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유란시아서 공부 414 (제3편) 71 본문
☐ 유란시아서 공부 414 (제3편) 71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로마서 8:1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로마서 8:28)
▶ 유란시아서 3:2.8---
The planetary creatures of God’s spirit indwelling,
scattered hither and yon throughout the universes of space,
are so nearly infinite in number and order,
their intellects are so diverse, their minds are so limited
and sometimes so gross,
their vision is so curtailed and localized,
that it is almost impossible to formulate generalizations
of law adequately expressive of the Father’s infinite attributes
and at the same time to any degree comprehensible
to these created intelligences.
Therefore, to you the creature,
many of the acts of the all-powerful Creator seem
to be arbitrary, detached,
and not infrequently heartless and cruel.
But again I assure you that this is not true.
God’s doings are all purposeful, intelligent, wise, kind,
and eternally considerate of the best good,
not always of an individual being, an individual race,
an individual planet, or even an individual universe;
but they are for the welfare and best good of all concerned,
from the lowest to the highest.
In the epochs of time the welfare of the part
may sometimes appear to differ from the welfare of the whole;
in the circle of eternity such apparent differences are nonexistent.
▶ 번 역 :
공간 우주의 여기 저기 흩어져 있으면서,
하나님의 영이 깃들어 있는 행성 피조물들은
그 수와 계급에 있어서 거의 무한하고,
지적인 능력은 큰 차이가 있으며,
그들의 지성은 극히 제한되거나 매우 천박하고,
그들의 시야는 매우 좁거나 지엽적이어서
아버지의 무한하신 속성을 적절하게 표현하는
일반적인 법칙을 만들거나
이들 피조 지성들에게 어느 정도 수준까지
동시에 이해시키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너희 피조물들에게는 전능하신 창조주의 많은 행위들이
임의적이고, 동떨어지거나, 드물지 않게
무정하고 잔인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내가 다시 확신을 가지고 말하건대 이는 사실이 아니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은 모두 목적이 있고, 지성적이며,
현명하고 친절할 뿐 아니라
영원의 차원에서 최선의 유익을 위해 고려되었다.
물론 각 개인이나 개별 인종, 각 행성이나 개별적 우주에
항상 그렇다고 할 수 없겠지만
가장 낮은 데서 최고 높은 곳에 이르기까지
최고의 복지와 최선의 배려가 베풀어진 것이다.
어떤 특별한 시기에는 일부 지역의 복지가
전체의 복지와 차이가 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영원의 순환 관점에서 보면 그런 명백한 차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 해 설 :
이 내용을 그리 어렵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도 흔히 발견되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극히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
사람은 태어날 때 거의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고,
행동도 똑 같다고 할 수 있을 만큼 차이가 없다.
그러나 그러한 동일성은 불과 몇 년 만에 깨어지게 되고
세월이 흐를수록 그 차이는 현격하게 벌어진다.
지성에서 뿐만 아니라 재능과 성격, 감정, 그리고 의지에서도
아주 뚜렷한 차이를 드러내는데
그것은 단순히 선천적인 속성 때문만도 아니요,
후천적 환경이나 교육 때문만도 아닌 것 같다.
타고난 기질만으로도 풀이할 수 없고,
우연이나 운에 그 근거를 둘 수도 없다.
정확한 원인을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나타난 현상을 통해서
우리는 그 뚜렷한 증거를 어렵지 않게 발견한다.
천재적인 학자나 발명가, 예술가 등으로
성장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기본적인 의사소통만 겨우 하면서
동물 수준의 지능을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런가 하면 성품이나 도덕성, 창의성 등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엄청난 차이를 낸다.
따라서 우리는 결과를 통해서
이러한 현상이 우리가 사는 사회 뿐 아니라
전 세계, 나아가서 우주 전체에도
이런 현상이 나타나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러기에 우리는 유란시아서가 제공하는
아주 복잡한 우주체계와 다양한 존재들에 대한 정보와 지식을
다 이해하지 못해도 받아들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차이 때문에 우리는 오히려
그 다양함을 즐길 수 있게 되고,
또한 그 무한한 다양성 속에서도 모두가
우주 아버지의 피조물이라는 통일성을 공유하며
하나 됨의 신비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이 둘 중의 어느 하나도 소홀히 여겨서는 안된다.
다양성을 복잡하고 골치 아픈 것으로 보고 배격하거나,
통일성을 획일화된 단조로움으로 오해하고 거부하게 되면
아름다움과 안정성을 잃게 되어
진리의 생명성이 사라지고 만다.
