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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십자 삼일신고(10)(11) /한민족의 하나님 본문

천지인 공부/삼일신고

백십자 삼일신고(10)(11) /한민족의 하나님

柏道 2019. 8. 29. 18:44


백십자 삼일신고(6) /한민족의 하나님|수요강좌/한민족 희망의편지

권천문 |       
 

 

제10강좌. 한 민족의 신앙 하나님

(三一神誥 : 一神訓)

 

천부경(天符經)의 첫머리에 일시무시일(一始無始一)하여 우리민족의 하나님의 창세기(創世記)를 먼저 언급하였다. 천부경의 하나님은 삼일신고(三一神誥)의 일신훈(一神訓)과 상호 연결되는 말씀이므로 이번 기회에 우리조상들의 신앙 하나님에 대하여 설명을 붙이고저 한다.

 

<일신훈 一神訓>

신재무상일위 유 대덕 대혜 대력 (神在無上一位 有 大德 大惠 大力)

생천 주무수 세계 조 신신물 (生天 主無數 世界 造 兟兟物)

섬진무루 소소영영 불감명량 (纖塵無漏 昭昭靈靈 不敢名量)

성기원도 절 친견 (聲氣願禱 絶親見)

자성구자 강재이뇌 (自性求子 降在爾腦)

 

하나님은 유일무이(有一無二)하신 최고의 유일신으로 큰 덕(大德)과 큰 지혜(大惠)와 큰 힘(大力)을 가지신 분으로서 하늘과 땅과 사람과 세상민물을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분이시다. 창조에는 티끌 하나도 빠뜨림 없으시며 밝고도 신령하시어 감히 이름을 지어 헤아릴 수 없으신 분이시다. 이러하신 하나님께 정성과 기를 다하여 기도드리면 반드시 만나실 수 있다. 스스로 씨알에 구하면 우리들 뇌에 내려와 계신다는 것이다.

 

스스로 우리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 마음.一心>을 지키고 <하나님의 기운>一氣>을 얻어 천아(天我)되기를 원하면 하나님은 우리 마음에 오셔서 함께 하신다는 것이다. 인간(人間)과 하나님(一神)은 두 개로 있지 아니 하시고 <하나님의 마음이 우리 마음이 되고, 우리 마음이 하나님 마음이 되어서 상호 거리 없는 하나에 달하는 것이다.> 그와 반대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거리가 있으면 우리에게 하나님이 떠나고 감화를 받을 수 도 없다.

 

그 다음은 하나님은 대덕(大德), 대혜(大惠), 대력(大力)을 가지신 분이다. 이는 석삼극무진본(析三極無盡本) 했을 때 조화(造化), 교화(敎化), 치화(治化)의 모습으로 나뉜 삼위(三位)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그러나 특정 종교의 삼위일체(三位一體) 교리와는 엄청난 차이로 서로 다르다. 한민족의 조화, 교화, 치화는 한분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역할을 말하는 것이고 특정 종교의 삼위일체 교리는 성부, 성자, 성령이 한분이라는 것이다.

 

성부(聖父), 성자(聖子)가 한분이라는 즉 하나님께서 하늘 자리를 비워 두고 이 땅에 내려와 아들과 한 몸이 되었다는 도성인신(道成人神) 이라는 것도 이해할 수 없는데 더욱이 성령(聖靈)이 하나님과 같다는 것은 잘못된 해석이다. 성령은 중계자(仲介者)이다. 부동산의 중개인이 부동산 주인이 될 수 없는 것 같은 이치이다.

 

성령(聖靈)의 히브리어 단어는 루아흐(ruah)이다. 루아흐는 “바람”을 의미하는 것이다. 한민족 언어의 신바람(神風)이다. 즉 힘, 운동, 활동의 개념이다. 이는 우리의 기(氣)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루아흐>는 인간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부여하는 임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능력을 부여 하는 것 즉 운기(運氣)하는 것이며, 부여 받는 대상은 고대의 카리스마적인 영웅(성서 사사기 6:34, 14:6,9) 예언자들(민수기11:24-29, 사무엘상10:10, 미가서3:8) 메시아 적 왕(이사야11:20 주의 종(이사야42:1)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우리가 흔히 말할 수 있는 한민족의 선사(仙師) 도사(道士) 대사(大師) 기공사(氣功師) 기타 종교계 지도자 등등 이라 할 수 있다. 그러한 성령과 기(氣)는 역사를 새 시대와 새 창조로 이끌어 가는 역동적인 힘이 있으며 인간의 역사 안에서 활동하는 구원의 힘으로 누구나 회피할 수 없는 하나님의 임재의 표정일 수는 있다고 하겠지만 그 자체가 하나님과 동일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

