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참전계경 제262사 -勿疑(물의) 본문
참전계경 (參佺戒經),
8理, 366事를 통한 인생지혜 탐구 274
'심은대로 거둔다'는 말은 하늘의 이치를 요약한 것이다. 여기서 황금율로 불리는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유명한 말씀이 나온다.
불교나 유교 등에도 같은 교훈이 있다.
'네가 싫은 것은 남에게 행하지 말라' 는 등으로 다양하게 표현된다.
己所不欲 勿施於人
요행을 바라는 어리석은 심리는 '적게 심고 많이 거두는 꾀'를 부추기며, 마치
그것이 지혜인 것처럼 사람들을 유혹한다.
'최소의 투자로 최대의 효과'를 내는 것이 경제원칙의 기본으로 여기는 의식은
이미 그 암담한 미래를 예고하고 있다. 산술적으로는 그럴 수 있다.
적게 투자하고 많이 거두는 일이 어느 시점, 어느 공간에서는 가능할지 모르나 한단계
높은 차원에서 보면 결국은 원래대로 되돌아가게 되어 있다.
물론 이렇게 환원되는 것은 물질적인 면을 말한다. 그러다보니 사람들이 또 꾀를 내어
내가 사는 동안 내가 사는 지역에서만 문제가 없으면 요행히 이런 자연의 균형을
피해갈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물론 이 또한 맞는 말일 수 있다.
어떤 사람은 평생 일 안하고 놀고 먹는가 하면, 어떤 지역에서는 아무리 일해도 먹고
살기조차 힘든 곳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하늘의
이치는 맞지 않고 불합리하다고 판단하여 그 이치를 거부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모르고 하는 소리요, 어리석은 판단일 뿐이다.
균형은 상시 이루어진다.
우리의 행, 불행이 외형적인 것들에 의해 갈리지 않고, 마음의 상태가 본질이라는 것을
알면 외적으로 많이 가지고, 못가지고는 차별이나 불균형으로 볼 수 없는 것이다.
없는 가운데 행복이 가능하고, 많은 것이 도리어 근심을 더해줄 수 있음을 알면
판단을 달리 해야 한다.
답은 하늘의 이치에 대한 올바른 깨달음을 통하여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것에 있다.
물론 이것이 정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세계를 나누어 균형을 이루는 것으로 위로를
삼을 수 있다. 부자와 거지 나사로 이야기처럼 이 세상에서 누린 자는 저 세상에서 고통을
당하고, 이 세상에서 고통을 당한 자는 저 세상에서 위로를 받는다고 해도 맞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가르침은 일시적 위로와 소망은 될 수 있지만 손해가 너무 크다.
답은 물질적인 것이 본질이 아니다라는 것을 깨닫는데 있다.
물질은 방편이요 수단일 뿐이며, 본질을 깨우치도록 하기 위해 도우미 역할을
하는 것이지 결코 그 자체가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지 못한다.
그래도 물질이 좋고, 이 세상에서 즐기는 것이 탐이 난다면 어쩔 수 없다.
자기 결정과 삶에 대해 책임만 지면 된다. 비록 그 보응이 끔찍할지라도 말이다.
第 262事 福 4門 和 4戶
(복 4문 화 4호) 勿疑(물의)
勿疑者(물의자)는
勿我疑人(물아의인)하면
勿人疑我也(물인의아야)라
我以中和接人(아이중화접인)이면
人亦以中和遇我
(인역이중화우아)니라
此誠彼信(차성피신)하면
彼誠此信(피성차신)하여
和氣凝而不散(화기응이불산)니라
물의(勿疑)라는 것은
내가 남을 의심하지 않으면
남도 나를 의심하지
않는다는 뜻이니라
내가 균형과 조화로 남을 대하면
남도 나를 그렇게 대하느니라
이쪽의 정성을 저쪽이 믿으면
저쪽의 정성을 이쪽이 믿게 되어
조화로운 기운이 응어리져서
흩어지지 않느니라
여기에 나오는 가치를 점검해 보라. 물질적인 것은 전혀 없다.
