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수련의 방법에서 접근한 천부경 <스승> /김한용 본문
『천부경』의 가장 첫 번째 문구가 1이라는 것이다. 1을 알지 못하면 『천부경』의 한 글자도 이해하기가 어렵다. 1에 대한 의미는 말로 다할 수가 없다. 이렇게 많은 1이지만 세상에는 절대로 두 개인 것이 없다. 지구에 60억의 인구가 살고 있지만 같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이 분필도 백 만개를 똑같이 만들어도 똑 같은 두 개는 없다. 이 하나를 우주로 가져가는 것이 아니라 나의 모습으로 가져와야 한다. 나를 이해하면 우주의 모든 근본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와 같은 하나는 어디에도 없고 우주의 중심은 바로 나이다. 석가와 예수가 태어나 진리를 설한 것은 내 자신이 따르기 위한 진리가 아니라 나를 진리의 전당에 거듭 태어나게 하기 위해 설한 것이다. 또 만물이 죽고 살고, 해와 달이 뜨고 지는 것은 나의 하나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내가 인연이 없어 만물을 안 보면 만물이 안 보여 없는 것이고 내가 인연이 있어 만물을 보면 만물이 보여 있는 것이기 때문에 나라는 1을 완전히 깨쳐야 한다. 내가 죽으면 세상이 없는 것이고 내가 눈뜨면 세상이 열리는 것이다. 이런 뜻에서 너희가 1을 깨치지 못하면 『천부경』을 이해할 수 없다. 1의 시작이 곧 『천부경』의 시작이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시작은 나의 하나로부터 시작한다.
일시무시일 “이 하나의 시작은 없음에서 시작됐다. 여기서 없음의 의미는 무(無)이다. 무는 우리가 지금까지 인식하고 있는 ‘없는 것’이 아니라 ‘우주 공간 전체의 큰 하나를 없다’고 표현한 것이다. ‘지금 나라는 존재는 어디서 왔다고 생각하느냐!’ ‘내가 태어나기 전에는 이 우주 공간 전체가 나라는 것이다.’ 가스레인지 위에 물을 올려놓으면 온도가 올라갔다가 불을 끄면 온도가 내려가기 시작하는데 바로 밖의 온도만큼 내려가게 된다. 이 같아진 이것이 바로 없음의 무인 상태이다. 이 매직도 없는 것이고, TV도 없는 것인데, 우리가 인위적으로 지구에 있는 기를 끌어 모았기 때문에 이것이 생겨난 것이지 얼마 지나지 않으면 원래의 없음의 상태로 돌아가게 된다. 물건을 쓰면 쓸수록 새것이 되는 것은 이 세상에 없다. 헌 것이 되어 간다는 것은 없음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 없음이 무이다. 지금 이 책과 돌도 마찬가지이다. 돌은 아주 강하게 뭉쳐졌기 때문에 좀 천천히 무로 돌아가는 것이고 종이는 아주 약하게 뭉쳐졌기 때문에 빨리 돌아갈 뿐이다.”
석삼극무진본 “원래의 없는 하나가 시작되어 세 가지로 갈라지는데 세 가지는 하늘, 땅, 생명으로 갈라져 근본을 이루게 된다. 나의 몸은 하나이다. 그런데 이 하나에서 셋으로 나누어지는데 이것이 나누어지지 않으면 정상인으로 살아갈 수 없게 된다. 이 셋은 하단전, 중단전, 상단전으로 나누어지고 완전한 하단전 중단전, 상단전으로 보고 듣고 말하고 느낄 수 있게 된다. 내가 보고 듣고 말하고 움직일 수 있는 것은 하단전의 정이 충만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고, 또 감정이 순하고 이해가 깊은 것은 중단전의 감성 때문이며, 지혜롭고 판단이 순리에 가까운 것은 상단전의 신성 때문이다. 이 세 가지를 가지고 하나인 내가 사는 것이다. 하단전의 정과 중단전의 감성과 상단전의 신성으로 갈라진다 해도 근본은 무에 중심을 두게 된다. 그래서 무는 항상 그러한 상태를 유지하며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우리는 자연 상태를 벗어나면 존재할 수 없다. 밥을 먹고 숨을 쉬는 것은 자연 상태를 유지하기 위한 본능적인 행위이다. 먹은 것이 변으로 나오기까지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단지 기다릴 뿐이다. 먹은 것이 변으로 나오기까지가 스스로 그러한 자연 상태이다. 그래서 몸은 스스로 그러한 무에 본을 두고 움직이고 있다.”
