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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족오(세발 달린 까마귀) : 용과 봉황의 전쟁 본문

마스터와 가르침/고대 비밀 가르침(密敎)

삼족오(세발 달린 까마귀) : 용과 봉황의 전쟁

柏道 2019. 2. 6. 15:22

삼족오(세발 달린 까마귀) : 용과 봉황의 전쟁

삼족오(세발달린 까마귀) : 용과 봉황의 전쟁

 


고대로 부터 북방민족과 중국을 비롯한 동북아의 대권은 봉황과 용과의 전쟁으로 기술된다.

배달민족(고조선) 이후 아니 고구려의 광개토대제 이후로는 우리민족의 상징인 하늘 새인 봉황이 용에게 눌리고 말았다. 바로 동이족이 한족에 밀리면서 부터이다.

 

이때부터 봉황이 용보다 낮은 단계의 상징물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그전에는 한족들이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던 봉황의 문양을 업신여기기 시작한 것이다.  

한족은 동이족의 상징동물을 의도적으로 깎아내리기 위해 용을 황제의 상징으로 하면서, 봉황은 황후의 상징 문양으로 사용한 것이다. 용맹하고 굽힐 줄 모르는 동이족의 상징을 여성화시킨 것이다.

역사의 조작이 어이 이것 하나뿐이겠냐?


상징의 높고 낮음은 특정 토템을 가진 집단의 흥망성쇠와 함께 한다. 뱀을 토템으로 하는 집단이 권력을 쟁취하게 되면 낮은 단계 뱀에서 상상의 동물인 용을 만들어 낸 것이다. 무엇보다 봉황 위에 군림하는 영물로 만들은 것이다. 우리의 봉황은 용보다 못한 존재로 여기는 것은 잘못임을 깨달아야 한다.


(대한민국 대통령의 상징 문장도 봉황을 쓰고 있다. 두 마리의 봉황이 서로 마주보고 있는 형상의 문장을 대통령이 수여하는 상장이나 상패 혹은 휘장 등에 새겨 넣고 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용이 아니라 봉황을 상징 문장으로 삼은 데는 특정 종교단체의 반대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여기에는 이승만 대통령의 종교도 한 몫 한 것 아닌가 싶다. 용과 드래건을 동일시하여 반대하는 바람에 정부에서 봉황을 채택했다는 것이다. 1998년 대한민국 국새제작 당시에도 ‘저 높은 곳에 계시는 분’께서 “용은 사탄 아닌가요?”라는 한마디에 봉황 인뉴(손잡이)로 급선회했다는 후문이 나돌기도 했다.)


봉황은  동이족의 상징인 삼족오에서 출발한 영물이다. 중국 사학자 왕따이유(王大有)의 <용봉문화의 원류(龍鳳文化源流)>를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이 책은 용봉문화(龍鳳文化)에 대해 용과 봉 각각의 기원 용봉문화의 형성과, 전개과정 용봉문화의 전파에까지 가장 체계적이고 폭넓게 연구한 저서라고 할 수 있다. 왕따이유는 이 책에서 봉황은 동이족의 상징 토템이었으며, 그 원조는 삼족오라고 설명하고 있다.

삼족오가 분화, 발전하는 과정에서 봉황, 주작 등의 여러 모습으로 변화했다는 것이다.

 

 


삼족오는 천손민족의 상징


삼족오를 까마귀로 보는 것은 우리 문화의 상징에 대한 몰이해에서 온 결과다.

삼족오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 알지 못하고, 검은 새는 무조건 까마귀로 본 것은 분명 잘못인 것이다.

 

이어령 전 문화부장관은 “한 민족의 고유한 전통문화 속에는 그 민족이 오랫동안 공유해온 ‘상징의 숲’이 있다. 거기에는 과학적 접근만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깊은 의미가 심연에 내재해있다”고 밝히고 있다.

