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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참전계경 제304사 -不倦(불권) 본문

천지인 공부/참전계경

참전계경 제304사 -不倦(불권)

柏道 2019. 4. 18. 14:27

참전계경 (參佺戒經),
8理, 366事를 통한 인생지혜 탐구 316 
 
수학에 '유한 속의 무한'이라는 
특별한 개념이 있다. 프랙탈 원리를
따라 만든 코흐 곡선(아래 사진 참조)은
일정한 길이의 선을 세등분 하여 같은
비율로 분할을 계속하면 무한한
반복을 만들 수 있다.
그렇게 하면 이론적으로는 유한 속의
무한이 존재하게 된다. 그러니까 끝없이
나누기를 계속하게 되면 끝이 나지
않는 것이다. 
우주는 확대해도 무한하며, 축소해도
무한하다. 제한이라는 것은 사실
우리의 시각과 의식의 제한만 있을
뿐이지 우주에는 그런 제한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이를 통하여 우리에게 일깨워 주는
소중한 영적인 지혜가 있다.
우리가 가장 귀중하게 생각하는 선이나
진리, 지혜, 사랑, 능력 등이 모두 이
무한발전의 원리에 속한다는 것이다.
완전이라는 개념은 추상적인 이론으로
존재할 뿐 현상세계에는 완전이란
존재하지 않고 무한한 발전만 있을
뿐이다.
따라서 하나님에 대한 이해도 이렇게
구분을 해야 한다. 우리가 개념적, 
신학적 하나님을 말할 때는 완전함을
논할 수 있지만 현상세계에서 체험하는
하나님은 사실 무한한 변화와 성장속에
존재하는 분으로 인식될 수 밖에 없다.
실제로 지금도 인간과 우주는 변화를
이루고 있다. 그렇다면 이 우주 만물을
통치하시는 하나님도 마찬가지로
인간과 우주와 함께 무한한 변화와
확장을 이루고 있다고 해야 살아계신
하나님이 된다.
안타깝게도 신학은 우리가 감지할 수 
없는 이론적인 완전함으로 하나님을
설명하니 개념만 남고 실제 삶 속에는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으로 불리는 예수가 바로 이런
속성을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그는
개념의 하나님 자리를 떠나 우리에게
왔고, 우리와 같은 삶을 살면서 무엇이
진정한 하나님의 능력인가를 몸소
삶을 통해 보여주었다. 그는 갈등하고
고민했으며, 유혹을 받았고, 분노했다.
그런 모습 속에서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발견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삶 속에서도 그를 따라
온전함을 향하여 쉬지않고 발전해
나아가는 삶으로 참 하나님의 자녀됨을
증명해야 한다.
이런 증거가 없으면 죽은 믿음이요,
공허한 개념만 가지고 떠드는 말장이에
지나지 않게 된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시다'(마태복음 22:32)
 
第 304事 報 3階 剙 5及
(보 3계 창 5급) 不倦(불권) 
 
不倦者(불권자)는
不倦爲善也(불권위선야)라
勤匠造器窮美而止
(근장조기궁미이지)하고
勤醫診痾盡藥而止
(근의진아진약이지)하나니
勤善亦如之(근선역여지)하여
尋善淘善合善而止
(심선도선합선이지)라야
勤性也(근성야)니
可領其福(가령기복)이니라 
 
불권(不倦)이란
선한일에 게으르지 아니함이라
부지런한 장인은 도기를 만들때
최고의 아름다움에 이르러야
비로소 만들기를 그치고
성실한 의원은 병을 진료할 때
약을 다 써야 비로소 마치느니라
선을 부지런히 행하는 것도
이와 같아서 선을 찾고
또 고르기를 온전한 선으로
완성될때까지 힘쓰는 것이
부지런한 성품이니
가히 그 복을 받게 되느니라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선이나, 진리 등은
끝이 없고 무한한 속성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이만하면 됐다'는 끝이 존재하지
않는다.
장인이 아름다운 도기그릇을 만들 때
자기의 마음에 흡족한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끝을 내지 않는다.
그런데 그 흡족한 결과라는 것이 사람에
따라 다르다. 보통 사람들이 보기에는
더할 것 없이 완벽해 보이나 장인의
눈에는 큰 결함을 발견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 생각에 아까운 그릇을
미련없이 깨뜨려 버리기도 한다.
그러면서 자신의 마음에 흡족한 결과가
나올 때까지 만들기를 계속한다.
하지만 그가 아름답다고 만족하며
끝을 맺어도 사실은 그의 수준에 만족
하는 것이지 그보다 더 높은 수준의
장인에게는 그 또한 흠이 있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니까 100%는 없다는 것이다.
기준을 어디에 정하느냐에 따라
완성품의 정의가 달라지게 된다.
의사가 병을 고치는 것도 마찬가지다.
병이라는 것이 완전하게 고쳐질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안다.
따라서 어느 기준을 적용하는가에
따라 '건강하다'는 판단이 달라진다.
완벽한 기준을 적용하면 사람들은
모두가 다 환자가 되고, 심각한 문제를
가진 존재들이 된다.
마치 율법과 마찬가지다.
완전함을 적용하면 아무도 의로운 자가
없다. 얼마든지 기준에 따라 달라지기에
율법을 적용하는 것은 조심해야 한다.
선이나 진리는 그냥 전진이 있고,
발전이 있을 뿐이다.
더 나은 선을 향하여 나아가고 더 깊고
높은 진리를 끊임없이 발전해 나가는
것이 선을 제대로 알고, 진리를 사랑하는
자의 증거이다.
사랑도 그렇지 않은가?
누가  '이만하면 됐지 않은가?' '내가 할
만큼 다 했다'고 한다면 그는 사랑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이요, 사랑을
자기 만족을 위해 한 사람이라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다.
우리의 생명이 영원하다면 우리의 성장과
변화도 영원해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천국에 가서 맛있게 먹고, 쉬고, 즐기는
것은 잠시 누릴 행복일 뿐, 늘 그렇게
지내는 것은 곧 지옥이 되고 만다.
생명은 무한한 변화와 발전, 성장이
있을 때 비로소 생명이다.
하나님이 무한하시니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가고 성품을 본받는 일이
영원할 수 밖에 없다.
이 세상에서 너무 고생을 해서 천국에
가서 푹 쉬고 싶더라도 생각을 고쳐
먹어야 한다. 한 백년 고생했으면,
한 백년 쉬고 다시 성장을 위한 고난과
위험으로 뛰어들어야 한다.
그렇게 무한하게 반복하며 발전해
나가는 것이 우리에게 부여된 하나님의
생명의 속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