천일일지일이인일삼 “이 움직이는 것 중에도 첫 번째와 두 번째와 세 번째로 나누어지는데 그 첫 번째인 하늘이 상단전이 되어 신성을 중심으로 지혜를 만들고, 두 번째인 땅이 하단전이 되어 정을 중심으로 몸을 만들고, 세 번째인 인이 중단전이 되어 감성을 중심으로 감정을 만들고 각자 각자는 서로 상부상조하며 움직이게 된다. 그리고 알아야 할 것은 몸 스스로가 일으키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상단전의 신성인 영이 지혜를 잃게 되면 감정이 일어나 몸을 상하게 한다. 영과 감성과 정은 서로 의지하며 한 몸을 이루게 된다. 가장 처음인 하늘이 땅을 관장하고 땅은 인을 관장하며 자라다가 인이 이성을 가지면 인이 땅을 의지하고 땅이 하늘을 의지하여 영을 양육하게 된다. 다시 영을 감정을 가지게 되고 이 감정이 수많은 삶을 만들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중단전의 흐름을 잘 알아야 한다. 이 흐름을 모르기 때문에 병들고 아파하는 것이다.”
일적십거무궤화삼 “하늘적인 영과 땅적인 몸이 감정을 일으켜 하나를 쌓아 가는데 여기서 쌓아간다는 것은 지혜를 터득하고 몸의 정을 터득하는 흐름으로 쌓아 완성을 이루면 큰 십이 된다. 십이라는 것은 ‘세 개의 단전이 갈라져서 지혜가 쌓이고, 정이 쌓이고, 감성이 비게 되면 각자의 본을 찾아 완성인 십으로 들어가게 된다.’는 뜻이다. 이 들어가는 것이 몸이 아니라 영이어야 한다. 사람들은 몸을 위해 지혜를 쌓고 건강을 만들지만 이것은 알맹이는 없고 껍데기만 쥐고 가는 격이다. 몸을 위해 산다는 것은 참 덧없는 것이다. 지금 몸이 나라고 하는 사람은 죽어 가는 것을 섬기고 있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몸은 항상 스스로 그러한 자연이기 때문에 어떻게 할 방법이 없다. 몸은 그대로 두고 영을 느끼고 자라게 하면 된다. 영이 본의 상태에 들게 되면 윤회가 없고 생로병사가 없게 된다. 알 수 없는 것은 완전한 무의 상태에 있는 몸을 왜 자꾸 관리하려고 하는지 모르겠다. 건강하기 위해 보약을 먹고 젊어지기 위해 노력하는 것을 보며 죽어 가는 몸을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지 참 답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선도인은 감정 속에 들어있는 영을 찾게 되면 몸이 늙어가고 병들어 가는 것이 그렇게 덧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몸은 하나의 옷과 같은 것이고 언젠가는 벗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런데 사람들은 몸에만 메여 오도 가도 못하고 그 자리에 발만 동동 구르고 있다. 선도인은 몸을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영을 자라게 해야 한다. 그래서 십거해서 크게 이끌어 가면 결국은 무에 들어가며 세 개의 단전이 화합하게 된다. 화합이 될 때 완전한 무의 상태에 들게 된다.
천이삼지이삼인이삼대삼합 “하늘인 상단전의 신성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땅인 하단전의 몸과 인인 중단전의 감정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으며, 땅인 몸 또한 하늘인 신성과 인인 감정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고, 인 또한 하늘인 신성과 땅인 몸 없이는 존재하지 못한다. 이 셋은 항상 서로를 포용하고 도우면 십거인 완전한 본의 상태로 들어간다. 이 들어가는 과정에서 대삼합이 일어나게 된다. 크게 합치게 된다. 땅인 하단전의 정은 충만한데 하늘인 상단전이 지혜가 없게 되면 인인 중단전의 감정이 날카로워져 상대를 해치고 정을 고갈시키게 된다. 또 지혜롭긴 한데 정이 약하면 의기소침해지고 내성적이 되어 자신을 해치게 된다. 그래서 하단전의 정과 중단전의 감정과 상단전의 신성이 크게 서로를 도와 화합하게 되면 이 합함이 육생칠팔구를 가지게 된다.”
