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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 의식적 진화와 무의식적 진화 본문

천지인 공부/천부경

* 의식적 진화와 무의식적 진화

柏道 2019. 8. 1. 17:56



* 의식적 진화와 무의식적 진화 


                                                         ㅡ 自不仙使

 


 모든 생명체는 진화합니다. 

 진화에는 의식적인 진화와 무의식적인 진화가 있습니다.

 


 생명체는 육체적으로 뿐 만 아니라 영혼적으로도 진화해 가는데,

 인간이라는 종으로 진화될 때까지는 무의식적인 진화를 하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무의식적인 진화의 최고 정점에 있는 것이 인간입니다.

 


 개나 소, 혹은 인간과 가깝다고 하는 침팬지나 고릴라가

 '나는 지금부터 영혼진화를 위해 공부한다.' 고

 하며 나무 밑에 앉아서 참선하고 명상 수행하는 것을 보셨습니까?

 모든 생명체가 인간까지는 무의식적으로 진화를 합니다.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은 무의식적인 진화의 최고정점입니다.

 그 다음에는 의식적인 진화를 해야 합니다.

 의식적인 진화를 하기 위하여 생각하는 동물인 인간으로 진화된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의식적으로 진화하여 인간보다 더 높은 단계의 영적차원으로 가야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악순환의 고리(윤회)를 빠져나갈 수가 없습니다.

 


 의식적인 진화를 거치지 않으면 무의식적인 진화의 최정점까지 왔으므로

 지옥으로 가든 축생으로 태어나든 추락하는 길 밖에 없습니다.

 


 육도(지옥.아귀.축생.수라.인간.천상) 윤회의 순환 고리를 끊기 위해서는

 의식적으로 진화하는 길 밖에 없습니다.

 의식적으로 진화하기 위하여 인간은 생각할 수 있는 특권인

  '마음'이라는 도구를 부여받았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마음이 의식적인 진화를 위한 도구라는 것을 모르고 마음에 속아서

 육체와 마음이 자신이 아닌데 자신으로 착각하는 어리석은 무명에 빠져

 고통과 불행 속을 헤매는 역효과가 난 것입니다.

 


 의식적 진화,이것을 '성경'에서 '거듭남'이라고 하였으며,

 거듭나지 않은 자는 천국을 볼 수가 없다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거듭날 것인가?

 그것에 대해 우리 <천부경>은 '본심 본태양'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자상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소위 "마음' 이라는 것은 심(心)과 성(性)으로 나눌 수 있는데,

 거듭나기 전에는 모든 사람들이 이 '심'이라는 것을 '나' 인 줄 착각하고 살아가게 됩니다.

 


 '심(心)' 은 굽은 낚시 바늘에 '탐(貪), 진(瞋), 치(痴), 즉 삼독의 미끼를 낚시 바늘에 달고,

 자신을 욕망의 노예로 만들어 고통을 주는 마음이며,

 이는 곧 육신의 생각을 말합니다.

 <성경>에서는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라고 하였으며,불경에서는 이 육신의 생각을 도적이라 했습니다.

 


 '성(性)'은 본심이며 신성(神性)의 성(性)으로 비유한 것입니다.

 마음 심의 미끼를 걸던 낚시 바늘이 곧게 펴진 모양으로,

 이 곧은 마음을 가진 '성'은 음양,미추,주야,생사,주객, 모든 것을 다 포함하는 마음입니다.

 즉 모든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을 초월한 본래의 성품을 말합니다.

 본래의 마음은 '곧은 낚시'이기 때문에 

 무엇에도 걸리지 아니하는 무아무애행의 마음을 뜻합니다.

 


 성경에서의 거듭남이란 '心' 에서 '性' 으로 의식적인 전환을 말합니다.

 거듭나게 되면 본래의 성품을 알게 되고 육신의 생각을 자신과 동일시하지 않고 지켜보며

 즐기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불교에서는 본성을 본다고 해서 앞에 見자를 붙여 '견성(見性)' 이라고 하였습니다.

 원래의 성품인 본심 본태양으로 거듭난 마음의 상태를 '견성성불' 이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거듭남' 입니다. 이 견성성불을 '성경'에서는 더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진노하사 불뱀을 땅에 내려 보내려니 불뱀에 물리는 자마다 죽으리라.