 

한민족 조상들의 신앙대상의 하나님은 어떤 특정 종교처럼 이론적이고 체계적이고 기계적인 하나님은 아니다. 신약성경에는 <하나님>을 영원한 영으로, 무한한 창조자와 보존자로, 그리고 그를 신앙하는 모든 자 들에게 구원자로 계시되고 있다. 그러나 구약성경에는 <하나님>에 관한 어떠한 조직적인 교리를 지니고 있지 않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어떤 논리적인 체계나 영적인 사상체계 안에 하나의 구성 요소로서 편입될 수 있는 개념이 아니고 그때마다 하나님은 그 백성과 맺는 역사적인 관계 내에서 계시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한민족이 기쁠 때나 어려움을 당할 때에 <하나님>을 부르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구약성경의 유대교 하나님은 우리 조상들의 점령지 <수메르>에서 전파되어 우리 민족과 같은 풍속을 따랐기 때문이다. 우리의 하나님은 절기에 따라 개인과 가정과 국가적으로 하나님께 감사제를 드리는 등 그때마다 하나님과 백성들과 맺게 되는 역사적 관계에서 하나님인 것이다.

* 천부경(天符經)과 삼일신고(三一神誥)를 유심히 분석해 보면 우리민족의 조상들이 섬겨온 하나님에 대한 몇 가지 특징을 볼 수 가있다.

 

첫째 : 하나님의 절대성(絶對性)이다. 천일일(天一一)이다.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절대자의 위치를 가지고 계신다. 하나님은 절대 자존자(自存者)로 만물의 제일 원인이시고 필연적 존재이시다. 하나님은 절대적 실유(實有)로서 존재한 모든 것이 지성적이며 자원적인 원인이시며 영존자(永存者) 존재의 인격자이시다. 그러므로 우리 심령속에 늘 모시고 살아야 한다. 이 땅에 각종종교와 이방신들은 사람이 인의적(人意的)으로 만든 것이다. 불안전한 인간이 만든 종교와 그 신(神)들은 사람의 정신을 혼미하게 할 뿐이다.

 

둘째 : 하나님의 자존성(自存性)이다. 하나님은 그 자신이 원인이시며 자존자이시다. 하나님은 실유에서 독립적일 뿐 아니라 만사만물을 자기에게 의존케 하는 원인으로서 동작하신다. 하나님은 영원 자존자이시다. 하나님은 시작도 원인도 없는 필연적으로 독립적인 자존자로서 존재한다. 불감명량(不敢明量)이시다.

 

셋째 : 하나님의 불변성(不變性)이다. 하나님은 불변 부동본(不動本) 이시다. 특히 공의(公義)에서 불변하신다. 하나님은 그 자신 외에 무엇에 의하여 변경될 수 없고 그 자신 안의 어느 원리에 의하여 변경되지도 않는다.

 

넷째 : 하나님의 무한성(無限性)이다. 일시무종일(一始無終一)이다. 하나님은 어떤 양식으로든 우주에서 제한을 받거나 국한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양적, 질적, 시간적, 공간적, 모든 면에서 초월하고 제한 받지 않는다.

 

다섯째 : 하나님의 유일성(唯一性)이다. 하나님은 오직 한분이신 유일신이다. 무한하고 절대적 실유는 독일무이하시다 그 류(類)가 없다.

 

여섯째 : 하나님의 영성(靈性), 생명성(生命性), 인격성(人格性)이다. 소소영영(昭昭靈靈)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다. 하나님은 살아 계시며 자기 속에 생명이다. 영생이시다. 하나님은 지정의(知情意)가 있는 인격적 신이시다.

 

일곱째 : 하나님의 지성적속성(知性的屬性)이다. 하나님은 지성, 지식, 지혜, 진실 하시다. 하나님은 빛이시다. 어둠이 없다. 모든 것이 전지하고 자유적 지식이 있다. 자유행동의 예지는 직관적이다. 하나님의 지혜는 영원하시다.