상징은 상징으로 이해해야지 현재의 과학기준으로 상징을 재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유럽의 독일이나 신성로마제국, 러시아에서는 머리가 둘 달린 쌍두 독수리를 상징으로 삼았으나 누구도 기형독수리로 보지 않는다. 삼족오 역시 ‘세발달린 기형 까마귀’가 아니라 우리 민족의 우주관을 반영한 상징물인 것이다.

 

 


우리 민족은 하늘로부터 시작된 천손민족(天孫民族)이다.

천신(天神)을 숭배해온 한민족은 하늘을 상징할 수 있는 태양을 그 대상으로 했다.

태양속에는 ‘세발 달린 검은 새’가 살고 있다고 믿었다.


태양 속에 살고 있는 ‘세발 달린 검은 새’는 현조(玄鳥), 혹은 삼족오(三足烏)라 불렸는데 이는 태양조(太陽鳥)의 명칭이다. 태양조가 ‘세발 달린 까마귀’로 잘못 알려진 것은 ‘오(烏)’를 까마귀로 해석한데서 생긴 오류이다.


‘오(烏)’는 검은 색을 지칭하는 글자이기도 하다. 즉 삼족오는 ‘세발 달린 까마귀’로 보기보다는 ‘세발 달린 검은 새’로 봐야한다. 모든 닭이 금계가 아니듯 검은 새라고 해서 모두 까마귀가 아니다. 사전에서는 삼족오에 대해 ‘태양을 다르게 가리키는 말’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삼족오는 그 자체가 태양인 것이다. 삼족오의 가장 완벽한 원형은 고구려 벽화에서 확인할 수 있다. 고구려인들은 태양 속에 산다는 태양조三足烏를 각저총(角抵塚), 오회분(五회墳) 4호묘, 덕화리 1, 2호분에 벽화로 표현, 하늘민족임을 강조하고 있다.


고구려 문화 유물에는 태양(해) 안에 ‘세발 달린 검은 새’를 넣은 그림이나 조각이 여러 점 있다. 대표적인 것으로 진파리 7호 무덤에서 나온 ‘해뚫음 무늬 금동장식품(日光透彫金銅裝飾品)’을 들 수 있다. 이는 왕의 장식품으로 추정되는데 중앙의 구슬을 박은 두 겹의 태양 동그라미 속에 황금빛 ‘세발 달린 검은 새’를 불타오르듯 절묘하게 넣었다.


물론 중국에도 태양조는 등장한다. 중국 장사(長沙) 마왕퇴(馬王堆)의 ‘양오(陽烏: 태양조)’가 그들 중 하나이다. 그러나 이때의 ‘태양조’는 모두 ‘두발(二足)’ 달린 새다.

‘세발달린 검은 새(三足烏)’는 오직 동이족과 그 후예들에게만 있었다.


‘세발 태양신(太陽神)’에 대해 박은식(朴殷植)은 고조선의 국교는 삼신교(三神敎․神敎)라고 하면서, 3신은 환인(桓因) 환웅(桓雄) 단군(檀君)을 가리킨 것이라고 하였다. 태양조는 한국인의 우주관, 생명관의 반영이기도 했다. 태양의 둥근 형태는 ○형으로 온 누리를 뜻하고, 1이라는 새의 한 몸에 3개의 다리를 지님으로써 지혜와 생명의 끝없는 순리를 뜻하고 있다.


