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 다시 풀어보는 천부경 본문
* 다시 풀어보는 천부경
ㅡ 곽현영 목사님(미국 필라델피아 '푸른오솔길 마을' 공동체 대표)
1.
2년 전 천부경 풀이에 두 번 도전을 했다.
그러다 두 번 모두 마음에 들지 않아서 어정쩡하게 풀이를 마무리하고 말았다.
특히 두 번째 시도에서는 운삼사성환오칠(運三四成環五七)에 딱 걸려서
중도에서 포기를 해 버렸다.
그 이후로 시시때때로 이 구절을 묵상하면서 좋은 풀이가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
그렇게 약 2년이 지났는데 어제 아침 갑자기 풀이가 된 것이다.
물론 당연히 이 풀이는 내 생각과 해석이지 이것이 옳은 답이라거나
제일 나은 해석은 결코 아니다.
사실 천부경을 접한 것은 꽤 오래 되었지만
그 단순성과 난해성 때문에 풀이를 시도조차 하지 못한 시절이 10년은 되었다.
그러다가 어떤 계기로 한 번 도전을 해 보게 되었고,
결과는 참담함을 맛보고 물러나는 것이 되고 말았다.
물론 그 과정 중에 엄청난 깨우침과 감격을 맛보기도 했지만
전체가 다 풀리지 않으니 답답함이 늘 마음 한켠에 남아 있었다.
그렇지만 내가 천부경을 제대로 풀어야 할 사명이나 책임도 없고
또 그것으로 남들을 깨우치고자 하는 생각도 없기에 전혀 부담은 없다.
다만 그 뜻과 의미를 알기 위해 최선을 다해 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마음 깊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던 것이다.
당연히 천부경에 대한 풀이와 해설은 거의 다 찾아보았다.
그런데 솔직히 그 어떤 유명한 사람이 풀었다 하는 해석을 읽어 보아도
마음에 드는 것이 없었다.
그 이유는 너무 자신의 생각과 후대의 이론들이 첨가되어,
본래 순수한 의미가 퇴색되고 왜곡되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어서였다.
소위 9,000년 전에 기록되어 전해져 내려온다는 천부경에
무슨 음양오행이나 사단칠정 같은 사상들이 들어있다고 저마다 풀이한 것을
들어보면 온통 그런 해석으로 가득하다.
그런식으로 짜맞추고 끼워넣기를 하면 어떻게 보편적인 진리로 널리 확산이 되고
받아들여지겠는가?
그런 사상을 알거나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나 자기 입맛에 맞는 경전으로
제한되어 버리지...
그래서 나는 최대한 있는 그대로,
특히 천부경에 나오는 무수한 수에 대해서는 가장 순수한 뜻을 보존하면서
해석을 하려고 노력을 했다.
숫자는 사실 순서와 양을 나타내고 구별하는 것이 기본이다.
이론이나 사상이 들어가면 곤란하다.
특히 수는 모든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약속기호이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그런 차원에서 풀이를 해야 한다.
그런데 그런 보편적인 수가 어떤 사람에게는
이 사상의 증거로, 어떤 사람에게는 저 이론의 근거로 사용된다면
이미 보편성을 잃어버려 영향력은 제한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최대한 수가 가지는 보편적 속성, 즉 '양과 순서'
그리고 '차원의 구분'에 제한하여 해석하려고 노력을 했다.
그러다가 결국 운삼사성환오칠에서 딱 막혀 버렸는데
도저히 이 구절을 숫자 그대로 풀 수 없는 한계에 부딪혔기 때문이다.
여기서 오행을 말하고, 칠정이나 심지어 북두칠성까지 등장을 시키는 것을
보고는 한동안 천부경을 덮어 버렸다.
그러다가 어제 아침 이 구절이 갑자기 생각이 나면서
한가지 풀이가 나왔다.
물론 이것이 옳고, 제일 낫다는 주장은 하고 싶지 않다.
남들은 문제가 아니고 상관도 없다.
적어도 내게 한가지 해석이, 그것도 제법 괜찮다 싶은 풀이가 나온 것이
감격스러운 것이다.
이제 한번 그 이야기를 해 보자.
2.
일단 전체 흐름을 이해하도록 처음부터 차근차근 다시 풀어 나가보자.
一始無始一 (일시무시일)
'하나가 시작하는데 아무 것도 없는데서 시작하는 하나다.'
'하나'가 시작하지만 시작이 없는(시작이라고 할 수 없는)하나이다'
'무에서 시작하는 하나'라고 하면 이 '하나'는 인식할 수 없는 차원,
즉 무(無)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초월세계에서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차원에 나타난 근원적 요소, 혹은 존재가 된다.
성경에 나오는 '태초의 하나님'이 바로 그러한 존재요.
'창조주'라고 불리는 존재, 혹은 빅뱅을 일으킨 우주 알(egg)이 바로 이것이 된다.
그 실체에 대해서는 알 수
우리의 '인식세계'로 들어온 모든 것의 근원이 되는 요소요, 혹은 존재이다.
그런데 만일 '하나가 시작하는데 시작이 없는,
혹은 시작이라고 할 수 없는 하나이다'라고 풀게 되면
그 존재와 의미가 달라진다.
'하나'는 분명히 '처음, 시작'을 의미하는데
이 '하나'를 시작이라고 부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설명을 하기 위하여 어쩔 수 없이 첫 존재,
혹은 근원 요소를 등장 시키지만 그것은 하나의 방편일 뿐이지
실제로 우리가 인식하는 차원의 '처음' 혹은 '시작'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 말은 도덕경의 '도를 도라고 하면 더 이상 도가 아니다'는 말과 맥이 통한다.
할 수 없이 '도'라는 말을 쓰기는 하지만 그것을 어떤 규정이나 실체로 받아들이면
본질이 왜곡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물리학에서 '전자(양자)의 위치를 측정할 수 없다'는 말과도 비슷하다.
위치를 측정하려면 한 곳에 머무는 순간이 필요한데
이미 측정하는 순간에 이동하고 있으므로 위치 측정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진리나 도, 하나님이 그런 존재다.
영원 무한한 이치와 존재를 우리 유한의 차원으로 끌어오는 순간
왜곡되어 버린다.
