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참전계경 제263사 -省事(성사) 본문
참전계경 (參佺戒經),
8理, 366事를 통한 인생지혜 탐구 275
도에는 '저절로 되는 경지'가 있다.
소위 '무위자연'의 경지인데 이러한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저절로 되도록 하는
이치를 알고 따라야 한다.
마냥 기다린다고 저절로 되는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애를 쓴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도가 때로는 황당한 소리처럼
들리고, 허무맹랑한 말장난처럼 여겨진다.
만일 교만한 마음으로 도를 이렇게
판단해 버리고 떠나게 되면 그는 평생을
어리석은 삶을 살게 된다.
불행할 것은 당연한 이치다.
그러나 겸손한 자는 그런 태도를 취하지
않는다. 성현의 지혜나 경전의 가르침이
그렇다고 하면 일단 신중하게 대하고
최선을 다해보는 것이 지혜요, 능력이다.
그 다음에 필요한 것은 무수한 시행착오와
좌절을 경험하는 것을 인내하는 마음이다.
몇 번 시도해 보고 안된다고 금방 포기해
버리면 그 또한 스스로를 존중할 줄
모르는 자로 평가될 수 밖에 없다.
사실은 도는 어려운 것이 아니다.
어렵게 보니 어려운 것이고, 미망에 물들어
있다보니 어려워진 것일 뿐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러한 무지와
두려움의 미망에 빠져있으니 도를 깨치는
것이 어렵다고 해야 맞는 말이 된다.
깨달은 자에게야 쉽지만 깨닫지 못한
자에게는 그렇게 어려울 수 없고, 황당해
보일 수 없다.
그럼 이런 말을 하는 나는 깨우친 자인가?
아니다. '깨우침'이 무엇인지 알고 있을
뿐 깨우쳤다고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깨우쳤다고 여기는 그 자체가
깨우침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냥 깨우침이 무엇인지 알고, 그 깨우침이
삶에 어떻게 적용되는지 관찰하고 교정해
나가는 과정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깨우쳤다는 말은 성립되지 않는다.
그런 사람에게 속지 말라.
깨우친 대로 살려고 노력하고 있어서
날마다 변화되고 성장해가고 있는지를
점검해 보면 금방 그 정체가 탄로난다.
그런데 또 그러고 있을 이유는 뭔가?
내 갈 길이 바쁜데 말이다.
第 263事 福 4門 和 5戶
(복 4문 화 5호) 省事(성사)
省事者(성사자)는
事之劇自去也(사지극자거야)라
衆人曲路多岐(중인곡로다기)하고
險路多石(험로다석)하여
雖窮術不能省事
(수궁술불능성사)하고
惟哲人執事(유철인집사)를
如太陽臨殘雪(여태양임잔설)하여
不見其消而自消
(불견기소이자소)니라
성사(省事)란
일의 어려움이 저절로
제거되는 것이니라
어리석은 사람은
가는 길에 굴곡과 갈래가 많고
가는 길이 험하여 돌이 많음 같아
비록 기술을 다해도 능히
그 어려움을 제거하지 못하느니라
오직 지혜로운 이는
일을 집행함에 있어서
태양이 쌓인 눈을 녹임과 같이
그 어려움이 눈에 보이지 않으나
저절로 사라지게 하느니라
아주 중요한 이치가 하나 등장하는데
매우 쉬우면서도 잘 안되는 이치다.
살필 '성'은 '진지하게 살피다'는 의미도
있지만 '깨우치다'는 의미도 있다.
여기서 '일을 진지하게 살피면 어려움이
저절로 제거된다'고 하면 말이 안된다.
'깨우침으로 지켜보면 문제가 저절로
해결되는 것을 볼 수 있다'고 하면 맞다.
그러나 이 또한 보통 사람들에게는 황당한
말이 되고 만다.
'무슨 지켜보고 있는데 문제가 해결된다는
말인가? 문제가 있으면 그 원인을 찾아
노력을 해야 해결이 되지 그냥 지켜 보고
있으면 해결된다니 엉터리 궤변이다'라고
반응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래서 이러한 가르침은 쉽게 내팽개침을
당한다. 그러나 그래도 소수는 이러한
가르침을 버리지 않고 진지하게 적용해
보려고 노력을 한다. 그런 사람이 진리의
혜택을 받고, 세상에 빛을 비추어 줄 수 있다.
