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제 2장 종교란 사람의 육체 속에 있는 영의 재생을 목적으로 한다 본문
예언편(세계)
사람은 육체 속에 신을 가진 존재이다. 과연 이렇게 살아가도 좋은가?
아리랑맨
2015. 9. 24. 11:16
제 2장 종교란 사람의 육체 속에 있는 영의 재생을 목적으로 한다
1)종교란 무엇인가?
종교란 무엇인가? 종교를 한자로 쓰면 종교(宗敎)이다. 종교(宗敎)는 마루 종(宗) 자에 가르칠 교(敎) 자로 이루어진 글자이다. 해석하면 ‘가장 으뜸의 가르침’ 또는 ‘가장 근본 된 가르침’이란 의미이다. 세상에는 많은 가르침이 있지만 그 중 ‘가장 근본 되고 가장 큰 가르침’은 종교란 의미이다. 종교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고, 근본 되고, 큰 가르침이란 것을 이 단어를 통하여 엿볼 수 있다.
종교를 영어로 쓰면 릴리젼(religion)이다. 어원은 라틴어이다. 리(re)는 다시라는 의미이고, 리젼(ligion)은 ‘결합하다’ ‘잇다’의 의미이다. 합하여 연결하면 ‘다시 잇다’ ‘다시 결합하다’는 의미이다. 종교란 무엇과 무엇이 다시 연결되는 것일까?
만물들 중에 종교를 가진 것은 사람뿐이다. 그래서 혹자는 “사람은 종교적 동물”이라고 정의한 사람도 있다. 스피노자는 “인간을 삶이 두려워서 사회를 만들었고, 죽음이 두려워서 종교를 만들었다”고 주장하였다. 과연 그럴까? 과연 사람이 종교를 만들었을까? 신이 종교를 만들었을까?
대답은 신의 존재를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은 종교를 사람이 만들었다고 할 것이고, 신의 존재를 믿는 사람들은 신이 종교를 만들었다고 할 것이다.
2)종교란 사람이 영혼을 소유한 신의 소생이므로 그 근본으로 돌아가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사람이 신(神)이다. 사람의 육체 안에 있는 영(靈)은 곧 신이다. 따라서 신은 있다. 신이 없다고 하는 사람은 자신 안에 거하는 영(靈)을 부정하는 사람이다.
신을 크게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진짜신이고, 또 하나는 가짜신이다. 진짜신은 창조주께서 만든 그대로의 신이고, 대표적으로 성령들이다. 가짜 신은 창조주께서 만든 신에서 변질된 신이며, 대표적으로 마귀 신이다. 따라서 진짜 신 계열의 신들과 사람들은 진리를 말할 것이고, 가짜 신 계열의 신들과 사람들은 거짓을 말한다.
진짜 신 계열을 성령이라고 하며, 이 성령이 사람의 육체에 들어가면 그 사람은 진리를 사랑하며, 자신도 진리를 말한다. 반대로 가짜 신 계열을 악령 또는 마귀 신이라고 하며, 이 마귀 신이 사람의 육체에 들어가면 그 사람은 진리를 싫어하며, 자신도 거짓말을 하게 된다. 이때 거짓말은 창조주를 마귀라고 하고, 마귀를 창조주로 인정하게 된다.
성경의 창세기에 등장하는 아담은 창조주가 주는 생기를 받아 생령(生靈)이 된 첫 사람이다. 생령은 살아있는 영이란 의미이다. 이 생령은 창조주 하나님의 형상이고, 다른 말로 성령이다. 이렇게 창조된 아담이 뱀이 먹으라고 한 선악과를 먹고 흙으로 되돌아갔다. 흙은 사령(死靈)을 비유한 말이다. 사령은 죽은 영이란 말이고, 악령이고, 마귀 영이다.
아담은 신앙의 조상이다. 그런데 아담이 마귀 영을 가진 육체로 변하였으니 그 후 신앙인들은 모두 그 유전을 받았다. 그래서 성경은 사람의 육체에 들어온 마귀 영으로부터 구원할 것을 예언한 책이다.
불경의 최고의 예언은 중생(衆生)에서 부처로 성불하는 일이다. 부처는 깨달은 사람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사람이 깨닫는 것은 육체가 아니라, 사람 안에 있는 영이다. 그럼 중생의 영은 깨닫지 못한 영이고, 부처의 영은 깨달은 영이다. 중생과 부처의 차이는 영의 차이다.
따라서 성경의 내용처럼 불경의 목적도 사람의 영이 마구니의 영에서 성령으로 다시 재생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렇게 크게 볼 때, 기독교와 불교의 교리는 같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기독교는 사람의 육체 안에 있는 영의 부활을 목적으로 하고, 불교도 사람 육체 안에 있는 영의 성불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이다.
창조주를 흔히, 하느님, 하나님, 상제님, 알라님, 부처님, 진여, 본지체, 조광불이라고 한다.
창조주께서 처음 많은 신들을 창조하셨다. 그 신들을 양신(陽神), 선령(善靈), 생령(生靈), 성령(聖靈) 천사(天使) 등으로 칭하며 비유로 봉황, 주작, 금시조라고도 칭한다.
가짜(모방) 신을 흔히 귀신, 음신(陰神), 마귀, 마구니, 악신, 악령, 사령(邪靈), 사령(死靈), 요귀, 사단이라고 칭하며 비유로는 용, 악어, 뱀, 전갈이라고도 한다. 가짜 신도 처음은 성령이었으나 변질 된 신들이다.
지구촌의 사람이 신이라면 그 사람들은 위에 열거한 신들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신으로 이루어진 사람이 지구촌에 살고 있는 것은 신과 연관이 없지 않을 것이다. 또 사람들을 이렇게 지구촌에 있게 한 무엇인가가 있을 것이다. 그것을 우리가 세상에서는 찾을 수 없으되, 종교 경전에는 기록되어 있다.
사람이 인신(人神)이라면 처음 인신(人神)을 낳은 분은 창조주일 것이다. 최소한 종교 경전에는 그렇게 기록되어 있다. 창조주께서 처음 사람을 지을 때, 자신의 형상으로 지었다고 한다. 창조주의 형상은 성령이다. 따라서 사람은 창조 신(神)의 아들로 태어난 셈이다.
따라서 사람들이 창조주를 공경하는 종교행위는 자식이 부모에게 행하는 효행이라고 할 수 있다. 또 그 사실을 기록한 종교 경서는 부모가 자식에게 약속한 유언장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 유언장에는 창조주와 인간의 관계가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과거의 역사와 현제와 미래에 있을 계획을 기록하고 있다. 역사에는 처음 인간이 창조되었을 때는 사람의 육체 안에 성령이 있었다고 한다. 성서의 창세기에는 그런 첫 사람이 뱀의 말을 듣고 변질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의 육체에는 마귀 신이 들어가 살게 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사람들은 창조주를 모르고, 진리를 싫어하고, 거짓을 좋아하게 되었단다. 그 대표적인 예가 사람들이 용을 좋아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용왕님 용왕님 섬기는 것은 곧 사람이 마귀를 섬긴다는 증거이다. 용이 바로 마귀의 왕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육체 안에 마귀 신이 살고 있으므로 사람이 신(神)이란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사람이 신이란 사실도 인정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의 육체 안에 성령이 들어오게 되면 사람의 육체 안에 있는 영(靈)은 곧 신이란 사실을 깨닫게 된다. 따라서 성령의 사람들은 신이 있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육체 안에 마귀 신이 있으면 진리가 없으므로 신이 없다고 할 수밖에 없다.
사람 중에 어떤 부류가 신이 없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자신 안에 거하는 영(靈)이 성령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령이 아닌 사람들은 종교를 인정하지도 않고, 사람이 종교를 만들었다고 할 수밖에 없다. 자신 안에 있는 신이 그렇게 생각하게 하기 때문이다.
3)기나긴 역사 기간 동안 과학을 발전하였고, 종교는 퇴보하였다
세상에는 참으로 많은 종교들이 있다. 그런데 종교마다 교리가 다르고 의식이 다르다. 이것은 당연한 것일까? 그런데 문제는 세상의 많은 전쟁이 종교로 말미암아 발생한다. 이것은 과연 옳은가? 스피노자의 말대로 사람이 종교를 만들었다면 세상의 종교를 다 없애버리면 전쟁이 없어질 것이 아닌가? 과연 그럴까?
세상에는 과학이나 의학이나 문화가 고도로 발달되어 있다. 그러나 종교는 오랫동안 오히려 퇴보하여 왔다. 세상의 종교는 과학만큼 의학만큼 발전하지 못했다. 오늘날까지 세계종교가 이룬 일이 무엇이 있으며, 지금은 무엇을 이루고 있는가? 살인? 전쟁? 마녀사냥? 파벌? 기업화? 세속화? 상속화? 직업화?
이제 종교학의 문제점을 간파하고, 순수한 종교학의 발전에 심혈을 기우려야 할 때가 아닐까? 세계평화와 전쟁 종식은 종교와 직결된 문제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4) 사람은 육체 가진 신이기 때문에 그 신을 준 자를 찾아 알아야한다
우리는 먼저 종교는 왜 해야 하는가 하는 근본적인 문제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지구상에 유일하게 사람만이 신앙이란 것을 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종교 경전은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서 한다고 한다.
마음은 무엇인가? 마음은 곧 정신(精神)이다. 정신을 영혼(靈魂)이라고도 한다. 따라서 사람이 종교를 하는 이유는 사람에게는 영혼(靈魂)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먼저는 사람의 육체 안에는 영혼이라 존재가 있는데 이 영혼의 출처가 어딘지를 생각해보아야 한다.
자신에게 있는 영혼은 어디서 온 것일까? 종교학은 여기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먼저 자신의 영혼의 출처를 알기 위해서는 영혼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알 필요가 있다. 영혼이란 무엇일까? 사람의 영혼은 사람의 육체 속에 있다. 그 영혼을 한자로 쓰면 영혼(靈魂)이다. 영혼은 영(靈)과 혼(魂)이란 글자로 어우러져 있다.
사람의 구성요소를 정리해보면 육체와 혼과 영으로 이루어진 것을 알 수 있다. 사람의 육체의 성분은 크게 물과 단백질이다. 또 물과 단백질은 곧 흙의 성분과 같다. 따라서 사람의 육체는 흙으로 이루어졌다.
부모가 서로 사랑을 하면 정자와 난자가 어머니모태에서 수정을 하게 된다. 정자와 난자는 현미경으로 봐야 겨우 볼 수 있는 아주 미세한 존재이다. 그것을 물질이라고 하기도 그렇다. 그런데 그 속에는 DNA라는 유전자가 들어있다. 겨자씨보다 작은 씨에서 자라 태아가 어머니 배속에서 나와 출산이 되면 아이는 보통 약 3KG정도의 체중을 가진다. 3KG정도의 체중은 어디서 온 것일까? 모태가 땅에서 난 식물이나 고기를 먹고 만든 영양으로부터 얻어 진 체중이다.
식물이나 고기는 어디서 나왔는가? 식물은 땅 속에 있는 것에서 체(體)를 얻고, 동물은 그 식물을 먹고 체중을 얻는다. 태아가 어머니로부터 받은 체중은 결국 모두가 땅에서 온 것이다.
그러므로 태아의 몸은 땅의 성분이다. 그리고 태어난 아이가 점점 자라서 땅에서 난 것을 먹고 체중이 10KG, 20KG, 30KG...점점 늘어간다. 그것이 사람들의 육체이다. 따라서 모든 육체는 땅에서 온 것이다. 따라서 세상 모든 사람의 육체는 땅의 성분이 이동되어 몸을 구성하게 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사람의 육체 속에 들어있는 영혼은 어디서 왔는가? 육체가 흙이라면 그 영혼은 흙 속에 들어있다고 할 수 있다. 흙에 혼(魂)이 들어있고, 그 혼에 또 영(靈)이 있다. 이렇게 보면 사람이란 참으로 신비(神秘)하기 그지없지 아니한가?
신비(神秘)라는 말을 해석하면 ‘신의 비밀’이란 의미이다. 흙속에 혼과 영이 섞여있는 것이 신의 비밀이란 말이다. 신비(神秘)라는 말도 그래서 생겨난 것이 아닐까?
