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참전계경 제264사 -鎭怒(진노) 본문
참전계경 (參佺戒經),
8理, 366事를 통한 인생지혜 탐구 276
보통 사람들은 자신에게 억울한 일이
발생하면 그 부당함을 알리고 진실을 밝혀
그 억울함을 풀고 부당한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애를 쓴다.
만일 그 일이 자기 힘만으로 여의치 않으면
가족과 가까운 주위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하고, 억울함이 심할 경우에는 법에
호소하여 그 억울함을 풀어달라고 탄원을
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을 취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기 때문에 잘못은 아니다.
그러나 이런 당연한 반응만으로는 문제가
깔끔하게 해결되지 않는다. 아무리 나중에
그 억울함이 풀려도 이미 받은 피해와
상처는 돌이킬 수 없기 때문에 후유증이
적지 않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한 단계 나아간 해결책은 그 억울한 일이
발생한 근원을 되짚어 보고, 최선의 방책이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해 보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전생의 '업보'로 돌림으로 너무
억울해 할 것 없으며 그런 억울함을 통해
카르마가 해소되기 때문에 묵묵히 수용하는
것이 낫다고 가르친다.
물론 이 가르침이 옳다고는 단정할 수 없지만
효과면에서는 훨씬 나을 수 있다. 적어도
피해의 불꽃을 확산시키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성경에서는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답다'(베드로전서 2:19)고 한다.
하나님의 주권과 사랑에 대한 믿음이 강하면
억울한 고난에 대해 이렇게 승화시킬 능력이
나타난다. 하나님의 공의가 반드시 시행되어
자신의 억울함을 풀어줄 것을 믿게 되고,
나아가 이러한 억울함을 참고 오히려 악을
행한 자를 긍휼히 여기고 용서하는 경지로
나아갈 수 있는 기회로 삼는 것이다.
예수의 고난에 동참할 기회로 삼는다면
오히려 이런 일은 그에게 도움이 될 수있다.
그러나 아무나 이런 믿음과 지혜를 갖지
못하기 때문에 여전히 대부분의 사람들은
억울함을 어떻게든 풀어야 하고, 누명을
벗어야 한다고 확신하고 산다.
그러나 결과는 기대한 바대로 가지 않는
것이 대부분이며, 비록 억울함을 풀어도
남는 것이 없게 된다.
第 264事 福 4門 和 6戶
(복 4문 화 6호) 鎭怒(진노)
鎭怒者(진노자)는
嗔怪不及於己也
(진괴불급어기야)라
有不善不信(유불선불신)이면
人必責己(인필책기)하고
或無不善不信 (혹무불선불신)라도
錯怒有至(착노유지)니라
有和德則無不善不信人
(유화덕즉무불선불신인)하여
人且信之(인차신지)하고
錯怒亦不至(착노역부지)니라
진노(鎭怒)란
남의 부당한 분노가
나에게 미치지 않게 함이니라
선함도 없고 믿음도 없으면
반드시 나에게 책망이 돌아올 것이요
혹 선함과 믿음이 없지 않아도
잘못 알고 꾸지람이 나에게
돌아오는 경우가 있느니라
그러나 온화함과 덕이 있으면
선함과 믿음이 없지 않게 되어
남이 나를 믿게 되고
잘못된 노여움도 미치지 않느니라
참전계경의 지혜는 또 하나 좋은 길을
제시하는데 바로 '예방하는 비결'이다.
과연 가능할까 싶지만 실제로 가능하며,
그 효과에 대해서도 많은 사람들이 증거한다.
잘못하면 꾸지람과 책망이 임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니 이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가 없다.
성경에서도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라고 해서
죄를 지었으면 응당 벌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한다. 거기에는 인내도 없고,
지혜도 없다. 그저 잘못에는 이런 벌이
따르는구나 하는 깨우침만 있을 뿐이다.
그런데 악하게 하지 않고, 속인 일도 없는데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비난과 책망을
받을 수가 있다. 인간은 모두가 불완전하기
때문에 내가 오해를 할 수 있고, 또한 상대방이
오해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심지어는 모함하는 자, 중상모략으로 억울하게
몰아가는 자들도 적지않게 존재하기 때문에
그저 마음 놓고 살아갈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최선은 바로 예방하는 것인데
참전계경은 그 예방법으로 '온화함과 덕'을
제시하고 있다.
착함과 신실함 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도 상당한 예방효과를 내고, 문제를
해결하는데도 큰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이나
그래도 좀 아쉬운 수준이다.
이보다 한 단계 높은 수준, 그리고 예방까지
가능한 수준은 '온화함과 덕스러움'이라고
한다.
그럼 착함과 온화함, 믿음과 덕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 착함과 믿음은 이론적이며, 심정적인
용어라면 온화함과 덕은 실천적이고 행위로
나타난 증거이다.
그러니까 성품이나 생각 수준에 머물러서는
효과를 제대로 낼 수 없다는 것이다. 반드시
외부적인 행위로 나타나서 온화함의 빛이
널리 퍼지고, 덕의 향기가 뭇사람들에게
알려져야 만이 부당하고 억울한 일을
막아낼 수 있다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그렇지 않은가?
평소에 늘 온화하고 덕을 베풀게 되면
누가 그를 함부로 모함을 하고 억울한 일로
몰아가겠는가?
혹시 악한 자가 그렇게 몰아간다 해도
주위에서 막아줄 것이요, 남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해명하고 변호해 줄 것이다.
[출처] 참전계경 제264사|작성자 푸른 오솔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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