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참전계경 (參佺戒經),8理, 366事를 통한 인생지혜 탐구 65 본문
참전계경 (參佺戒經),
8理, 366事를 통한 인생지혜 탐구 65
(지난 글을 잇는다)
글을 쓰다 보면 가는대로 따라가는 경우가 많다.
내 마음이라고 할 수도 있고,
성령의 인도라고도 할 수 있는데
그거야 별 상관없다. 내용이 중요하다.
내용에 진리성이 있는가를 나도 확인하며 나아간다.
참전계경에서 이렇게 '믿음과 의'의 관계에
대한 가르침을 만나게 될 줄 몰랐다.
특히 그 풀이에 감탄을 금할 수 없다.
'의는 큰 믿음에 부응하는 기운, 힘이다'
캬 기가막히다.
로마서 이야기로 돌아가자.
율법의 정죄아래서 벗어날 수 없는 인간,
그에 대한 하나님 아버지의 지혜는 어떻게 발휘되었을까?
성경은 독생자 예수와 그의 십자가 부활을
통하여 이를 해결하려 했다.
상당한 효과를 나타냈고, 동시에 부작용도 심하다.
오늘날까지 그 부작용이 광범위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도 문자와 전통에만 매어 달리니
유대인들의 오류에 또다시 봉착한 꼴이다.
성경을 다시 보자.
바울은 치밀한 논리로 모든 인간이 죄에 빠진 문제를
밝히고 율법의 한계에 대해서도 분명하게 판단을 내린다.
그리고 은혜의 복음을 제시하는데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자신의 의와, 우리의 의 문제를 동시에 해결 했다고
감격 속에서 선포한다.
바울의 고민은 우리의 문제가 아니었다.
하나님 자신의 의에 대한 문제였다.
율법은 하나님 자신의 의의 표현이다.
동시에 생명의 법칙이기에 이를 부정하거나
무시하는 것은 하나님이라도 안된다.
왜냐하면 자기 모순, 자기 부정이 되기 때문에
그러실 수 없다.
어떻게 스스로 정해놓고 스스로 어긴다면
완전하다고 하겠는가?
바꾸면 지혜가 문제가 생기고,
매이면 능력에 문제가 생긴다.
바울은 자기 입장에서 보니 하나님이 바로 이 딜렘마에
빠진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도대체 하나님이 이 딜렘마를 어떻게
해결하는지 궁금했는데 기가막힌 지혜가
나타나는 것을 보고 감탄하고 말았다.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여기서 말하는 '한 의'는 '다른 길을 통한 의'다.
그러니까 율법으로는 안되고, 다른 길을 내셨다는 말이다.
그런데 만일 이 길이 율법과 상충되면 안된다.
인간이야 상관 없지만 하나님 자신이 문제가 생긴다.
언제는 율법을 지키라 했다가,
언제는 믿기만 하면 된다고 하면 이건 모순이다.
지금 사람들은 자기 구원만 생각하고
이런 문제를 고민하지 않는다.
그러니 자연히 자기 구원에 대해서도 확실치 못하다.
하나님의 지혜로 연 다른 의에 대해서
제대로 풀어야 한다.
아무리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고,
죄가 없는 분이라고 해도 그가 우리 죄를 대신하여
벌을 받고 우리는 믿기만 해도 사함을 받는다는 논리는
쉽게 이해도 안되고 수용도 안된다.
믿으라고 고함을 치지만 불합리하게 여겨지고
믿기지 않는 것을 윽박지르면 어쩌자는 것인가?
그럴 것이 아니라 왜 반 이상의 사람들이
이 교리를 받아들이지 못하는지를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 할 것 아닌가?
자기들은 믿는다고 자랑하고,
안믿는다고 지옥간다 저주하면...
거 참...
그 하나님은 인간 갈라 싸움 붙이는 신인가?
진리는 우리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 자신의 문제이다. 하나님 자신이 걸리면
우리의 구원은 허사다. 하나님 자신이 모순을 일으키면
그 자체로 하나님 자격박탈이다.
바울은 분명하게 '하나님 입장'이 우선임을 알았다.
그래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셨다'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로마서 3:25-26)
반복해서 하나님 자신의 의로움이 앞섬을 나타낸다.
제발 내가 가는 천국을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의 나라가 합당한 진리에 섰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안그러면 실 컷 가 봐야 허상의 세계일 수 있다.
도대체 하나님은 어떻게
자기 모순을 극복하셨을까?
어떻게 살라고 주신 율법이 사망이 되며,
의를 위한 진리가 불의를 조장하게 된 상황...
물론 인간의 잘못이라 하지만 인간 또한 자신의 작품아닌가?
정말 우리 입장에서 보면 헤어나오기 어려운
자충수를 둔 것 같은 느낌이 들 수 밖에 없다.