동물도 혼은 있다. 그러나 영(靈)은 없다. 사람은 영도 있고 혼도 있다. 혼은 육체를 움직이게 하는 생명의 근원이다. 영(靈)은 언어를 구사할 수 있게 하고, 인간을 이성적(理性的) 고차원적 사고를 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 혼은 죽을 때까지 육체와 하나 되어 있지만 영(靈)은 입출(入出)이 가능하다.
우리가 꿈을 꿀 때, 자신의 몸은 한 자리에 누워있지만 그 영은 온 세계를 돌아다니고 있음을 누구나가 경험한다. 그러나 인간의 육체 속에서 영이 떠나 돌아오지 않으면 혼은 생명을 다하고 육체는 썩게 된다.
5) 눈으로 보이는 역사와 눈으로 볼 수 없는 역사
인류 세상의 역사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가 있다. 하나는 보이는 육체의 역사이고, 다른 하나는 보이지 아니하는 가운데 육체 안에서 활동해온 신의 역사이다. 사람의 육체는 육체 안에 있는 영혼에 의하여 움직인다. 그러나 움직이는 사람의 육체는 눈으로 볼 수 있으나, 육체 안에서 육체를 움직이는 영혼은 눈으로 볼 수 없다.
사람의 육체 안에 있는 혼과 하나 되어 있는 영(靈)을 달리 신(神)이라고 칭한다. 따라서 사람의 육체에는 신이 함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인간세상의 역사를 엄격히 둘로 나누어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는 보이는 육체의 역사였고, 그것은 우리가 학교의 국사와 세계사 학과 과정을 통하여 배워왔다.
그러나 인간 안에서 세계의 역사를 움직이게 한 신의 역사는 우리는 배우지 못했다. 본 필자는 그것을 여기서 신들의 역사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신의 역사를 협의적(狹意的) 종교의 역사라고 한다면, 오늘 필자가 말씀 드리는 신의 역사는 광의적(廣意的) 종교의 역사로 봐주면 좋겠다.
광의적(廣意的) 종교의 역사는 인류가 창조되어 오늘날까지 흘러온 신과 결부된 인간의 역사이다. 그러나 인류의 역사는 외관으로 보이게 나타났지만, 광의적(廣意的) 종교의 역사는 보이지 않게 진행되어 왔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사람의 마음은 모른다” 격언 처럼 세상은 사람에 의하여 돌아가고, 사람은 그 안에 든 마음에 의하여 움직인다.
따라서 인류 세상도 보이지 아니하는 사람들의 마음에 의하여 움직여 왔다고 볼 수 있다. 마음은 곧 영이요, 신이니 결국 세상도 신에 의하여 움직여 왔음을 논리적으로 증명이 된다.
그것을 달리 신의 역사라고 표현 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까지의 종교는 역사의 흐름에 따라 변형되고 부패하고 잘 못되어 왔다. 오늘날의 세계현상은 그것을 답하고 있다.
그래서 이제 미래 인류역사에 다시 만들어져야 할 광의적(廣意的) 신의 역사의 희망은 회복이다. 여기서 회복이란 처음 창조된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인간은 육체와 혼과 영이 결합되어 있는 복합체이다. 삼개체로 이루어진 존재이다. 사람의 육체에는 뇌가 있고, 각 지체에는 뇌로부터 이어진 신경(神經)이 있다. 사람의 지체에 신경이 끊어지면 그 부분은 죽은 상태가 된다. 사람의 육체에 신경이 연결되어 있으므로 몸에 이상이 생기면 아프기도 하고, 가렵기도 하는 등 감각이 있다. 신의 유무에 따라 삶과 죽음이 교차됨을 이로써 알 수 있다. 흙에도 신이 들어가면 생명이 될 수 있고, 사람의 육체에서도 신이 빠져나오면 죽음이 된다.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을 차리면 살 수 있다”는 격언처럼 사람은 신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정신을 차리면 못 이룰 일은 없다.
사람의 정신에 이상이 생기면 정신병원(精神病院)으로 들어간다. 사람의 육체가 영혼으로 혼합되어 있다는 말은 곧 사람의 육체는 신(神)과 혼합되어 있다는 말과 같다. 사람의 육체 안에 영혼이 있다는 사실은 사람 안에 신(神)이 있다는 말과 같다. 그러므로 사람은 육체와 신으로 이루어진 결합체임을 알 수 있다.
사람에게서 육체를 제하면 무엇이 남을까? 신(神)이 남는다. 따라서 사람의 영혼을 정신(精神)이라고 예로부터 명명했던 것이다. 정신(精神)이란 말에 정이란 글자를 제하면 신(神)이 된다. 사람 안에 신이 있다는 말이다. 결론은 사람은 곧 신(神)이란 말이다. 신은 신인데 인신(人神)이다.
신에 병이 들면 정신병원으로 가야 치료를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정신병은 약으로만 치료되지 않는다. 정신병은 마음병이기 때문이다.
사실 마음 수양을 하는 전문기관은 종교이다. 그래서 종교는 신병(神病)을 치료하는 종합병원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의 병들 중에도 경병(輕病)이 있고, 중병(重病)이 있다. 가장 큰 병은 신병(神病)이고 신병(神病)은 죽음 병이다.
육체의 병에도 불치병도 있고, 유전병이 있고, 후천적 병도 있고 전염병도 있다. 영적인 병에도 원병(原病)이 있고, 유전병(遺傳病)이 있고, 자범병(自犯病)이 있다. 이 병들은 모두 영혼의 병들이다. 원병(原病)은 죽는 병이다. 원병이 생긴 원인은 원죄 때문이다.
원병은 불치의 병이다. 죽음은 원병(原病)을 치료하지 못하여 생긴다. 한자숙어에는 인명(人命)은 재천(在天)이란 말이 있다. 사람의 생명은 하느님께 달려있다는 의미이다. 사람의 생명은 하느님께 달렸는데 사람이 죽는 이유는 무엇인가?
하느님께 죄를 지었기 때문이다. 그 죄가 원병(原病)이다. 원병은 하늘로부터 받은 병이고, 유전병(遺傳病)은 조상과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병이고, 자범병(自犯病)은 자신이 살아가면서 얻은 병이다.
따라서 원병(原病)은 신으로부터 치료받을 수 있고, 유전병(遺傳病)은 영적 스승으로부터 받을 수 있고, 자범병(自犯病) 자신의 수신(修身)으로 치료할 수 있다. 이 병원의 역할을 하는 곳이 종교기관이다.
육체의 병이 걸렸을 때도, 치료를 잘 하는 병원이 있고, 그 병원에는 병을 잘 치료하는 의사가 있다. 같은 병이라도 병원에 따라 의사에 따라 치료할 수 있는 경우도 있고, 치료할 수 없는 경우도 있다.
원병(原病)의 경우도 같다. 원병(原病)을 치료하는 병원은 각종 종교이다. 그리고 각 종교의 목사님, 신부님, 스님 같은 분은 원병(原病)을 치료하는 의사이다. 나 자신은 나 자신의 원병(原病)을 치료하기 위하여 어떤 병원을 선택해야 할까? 그리고 어떤 의사를 만나야 할까? 어떤 의학전문서적을 기준으로 치료하는 의사를 택하여야 할까? 이 선택은 매우 중요한 선택이라 아니할 수 없다.
세상에도 아직 암, 버거씨병, 파킨슨병, 에이즈 특별성 폐섬유증 등 현대병 중 치료할 수 없는 불치병들이 많이 있다. 이 병에 걸린 사람들은 대부분 결국 사망에 이르게 된다. 그런데 이 병에 걸린 사람들은 언제까지나 죽을 수밖에 없을까? 아니다.
이 병의 발생원인과 치료할 수 있는 의술이 개발되면 살 수 있다. 이 병을 치료할 수 있는 훌륭한 의사가 등장하면 살 수 있다.
그렇다면 영적 불치병이라고 할 수 있는 원병(原病, 원죄)으로 모든 사람들이 죽음에 이를 수밖에 없는데 사람은 영원히 이렇게 죽을 수밖에 없는가?
아니다. 신병(神病) 중, 원병(原病)을 치료할 수 있는 영적 의사가 오면 사람도 죽음을 중지하고, 영원한 삶을 살 수 있다. 그것이 우리가 신앙을 하고 있는 이유이고, 종교 경전의 주된 목적이다. 이 말은 본 필자의 말이 아니라, 경서에 기록된 진리이다.
6) 죽음 병의 영적 치료사는 경서에 예언된 구세주이다.
그 영적 의사가 누군가? 영적 의서인 성서와 불서와 격암유록, 정감록에 모두 그 명의(名醫)가 세상에 출현할 것을 예언으로 기록해두었다. 그를 각각의 책에서 다른 이름으로 소개되어 있지만 사실 인류세계에 나타날 한 사람이다. 그를 흔히 구세주(救世主)라고 한다. 구세주란 말은 ‘세상을 구원하는 주인공’이란 말이다.
성서에는 그를 메시야, 임마누엘, 이스라엘, 예수그리스도, 요한 등의 이름으로 나열되어 있으나 사실 인류 모든 사람들의 원병(原病)을 치료하기 위하여 세상에 오는 구세주(救世主)의 이명(異名)들이다. 불서에는 그 이름을 미륵부처라고 기록하고 있다. 정감록, 격암유록에는 그 이름을 정도령, 십승자, 백석, 천택지인 등 다양하게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구세주(救世主)란 이름 속에서 느낄 수도 있는 것이지만 각 경전에 기록된 그 각각의 이름이 시사하는 바가 있다. 이 이름들의 의미만 생각을 해봐도 모든 경전에 예언한 구세주의 하는 일이 무엇인지 어떤 신분인지 어떤 역할을 수행하는 자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이름만 봐도 인간의 원병을 어떻게 치료하게 되는지를 알 수 있다.
메시야란 히브리어로 구원자란 의미를 가지며 ‘기름부음을 받은 자’란 의미이다. 헬라어로는 ‘그리스도’라고 한다. 성서에서 기름은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한다.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한 이유도 그는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를 구세주라고 한 이유는 그가 진리의 말씀으로 사람들을 깨닫게 하여 사람들을 구원시키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이 말을 통하여 사람들은 진리말씀을 받은 자를 통하여 깨달음을 얻어야 구원받을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다음은 구세주를 임마누엘(Immanuel)이라고 한다. 임마누엘이란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시다’는 의미이다. 예수를 또 임마누엘이라고 한 이유는 하나님의 영이 예수의 육체에 계셨기 때문이다. 이것은 무당이 굿을 할 때, 그 집 귀신이 그 무당의 육체에 임하여 무당은 입을 빌려주고 귀신은 그 무당 안에서 자신이 하고자 하는 말을 하는 것과 같다. 이것을 흔히 빙의(憑依) 라고 한다.
임마누엘이 구세주란 것에서 구세주에게는 창조주의 영이 임한 사람이란 것을 시사한다. 따라서 구세주란 아무나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천상천하에 한 분밖에 안 계신 창조주의 영이 임한 사람이어야 구세주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여기서 깨달을 수가 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자칭 구세주라 하지만 그들이 진짜 구세주라면 자신 안에 창조주가 계신 것을 증명 해내야 할 것이다.
따라서 구세주란 대단한 존재임을 알 수 있다. 구세주는 인간인데 그 인간을 만남으로 온 세상과 사람과 자연을 창조하신 창조주를 만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사람으로서는 구세주를 만난다는 것은 일생일대의 희망이고 소망이 아닐 수 없다.
옛날 한민족의 고서에는 환인(桓因)이란 임금이 소개되어 있다. 환인임금을 오늘날까지 우리는 하느님이라고 한다. 사람은 육체이고, 하느님은 신이라고 할 때, 사람은 절대로 하느님이 될 수 없다. 여기서 환인을 하느님이라고 한 근거는 하느님의 영이 환인임금에게 임하였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이럴 경우 환인을 곧 임마누엘이라고 명명할 수 있다.
구약성서의 예언대로 이스라엘 땅에 나타난 예수를 하나님과 동일 시 하는 시각 또한 이러한 개념이다. 즉 예수의 육체에 하나님의 영이 임하여 이스라엘 땅에 오셔서 구약성서에서 약속한 모든 예언을 이루신 것이다. 이것을 이해할 수 있는 좋은 단어가 임마누엘이다.