그런데 고대인들은 왜 태양 속에 새가 산다고 생각했을까? 그것은 물상(物像)적 근거는 바로 태양의 흑점이라는 주장이 있다. 흑점은 태양의 광구(光球)에 나타나는 검은 반점으로 이 흑점의 움직임에 따라 지구 환경은 매우 큰 영향을 받게 된다. 이 흑점은 고대인들에게 마치 ‘해 속에 사는 새’처럼 보였을 것이다. 고대인들은 태양을 상징하는 청동거울을 만들고, 그 속에는 태양 속에 사는 삼족오를 새겼다는 것을 추정할 수 있다.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청동거울에 왕권을 지켜주는 신령스러운 동물로 세발 달린 검은 새, 즉 삼족오(三足烏)가 있었다. 현재 일본축구협회에서 삼족오를 상징물로 삼는 것도 따지고 보면 그들이 동이족의 후예이기 때문이다. 일본에서 삼족오를 쓴다는 이유로 새로운 국새의 상징으로 삼족오가 적합하지 않다는 주장은 30년 때문에 3000년 역사를 포기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흥미로운 사실은 고조선 문명의 흔적인 삼족오가 북미인디언이나 마야문명에서도 나타난다는 점이다. 왕따이유의 연구에 따르면 동이족(東夷族)은 서쪽으로는 바이칼호, 동쪽으로는 쿠릴열도, 남쪽으로는 중국의 창청(長城), 북쪽으로는 대싱안링(大興安領)까지 영역을 확장했으며, 일부는 베링해협을 지나 북미와 마야 인디언의 조상이 되었다고 한다. 북미 인디언이나, 마야족의 벽화에는 태양조가 어김없이 표현되어 있어 문화의 동일성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삼족오(三足烏)는 다리가 셋이고, 날개가 둘이며, 머리에 뿔이 하나 있는 까마귀다. 늘 붉은 해 안에 있기 때문에 ‘일중(日中)삼족오’라고도 하는데, 해를 상징하는 새다. 삼족오는 북방 민족의 침략을 받아 남진을 해야 했던 한족(漢族)에게는 불길한 징조를 나타내는 새였다.

 

전쟁을 하면 많은 사상자가 났고, 그 후 처리는 하늘에 까마귀떼가 나타나 시체 처리를 하는 것을 본 중국인들은 북방민족의 국조인 까마귀를 불길의 징조로 생각했었고, 까마귀를 보면 의례이 북방민족을 생각이 났으니 까마귀를 너무나 싫어했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다.

그들 중국인들이 얼마나 북방민족이  두려웠으면 만리장성을 쌓았겠는가?

 

슬프게도 우리가  오랜 시간전에 대국인 중국(당나라)의 힘을 빌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면서 부터 북방민족이 가진 위대한 포부는 자연스럽게 좁디 좁은 반도내에 안정내지 안주를 하기 시작하였다.

그때부터 위대한 북방민족의 끓는피는 좁은 반도 안에서 중상과 모략으로 몇천년을 삭이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이게 한(恨)이 되지 않겠는가?  

그때 부터 대국인 중국의 눈치를 봐야 했고, 그들의 문화와 생활 방식과 교육을 따랐다. 하물며 이 나라 왕을 대국의 허락을 받아야 왕이 되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폐위도 시키기도 하였다. 이렇게 중국을 동경하는 마음이 몇 천년이 흐르다 보니, 자연스럽게 사대주의가 우리 사상에 일상생활에 오래동안 남아서 오래 전 부터 그들이 꿈꾼 대로 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언제부터 우리의 핏줄인 북방민족의 국조를 불길의 징조라 생각하고 까마귀 울음 소리를 듣기 싫어 했다. 아니  까마귀를 보는 조차 싫어하게 되었다. 우리는 오랜세월 동안 이 새를 너무  멀리해왔고, 급기야는 삼족오의 존재와 의미마저 잊고 말았다. 우리 정신에서 잃어 버린 삼족오를 되찾아 대국으로 부터 정신적 독립부터 해야겠다. 

 

고대 북방 민족들의 장례는 높은 산, 바위에 그 시신을 올려 놓아 까마귀에게 자기 몸을 맡껴서 그 시신이 까마귀의 먹이가 되도록 하였다. 자기의 육신이 먹이가 되어 그 까마귀와 하나가 되어 까마귀 날개를 통해 같이 배달나라 위로 날고, 까마귀의 눈으로 넓디 넓은 대륙을 같이 본 것이다.  죽어서도  그들은 자유로 왔다. 우리는 북방민족 조상님들의 높은 정신세계를 가진 위대한 후손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 벽화들 곳곳에는 다양한 형태로 삼족오가 그려져 있다. 또한 주몽이 동부여를 탈출할 때 가장 충실한 신하로서 오이가 있었고, 신라 관품에는 대오(大烏)·소오(小烏) 등 까마귀 오(烏)자가 들어간 이름이 있었으며, 신라 아달라왕 때 일본 열도로 건너가 소국의 왕과 왕비가 된 연오랑과 세오녀는 까마귀로 상징된 신이다.