육생칠팔구 “크게 합한 셋이 각기 기운을 얻으면 육이 되어 살아나게 되는데, 즉 상단전이 기를 얻고 중단전이 기를 얻고 하단전이 기를 얻어 새로운 삶이 된다. 상단전의 지혜가 바른 판단을 하고 중단전의 감정이 상대를 이해하게 하고 하단전의 정이 몸을 건강하게 할 때만이 나의 삶이 시작된다는 뜻이다. 이 삶이 시작되는데 어디를 향해서 가느냐 하면 바로 십이라는 완성을 향해서 가는데 이 때에 칠팔구가 생겨나게 된다. 칠이라는 것은 일곱 개의 구멍을 말한 것이고 일곱 개의 구멍은 얼굴을 지칭하는 것으로 영의 구멍이 일곱 개라는 뜻이다. 이 구멍을 통해 생각하고 느끼고 경험하여 지혜를 만들고 감정을 만들고 몸을 만들며 사는 것이다. 이 모두를 관장하는 것이 바로 영이 되게 된다. 영은 뇌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몸 전체에 존재하면서 일곱 개의 굴을 통해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말하며 영을 성장시키게 된다. 이 일곱 개의 굴을 통해서 팔이 시작되는데 팔이 시작된다는 것은 삶이 시작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삶의 희로애락으로 십이라는 완성의 근본으로 간다는 뜻이다. 이 희로애락에서 팔자라는 말이 나온 것이다. 희로애락이 극치에 다다르게 되면 다시 아홉 개의 구멍이 차게 되어 본으로 돌아가게 된다. 술잔에 술을 찰랑찰랑하게 따르면 아구가 찼다는 말을 하는데 아홉 개의 구멍이 찼다는 뜻이다. 우리 몸에 구멍을 세어보면 얼굴에 일곱 개 성기와 항문을 합하면 구가 되고 이 아홉 개의 구멍이 찼다는 말이다. 아홉 개의 구멍이 찼다는 말은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는 뜻이다.”
운삼사성환오칠 “셋이 기운을 얻으면 움직이기 시작하는데 그 움직임이 영의 굴을 통해 삶을 만들게 되고 이 때 완성의 고리가 연결되어 목화토금수를 얻어 오장육부가 생겨나게 된다. 오장육부의 탄생이 기를 움직이게 하고 영의 굴을 만들고 그 굴을 통해서 마음이 오가면서 삶이 시작된다. 이 삶은 다시 칠이라는 주기를 타고 흐르게 된다. 여자가 아이를 낳으면 스무 하루 동안 요양을 시키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칠의 주기에 삼을 곱하면 스무 하루가 된다. 우리도 육 일을 일하고 칠 일째 쉬는 것은 몸의 리듬을 맞추기 위함이다. 24경락이 한 바퀴 도는데 21시간이 걸리게 된다. 칠의 주기는 알게 모르게 삼 단전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또 북두칠성의 움직임을 통해 주역이 만들어졌고 삶의 방향을 잡아 우리 조상들은 살아온 것이다. 그래서 삼 단전이 칠을 주기로 돌아가며 묘하게 일어나게 된다.”