여기서 그 옛날에 환인에게 확실한 하느님의 영이 임하셨다면 그리고 예수의 육체에 하나님의 영이 확실히 임하였다면 환인임금에게 임한 영이나 예수의 육체에 임한 영은 동일한 영이여야 할 것이다.
또 앞에서 언급한 구세주를 임마누엘이라고 한 것으로 보면 말세에 출현할 구세주의 육체에도 환인임금과 예수께 임했던 동일한 영이 임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러한 사실은 매우 의미심장한 일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곧 한 가정에서 여러 차례 여러 무당을 불러 굿을 했다면 무당은 바뀌었지만 그 무당 안에 들어온 귀신은 동일하다는 말과 같은 이야기이다. 여기서 창조주란 유일신을 생각해보게 된다. 지구촌에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것처럼 신의 세계에도 많은 신들이 있다. 또 사람이 살고 있는 세상도 조직적으로 이루어졌듯이 신의 세계도 조직을 갖추고 있다.
7) 지구촌에 사는 사람들 중에 같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듯이 수많은 신들도 각각 다른 개체이다
세계에는 70억 이상의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다. 그 많은 사람들은 다양한 조직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그 많은 사람들 중에 같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그리고 세계에는 각각의 사람마다 지위가 있고, 각각 맡은 소임이 있다.
미국이란 나라를 통치하는 오바마라는 대통령도 있고, 한국을 통치하는 박근혜라는 대통령도 있다. 세상에는 빌게이츠라는 사람도 있고, 회사 생활을 영위하는 평범한 존슨이란 사람도 있다.
그들은 모두 각각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 이 처럼 신의 세계에도 창조주란 고유한 신이 계신가 하면, 수많은 신들이 있다. 그 신들 또한 고유한 하나의 개체이다. 이들을 크게 보면 다 같은 신들이지만 작게 보면 하나하나의 고유한 개체를 가지고 있다. 그 신들 중에는 자신을 있게 한 수많은 직계 조상신들도 있다.
이런 많은 신들 중에 오늘 언급하는 신은 창조주 하느님의 신이다. 만약에 지구촌에 구세주가 나타났다고 한다면 그것은 바로 창조주 하느님의 신이 지구촌의 어느 한 육체에게 임한 상황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이 이상하다.
왜냐하면 대자연과 인간세상을 창조 하신 분이 자신이 창조한 곳에 다시 오신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창조주는 신이기 때문에 육체가 없다. 육체가 없으니 사람들에게 보일 방법이 없다. 그래서 창조주는 인간의 육체를 택하여 사람에게 나타나게 된다.
유리그릇에 액체가 담길 수 있듯이 사람의 육체에는 영이 담길 수 있다. 그래서 경서에는 사람의 육체를 성전이라고 하였다. 사람의 육체에 거룩한 영인 성령이 거하면 육체는 성전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창조주의 영이나 다른 영들도 조건이 맞으면 어떤 육체에 임할 수 있다. 창조주의 영이 처음 인간이 창조될 때, 첫 사람의 육체에 들어갔다고 한다. 그리고 그 영은 환인임금께 들어가셨단다. 그리고 또 이 천년 전에는 그 창조주의 영이 예수란 육체에 들어갔단다. 그리고 말세 때는 구세주의 육체에 창조주의 영이 임하게 된다고 경서는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마치 세종대왕의 업적을 알리기 위한 드라마나 연극에서 한 때는 김상경이란 배우가 세종의 역할로 출연하였다. 그 다음은 한석규란 배우가 세종대왕의 역할을 하였다. 뿌리 깊은 나무란 뮤지컬에서는 서범석이란 배우가 캐스팅 되어 세종대왕의 역할을 하였다.
이때 드라마나 연극을 본 사람은 배우의 인생을 본 것이 아니라, 세종대왕의 인생을 본 것이다. 본 필자가 말하는 구세주란 존재도 이 드라마나 연극의 경우처럼 새로운 육체를 통하여 창조주의 모습을 나타내게 된다는 사실이다.
이런 맥락에서 기록된 역사나 경서가 사실이라고 하면, 환인, 예수, 마지막 때 나타난다는 구세주에게 임한 영은 동일한 창조주의 영이란 사실이 뒷받침 된다.
또 여기서 창조주의 영도 세종대왕의 영도 영의 세계에서 지금 실존하고 있다면 이 둘의 영도 각각의 다른 개체로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이것은 영의 세계도 우리 지구촌 인류세상처럼 제각기 다른 영들이 각각 개체로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그렇다면 구세주가 우리가 사는 세상에 오셨다는 의미는 이러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구세주에게는 창조주의 영이 임하셨다는 것이고, 구세주가 지구촌에 오셨다는 의미는 곧 창조주가 지구촌에 오셨다는 의미와 같다. 그리고 창조주는 오직 한 분뿐이므로 이 세상에 구세주가 오셨다는 것은 다른 곳에는 창조주가 없고 오직 이곳에만 창조주의 영이 있다는 말과도 같다.
지구촌에 오바마란 대통령은 한 사람뿐이다. 그런데 미국의 백악관에 있던 오바마 대통령이 현제 지구촌 땅 끝인 한국에 와 있다면 오바마는 세계 중 한국 외,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을 것이다.
구세주가 지구촌 어디에 왔다는 사실은 이런 상황들과 비교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처럼 창조주도 한 개체이다. 그 창조의 신이 지구촌 어디에 있을 한 육체에 임하여 있다면 다른 곳에서 그 신을 찾을 수 없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이렇게 구세주란 그의 육체에 유일신인 하느님의 신이 임하여야만이 그 자격이 될 수 있다. 그래서 불교의 구세주가 달리 있을 수 없고, 기독교의 구세주가 달리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구세주라면 모든 종교 모든 인류의 구세주가 되어야 된다. 구세주가 여럿이 있다는 말은 곧 자신을 낳아준 부모나 직계조상이 여럿이 있다는 말과 같기 때문이다.
8) 구세주란 오늘날까지 사람들의 영혼 속에 기생한 악신의 정체를 드러내어 이기는 자이다
그 다음은 구세주를 이스라엘이라고 한 부분에 대한 설명이다. 이스라엘이란 히브리어의 의미는 ‘이기다’ ‘이긴 사람’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 구약성서에 처음으로 이스라엘이란 이름이 등장하는데, 하나님은 이삭의 아들 야곱이 천사와의 씨름에서 이기므로 이스라엘이라고 개명해준 데부터 유래된 이름이다. 야곱이 이겼으므로 이스라엘이란 이름을 최초로 가질 수 있었다.
그런데 신약성서 히브리서에는 구약성서에 기록된 것들은 장차 오게 되는 좋은 일의 그림자라고 덧붙여놓았다. 이는 구약성서에 기록된 기구들은 상징하는 바가 있고, 그림자란 것이다. 장차 있을 좋은 일이란 그림자로 있던 것이 실체로 나타나게 된다는 의미이다.
즉 이 말을 여기에 적용시키면 구약에 등장하는 이스라엘은 그림자이고, 신약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이스라엘은 실체라는 말이 된다. 따라서 구약성서의 이스라엘은 야곱이 천사와 씨름하여 이기므로 얻은 나라이며, 이는 그림자란 말이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이스라엘은 마귀의 왕, 용과 진리로 싸워 이긴 결과 얻어지는 구세주이다. 그리고 그가 세우는 나라는 마귀와 싸워 이긴 ‘이스라엘나라’이다.
이 이스라엘은 근동의 이스라엘과 다른 나라이며, 지상천국이다. 이는 구약의 그림자가 실체로 나타난 실제의 나라이다.
그런데 요한계시록 이전에 하나님께서는 예수를 또 이스라엘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예수는 자신이 ‘마귀의 시험에서 이겼다’고 하였다. 그리고 또 예수는 그 당시 현직 목자였던 서기관 바리새인들과 진리의 말로 싸워 이겼다고 선언하였다.
그리고 예수는 현직목자들에게 ‘뱀’이라고도 ‘독사들’이라고도 하였다. 뱀은 마귀신이 들어간 사람이나 목자를 비유하여 칭한 비밀스런 말이다.
그러나 예수는 임마누엘로서 하나님의 성령이 임한 사람이었다. 영적으로 볼 때, 두 관계는 하나님의 영과 마귀 영이 각각 그 육체에 들어간 관계였다. 두 영은 모두 각각의 육체 안에 거하였다.
하나님의 영은 예수의 육체에 들어갔고, 마귀 영들은 그 당시 현직목자들의 육체에 들어간 상태였다.
따라서 예수 초림의 때에 있었던 사건을 기록한 사복음서에 기록된 예수와 그 당시 목자들과의 언쟁은 사실 영적 전쟁이었던 것이다. 이것을 통하여 신들의 전쟁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는가를 알 수 있게 된다. 이 전쟁은 마치 경마경기를 방불케 한다. 경마경기에서는 자신이 택한 말이 이기면 경기에서 자신이 이긴 것이고, 자신이 택한 말이 지면 자신이 경기에서 진 것으로 간주한다.
그래서 영적 전쟁에서 예수가 이긴 것은 곧 하나님이 이긴 것이다. 하나님이 이긴 것은 사람을 이긴 것이지만 사실은 마귀를 이긴 것이다. 예수는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싸웠으며, 서기관 바리새인 등 그 당시 현직 제사장들은 마귀의 이름으로 싸웠던 것이다.
이것은 마치 각국의 국가대표 선수가 나라를 대신하여 싸워 이기면 그 나라가 이긴 경기요, 지면 그 나라 전체가 진 경기가 되는 이치와 같은 것이다.
이 종교전쟁의 최종 결과가 마지막 때를 예언한 신약성서 요한계시록에 있어진다. 요한계시록에는 ‘이스라엘’이란 말이 주제어로 등장하는데, 이것을 한국 번역 성서에는 한글로 해석하여 ‘이긴 자’ ‘이기는 자’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기는 대상은 용과 뱀이고, 용과 뱀은 또 마지막 시대의 목자들에게 빙의(憑依=어떤 사람의 육체에 다른 신이 들어간 상태)되어 나타난다.
즉 마귀의 왕과 마귀들이 마지막 시대를 주관하는 목자들의 육체에 임하게 된다는 것이다. 사람의 육체에 하나님의 영이 들어가면 ‘임마누엘’이란 이름을 얻게 되고, 사람의 육체에 마귀의 영이 들어가면 그 사람을 ‘뱀’이라고 부른다.
예수 초림 때, 예수는 그 당시 신앙지도자들인 서기관 바리새인들에게 뱀이라고 하였다. 그것은 밀어(密語)였다. 뱀이라고 한 것은 그들이 파충류인 뱀을 의미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마귀 소속이란 것을 암시한 것이다. 따라서 창세 때부터 비유를 베풀어 비밀로 발표한다고 기록한 시편 78편의 말씀처럼 창세기의 뱀의 정체도 이로써 알만한 것이다. 아니면 어찌 옛날이라 하지만 뱀이 말을 다 할 수 있었겠는가?
요한계시록에서 하나님은 한 정한 장소에 가칭 요한이란 한 사람을 등장시킨다. 그리고 마귀의 왕은 그곳에 뱀들을 출현시킨다. 이들 간에 서로 영적 전쟁이 벌어진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가칭 요한이란 자가 이기게 된다. 당연히 이기는 도구는 진리이다.
이긴 상대는 용왕과 뱀들이다. 결국 요한은 용왕과 마귀를 상대로 이기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요한이란 자가 ‘이긴 사람’이 되고, 이긴 사람은 곧 히브리어로 ‘이스라엘’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긴 사람은 사람의 육체에 든 마귀를 이긴 격이다. 이 이스라엘이 요한계시록에 새롭게 탄생하므로 말미암아 이긴 사람이 이 사실을 만방에 고하게 되니 이 나라가 마지막 때, 세워지는 마귀 없는 나라가 된다.
