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참전계경 (參佺戒經),8理, 366事를 통한 인생지혜 탐구 67 본문
참전계경 (參佺戒經),
8理, 366事를 통한 인생지혜 탐구 67
좀 더 이론을 전개해 보자.
바울은 하나님이 '예수 피를 근거로 우리의
지은 죄를 간과하시기로 하셨다'고 했다.
그렇게 하심으로 하나님 자신도 의로우시고,
예수를 믿는 자들도 의롭다 하려 하셨다고 기록한다.
이제까지 설명한 것은 하나님과 예수,
우리와의 연결고리에 대한 것이었다.
지금처럼 교회에서 가르치면 그 연결고리가
너무 약하다. 처음에는 감격하고 감사하고
눈물 콧물 흘리며 다짐하고, 각오하지만
그리 오래 못간다.
금방 다시 연약함과 정죄감에 빠지고
의무감과 자책감으로 괴로와하는 모습으로
돌아가 버린다. 이런 경험을 나도 수도 없이 경험했고,
오늘날 교인들을 보면 예수 믿음으로 받은 의는
거의 쓸모 없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나를 위해 대신 죽으셨다는 감격이
그리 오래가지 못하는 것이다.
특히 다시 죄로, 연약함으로 돌아가는 자신을 보면
오히려 더 죄송하고, 부끄럽다.
저렇게 피흘리고 돌아가셨다는데
나는 이게 뭔가? 하면서 심각한 자책에 빠지는 것이다.
그래서 변하고 달라지려고 몸부림을 치고,
거룩해지기 위해 애를 쓰나 번번히 좌절한다.
8理, 366事를 통한 인생지혜 탐구 67
좀 더 이론을 전개해 보자.
바울은 하나님이 '예수 피를 근거로 우리의
지은 죄를 간과하시기로 하셨다'고 했다.
그렇게 하심으로 하나님 자신도 의로우시고,
예수를 믿는 자들도 의롭다 하려 하셨다고 기록한다.
이제까지 설명한 것은 하나님과 예수,
우리와의 연결고리에 대한 것이었다.
지금처럼 교회에서 가르치면 그 연결고리가
너무 약하다. 처음에는 감격하고 감사하고
눈물 콧물 흘리며 다짐하고, 각오하지만
그리 오래 못간다.
금방 다시 연약함과 정죄감에 빠지고
의무감과 자책감으로 괴로와하는 모습으로
돌아가 버린다. 이런 경험을 나도 수도 없이 경험했고,
오늘날 교인들을 보면 예수 믿음으로 받은 의는
거의 쓸모 없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나를 위해 대신 죽으셨다는 감격이
그리 오래가지 못하는 것이다.
특히 다시 죄로, 연약함으로 돌아가는 자신을 보면
오히려 더 죄송하고, 부끄럽다.
저렇게 피흘리고 돌아가셨다는데
나는 이게 뭔가? 하면서 심각한 자책에 빠지는 것이다.
그래서 변하고 달라지려고 몸부림을 치고,
거룩해지기 위해 애를 쓰나 번번히 좌절한다.
예수 이전 율법에 매인 모습과 같아져 버렸다.
이런 상황인데도 교회 지도자들은 엉뚱한 일에
바쁘다. 무언가 가책을 건물과 수, 행사 등으로 메꾸려
하는 것 같은데 보기에도 안쓰럽다.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마치겠느냐?'는
바울의 탄식이 들리는 것 같다.
인터넷을 통해 어느 기독교 신문을 보니
'한국교회 어디서 길을 잃었는가?'하는 질문의
기사가 있는데 내가 보기에는 애초에 길을 잘못 들었다.
처음으로 돌아가 근본을 점검해야 하는 시점에 이른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모든 것을 부정하자는 것이 아니다.
이만한 시행착오와 오류를 경험했으면
정말 진지하게 복음의 본질을 다시 점검해볼 필요가
있지 않겠는가?
이제껏 맞다고 여겨온 부분을 두드려 보자는 것이다.
