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성경, 그 권위는 어디서 나오는가? 20 본문
성경, 그 권위는 어디서 나오는가? 20
누구나 다 아는 노아 홍수.
노아 가족 8명 외에는 다 죽었다.
그럼 당연히 노아홍수의
직접 원인을 제공한
네피림(히브리어로 떨어진 자들,
타락한 자들이라는 의미다)들도
멸절되었어야 맞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들은 살아남았다.
왜냐하면 가나안 땅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거기서 또 네피림 후손 아낙 자손
대장부들을 보았나니...'(민수기 13:33)
이런 모순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성경의 권위를 비난하고
공격하려는 의도가 아니니 안심하라.
그러나 거짓으로 옹호하거나
눈가림으로 속여서는 안된다.
일단 정직해야 소망이 있다.
또 당시 인구를 계산해 보면
그리 많지 않은 시대임에 분명한데
툭하면 수만, 수십만이 죽는다.
오늘날 발달한 무기로 전쟁을 해도
그만한 사상자가 나기 힘들고
인구대비로 치면 아무리 큰 전쟁이라도
50%이상 죽는 일이 없는데
웬일로 그 옛날 사사사대나
왕정시대에 툭하면 수만, 수십만인가?
학자들이 고민하다가
히브리어 용례에 문제가 있다며
1/10로 줄여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여전히 성경에는
수만, 수십만으로 그대로 남아 있다.
완전축자 영감이 무색하다.
신약으로 들어가도 마찬가지다.
제자들을 부르는 사건이 다르고,
구약을 인용하는데 그 출처가 이상한 곳이
한 두군데가 아니다.
예수님 조차도 구약을 인용하시는데
원문과 다른 곳이 있다.
내용적으로도 서로 어긋나며
복음서 저자들의 기록도 사뭇 다르다.
어떻게 같은 인물, 상황을 다루는데
그렇게 차이가 날 수 있을까?
나사로 부활이나 나인성 과부의 아들
살리신 일, 베데스다 못가의 38년된
중풍 병자를 일으킨 일,
날 때부터 소경된 자의 눈을 뜨게 하신 일,
가나 혼인잔치의 물로 포도주 만든 사건
등은 빼놓을 수 없는 사건 같은데
기록이 없는 복음서가 많다.
예수 출생 당시 호적명령도
없었고, 호적하러 일부러 고향에
가야 하는 규정도 역사의 자료에 의하면
없다고 한다.
어거지로 끼워맞춘 느낌이 매우 강하다.
이렇게 따져 들어가면
의심의 폭풍이 거세게 일어나
성경에 대한 믿음의 뿌리가 흔들릴 수 있다.
그렇다고 눈 감고,
머리만 덤불에 숨기고 안들키기를
바랄 수 있을까?
이미 종교로 밥줄을 삼은 자들에게는
제발 이런 의문과 문제제기가
안일어나기를 바랄 것이다.
일어나도 소규모로 일어나면
강압으로 일축해 버릴 수 있겠지만
대규모로 조목조목 따지고 들면
오래 버틸 수 없다.
아무리 큰 나무라도
밑둥치가 잘리면
허무하게 쓰러지고 말듯이
제아무리 역사와 조직, 수를 자랑해도
거짓 위에 세워진 종교는
그 붕괴가 한순간에 임한다.
9.11 쌍둥이 빌딩이 무너지는 것을
눈으로 보면서도 믿기 어려웠다.
그러나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음을
누구나 다 알고 있다.
진리는 전통과 조직, 수를
의지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그것들을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진리는 원래부터 지니고 있던 본질,
즉 의와 평강과 희락
또 지혜와 능력과 사랑의 빛을 발해왔고
지금도 발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영원히 발할 것이다.
이제 정직할 때가 왔다.
성경 속에 담긴 오류와 모순을
부정하려 해서는 안된다.
솔직하게 인정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이 지니는
특별한 권위에 대해서
이야기 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을 볼 줄 모르고, 말할 수 없으면
차라리 모른다고 해야 정직하다.
그럼 과연 성경의 권위는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첫째로, 성경의 가장 강력한 권위는
우리의 이성과 논리를 만족시키려 하지
않고 오히려 다른 세계, 즉 우리의 이성과 지혜로
알 수 없는 영적세계,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계시가 주어진다는데 있다.
그러니까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게 되면
자기 생각을 내려 놓고
하늘의 계시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혜택이요, 축복이다.
따라서 성경의 권위를 믿는 자는
당연히 세상의 재물이나 명예, 권력 등에
관심이 사라지고 오직 영적인 세계,
하나님의 나라에 포커스가 맞추어지게
되어 있다.