모두가 정신적인 것이요, 보이지 않는 차원의 속성들이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이 우리의 행, 불행을 좌우한다.
남의 의심을 받는 것만큼 괴로운 일이 또 어디에 있을까?
또 남이 나를 편견과 고정관념으로 대하면 그 또한 얼마나 괴로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내 정성과 진심을 믿어주지 않고, 도리어 오해를 하고 거부를 한다면
살 마음이 안 생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원인은 상대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나에게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내가 믿어주지 못하기 때문에 남이 나를 의심하는 것이며, 내가 균형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에 남도 나에게 그렇게 대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내가 남의 정성을 믿지 못하기에 남들도 나의 정성을 신뢰하지 않는다.
그런데 왜 자신을 돌아보고 바꿀 생각은 않고 남들이 잘못한다고 탓하는 소리만 이렇게 많은가?
지금 세상이 온통 서로에 대한 비난과 불평으로 가득한데 안타깝게도 그 원인을 찾지 못하고
있으니 답도 제대로 나올리 만무하다. 모두가 주장하는 것은 '네가 먼저 잘하면 나도
잘해 주겠다'고 한다. 이 말은 이미 의심과 불균형, 부조화, 무성의가 다 들어있는 말이기
때문에 좋은 결과를 기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런데 내 속에 이런 불안과 두려움, 욕심이
있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을 믿고, 정성을 다하며 살 수 있겠는가?
두려움은 '이러다가 나만 손해보면 어떻게 하나? 나만 바보 되는 것 아닌가?'하는 생각을
지혜라고 속인다. 이런 경우에 그렇게 하지 말고 먼저 믿어보라,
먼저 잘해주라고 권면을 하게 되면 도리어 내가 의심을 받게 된다.
'너도 저 편이구나'하고 의심을 하거나 '너나 그러다가 속고 손해보고 살아라'하고 욕을
먹을 것이다. 따라서 이런 권면들은 이제는 아무런 효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한단계 더 깊은 차원으로 일깨워야 한다. 남이 나에게 잘해 줄 것을 기대하지 말고,
너 자신이 의심과 불만에 빠지지 않도록 지키라고 권면하는 것이 낫다.
그러니까 의심하고 불평하면 그 손해는 자기자신에게 돌아간다는 것을 일깨우는
것이다.
조금 의식이 열리고, 지혜가 있는 사람이라면 이런 말을 이해하고 돌이킬 확률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깨우침도 손해를 막는 수동적인 차원일 뿐 적극적이고 생산적인
조치는 아니다. 그럼 보다 깊은 진리가 주는 답은 무엇일까?
그것은 두려움을 제거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손해를 입고, 고통을 당할까, 수치와 버림을
받을까 하는 그러한 두려움이 자리잡고 있는 한 그 어떤 가르침도 한계가 있고, 상황을 악화
시키게 되어 있다.
가장 확실하고 높은 진리의 깨우침은 두려움을 제거하고, 욕심도 없애는 차원이다.
성경에 의하면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았고, 영생과 영광을 다 받았기
때문에 잃을 것도 없고, 상처받을 것도 없다' 는 복음이고, 천부경의 가르침에 의하면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왔고, 우리의 본성은 태양과 같이 밝으며 우리 안에 이미
하늘과 땅이 하나로 거한다'는 깨우침이다.
의심 받음으로 흔들릴 것도 없고, 부당한 대우 때문에 고통을 받을 것도 없어야 내가
다른 사람을 믿고, 정당하게 대할 수 있지 조금이라도 손해볼 위험이 있다고 여기는 한
'네가 먼저 베풀고, 네가 먼저 믿으라'는 식의 가르침은 어리석게 들릴 뿐이다
[출처] 참전계경 제262사|작성자 푸른 오솔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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