따라서 우리는 진리나 하나님을 규정할 수 없고 하려고 해서도 안되는 것이다.
그런데 어리석고 교만한 인간이 끊임없이 진리에 대해
큰소리 치고, 하나님에 대해 안다고 떠들고 다닌다.
유란시아서에서 우주의 근원과 시원을 '우주 아버지'라고 이름은 붙이지만
그 누구도 그를 안다고 하거나, 이렇다 저렇다 규정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나는 일시무시일의 의미를 후자로 해석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
'하나가 시작하는데 시작이 없는, 혹은 시작이라고 할 수 없는 하나이다.'
이렇게 풀이하게 되면 이 하나는 인간의 의식에 들어오면서도
동시에 의식에 매이지 않게 된다.
그러니까 '하나' 즉 '시작'이라는 개념으로 우리의 의식에 들어오지만
'시작'이라고 할 수 없는 시작'이기 때문에
'시작'에도 매이지 않는 시작이 된다.
'도'라는 개념에 매이지 않는 도요, 하나님이라는 개념에 갇히지 않는 하나님이다.
하나, 그리고 시작이라는 개념을 제공하면서도 하나가 아니요, 시작이 아닌 것이다.
그렇게 그 무엇으로도 규정할 수 없는 '무한'도 살고.
우리의 인식에 들어오는 '하나'도 산다.
'무'가 바로 '하나'요, '하나'가 바로 '무'다.
다시 정리하지만 '무'에서 나온 '하나'가 아니다.
우리의 인식을 초월해 있을 때는 '무'즉 알 수 없는 상태로 존재하고
계시가 되어 우리의 인식에 들어올 때는 '하나'로ㅡ,
즉 '알 수 있는 상태'로 존재하는 것이다.
이를 이해하지 못하면 '무'와 '하나'를 분리를 시키게 되고
'무'를 기원으로 오해하여 '무'를 '하나'의 자리에 두게 되고,
'하나'는 결국 '무'에서 나온 둘째가 되어 버린다.
카발라를 잘못 풀게 되면 바로 이런 오류와 왜곡이 생기게 된다.
카발라에서는 '창조주'가 최상이 아니다.
그 위에 '아인소프(무한)'가 있다.
심지어는 아인소프 오르(무한의 빛0까지 등장을 시켜 그 위에 두기도 한다.
그러다보니 잘못 생각하면 계속 더 높거나 근원적인 존재나 요소가 있는 것처럼
여겨지게 된다.
그러나 천부경의 첫구절을 제대로 이해하게 되면
카발라의 의도도 알 수 있게 된다.
창조주와 아인소프는 순서나 지위의 차이,
혹은 존재의 선후가 아니다.
인식세계를 넘어선 것을 아인소프라 하고,
인식세계에 들어온 것을 '창조주'라 한다.
유란시아서에서도 우주 아버지나 첫째 근원과 중심 등은
우리의 인식의 차원을 넘어선 존재다.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하나님은 스스로를 제한하여 무한의 족쇄와
영원의 굴레를 깨뜨리고 물질세계로 진입해 들어오신 '최상위하나님'이다.
보다 더 뚜렷하게 우리에게 인식되는 하나님은 네바돈 우주의 통치자로
우리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마이클 크라이스트, 즉 나사렛 예수다.
따라서 인간이 현재 의식으로 하나님을 알고 체험할 수 있는 최상의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밖에 없다.
그 외에 많은 이론과 존재에 대한 설명이 있을지라도
그것은 모두 우리 의식차원을 넘어선다.
아마 우리가 지금 물질세계의 한계를 넘게 되면
그제야 그 다음 차원, 즉 초월존재들에 대한 인식이 가능해질지 모른다.
그러나 지금은 아무리 그 차원에 대해서 말해도 별 의미가 없다.
천부경 첫 문장에서 말하는 일시무시일은 '무'와 '일'을 동일시 한다.
무는 인식을 넘어선 차원이요,
일은 인식으로 들어온 차원이다.
이 '둘 아닌 둘'이 '둘'로 분리되거나,
'처음'과 '처음 이전'의 상태로 나누게 되면 다 틀어지고 만다.
3.
'무'와 '일', '시작'과 '시작없음'을 둘로 보지 않는 것,
이것이 천부경 풀이의 열쇠다.
천부경 뿐 아니라 모든 심오한 경전과 이치의 핵심도 여기에 있다.
분리될 수 없는 것을 분리하면 모든 것이 다 부서지고 갈라진다.
낮은 차원의 존재들로 하여금 인식과 이해에 도움을 주기 위하여,
또 다양함의 신비와 풍성한 누림을 위해서 '구분'과 '구별'을 하는 것은 지혜에 속한다.
그러나 이를 오해하여 '분리'를 해 버리면 끔찍한 불행이 닥쳐오는데
바로 최초의 인간이 실패한 '선악과' 시험이 바로
이 분리의 오류에 빠진 것을 상징한다.
통합 안에서 구분을 하는 것은 생명나무에 속한다.
다양함은 생명이 일으키는 현상인데 사랑은 그 다양함을 하나로 묶어낸다.
그러나 무지의 두려움은 계속해서 분리와 나눔을 일으킨다.
따라서 이를 극복하지 못하면 불행은 지속되고 가중될 것이다.
선과 악은 사실 분리된 것이 아니다.
선은 악을, 악은 선을 보완하며 생명의 다양성과 풍성함을 일구어 나가는
두가지 양상일 뿐이다.
마치 낮과 밤, 빛과 어두움과 같다.
사람은 낮과 밤을 다 수용하고 품어낼 수 있다.
그러나 두려움은 빛과 낮만 선한 것으로 인식하고
어두움과 밤을 악한 것으로 나누어 스스로 두려움을 재생산 하게 된다.
아직 현재 인류의 의식수준은 선과 악에 대한 바른 기준도 갖지 못하고 있을 뿐 아니라
제대로 평가할 능력도 없는 상황이다.
들어보면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함부로 판단하고,
어리석은 욕심과 이익에 따라 마음대로 저울추를 바꾸고 있다.
그러면서도 '의'를 외치고 있으니 얼마나 한심한 일인가?
