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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참전계경 제251사-(복 3문 순) 順(순) 본문

천지인 공부/참전계경

참전계경 제251사-(복 3문 순) 順(순)

柏道 2019. 4. 15. 22:02


참전계경 (參佺戒經),
8理, 366事를 통한 인생지혜 탐구 263  
 


 '순천자는 흥하고, 역천자는 망한다'는
말들은 다들 하고 있지만 정작 무엇이
하늘의 이치를 따르는 것이며, 어떻게
하는 것이 하늘을 거스리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부정확한 상식과 피상적인
판단'에다 덜렁 맡겨 놓고 있다.
그러면서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불안과
경계신호를 억지로 누르며 괜찮을 거라는
억지 평안요법을 활용한다.
순간순간 그 방어벽을 뚫고 올라오는
내면의 소리에 대해서는 고개를 힘차게
흔들며 '아니야'라고 부정하며 세게 억압한다.
그렇게 해서 눌러지면야 다행이지만
그럴 수가 없다.
한번씩 위로 치고 올라오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게 누를 수 있는데 깊은
언저리에서 일렁이는 거대한 불안의
물결은 점점 파동이 심해지면서 위협을
가해온다.
아무래도 무언가 조치를 취해야 할 것
같은데 직접 자신이 파고 들어가 확인할
용기는 없다.
마찬가지로 제대로 된 전문가에게
진단을 맡겼다가는 필경 좋지 않은 통보를
받을 것이 분명하니 거기를 찾기도 싫다.
이럴 때 제일 돈 적게들고 편하게 찾을 수
있는 곳이 기존 종교조직이다.
사람도 많고 조직도 든든하며 그 대표자는
사회적인 명망도 있을 뿐 아니라 그가
내리는 처방은 대부분 희망적이라는
소문도 있으니 용기를 내어 본다.
아니나 다를까 그의 말을 들어보면 자신은
그리 잘못한 것도 없고, 하늘을 거스리는
행위를 하며 사는 것이 아니다.
기쁜 마음으로 '복채' 좀 두둑하게 내어
놓고 나오면 속이 후련하며, 한 며칠은
불안을 내려놓고 지낼 수 있다.
그래서 거기를 찾기 잘했다고 여기면서
가던 길을 계속 진행하려고 힘찬 각오로
큰 걸음을 내딛는다.
그런데...웬 걸 또 다시 밀려오는 거센 물결,
아니 이번에는 더 크고 가깝게 느껴진다.
아! 이를 어쩌란 말인가? 
 
第 251事 福 3門 順
(복 3문 순) 順(순) 
 
順不逆度也(순불역도야)라
貧不强取(빈불강취)하고
困不强免(곤불강면)은
順天理也(순천리야)라
答恩不之諛(답은부지유)하고
枉威不之屈(왕위부지굴)은
順人理也(순인리야)니라 
 
순(順)이란
법도를 거스리지 않음이라
가난해도 빼앗아 취하지 않으며
곤란해도 억지로 벗어나려
하지 않는 것이 하늘의 이치를
따르는 것이니라
은혜를 보답함에 아첨하지 않으며
위협에도 굴하지 않는 것이
인간의 도리를 따르는 것이니라 
 