이 사람이 이 사실을 가지고 세상만민들에게 가르치니 사람의 육체 속에 마귀가 없어지게 된다. 이 나라가 바로 마지막 때, 세워지는 최종적 이스라엘나라이다. 이 전쟁에서 이기는 이가 성서에서 예언한 구원자이고 구세주이다. 이 사람이 창세기 때부터 인간의 육체에 임하게 된 마귀를 이기고 쫓아내는 역할을 하게 된다.
말세 때까지는 모든 사람들의 영은 악령이다. 그 모든 사람 가운데 최초로 마귀 영을 이긴 첫 사람이 등장한 것이다. 마귀를 이긴 첫 사람은 마귀를 이겼으므로 자신 안에 살던 마귀가 떠나게 된다.
그래서 구세주는 모든 사람들 중에 최초로 마귀 영으로부터 구원을 받는 사람이 된다. 구원 받은 그 육체에는 성령이 임하게 된다. 그리고 첫 사람은 두 번째 사람 세 번째 사람들에게도 진리로 가르쳐 마귀를 이기게 하니 이긴 사람들은 마귀 영에서 풀려나게 되니 이것이 바로 실재하는 구원의 역사가 된다. 이렇게 마귀의 영에서 해방된 사람들은 마지막에 세워진 이스라엘나라의 백성이 된다. 이곳을 격암유록에서는 십승지(十勝地)라고 한다. 십승지를 해석하면 십자가의 진리 곧 ‘성경의 예언으로 이긴 땅’이란 뜻이며 이것을 히브리어로 하면 이스라엘이다.
따라서 진정한 이스라엘나라에는 마귀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귀가 없는 나라에는 하나님의 영과 성령들이 올 수 있는 환경이 된다. 하나님의 영과 성령들이 온 나라를 우리는 천국이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에서 마귀를 이기고 나타난 나라인 최종의 이스라엘은 지상 천국임을 알 수 있다. 이스라엘의 공식은 예로부터 12신이 이끌게 된다. 12신이 지상의 이스라엘 나라의 열 두 사람과 영육 간 신인합일을 이루게 되니 12인은 이스라엘의 12제자로 나타난다.
12제자는 다시 사람들을 진리로 깨닫게 한다. 그렇게 깨달은 자들이 모인 나라가 12지파가 된다. 이곳에서 사람들을 불러 진리로 깨닫게 하게 되는데, 이들 중 깨닫는 자들은 12지파의 소속이 된다는 의미이다. 이들이 깨닫는 사항은 세상과 모든 사람들의 육체에는 마귀영이 들어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실을 깨닫게 되면 자신의 육체 속에 들어있는 마귀 신은 자신의 육체 밖으로 쫓겨 갈 수밖에 없다. 자신 속에서 오늘날까지 마귀 신이 자신의 육체를 구속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을 종교 경전적으로 표현하면 ‘마귀를 이겼다’고 하는 것이다. 이전까지는 자신의 육체가 마귀에게 져서 마귀의 소유물로 있었지만 이제부터는 마귀를 이겼기 때문에 마귀로부터의 구속이 끝나게 된다. 이런 상태를 종교적으로 ‘구원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이스라엘이란 나라의 참의미는 중동에 있는 이스라엘이란 나라와 별개로 ‘마귀를 이긴 사람들의 나라’라고 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긴 사람이 될 수 있는 이유는 마귀를 이긴 사람의 진리를 듣고 깨닫게 되면 자신도 마귀를 이긴 사람으로 인정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이스라엘이란 나라에는 마귀를 이기지 아니하면 들어올 수 없는 나라이다. 따라서 이 나라의 백성들의 영혼은 마귀 신에게 구속된 사람이 한 사람도 없고 모두 마귀로부터 구원받은 사람들만 있다.
그래서 구세주란 이름을 이스라엘이라고도 한 것이다. 이렇게 마귀를 이긴 사람들은 마귀를 이기지 못한 사람들과 구별이 될 것이다. 이기지 못한 사람들의 영혼은 여전히 마귀의 영이고, 마귀를 이긴 사람들의 영혼은 성령으로 변화 된다.
그래서 마귀를 이긴 나라의 사람들과 이기지 못한 사람들과의 차이가 있게 되는데 그 차이는 영의 차이이다. 그 결과 그 영의 차이로 말미암아 둘 사이에는 사상이 다르게 된다.
마귀를 이기지 못한 사람들의 사상은 오늘날과 같은 사상이고, 마귀를 이긴 사람들의 사상은 새로운 사상이다.
그런데 이 사상에는 각각 영들이 개입되어 있다. 영은 곧 신이기 때문에 서로의 신은 자신의 것을 주장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논쟁들이 발생하게 되고 세상 사람들에게 이슈가 된다. 그리고 이런 논쟁들이 일반 사람들의 눈에는 교파간의 교리싸움처럼 비치어 나타난다.
9) 이스라엘을 한자로 표현하면 십승자(十勝者)이다
그 다음 구세주의 이름을 우리민족의 예언서 격암유록에는 십승자라고 기록하고 있다. 십승자를 한자로 쓰면 열 십(十) 자에 이길 승(勝) 자에 놈 자(者)이다. 합하면 십승자(十勝者)이다. 이를 해석하면 ‘십자가의 도(道)로 이긴 사람’이란 의미이다. 십자가의 도는 성서를 가리킨다. 성서의 진리로 이긴 사람은 앞에서 설명한 ‘가칭 요한’이란 사람임을 알 수가 있다.
격암유록에서는 그 십승자를 정도령이라고도 한다. 정은 바를 정(正) 자이고, 도는 길 도(道) 자이고, 령은 명령 령(令) 자이다. 합하면 정도령(正道令)이고, 해석하면 바른 도를 가지고 하느님의 명령으로 온 사람이란 의미이다.
격암유록에서는 이 사람을 또 천택지인(天擇之人)이라고 소개를 하고 있다. 해석하면 ‘하느님이 택한 사람’이란 의미이다. 이 말로서 알 수 있는 것은 구세주가 될 수 있으려면 하늘의 택함을 받아야 될 수 있지 아무나 자신의 의지로 구세주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또 구세주가 사람의 육체로 출현된다는 것도 이것으로 깨달을 수가 있다.
격암유록에서는 또 이 천택지인을 백석(白石)이라고 한다. 백석은 흰 돌이란 이름으로 예수를 비유한 말이다. 이 처럼 동양의 예언서인 격암유록에서 예언한 구세주와 성서에서 예언한 구세주는 동일한 구세주임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구세주를 미륵부처라고 했다. 미륵부처는 정법(正法)을 가지고 사람들을 부처로 성불시키는 사람이라고 불서는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미륵경에는 미륵은 마왕(魔王)과 싸워 이겨서 미륵부처로 성불하게 된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미륵이 정법으로 마왕과 싸워서 이긴 자가 된다는 말과 같다.
정법은 곧 진리이고, 마왕은 성서에 등장하는 용왕이니, 곧 미륵부처의 실체는 진리로 용왕을 이겨서 이긴 자가 되는 격암유록의 십승자요, 성서의 요한과 동일한 인물이 아니냐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구세주의 이름은 여러 가지나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는 오직 한 사람이다. 그리고 그의 역할은 그가 가진 여러 가지 이름을 통하여 추측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람의 원병은 이 구세주가 세상에 등장하므로 비로소 치료되게 된다.
사실 인류 모든 사람들의 원병(原病)을 치료하기 위하여 세상에 오는 구세주(救世主)는 이런 차원의 사람이다. 그렇게 될 수 있는 이유는 구세주는 사람의 육체로 출현하지만 그 속에는 창조주의 영이 임하기 때문이다. 창조주는 만물과 사람을 창조하신 신이므로 사람이 신병이 든 원인을 알고 있다. 그래서 현 인생의 마지막 때 이러한 섭리로 세상에 와서 모든 일을 바르고 새롭게 고쳐서 좋은 세상을 시작하게 하는 것이다.
불서의 미륵부처, 정감록, 격암유록의 정도령, 십승자, 백석, 천택지인, 성서의 이스라엘, 메시야는 마지막 때, 세상에 임하는 명의의 다른 이름들이다. 이 명의(名醫)의 정체는 그 내면은 천신(天神)이고, 겉은 사람의 모습이다. 하여 이 사람을 찾을 수 있는 방법은 오직 도(道)뿐이다. 또 도(道)는 참경전이다.
이 처럼 경전을 내용상으로 정리해보면 매우 합리적으로 기록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은 종교경전이 저절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신과 연관 된 선지자들에 의하여 쓰인 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종교 경전에는 사람이 종교를 해야 하는 이유가 기록되어 있다. 즉 창조주는 신이며 이 신은 인간과의 관계에 이상이 생겨서 그것을 바로잡기 위해서 선지자들을 영적으로 감동시켜서 그 사연과 계획을 기록하게 한 것이 종교 경전이란 것이다.
그리고 그 주된 내용을 살펴보면 모든 사람이 신병(神病)에 걸렸다는 사실이다. 모든 사람이 신병(神病)에 걸린 이유는 죄 때문이다. 죄는 죄지만 일반의 죄가 아니라, 원죄(原罪)이다. 원죄는 불경죄(不敬罪)나 불효죄(不孝罪)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조상 중에 부모를 공경하지 않고, 부모를 버린 자가 있다하면 이는 세상적으로 반인륜적인 죄라고 할 수 있고, 불경죄, 불효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원죄를 쉽게 표현하면 사람은 천부(天父)로부터 세상에 태어났는데 사람이 천부를 부정하고 버린 것을 말한다. 천부의 본성은 신(神)이다. 그 본성이 사람의 영(靈)으로 임하였기 때문에 사람은 천심(天心)을 가지게 된 것이다. 천심(天心)은 곧 천신(天神)이다. 천신이 인간의 육체에 임하여 왔으니 사람이 인신(人神)이 되었고, 인신은 곧 인심(人心)이 된 것이다. 따라서 인심(人心)은 인신(人神)이다.
사람의 마음에 신이 왔으니 그 신은 창조주의 신에서 온 것이 확실하다. 따라서 창조주인 천부(天父)와 사람과의 관계는 부자관계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부자관계는 먼 옛날에 깨져버렸다. 그런 나머지 사람의 육체 안에 있던 천신인 성령은 육체를 떠나고 말았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창조주인 천부(天父)를 인정하지 않고 믿지 않고 있다. 그런데 자신의 몸에는 원래 창조주인 천신의 분신(分神)이 임하여 있었다. 그것이 자신의 원래의 영혼이다. 사람이라면 정신(精神)이 없는 자가 없다. 정신(精神)은 자신의 육체 속에 살고 있다.
이것은 분명 자신이 천신의 자식임을 증거 하는 것이거늘 그 사실을 믿지 않고 인정하지 않는 것은 부모를 버린 폐륜아가 되는 것이다. 자식이 부모를 버렸으니 부모는 자식을 떠날 수밖에 없다. 이것이 천부와 인간간의 현제 상황이다. 자신이 천신을 버렸으니 자신의 육체 속에 있던 성령이 떠나게 된 것이다.
처음 그 불효를 저지른 사람을 구약성서에는 분명히 기록하고 있는바, ‘아담’이란 자이다. 아담은 천부(天父)에게 생령을 부여받았으나 천부(天父)에게 지울 수 없는 죄를 저질러버렸다. 이 일로 말미암아 아담 이후 모든 인류에게 천부(天父)의 영은 떠나고 대신 망령된 악한 신이 사람의 육체를 지키고 있게 된 것이다.
이렇게 얻어진 신병(神病) 때문에 모든 사람들은 그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영적 병원에 가야했다. 사람이 신병(神病)을 치료 받기 위해서는 그 병을 완치시킬 수 있는 명의(名醫)를 만나야 했다. 사람의 질병을 잘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을 기록한 책은 동의보감이나 황제내경 같은 의서(醫書)이다. 명의(名醫)는 의서(醫書)를 통달한 사람이다.
신병을 치료할 수 있는 의서는 종교 경전이다. 의서가 모든 병을 완치시킬 수 있는 확실하고 충분한 내용으로 되어 있지 아니하면 불완전한 의서일 것이다. 사람이 신병(神病)을 완치 시킬 수 있는 의서는 과연 무엇일까? 그리고 아무리 좋은 의서가 있다 할지라도 의사가 그 의서를 이해하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명의가 의서를 통달하여 사람의 신병(神病)을 완치 시킬 수 있을까?
