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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참전계경 제213사-摧殘(최잔) 본문

천지인 공부/참전계경

참전계경 제213사-摧殘(최잔)

柏道 2019. 4. 9. 15:33


참전계경 (參佺戒經),
8理, 366事를 통한 인생지혜 탐구 225  
 
열심보다 중요한 것은 지혜이다.
바로 알지 못하고, 지혜가 없으면서
열심을 내게 되면 오히려 상황을 악화
시키게 되며 하늘을 거역하게 된다.
바울은 자기 민족에 대해서 열심은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어서 하나니의 의를
모르고 자기의 의를 세우려고 오히려 
힘을 다해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다고
탄식했다(로마서 10:2-3)
무지함이 열심과 동행을 하게 되면
끔찍한 일이 벌어진다.
따라서 무슨 일을 하기 이전에 반드시
하늘의 이치를 따져보고, 확인을 하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
예수의 위대한 선언 '원수를 사랑하라'
는 말씀이나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는 등의 말씀을 단순한
열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애를 써서
이 말씀을 실천해 보려고 노력을 할 것이다.
순수한 열정은 가상하지만 지식과
지혜를 따르지 아니하게 되면 반드시
역효과를 내게 되어있다.
더 큰 분노와 좌절에 빠지든지, 진리에
대한 불만과 불신으로 귀결되기 쉬운 것이다.
이 말씀의 의미를 먼저 깨달아야 한다.
왜 예수가 원수를 사랑하고,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오히려 축복하고
기도하라고 했을까?
이 말씀들은 결코 원수를 위함이 아니다.
그렇다고 억누르고 참아 도를 닦으라는
고행을 요구하는 것도 아니다.
하늘의 이치를 깨달으라는 의미가 이 속에
들어 있다. 당연히 하늘의 이치를 깨닫게
되면 이러한 일들을 자연스럽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말처럼 쉽지가 않고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그러나 그 탓을 지혜가 없고, 깨닫지
못하는 자신에게로 돌려야지 하늘이나
환경, 남에게 돌려서는 안된다.
같은 맥락의 말씀이 드디어 등장한다.
이미 앞에서도 이런 맥을 찾아 강조했지만
숨겨져 있었다.
그런데 213사에서는 비로소 그 비밀을
뚜렷하게 밝히고 있다.
정말 귀중한 지혜이니 주의깊게 
연구하고 묵상해 보자.
 
第 213事 禍 4條 傷 4目
(화 4조 상 4목)  摧殘(최잔) 
 
摧殘者(최잔자)는
拉朽枝也(납후지야)라
雖有嫌怨(수유혐원)이나
不忍於殘者(불인어잔자)는
仁界也(인계야)니라
蹈仁界則嫌怨自解
(도인계즉혐원자해)하고
福利自至(복리자지)라
若以拉朽之易(약이납후지이)로
飜然下決之(번연하결지)라도
未年春根復至(미년춘근복지)니라 
 
최잔(摧殘)이란
썩은 나무를 꺽어버리는 것이니라
비록 미움과 원한이 있더라도
잔인하게 대하지 않는 것이
어진 경지니라
어진 경지에 들어서면
미움과 원한이 저절로 풀리고
이로움과 행복에 저절로 이르게 되느니라
만약 썩은 가지를 꺽는 것 같이
쉽게 그리고 한순간에
상대를 무너뜨린다 해도
일년 못되어 봄에 다시 뿌리가
돋아나듯 미움과 원한이 생기느니라 
 
미움과 원한이 있어도 어진 마음으로
그 한을 상대방에게 풀지 아니하면
한 동안 괴로울지 모르나 얼마 안있어
신기한 체험을 하게 된다.
미움과 원한이 저절로 풀리는가 하면
곧 이로움과 행복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자체가 사랑의 세계로
들어선 것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되어 있다.
원수 갚는 일을 네가 하지 말고 하늘에
맡기라는 말씀은 하늘이 더 확실하게
원수를 갚아 시원하게 해 줄테니 기다리라는
의미가 아니다.
하늘의 이치를 알고 신뢰하여 참게 되면
그 '신뢰'가 주는 복이 자신에게 임하게 된다.
다시 말해서 원수를 갚는 일에 몰두함으로
온통 마음에 원수에 대한 생각, 복수를 향한
분노 등으로 채우게 되면 결국 불에 타는 것은
자신의 마음이 되기 때문에 지혜롭지
못하지만 하늘을 신뢰하고 맡기게 되면
그 신뢰감이 자신에게 힘이 되어주고,
소망이 되어주어 그것이 자신을 치료할 뿐
아니라 지혜로 변하여 자신을 행복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지혜가 열리면 이미 하나님이 심판을
행하고 계심을 깨닫게 된다. 그것도 아주
철저하고 무서운 심판을 행하고 계시다는
것을 보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미운 사람이 오히려 불쌍하게 보이고
그를 위하여 기도하게 될 뿐 아니라 심지어
용서와 축복까지 비는 차원으로까지
나아갈 수 있게 된다.
이 일은 하나님을 아는 만큼, 하나님의 공의와
능력을 믿는 만큼 효과를 나타내게 되어 있다.
급기야 최고의 사랑, 즉 하나님의 마음을
품는 경지까지 이르게 되면 원수는 존재하지
않게 된다. 그러니까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은
원수를 억지로라도 용서하고 품으라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 안으로
들어가라는 뜻이다.
사실 하나님에게는 원수가 없다.
아니 있을 수가 없다. 그래서 마귀 조차도
하나님은 적절하게 부리시고 활용하신다.
원수가 존재한다는 것은 아직 우리가
하나님의 성품과 경지에 이르지 못함을
반증하는 것일 뿐이다.
물론 말이 쉽지 실제로 삶에 적용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다. 그러나 어렵다고 해서
멀리 두는 것 또한 지혜가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하여 이런 경지까지
가능하다고 하시며 손을 내밀고 계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