모두들 자신은 양심적이며, 천리를
거스리는 삶을 살지 않는다고 자부한다.
대개 그 근거를 들어보면
'열심히 정직하게 땀흘려서 벌어 먹고
살려고 하고,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으며
비록 실수로 잘못은 저지르지만
의도적으로 남을 괴롭히거나 해치는 일은
하지 않고 산다'는 것이다.
여기에 조금 덧붙이면 '그래도 남들
어려운 일 보면 그냥 넘어가지 않고
도와 주기도 하며, 사회나 국가에 대한
의무와 책임도 성실하게 하는 편이다'라고
하면 자기가 생각해도 괜찮은 답이다.
많은 좋은 말들이 동원된다.
'정직' '성실' '봉사' '책임'...
그러니까 하늘의 이치를 거스리지 않고
순리를 따라 사는 삶이 바로 이런 삶이라는
전제가 들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위에서 소개한 내용과
같은 말은 들어본 적도 생각해 본적도 없다.
'가난해도 빼앗아 취하지 아니하며
곤란해도 억지로 벗어나려 하지 않는 것'이
하늘의 이치를 따르는 것이란다. 
앞에서 확인한 것처럼 보통 사람들은 
'가난하게 살지 않기 위해서 열심히 땀흘려
일하고 산다'고 하는데 이 답은 가난에
대해 '저항'하고 '거부'한다는 의미가 들어있다.
그래서 마땅히 열심히 일하고 벌어 가난에서
벗어나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하고 앞만
보고 달리고 있는데...이 무슨 말인가?
'가난에서 벗어 나려고 애를 쓰지 말라'
'곤경에서 벗어나려고 애를 쓰지 말라'고 한다.
물론 이 말씀이 결코 가난을 미화하거나,
곤경을 긍정하는 의미는 아니다.
특히 게으름이나 무기력한 수용을 뜻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가난이나 곤경은 인생이
살면서 반드시 겪게 되는 과정을 말한다.
그러니까 사람의 노력여하를
넘어서는 그런 차원의 인생경험이다.
생각해 보라. 안그런 사람이 어디있는가?
원하지 않는 좌절과 억울한 실패...
누구나 다 겪는 인생의 과정이다.
하늘은 이러한 과정을 누구에게나 다
예정해 두었다는 것이 진리의 증거다.
이러한 상황에서 '가난과 곤경을 벗어
나려고 억지로, 무리해서라도 몸부림을
치는 것'이 바로 하늘의 이치를 거스리는
것이라는 의미다.
그 때는 가난과 곤경을 수용하면서 그 속에
담긴 하늘의 뜻, 즉 '인내훈련'을 받으라는
하늘의 이치를 발견하고 기다리는 것이
하늘에 순응하는 것이 된다.
그럴 때 탐욕이 제거되고, 높은 차원의
세계에 대한 눈이 열리는 기회를 얻게 된다.
그런데 하늘의 이러한 깊은 뜻을 모르게
되면 가난과 곤경을 본능적으로 거부하게
되고, 어떻게든 벗어나려고 몸부림치게 될
것이며, 심지어 남의 것을 빼앗는
지경에까지 나아가게 되어 있는 것이다.
은혜에 아첨을 하는 것이나, 위협에 굴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거기에는 하늘이 원하는
인간의 도리는 사라지고 오직 물질이나 명예,
목숨등에 연연하는 추한 모습이 되니
이 또한 천리와 인도에 어긋난다.
물질이나 사람의 평가에 연연하지 않는
사람은 위협에 대해서 초연한 것처럼,
은혜에 대해서도 초연하다. 
많은 사람들이 은혜를 받으면 지나칠
정도로 그에게 호감을 가지거나
보답을 하려고 애를 쓴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불의한 청탁이나
불공정한 처사들이 나타나는 것이다.
상대방이 기쁜 마음으로 은혜를 베풀었으면
감사한 마음으로 받고 초연해져야 한다.
그래야 베푼 사람의 호의도 존중이 되고,
받은 사람도 그에 매이지 않게 된다.
원래 은혜는 되돌려지는 것이 아니다.
위에서부터 내려오는 것이기 때문에 내가
위에서 받았으면 가야 할 곳은 아래쪽이다.
그런데 아부를 하고 되갚으려 하게 되면
그것은 은혜를 손상하는 일이 되고, 만일
위에서도 되갚음을 기대하고 내렸다면
그것은 은혜라고 할 수 없으니 마찬가지로
무시하는 것이 낫다.
하늘의 뜻에 따른다는 것이 그리 쉽지 않다.
일단 하늘의 깊은 뜻부터 제대로 아는 것이
순서다. 얄팍한 생각을 가지고 자기 자랑이나
위로하는 수준에서 하늘의 뜻을 운운하는
것은 그 자체로 속병을 키우는 꼴이 된다.
한 번 이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보라.
'과연 나는 가난과 곤경에 처했을 때
벗어나지 않으려 해 본 적이 있는가?'
'과연 나는 은혜나 위협을 받았을 때
아부를 떨거나 비굴한 태도를 취하지 않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