람들에게 무슨 죄가 남아 있겠습니까?

P.120

교회는 이성을 앞세우면 사람들의 믿음이 약해질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그냥 믿으라고 합니다. 이성 앞에 약해지는 믿음이라면 그것은 모래 위에 세워진 참으로 나약한 믿음일 것입니다. 믿음만으로 성경을 대하면 문자에 얽매이게 되어서 숨겨진 의미를 모르고 평면적인 문자해석에만 매달리게 됩니다.

P.123

삶이란 경험을 통하여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개선시켜나가는 여정입니다. 그것도 한생으로 끝나기 보다는 완전해질 때까지 반복되는 기나긴 여정입니다. 그 끝은 동양 언어로 깨달음이고 비의 단체 용어로는 신과 합일입니다.

P.136

사도행전을 연구해온 신학자들은 사도행전의 내용에 대한 역사적 진실성에 많은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어떤 내용이 누가 자신이 말한 것이고, 어떤 내용이 교회의 전승인지, 그리고 어떤 내용이 바울이 직접 말한 것인지, 구분하기가 어렵다고 한다. 누가가 신학적 목적에 따라 이야기를 재구성하였다는 것이다.

P.140

바울처럼 아무런 준비 없이 갑자기 찾아오는 것은 예언이나 계시가 아니다. 그런데 누가와 바울은 용감하게도 다메섹 체험을 예언자 소명과 비슷하게 기술하고 있다. 바울은 신의 통로가 되기에는 많이 부족한 인물이었다.

P.144

누가는 자신의 신학적 목적을 위하여 바울을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 누가가 다메섹 회심 사건을 신화처럼 유치하게 각색하였던 것도 자신의 신학적 목적 때문이었다. 그는 초기교회가 갈등 없이 서로 협력하여 예수가르침을 받들면서 교회를 운영하였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미화하여 보여주려고 했다.

P.160

안타깝게도 70년경에 성전을 포함하여 예루살렘 전체가 로마군대에 의하여 거의 파괴되면서 자연스럽게 야고보와 예수 제자들이 이끌었던 예루살렘 교회의 영향력은 사라진다. 그 후에 바울이 쓴 서간 내용이 교부들에게 받아들여졌고 이들은 바울 교리를 근간으로 기독교 교리를 만들었다.

P.163

야고보가 바울을 인정하지 않고 그가 전하는 메시지(믿음으로 구원 등)에 우려를 표명한 것은 실제로 바울이 부활한 예수를 만나지 못했음을 야고보는 알고 있었다는 증거이다. 야고보는 사도회의 이후 안디옥에 사람들을 보내 바울의 복음과 반대되는 가르침을 전한다(갈라디아서 2:11~14).

P.165

바울은 야고보의 권위에 순종해야 하는 위치에 있었다. 중요한 사실은 예수를 생전에 그리고 부활 후에도 만났던 예수의 수제자인 야고보는 바울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P.171

십자가 부활을 믿는 것과, 이 사건에 대한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이 사건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의 종교가 탄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바울 신학은 십자가 사건에 대한 많은 해석 중의 하나일 뿐이다.

P.194

어떤 학자들은 바울의 편지에 드러난 영지주의 문구에 주목하고는 바울이 영지주의자였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구절이 바울이 영지주의자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바울 사상의 핵심인 이신칭의 교의는 영지주의와 도저히 함께 할 수 없는 교리이기 때문이다.

P.202

방언을 명상을 통해 일어나는 종교적 체험으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은데(특히 기독교인들), 명상이나 수련 등을 통해 일어나는 종교적 체험은 그 작동 메커니즘이 방언과는 아주 다르다. 방언이 인간의 감정을 자극하는 것이라면 명상은 감정을 넘어서게 하여 우리로 하여금 내적 본질에 도달하게 한다. 어느 고급 종교에서도 영적 성장이나 상위 존재와 영적 교섭을 위하여 감정을 자극하는 일은 하지 않는다. 이런 것만 보더라도 보면 바울이 하느님의 참다운 계시를 받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P.221

이처럼 지금 믿고 있는 교회 교리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예수의 말씀이라기보다는 여러 종파 간의 논쟁을 통하여 형성된 정치적 산물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P.222

니케아 공의회에서 예수의 신성과 삼위일체설이 부결되었다면 예수 신성과 삼위일체론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고, 예수는 인간으로 조명되었을 것이다. 다수결에 의해 예수는 신이 된 것이다.