 

여덟째 : 하나님의 도덕적속성(道德的屬性)이다. 하나님은 거룩(聖), 의(義), 선(善), 사랑(愛), 은혜(惠), 궁휼(矜恤), 참음(忍)이시다. 그는 참으로 거룩하시다.

 

아홉째 : 하나님의 주권적속성(主權的屬性)이다. 하나님은 주권적의지, 주권적 능력자이시다. 하나님의 의지는 만사의 목적으로 제시된다. 창조의 보전, 정치, 선택과 유기, 생의 작은 일도 하나님의 의지에서 나온다. 하나님의 의지는 만사의 구원적 원인이시다. 하나님은 의지를 집행한 능력에 나타난다.

 

열째 : 하나남의영광(榮光)이다. 하나님은 완전하시고도 내면적으로 복이 있고, 외면적으로 영광스럽다. 하나님의 영광과 위엄은 전체 피조계와 은혜의 전역에 계시된다. 하나님은 전지전능 유복하시다.

 

제11강좌. 마음개발에 따라 열리는 하늘

(三一神誥 : 天訓, 天一一)

 

<삼일신고 천훈 三一神誥 天訓>

제왈 이오가중 창창비천 현현비천 (帝曰 爾五加衆 倉倉非天 玄玄非天)

천 무형질 무단예 무 상하 사방 (天 無形質 無端倪 無 上下 四方)

허허공공 무불재 무불용 (虛虛空空 無不在 無不容)

 

천제께서 말씀하시기를 푸르고 푸른 것이 하늘이 아니며, 검고 검은 것이 하늘이 아니다 고 하신다. 하늘은 모양도 질량도, 서로 마주치는 곳도, 상하도 사방도 없는 것이 라고 하셨다. 허허공공하여 <없음이 없다>한 것이니 무소 부재하여 모든 것을 수용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알파와 오메가요 전지전능하시다는 뜻이다.

 

여기에서 제(帝)를 현실 국가의 천황(桓雄)으로 해석하면 현실세계를 정치와 종교를 통하여 지상세계(地上世界)를 지상낙원(地上樂園)으로 가꾸려는 의도가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푸르고 푸른 것이 하늘의 양(陽)이 아니고, 검고 검은 것이 하늘의 음(陰)도 아니라고 한 것은 보이는 것이 하늘이 아니라 그 어떤 보이지 않는 일신 하나님의 세계가 따로 있다는 것으로 해석 된다.

 

우리가 보통 창공을 가리켜 하늘이라고 부르고 있지만 이것은 대기권의 하늘이고 종교(宗敎)에서 의미하는 하늘(天)은 아니다. 하늘의 구조는 어떻게 생겼을까? 하늘은 일층인가. 다층인가? 이 문제는 종교의 진화(宗敎進化)와 깊은 관계가 있으며 또한 윤회(輪回) 하고도 긴밀한 관계가 있다. 기독교(基督敎)는 삼천층(三天層)이라 하고, 유대교(猶太敎)는 칠천층(七天層)이며, 유교(儒敎)는 구천층(九天層)이요, 불교(불교)는 삼삼천층(三三天層)으로 보고 있다.

 

우리가 이날까지 죽으면 영혼이 하늘로 가는 줄 만 알았지 하늘 어디로 가는지를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죽으면 다같이 하늘로 갈 수 없다. 그렇다면 도대체 하늘이란 무엇 인가? 종교에서 특히 한민족 고대신앙에서의 하늘은 무엇인가? 우리민족은 하늘의 개념을 <마음의 열림>과 <자각의 차원>을 의미하였다. 인간의 마음이 개명(開明)되는 정도에 따라 그 개천(開天)하는 하늘도 각각 다르다는 것이다.