일묘연만왕만래용변부동본 “그 하나가 칠이라는 주기를 통해 묘하게 일어나는데 여기서 묘하다는 것을 깊게 알아야 한다. 내가 태어남과 동시에 엄마 아빠를 만나 감정이 오가고 다시 친구를 만나 미워하고 좋아하는 것이 참 묘하다는 것이다. 이 묘함을 통해 아파하고 고통 받으며 살아온 것이 얼마나 신기한 일인가. 또 묘함을 따라 만왕만래가 이루어지고 하루에도 수백 가지의 마음이 일어났다 없어 졌다를 반복하며 살아온 것이다. 이 수백 가지가 오가는 가운데 용변부동본이다. 변하지 않는 본이 있다는 뜻이다. 이 근본은 바로 무이다. 태풍을 보면 모든 것을 잡아 삼킬 듯 하지만 정작 태풍의 눈은 고요하다는 것이다. 고요함이 전체를 일으키고 있다는 뜻이다. 마차바퀴가 수없이 돌아가지만 그 중에서도 돌아가지 않는 곳이 있다 바로 축이다. 움직이지 않는 것이 움직이는 것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이 하루에도 수백 번 마음이 일어나지만 이 마음은 항상 움직이지 않는 곳에 중심을 두고 있다. 이 움직이지 않는 곳이 바로 본이다. 본은 말로 표현되어지지 않고 어떠한 단어로 해석할 수 없다. 본은 느낌과 경험으로만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수만 가지가 오가는 것을 경험하고 느끼면 본을 중심으로 오간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내 아이를 걱정하고 내 남편을 걱정하는 것은 결국 나의 본을 걱정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사람들은 본을 물질이라 생각하고 그 위에다 많은 것을 세우지만 이것은 진정한 본이 아니다. 이 본은 얼마 가지 못해 불안해질 것이다. 손 위의 콩가루와 같아서 작은 바람에도 모두 날아가게 된다. 우리는 아무리 많은 것이 오가도 냉철한 마음에서 움직임 없는 본의 축을 찾아야 한다. 본의 축을 찾을 수 있는 것이 수련이다. 내 몸의 하단전의 정을 채우고, 중단전의 감성을 열고, 상단전의 지혜를 밝힐 때 근본의 본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하단전, 중단전, 상단전이 크게 합하여 만왕만래에서 본을 찾게 되면 큰 밝음을 얻게 된다.
본심본태양앙명인중천지일일종무종일 “본심을 찾게 되면 아주 크고 맑고 밝음이 생겨나 인중천지일을 느끼게 된다. 하늘과 땅의 근본과 하나 된다는 말이다. 이는 태풍의 눈에 들어가는 것이고 마차바퀴의 축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 축이 천지의 중심이 되어 만물이 죽고 사는 것과 해가 뜨고 해가 지는 것 또한 이 축에 중심을 두고 오고 간 것이다. 나 또한 이 축에 삶을 만들어 오가다 끝을 맺게 되는데 이것이 다시 한 얼이 되어 시작된다. 이것이 끊임없이 오가는 것이 윤회며 삶이다. 앞에서 말한 축이 바로 상단전, 중단전, 하단전이며 이 셋은 다시 하나의 축을 만들어 몸, 감정, 지혜를 관장하는 얼을 만들고 얼은 다시 삶을 만들어 살게 된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몸이 내가 아니라는 것이다. 살면서 몸을 느끼며 사는 사람은 없다. 몸이 느껴질 때가 언제냐 하면 아플 때 뿐이다. 몸이 아프다는 것은 정의 흐름이 원활하지 못하고 기가 약해졌다는 뜻이다. 그래서 우리는 영을 찾아야 하고 영을 자라게 하여 인중천지일이 되게 해야 한다. 인중천지일이 될 때 모든 흐름을 끝낼 수 있다. 끝을 못 맺는 것은 삶에 집착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집착을 하니 끊임없이 고통과 아픔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집착은 감정을 일으켜 정을 고갈시키고 지혜를 어둡게 하여 근본의 무에 들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또 들지 못하니 만왕만래가 시작되고 시시비비가 삶의 창살이 되어 너와 나를 힘들게 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영이 자라지 못하면 집착과 감정이 일어나 몸을 병들게 하고 다시 윤회의 사슬로 이어지게 한다. 그래서 우리는 일적십거를 통해 얼을 십의 자리인 본에 들게 해야 한다. 지금 영을 제대로 자라게 하는 교육이 없다. 그러니 모든 영이 아이가 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어린 영이 생각을 일으키고 감정을 오가게 하니 모든 삶이 시비로 이어지는 것이다. 상단전의 영을 바르게 자라게 할 수 있는 만왕만래를 줄이고 본심본에 들게 하여 인이 하늘과 땅의 중심축에 들게 하여 일종무종일로 종(終)해야 한다는 뜻이다. 『천부경』은 하늘로 들어갈 수 있는 경전이다. 이 경전을 중심 삼아 느끼다 보면 하늘 마음을 알게 된다. 그래서 무슨 경이든 얼을 자라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천부경』이든 성경이든 불경이든 경을 자꾸 외우는 사람들은 업이 닦이고 맑고 밝음으로 간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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