우리 민족은 하늘의 피를 받은 선택된 집단이며 빛을 신령스럽게 여겼다. 단군신화에 등장하는 환웅, 부여 건국신화의 동명, 고구려의 주몽, 신라의 박혁거세, 가야의 김수로왕 등은 하늘과 해의 자식임을 자임했는데, 하늘 세계를 상징하는 것이 바로 삼족오였다. 그리고 다리가 셋, 날개가 둘, 뿔이 하나인 삼족오는 3에서 1로, 다시 1에서 3으로 변화 순환하는 우리 식의 변증법(3의 논리)을 표현한다.


삼족오를 흉조로 보는 중국 문화의 영향을 받은 탓으로, 대신에 용이나 거북은 중국 문화의 영향으로 신성시된 동물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국새는 우리의 정신세계에서 우주 질서를 표현하는 신성한 동물로 만드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 삼족오를 우리의 상징으로 되찾아 와야 한다.


三足烏, 즉 풀이하면 "세발(三足)달린 까마귀(烏)"이다.

고대의 우리민족은 세 발 달린 까마귀가 태양 속에 살고 있다고 믿었으며,  까마귀를 "신(神)의 사자(使者)"로 귀히 여겼다. 또한 한님이나 해신을 상징하는 동물로 단군의 지팡이 머리에 까마귀를 조각함으로써 단군이 "신의 사자"임을 나타내었다.

 

중국신화에서는 까마귀를 "현조(玄鳥)"로 북방을 지키는 새로 인식한다.

바로 오행사상에서 나온 것인데, 북방을 검정색으로 나타내기 때문이다. 또한 북방은 오행(五行)에서 수(水)를 차지하고 있고, 이 水의 의미는 "탄생과 시작"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신의 전령인 성스런 신물(神物)에 왜 발이 세 개가 달린 걸까?

이는 우리 고유의 삼사상(三思想)에 유래한다고 보인다.


바로 삼신을 일컫는 것으로 완성의 숫자로 삼(三)을 숭상한 것이다.

발이 두 개인 신의 전령 까마귀는 단순히 천(天)과 지(地) 즉, 신의 뜻만을 전달하는 의미이지만, 이 불완성체의 까마귀에 인간을 상징하는 발 하나를 더 붙여 "세발달린 까마귀"가 되어, 천지인(天地人)을 의미하는 완성체적인 "신의 전령"이 된 것이랍니다.

 

발(足)이 세 개인 것은 이 삼족오 말고도, "삼족정(三足鼎)"라는 것이 단군 조선의 유물로 나타나고 있다. "세발달린 솥"은 단군왕검시대의 제기(祭器)로 국가를 다스리는 이념을 표현한 것이다. 이러한 국가 치도(治道)의 이념을 상징한 것이 "세발달린 솥"이라면, 군왕 즉 단군왕검을 상징한 왕가의 문양이 바로 "세발달린 까마귀"인 것이다.

 

"삼족오"는 태양에 살면서 태양의 불을 먹고 사는 태양의 전령으로 전설에 나타나는데, 태양은 바로 하늘 혹은 밝음을 상징하는 것으로, 더 올라가면, 환(桓)이 되는 것이고, 배달(밝달)이 되는 것이다.

 

천지인(天地人)이라는 만물의 완성체를 가장 완전한 것으로 인식하여, 삼신사상이 유래 되었는데, 단군조선시대에는 이러한 삼사상에 입각하여, 국가의 기틀을 삼조선으로 삼아, 일명 진한, 마한, 번한으로 칭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스스로 하늘에서 내려온 천손족(天孫族)임을 자처하던 고대의 우리 조상들은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이 "삼족오"를 숭상의 대상으로, 신앙의 대상으로 여기었던 것이다.