그런데 이를 깨닫지 못한 자들이
다시 이 땅에 종교왕국을 세우고 치부하며
명예와 권력을 추구한다.
다음으로, 성경의 권위는
그 깊이가 무궁무진하다는데 있다.
그러니까 그 누구에게도 성경을 통달했다,
다 열렸다는 헛소리를 하게 하지 않는다.
모순 같아 보이나 조화를 이루고,
말이 안되는 이야기 속에
천국의 비밀이 감추어져 있다.
알고 깨달았다 싶으면 다음 문이
기다리고 있고, 올랐나 싶으면
또 다른 산이 보인다.
따라서 성경을 이러니 저러니 논하는
자체를 성경 자체가 거부한다.
그저 겸손하게 연구하며
삶에 적용하여 열매로 증거하라고 한다.
지금은 열매를 맺을 시기다.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교리나 지식을
내세워 교만과 무지를 폭로하지 말고
의와 평강과 희락
지혜와 능력과 사랑의 열매를
스스로 확인하고 드러내야 한다.
셋째로, 성경의 권위는 누구라도
진리를 찾는 자에게 답을 준다는데 있다.
물론 안다고 하고 지식이 있다고
자랑하는 자들에게는 암흑을 내릴 것이다.
하지만 겸손하게 하나님을 알고
진리를 깨닫고자 하면
성경은 그에게 빛을 발하여
구원을 얻게 한다.
분야와 영역, 상황이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아무 문제가 안된다.
달라도 근원이 같고 본질이 같기 때문이다.
그 빛을 받은 자는
성경의 모순과 오류도 사랑할 수 있다.
오히려 그게 멋이고 정직이며
아름다움이기에....
그리 많은 지식이 필요하지 않다.
진리를 사랑하여 겸손히 구하는 자에게
성령께서 기가막히게 상황과 수준에 맞게
인도하신다.
그래서 말씀을 사랑하여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 만들고
하늘 본향을 사모하여
늘 그 나라를 생각하게 하며
이 땅에 보내신 목적과 사명을
명홛히 깨닫고 그 일에 묵묵히 힘씀으로
하늘의 뜻이 자신을 통해 이루어지게 한다.
예수가 그랬던 것 처럼...
누구나 다 아는 노아 홍수.
노아 가족 8명 외에는 다 죽었다.
그럼 당연히 노아홍수의
직접 원인을 제공한
네피림(히브리어로 떨어진 자들,
타락한 자들이라는 의미다)들도
멸절되었어야 맞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들은 살아남았다.
왜냐하면 가나안 땅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거기서 또 네피림 후손 아낙 자손
대장부들을 보았나니...'(민수기 13:33)
이런 모순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성경의 권위를 비난하고
공격하려는 의도가 아니니 안심하라.
그러나 거짓으로 옹호하거나
눈가림으로 속여서는 안된다.
일단 정직해야 소망이 있다.
또 당시 인구를 계산해 보면
그리 많지 않은 시대임에 분명한데
툭하면 수만, 수십만이 죽는다.
오늘날 발달한 무기로 전쟁을 해도
그만한 사상자가 나기 힘들고
인구대비로 치면 아무리 큰 전쟁이라도
50%이상 죽는 일이 없는데
웬일로 그 옛날 사사사대나
왕정시대에 툭하면 수만, 수십만인가?
학자들이 고민하다가
히브리어 용례에 문제가 있다며
1/10로 줄여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여전히 성경에는
수만, 수십만으로 그대로 남아 있다.
완전축자 영감이 무색하다.
신약으로 들어가도 마찬가지다.
제자들을 부르는 사건이 다르고,
구약을 인용하는데 그 출처가 이상한 곳이
한 두군데가 아니다.
예수님 조차도 구약을 인용하시는데
원문과 다른 곳이 있다.
내용적으로도 서로 어긋나며
복음서 저자들의 기록도 사뭇 다르다.
어떻게 같은 인물, 상황을 다루는데
그렇게 차이가 날 수 있을까?
나사로 부활이나 나인성 과부의 아들
살리신 일, 베데스다 못가의 38년된
중풍 병자를 일으킨 일,
날 때부터 소경된 자의 눈을 뜨게 하신 일,
가나 혼인잔치의 물로 포도주 만든 사건
등은 빼놓을 수 없는 사건 같은데
기록이 없는 복음서가 많다.