적어도 스스로 틀릴 수 있다,
아니 틀릴 수밖에 없고, 제한 될 수밖에 없다는 것만 깨달아도
벗어날 소망이 있을텐데 뭐가 그리 똑똑한지 모두가 다 자기만 옳다고 큰 소리치고 산다.
그러다가 어려움을 만나게 되면 예외없이 남 탓, 환경 탓, 하나님 탓을 한다.
알 수 없는 '무'가 인식의 세계로 들어와 '알'이 되는 순간
즉시 있음과 없음이 발생한다.
무는 있음과 없음도 초월한 상태다.
따라서 무를 없음으로 이해하면 잘못 해석한 것이 된다.
없음은 사실 있음이 생길 때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현상이다.
따라서 '하나'가 인식세계로 들어와 '존재'나 '요소'의 의미를 가지게 될 때
'존재없음' '요소없음'의 반대개념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무'는 초월이요 '일'은 현상세계의 시작이다.
현상세계의 시작은 곧 존재의 시작이요, 있음의 출발이다.
존재는 '비존재'를 낳고, '있음'은 '없음'을 낳게 된다.
그렇게 시작의 하나 즉 있음이 현상세계에 나타나면 즉시 거기에는
없음이라는 상대적인 구분이 일어나는 것이다.
천부경에서 '둘'의 존재를 언급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하나'즉 '있음'을 말할 때 곧바로 '둘' 즉 있음과 없음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다음 구절이
析三極無盡本 (석삼극무진본)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4.
'무한'이 우리 인간의 인식세계로 들어오면서 '처음 있음' 즉
'시작'을 의미하는 '하나'가 발생한다.
그렇게 '있음'의 개념이 들어오면, 자연스럽게 그 상대개념인 없음이 생기게 된다.
이는 이치를 따져 아는 것이 아니라 현상을 통해 이치를 파악해 내는 것이다.
그러니까 근본 이치를 몰라도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을 보니
그렇게 되어 있는 것을 알게 된다.
나고 죽는 것이 있으며, 빛과 어둠이 있고, 양과 음이 있다.
우리가 태어난 곳이 그러하니 그렇게 경험을 통해 알게 되는 현실이다.
그리고 이를 토대로 이러한 이원론을 초월한 차원이 존재한다는 것을 추론해 내고,
또 그러한 계시가 주어질 때 받아들일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어서 나타나는 셋으로의 분화즉 석삼극의 현상도
'이치'로 깨닫는 것이 아니라 나타난 현상을 통해 발견하는 법칙이다.
누가 하나를 셋으로 쪼갠 것도 아니오,
하나가 스스로 분화해서 셋이 된 것도 아니다.
만일 그렇게 풀이하면 또 다른 존재가 개입하는 것이 되어 뒤죽박죽이 되고 만다.
하나를 셋으로 쪼개는 어떤 존재가 있어서는 안된다.
그렇다고 하나가 스스로 분화를 해서 셋이 되었다고 해도 문제가 생기는 것은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분화시키는 하나와 분화되는 하나로 나뉘어 결국은 둘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은가?
하나가 스스로 분화가 되어 셋이 된다면,
분화를 일으키는 어떤 주체가 있을 것이요,
분화의 대상이 되는 객체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무'가 인식세계로 들어오게 되면서 '하나'라는 개념과 양식을 가지게 되었고,
이 '하나'는 '있음'을 의미하면서 자연스럽게 없음을 생산해 내어 둘이 된다.
그런데 이 하나 혹은 둘이 셋을 만들어 내거나 분화되는 것은 아니다.
도덕경에서 '도생일일생이이생삼삼생만물(道生一一生二二生三三生萬物)'
이라고 한 것을 하나에서 둘이 나오고, 둘에서 셋이 나오며, 셋에서 만물이 나온다'는
식의 어떤 생성과정과 분화과정으로 이해하게 되면 곤란하다.
그런 해석은 시간과 공간에 매인 낮은 의식차원에서 나온 풀이일뿐
초월적 진리를 이해한 것이 아니다.
천부경이 말하는 석삼극, 즉 '셋으로의 분화'는
'무'가 일으킨 현상이요, '하나'가 펼치는 활동 현상을 묘사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의 입장에서 나타나는 현상을 파악하여 어떤 법칙을 찾아낸 것이라는 말이다.
'진리가 그렇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그렇게 인식하는 우리가 있다'는 말이다.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진리는 객관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 백번 양보해서 객관적으로 존재한다고 해도
우리는 그 객관성을 파악할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 각자는 철저히 자신의 주관적 인식체계를 가지고 있고,
모든 경험과 지식은 바로 그 주관적 인식을 통해 나의 의식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 때문에 모든 사람의 생각이 다르고,
판단과 평가가 달라지는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또 큰 단위에서는 같은 그룹으로 유대감과 동질성을 말할 수
있겠지만 작은 단위,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결국 모두가 다 다르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눈송이가 모두 다르듯,
인간의 의식은 모두가 다르다.
그래서 사이좋게 지내려면 크고 보편적인 것으로 접근해야 하고,
자신의 개성과 독립적 존재를 확인하려면 깊이 들어가 보면 된다.
거기에는 아무도 없고 독특한 의식을 가진 자기 혼자만 존재한다.
이 양극단을 알게 되면 조화와 개성을 모두 살릴 수 있고,
적절하게 활용하면 휴식과 창조를 하면서 멋지게 살아갈 수 있다.
다시 정리한다.
석삼극은 누가 셋으로 쪼개는 것도 아니요,
하나가 스스로 분화되어 셋이 되는 것도 아니다.
셋으로 작용하는 현상을 우리가 보고 어떤 법칙을 발견한 것 뿐이다.
그렇게 하나는 셋과 아무런 문제없이 공존할 수 있게 된다.
5.
자, 그럼 다음으로 넘어가 보자.
아주 쉬울 것 같으면서도 어려운 숫자들이 겹치면서 등장한다.
天一一 地一二 人一三 (천일일지일이인일삼)
일단 삼극의 정체가 드러난다.
천지인이 바로 삼극, 즉 하나의 다른 얼굴이다.
이는 하나가 셋으로 존재가 분화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인식세계로 좀 더 가까이.
그리고 구체적으로 표현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니까 셋을 보아도 하나를 볼 수 있어야 하고,
하나를 보면서도 동시에 셋을 볼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바로 기독교의 삼위일체와 같은 개념이다.