분명한 것은 아직 세상에 영적 의서인 경서를 완전히 통달한 의사는 없다. 그 결과 아직 세상에서 죽음을 이긴 사람은 없다. 그것을 뒷받침 할 수 있는 것은 오늘날까지 성서 및 불서에 기록된 예언을 해석할 수 있는 사람이 지구촌에 한 사람도 없었다는 사실이다.
신병(神病)의 의서는 무엇인가? 종교 경서이다. 따라서 신병(神病)의 명의(名醫)는 종교 경전을 통달해야 하지 않겠는가?
사람에게 왜 신병이 생겼을까? 사람이 신이고 신이 사람을 낳았다면 사람이 우연히 지구상에 생겨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신은 우연히 존재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개가 새끼를 낳으면 강아지가 되고, 소가 새끼를 낳으면 송아지가 되듯이 신이 새끼를 낳으면 신이 아닌가?
신약 성서 사도행전 17장 29절에는 사람을 ‘신의 소생’이라고 기록해둔 것도 그 때문이다.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진찰을 정확히 해야 하고 그 병에 맞는 처방을 잘 내려야 할 것이다.
진찰과 처방을 잘 내기 위해서는 이 사람의 조상의 유전성 병역이나, 자신의 병역이나 태생이나 생활환경 등을 잘 참고하여야 할 것이다. 우리 인간들의 신병의 원인을 알기 위해서는 인간 세상이 어떻게 생기게 되었는가에 대하여서부터 잘 알아야 할 것이다.
종교 경전에는 이런 사실들에 대해서 산발적으로나마 잘 기록해두었다. 여기서는 종교 경전과 상식적인 사고로서 먼저 사람이 어떻게 이 세상에 생겨날 수 있었나를 인간 탄생의 계보도(系譜圖)를 더듬어 보면서 깨달아 보고자 한다.
사람의 구성요소가 신(神)이라면 분명 자신은 우연한 존재가 아님이 분명하다. 그리고 자신이 신이란 사실은 매우 흥미로운 사실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신의 속성을 가진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옛날 단군조선 시대 때의 교육의 핵심을 엿보면 이미 우리 조상들은 이런 사실들을 다 알고 있었음이 확인된다. 그때의 가르침은 ‘자신은 부모님에게서 왔고, 부모님은 조상에 의하여 존재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조상은 또 하늘에서 왔다’는 것이다.
결국 자신이 하늘에서 왔다고 말함이 아닌가? 이때 하늘은 하느님을 의미한다. 자신이 하느님에게서 왔으니 자신은 하느님의 후손이 아닌가? 역으로 말하면 하느님은 그 후손들의 조상이 아닌가? 그래서 예로부터 우리나라를 천손(天孫) 천강(天降)민족이라고 했던 것이다.
그래서 동학에서는 인내천(人乃天)이라고 이를 표현하려 했다. 인내천이란 ‘사람이 곧 하늘’이란 의미이다. 사람은 뭐고? 하늘은 뭔가? 사람에게는 영이 있고 영은 곧 신이다.
하늘은 곧 하느님이며, 하느님은 영이고, 신이다. 하늘도 사람도 신이니 곧 사람이 곧 하늘이라고 한 것이다. 결국 사람은 존엄한 존재란 사실을 깨닫게 한다. 그러나 한편 사람은 육체를 가진 피조(被造)된 신(神)이고, 하느님은 창조의 신(神)이다. 그래서 사람은 하느님을 공경해야 한다는 뜻도 동시에 있다.
성서에도 하나님이 사람과 사람의 심령(心靈)을 창조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하나님이 세계만민을 한 혈통으로 창조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한 혈통으로 낳았다는 말은 결국 단군조선 때의 교육이었던 ‘하느님이 조상을 낳고’, ‘조상이 부모님을 낳고’, ‘부모님은 자신을 낳아 이렇게 존재하고 있다’ 것을 설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그러한 사실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 증거는 바로 우리 육체 속에 들어있는 신(神)의 존재성과 출처이다.
우리 육체 속에 있는 신(神)은 어디서 온 것일까? 자신은 부모로부터 나왔으니 자신 속의 신(神)도 부모로부터 받았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부모님은 자신 속의 신(神)을 누구에게 받았을까? 조부모님으로부터 받았을 것이다. 조부모님은 또 그 윗대 조상에게 신(神)을 받았다. 그리고 가장 높은 곳으로 올라가면 우리의 시조가 존재할 것이다. 그 시조 또한 자신의 부모로부터 신을 물려받았을 것이다.
그런데 시조는 첫 사람인데 어찌 부모가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우리 자신이 이렇게 존재할 수 있는 것은 분명히 자신 위로 직계계열의 조상이 있었기에 가능하다 할 것이다. 그런데 시조는 누구에서 왔느냐는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그런데 시조에게 발견할 수 있는 신(神)을 세상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옛 역사서와 종교 경서에는 그 신(神)에 대하여 자세한 정보가 들어 있다. 거기에만 창조주 하느님에 대한 정보가 또렷하게 기록되어 있다. 거기에는 영이신 창조주가 자신의 형상으로 사람을 창조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창조주는 육체가 없는데 무슨 형상이 있겠는가?
창조주의 형상은 성령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창조주는 시조를 성령으로 창조하였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시조와 우리인간은 하나님에게서 왔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처음 성령으로 창조되었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그래서 시조의 친아버지는 천부(天父)임을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다시 반복하면 성서에는 하나님은 신(神)이고, 영(靈)이라고 소개를 하고 있다. 그러고 보니 우리 육체 속에 있는 신(神)의 출처를 지구촌 어디서도 찾을 수 없었으나 오직 하나님에게서만 찾을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은 멀리 계시는 분이 아니라, 자신의 직계 조상임을 알 수 있다. 결국 우리 자신의 가장 높은 조상이 하느님이란 사실을 이로써 깨달을 수가 있게 되는 것이다.
10) 창조주는 자신의 가장 높은 직계 조상이다
이렇게 될 때, 우리의 족보는 하느님으로부터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됨으로써 하느님을 서양 성서에서만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동양의 경서에서도 찾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그 하느님을 성서에만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많은 경서에서도 찾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가 있다. 따라서 하나님이란 분이 기독교인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세계 만민들의 직계조상임을 이로써 알 수 있는 것이다.
세계만민들이 한 혈통이라면 세계 만민들이 섬겨야 하는 종교의 대상은 자신의 직계 조상인 창조주 한 분밖에 없지 않는가? 그런데 왜 세상에는 종교가 그렇게 많은가?
이렇게 창조주와 인간의 계열을 깨닫게 되면 우리는 창조주를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창조주와 우리의 관계가 서로 직계조상과 후손으로 맺어져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그렇다면 세계 종교가 창조주란 이름을 내세우게 되면 세계인들은 모두 한 창조주의 자손이 되며 우리는 같은 형제자매란 사실을 인정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종교로 서로 전쟁하는 일도 없어질 것이다. 종교로 생기는 가족 간 불화도 없어질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세계 종교가 하나로 통일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앞으로 이런 길을 통하여 세계종교와 사상이 하나로 통일될 것이다. 이것은 처음 하나였으니 나중도 하나로 합하여지는 역사이다.
우리나라의 토속종교라 할 수 있는 대종교(大倧敎) 경전 중 하나인 ≪신사기 神事記≫ 등에는 인류 창생과 문명의 기원에 관한 기록을 다음과 같이 담고 있다. 대종교에서 말하는 인류 창생에 관한 교리에서 ‘최초의 인류는 나반(那般)이라는 남자와 아만(阿曼)이라는 여자’이다. 이 내용은 상고사서인 ≪환단고기≫ 삼성기 전에도 역사적인 사실로 기록하고 있다.
이들은 태초에 천하(天河)의 상류 양편에 별거하며 오랫동안 만나지 못 하다가 세월이 지난 다음에 만나 짝이 되었다고 한다. 나반과 아만의 자식은 다섯인데, 그 피부색이 각각 달랐다.
그 자식이 나뉘어 다섯 빛깔의 겨레가 되었는데, 황(黃), 백(白), 흑(黑), 홍(紅), 남(藍)이 그것이다. 이처럼 대종교에서는 인류의 기원을 설명할 때 피부색에 관한 문제를 가장 근원적인 것으로 놓고 기술하고 있다.
특히 ≪삼신오제본기≫에는 ≪신사기≫보다 더 자세하게 피부색과 외모의 생김새를 묘사하고 있다. “황부(黃部)의 사람은 피부가 약간 노랗고 코가 높지 않으며, 광대뼈가 높고 머리가 검으며 눈이 평평하고 청홍색이다. 백부(白部)의 사람은 피부가 밝고 얼굴이 길고 코가 튀어나오고 머리가 회색이다. 적부(赤部)의 사람은 피부가 녹슨 구리 빛이고 코가 낮고 코끝이 넓으며 이마가 뒤로 경사지고 머리는 말아서 오그라졌다.” 고 기록하고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이것들이 인류의 역사자료들이요, 인류의 종교의 재료가 된다. 이로써 자신이 신이란 사실도 알 수 있고, 하느님이 우리를 낳은 진정한 (할)아버지이심을 알 수 있다. 단군임금의 가르침처럼 서양의 대표적 신서인 신약 성서에도 여기에 대한 기록이 분명히 있으므로 여기에 싣는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세기 1장 27절의 내용이다.
“이스라엘에 관한 여호와의 말씀의 경고라 여호와 곧 하늘을 펴시며 땅의 터를 세우시며 사람 안에 심령을 지으신 자가 가라사대” 구약 성서 스가랴 12장 1절의 내용으로 사람 안에 있는 심령을 창조하신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하신 내용이다.
이것으로 보아도 우리 안에 있는 심령(心靈)은 만든 자가 계시고 만든 자는 창조주 하나님이심을 알 수 있다. 그렇게 창조주께서 인간의 첫 시조를 낳고, 그 시조로부터 생겨난 사람들이 오늘날 세계인들이란 것이 다음 내용에 나온다. 그러니 인류는 한 혈통이요, 한 가족이란 사실을 깨달을 수가 있다.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신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저희의 년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하셨으니 이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도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 너희 시인 중에도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 이와 같이 신의 소생이 되었은즉...후략” 신약성서 사도행전 17장 24~29까지의 내용이다.
위 글에서 하나는 동양의 종교에 말하는 인류가 한 혈통이란 것이고, 하나는 서양경서에서 말하는 인류는 한 혈통이란 것이다. 역사를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면 동서양도 유불선도 따로 있는 것이 아니건만 왜 그렇게 한 혈통으로 태어난 창조주 하느님의 자손들이 수천 년 동안 서로 대립하고 전쟁하며 왔던가?
종교를 영어로 쓰면 릴리젼(religion)이라고 했다. 의미는 ‘다시 잇다’ ‘다시 결합하다’는 의미라고 서두에서 설명한바가 있다. 종교란 무엇과 무엇이 다시 연결되는 것일까?
‘다시 잇는다’는 말과 ‘다시 결합 한다’는 말에서 그 전에는 이어져 있었고, 결합되어 있었다는 것을 나타낸다. 이어져 있다가 떨어진 적이 있었기 때문에 다시 연결할 필요가 있고, 다시 결합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무엇과 무엇이 붙었다가 떨어져서 다시 잇는다고 하는가?
창조주는 세계만민들의 직계조상이고, 종교는 자신을 있게 창조주에 대한 신앙인데 세계만민들이 이를 잊었다는 것은 세계 만민들이 창조주 아닌 다른 신을 믿고 있었다는 이야기밖에 되지 않는다. 세계 만민들이 창조주 아닌 다른 신을 믿었다는 사실은 악신을 믿었다는 증거이다. 그 악신의 대왕이 용이다. 그 증거로 세계 만민들이 용을 섬기고 좋아하는 문화로 보아도 능히 사람들이 악신을 섬기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 일이다.
신앙을 하는 것은 사람이다. 신앙(信仰)이란 말은 ‘높이 우러르 믿는다’는 의미이다. 사람이 누구를 높이 우러르 믿는가?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을 우러르 믿고, 불교에서는 부처님을 높이 우러르 믿는다. 다른 종교도 신을 우러르 믿는다.