인간이 완전함을 향하여 성숙해 나간다는 말은
사실 이 둘 사이의 조화를 유지하며
점점 그 범위를 확대해 나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무조건 위로 올라가는 것만도 아니요,
마구잡이로 넓게 퍼지거나 깊이 파고 들어가는 것만이 아니다.
그렇다고 모든 초점을 하나에만 맞추어
다양성의 가지를 다 제거하려고 하는 것도
진리의 생명을 거부하는 것이요,
생명의 길을 역행하는 것이 된다.
온 우주가 파라다이스를 중심으로 무한히 확장되고 분화되듯이
우리의 의식도 그렇게 중심과 분화가 조화롭게 확장되어 가야하고,
우리의 삶도 중심을 잡고
다양한 경험으로 확장을 시켜 나가야 한다.
물질 우주의 중심은 파라다이스 섬이요,
존재와 인격의 중심은 영이신 우주 아버지시다.
그리고 물질 우주는 측량할 수 없을 정도로 무한하게
온 사방으로 뻗어나가 있고,
우주 아버지는 우주의 모든 존재를 다 품으시고 다스리신다.
그렇게 우주 아버지 안에 모든 만물이 존재하고,
모든 만물 안에 우주 아버지가 거하신다.
이러한 통일성과 다양성 때문에
지금 이러한 계시가 보편적인 효용성을 가지면서도
동시에 극히 제한적인 효과를 나타내게 된다.
모두를 위한 것임과 동시에 아무도 독점할 수 없다.
아무리 뛰어난 지성을 가진 존재라 할지라도
모든 것을 다 알 수가 없고,
아무리 낮은 지성을 가진 존재라 할지라도
가장 중요한 한가지,
즉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시다’는 진리는 충분히 알 수 있다.
그렇게 어린아이도 걸어서 건널 수 있으면서
동시에 코끼리도 헤엄을 쳐야하는 것이
진리의 강물이 가지는 신비한 속성이다.
이 유란시아서에는 가장 기본적이고 간단한 진리가 무수히
반복되고 있으면서 동시에 그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난해한 진리가 엄청나게 기록되어 있다.
그렇게 모든 사람들을 위한 계시이면서
아무도 다 알 수 없도록 감추어져 있다.
그래서 우리는 유란시아서를 통해서
가장 중요한 진리의 핵심을 붙들 수 있음과 동시에
평생, 아니 영원히 씨름해도 다 알 수 없는
무궁한 성장과 발전을 경험할 수 있다.
이 내용은 앞선 내용의 반복이요, 부연설명이다.
우리가 모든 것을 다 이해할 수 없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함부로 판단하고 단정하지 말라는 것이다.
특히 나타난 외형적인 현상 때문에
본질을 오해하거나 왜곡하지 말라는
간절한 호소도 이 속에 담겨있다.
아무리 겉으로 나타난 현상이 잔인해 보이고,
무자비해 보인다 할지라도
그것 때문에 우주 아버지의 사랑과 지혜, 자비하심에 대해
오해하지 말라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충고는 듣는다고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강조를 해도 의식 수준이 낮고,
보는 눈이 가려져 있으면 받아들일 수가 없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끊임없는 믿음 훈련이 필요하고,
탐구 의식이 요구된다.
믿음이 깊어지는 만큼, 그리고 지식과 이해가 높아지는 만큼
우리는 더 높고 멀리, 그리고 깊고 풍성하게 알고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그 혜택은 자신과 주위로 흘러가게 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아버지의 완전하심을 향해
성장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서
우리의 의식과 경험을 넓히고, 높이며,
길고 깊게 확장을 시켜나가야 한다.
그것이 생명이요, 사랑이다.
내가 높아지고 넓어질수록 혜택은 그만큼
나와 주위로 뻗어나갈 수 있다.
만일 내가 좁고 낮으면 혜택은커녕
나 자신과 주위에 폐를 끼치게 되고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밖에 없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 아버지는 우리에게
‘내가 완전하니 너희도 완전하라’고 명하신다.
왜냐하면 그 길 외에 사랑과 기쁨이 충만해질 길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명령은 의무나 요구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행복과 모든 존재의 행복을 위한
지혜와 생명의 요청이요,
우주 아버지의 자녀들에게서 나타나야 할 당연한 증거인 것이다.
( 181014일, 푸른 오솔길 곽현영 목사님이
카카오스토리에 올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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