일단 셋으로 나타났으면 '하나'라는 수를 고집하면 안된다.
그러나 그렇다고 '셋' 때문에 하나가 사라졌다고 해도 맞지 않다.
하나 속에서 셋을 보아야 하고, 셋 속에서 하나를 보아야 한다.
기독교의 삼위일체, 즉 성부. 성자. 성령은 존재양식이 그렇다기 보다
우리에게 그렇게 구별되어 인식된다는 차원에서 이해해야 한다.
따라서 '하나님은 세 분이시다'하면 틀리게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나님은 한분이시다'를 고집하게 되면
이미 현상계에서 세 위격으로 나타나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이 되어
마찬가지로 오류에 빠지게 된다.
그런데 천부경은 삼극, 즉 삼위 일체를 신격의 존재양식으로 제한하지 않는다.
도리어 땅과 인간을 그 안에 포함을 시켜 파격적인 의식을 일깨운다.
'무=하나=셋'이라는 공식을 대입하면 '알수 없음(초월)=하나(시작)=천지인(삼극)이 된다.
그러니까 땅도, 인간도 그 근원은 초월이요, 하나의 근원을 가진 세가지 양상이라는 말이 된다.
이런 개념은 정말 혁명적이요, 파격적이다.
미신과 유신종교에 오래 몸담고 있던 자들에게는
이러한 주장이 참담한 말로 들릴 것이 분명하다.
인간을 신의 자리에 올려놓는다고 펄쩍 뛰면서 이단이니, 사탄이니 할 것이다.
그러나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그렇게 한다고,
그런 식으로 땅과 인간을 낮추고 신을 높인다고 좋아할 신이 아니라는 것이다.
만일 그러기를 바라는 신이 있다면 그 신은 뭔가 모자라거나,
인간을 착취하려는 의도를 가진 악한 존재일 것이 분명하다.
오죽 못났으면 인간을 밟고 부리면서 자기 영광과 만족을 꾀한다는 말인가?
그렇게 인간이 자신을 비굴하게 낮추는 것이 신에 대한 예의요,
은총을 받는 비결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스스로 속고 있는 것이요,
스스로 자기 신을 형편없는 신으로 만들어 놓고서는 거기에 기대를 하는 꼴이 되고 만다.
신(하늘)을 경외하여 높이는 것은 전혀 문제도 아니요, 나쁜 것이 아니다.
우주와 땅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인간에 대해서도 그렇게 해야 한다.
인간의 한계와 연약함 등을 무시하고 무리하게,
혹은 교만한 마음으로 높이라는 것은 아니다,
진리의 계시를 따라 이치를 따라 바르게 이해하고 합당한 대우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독교에서는 신의 영광에 초점을 맞춤으로 땅과 인간을 상대적으로 격하시켜 버렸다.
지금도 여전히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특히 인간을 죄인 취급하며, 낮추어야 신과 인간 사이에 질서가 제대로 잡히고,
신의 도움과 복을 받아서 인간이 행복해 질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조금만 더 깊이 생각해 보면 이런 논리가 극히 어리석고
악하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어떻게 예술 작품을 형편없다고 평가하면서 그 예술가를 위대하다고 칭송할 수 있겠는가?
신이 인간을 창조했다면 인간은 신의 작품이요, 예술품이다.
그런데 인간은 악하고 무지하여 죄에 빠져 형편없는 존재로 타락했다고 한다면
도대체 누구에게 그 비난이 돌아가겠는가?
아무리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에게 죄에 대한 책임이 있다고 주장해도
그럼 도대체 그 자유의지는 누가 주었으며, 악한 생각과 결정을 하는 인간 의식은
어디서 왔단 말인가?
그렇게 되면 결국 모든 책임은 신에게로 돌아가 함께 망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겠는가?
그래서 셩경도 제대로 읽게 되면 이 모든 과정이 하나님의 지혜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아무 것도 잘못된 것도 없고, 비난할 것도 없어진다는 복음을 전하고 있다.
특히 유란시아서는 인간의 한계나 연약을 '죄'로 보자 않고
도리어 경험과 성장의 기회로 보며, 하나님 조차 이 경험에 동참하고 싶어 하는 것으로
풀이한다. 그리고 실제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우리와 같은 인간의 몸을 입고 와서
가장 비참하게 보이는 경험을 통해 도리어 최고의 지위,
최상의 영광에 오르는 증거를 보여주었다.
알고보니 연약도, 죄도 아니라 영광에 이르는 과정이요,
완전함을 향한 위대한 여정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위대한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스스로를 '죄인'과 '심판과 형벌을 받을 존재'로 여기고 살아간다면
그 자신 뿐 아니라 온 우주를 어둡게 하고,
창조주마저 어리석고 악한 존재로 만드는 잘못헤 빠지게 된다.
죄인이어서 문제가 아니라 스스로 죄인이라고 여기는 의식이 문제인 것이다.
특히 성경을 보면 이미 우리는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았다고 선언한다.
(에베소서 1:3 - 14) 그런데도 여전히 '죄인'이라고 스스로 굴레를 쓰고 있으면
도대체 어쩌자는 것인가?
6.
사실 천부경 풀이는 애매하거나 어려워서는 안된다.
물론 그렇다고 그 깊은 의미와 이치를 아무나 쉽게 풀고 이해할 수 있다는 말은 아니다.
수수께끼 같이 모를 때는 매우 어렵다가도, 알게 되면 쉬워지는 그런 지혜다.
진리가 모두 그렇게 작용하지 않던가?
그런데 아무리 쉽게 풀이를 하고, 그 깊은 의미를 알려 준다고 해서
저절로 깨달아지고 열매를 맺는 것은 결코 아니다.
거기에는 전제가 있는데 바로 '듣는 귀와 보는 눈, 깨닫는 마음' 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그만큼 의식이 훈련되고 성숙해야 한다는 의미다.
특히 관심과 열정, 헌신을 통해 얻은 예민함과 높은 의식으로 나아가지 못한 자들에게는
쉽고 어려운 것이 따로 없다.
그들에게는 진리는 무조건 가려진 비밀이 되고 만다.
쉽게 풀어주어도 안 보이고 안 들리기는 마찬가지다.