 

 

한국의 삼족오


■ 고구려 벽화

고구려 벽화에는 풍속화, 초상화, 사신도 등과 함께 성신도(星辰圖:천체의 그림)가 많다. 성신도에는 해와 달, 별자리 등이 그려져 있고 해 속에는 까마귀가 그려져 있다. 이 까마귀가 삼족오이다.

 

해 속의 까마귀는 달 속의 개구리(金蛙, 혹은 두꺼비)와 한 쌍을 이루고 있다. 이 까마귀는 검은 색으로 되어 있고 다리가 셋이다. 이 세 발 달린 까마귀는 해의 상징으로 양(陽)의 뜻이고 개구리로 상징되는 달은 음(陰)의 뜻이다. 즉, 음양론의 한 표현이기도 하다. 삼족오는 고구려 쌍영총, 각저총, 덕흥리 1호, 2호 고분, 개마총(鎧馬塚), 강서중묘, 천왕지신총, 장천 1호분, 무용총, 약수리 벽화고분, 그리고 다섯무덤(오회분) 4호묘, 5호묘 등에 그려져 있다.     

                                                

다섯무덤 5호묘은 널길(묘도:墓道), 이음길, 널방(묘실:墓室, 현실:玄室)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으며 널방에는 사신도를 비롯해 많은 벽화가 있다. 동, 서, 남, 북에 청룡, 백호, 주작, 현무가 그려져 있다. 들보란 건물의 칸과 칸 사이에 있는 두 기둥 위를 건너지르는 나무를 말한다.

 

다시 말하면 네 귀퉁이에 기둥을 세우고 그 위를 가로지르는 재목을 말한다.

5호 무덤에서는 네 면의 벽 위에 약간 밖으로 내어 쌓은 부분이 바로 들보에 해당된다.

이 들보 위에는 서로 얽힌 용의 그림이 이어져 있다.

이 용들은 하늘 세계를 받치고 있는 것으로 천상과 천하를 가르는 상징으로 사용되었다.

 

들보의 각 귀퉁이에 삼각형의 돌판을 올려서 1단을 만들었는데, 한 변의 길이를 정확히 3분의 1로 나누어 삼각돌판을 올려 모줄임을 했기 때문에 네 귀퉁이에 4면이 나오고, 나머지 벽면과 같은 면에 4면이 나와 모두 8면이 된다(1단).

 

다시 이번에는 벽면 한가운데를 기점으로 각 귀퉁이에 1단보다 훨씬 큰 삼각형 돌판을 얹어 모줄임을 하여 면적을 좁힌 뒤(2단), 그 위에 커다란 천장돌을 올리는 절묘한 건축술을 사용하고 있다. 그러니까 1단은 8각이고 2단은 4각인 특이한 모양을 이룬다. 4호 무덤은 1단과 2단이 모두 4각이란 점에서 차이가 난다. 모서리를 줄였다고 해서 이러한 건축양식을 모줄임(말각조정 : 抹角藻井)이라고 한다.

 

동북쪽(청룡과 현무의 귀퉁이)에 나무처럼 생긴 식물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며 날아오르는 해신과 달신이 있고 두 다리는 날카로운 발톱을 드러낸 채 앞뒤로 힘 있게 펼쳐졌으며, 오색의 굵은 꼬리는 아래에서 위로 탄력 있게 휘어 오르고 있다.

 

해신(복희)은 머리에 삼족오가 들어 있는 해를 이고 있으며, 달신(여왜, 여와)은 달을 이고 있으나 달 속의 두꺼비는 사라지고 없다. 그 위쪽 2단에 용을 타고 춤을 추는 신선과 피리를 부는 신선이 있는데, 이들 뒤로 북두칠성과 삼족오가 보인다.