하나님도 부처님도 신도 알고 보면 앞에서 설명한 창조주이다. 창조주와 신앙인과의 관계는 아버지와 자식관계이다. 창조주와 인간의 공통인자는 영이고 신이며 서로는 영(신)으로 묶여져 있다.
따라서 창조주도 신(神)이고, 신앙인도 신(神)이다. 사람에게 있는 신(영혼)은 창조주에게서 왔다. 그러니 이 상태는 사람과 창조주의 영이 하나로 이어져 있는 상태이다. 사람의 신과 하나님의 신이 서로 결합되어 있는 상태라는 것이다.
그런데 창세기 6장 3절에는 이런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백 이십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의 신(神)이 사람들에게서 떠나니 사람은 육체가 되더라고 한다. 사람의 육체와 하나님의 신이 함께 있었는데 그 신이 떠났다는 것이다. 이 내용을 정리해보면 사람의 육체는 하나님의 신(神)과 함께 있어서 서로 이어져 있었고, 서로 결합되어 있었는데, 그 신(神)이 육체를 떠남으로 말미암아, 육체와 하나님의 신(神)이 서로 떨어지고 분리 되었다는 말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육체와 하나님의 이별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이것은 사람과 하나님과의 이별을 나타내고 있다.
위 사도행전에서는 만유를 지으신 창조주이신 신은 사람의 손으로 지은 교회나 절에 거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육체 안에 거한다는 표현이 잘 되어 있다. 그런데 하나님의 신은 육체를 떠났단다. 그러나 경서에는 떠난 하나님의 신이 다시 세상과 육체에 돌아올 것을 약속하고 있다.
그런데 창조주 하나님의 신은 하나인데 어찌 수많은 육체들에 각각 거할 수 있을까?
이는 이렇게 답할 수 있다. 즉 창조주의 신은 한 분이지만 창조주께서 자신의 분신(分神)으로 낳은 수많은 신들이 있다. 그 분신들의 이름을 성령 또는 천사라고 했다. 따라서 창조주께서는 사람의 육체를 만드시고, 자신도 한 육체에 임하여 자신은 육체 가진 임마누엘이 되시고, 자신의 분신들은 수많은 다른 육체에 임하여 나라를 이루신 것이다. 그런데 창세기 6장 3절에서 그 창조주의 영과 분신들이 모두 육체를 떠나게 되니 성령과 육체가 하나 되어 있던 사람들이 모두 육체가 되어 버린 것이다.
사람의 육체에서 영원한 생명체인 성령이 떠나게 되니 사람은 육체만 남았으니 인간의 수명도 120세로 줄어들게 되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120까지는 그나마 살 수 있는 이유는 아직 생기가 조금은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인간의 육체에서 하나님의 신이 떠나지 않았을 때는 120세 이상 살 수 있었다는 말이 아닌가?
그러면 인간에게서 떠난 하나님의 신이 다시 돌아오면 인간의 수명은 다시 길어진다는 의미가 아닌가?
이 말은 또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된다. 사람에게 성령이 임하면 사람의 몸이 죽지 아니하게 된다는 신약성서 로마서 8장 11절의 말씀이다. 이것은 120세 이상이 아니라, 영생을 의미함이 아닌가? 이것을 통하여 종교에서 약속한 영생이란 것이 언제 어떻게 인생들에게 있어지게 되는지 알만한 힌트가 아닌가?
그래서 종교란 의미의 릴리젼(religion)이 ‘다시 잇다’ ‘다시 결합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 이유는 사람과 하나님의 신이 다시 재결합할 것을 예표 한 뜻임을 이해할 수 있다. 이렇게 창조주의 영과 인간의 육체가 서로 다시 맺어질 때, 또 하나의 종교의 목적인 영생이 이루어지게 된다는 사실도 이를 통하여 알 수 있다.
사람과 하나님의 신이 서로 이별하게 된 이유를 설명한 경전은 성서이다. 인간과 하나님의 신이 이별한 이유를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할 것이다. 종교가 인간과 하나님의 신과의 이별한 상태에서 다시 결합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그 이별한 이유를 확실히 알지 못하면 결합 또한 할 수 없을 것이다.
창세기 3장 4~6절과 22~24절의 내용이다. 이 내용은 아담과 하와란 자가 하나님의 동산에 있는 선악나무실과를 먹지 말라고 하며 먹으면 죽는다고 했는데 그 약속을 어기고 선악실과를 먹는 내용이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으로부터 쫓겨나는 장면이다.
아담은 사람이란 뜻이고, 사람의 조상이다. 이 조상이 지은 죄는 신에게 지은 죄로서 이 후 모든 사람들의 원죄(原罪)가 되었던 것이다. 그것을 앞에서는 원병이라고 이름을 붙여본 바가 있다. 그 원죄로 말미암아 사람의 육체에서 하나님의 신이 이별을 하시게 되었고, 그 원인으로 말미암아 사람은 원병을 얻게 된 것이다.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 사람을 내어 보내어 그의 근본된 토지를 갈게 하시니라.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11) 사람의 육체는 신이 사는 집이고 그것이 사람 속에 들어있는 영이다
사람의 육체는 신(神)의 집이다. 육체 안에 하나님의 신이 들어오면 육체는 하나님의 성전(聖殿)이 되고 하나님은 거룩하시니 그 영을 거룩한 영이란 의미에서 성령(聖靈)이라고 한 것이다. 아담과 하와의 육체에는 하나님의 영이 함께 있었으니 아담과 하와의 육체에는 성령이 임하여 있은 것이다. 그러던 아담과 하와가 원죄를 짓고 그 후로도 죄가 계속되어 창세기 6장 3절에서 하나님의 성령이 육체를 떠나버린 것이다.
이때 성령이라고 하면 많은 천사들을 의미하고, 이 성령 중에는 하나님의 영도 있고, 예수의 영도 있고, 베드로나 빌립의 영도 있다. 성령이란 ‘거룩한 영’이란 말로 하나님에게 소속된 모든 영들을 의미한다. 이것은 악령이란 말의 대칭어이다. 그래서 창세기 6장 3절에서 하나님의 신이 사람의 육체에서 떠났다고 하심은 하나님의 신과 또 하나님의 소속의 모든 신들이 육체들을 떠났다는 말로 이해를 해야 한다.
이 일로 말미암아 사람을 창조 하신 하나님의 신은 육체들을 떠나시고, 사람은 육체만 남게 되었다. 이것은 창조주가 창조한 창작품을 잃어버린 것이고, 잃어버리게 된 이유는 아담과 및 사람들의 죄 때문이었다. 그래서 창조주하나님은 잃어버린 육체를 다시 찾아야 하고, 사람은 잃어버린 하나님의 신을 찾아야 하는 입장이 된 것이다. 하나님은 이 사실을 알려서 인간이 원죄에서 씻음 받고 원래대로 회복하시기를 원하셨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령의 능력으로 시대마다 의롭고 성스러운 선지자를 택하여 그 사실을 알려주고 기록하게 한 것이다. 그 내용이 석가모니로 말미암아 기록된 불경이고, 각각의 선지자를 택하여 알려주고 기록하게 한 책이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민족에게도 이러한 신서가 많다. 신사기, 삼성기, 정감록, 격암유록, 원효결서, 용담유사 등등이 있다.
12) 세계의 경서들은 퍼즐 조각들이고 이것을 모아서 맞추면 하나의 완성된 모양이 나온다
이 경서들에는 이런 사연들이 퍼즐처럼 흩어져 있다. 퍼즐을 흩어놓은 상태에서는 그 형체를 알 수 없다. 그러나 그 퍼즐을 맞추면 정확한 형체가 나온다. 따라서 세계의 경서들을 퍼즐로 맞추어 볼 때, 그 형체를 알아볼 수 있게 된다.
그 퍼즐 중에 핵심적인 조각들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구원이란 조각이다. 구원(救援)이란 말은 건질 구(救) 자에 당길 원(援) 자로 이루어진 말이다. 기독교도 구원을 목적으로 신앙을 한다고 한다. 또 많은 정상적인 경서에는 미래세에 나타날 구원자(救援者)를 예언하고 있다. 구원이란 말은 정상적인 사람에게는 해당이 없는 말이다. 왜냐하면 구원이란 말은 구덩이나 아니면 강도에게 감금을 당하였거나 어떤 위협으로 협박을 당하고 있을 때 필요한 단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이 어디에 감금되고 협박을 당하므로 구원이 필요하다고 구원 받기 위해서 신앙을 한다고 하는가? 왜 그들을 구원할 구원자가 필요할까? 그런데 정말 기독교만 구원이 필요할까?
모든 인류가 구원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경서의 공통된 이론이다. 구세주(救世主)란 말은 그것을 더 명확하게 해주고 있다. 구세주란 ‘세상을 구원하는 주인’이란 말이다. 모든 인류가 어디에 빠져 있기에 구세주가 필요한가?
구약성서에서 사람의 육체에서 성령이 떠났다고 하였고, 영에는 두 종류가 있다. 성령은 떠났지만 그 다음 가짜 영인 악령이 땅을 차지하고 있었다. 창세기에서 하와에게 선악과를 먹게 한 뱀이 바로 비밀로 포장된 악령이다. 인간의 육체에 악령이 들어갈 때, 성서에서는 그들을 뱀이라고 표현하고, 그 안에 성령이 들어갈 때, 그를 ‘사람’ ‘신선’이라고 표현한다.
물 잔이 어떤 것으로 가득 차 있으면 다른 것이 들어갈 수가 없다. 그러나 물 잔을 비우면 다른 액체가 압력을 가하며 잔속으로 들어오게 된다. 사람의 육체는 영의 집이라 하였다. 그 집에 성령이 들어있으니 다른 영이 들어올 틈이 없었다. 그런데 육체에게서 성령이 떠나게 되니 그 집은 빈 집이 되었다. 그 속에 악령이 들어가 다음 주인이 된 것이다. 그 악령을 귀신, 마귀, 사단, 요귀 등 다양한 이름으로 명명 했다. 그 악령이 사람의 육체에 임하여 악한 일을 하므로 사람의 육체는 사망 전쟁 등의 위협을 받고 죽어가야 했던 것이다.
성령은 거룩하며, 창조주의 신과 같은 선한 신이다. 성령은 근본이 생명이고 죽음과 상관이 없는 신이다. 성령은 창조주의 신과 같은 영이므로 영원한 신이다. 또 창조의 신은 창조의 모든 내력을 알고 있는 진리의 신이다. 이 성령이 사람의 육체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의 입에서는 성령의 말이 나온다. 성령은 진리의 신이다. 진리의 신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특히 창조나 신에 대해서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성령은 생령이고, 산 영이다. 그래서 성령이 사람의 육체에 들어가 있으면 사람의 육체는 영원히 썩지 않게 된다. 따라서 동서양의 경전에서 공히 종교의 목적이 불로불사(不老不死)이고 쇠병사장(衰病死藏)이 없는 것이라고 한다. 사람의 육체에 성령(신명)이 임하는 일이 있기 때문이다.
악령은 악하여 못된 일을 많이 한다. 악령은 근본이 죽음이고, 영원한 생명이 될 수 없는 신이다. 악령은 창조주의 신을 대적하여 생긴 영이므로 창조의 내력을 알지 못하고, 진리가 없는 거짓의 신이다. 이 악령이 사람의 육체 안에 있으면 그 입에서 악령의 말을 하게 된다. 악령은 자신이 창조주가 아니면서 창조주라고 거짓말을 하는 존재이다. 그러니 악령은 창조의 내력을 알 수가 없는 것은 당연하다 하겠다. 이 악령이 사람의 육체 안에 있으면 악령은 일회성 유한생명밖에 없기 때문에 생로병사(生老病死)를 겪을 수밖에 없고, 쇠병사장(衰病死藏)을 일으킬 수밖에 없는 것이다. 또 육체 속에 무지한 마귀영이 들어있으면 그 육체의 입에서 진리가 나올 수 없다. 이로써 오늘날의 신앙인들에게 진리가 없는 이유를 알 수 있게 된다.