 그때 모세야 놋뱀을 만들어 세워라. 보는 자마다 다 살리라.'

 


 '놋뱀을 닦는 자' 혹은 '놋뱀을 사랑 하는 자' 가 사는 것이 아니고,

 '놋뱀을 보는 자' 마다 살리라 하였습니다.

 '견(見)놋뱀' 이나 '견성성불' 이나 모두 같은 뜻입니다.

 불뱀이란 탐진치에 물든 육신의 생각을 뜻합니다.

 


 그러면 거듭나기 위해선 무엇을 해야 하는가?

 


 모든 인간은 중생의 마음과 부처의 마음을 동시에 가지고 있습니다.

 중생과 부처가 이미 하나이며 내안에 心과 性이  이미 같이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거듭나기 위하여 내가 할 일은 그냥 선택하는 것입니다.

 안.이.비.설.신.의 라는 도적에 의해 탐진치에 물든 '불뱀'의 마음을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그 무엇에도 물들지 않는 태양과도 같은 본래의 성품인

 죽지 않고 썩지 않는 '놋뱀'의 마음을 선택할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만약 나의 뇌가 중생의 마음을 선택하면 죽었다 깨어도 중생이며,

 또한 나의 뇌가 부처의 마음을 선택하면 그 순간 바로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너무도 쉬운 것  ㅡ  선택

 


 꺠달으려고 헛되이 죽도록 고생할 것이 아니라 그냥 부처의 마음을 선택해서

 본심 본태양(태양과 같은 마음)으로 살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더 이상 깨달을 것은 없으며,그것은 전적으로 스스로의 선택 여하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 안에 이미 부처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데

 어디에서 깨달을 그 무엇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이와 같은 이치는 이미 <육조단경>이나 불조사(佛祖師)들의 법문에 

 수없이 많이 나와 있습니다.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성경은 전체가 믿음을 강조합니다.

 의인이 되는 것도,천국 가는 것도,기적이 일어나는 것도,모두 믿음으로 된다고 하였습니다.

 


 불경의 <천수경>과 <육조단경>에는 한 생각에 모든 죄업을 소멸시키는 방법이 있습니다.

 


               백겁적집죄 ㅡ 천겁만겁 쌓인 죄업

               일념돈탕진 ㅡ 한 생각에 없어지니

               여화분고초 ㅡ 마른 풀에 태운 듯이

               멸진무유여 ㅡ 흔적 없이 사라지네

 


               죄무자성종심기 ㅡ 죄 자성 없이 마음따라 일어나니

               심약멸시죄역망 ㅡ 그 마음 멸할 때 죄 또한 없어지네

               죄망심멸양구공 ㅡ 죄와 마음 멸해 둘 모두 사라지면

               시즉명위진참회 ㅡ 이를 일러 참 참회라 하는 도다.

 


 불가(佛家)에서는 모든 고통이 육신의 생각 때문이라 합니다.

 곧 무명에 의해 분별된 모든 모습은 영원불변의 참 모습이 아니라

 곧 사라질 헛되고 망령된 허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생은 육신의 생각에 속아 헛된 것을 참으로 착각하여 

 그것을 구하려고 몸부림치고 있습니다.

 


 억겁의 모든 죄악과 고통은 바로 여기 육신의 생각에서 생깁니다.

 그러니 죄악과 고통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무명에서 생긴 허상이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천겁만겁 쌓인 죄악과 고통일지라도 

 무명 때문에 생긴 허상이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모두 사라집니다.

 위의 경문에서는 그것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는 특히 마조도일과 남악회양 선사 사이의 대화를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루는 도일이 참선을 하다가 그 앞에서 스승 회양 선사께서 벽돌을 갈고 있는 것을 보고

 그 까닭에 대해 여쭈었습니다.

 그러자 회양 선사는 아주 어뚱한 행동과 말로써

 제자가 쓸데없는 짓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우쳐 주었습니다.

 


 도일선사 : 선사님 무얼 하십니까?

 회양선사 : 거울을 만들려고 벽돌을 간다네

 도일선사 : 벽돌을 간다고 어떻게 거울이 됩니까?