P.232

오늘날 기독교 교리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바울사상이 수천 년 동안 인류의 의식을 병속에 가두어버렸다. 바울이 지녔던 사유의 틀로는 구원으로 동양종교처럼 내적 각성이나 깨달음, 근원과 합일 등을 생각할 수 없었기에??그의 머리에서 오직 믿음이라는 구원론이 나온 것이다.

저자 소개

지은이: 김태항 신간 알림 신청

최근작 : <예수에게 던진 질문 : 바울은 누구입니까?>,<영지주의 복음서와 카발라>,<카발라와 예수 그리고 성경> … 총 26종 (모두보기)

동국대학교 법학과, 미국 콜로라도 주립대학교 교육학 석사. 기업체 연수원에서 사원교육을 담당하였고 대학에서 영어강사를 역임하였다. 오랫동안 동서양 가르침 특히 유대신비 가르침인 카발라와 고대 신비 가르침을 공부하였으며 현재 출판과 번역 및 저술 활동을 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카발라의 신비열쇠>, <도마복음과 카발라>, <슬픈 예수>, <완성의 길>, <구도여행과 소리 없는 소리>, <진짜 삶을 위한 개념 넘어서기>, <영지주의 복음서와 카발라> 등이 있고 번역서로는 <모던 매직>, <유대명상>, <성경과 명상>, <카발라 명상>, <헤르메스 가르침>, <인권 운동 이야기>, <진화의 비밀>, <마음챙김과 감정치유>, <이완과 집중 그리고 명상>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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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제공 책소개

“오직 예수” “오직 성경” “오직 은총”으로 대표되는 기독교 사상은 인류의 삶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정통 기독교에서는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후 3일 만에 부활한 사건에 큰 의미를 부여하여 이것을 예수 복음의 핵심으로 삼는다. 예수 그리스도가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부활하였으니, 이것을 믿고 받아들이면 구원받게 된다는 좀 기묘한 구원론을 주장한다. 예수에 대한 믿음만으로 구원받게 된다는 주장은 타종교와의 공존 부정, 타종교에 대한 배타성과 폭력성, 일회성 회개로 인한 도덕적 파탄과 책임의식 부족, 폭력적 선교 등을 야기하고 있다.

 

그래서 예수가 과연 우리가 알고 있는 이런 교리를 가르쳤는지 아니면 예수 사후에 그의 가르침이 왜곡되어 전해졌는지, 알아보는 일은 참으로 중요한 일이라 할 수 있겠다. 인류 문화와 인간 사고를 지배하는 기독교 교리에 문제가 있다면 이것은 기독교라는 종교의 문제가 아니라 인류 운명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관심은 기독교가 자랑스럽게 내세우는 성경이 과연 우리가 믿을 만한 가치가 있는 경전인가 하는 것이다. 성경의 진위에 대한 많은 논의가 있어왔고, 성서학자들은 성경 왜곡(내용 변경, 첨부, 삭제 등)을 당연한 일로 받아들이고 있다.

 

예수는 성경에서 많은 말을 하지 않았다. 예수는 4복음서에서 오늘날 기독교인들의 정신세계를 지배하는 교회 교리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예수는 직접적으로 원죄론도, 동정녀 성모 마리아론도, 보혈을 통한 구원론도, 연옥도, 삼위일체도 말하지 않았다. 이것은 후대에 교부들이 주장한 내용이고 이런 내용의 상당 부분은 바울의 사상에서 가져온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는 예수의 종교가 아니라 바울의 종교란 말을 하는 학자들도 상당하다.

 

신약성서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바울 서간에 대해서는 끊임없이 그 가치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어 왔다. 사람들은 이런 질문을 던진다. “예수를 육체적으로 대면한 적이 없는 바울이 쓴 서간 내용을 우리는 얼마만큼 믿어야 하는가?” “생전에 예수를 수행한 베드로나 요한의 말이 아닌 예수를 뵌 적도 없는 바울의 말을 무슨 근거로 경전으로 받아들여야 하는가?”

 

기독교와 성경에 대한 불신은 예수에 대한 불신으로까지 확대되고 있다. 사람들은 묻는다. “예수는 누구인가, 실존 인물인가 아니면 신화적인 인물인가? 실존 인물이라면 신의 아들인가 아니면 붓다나 노자와 같은 깨달은 성자인가, 아니면 사회개혁을 꿈꾼 혁명가인가?”