그것이 인생의 가장 큰 불행이다.
천부경은 나의 의식수준에 대한 시험이요, 평가지이다.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그렇다고 할 필요는 없겠지만
나와 같이 느끼는 사람들이 제법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천부경을 놓고 보면 내 안에 형성되는 진리의 진주가 얼마나 잘
형성되어가고 있는지 그대로 드러난다.
물론 성경이나 불경 등 여럭 가지 심오한 진리와 지혜가 담긴
경전들도 같은 역할을 하겠지만...
그래서 요즘 상당히 신이 나고 흥분이 된 상태다.
2년간이나 잠잠하던 천부경이 다시 나를 찾아왔으니
어찌 감격스럽지 않겠는가?
약 15년만에 유란시아서가 내 손에 잡히고, 그 내용이 내 눈에 보이여,
그 깊은 의미가 마음에 새겨지는 체험을 하고 있는 중에
삼일신고와 함께 천부경이 내게 이렇게 다가오니 신기하고 감사하여
얼떨떨할 뿐이다.
성경이나 유란시아서는 분량이 너무 방대하고 극히 어려운 내용들이 담겨 있어서
그것을 보통 사람들에게 시험용으로 쓰기는 곤란하다.
81자 천부경이나 260자 반야심경, 366자 삼일신고 등이 이 역할을 하기에 적합해 보인다.
이 중에서도 모든 사람들이 다 쉽게 이해하는는 1-10까지의 수가 31개나 나오고,
주제를 이루는 천지인이 총 9자, 無가 4번, 本이 4번 등 반 이상이 아주 쉬운 글자요,
그것도 반복되고 있다. 따라서 한자를 잘 몰라도 얼마든지 도전할 만한 내용이다.
오죽했으면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 같은 사람이
천부경을 만나고 그렇게 감탄을 했겠는가?
하지만 이 또한 내 생각일 뿐이고 보편적 동의를 얻은 것은 아니다.
일단 천부경은 쉽다. 적어도 눈으로 보기에는 말이다.
내용도 그렇거니와 등장하는는 수도 1에서 10이 전부다.
물론 수라는 것 자체가 기호요, 약속이기 때문에 그것이 가지는 특징과
의미를 제대로 파악해야 한다는 문제가 있다.
그것이 어렵다면 어렵고, 쉽다면 또 쉽다.
내가 무수한 천부경 해설을 보면서도 하나같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은
본문보다 풀이가 더 난해하고, 너무 주관적인 생각이 많이 들어가며,
근거도 없는 추론이 너무 심하고, 당시 있지도 않은 후대의 사상이나
주장들을 마구 덧씌운 것을 많이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천부경이 가지는 독특한 맛도 찾아내지 못한 해설이
대부분이어서 실망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때를 기다려 풀이를 시도해 보았는데
아니나 다를까 나도 별 수 없었고, 그 신비의 자물쇠를 푸는 데 여러 번 실패하고 말았다.
특히 주어진 본문을 변경시키거나 억지주장을 하지 않고
해설을 하려니 얼마나 어려운지 그만 덮고 말았다.
그것이 2년 전 11월이었는데 8월에 아주 어슬프게
처음 풀이 한 후 두 번째 시도였다.
(운삼사성환오칠)이 도저히 풀리지 않아서
머리 한 쪽에 계속 이 구절이 돌아가게 해 놓고 때를 기다렸다.
그랬더니 약 2년 만에 신호가 왔는데
그것을 밝히려다가 이렇게 글이 길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 덕분에 세 번 째, 좀 더 나은 해석 ㅡ내 생각에ㅡ 을 시도해 볼 기회를 얻었다.
또 말이 길어지고 이야기가 다른 데로 흘러갔는데
그만큼 천부경의 내용을 쉽게, 덜렁 내어 놓고 싶지 않아서 그런 것 같다.
충분히 뜸을 들이면서 나 자신과 독자들의 의식을 천천히 데워가고 싶은데
이게 답답하고 마뜩찮으면 아직 천부경과 제대로 인연을 맺을 때가 아니라고 생각된다.
소중한 이야기일수록 조심스럽고, 그래서 뜸을 잔뜩 들이는 것이 보통이다.
이만큼 뜸을 들이고 천부경에서 해석이 제각각으로 나오는 부분으로
한 번 들어가 보자.
7.
天一一 地一二 人一三 (천일일지일이인일삼)
삼극이 천지인이라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하나가 셋으로 나타나고 인식되는데 그 중 하나가 '사람'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데
어려움이 있어서는 안된다.
한계와 연약, 추함과 게으름, 무지와 교만 등 부정적인 면에 초점을 맞추면
말도 안되는 소리같이 들리겠지만 천부경을 비롯하여 모든 경전과 지헤가
결국은 우리 인간을 중심하고, 목적하고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
능히 이 모든 부정성을 다 극복할 수 있다.
하늘, 즉 신이 없으면 우주(땅)도 인간도 없겠지만,
동시에 인간이 없으면 신도, 우주도 의미를 잃어 버린다.
마찬가지로 우주가 없으면 하늘과 인간은 도대체 어디서 만날 것인가?
천일일 지일이 인일삼
그런데 여기서 머리를 갸웃하게 하는 것이 일(一)에서 삼(三)까지
섞여서 나오는 수의 배열이다.
그냥 天一地二人三이라 했으면 쉽게 하늘을 1이라 하고,
땅을 2라 하며, 사람을 3이라고 어떤 기호와 순서를 정하는 것으로 쉽게 이해를 하겠는데
왜 그 사이에다 일(一)을 하나씩 다 끼워 넣었는가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구구한 해석들이 많은데
사실 알고보면 간단하게 풀린다.
왜냐하면 뒤에 같은 형식을 취하는 구절이 나오기 때문이다.
天二三地二三人二三 (천이삼지이삼인이삼)
물론 내용은 달라지지만 형식은 같다.
그렇다면 가운데 들어가는 '一' 과 '二'의 차이만 일단 파악하면 된다.
수는 양을 측정하는 단위로도 사용되지만
동시에 순서와 종류를 구분하는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
그러니까 하나, 둘, 셋 하면서 하나씩 더해가서 의미(양의 증가)로 쓰임과 동시에,
첫째, 둘째, 셋째의 순서를 나타내는 의미로,
또 이것, 저것, 그것의 종류를 나열해 나가는 의미로도 쓰인다는 것이다.
