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참전계경 (參佺戒經)제 65事- 替擔(체담) 본문
참전계경 (參佺戒經),
8理, 366事를 통한 인생지혜 탐구 76
명쾌하고 강한 진리의 힘을
느끼니 온 마음이 밝음으로 충만하다.
그 밝음이 미음을 평안하게 하고
고요함 속에서 잔잔한 설렘을 일으킨다.
의의 마지막 부분으로 넘어간다.
제 65事 信 1團 義 중에서
아홉번째 부분(1團 9部) 替擔(체담)에
대한 말씀이다.
信 1 團 9 部 (신 1 단 9 부)
제 65사 替擔(체담)
替擔者(체담자)는
爲人擔憂也(위인담우야)라
善人有冤(선인유원)하되
自不能伸(자불능신)하고
正人有急(정인유급)하되
自不能求(자불능구)하나니
哲人憫焉而(철인민언이)
擔憂者義也(담우자의야)라
'체담이란 다른 사람의 근심을
함께 나누는 것이라
착한 사람은 원통함이 있어도
스스로 풀지 못하며
올바른 사람은 다급한 일이 있어도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느니라
지혜롭고 밝은 이는
이를 측은히 여겨 근심을 함께 나누는데
이것이 의니라'
어떻게 이렇게 우리의 마음을 꿰뚫고 있을까?
착한 사람은 원통함이 있어도
스스로 풀지 못한다.
되갚아 줄만한 악이 그 속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혼자 발만 동동 구르고
속으로 괴로워하기만 한다.
정직한 자도 아무리 자기의 급한 일이 있어도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기 싫어서
그 고통과 손해를 고스란히 당하는 경우가 많다.
세상에는 이런 착하고 정직한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힘과 지혜가 없어서
손해보고, 뒤로 밀리는 자들이 아니다.
악이 없어서, 거짓을 못해서 그러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세상은 온통 악하고
부정한 자들이 판을 치고 있는 것 같이 보인다.
그래서 조급하고 불안한 사람들은
'악을 악으로 갚자'고 하는 선동에 흔들린다.
그래서 촛불을 들고, 피켓을 들고 나서지만
그 이상 과격하게 하지 못한다.
그러다가 교묘한 전략으로 이들에게
죄를 덮어 씌우려는 공작이 진행되고
결국은 착하고 바른 사람들이 더 고통을 당하게 된다.
조심해야 한다.
'당하고만 있지 말고 우리도 힘을 모아 대적하자'는
선동은 악한 자들로 몰아가려는 전략일 뿐이고,
저들의 악을 정당화 시켜주는 공작에 말려들 뿐이다.
8理, 366事를 통한 인생지혜 탐구 76
명쾌하고 강한 진리의 힘을
느끼니 온 마음이 밝음으로 충만하다.
그 밝음이 미음을 평안하게 하고
고요함 속에서 잔잔한 설렘을 일으킨다.
의의 마지막 부분으로 넘어간다.
제 65事 信 1團 義 중에서
아홉번째 부분(1團 9部) 替擔(체담)에
대한 말씀이다.
信 1 團 9 部 (신 1 단 9 부)
제 65사 替擔(체담)
替擔者(체담자)는
爲人擔憂也(위인담우야)라
善人有冤(선인유원)하되
自不能伸(자불능신)하고
正人有急(정인유급)하되
自不能求(자불능구)하나니
哲人憫焉而(철인민언이)
擔憂者義也(담우자의야)라
'체담이란 다른 사람의 근심을
함께 나누는 것이라
착한 사람은 원통함이 있어도
스스로 풀지 못하며
올바른 사람은 다급한 일이 있어도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느니라
지혜롭고 밝은 이는
이를 측은히 여겨 근심을 함께 나누는데
이것이 의니라'
어떻게 이렇게 우리의 마음을 꿰뚫고 있을까?
착한 사람은 원통함이 있어도
스스로 풀지 못한다.
되갚아 줄만한 악이 그 속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혼자 발만 동동 구르고
속으로 괴로워하기만 한다.
정직한 자도 아무리 자기의 급한 일이 있어도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기 싫어서
그 고통과 손해를 고스란히 당하는 경우가 많다.
세상에는 이런 착하고 정직한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힘과 지혜가 없어서
손해보고, 뒤로 밀리는 자들이 아니다.
악이 없어서, 거짓을 못해서 그러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세상은 온통 악하고
부정한 자들이 판을 치고 있는 것 같이 보인다.
그래서 조급하고 불안한 사람들은
'악을 악으로 갚자'고 하는 선동에 흔들린다.
그래서 촛불을 들고, 피켓을 들고 나서지만
그 이상 과격하게 하지 못한다.
그러다가 교묘한 전략으로 이들에게
죄를 덮어 씌우려는 공작이 진행되고
결국은 착하고 바른 사람들이 더 고통을 당하게 된다.
조심해야 한다.
'당하고만 있지 말고 우리도 힘을 모아 대적하자'는
선동은 악한 자들로 몰아가려는 전략일 뿐이고,
저들의 악을 정당화 시켜주는 공작에 말려들 뿐이다.
이를 정확하게 간파한 자가 인도의 비폭력 무저항주의자
마하트마 간디다.
그는 자신들이 폭력을 쓰면 폭력을 쓰는 자들을
정당화시켜 주는 것이 되기에 철저히 반대했다.