바울은 믿음과 의의 적용에 대해서
아브라함의 예를 들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어 의롭다 함을 받았는데
율법이 오기 전이었다고 강조한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행위와 상관없이
의롭다 함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는 자식이 없는 가운데서도
'네 후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다의 모래같이
많을 것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고,
특히 자신도 나이 많고 아내가 출산 불가능한 상태임을
알고도 하나님을 믿었다고 한다.
우리는 이런 말씀을 들으면서
'참 아브라함은 믿음이 좋다.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믿어야 된다'고 결론을 지어 버린다.
그런데 자신은 절대 그런상황의 1/10만 되어도
믿음은 온데간데 없다.
그러다 보니 아브라함을 부러워하고, 자신의 부족함을
자책하면서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만 바라고 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예수 믿음도
자신이 없어서 혹시 '너 가짜다. 지옥가라'할 것 같아서
오늘도 노심초사 하는 교인들이 많다.
도대체 아브라함은 어떤 기인이기에
이런 엄청난 믿음을 보여 우리의 기를 죽이는가?
결국 우리는 아브라함이나 다윗, 바울 같은
믿음의 위인들을 보면서 부러워하거나,
조금이라도 닮아가려고 노력하다가 생을 마쳐야 하는가?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믿음을 나에게도 달라고
기도하다가, 아무리 기도해도 그 수준이 안될 것 같으니
포기하고 보통 사람으로 살다가 가야 할까?
그렇게 살다 죽고 나서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기대하고,
예수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하시는 변호를
소망해야 할까?
모두 오해다. 그렇게 살면 안된다.
이전까지 충분한 고생을 했고, 시행착오를 했다.
이제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 합당한 답을 찾아야 한다.
효과없는 약 언제까지 계속 먹을 것인가?
결국 믿음의 조상이요, 모범이라고 하는
아브라함에게로 돌아가고,
아브라함의 믿음을 다시 점검해야 한다.
아브라함의 믿음의 비결은 무엇일까?
그에게 주어진 말씀들은 모두가 인간의 입장으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불가능한 말씀들이었다.
그 자체가 자연의 법칙, 인간에게 주어진 기능과도
전혀 안맞는 말씀들이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믿었고, 믿을 수 있었다.
답은 한가지다.
아브라함은 자신 안에 계신 하나님을,
하나님 안에 있는 자신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다른 말로 하나님과 자신이 둘이 아니요,
하나이며, 자신이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자녀임을 알았던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마치 하나님 자신에게
하시는 말씀처럼 들렸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인간의 몸을 입고 있는 것을 잊고
본성으로 하나님께 반응할 수 있었다.
아브라함은 분리된 자신으로 살면서
그 한계와 연약함을 절실히 체험했다.
아무리 노력해도 거기는 답이 없음을 안 것이다.
그가 찾아낸 답은 바로 근원으로 들어가
자신의 근원이 하나님이요, 자신과 하나님은
분리될 수 없음을 깨닫기에 이른 것이다.
그러고 나니 믿는 데 문제가 없었고,
의로움을 누리는 것이 당연한 것이 되었다.
오늘날도 우리의 구원은 이렇게 풀어진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고,
우리 안에 또한 그리스도가 계시며,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께서
계심을 깨닫게 됨으로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하나님과 연합된 자신을 발견하는 길 외에는
다른 길이 없는 것이다.
이 믿음이 의를 산출해 낸다.
그리고 이 의는 용기를 일으키고
이 용기는 결단으로 놀라운 일을 하게 하며,
그 어떤 것도 이 확신을 깨뜨리지 못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연합되어 있고,
하나님과 하나라는 믿음...바로 그것이
우리를 살릴 뿐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힘의 원동력이 된다.
지금 내 수준으로는 이 정도까지 밖에 설명 못한다.
난해하고 복잡해도 진리가 그런 것이 아니다.
진리는 정말 단순하고 간단한데
우리가 어렵게 만들어 놓고
또 어렵다고 불평을 한다.
답은 간단하다.
'우리는 하나님과 하나다'는 말이다.
이를 기독교 식으로 하면
'우리는 예수 안에서 하나님과 하나다'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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