이 또한 우리가 늘 쓰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전혀 어렵지 않다.
천부경 풀이가 어려워진 이유는 바로 이 구분을 제대로 못함으로 인해 발생한다.
수(數)가 양을 더하는 말인지, 순서를 나열하는 의미인지,
종류를 구분하는 것인지 제대로 파악을 못하니 뒤죽박죽 헷갈리게 되는 것이다.
하나가 셋으로 분화된 것은 양도 아니요, 순서도 아니다.
순전히 종류를 분류한 것 뿐이다.
하늘을 1로, 땅을 2로, 사람을 3으로 구분한 것은 양이나 순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한꺼번에 셋을 다 말할 수도 없기 때문에 편의상 순서로 보이는
1, 2, 3을 사용한 것이지 구분을 한 것이 그 본의미다.
이를 오해하여 하늘을 높게 보고, 그 다음이 땅이요, 셋째가 사람이라고 해 버리면
본래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가 왜곡되고 만다.
마치 삼위일체 하나남이 성부, 성자, 성령의 순서로 구분한다고 해서
그것을 지위와 계급의 차이로 생각한다면 큰 오류인 것과 마찬가지다.
그런데 평면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보통의 의식은
쉽게 이 오류에 사로잡히게 되고 순서와 등급을 정하고 싶은 유혹에 빠지게 된다.
天一一 地一二 人一三 (천일일 지일이 인일삼)
여기서 공히 들어간 가운데 일(一)은 뒤에 나오는 구절 즉
天二三 地二三 人二三에 이(二)가 나오기 때문에
구분을 하기 위한 것이지 다른 의미가 없다.
천부경에서는 두가지 차원에서 천, 지, 인을 말하고자 한다.
하나는 1, 2, 3으로 구별하여 삼극, 즉 세 종류를 밝히는 차원이고,
다른 하나는 모두 3이라고 하여 구별이 사라지는 차원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렇게 이 두가지 다른 차원을 말하기 위해서
가운데 일(一)으을 넣어 그 '한 차원'을 말하고,
이(二)를 다른 차원을 말하고 있는 것 뿐이다.
8.
一積十距無匱化三 (일적십거무궤화삼)
'하나가 쌓여 열로 커지면 갇힘이 없는 셋으로 화한다'
다시 하나로 돌아간다.
여기 나오는 '하나'는 하늘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그 이전 즉 셋으로 나타나기 이전의 하나(一)를 말한다.
이 '하나'는 셋으로 분화되어 작용하기도 하지만,
쌓아 나가는 작용을 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하나'가 생명력을 가지고 그 양을 늘여 나가는 것이다.
이 또한 왜 그렇게 되는지에 대한 근본이치는 알 수 없다.
나타난 현상을 가지고 이치를 추론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에 대해서는 아무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왜냐하면 생명현상이 그렇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생명의 가장 기초 단위인 세포를 보라.
하나가 둘로 갈라지고, 둘이 넷으로 그렇게 무한하게 늘어나는 것은
만물의 보편적인 속성이다.
그렇게 무한하게 늘어나는 것은 열(十)에 이르면 그 한계, 혹은 완성에 이르게 된다.
물론 11도 있고, 100도 있으며, 천, 만...
무한한 수가 존재하지만 편의상 10을 완성으로 보는 것이다.
실제로 1에서 10만 있으면 모든 수를 다 담을 수 있다.
따라서 그런 원리적인 차원에서 10을 완성의 수로 보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는 생명력이 있어 확장을 시작한다.
그런데 이 하나의 확장은 천. 지. 인으로 분화된 셋에서도 같은 현상이 일어난다.
각각 쌓여서 10, 즉 완성의 수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완성에 이르게 되면 다음 차원으로 넘어간다.
그리고 그 차원에서는 더이상 쌓아 나가는 생명현상이 아닌 다른 현상으로 나타나는데
모두가 셋의 원리로 작용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차원에서 나타난 '셋'은 갇힘도 다함도 없다 (無匱)
天二三 地二三 人二三 (천이삼 지이삼 인이삼)
그렇게 한 차원을 넘어 다른 차원으로 넘어가니
천지인 모두가 셋(三)으로 통일이 된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여기에 나오는 이(二)는 두번째, 혹은 '다음 차원'이라는 의미이다.
처음 차원에서는 구분과 순서로 우리에게 인식이 되지만
이 차원을 넘어서게 되면 그것이 다 사라지고 통일된 모습으로,
그러나 천지인의 구별은 존재하는 양상으로 우리에게 인식이 된다는 것이다.
다시금 여기서 강조를 할 필요를 느끼는 것은
지금 풀이하는 것은 근원적 이치보다 나타난 현상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이다.
근원적 이치는 우리가 알 수 없다.
다만 나타나서 인식과 경험을 할 수 있어야 비로소 우리는 논할 수 있고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
경험되지 못하는 이치는 그야말로 허상이요, 공허한 말장난이다.
모든 진리는 반드시 경험으로 증명이 되어야 하고,
확장되고 보편화되는 경험을 통하여 진리는 그 가치를 드러낸다.
따라서 이해되지 않고, 경험되지 않는 것은 진리라고 받아들여서는 안되는 것이다.
하지만 현재 낮은 수준에 갇혀 있으면서 그에 맞는 이해와 경험을 말하면 곤란하다.
성장하고 있는 이해라야 하고, 확장되고 있는 경험이라야 한다.
9.
무 = 1 = 3 (천지인)
첫 천지인 ㅡ 1, 2, 3
1→ 10→'3'
두 번쨰 천지인 ㅡ 3, 3, 3
지금까지의 내용과 설명을 숫자와 한글로 바꾸어 표시해 보았다.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생각에서 한 번 도식화 해 보았다.
여기에는 하늘과 땅, 인간의 생성 원리와 성장과 변화의 과정이 담겨있다.
특히 놀라운 것은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차원과
인식을 넘어선 두 차원을 다 포함하고 있다는 점이다.
처음 천지인을 1, 2, 3으로 구분하는 것은 나타난 현상이
우리에게 그렇게 인식된다는 의미요,
두 번째 천지인이 모두 3으로 표시된 것은 천지인의 구별이 초월되는 차원을 말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우리의 인식을 완전히 넘어선 것은 아니다.