진리의 영과 거짓의 영의 차이를 예를 들어 설명하면 남대문을 재건할 때, 감독을 한 사람이 있다고 하자. 이 사람은 남대문을 지을 때, 직접 참가하고 일의 시종을 지시하고 감독한 사람이다. 그런데 어느 정도 세월이 흘렀다. 그런데 정부의 문화제청 관계자가 남대문을 지을 때, 사용한 노하우와 기술적 비밀을 알기 위하여 전에 남대문 재건 때 감독한 사람을 수소문하였으나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문화제청은 신문에 광고를 내어 많은 포상금과 함께 그 감독을 찾기에 혈안이 되었다. 그런데 남대문을 재건할 때, 참여한 한 직원이 그 광고를 보았다. 그 직원은 감독 옆에서 남대문 재건 과정을 곁눈질로 본 사람이었다. 그 직원이 포상금에 눈이 먼 나머지 자신이 남대문 재건 공사 때, 감독을 한 사람이라고 거짓으로 보고를 하였다. 그런데 나중에 얘기가 끝날 때 쯤 진짜 감독이 헐레벌떡 그 현장으로 도착했다. 얘기는 이미 끝난 상태였다.
진짜 감독은 자신이 남대문 재건 때, 참여한 진짜 감독이라고 주장하였다. 그에 지지 않고 가짜 감독도 자신이 진짜 감독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미 재건 공사를 한지는 많은 세월이 흐른 후라서, 그 당시 감독에 대한 인적사항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문화제 관리청 직원은 누가 진짜 그 당시 감독인지 판단을 할 수 없어 쩔쩔매고 있었다.
그런데 문득 문화제청 직원은 두 감독에게 남대문을 지을 때, 감독만이 알고 있는 극비 사항이 있었다는 것이 생각났다. 옳지! 이것으로 진짜와 가짜를 가릴 수 있겠구나하고 생각한 직원은 두 감독에게 그 극비 사항에 대하여 각각 종이쪽지에 적어보라고 문제를 내었다. 가짜 감독이 다른 사손한 것은 진짜 감독처럼 알 수 있었지만, 이 극비사항 만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직원은 가짜를 분별하여 진짜를 고를 수가 있게 되었다. 그것이 뭐냐 하면 남대문을 지을 때, 감독만 아는 비밀이 있었고, 그 비밀은 대외 극비 사항이었다. 그 비밀은 남대문 공사의 책임을 맡은 감독만이 알고 있어야 하기 때문에 가짜로서는 그것을 알 도리는 전혀 없었다.
이 처럼 사람들은 창조주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여 그렇지만, 창조주는 우주와 대자연과 인간을 직접 설계하고 만든 창조주이다. 자칭 창조주라고 하는 거짓신인 마귀가 모든 기적을 다 부릴 수 있지만 중요한 것 하나는 절대로 하지 못한다. 그것은 자신이 창조의 비밀에 대한 진리를 증거 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마귀는 모든 능력 면에서 창조주와 같은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마귀는 진리는 절대로 말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만약에 마귀가 진리를 말한다면 자신이 마귀이고, 창조주가 아니란 것이다. 즉 자신이 가짜 창조주라는 것이 진리이기 때문에 마귀는 절대로 진리는 말할 수 없는 신이란 것이다. 마귀가 진리를 말하는 순간 마귀는 가짜라는 것을 시인하는 격이 되기 때문이다.
아담의 범죄 이후로 사람의 육체는 악령의 놀이 감이 되어 있었다. 사람의 생각을 담당하는 것은 사람 안에 있는 영이다. 그 영을 곧 신이라고 했다. 그 신이 악신이니 사람의 육체를 이용하여 자신 마음대로 좌지우지 할 수 있었다. 그 악신이 사람의 육체를 강탈하여, 감금하며 생로병사와 쇠병사장을 일으켰던 것이다. 이렇게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진멸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다. 마귀라는 신은 마치 육체의 건강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암과 그 유형이 같다고 할 수 있다.
구원이란 이 마귀의 늪에서 구출되어 나옴을 의미한다. 구세주의 역할은 이런 모든 세상 사람들을 구출하여, 회복시켜야 한다. 그래서 종교의 궁극적 목적은 바로 자신이 악한 신으로부터 구원을 얻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악한 영에게 사로잡혀 있으니 그 상태에서 스스로 해방을 이룰 수가 없다. 그것이 구세주가 필요한 이유이다. 그러나 구세주는 말세 때에 등장한다고 예언되어 있다. 그래서 유불선 등 많은 경서에는 구세주에 대한 것을 기록해두고 있다. 이 경서들을 퍼즐로 맞추어보면 놀랄 만한 사실을 우리는 발견할 수 있다.
13) 구원이 세상 만민들의 절대적인 요구라면 오늘날과 같은 신앙을 해서는 구원에 절대로 이를 수가 없다
그래서 세상 모든 인류는 구원을 받을 때까지 원죄 병에 들어있는 상태이고, 이 병에서 구출되는 것이야말로 온전한 구원이 되는 것이다.
종교가 생긴 원인이 이러하고 종교의 목적이 그러하다면 세상에 모든 종교가 지금까지 한 것처럼 해서는 아무도 구원을 이룰 수가 없을 것이다. 이 사실을 깨닫는다면 기독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불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악령으로부터 구원 받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들 것이다. 불교에는 구원이란 말 대신에 해탈(解脫) 또는 탈겁(脫劫)이란 말을 쓰지만 결국 의미는 구원과 똑 같은 의미임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종교의 목적이 구체적으로 명시적으로 나온다면 우리는 구원을 얻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까? 이것이 종교의 진정한 목적이라면 자신의 경전에 이런 구원으로 가는 방법이 충분하지 아니하면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중요한 것은 이것을 깨달아야 정확한 종교의 목적을 이룰 수 있고, 자신으로서는 그 목적을 이루는 자가 되어야 하며, 그렇게 되면 신앙생활을 가장 잘 한 사람이 될 것이다. 오늘날까지 이러한 진리를 잘 모르고 신앙을 해왔는데 이런 상태에서 계속 간다면 어찌 구원을 얻을 수 있었겠는가? 그렇다면 어떤 변화를 꾀해야 하지 않겠는가?
혹자는 이미 구원 받았다. 해탈을 했다고들 한다. 하지만, 암에 걸린 사람이 암에서 치료되었다면 증거가 있어야 할 것이다. 말로만 자신이 암에서 치료되었다고 해서 치료가 된 것은 아니다. 배를 열어 덧 살로 자란 암 덩어리가 처음처럼 정상이 된 것을 확인할 때, 비로소 암을 정복하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처럼 구원되고 해탈했다는 사람들도 말만 하지 말고 구원 된 증거를 보여야 할 것이다. 아날로그 TV와 디지탈 TV는 겉보기는 구별이 없을 수 있지만 그 안의 칩은 분명 다르다. 많은 신앙인들에게 “당신은 왜 구원받아야 합니까?”라고 물으면 대부분 꿀 먹은 벙어리가 되는 것을 보곤 한다. 자신이 누구에게 어떻게 구속이 된 줄도 모르면서 입으로만 “구원 받았다” “해탈했다”고 하는 신앙인들이 너무 많다.
예를 들면 지금 북한 주민들은 민주주의의 입장에서 볼 때, 공산독제 제도에 구속되어 있다. 이들이 공산주의 사상에서 구원받으려면 먼저 공산주의의 실상과 민주주의의 실체를 깨달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북한에서 탈출하여 민주주의 사상을 받아드리고, 북한의 국적에서 벗어나 민주주의나라의 국적을 취득했을 때, 그는 북한과 공산주의에서 구원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신앙인들의 구원 역시 자신이 누구에게 어떤 식으로 구속되어 있는 상태라는 것을 먼저 깨달아야 할 것이다. 그 다음 그 깨달음을 통하여 거기서 벗어나서, 사상도 육체도 구속된 것에서 완전히 독립되어야 비로소 그것이 진정한 구원이 될 수 있고, 해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시대에 정말 진정한 구원을 받았다면 자신을 오늘날까지 이끌어 왔던 내적 존재인 자신의 영이 자신의 체외로 빠져나갔다는 증거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새 영이 들어왔다는 정황이 있어야 한다. 상상이 안 되는 이야기 같지만 이것이 종교에서 말하는 ‘거듭남’이다. 성령으로 거듭남이 기독교의 목적이다.
민족종교에서 말하는 정신개벽 또한 이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불교의 목적인 중생의 영에서 부처의 영으로 성불함 또한 이것을 시사한다. 예수는 그 좋은 본보기이다. 예수와 다른 여타의 사람과 다른 점은 영의 차이밖에 없다. 예수는 성서에서 성령으로 태어났다고 명백히 하고 있다. 그런데 모든 사람들은 구원을 받아야할 악령의 사람이었다. 그 차이가 예수와 여타 일반적인 사람의 차이이다.
그 결과 모든 사람들은 한 번 죽으면 살아날 수 없지만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었지만 다시 살아났다. 예수가 죽음에서 다시 살아날 수 있었던 것은 예수의 육체 안에 있던 성령이었다. 구원을 받았다면 다른 사람들도 예수와 같이 증거를 보여야 할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성령과 악령의 차이이고, 종교의 목적이 구원이라면 이 구원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상상이 아니라, 실체이다. 이것은 마치 흑백 TV가 컬러 TV로 교체되는 것과 같은 이치로 생각하면 쉬울 것이다. TV속에는 우리 몸속에 있는 영과 같은 것이 있다. 그 속에는 마치 인간의 유전자 같은 존재가 있어서, 화면에서 흑백만 나오게 하는 부속이 있는가 하면 화면에서 컬러로 나오게 하는 부속도 있다. TV는 그 부속에 따라 흑백 또는 컬러가 나오게 된다.
이 처럼 사람 안에 있는 영도 두 종류가 있는바, 악령과 성령이다. 사람이 구원을 받는다는 의미는 자신 속에 있던 악령이 퇴출되는 것을 말한다. 그러면 그 공간에 성령이 들어오게 된다. 사람의 구조가 이렇게 변화 받을 때, ‘거듭났다’라고 한다.
TV에 내장된 부속에 따라 화면이 흑백으로도 나올 수 있고, 컬러로도 나올 수 있듯이 사람의 내면에도 악령이 들어있는 경우와 성령이 들어있는 경우 그 행위나 생각이나 사상이나 수명이 달라진다.
쉽게 말하면 불교에서 말하는 부처의 개념이 이를 대변할 수 있으리라고 본다. 즉 사람 속에 악령이 들어있으면 오늘날 세상 사람들에게서 나오는 그런 행동이 나온다. 이 상태의 사람들을 불교에서는 중생(衆生)이라고 한다. 그런데 사람 속에 성령이 들어가게 되면 부처의 행동이 나온다. 부처의 행동에 대해서는 불경에 많이 나온다.
분명한 것은 사람의 영이 지금의 영에서 새로운 영으로 탈바꿈되는 것이 구원의 실상이란 것이다. 그래서 이런 개념 없이 자신이 ‘구원 받았다’ ‘해탈 했다’고 하는 것은 경전에서 말하는 ‘구원’과 ‘해탈’과는 관계가 없다는 사실이다.
14) 우리는 구원을 받기 위하여 무엇을 해야 하는가? 세상의 모든 경서를 다 모아서 비교 분석하는 작업이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이 이런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할까? 사람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먼저 구원 받을 수 있는 방법을 알아야 할 것이다. 구원 받을 수 있는 방법을 알기 위해서는 구원에 대하여 공부를 해야 할 것이다. 무엇을 가지고 공부를 해야 할까? 전문서적을 가지고 공부를 해야 될 것이다. 구원에 대한 전문서적은 무슨 책일까? 종교 경전이다. 그럼 무슨 경전이 구원에 대하여 가장 잘 기록한 전문서적일까?
그 대답은 각각일 것이다. 불교인들은 불경이 전문서적이라고 할 것이고, 기독교인들은 성경이 가장 좋은 전문서적이라고 할 것이다. 또 민족 종교인들은 자신의 경전이 가장 멋진 전문서적이라고 자랑할 것이다. 세계의 다른 종교인들 또한 자신의 경전이 제일 잘 된 전문서적이라고 각각 말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답하는 것은 별로 객관적이지 못하다. 만약에 자신의 것이라고 무조건 맹신하다가 자신의 경서에 구원에 이르는 방법이 없거나 잘못된 정보이거나 무언가 결여되어 있다면 어쩔 것인가? 그렇다면 구원을 받지 못할 것이 아닌가?