그러나 하나님이 누구신가?
걱정할 것은 우리지, 하나님이 아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지혜에 귀를 기울이고,
마음을 열면 그 기가막힌 지혜를 볼 수 있다.
자충수를 절묘하게 활용하여
오히려 외통수로 몰아버리는 지혜...
그게 우리가 체험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역사다.
이것 맛보지 못하고 살면 허사다.
이것 맛보면 인생 멋지게 잘 산게 된다.
또 4000자에 걸릴 것 같지만 상관없다.
급할 것도 없고, 제한도 없으니 횟수만 늘이면 된다.
다시 하나님의 지혜로 가보자.
바울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 딜렘마를
확실하게 해결하셨다고 증거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신비한 언어들의 연속이다.
이제까지 들어온 교리와 좀 깊이나 의미가 다르다.
'죄인이지만 예수 믿고 죄사함을 받으면 죽어 천국갑니다.
예수 믿고 구원 받으세요'
이건 껍질 장사지 뭐가 복음인가?
자기 자신도 이 말씀의 의미를 모르는데...
하나님이 해결하신 특별한 지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피, 즉 십자가이다.
여기서 우리는 의식을 좀 새롭게 해야 한다.
'하나님, 예수' 이렇게 분리된 상태로
계속 풀이하면 엉뚱한 방향으로 나가게 되어 있다.
천부경의 도움을 좀 받아야 한다.
기독교에서는 삼위일체 교리를 통하여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요, 동등하다고 주장하지만
여전히 별개로 나뉜 인격에 대해서 설명이 어렵다.
그러나 우리 민족경전의 풀이를 빌리면
의미가 밝아진다.
하나님과 예수는 분리된 존재가 아니다.
한 근원의 다른 모양을 의미하는 것이지
우리처럼 아버지, 아들 두 개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예수는 하나님 자신이다.
그리고 한 단계 더 나아가야 한다.
예수와 우리의 관계다.
이 또한 마찬가지다.
예수와 우리를 다른 개체로 보게 되면
또 다시 말짱 도루묵이다.
'예수 안에 있는 우리'는 예수와 우리를 하나로
보게 하는 설명이다.
따라서 예수와 나를 동일시 하는 차원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진정한 구원은 없다.
하나님이 주는 선물만 받을 뿐이지,
참된 영생은 아니다.
이렇게 먼저 개념정리를 안해두면
아무리 풀어도 엉뚱한 방향으로 갈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이 작업을 먼저 한다.
사실 이 진리도 어려운 것이 전혀 아닌데
우리가 어두워서 이해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할 뿐이다.
천부경이나 바울의 증거를 통해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왔고, 하나님으로
돌아간다는 것만 확실하게 붙들어도
이런 설명이 어렵지 않다.
하나님과 예수를 동일시 하고 보면
예수의 성육신이나 십자가 사건은 하나님 자신의
사건이 된다.
아들 따로, 아버지 따로가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에 성령을 포함해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십자가 사건은 아버지, 아들,
성령 모두의 사건이 된다.
여기서 위대한 하나에서 셋으로 나뉘어도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석삼극 무진본)는
천부경의 지혜가 빛을 발한다.
아버지는 영원한 근원으로 계실 수도 있고,
아들과 성령으로 분리하실 수도 있다.
그렇다고 분화되거나 나뉜 것이 아니다.
아버지는 언제든지 근본으로 계실 수 있고,
마찬가지로 셋으로, 만물로 자신을 분화하실 수 있다.
그래야 하나님이지 무엇에든 매여 있으면 안된다.
하나님은 하나로 존재하심에서
둘, 셋으로 존재의 변화를 이루셨다.
그 중 하나가 아들로 표현된 예수이며,
그 예수는 또 모든 인간의 표상이요, 형제이다.
성령 또한 만물 속에 생명으로 거하시니
마찬가지 하나님의 속성이 그대로 들어있다.
하나님은 하나로 계실 때는 아무런 문제가 없으시다.
그런데 율법을 어기는 인간이 있으니 문제가 된다.
없앨 수도 없고, 포기해서도 안되는 존재다.
그렇게 하면 자기 부정이 된다.
사실은 이러한 말 자체가 필요가 없는데
하는 이유는 우리가 느끼는 것이 물질세계요
율법 아래 있으며, 고통과 두려움을 생생하게
느끼고 살고 있으니 이런 작업이 필요할 뿐이다.
또 4000자에 걸렸다.
다음 회로 넘어간다.
8理, 366事를 통한 인생지혜 탐구 65
(지난 글을 잇는다)
글을 쓰다 보면 가는대로 따라가는 경우가 많다.
내 마음이라고 할 수도 있고,
성령의 인도라고도 할 수 있는데
그거야 별 상관없다. 내용이 중요하다.