처음 천지인에 대한 인식과 구별되는 특별한 차원이지만
분명히 3으로 인식이 되는 그런 한 단계 발전된 의식을 의미한다.
다시 강조하지만 진리가 계시로 드러날 때에는
반드시 우리의 인식 속으로 들어와 이해가 되어야 한다.
그것도 보편적인 용어와 개념으로 설명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계시'라고 할 수 없다.
드러나지 않고 숨겨져 있는데 그것이 어떻게 계시가 되며,
보는 사람마다 다르게 이해가 되어 보편적인 의미로 전달되지 못한다면
그것이 어떻게 생명의 진리가 되겠는가?
세상에는 자기만 아는 진리, 자신만 깨닫고 이해하는 그런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진리는 반드시 공유되어야 하고 보편적인 유익으로 열매 맺어야 한다.
비록 처음에는 이상하게 보이고, 이해가 되지 않아서 반발할지 모르나
결국에는 그 계시가 의식성장을 촉진하여 진리의 생명성을 일깨우는 데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 인간사의 모든 분야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래서 지금 내가 풀이하는 것도 어떤 특별한 사상이나 이론을 더하지 않고
최대한 있는 그대로에서 의미를 찾아내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가능하면 많은 사람들이 이 천부경의 내용을 이해하고 적용할 수 있기를
바라는데 이는 결코 쉽지 않은 일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놀라운 지혜와 계시를 경시하거나 내팽개 쳐서야 되겠는가?
사람마다 생각이 다른 것은 충분히 이해를 하겠지만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진지한 반응을 보인다면
거기에는 분명히 무언가 있다는 의미다.
하나에서 셋으로 분화된 현상이 천, 지, 인으로 우리의 의식에 들어오고,
천지인 각각은 나름 시작(1)에서 완성(10)으로 생명 작용을 하여 결국 한 차원을 넘어선다.
그리고 그 차원에서는 1, 2, 3이라는 구분을 초월하여 3으로 통일된 현상을 나타내며
우리에게는 3으로 인식되는 어떤 특별한 원리가 적용된다.
나는 이를 다른 두 차원으로 이해한다.
처음 천지인은 존재의 차원이라면,
하나에서 열로 완성되는 작용 과정을 거쳐 두 번째로 나타난 천지인은
각각의 활동을 통일된 원리(3)으로 만물의 조화와 질서를 이루어 내는 차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이어서 나오는 구절이 바로 이 현상을 묘사하고 있다.
10.
大三合六生七八九 (대삼합육생칠팔구)
'큰 셋(천지인)이 여섯과 합하여 일곱, 여덟, 아홉을 낳는다'
그런데 대부분의 풀이를 보니 '큰 셋이 합하여 여섯이 된다'로 되어 있다.
그런데 그렇게 풀이하면 도대체 의미가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큰 셋(1,2,3)이 합하여 여섯(6)이 되는 거야 쉽게 이해하겠는데
이 여섯은 왜 7, 8, 9를 낳는다는 말인가?
그리고 이 7, 8, 9는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때문에 천부경 해석이 제각각이요, 풀이하면 할수록,
또 풀이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복잡해지고 난해해 지고 말았다.
오늘도 인터넷으로 천부경 해석을 죽 훓어 보니 가관이 아니다.
백인백색 다 다르게 해석을 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저마다 자기 해석이 기발하고 바른 해석이라는 것을 은근히 자랑하고 있다.
그런데 그 속에 나도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다들 그렇듯이 옳은 해석, 더 나은 풀이를 내어 놓는다고 하면서
또 한가지 더 보태어 사람들로 골치를 아프게 하고 있는 것이다.
ㅎㅎㅎ
그러나 이를 부정적으로 볼 필요는 없는 것 같다.
나도 그렇지만 천부경 해석에 매어 달린 사람들 모두는
무언가 좋은 해석을 내어 놓아 도움을 주려는 의도이기 때문에
그 다양함을 나쁘게 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성경 누가복음을 보면 예수의 일생에 대해서 저술해 보겠다고 붓을 든 사람들이
많다고 되어 있는데(누가복음 1:1-2)
그 수많은 복음서 중에 단 4개의 복음서만이 뽑혀서 성경 안에 포함되는
영예를 누리고 있다.
아마 천부경도 조만간 그런 때가 올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수천 수만의 해석 가운데 어떤 풀이가 바르고 좋은 것으로 뽑히게 될지 모르지만
조만간 공정하고 엄격한 심사를 통해 그 결과가 밝혀질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좋은 평가가 문제가 아니라 '유익함'이 본질이다.
의식의 발전과 생명 성장, 지혜와 사랑이 확산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大三合六生七八九 (대삼합육생칠팔구)
큰 셋, 즉 천지인이 가지고 있는 수 1, 2, 3을 합하면 여섯이 된다는 것은
아주 쉬운 산수에 속한다.
그런데 앞에서 확인한 것처럼 이 수는 '양'의 표시가 아니라 '구별'의 표시다.
그런데 이를 '양'으로 취급하여 더해 버리면 본래 의미를 이탈하고 만다.
따라서 '큰 셋을 합하여 여섯이 된다'고 풀이하는 것은 그리 좋아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큰 셋, 즉 천지인이 여섯과 합하여 일곱, 여덟 ,아홉을 생성한다고 하는 것이
무난해 보인다.
그러면 갑자기 여기 등장하는 여섯(6)은 어디서 나온 것인가?
그거야 쉽다. 처음 천지인과 두 번째 천지인을 합한 수다.
처음 하나에서 분화된 셋,
즉 하나이면서 셋으로 구별되는 천지인(3)이 있고,
모두 셋으로 작용하는 두 번째 차원의 천지인(3)이 있다.
이 두 천지인, 즉 두 차원의 천지인이 또 다시 큰 셋과 합하여
7, 8, 9를 생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두 차원의 천지인이 또 한번 천지인과 작용하여
또 다른 차원의 천지인을 구성한다는 말이다.
이 설명이 좀 복잡할 수 있는데 다시 한 번 정리해 보자.
11.
처음 천지인은 하나에서 셋으로 분화된 존재론적인 차원의 근원적 세 실체이다.