 

원시인(原始人) 들은 무명(無明)과 미망(迷妄) 속에서 방황하며 개천한 하늘은 저급한 신들이 살고 있는 하늘이었고, 심령과 자각이 높아질수록 개천되는 고등종교의 하늘에는 윤리와 도덕을 주제하는 높은 신들이 살고 있으며,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하늘 가운데 가장 높은 하늘에 자리하고 계신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모든 종교는 마음의 개명(開明)에 비례하여 개천(開天)하였으므로, 인간의 마음을 닦는 정도에 따라 개천되는 하늘이 다르며 하늘의 열림에 따라 감응(感應)되는 신(神)들도 다른 것이 엇다. 그러므로 최초에 종교가 없었던 원시인들에게는 하늘이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들의 의식 정도가 지극히 저급하고 심전(心田)을 개발하지 못한 미개인들이었으므로 하늘을 개천할 능력이 없었다. 원시인들은 그 의식이 저급하므로 잡신들의 도전을 받아 미신의 하늘을 개척하였다.

원시상태를 뚫고 나와 고등종교의 심전을 개척한 첫 사람은 최초로 하나님의 하늘을 개천하려고 구도의 몸부림을 친자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찾아가는 첫 사람으로 기록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식의 진보와 마음의 자각은 물질문명의 발달에 정비례하지는 않는다. 고도의 문명인이라 자부하는 일급 교양을 가졌다고 교만하는 현대인들 속에서도 아직 하늘을 개천하지 못한 마음의 원시인들이 허다하다. 이들은 과학미신(科學迷信)을 믿는 무신론자(無神論者)들이기 때문이다. 하나님(一神) 이던 다신(多神)이던 부인하는 자들은 마음을 개명하지 못한 관계로 스스로의 하늘을 개천하지 못하였다.

 

그런대 현대인들은 새 하늘을 개천하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이미 선인(先人)들이 개천했던 하늘은 낡은 하늘이 되어 현대인들에게는 우수의 잿빛하늘로서 아무런 감동을 주지 못하는 형편이라는 것이다. 이 때문에 성서(聖書)의 마지막과 천부경(天符經)의 마지막에는 <새 하늘의 개천>을 부르짖고 있다.

 

하늘의 개천에는 인간의 심전개명(心田開明)과 윤회환생(輪回幻生)의 두 가지와 깊은 관계가 있다.

 

첫째: 심전(心田)에 따라 열리는 하늘.

 

인간이 심전을 개발함에 따라 그와 정비례하여 높은 하늘이 열린다. 바꿔 말하면 여러 하늘의 영들이 도전하는 정도에 따라 인간은 심전 개발하는 정도에 차이가 생기는 것이다. 창세 이후 많은 인간들은 심전개발에 주력하고 그들의 하늘에 머물게 되었다. 인간들이 심전을 개발함에 정비례하여 하늘의 차원이 열리기 때문에 하늘은 다천층(多天層) 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인간의 개명의 차이에 따라 하늘의 열림이 달라진다는 뜻이다.

 

둘째: 윤회환생(輪回幻生)에 따라 열리는 하늘.

 

인간은 유일신 하나님이 계시는 참 하늘을 개명하기 까지는 무수히 윤회를 거듭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목적지에 도착하기 까지는 우리는 도중에 죽으면 다시 새 몸을 쓰고 나와서 전생(前生)보다 앞서 전진하여 목적에 도달하도록 노력한다. 사다리를 오르다가 잘못 오르면 떨어져 다시 시작해야 하듯이 우리는 이 생애에 와서 범죄하므로 전생의 개천한 하늘에서 다시 밑바닥으로 떨어져 무명과 미망 속에서 반복을 거듭하는 자도 있고, 마음을 잘 닦아 계율을 지켜 한층 한층 사닥다리를 오르듯 높은 하늘을 향하여 차례로 개천하는 자도 있으며, 또한 뛰어난 심령들은 남들이 천 번 윤회하여 닦아야할 과정을 하루아침에 깨치고 행하는 자도 있는 것이다. 이것은 은혜인 것이다.

창조주 하나님은 생명 그 자체이므로 그와의 만남은 곧 하늘나라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인 종교들은 종교지도자가 전해준 진리이므로 닦아 올라가는 계명과 율법에 따라 다르며 개천하는 하늘의 층도 다층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 민족 고유의 하나님은 개인의 신앙에 따라 단번에 <하늘낙원>에 이를 수가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불교(佛敎) 신자는 33단계를, 유교(儒敎) 신자는 9단계를, 유태교(猶太敎) 신자는 7단계를, 기독교(基督敎) 신자는 3단계 하늘 사다리를 올라가야 하지만 한민족 하나님을 믿는 자는 개명(開明)과 개천(開天)을 한 단계에 뛰어 오를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