 회양선사 : 자네는 앉아서 뭘 하는가?

 도일선사 : 부처가 되려고 참선을 하지요!

 회양선사 : 자네 하는 짓이나 내 하는 짓이나 똑같네

 


 제자 도일이 헛된 아상을 가지고 참선하는 것에 대해 

 그 스승 회양은 마치 벽돌을 갈아서 거울을

 만들고자 하는 것처럼 헛된 짓이라고 따끔하게 꾸짖었습니다.

 자신의 행위와 노력,그리고 의지를 모두 놓을 때

 자신 속의 진아인 불성이 전체에 고루 빛을 내면서 대조화를 이룹니다.

 아상을 버리라는 말은 다른 말이 아닙니다.

 육조단경 내용 중 신수와 혜능의 게송에도 이런 점은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신수의 게송

 


         신시보리수 : 몸은 깨달음의 나무요

         심여명경대 : 마음은 거울 누각 같으니

         시시근불식 : 때마다 부지런히 털고 닦아

         물사야진애 : 먼지가 끼지 않게 하라

 


                    혜능의 게송

 


         보리본무수 : 깨달음엔 본래 나무가 없고

         명경역비대 : 거울 또한 누각이 아님에

         본래무일물 : 본래 아무것도 없는데

         하처야진애 : 어느 곳에 먼지가 끼겠는가

 


 신수의 게송은 자신의 심신에 절대적인 본성이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아직 그에 대한 분별의 먼지를 버리지 못해 

 아상을 가지고 털고 닦는 과정을 읊은 것입니다.

 이에 비해 혜능의 게송은 이미 본성과 일체가 되어 모든 분별이 사라진 

 부처의 경지를 선택한 거듭난 삶의 경지를 노래한 것입니다.

 


 그러면 거듭난 마음의 모습에 대해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중생의 마음은 어떤 것이고 부처의 마음은 어떤 것인가?

 거듭난 마음,부처의 마음은 '본심 본태양' 으로, 본심을 태양에 비유했습니다.

 오늘 먹구름이 엄청나게 끼었다고 내일 태양이 떠오를 때,

 이마에 시커멓게 숯 검정 칠을 해가지고 올라오겠습니까?'

 오늘 엄청나게 비가 온다고 내일 태양이 떠오를 때 물을 뚝뚝 흘리면서 떠오르겠습니까?

 구름이 끼었건 말건, 비가 오건 말건, 태양은 언제나 찬란한 빛을 발하며 떠오릅니다.

 아무리 구름이 낀다 해도,

 아무리 비가 온다 해도,그것에 의해 태양은 물들거나 손상되지 않습니다.

 인간의 본성도 이처럼 육신의 생각에 의해서 좌지우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를 돕기 위해 비유해서 말씀드린 것입니다.

 


 또한 본심 본태양은 스스로 빛을 발합니다.

 태양은 하나님이 있어야 빛을 발하거나 부처님이 있어야 빛을 발하는 것이 아닙니다.

 알라신이 있어야,산신, 용신,터줏대감이 있어야 빛을 발하는 게 아닙니다.

 태양은 이미 스스로 빛을 발하고 있기 때문에 고타마 싯다르타는 '천상천하유아독존' 즉

 '하늘 위 하늘 아래 홀로 어디에 있어도 그 자체로서 

 아무런 부족함이 없는 존귀한 존재다' 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에게는 중생의 마음도 있고 부처의 마음도 있는데,

 내가 부처의 마음을 선택한다면 우리는 그와 같은 천상천하유아독존, 

 인내천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참 모습인 부처의 마음을 태양에 비유한 것이고,

 비가 온다, 바람이 분다, 풍우상설이 일어난다는 것은 우리가 세상을 살아갈 때 일어나는

 온갖 고통과 불행을 느끼는 중생의 마음과 삶을 비유한 것입니다,

 


 중생의 마음이 욕망에 물들어 고통과 불행을 일으킬지라도 우리의 본성인 '본심 본태양' 은

 조금도 물들지 않고, 침해받지 않고, 손상되지 않고,쓸려가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육신의 생각,탐진치에 물든 마음이 나인 줄 착각하고 있으면

 풍우상설에 비 맞고 고통의 바다 속으로 완전히 쓸려가 버립니다.