 

■ 桓檀古記(환단고기)


桓檀古記(환단고기, 한단고기) 단군세기(檀君世紀) 중에서 8세 단군 우서한(혹은 오사함)

재위 8년 갑인 7년(B. C.1987년), 세 발 달린 까마귀가 날아와 대궐 뜰 안으로 들어왔는데 그 날개넓이가 석자나 되었다고 한다.


 甲寅七年三足烏飛入苑中其翼廣三尺

 * 단군 우서한은 8대 단군으로 8년 동안 재위(B. C. 1993 ~ 1985)

   => 한단고기 - 임승국 번역, 주해 - 정신세계사

 

■ 기타

 

우리의 전통적인 풍습에서도 아기를 출산(出産)하면 대문(大門)을 가로질러 검정 숯과 빨간 고추, 흰 종이를 끼워놓은 새끼줄을 걸어놓는데, 이것을 '금줄'이라고 부르며 '신색(神索)'이라고 적는다. 그리고 제단(祭壇) 앞에 까는 노란 흙을 신토(神土)라고 적으며, '검토'라고 읽어서 과거에는 '신(神)'을 '검'이라고 읽었다.

 

또한 한글에서 '까마귀'나 '거미', '그믐달' 그리고 '검은' 색(色) 등 어두운 흑색(黑色)을 가마, 검, 그믐 등으로 말하는데, 이 또한 '곰'과 같은 어원에서 비롯된 것이다. 결국 '곰'은 곧 '흑곰(黑熊)'을 말하는 것이며, '흑곰'을 '신(神)'으로서 추앙(推仰)한 고대(古代) 종족(種族)이 남겨 논 흔적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고구려 (高句麗)에서 태양(太陽)을 '세발달린 까마귀'인 '삼족오(三足烏)'로 형상화하거나, 신화(神話)에서 태양을 '금오(金烏)'라고 부른 이유도 모두 여기에 근원을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까마귀의 까맣다, 검다의 뜻은 바로 우리말의 검다는 뜻으로 곰이란 뜻이다. 곰, 검의 뜻은 바로 존경한다, 신성시한다는 뜻으로 이것은 바로 왕이란 뜻이다. 이건 우리가 단군의 자손이란 뜻이다.

늘날 우리가 쓰는 고맙습니다. 고마워요란 말이 바로 이 곰이란 말에서 나왔다.

 

삼족오가 동북아 공통의 문화로 중국에서도 보이고 일본에서도 보인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지만 고대 토기 모양에서 세 발 달린 토기가 수없이 나오고 있다. 은나라 유물을 보더라도 그렇고 산동성 대문구 문화의 토기를 보더라도 세 발 달린 토기 모양이 발견된다. 그러나 은나라가 동이문화임이 증명되고 대문구 문화가 동이문화라고 본다면 어쩌면 당연한 결과로 보인다.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나타나는 삼족오, 그리고 까마귀의 모습을 한 솟대와 정월 대보름의 까마귀제 등에서 신조로서의 까마귀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세발 까마귀는 원래 동이족이 숭상하던 신성한 새였다.

상고시대 동이족은 중화족을 압도하여 동아시아의 맹주의 역할을 하였으나 후에 한족과의 경쟁에 밀리게 되고 중국의 사상의 영향으로 '한족을 핍박하던 동이의 상징'인 까마귀에 대한 한족의 시각이 우리 문화로 스며들게 되었다.

 

중국문화의 영향을 받아서 까치는 길조로 여기고 북방을 상징하는 까마귀는 흉조로 여기는 조선의 사대주의 양반들로 인해서 퍼지기 시작한 것이다.

      

*.중국 신화속의 삼족오

 

태양 속에 사는 까마귀에 대한 이야기는 중요한 특징을 가지는데 바로 달 속에 사는 두꺼비와 하나의 짝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중국신화에 나타나는 태양 속에 사는 까마귀에 대한 전설은 후예란 사람에 관한 이야기다.