내용에 진리성이 있는가를 나도 확인하며 나아간다.
참전계경에서 이렇게 '믿음과 의'의 관계에
대한 가르침을 만나게 될 줄 몰랐다.
특히 그 풀이에 감탄을 금할 수 없다.
'의는 큰 믿음에 부응하는 기운, 힘이다'
캬 기가막히다.
로마서 이야기로 돌아가자.
율법의 정죄아래서 벗어날 수 없는 인간,
그에 대한 하나님 아버지의 지혜는 어떻게 발휘되었을까?
성경은 독생자 예수와 그의 십자가 부활을
통하여 이를 해결하려 했다.
상당한 효과를 나타냈고, 동시에 부작용도 심하다.
오늘날까지 그 부작용이 광범위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도 문자와 전통에만 매어 달리니
유대인들의 오류에 또다시 봉착한 꼴이다.
성경을 다시 보자.
바울은 치밀한 논리로 모든 인간이 죄에 빠진 문제를
밝히고 율법의 한계에 대해서도 분명하게 판단을 내린다.
그리고 은혜의 복음을 제시하는데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자신의 의와, 우리의 의 문제를 동시에 해결 했다고
감격 속에서 선포한다.
바울의 고민은 우리의 문제가 아니었다.
하나님 자신의 의에 대한 문제였다.
율법은 하나님 자신의 의의 표현이다.
동시에 생명의 법칙이기에 이를 부정하거나
무시하는 것은 하나님이라도 안된다.
왜냐하면 자기 모순, 자기 부정이 되기 때문에
그러실 수 없다.
어떻게 스스로 정해놓고 스스로 어긴다면
완전하다고 하겠는가?
바꾸면 지혜가 문제가 생기고,
매이면 능력에 문제가 생긴다.
바울은 자기 입장에서 보니 하나님이 바로 이 딜렘마에
빠진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도대체 하나님이 이 딜렘마를 어떻게
해결하는지 궁금했는데 기가막힌 지혜가
나타나는 것을 보고 감탄하고 말았다.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여기서 말하는 '한 의'는 '다른 길을 통한 의'다.
그러니까 율법으로는 안되고, 다른 길을 내셨다는 말이다.
그런데 만일 이 길이 율법과 상충되면 안된다.
인간이야 상관 없지만 하나님 자신이 문제가 생긴다.
언제는 율법을 지키라 했다가,
언제는 믿기만 하면 된다고 하면 이건 모순이다.
지금 사람들은 자기 구원만 생각하고
이런 문제를 고민하지 않는다.
그러니 자연히 자기 구원에 대해서도 확실치 못하다.
하나님의 지혜로 연 다른 의에 대해서
제대로 풀어야 한다.
아무리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고,
죄가 없는 분이라고 해도 그가 우리 죄를 대신하여
벌을 받고 우리는 믿기만 해도 사함을 받는다는 논리는
쉽게 이해도 안되고 수용도 안된다.
믿으라고 고함을 치지만 불합리하게 여겨지고
믿기지 않는 것을 윽박지르면 어쩌자는 것인가?
그럴 것이 아니라 왜 반 이상의 사람들이
이 교리를 받아들이지 못하는지를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 할 것 아닌가?
자기들은 믿는다고 자랑하고,
안믿는다고 지옥간다 저주하면...
거 참...
그 하나님은 인간 갈라 싸움 붙이는 신인가?
진리는 우리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 자신의 문제이다. 하나님 자신이 걸리면
우리의 구원은 허사다. 하나님 자신이 모순을 일으키면
그 자체로 하나님 자격박탈이다.
바울은 분명하게 '하나님 입장'이 우선임을 알았다.
그래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셨다'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로마서 3:25-26)
반복해서 하나님 자신의 의로움이 앞섬을 나타낸다.
제발 내가 가는 천국을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의 나라가 합당한 진리에 섰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안그러면 실 컷 가 봐야 허상의 세계일 수 있다.
도대체 하나님은 어떻게
자기 모순을 극복하셨을까?
어떻게 살라고 주신 율법이 사망이 되며,
의를 위한 진리가 불의를 조장하게 된 상황...
물론 인간의 잘못이라 하지만 인간 또한 자신의 작품아닌가?
정말 우리 입장에서 보면 헤어나오기 어려운
자충수를 둔 것 같은 느낌이 들 수 밖에 없다.
그러나 하나님이 누구신가?
걱정할 것은 우리지, 하나님이 아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지혜에 귀를 기울이고,
마음을 열면 그 기가막힌 지혜를 볼 수 있다.
자충수를 절묘하게 활용하여
오히려 외통수로 몰아버리는 지혜...
그게 우리가 체험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역사다.
이것 맛보지 못하고 살면 허사다.