 


 그러나,이러한 현상이 내가 아니고 태양과 같은 본성이 나라는 것을 인정하고 꺠어서

 섬세한 통찰력으로 지켜볼 때 비동일시와 현존의 대자유를 성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에 의지해야 되는 게 아니고,용신이 있어야 되고, 알라신이 있어야 되고,

 산신이나 조상신이나 기타 의지할 그 무엇이 있어야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안에 이미 있는 그대로 붓다의 마음을 인정하고 선택하여 받아들인다면

 그것이 본심본태양으로 거듭난 대자유의 마음과 삶이 되는 것입니다.

 


 이 마음의 모습을 좀 더 살펴봐야 합니다.

 마음이란 것은 절대 내편이 안 되어 줍니다.

 예를 들어, 그대가 억울하게 다른 사람에게 5초간 손가락질 당하며

 욕을 먹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자려고 누우면 천정에서 그 상황이 재현되기 시작하고 속에서 열불이 뻗쳐

 ' 야! 이 미친놈아 넌 속도 없냐? 잠이 오냐? '그러면서 잡도 안 재웁니다.

 욕 얻어먹은 상황은 5초밖에 안 되고 그 상황은 벌써 종료되었는데,

 이 마음은 몇날 며칠을 가며 나를 괴롭힙니다.

 마음이 거듭나 깨어 있지 못하면 사람의 말 뿐 아니라 천지 만물의 노예가 되기도 합니다.

 날씨가 안 좋다고 짜증내고,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뻔해도 신경질 부리고...

 


 하지만 흐르는 강물에 발을 두 번 담글 수 있겠습니까?

 흐르는 강물에는 한 번도 발을 담글 수가 없습니다.

 담그는 순간 물은 흘러가 버립니다. 실체는 이미 다 지나가 버렸습니다.

 그걸 붙들고 괴로워하는 그것이 바로 내 마음인 것입니다.

 그 현상은 다 사라졌고 모두 꿈이 되었는데 그 헛된 꿈을 붙잡고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상대방이 내게 욕을 할 때는 명령을 하는 것입니다.

 어떤 명령을 하는 것인가? "내가 지금부터 당신에게 욕을 하니,

 당신은 화를 벌컥 내면서 심장에 불을 붙여 가지고 간의 나무가 타게 하여,

 그 그을음이 얼굴에 나타나 기미가 생기고 괴로워지라! 고 명령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마음은 노예의 마음이 되어 즉각적으로 그 명령에 복종합니다.

 "네 주인님 지금부터 제가 화를 내겠습니다,' 라고 하면서 바로 화를 내기 시작합니다.

 


 이때 깨어 있어야 합니다.

 '아' 이 사람이 내 육신의 생각,마귀,도적,불뱀을 죽여주고 있구나!'

 어떤 사람이 내게 욕을 해서 내가 치욕적이고 자존심 상하게 될 때,

 뭐가 무너지는지를 예리한 통찰력으로 잘 살펴봐야 합니다.

 그것은 내 본심,진아가 죽는 것이 아닙니다.

 나에게 너무나 밀착되어 있어서 나인 줄로 착각하여 늘 속아 사는 육신의 생각,

 불뱀,마귀,도적놈,나의 목에 밧줄을 메어서 나를 노예로 끌고 다니는 마음,

 바로 이 나의 철천지원수를 무너뜨려 죽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마음의 노예상태에서 나를 해방시켜주고 무애 역행으로 마음을 유희의 소품화시켜

 노예에서 주인이 될 기회를 주니 진실로 상대에게 감사와 기쁨이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이 일이 얼마나 힘듭니까? 죽기보다 어려운 일입니다.

 상대방이 욕을 마구해 대는데 ' 감사합니다.

 내 안이비설신의 여섯 도적놈을 죽여줘서 감사합니다.'

 라는 마음이 일어날 수 있도록 하고 역으로 기쁨을 창조해서 

 마음을 도리어 속일 수 있는 현존의 깨어있는 심오한 통찰력과 행동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대자유인이 될 수 있는 깨어있는 의식의 상태입니다.