 

바울 없는 기독교는 생각할 수가 없다. 기독교 교리의 핵심인 원죄론과 대속론(구원론, 이신칭의론)은 바울의 주장이었고 이것이 없으면 지금의 교회는 존재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독교에서는 바울을 하느님의 뜻을 받든 최고의 사도로 존경하고 있다. 그렇다고 바울에 대한 비판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교회 내부에서 바울신학을 비판하는 소리가 있었으며 이들은 바울로부터 예수에게로 돌아가야 한다고 외쳐왔다.

 

이처럼 바울은 논쟁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고 이 논쟁은 필연적으로 기독교의 근간을 흔드는 일이 된다. 그래서 기독교는 거의 맹목적으로 바울을 칭송하면서 신자들이 바울신학에 대하여 이성적 사유를 하지 못하게 하고 있다. 누군가 바울신학을 비판하면 교회는 그 사람을 거의 이단시한다.

 

주요 종교는 어김없이 수준 낮은 일반 대중을 위한 현교와 수준 높은 소수의 사람들을 위한 비밀가르침(밀교)으로 나뉘어 존재해 왔다. 불교의 밀교는 티베트 밀교이고, 유대교의 밀교는 카발라이고, 이슬람의 밀교는 수피즘이고, 기독교의 밀교는 영지주의이다. 그리고 이 영지주의가 바로 예수가 소수의 제자들에게 전한 비밀가르침이다.

 

기독교 영지주의 자료와 비의 단체에서 전해지는 예수 자료 그리고 실증적인 성경해석 자료를 통하여 오늘날 기독교 교리가 예수의 참 가르침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지고 있다. 예수의 참 가르침을 전하던 기독교 영지주의 가르침이 로마제국의 탄압으로 사라지고 나서는 지금의 기독교 교리는 예수의 의도와는 다르게 왜곡되어 거의 다른 가르침이 되었다. 교부들이 예수를 신의 아들로 만들고 자신들의 구미에 맞는 경전을 선택하여 오랜 세월 종교 사업을 해온 셈이다.

 

수많은 사람들의 의식을 지배하는 대속론(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믿어야만 구원을 얻는다는 주장)은 예수의 말이 아니라 바울의 생각이었다. 당시에는 누구든 자신이 이해한 예수를 그려낼 수 있었고 예수에 대하여 바울과 다른 견해를 펼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거의 바울의 주장만 살아남았다.

 

그래서 뜻있는 신학자들이나 사람들은 바울에 의하여 왜곡된 예수가 아닌 진짜 예수로 돌아가야 한다면서 이것은 예수의 명예를 위해서 그리고 거짓 가르침에 구속되어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을 해방시키기 위해서도 절실히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성경에서 바울의 흔적을 지우면 우리는 4복음서에서 예수의 치유와 이적 행위, 하늘나라에 대한 가르침, 사랑을 포함한 여러 도덕적 훈계, 형식화된 율법에 대한 비판, 기득권층과의 갈등, 십자가 사건과 부활 등을 만날 수 있다.

 

그러나 바울이 사라지고 남은 복음서 내용만으로 우리는 예수가 전하고자 한 구원이 무엇이고, 하늘나라가 무엇인지, 그리고 치유와 기적은 어떤 원리로 일어났는지 등을 알 수가 없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를 바로 알려면 우선 성경에서 바울을 제거하고, 이어서 정경으로 인정받는 4복음서의 내용에 머물지 말고 예수의 비밀가르침인 영지주의를 알아야 한다.

 

이 책은 영지주의 문헌을 비롯하여 여러 자료를 통하여 예수가 인류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하려고 하였는지를 그리고 수천 년 동안 인류의 의식을 옥죄어 온 기독교 교리의 창시자인 바울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철저히 분석하고자 했다.

 

1편에서는 우리가 예수에게 묻고 싶었던 질문과 예수가 우리에게 꼭 알려주고 싶었던 내용을 대화 형식으로 담고자 했으며, 2편에서는 바울이라는 사람이 누구이며, 그가 어떤 생각을 하였는지를 보여주고자 했다.

 

기독교인들이 기존의 습관적인 사유의 틀에서 벗어나 새롭게 성경과 예수 그리고 바울을 알았으면 한다. 위대한 예수의 참 메시지가 세상에 단비처럼 내려 인류가 행복했으면 한다.접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