이는 우리의 인식세계에는 들어와도 현상세계에 그 실체를 나타낸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그건 너무 빠르고 급하다.
그러나 이 세 실체는 엄연히 구별이 되면서 또한 작용을 한다.
그렇게 각각이 하나에서 열로 완성을 이른 후 이어서 모두가 '셋'으로 구별을 넘어
통일성을 이룬다.
존재에서 작용으로 넘어오면서 조화와 질서를 확립한 것이다.
그리고 또 한 번 생명작용을 일으키는데
큰 셋, 즉 천지인이 두 차원이 결합한 상태인 6과 합하여
그 다음 차원 7, 8, 9를 생성하는 것이다.
바로 이 차원이 지금 우리가 보고 느낄 수 있는 물질차원의
하늘과 땅, 그리고 인간이라 할 수 있다.
나는 이 해석이 맞다, 틀리다에 초점을 두지 않는다.
오히려 지금 우리 자신과 우리의 감각에 잡히는 우주만물은
이처럼 엄청난 이치와 과정을 거쳐 나타나게 되었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은 것이다.
지금 우리의 물질 몸을 형성하고 눈에 보이고 만져지는 만물은
결코 가장 저급하거나 찌꺼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근원에서 따지면 가장 멀고, 낮은 차원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렇게 멀리, 또 낮은 수준까지 내려온 것은
처음부터 그 자리가 아니라 도리어 가장 근원적이고 높은 수준을 거쳐
이 자리까지 왔다는 것이다.
그만큼 물질세계와 우리 몸이 소중하고 귀하며 그 가치가 상상을
초월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이제까지 우리는 지속적으로 하늘은 높고, 영적세계는 위대하며
인간과 물질은 추하고 저급하다는 가르침을 받아왔다.
물론 분명히 그러한 요소들이 있음을 부정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천부경은 이렇게 우리가 현재 모습을 하게 된 것이
가장 밑바닥에서 시작한 것이 아니라 가장 높은 곳에서 시작된 것을
깨우치고자 하고 있다.
그러니 현재의 악하고 추한 상황을 보지 말고 다시 회복하고 완성될
근원을 생각하고 그 차원으로 상승하라는 것이다.
이렇게 풀이하니 비로소 인간 존재의 신적기원을 말하는
모든 다른 경전들과 조화를 이루는 것을 알 수 있다.
성경도 사실 인간은 '죄인' 이전에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존귀한 존재로 묘사한다. 그러니까 기원이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바울도 이 점에 대해서 명확히 했다.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로마서 11:36)
그렇다면 우리가 볼 것은 지금 처한 낮음과 불행, 연약과 악이 아니다.
도리어 우리의 근원이 영원하며 영광스럽고 무한한데서 부터 나온 존재임을 기억하고
다시 그 차원으로 돌아가기를 힘써야 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돌아가는 것은 단순히 여기가 괴롭고 힘들기 때문에 피하는 차원이 아니다.
오히려 낮고 연약한 차원으로 일부러 내려와서 모든 것을 경험하여
지혜와 능력, 사랑을 깨닫고 얻은 후에 영광스러운 귀환을 하는
차원으로 이해를 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운명이자 사명이다.
12.
드디어 나를 크게 좌절시킨 구절을 다시 만난다.
運三四成環五七 (운삼사성환오칠)
'셋이 네 번째로 운행하니 다섯과 일곱의 고리를 이룬다'
도대체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다.
이 부분에 대한 설명을 아무리 찾아봐도 시원하게 풀이한 사람이 없다.
대충 두루뭉실 넘어가거나 해괴한 해석들을 늘어 놓는다.
특히 5와 7에 이르러서는 가관도 아니다.
주역의 오행은 기본이고 칠정(七情)이 등장하는가 하면
심지어는 이상한 숫자 풀이를 하면서 억지로 꿰 맞추려고 애를 쓰는데
보기에 안스러울 정도다.
그래서 나는 그렇게 억지로 풀려고 하기보다 차라리 덮어 두고
때를 기다리는 것이 낫겠다 싶어 약 2년을 보냈다.
그러다 문득 어떤 느낌이 와서 다시 풀이를 하게 되었는데
솔직히 지금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자신이 없다.
그래도 2년 전보다는 나아진 것 같아서 또 한번 노력을 해 보기로 한 것 뿐이다.
운삼사성환오칠
일단 이 문장의 구조를 잘 점검해 보자.
3, 4를 붙여 두면 '삼사가 운행하여 오칠의 고리를 이룬다'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런데 도대체 무슨 말인지 그 의미를 알 수가 없다.
그런데 3과 4를 떼어두면 셋이 넷을 움직여서 오와 칠의 고리를 이룬다가 된다.
마찬가지로 무슨 소린지 감이 안온다.
특히 5와 7에 대한 풀이가 전혀 되지 않는다.
그러는 중에 수라는 것이 '양'과 '순서' '종류'등의 의미로 쓰인다는 것을 감안하여
다르게 적용을 해 보기로 했다.
3과 4를 단순한 수의 나열로 보지 않고 '셋이 네 번째로 운행하여...'로
풀이를 해 본 것이다.
그랬더니 연결이 된다.
왜냐하면 앞의 내용을 보면 셋의 작용이 지금까지 세 번 진행된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첫째는 셋으로 분화되는 작용이요,
둘째는 셋이 통일되는 작용이다.
그리고 셋째는 셋이 두 셋, 즉 여섯(6)과 합작하여 7, 8, 9
즉 만물을 생성해 내는 작용이다.
이렇게 셋은 이미 세 번에 걸쳐 작용을 함으로 존재와 영적차원,
물질차원의 세상을 창조해 내었다.
그리고 그 작용을 멈추지 않고 네 번째로 작용하는 것을 여기서 설명한다.
運三四(운삼사)는 '셋이 네 번째 운행하여'라고 풀이하는 것이
제일 무난하다고 생각이 든다.
그러면 그 다음 成環五七(성환오칠)은 도대체 뭔가?
'오와 칠의 고리를 이룬다'고 풀 수 있는데
왜 '5'와 '7'이며. 6은 어디로 가 버렸는가?
[출처] 다시 풀어보는 천부경 |작성자 수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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