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참전계경 제204사-戕主(장주) 본문
참전계경 (參佺戒經),
8理, 366事를 통한 인생지혜 탐구 216
일부러 강조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성적 욕구는 막강하다.
프로이트 같은 경우 모든 것을 성과 관련시켜 인간정신을 풀이하려고
하여 지나치다는 비판을 받았지만 아무도 그의 말을 무시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다들 그렇다고, 혹은 그럴만 하다고 동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킨제이 보고서를 통해 그동안 숨겨왔던 성의 적나라한 양상이 나타났을 때
사람들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나타나지 않고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지 알고보니 사람들은 속으로 뿐 아니라
실제로 성에 거의 미쳐있음이 드러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부인하며 역겨움까지
표출하면서 비난을 퍼부었지만 얼마 못가서 다들 항복하고 말았다.
부끄럽지만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가장 금욕적인 종교에서 가장 타락한 형태로
성이 폭로되었을 때 사람들은 경악했지만 서서히 무언가를 깨닫기 시작했다.
몇 십년 전 보스톤에서 일어난 사건, 즉 교구 신부들이 지속적이고 조직적으로
많은 소년들을 성추행하고 성폭행 사건이 미국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교회에서 가장 추악하게 여기는 동성애 뿐 아니라 심지어 상상도 하고 싶지 않은
아동성애까지 아주 변태적인 성이 신부들 사이에 만연해 있던 것이 세상에 폭로가
된 것이다.
중세 때 있었던 일들이 여전히 행해지고 있었다. 그것도 가장 엄격한 교리와 규율로
절제와 금욕을 잘한다는 카톨릭 신부들 가운데서 말이다.
그래서 최근에는 신부들에게도 결혼을 허용하자는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고
하는데 비단 지원자가 적어서 뿐 아니라 금욕수행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니까 비로소 적(?)의 무서움을 깨닫고 차라리 타협하는 것이 낫다는
입장으로 변경한 것이다.
세상은 벌써 야합하여 한 패가 되었는데 이젠 마지막 보루로 여겨지던 종교까지도
굴복하고 마는 상황에 이른 것이다. 결혼을 허용하는 목사들의 세계도 마찬가지다.
결혼도 음란함에 대한 대책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증거하며 천하무적의 위세를
몰아가고 있다.
第 204 事 禍 3條 淫 2目
(화 3조 음 2목) 戕主(장주)
戕主者(장주자)는
淫其婦而害其夫也
(음기부이해기부야)라
淫無智愚(음무지우)나
智戕也(지장야)는
鬼神質其謀(귀신질기모)요
愚戕也(우장야)는
日月質其頑(일월질기완)하니
風吹草動聲色自顯
(풍취초동성색자현)이니라
장주(戕主)란
음탕한 부인이 남편을
죽이는 것이니라
음탕함에는 지혜롭고
어리석음이 따로 없으니
지혜로운 자는 남편을 해하기를
귀신같은 꾀로 하고,
어리석은 자는 남편을 해하기를
해와 달 아래서 뻔뻔하게 하니
바람이 불면 풀이 흔들리듯이
음녀는 소리와 모습으로
스스로를 드러내느니라
성에는 지혜도 못이긴다고 한다.
물론 상대적인 지혜를 말하지만
그렇다고 가볍게 여길 문제가 아니다.
음탕에 빠지게 되면 눈에 보이는 것이
없어지고, 지혜의 빛까지도 꺼뜨려 버리는
지경에 이르게 되는데 놀랍게도
남자가 아닌 여자가, 그것도 남편이 있는
아내가 그런 상태에 빠져 심지어
남편을 죽이는 데까지 간다고 한다.
물론 그리 흔하지 않은 일이라며
너무 과장한다고 할지 모르나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수의 문제가 아니다.
강도의 문제를 말하는데
남자가 아닌 여자가, 그것도 남편까지
있는 상황에서, 지혜로움도 상관없이
남편을 수단방법 다 동원하여 죽이는데까지
나아갈 수 있다니...
도대체 이것의 정체가 무엇이기에
이렇게도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말인가?
이쯤 되면 이제 다 항복해야 한다.
버텨봐야 구차한 변명이요, 스스로 무지함을
드러내는 것 밖에 안된다.
여전히 안그런척 하고, 이런 일들은 아주 극소수
예외적인 일이라고 자꾸 발뺌을 하려고 한다면
성경을 들이대고 싶다.
그야말로 성경은 온통 이런 이야기로 가득차
있지 않은가? 심지어 영적인 차원으로까지
끌고 들어가 우상숭배를 음행과 직결시키는
것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성의 문제를 제대로 다루기 위해서는
민망하고 부끄럽지만 직면하고, 직시해야 한다.
그리고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자신의
이야기요, 단지 부끄럽다고 숨기고 아닌척
가릴 것이 아니라 솔직하게 드러낼 각오를
해야 한다.
그러지 않고는 성은 절대로 자기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을 것이며, 성을 모르는데
어떻게 생명과 영적인 세계에 대해서 알 수
있겠는가?
성경 중 아가서가 막강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데 아가서를 제대로 풀지 못하면
영적이니, 하나님이니, 사랑이니 하는 말들이
다 공허해 진다고 한다면 지나치게 들릴까?
그렇지 않다.
아가서를 진지하게 연구하고 풀어본 결과
이런 결론을 내릴 수 밖에 없었다.
성에 대한 이해는 인간이 하나님의 신성을
회복하는 마지막 관문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물론 가장 힘든 상대일 것이고...
[출처] 참전계경 제204사|작성자 푸른 오솔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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