이런 자세가 안 갖추어져 있는 사람에게는
아무 것도 기대할 수 없다.
'지켜보기'
최근 양자물리학에서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고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 이론이 있다.
이름하여 'double slit experience'라는 것인데
유투브 등에서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니 당장 한 번 찾아보라.
빛의 속성이 입자인지, 파동인지를 확인하기
위해 행한 실험인데 이상한 결과가 나왔다.
'관찰자'가 보고 있을 때는 입자로, 보지 않을
때는 파동의 속성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 무슨 황당한 말인가? 세상에 최첨단 과학이
이런 이상한 이론을 진리라고 발표하다니...
미안하지만 사실이다.
지켜보고 있으면 입자로, 안보면 파동으로...
이 놀라운 발견은 과학이 진리를 증명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이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설명할 여유가 없다.
그들의 수고한 결과만 받아와서 응용하면
될 일이다.
명상에도 '비파사나 명상'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는 '집중'이라는 일반적인 방식을 쓰지 않고
'지켜보기'의 방식을 쓴다.
그냥 지켜보는 것이다.
생각도 지켜보고, 마음에서 일어나는 감정도
지켜보면 되는 것이다.
보통 사람들은 생각을 지켜보지 못한다.
잡생각이 끌고 다니는데로 끌려 다닌다.
그래서 명상을 해도 잡생각만 하다가
끝을 내고 만다. 그러니 재미도 없고 지루할
수 밖에...
생각을 지켜보면 놀라운 현상을 경험하게
되는데 생각이 없어진다는 사실이다.
생각이 없어지니 감정도 없어지고
번뇌나 불안 등도 사라진다.
그리고 우리가 가졌던 고유의 파동과
생명의 흐름이 나타난다.
고통의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그러나 원리를 같다. 지켜보기 어려워서
힘들지 지켜볼 수만 있으면 고통은 더
이상 고통으로 활약하지 않는다.
중화되어 버리고, 초월해 버리는 것이다.
보통 사람들은 이런 말이 황당하기
짝이 없겠지만 도를 닦는 사람에게는
전혀 이상하지 않게 들린다.
깨달음으로 지켜보는 것이 어려움을
극복하는 답이다. 문제를 내가 원하는
방향, 고통이 없는 방향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오히려 더 큰 불안과
고통을 야기한다.
그러나 지켜보기에 충실하게 되면 환란과
고통의 본질을 파악할 수 있다. 사실
알고보면 환란과 고통은 그 자체로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로 생명과 평안을 누리도록
계획된 배경역할을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마치 빛을 드러내기 위해 어두움이 먼저
있어야 하는 것과 같고, 물과 음식의 맛을
절실하게 느끼기 위해서는 목마름과 주림이
전제되어야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훈련을 통해 진리와 사랑,
생명, 평화 등 가장 고상한 가치들을 체험하기
위해 이 땅에 왔다.
그런데 이러한 것들을 악한 것으로 보고
무조건 피하려고만 한다면 그것이 사실
황당한 일이다.
또 조금만 더 생각해 보면 지나친 불안과
염려는 필요없음을 자연스럽게 알 수 있다.
고통이 무섭고 싫은 것은 이해가 간다.
그러나 잘 생각해 보라.
우리의 육신이 당하는 고통은 사실
한계가 정해져 있다. 어느 한계에 이르면
전원이 꺼지도록 설계되어 있기 때문에
불안으로 고통을 증폭시킬 필요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사실은 환란이나 어려움, 고통 등은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원하는대로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원래 그것들이 악한 것도 아니고,
없어져야 할 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니 문제가 근원적으로 해결되는 것이다.
그런 수준에 이르게 되면 죽음 조차도 두려워
하거나 거부할 이유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니 그보다 확실한 답이 어디에 있을까?
물론 평온한 상태에서 고통과 죽음까지
지켜보는 수준에 이르기 위해서는 삶과
죽음의 본질도 꿰뚫어 보는 지혜와 그 둘의
경계를 어려움 없이 넘나들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가능하기에 아무나 이를 수 있는
수준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나은 답이 없는데
어떻게 할 것인가?
그래서 도는 닦을만 하고, 모든 것을 다
투자해서라도 진리는 깨우칠 만하다.
[출처] 참전계경 제263사|작성자 푸른 오솔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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