폭력을 당하고 참아야 저들의 악함을 폭로시키는
것이 된다고 하며 오히려 이것이 적극적인 항거라고 했다.
그러나 두려움과 연약에 매인 자들은
진리의 증거보다 미혹의 말에 더 솔깃하다.
결국 진리의 입을 막고 만다.
간디는 철저히 예수의 방법을 따랐다.
예수의 십자가는 무능이나 패배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러한 자리까지 두려움 없이 내려가고,
짓밟히는 가운데서도 원망하지 아니하며,
심지어 자기를 못박는 자들을 위해 용서를 구하는 기도...
그보다 강한 자는 역사상 없었고,
신들이라 할지라도 그러한 지혜와 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래서 예수는 탁월하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이 되었고, 승리의 증거가 되었다.
그런데 오늘날 예수를 믿는다는 자들이
다시 힘의 논리로 자기들을 증거하려고 한다.
크고, 많고, 높고, 세며, 화려하면 이기는 것으로
착각하고 부지런히 그 길로 달려가고 있다.
어리석은 교만으로 세상을 정복하려 한다.
세계를 복음화 시킨다고 큰소리치는 것을 보면
저런 무지함도 없다 싶다.
중세의 어리석은 십자군 출정의 교훈도 받지 못한다.
숫자 많이 모아 세력을 과시하면
세상이 함부로 무시 못하고 자기들의 말을 들을 것이라
생각하고 대중 집회를 그렇게 좋아한다.
참 웃기는 짓거리가 아닐 수 없다.
그들은 할 수만 있다면 무장을 할 것이요,
테러나 핵 공격도 얼마든지 하려 할 것이다.
왜냐하면 절대로 지고는 못살기 때문이다.
예수는 그들에게 있어서 큰 조직을 움직일 수 있는
영웅일 뿐이다. 그러니까 예수를 이용하여 자기 욕망을
채우려고 하는 것일 뿐 정작 예수의 말은 단호하게 거부한다.
아무리 예수가 반대의 길을 말해도
오히려 예수를 어리석다하며 화까지 낸다.
그리고 예수가 원하지도 않았는데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영광과 권위를
자기들의 뜻을 이루기 위해 좀 쓰겠다고 내어 놓으라고 한다.
그것 이용해서 더 강한 세력을 보임으로
다른 종교, 다른 사람들을 굴복시키겠다는 것이다.
이미 자신들이 악이라고 하는 그 악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다행스럽게도 그런 자들은 아주 극소수다.
많아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매우 적은데 워낙 설치다 보니 많은 것 같다.
여전히 지금도 착한 자들이 많다.
억울해도 그 말도 못하고,
원통해도 그저 울기만 할 뿐 어찌할 바를 모른다.
여전히 지금도 바른 자들이 많다.
자기가 급한데도 남들을 위해서 양보한다.
자기 문제보다 남의 문제를 해결하려 하다가
손해를 보기 일쑤다.
그러면서도 또 그런 상황이 생기면
남을 위해 또 희생한다.
참 아름다운 신성을 발휘하며 사는데
그들을 돕는 길은 원통함을
해결해 주는 것이 아니다.
급한 일을 처리해 주는 것이 아니다.
오늘 말씀이 지혜를 일깨워 준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법에 익숙한
사람들이 그들을 위로하는 것이다.
그들과 함께 울고, 함께 아파하면 된다.
그 이상 해주려고 할 필요도 없고
해서도 안된다.
하나님은 이 불의함이 판치는 세상에서
그 착함과 정직함을 지키라고 하셨다.
만일 해결한다고 힘으로 대적하고,
손해보면 바보라고 자기 것 먼저 챙기게 되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못한다.
예수는 힘이 없어 십자가 진 것이 아니다.
아버지의 뜻이기 때문에 십자가를 졌다.
예수는 속이 없어서 그들을 용서한 것이 아니다.
아버지가 그것을 원하셨기 때문에
예수는 아버지의 뜻을 따라 용서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온 것은
바로 그 인내를 배우도록 왔다.
시원시원하고 화끈한 무언가를 바라는 것은
자아의 욕구이다.
진리는 정말 답답해 속이 터질 지경으로
우리를 이끌어 간다. 그러면서 이런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겠는가고 묻는다.
그럴 때 정말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자는
소망 중에 인내한다.
보복을 기다리며 재림과 심판을 기다리는 것은
옛날 방식이고, 낮은 수준이다.
그들을 긍휼히 여기고 돌이켜 깨달음에 이르도록
기도하면서 기다리고 인내한다.
이러한 인내가 바로 예수를 닮았고,
하나님의 자녀의 멋을 잘 드러낸다.
억울한 것 말 못해도
그것 때문에 더 속상하지 말라.
성령께서 위로하시고, 주위에
그런 삶의 의미를 아는 자들이 함께 한다.
누군가 큰 사람이 내 마음 알아주는 것 자체로도
이미 원통함이 풀리지 않던가?
내 깊은 속마음, 즉 착해서 말못하고
정직해서 손해보는 그것 알아주는 이가
한사람이라도 있으면 얼마나 고맙던가?
이런 사람들이 많이 나와야 하는데
그들도 반드시 이 과정을 거쳐야 하기에
보기가 드물다.
혹시 이런 말씀에 좀 더 이해가 필요하다면
'MISSION'이라는 영화를 보라.
무엇이 진정한 능력이요,
지혜이며 사랑인지 큰 깨달음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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