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참전계경 제268사 -弘量(홍량) 본문

천지인 공부/참전계경

참전계경 제268사 -弘量(홍량)

柏道 2019. 4. 15. 23:07


참전계경 (參佺戒經),
8理, 366事를 통한 인생지혜 탐구 280  
 
흔히들 모르고 하면 죄가 적고, 알고
하면 큰 죄가 된다고 생각하는데
이런 말은 의식수준이 낮은 아이들에게나
적용되는 말이다.
높은 의식에서는 정 반대가 된다.
모르고 하면 거짓과 위선이 되고,
알고 하면 지혜와 덕이 된다.
물론 알고 한다는 말이 잘못인 줄 알면서도
나쁜 일을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여기서 알고 한다는 말은 전후상황을 충분히
예측하고, 그에 따라 적절한 방편을 쓴다는
말이다.
의식 수준이 낮은 사람은 모든 것을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한다. 그러다보니
좋은 말을 하고 행동을 해도 이기적인
욕심에서 나오는 위선이 되어 해롭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이것이 잘못인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앞에서 '모르고 한다'는
의미가 바로 이것이다.
따라서 이 실상을 모르고 하면 모든 것이
다 거짓이요 위선이 된다는 것이다.
의식 수준이 높아져서 이이상 자신을
드러내거나 욕심을 취하기 위해 하는 
수준 삶이 아닌 남에 대한 배려가 목적이
되면 그가 행하는 모든 것이 덕이 되고
지혜가 된다.
때로는 거짓말이 들어가기도 하고
심지어는 가면을 쓰기도 한다.
그러면 낮은 수준의 사람들은 이런 모습을
이해하지 못하고 거짓이니, 위선이니
하며 잘못된 평가를 내리기 쉽다.
그러나 수준이 높은 사람은 이런 평가에
연연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런 평가를
하는 사람만 손해를 보게 된다.
자기가 보기에는 분명히 거짓이고,
잘못이지만 자기의 수준이 낮음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을 모르니 어떻게
설명할 수도 없다.
바울이 우상의 제물 문제를 다루면서
이런 수준을 자세하게 설명했다.
우상을 인정하고 먹는 약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우상을 인정하지 않으니
자유롭게 먹을 수 있는 강한 사람이
있다고 했다. 그러나 우상을 인정하지
않아서 먹어도 되지만 혹시 다른 사람이
오해할까봐 먹지 않는 더 높은 수준도
있다고 했다.
꼭 같이 먹지 않아도 그 의식수준의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따라서 외적으로 나타난 것만으로
판단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아무리 객관적이고 공정하게 평가한다고
해도 자기 수준 이상의 평가를 할 수
없기 때문에 아예 안하는 것이 낫고,
늘 자기자신을 돌아보는 것이 지혜롭다.
 
第 268事 福 5門 寬 1戶
(복 5문 관 1호) 弘量(홍량) 
 
弘量者(홍량자)는
性用之大度也(성용지대도야)라
柔中有剛而不見剛
(유중유강이불견강)하며
和中有毅而不見毅
(화중유의이불견의)하니
測之柔不似柔(측지유불사유)하고
測之和不似和(측지화불사화)하여
無際涯屈曲(무제애굴곡)이니라 
 
홍량(弘量)이란
성품을 쓰는 큰 법도니라
부드러움 가운데 강함이 있으니
그 강함이 드러나지 않으며
온화함 속에 굳셈이 있으니
그 굳셈이 보이지 않느니라
부드러움을 헤아리려 해도
부드러운 것 같지 않고
온화함을 헤아리려 해도
온화한 것 같지 않아서
그 한계도 굴곡도 없느니라 
 
도가 높은 사람은 자신의 속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아니 드러낼 수가
없다고 해야 맞다. 왜냐하면 그 자신은
이미 옳고, 그름의 이원론을 넘어서
있기 때문에 이이상 어떤 규칙이나
법에 매이지 않아서 자신도 무엇이
진짜 속마음인지 알 수 없다.
필요에 따라 적절한 것을 내어 놓을
수 있을 뿐 그 안에 정해진 것이 없다는
것이다.
이를 중용의 도라고 한다.
집기양단, 즉 양쪽 극단을 다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어느 것에도 치우치거나
편견을 가지지 않는다. 상황에 따라
적절한 것을 꺼내어 놓을 뿐이다.
그러다 보니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이랬다, 저랬다 하는 것 같고, 상황에
따라 가면을 쓰며 위선을 행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조심해야 한다.
깨달은 사람에게는 율법적인 판단이
통하지 않는다. 그에게는 이미 사랑으로
행하는 도가 중심에 있기 때문에 율법을
초월한다. 반율법적이 아니라 초율법적이
된다는 의미다.
의식수준이 낮은 사람은 절대로 이 수준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종을 잡을 수
없는데 종을 잡으려는 것 자체가 깨닫지
못한 수준임을 드러낸다.
 깨달은 사람은 이런 자들에게 '뭣하러
남에게 그리 관심을 가지느냐? 너 자신이나
수련하여 깨달음에 이르도록 힘쓰라'고
충고할 것이다.
도량이 넓은 사람에게는 강함과 부드러움이
잘 균형과 조화를 갖추어 있다.
그래서 부드러움 속에도 강함이 있고,
굳셈 속에서도 온화함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강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부드러움이 어른거리고, 온화하다고
느끼는 순간 굳셈이 드러난다.
이것은 꾸며서 되는 일이 아니다.
부드러움과 강함을 적절하게 함양할 수
있는 능력과 이를 조화롭게 잘 사용할 수
있는 지혜가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한 마디로 깨달음이 있어야 이런 멋지고
아름다운 모습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에게는 내적인 갈등이 없다.
내면의 빛을 따라서 적절하게 강함과
부드러움을 활용하고, 온화함과 굳셈을 
드러낼 뿐이다.
그러니 이런 사람에게는 마음에 장애가
있을 수 없고, 심경에 굴곡이 발생할 일이
없는 것이다.
바로 이런 수준으로 우리를 이끌어 가는
것이 진리요, 도이다.
그런데 왜 안팍에서 일어나는 갈등과
번뇌의 수렁에서 헤매는 삶을 계속하려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