이것 맛보면 인생 멋지게 잘 산게 된다.
또 4000자에 걸릴 것 같지만 상관없다.
급할 것도 없고, 제한도 없으니 횟수만 늘이면 된다.
다시 하나님의 지혜로 가보자.
바울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 딜렘마를
확실하게 해결하셨다고 증거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신비한 언어들의 연속이다.
이제까지 들어온 교리와 좀 깊이나 의미가 다르다.
'죄인이지만 예수 믿고 죄사함을 받으면 죽어 천국갑니다.
예수 믿고 구원 받으세요'
이건 껍질 장사지 뭐가 복음인가?
자기 자신도 이 말씀의 의미를 모르는데...
하나님이 해결하신 특별한 지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피, 즉 십자가이다.
여기서 우리는 의식을 좀 새롭게 해야 한다.
'하나님, 예수' 이렇게 분리된 상태로
계속 풀이하면 엉뚱한 방향으로 나가게 되어 있다.
천부경의 도움을 좀 받아야 한다.
기독교에서는 삼위일체 교리를 통하여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요, 동등하다고 주장하지만
여전히 별개로 나뉜 인격에 대해서 설명이 어렵다.
그러나 우리 민족경전의 풀이를 빌리면
의미가 밝아진다.
하나님과 예수는 분리된 존재가 아니다.
한 근원의 다른 모양을 의미하는 것이지
우리처럼 아버지, 아들 두 개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예수는 하나님 자신이다.
그리고 한 단계 더 나아가야 한다.
예수와 우리의 관계다.
이 또한 마찬가지다.
예수와 우리를 다른 개체로 보게 되면
또 다시 말짱 도루묵이다.
'예수 안에 있는 우리'는 예수와 우리를 하나로
보게 하는 설명이다.
따라서 예수와 나를 동일시 하는 차원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진정한 구원은 없다.
하나님이 주는 선물만 받을 뿐이지,
참된 영생은 아니다.
이렇게 먼저 개념정리를 안해두면
아무리 풀어도 엉뚱한 방향으로 갈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이 작업을 먼저 한다.
사실 이 진리도 어려운 것이 전혀 아닌데
우리가 어두워서 이해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할 뿐이다.
천부경이나 바울의 증거를 통해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왔고, 하나님으로
돌아간다는 것만 확실하게 붙들어도
이런 설명이 어렵지 않다.
하나님과 예수를 동일시 하고 보면
예수의 성육신이나 십자가 사건은 하나님 자신의
사건이 된다.
아들 따로, 아버지 따로가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에 성령을 포함해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십자가 사건은 아버지, 아들,
성령 모두의 사건이 된다.
여기서 위대한 하나에서 셋으로 나뉘어도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석삼극 무진본)는
천부경의 지혜가 빛을 발한다.
아버지는 영원한 근원으로 계실 수도 있고,
아들과 성령으로 분리하실 수도 있다.
그렇다고 분화되거나 나뉜 것이 아니다.
아버지는 언제든지 근본으로 계실 수 있고,
마찬가지로 셋으로, 만물로 자신을 분화하실 수 있다.
그래야 하나님이지 무엇에든 매여 있으면 안된다.
하나님은 하나로 존재하심에서
둘, 셋으로 존재의 변화를 이루셨다.
그 중 하나가 아들로 표현된 예수이며,
그 예수는 또 모든 인간의 표상이요, 형제이다.
성령 또한 만물 속에 생명으로 거하시니
마찬가지 하나님의 속성이 그대로 들어있다.
하나님은 하나로 계실 때는 아무런 문제가 없으시다.
그런데 율법을 어기는 인간이 있으니 문제가 된다.
없앨 수도 없고, 포기해서도 안되는 존재다.
그렇게 하면 자기 부정이 된다.
사실은 이러한 말 자체가 필요가 없는데
하는 이유는 우리가 느끼는 것이 물질세계요
율법 아래 있으며, 고통과 두려움을 생생하게
느끼고 살고 있으니 이런 작업이 필요할 뿐이다.
또 4000자에 걸렸다.
다음 회로 넘어간다.
'천지인 공부 > 참전계경' 카테고리의 다른 글
참전계경 (參佺戒經),8理, 366事를 통한 인생지혜 탐구 67 (0) | 2019.03.14 |
---|---|
참전계경 (參佺戒經),8理, 366事를 통한 인생지혜 탐구 66 (0) | 2019.03.14 |
참전계경 (參佺戒經),8理, 제 56 事 信 1 團 (신 1 단) 의(義) (0) | 2019.03.14 |
참전계경 (參佺戒經),8理, 제 55사 제 2 강령 신(信) (0) | 2019.03.13 |
참전계경 (參佺戒經),8理, 제 54사 忘形(망형) (0) | 2019.03.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