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참전계경 제305사 - 欲及(욕급) 본문
참전계경 (參佺戒經),
8理, 366事를 통한 인생지혜 탐구 317
바울은 자신의 속 깊은 곳을 들여다
보고는 이렇게 탄식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로마서 7:19-20)
그러면서 이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는
자신을 향해 깊은 신음을 내 뱉았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로마서 7:24)
그러나 그는 답을 발견했다.
바로 이 심각한 고민과 자기 성찰이
결국 복음의 밝은 빛으로 그를
이끌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고민을 깊이 하는 자는
반드시 복음의 빛을 받게 된다.
만일 이런 심각한 고민이 없다면 그것은
아직 때가 되지 않았다는 의미도 되지만
인생을 진지하게 살지 않고 있다는
증거도 된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고, 신성을
부여받은 인간에게는 당연히 그 속에서
'선을 향한 소원'이 일어나게 되어 있다.
그러나 문제는 제대로 모르거나, 알아도
그 앎을 행할 힘이 없다는 것이다.
율법의 선함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도 왜 율법대로 실천하며 살지
못하는가? 그 답은 '연약함'이라고
바울은 판단했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로마서 8:3)
그에게 빛이 비쳐든 것은 자신의
연약함을 제대로 깨닫는 시점부터이다.
그로 인해 그는 이이상 자신에게서
답을 찾지 않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은혜라는 복음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바로 여기서 빛을 찾고 답을 얻은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소망은 나를 보지 않고
하나님을 보는 것이다. 그러면 죄도,
정죄도, 심판도, 형벌도 없고 오직
사랑의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만이
자기 속에 가득하게 된다.
바로 이것을 구원이라고 한다.
혹시 항상 자신의 약함과 추함을 보고
살고 있지나 않은가?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고, 마음의
눈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보라.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보이신 하나님의 무한하신 긍휼과 자비를
바라보라.
그 바라봄이 믿음이요, 바라보고 있는 순간
구원을 받으며, 바라보는 것을 지속하는
것이 구원을 이어가고 영생의 삶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말할 필요도 없지만 그 바라봄을 망각하고
자신과 세상을 보게 되면 순식간에 빛을
잃고 생명력은 약해질 것이다.
그래서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히브리서 12:2)라고
권면한다. 이처럼 항상 예수를 바라봄으로
'세상과 나는 간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라고 고백할 수 있으면 그보다
행복한 순간이 어디에 있겠는가?
第 305事 報 3階 剙 6及
(보 3계 창 6급) 欲及(욕급)
欲及者(욕급자)는
欲及於善也(욕급어선야)라
性昏知昧(성혼지매)하여
雖欲爲善(수욕위선)이나
不知善之所善(부지선지소선)니라
惟知惡之不可(유지악지불가)면
眞性也(진성야)니
可領其福(가령기복)이니라
욕급(欲及)이란
선함에 이르고자 원함이라
성품이 혼미하여 앎이 어두우면
선을 행하고자 하나
선이 선인줄을 알지 못하느니라
그러나 오직 악한 것을
허용할 수 없다는 것만 알아도
이는 참된 성품이니
가히 그 복을 받게 되느니라
여기서 교훈하는 수준은 소극적이고
연약한 자들을 위해 주는 가르침이다.
제대로 양육을 받지 못하고 자라게
되면 본능의 욕구를 따라 행하는 것이
몸에 배게 되고, 자연스럽게 성품이
혼미해 지게 되어 있다. 그런 혼미한
영은 지식과 지혜와는 거리가 멀다.
배우기를 싫어하게 되고, 가르침을
거부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선과 악에 대한 기본적인
분별력조차 함양하지 못하고 불행하고
위험한 사람으로 성장하게 된다.
이에 대한 책임소재를 가리는 것은
의미가 없다. 현상을 봐야 한다. 이렇게
자라게 되면 무조건 자신에게 해롭고,
주위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게 된다.
그러나 다행인 것은 모든 사람이 본성에
부여된 '선에 대한 욕구'이다.
이러한 선함에 대한 욕구는 모든 생명에게
주어진 보편적인 속성이요, 은혜이다.
아무리 악한 자라해도 선을 향한 욕구가
있게 마련이고, 악이 무엇인지는 안다.
따라서 이런 수준에 있는 자에게는
적극적으로 선을 행할 것을 가르치기
앞서 소극적으로 악을 행치 않도록
가르치는 것이 낫다.
실제로 우리가 어린 아이들을 가르칠 때
'할 것'보다 '하지 말 것'을 먼저 알려주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이처럼 악을 억제하는 의식을 일깨우게
되면 일단 악으로 인해 발생하는 피해를
막을 수 있다.
재미있는 것이 악을 싫어하고 미워하게
되면 그것이 바로 선의 시작이 된다.
선을 행하는 것이 악을 방지하는 적극적인
방법이기는 하지만 그만한 수준에 이르기가
쉽지 않기에 '악을 멀리하는 것'부터
가르침으로 선의 본성을 일깨우는 것이다.
이처럼 악을 허용하지 않는 것도 참된
선이기에 칭찬을 해 주고 격려를 할
필요가 있다.
이처럼 악을 허용하지 않는 차원을 넘어
서게 되면 비로소 선을 행할 의욕에
작은 힘을 얻게 되고, 선을 행함으로
인해 보람과 즐거움을 맛보게 된다.
그렇게 선을 행하는 자로 돌아서면
일단 생명은 피어나기 시작한다.
그러나 ... 우리 인생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이렇게 선으로 방향을 돌리고
선을 행하고자 하는 욕망을 강화하면
다음 난관이 기다린다.
그에 대해서는 앞부분에 이미 설명을
해 두었다.
그래서 사실 이 글은 본문을 중심으로
순서를 바꾸어 읽어야 된다.
[출처] 참전계경 제305사|작성자 푸른 오솔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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