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참전계경 제266사 -不謀(불모) 본문
참전계경 (參佺戒經),
8理, 366事를 통한 인생지혜 탐구 278
노자는 '패한 적이 없다'고 했다.
이 말을 들으면 보통 사람들은 '어떻게
지지 않고 늘 이길 수 있지?'하는 반응을
보인다. 하나의 편견이요, 선입관이다.
노자는 패한 적이 없다는 말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나는 이미 패했기 때문에 패할 수가
없었다'
사람들이 진리를 어려워 하는 이유는
진리 자체가 어려워서가 아니라
스스로 가지고 있는 답을 내려놓기가
어려워서 진리를 받아들일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콜럼버스의 달걀처럼 있는 그대로 세워야
한다는 불필요한 편견을 전제하고
있다 보니 끝을 깨어서 세울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올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사람은 교육과 경험을 통해 자신은
불완전하다는 것에 한치의 의문도
가지지 않고 살아가고 있다.
이러한 전제는 '더 배워야 하고, 발전해야
하며, 고쳐나가야 한다'는 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한다.
진리는 이러한 면을 부정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또한 분명한 사실이요,
확고한 진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리는 이것만 말하지 않는다.
사람은 원래 완전하며, 변할 것도,
더할 것도, 배울 것도, 고칠 것도 없는
존재라는 것을 또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양자택일, 이원론적 흑백론에 익숙한
우리의 의식은 이 둘을 함께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러면 이 둘 중에 차라리 후자를 택하면
나을텐데 그럴 능력도 배짱도 없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제일 나쁜 쪽을
택하고서는 고생을 사서한다.
그나마도 진지하게 택했다고 한다면
그 선택은 소망이 없고, 끝이 없는 수고와
절망을 강요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을텐데 그런 태도마저 없으니 막연한
기대 속에서 고통스러운 삶을 산다.
누가 그것을 생명의 삶이라고 하겠는가?
솔직히 죽는 것도 무서워 죽지도 못하고
사는 것이라면 '죽지못해 사는 것'이라
해야 맞지 않겠는가?
만일 이렇게 사는 것이 인생이라면 이런
인생과 우주를 창조한 조물주는 악하거나
무능하거나 둘 중의 하나일 수 밖에 없다.
만일 그런 신성모독의 죄에 빠지기 원치
않는다면 생각을 바꾸어 볼 노력을 해야
한다.
第 266事 福 4門 和 8戶
(복 4문 화 8호) 不謀(불모)
不謀者(불모자)는
不謀和於人也(불모화어인야)라
瑞雲在霄(서운재소)에
自舒自合(자서자합)하여
無滯無礙者(무체무애자)은
哲人之處己也(철인지처기야)니
於人無不和故(어인무불화고)로
不謀而和(불모이화)니라
불모(不謀)란
사람에게 꾸며서 화합을 이루려
하지 않음이라
상서로운 구름이 하늘에서
스스로 모이기도 하고
흩어지기도 하나니
머무름이나 걸림이 없음이
깨달은 이의 처신도 이와 같아서
다른 이와 불화할 일이 없는고로
꾸미지 아니하여도 화합하느니라
이런 경지가 있다는 말이다.
불화를 하게 되면 화목하는 것이 극히
어렵다. 이미 불화를 일으킨 상태가
부정적인 에너지에 매여 무능함의
증거인데 어떻게 그보다 두배 이상 강한
에너지가 필요한 화목을 이루어 내겠는가?
따라서 이미 불화로 들어가게 되면
화목은 이론으로만 존재하게 될 뿐
실제로 이루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그런 자들이 화해를 하려고 한다면
분명히 진정이 아니다. 너무 힘들어서든지
아니면 자기 이익을 위해 정략적으로
연합이 필요하든지 해서 그럴것이다.
따라서 일시적인 화해는 가능할지 모르나
조만간 원위치로 돌아간다.
정치가들이 하는 일들을 보라.
서로 싫다고 갈라지더니 금방 공동목표가
생기니 또 손을 잡고 난리다. 그러나 그게
무슨 화합이요 협력이겠는가?
그 상황만 끝나면 금방 다시 돌아가고 말
것이 뻔한데 말이다.
이세상의 화해니 용서니, 연합이니 하는
말들은 모두 이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니까 늘 긴장상태이며, 불안하다.
아무리 확약을 하고 서로 변치말 것을
맹세해도 그러는 동안에도 의심하는 것이
보통 사람들의 의식이다.
깨달은 사람의 의식은 이와 다르다.
그에게는 불화도, 화목도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다른 사람이 볼 때는 화목하기를
힘쓰는 것 같고, 불화를 잘 극복해 내는 것
같이 보인다.
그러나 실상 그들의 의식 속에는 아예
불화니 하는 것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나타나는 양상이 그렇게 보일 뿐이다.
당연히 그러한 자들은 화목해야 한다는
의식에도 매이지 않는다.
그래서 때로는 냉정하게 돌아서며,
날카롭게 대립을 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불화가 아니라 초월한
모습인데 굳이 말로 표현하자면 '불화같은
화목'이라 할 수 있다.
왜 이런 표현을 쓰는가 하면 어쩔 수 없이
지금 이 가르침이 '화목'에 긍정적인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에 그러는 것이지 실제로는
불화나 화목 자체를 넘어서 있다.
구름이 모인다고 화목한 것이고, 흩어진다고
불화한 것인가?
마찬가지다. 깨달은 사람에게는 화목이니,
불화니 하는 의식 조차도 없이 하늘의
이치를 따라 살아갈 뿐이다.
[출처] 참전계경 제266사|작성자 푸른 오솔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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