자신의 종교나 자신의 종교의 경전이나 자신의 종교의 지도자를 자기 것 혹은 자신이 선택한 것이라는 이유만으로 종교의 목적도 망각한 채 맹신하는 것은 종교의 목적과 전혀 반대방향으로 흘러버릴 우려를 매우 많이 가지고 있다.
그럴 경우, 자신의 종교나 지도자는 자신을 종교의 목적과 반대되는 방향으로 몰고 갈 수 있다. 종교의 목적이 구원이라면 그 목적의 반대는 무엇일까? 구원 받지 못하는 길이다. 그 길을 바라는 신은 어느 신일까? 마귀이다. 결론적으로 신앙인들의 맹신의 결과는 종교를 한다고 하지만 마귀의 조종으로 마귀를 위하여 신앙을 하는 셈이 되어버린다. 왜냐하면 마귀의 입장에서는 사람들이 구원을 받게 되면 사람들이 자신을 버리게 되기 때문이다. 이 좋은 사례가 2천 년 전에 있었던 유대인들의 경우이다.
그래서 그런 주관적인 생각으로는 구원을 이룰 수가 있는 방법을 찾을 수가 없다. 그런데 그렇다면 그 많은 것들 중 도대체 어느 책이 자신이 구원 받을 수 있게 하는 경전일까?
이것의 절실함은 마치 난치병에 걸린 사람이 무슨 의서 어떤 병원 어떤 의사를 만나야 자신의 병을 고칠 수 있을까라고 고민하는 것에 비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알기 위해서는 세상의 모든 경전들을 다 조사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경전을 조사하고 그 중에서 구원에 대하여 기록된 내용을 발췌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들을 어떻게 수합해볼 수 있을까?
그런데 자신의 경전에 대해서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자신의 경전을 열심히 연구하고 공부한 사람일 것이다. 그렇다. 방법은 각 종교인들이 서로 합력하여 자신의 종교 경전에 구원에 대한 핵심을 정리하여 수합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의 종교의 경전에 밝은 자들을 내세워 구원에 관한 것을 모두 선별해보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세상에 있는 모든 종교 경전에 기록되어 있는 구원에 관한 지식들을 모두 두루 섭렵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세계의 모든 종교 경전에서 수합한 구원에 대한 내용들을 비교 분석하면 그에 대한 진실들이 속속 드러날 것이다. 어떤 책은 구원에 대한 정보가 정확할 것이고, 어떤 책은 구원에 대한 정보가 부정확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 어떤 종교 경전은 구원에 대한 정보가 아애 없는 책도 있을 것이다. 또 어떤 책은 구원에 대한 정보가 있지만 부족한 것도 있을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어떤 종교 경전은 구원에 대한 정보가 매우 자세하고 구체적으로 잘 기록되어 있어 읽는 사람들로 하여금 이 경전에 기록된 구원의 내용은 “참으로 믿을 만 하구나”라고 감탄을 자아낼 만큼의 충실한 책도 있을 수 있을 것이다. 또 어떤 경서는 구원에 대한 정보가 거짓으로 기록된 경우도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이리하여 우리가 얻은 충분한 내용을 서로 비교 분석하고 합하고, 제하고 하면 세계의 모든 종교에서 말하는 ‘구원’에 대한 참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작업이 비단 구원에 관한 것뿐만 아니라, 종교의 핵심이 되는 다른 사항에 대해서도 이와 같은 방법을 이용한다면 종교의 앞날은 참으로 밝아 올 것이다. 이런 길을 통하여 지구촌 사상을 하나로 묶어가는 날을 만들어간다면 지구촌의 사상은 큰 의미에서 하나 될 수 있으며 이로 말미암아 생기는 불화와 전쟁은 비로소 종식되어 평화의 세상이 만들어 질 것이다.
이제 세계의 모든 종교지도자들은 이런 작업을 시행할 때가 되었다. 오늘날까지 종교란 이름으로 서로 대립하고 갈등을 겪으며 전쟁을 일삼아 온 데서 이제 이렇게 개혁되어야 한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세계만민들이 모두 영적으로 악한 영에게 사로잡혀 있는 실정이라면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영적으로 구원을 받아야 할 지경이라면 그것이 종교의 목적이라면’ 분명히 이제 지금까지 걸어온 길에서 개혁하지 않으면 종교는 영영히 희망이 없는 망국(罔國)의 상황에 직면할 것이다.
세계 종교 경전의 주제들을 모두 수합하여 그 실체가 모여지면 우리가 오늘날까지 무슨 목적으로 왜 그렇게 밖에 신앙생활을 하지 못했는지 회한과 반성의 시간이 될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얻은 결실로 종교의 목적이 ‘구원’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된다면 이제 순수한 종교의 목적을 찾아 나서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세상은 종교로 말미암아 더욱더 좋은 세상으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많은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우리가 오늘날까지 ‘나는 교회 다닌다’, ‘나는 성당에 다닌다’ ‘나는 절에 다닌다’ 고 하면서 다닌 목적이 과연 오늘 지금 주제인 ‘자신이 구원 받는 일과 관계가 있었던가’? 허무한 생각도 들 것이다. 또 그렇게 다니면서 ‘목사님’ ‘신부님’ ‘스님’ 불러가면서 열심을 다 한 일들이 과연 ‘자신이 구원 받는 일’에 역행한 부분은 없었을까? 하는 생각들도 해보게 될 것이다.
세상에서 교회 성당 절은 왜 필요할까? 목사님, 신부님, 스님의 역할은 도대체 무엇일까? 모두 영적으로 악령에게 사로잡힌 사람들을 구원시키는 일을 돕기 위해서이다. 그것이 아니면 종교는 지금 당장 없어져야 한다. 종교의 목적은 자신의 구원을 목적으로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 구원에 대한 전문서적이 성서이고, 불서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목사님, 신부님, 스님들은 성경과 불경을 교과서로 가르쳐야 할 것이다.
이는 학생들이 정한 교과서를 통하여 공부를 하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학생들은 정해진 교과 과정을 통하여 초등과정, 중등과정, 고등과정, 대학과정의 공부를 한다. 그 공부를 통하여 교과 과정을 이수한 사람들이 세상으로 나가서 사회라는 생활에 적응하게 된다. 사회는 여러 개의 직업적 계층과 여러 종류의 직업군이 있다. 학교 교과서를 통하여 배우고 익힌 이 지식은 원만한 사회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공통적인 모럴이 되며, 때로는 각자가 배운 전공을 활용하여 전문 직종을 가지기도 한다. 이때 각 과정을 통하여 배운 지식은 사회구성원이 되어 활용된다. 이때 각 과정을 담당하여 가르친 것은 교사의 몫이다.
이때 한 부류의 교사들은 아이들을 잘 가르쳐 성공적인 사회생활을 영위할 수 있게 만든 성공한 교사들이다. 또 한 부류의 교사들은 아이들을 잘 가르치지 못하여 실패한 사회구성원들을 양성한 실패한 교사들이다.
목사님이나 신부님이나 스님의 사명 또한 가르치는 일이다. 그래서 목사(牧師)님의 끝 글자 사(師)는 스승을 가리킨다. 학교에서 배운 학생들은 사회로 간다. 교회나 성당이나 절에서 배운 자들은 천국(극락)으로 가야할 것이다. 그런데 천국(극락)은 구원을 얻은 사람들만 갈 수 있다. 왜냐하면 천국은 하나님(하느님, 부처님)이 계신 곳이기 때문이다. 하나님(부처님)은 성령이시다. 그런데 구원 받기 전의 모든 사람들은 성령이 아니라, 악령이다. 따라서 악령은 성령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이 없다.
하나님(하느님 부처님)이 계신 나라는 성령(神明)의 나라이다. 성령은 거룩한 영이란 의미이다. 하나님(하느님, 부처님)이 계신 곳은 거룩한 곳이다. 또 하나님이 계신 곳을 천국이라고 한다. 따라서 사람이 거룩한 영으로 다시 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다. 그래서 천국에는 성령(神明)으로 거듭난 사람들만 들어갈 수 있다. 성령(神明)으로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은 악령이고 악령은 거룩한 영이 아니라, 천박한 영이다. 그렇기 때문에 악령은 천국(극락)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이 안 된다.
학교의 교사들이 학생들을 잘 가르치고 못 가르치느냐에 따라서 바람직한 사회 구성원이 되느냐 못되느냐로 갈리듯이 성직자가 신앙인들을 잘 못 가르치면 구원도 못 받게 할 것이고 천국(극락)도 못 가게 할 것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말세(末世)라고 하는 이런 마당에서 신앙인이라면 한 번쯤은 생각해봐야 할 중대한 사항이라 생각되지 아니한가? 교사들은 학생들이 다 배우면 사회로 귀속시킨다. 종교는 다 배우면 천국(극락)으로 귀속시켜야 한다.
그런데 신앙인들을 모아놓고, 천국(극락)이 어디냐고 물으면 대부분 모르거나 그 대답은 천태만상이다. 많은 신앙인들이 죽으면 천국 간다고 한다. 맞는 말일까? 경서 및 성서에는 그렇게 답이 나와 있는가? 오답이다. 누구의 책임일까? 그런데 문제는 학생을 잘 못 가르치면 학부형이나 학교장에게 징계도 받고 평가를 받게 되지만 신앙인들을 잘 못 가르쳤다고 징계하고 평가하는 곳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종교 세계는 누구도 통제할 수 없는 제도권 밖의 세계이다. 그래서 신앙인들이 영적인 여러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신앙인들이 스스로 종교에 대한 지식을 잘 갖추어 종교에 대한 기본 목적을 잘 숙지하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도 그 결과에 대하여 책임을 져줄 사람이 없다.
종교란 사람이 영혼을 가진 신적(神的)인 존재이기 때문이라는 데서 출발하며, 그 신적인 존재에게 문제가 생겼기 때문에 종교가 필요하게 된 것이다. 종교지도자들은 신앙인들에게 이러한 사실을 잘 알려주어야 신앙인들이 신앙을 해야 하는 이유를 깨달을 수가 있을 것이다. 신앙의 요점은 본래 사람의 영혼은 창조주의 영에서 온 것인데 육체에서 이 영이 떠나므로 문제가 생기게 되었다는 것이다. 지도자들은 최소한 이런 기본 적인 사실 정도는 신앙인들에게 가르쳐 주어야 할 것이고, 신앙인들은 최소한 그 정도는 숙지한 후에 신앙을 해야 잘못된 신앙의 길로 빠지는 일 따위는 없을 것이다.
종교의 기본 지식은 성령이 육체를 떠나자 자신의 육체에는 악령이 들어오게 되었고 자신의 육체는 그때부터 악령의 횡포와 구속에 시달리게 되었다. 그 악령으로부터 구속된 상태에서 해방되는 것이 종교가 필요한 이유이다. 이것을 가르쳐 알게 하여 구원을 이룰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이 성직자들의 역할이다.
따라서 종교의 의미는 이것에 더할 것도 없고, 이것에 더 뺄 것도 없다. 이 목적을 이루는 것만이 종교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고, 구원 받는 일이다. 그 구원에 관하여 기록된 훌륭한 전문서적을 구하여 구원에 이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성직자의 사명이다.
이를 위해서라면 스님이 성서중에 그것을 찾아 불교인들에게 가르칠 수 있어야 될 것이고, 목사님이나 신부님은 불경 속에 그 구원의 목적을 이룰 좋은 내용이 있다면 그것을 퍼서 기독교인들에게 가르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종교의 성직자들은 하늘의 도리와 하늘의 법을 가르치는 자라야 한다. ‘착하게 살아라’ ‘믿으면 복 받는다’ 이런 교육은 종교 교육으로서는 너무 모호한 교육이며, 학교나 사회에서도 배울 수 있는 교육이다. 신앙인들도 오늘날에는 사교나 사업이나 교제를 위해서 신앙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는 종교의 참 의미를 모르는 데에 기인한 심각한 상황임을 직시해야 할 것이다.
필자: 천봉 010-7188-6645
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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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의 성서 격암유록
일합상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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