 


 이렇게 깨어서 지켜보며 연출 할 수 있는 통찰력을 키우기 위해서 

 참선,명상,기타 수행을 하는 것입니다.

 본심 본태양이 진짜 자신이라는 인식이 마음에 전체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돈오이고,

 오랜 습관을 벗어나게 지켜보며 늘 무애역행의 깨어 있는 훈련을 하는 것이

  점수인 것입니다.

 


 본심 본태양이 자신인 줄 알고 깨어 있으면 

 그 어떤 일에도 침해받지 않고 손상 받지도 않으며,

 죽지도 썩지도 멸하지도 않습니다.

 즉 본심 본태양으로 거듭나면 고통과 재난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그리고 삶과 죽음을 초월할 수 있는 길,

 칭찬과 비난에 똑같이 감사와 기쁨이 일어나게 할 수 있는 길이

 '본심 본태양' 그 안에 들어있다는 말입니다.

 


 생명은 절대 죽지 않습니다. 우리가 지금 살아 있는 것이 그 증거입니다.

 전생에 죽었기 때문에 지금 여기 살아 있는 것입니다.

 만약 전생에 죽지 않았다면 지금 우리는 적어도 

 100살, 1000살, 10000살까지도 되어 있을 것입니다.

 현재도 마찬가지로 지금 여기서 죽으면 다음에 또 살아 있게 됩니다.

 그래서 생명은 절대로 안 죽습니다. 

 다만 옷을 바꿔 입는 것처럼 육체를 바꿔 입는 것 뿐 입니다.

 


 인간이란 하나님,부처님,알라신에 의지하지 않아도 홀로 이미 존귀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스스로 존귀한 존재라는 것을 잊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잘못된 교육에 중독되어 하찮은 미물보다 못한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비오는 날 한밤중에 홀로 산에 가라고 하면 많은 사람이 무서워할 것입니다.

 그런데 쥐는 낮에 제사지낸 음식을 찾아서 한밤중이라도 산소 옆을 마음대로 돌아다닙니다.

 인간이 이 부분에 있어서는 쥐보다도 못한 것입니다.

 어릴 때 귀신이야기에 마음이 중독되어서 헛된 무서움을 스스로 만들어 내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중독되어가는 것이 육신의 생각, 즉 마음입니다.

 


 거듭나지 않는다면 이 세상은 유배지일 뿐입니다.

 여러분들에게 남태평양 타히티섬에 6일 정도 여행 가라고 하면 재미있게 여행 갈 것입니다.

 그런데 60년을 타히티섬에 가서 살라고 한다면 유배지가 되지 않겠습니까?
 만약 그대가 본심 본태양으로 거듭나지 않는다면 수 십 년을 산들, 수 백 년을 산들,

 유배지에서 사는 것과 조금도 다를 바 없을 것입니다.

 유배지에서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그 삶에 무슨 가치가 있겟습니까?

 


 그래서 <성경>에 '부귀영화 권세가 헛되고 헛되고 헛되도다.' 하였고

 불경에서도 '범소유상이 개시허망 ㅡ모든 모습 있는 것은 다 허망한 것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헛되고 망령된 것을 이용하여 죽지 않고,썩지 않고,

 멸하지 않는 본성을 발견하기 위해 수행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행하는 것을 '돈오' 라 합니다.

 마음.육신의 생각. 불뱀.원수.도적을 죽여야 된다고 해서 돈오라고 합니다.

 돈오라는 말은 즉각적인 깨달음이란 말이 아닙니다.

 돈오란 "頓梧 ㅡ 무너질 돈, 내마음 오' 라고 씁니다.

 이 도적놈,내 육신의 마음이 무너진다는 말입니다.

 또 이것을 다른 말로 말하면 '명상' 이라고 합니다.

 명상이란 '冥想 ㅡ 어두울 명, 생각 상 ' 즉 모든 수행을 지칭하는 단어로 육신의 생각인 마음을 무너뜨리고

 밝게 하고 없애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으며 이것은 무아(無我)와도 같은 뜻입니다.

 


 모든 고통은 돈이 없어서 오는 것도 아니요,

 집이 없어서 오는 것도 아니요,건강하지 않아서 오는 것도 아닙니다.

 모든 고통은 무명(無明)에서 옵니다. 