예수 출생 당시 호적명령도
없었고, 호적하러 일부러 고향에
가야 하는 규정도 역사의 자료에 의하면
없다고 한다.
어거지로 끼워맞춘 느낌이 매우 강하다.
이렇게 따져 들어가면
의심의 폭풍이 거세게 일어나
성경에 대한 믿음의 뿌리가 흔들릴 수 있다.
그렇다고 눈 감고,
머리만 덤불에 숨기고 안들키기를
바랄 수 있을까?
이미 종교로 밥줄을 삼은 자들에게는
제발 이런 의문과 문제제기가
안일어나기를 바랄 것이다.
일어나도 소규모로 일어나면
강압으로 일축해 버릴 수 있겠지만
대규모로 조목조목 따지고 들면
오래 버틸 수 없다.
아무리 큰 나무라도
밑둥치가 잘리면
허무하게 쓰러지고 말듯이
제아무리 역사와 조직, 수를 자랑해도
거짓 위에 세워진 종교는
그 붕괴가 한순간에 임한다.
9.11 쌍둥이 빌딩이 무너지는 것을
눈으로 보면서도 믿기 어려웠다.
그러나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음을
누구나 다 알고 있다.
진리는 전통과 조직, 수를
의지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그것들을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진리는 원래부터 지니고 있던 본질,
즉 의와 평강과 희락
또 지혜와 능력과 사랑의 빛을 발해왔고
지금도 발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영원히 발할 것이다.
이제 정직할 때가 왔다.
성경 속에 담긴 오류와 모순을
부정하려 해서는 안된다.
솔직하게 인정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이 지니는
특별한 권위에 대해서
이야기 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을 볼 줄 모르고, 말할 수 없으면
차라리 모른다고 해야 정직하다.
그럼 과연 성경의 권위는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첫째로, 성경의 가장 강력한 권위는
우리의 이성과 논리를 만족시키려 하지
않고 오히려 다른 세계, 즉 우리의 이성과 지혜로
알 수 없는 영적세계,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계시가 주어진다는데 있다.
그러니까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게 되면
자기 생각을 내려 놓고
하늘의 계시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혜택이요, 축복이다.
따라서 성경의 권위를 믿는 자는
당연히 세상의 재물이나 명예, 권력 등에
관심이 사라지고 오직 영적인 세계,
하나님의 나라에 포커스가 맞추어지게
되어 있다.
그런데 이를 깨닫지 못한 자들이
다시 이 땅에 종교왕국을 세우고 치부하며
명예와 권력을 추구한다.
다음으로, 성경의 권위는
그 깊이가 무궁무진하다는데 있다.
그러니까 그 누구에게도 성경을 통달했다,
다 열렸다는 헛소리를 하게 하지 않는다.
모순 같아 보이나 조화를 이루고,
말이 안되는 이야기 속에
천국의 비밀이 감추어져 있다.
알고 깨달았다 싶으면 다음 문이
기다리고 있고, 올랐나 싶으면
또 다른 산이 보인다.
따라서 성경을 이러니 저러니 논하는
자체를 성경 자체가 거부한다.
그저 겸손하게 연구하며
삶에 적용하여 열매로 증거하라고 한다.
지금은 열매를 맺을 시기다.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교리나 지식을
내세워 교만과 무지를 폭로하지 말고
의와 평강과 희락
지혜와 능력과 사랑의 열매를
스스로 확인하고 드러내야 한다.
셋째로, 성경의 권위는 누구라도
진리를 찾는 자에게 답을 준다는데 있다.
물론 안다고 하고 지식이 있다고
자랑하는 자들에게는 암흑을 내릴 것이다.
하지만 겸손하게 하나님을 알고
진리를 깨닫고자 하면
성경은 그에게 빛을 발하여
구원을 얻게 한다.
분야와 영역, 상황이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아무 문제가 안된다.
달라도 근원이 같고 본질이 같기 때문이다.
그 빛을 받은 자는
성경의 모순과 오류도 사랑할 수 있다.
오히려 그게 멋이고 정직이며
아름다움이기에....
그리 많은 지식이 필요하지 않다.
진리를 사랑하여 겸손히 구하는 자에게
성령께서 기가막히게 상황과 수준에 맞게
인도하신다.
그래서 말씀을 사랑하여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 만들고
하늘 본향을 사모하여
늘 그 나라를 생각하게 하며
이 땅에 보내신 목적과 사명을
명홛히 깨닫고 그 일에 묵묵히 힘씀으로
하늘의 뜻이 자신을 통해 이루어지게 한다.
예수가 그랬던 것 처럼...
푸른오솔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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