후예사일(后예射日 : 후예가 태양을 쏘았다)로 표현되는 신화 부분을 간단히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한자 중에 예자가 없음(활쏠 예))


오제의 한 명인 요임금 때 하늘에 열 개의 태양이 나타나는 일이 발생한다. 이 열 개의 태양은 천제와 그의 부인 희화(羲和)의 아들들로서 원래는 하루에 한 명씩만 하늘에 나와야 하지만 어느 날 장난 끼가 동해 열 명이 모두 하늘로 나왔다.

 

열 개의 태양이 하늘에 떠 있으니 지상에는 큰 난리가 났다. 식물들과 동물들이 죽어가고 강과 바다의 물도 말라버리는 등 엄청난 재앙이 닥치게 되어 요임금은 천제에게 이 혼란을 막아달라고 간청을 한다.

이에 천제는 후예(后예)라고 하는 활의 명인을 지상에 내려 보낸다.

 

후예는 10개의 화살을 가지고 지상에 내려온 후 지상의 참혹한 모습에 분노하여 태양을 활로 쏘아 떨어뜨렸는데 이 때 화살에 맞고 태양이 떨어진 자리에 죽어있는 것은 바로 까마귀였다.

요임금은 후예 몰래 화살 한 개를 감추어 마지막 1개의 태양은 남겨 두었다고 한다.

 

후예는 인간세상을 구했지만 천제의 아들들을 쏘아죽인 죄로 하늘로 돌아가지 못하고 인간세상으로 추방당한다. 후예의 부인은 항아(嫦娥 : 또는 상아)라는 여인이었는데 이 여인은 남편 때문에 인간계로 추방당한 것에 큰 불만을 가지게 되어 매일 바가지를 끍는다.

 

후예는 아내를 위해 곤륜산에 사는 서왕모를 찾아가 불사약을 받아와서 아내에게 준다. 원래 부부가 반드시 나누어 먹으라고 준 것이었지만 항아는 남편 몰래 혼자 다 먹어버립니다. 불사약을 먹자마자 항아는 하늘로 올라가게 되지만 올라가던 도중 남편을 배신했다고 천제에게 벌을 받을 것이 두려워 하늘로 더 이상 가지 못하고 달속에 가서 두꺼비가 된다. 달은 밤에만 뜨니 낮에 숨어살기에 좋다고 생각한 것이다.  (달속에 항아란 말이 여기서 나온다.)

그 후 아내에게 배신당한 후예는 좌절하여 술로 지새다가 제자에게 마저 배신당하고 비참하게 죽고 만다.


이것이 중국신화에 나오는 후예사일(后예射日)에 관한 부분이다. 그럼 이 신화는 언제 형성되었으며 이 신화에 나오는 저 태양속의 까마귀 다리가 세 개로 나타나기 시작했을까?

후예신화는 적어도 춘추전국시대에는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전국시대 초나라 시인이었던 굴원(屈原)이 그의 작품 초사(楚辭)속에서 후예에 관해 읊고 있다.

 

전한시대에 지어진 것으로 알려진 춘추원명포(春秋元命苞)라는 책 속에 삼족오의 명칭이 비로소 등장한다. 이 춘추원명포라는 책은 현재 전해지지 않으며 그 내용만 다른 책에 실려 전해지고 있다. 특이한 것은 삼족오의 다리가 왜 세 개인지를 설명하고 있다.


陽數起於一成於三故日中有三足烏

양수는 1에서 시작되어 3에서 완성되니 고로 태양속에는 삼족오가 있다.


또 후한 초기의 인물인 왕충(王充)이 쓴 논형(論衡) 설일(說日)편속에도 삼족오란 단어가 나타난다.

 

儒者曰 日中有三足烏, 月中有兎蟾여

 

유자들이 말하기를 태양속에 삼족오가 있고 달속에는 토끼와 두꺼비가 있다고 한다.

중국신화에서의 후예에 관한 이야기는 춘추전국시대에 이루어졌으며, 전한시대에 비로소 삼족오의 형태로 발전했음을 알 수 있다.

 

 

 

 

출처 : 친환경유기농과 한지공예 | 글쓴이 : 푸르른 | 원글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