 무명이란 이 마음이 나인 줄로 착각하고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불경에 '제고 무명고(諸苦無明苦)ㅡ 모든 고통은 무명에서 온다' 라 했습니다.

 본심 본태양으로 거듭나게 되면 모든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성경에서는 '거듭남',  불경에서는 '견성성불',

 그리고 유교에서는 '중야자(中也者)' 라 한 것입니다.

 


 앞에서 도덕경의 '무위자연' '물아일체' 사상이 우리 천부경에 다 들어 있다고 했는데

 어디에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본심 본태양 앙명 인중천지일' 

 바로 이 인중천지일(人中天地一)이 인간의 내면 중심에 다다르면

 천지와 하나 된다는 '물아일체' 를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노자 도덕경에서는 '무위자연'을 얘기 하는데

 우리는 더 깊은 통찰력을 가지고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무위자연'이란 사람의 힘을 더하지 않은 그대로의 자연(저절로 그러함)을 말합니다.

 사람 이외의 짐승이나 천지만물로 태어나면 '무위자연'이 저절로 됩니다.

 


 나무도 봄이면 꽃피우고 가을에 낙엽지고 결실을 맺습니다.

 강남 갔던 제비도 봄이면 돌아오고, 개구리도 겨울이면 동면하고, 

 개나 소도 화가 나면 으르렁댑니다.

 이렇듯 짐승들은 다 '무위자연' 합니다. 그래서 이 '무위자연' 은 의미가 없습니다.

 '천부경'은 '무위자연' '물아일체' 를 넘어 '유희자연'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만약 지금 우리가 '무위자연' 을 한다면 

 깜깜한 밤중에 전기불도 없이 암담하게 생활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유희자연' 을 하고 있습니다.

 전기도 창조하고 TV같은 것도 창조해서 한밤중에도 대낮처럼 밝게 하고

 즐겁게 생활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대자연을 재창조해서 더 유익한 삶을 만드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런 가르침이 천부경 어디에 있느냐면 바로 '앙명(昻明)' 이라는 구절에 있습니다.

 앙명이란 무슨 말인가? 본심 본태양의 작용을 설명한 말로써  스스로 빛을 발하는 밝음,

 즉 스스로 빛을 발해서 이 자연을 '무위자연' 이 아니라 무아역행이

'유희자연'으로 재창조하는 것을 앙명이라고 합니다.

 인간을 만물의 영장이라고 말할 수 있는 특징 중의 하나가 바로 創造性입니다.

 그래서 인간만이 스스로 빛을 밝혀 자연을 재창조해서 

 대자유와 평화의 지상천국을  만들 수 있습니다.

 


 도교에서 말하는 '무위자연'  '물아일체' 를 넘어서 

 무애역행의 '유희자연' 을 할 수 있는 방법이

 '천부경' 에 나와 있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어마어마한 얘기입니까?

 모든 경전을 모아서 피라미드를 만든다면 <천부경>은 마지막 윗돌에 해당됩니다.

 마지막 윗돌을 세울 때까지는 밑바닥부터 차곡차곡 잘 쌓여져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맨 윗돌을 얹을 수 있습니다.

 최고의 박사과정을 밟으려면 석사과정까지 다 알고 통과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즉 유불도에 완전히 통달해 있어야 천부경 속의 거듭남의 법칙을 체득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나는 태양신 모든 것이 축제다.' 를 틈만 나면 끊임없이 염송하여 마음을 유희축제의 소품으로 만들고

 길들여 마음의 주인이 되고 무애 역행유희의 대자유를 향유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비동일시,현존,무아,무애,무분별,역행유희,연출을 빛의 법칙에 따라

 감동장치,감동교육,감동경영, 감동사랑,강동우정으로 생활 속에서 실천하여야 합니다.

 이와 같이 천부경의 내용을 실생활에 적용하여

 최상의 즐거움인 대환희와 대자유를 성취하시기 바랍니다.

 


 


 * 경전이나 좋은 책들을 반복해서 읽는 정성과 훈련만으로도 자기 암시가 되어

 병이나 불행과 같은 부조화가 사라지고 자유와 평화가 오며 행복한 삶이 이루어집니다.

 


 


                                                                                           2012 .02.09 - 수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