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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전계경 (參佺戒經),8理, 제 51사養體(양체) 본문

천지인 공부/참전계경

참전계경 (參佺戒經),8理, 제 51사養體(양체)

柏道 2019. 3. 13. 18:39


참전계경 (參佺戒經),
8理, 366事를 통한 인생지혜 탐구 59
 
3주간 잘 키운 병아리들이
개들에게 다 잡아먹혔다.
슬픔과 허무함의 감정보다
더 생명에 대한 지식에 절실해 진다.
도대체 어떤 이치로
생명이 오가는지...
지극한 정성으로 하나님을 향하면
감천하여 답을 얻을 것이라 믿는다.
더 열심히 탐구하자.
드디어 50사를 넘었다.
약 1/7지점을 통과한다.
유익되고 즐거우니 불행한 사건에도
오하려 덤덤해 진다.
이번에는 제 51事 誠의 6체 大孝(대효) 중
네번째 쓰임(6체 4용) 養體(양체)에 대한 말씀이다.
 
誠 6體 4用 (성 6체 4용) 제 51사養體(양체) 
 
養體者(양체자)는
養父母之體也(양부모지체야)라
父母之肢體(부모지지체)
在健康(재건강)이라도
猶適宜奉養(유적의봉양)이니
況或有殘疾(황혹유잔질)하며
或有重疴乎(혹유중아호)이랴
使殘疾安如完體(사잔질안여완체)하며
重疴無遺術然後(중아무유술연후)에
可盡人子之孝矣(가진인자지효의)니라 
 
'양체란 부모의 몸을 봉양함이니라
부모가 건강하더라도
마땅히 봉양해야 하는데
하물며 혹 몸에 잔병이 있거나
혹 중병이 있음에야 말할 것도 없느니라
잔병이 있으면 성한 몸처럼
편안하게 해드리며
중병도 남김없이 치료를 해 드린 후에야
가히 자식된 도리로 효도를
다하는 것이니라' 
 
같은 맥락의 말씀들이 이어진다. 
연로한 부모의 몸을 봉양하는 것이야
일부러 가르칠 필요가 없다.
나이가 들면 성한 몸이라도 약하여 도움이 필요한데 
연약한 몸이라면 더 마음이 약해지고 불안한 것이 
인간이다.
모든 사람들이 다 그러한데
자기를 낳아주고 길러주신 부모님이야
당연히 봉양하는 것이 도리이자 상식이다.
그런데 마찬가지로 이 문제를
다루기가 그리 녹록하지 않다.
여러가지 변수들이 많이 들어온다.
여건이 맞지 않을 수도 있고,
형편이 여의치 않을 수도 있다.
그런가 하면 사람에 따라서 좋아하는 것과
몸에 좋은 것의 차이가 있기에
서로 맞지 않을 수도 있고,
봉양도 바라는 정도, 필요한 정도가
다 다를 수 있기 때문에 그리 간단하지 않다.
병도 마찬가지다.
집에서 보살필 병인지, 입원을 하는 것이 좋은지
혹 아무리 큰 병이라도 치료를 원하는지
아니면 그냥 두기를 바라는지 생각이 다르다.
오늘날 품위있는 죽음과 안락사 허용 논쟁이
뜨거운 것도 병이라고 다 고쳐야만 하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그로 인해 삶의 질이 떨어지고
고통만 더하게 된다면 거부할 수도 있게 하자는 것이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병원치료를 거부하고
가족과 자연 속에서 죽음을 받아들이려 한다.
그런 경우에는 이 말씀처럼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하여 치료하려는
효심이 도리어 부모를 고통스럽게 하는 일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어렵다.
듣기 좋고 말하기 좋다고
맛있는 것 해 드리고, 아프면 잘 보살펴
건강을 회복하게 하라는 말을 주고 받는 것은
사실 겉도는 말이고, 서로 그런 말들이 별 의미 없는
빈 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오늘날 가르치는 강단이나 설교, 설법 자리에서
여전히 이런 당연한 말들을 하고 있는데
폼은 날지 모르나 실속 없는 귓전 울리는 말들이 되고 만다.
여기서도 다음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
보다 깊은 단계로 나아가서
근원적인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몸은 믿을 것이 못된다.
물론 최선을 다해 돌보고,
돌봐주고 해야 하지만 그것은 예표일 뿐이다.
일단 몸을 통해 알아야 할 지혜는
인생의 황혼에 들어서면
약해지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을 되돌리려고 애를 쓰는 것보다
밤을 맞을 준비를 하는 것이 지혜롭다.
지는 해를 되돌리려고 몸부림을 해 봐야
서로 좌절과 슬픔을 더해가는
어리석은 짓이 될 뿐이다.
9988234 (99세까지 88하게 살다가 2,3일 앓다 죽는다)는
말이나 120세까지 살리라는 노래 등은
처량한 몸부림이요 세속적인 욕심,
준비되지 못한 자의 발악일 뿐이다.
한 50살 넘어가면 다른 차원으로 나아가야 한다.
몸은 기울기 시작했으니 언제 가도 상관없다고
생각하고, 지치거나 늙고 병들지 않는 속사람을
점점 강화하고 하늘이 주신 천명을 받드는 일이
주된 관심이 되어야 한다.
그렇게 될 때 건강은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부모는 그런 모습을 보여야 하고,
자식은 부모로 하여금 염려없이 그 길을 가도록
돕는 것이 진정한 효도다.
그저 좋은 것 사드리고, 약이나 병원을 통해
늙고 병듦을 도와드려봐야
오히려 아쉬움만 더하고 불안만 커지게 된다.
부모도 자식도 천명을 바라보고 살면
이런 일들은 자연스럽게 해결되고,
해결되지 않는다 해도 문제가 될 것이 없다.
무조건 오래사는 것이 무슨 복인가?
삶에 의미가 있어야 하고,
특히 하늘이 허락한 삶이어야 하며, 
하늘의 뜻에 합당한 삶이어야 가치가 있다.
노인 사역을 하면서 많이 실망한 부분이 이것이다.
모인 자리에서 바라는 바 소원을 여쭈어 보았다.
약 30명 되시는 분들의 입에서 같은 말이 나온다.
'그저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살다가 죽는 것'이란다.
세상에 어떻게 그렇게 사셨는지 모르겠다.
물론 한국전쟁, 보릿고개 등 생존의 위협을
느끼는 시대를 지나와서 그러실만 하다고
이해를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너무한다.
목사가 그런 질문을 하면
설사 그렇다 해도 좀 멋있는 말을
할 수 있어야 할텐데...
'이제 별 여한이 없습니다.
건강이 허락하는대로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잘 감당하고 자녀와 이웃에게 유익한 일을 하다가
부르시면 기쁘게 가고 싶습니다'
슬프게도 이런 말을 아무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오기와 도전이 생겼다.
이제 50 넘긴 나이지만 자주 오래 살았다고 말을 한다.
말로만 그러는 것이 아니다.
지천명의 나이를 지났으면
이제는 더이상 삶에 연연하지 않고
하늘이 주신 사명에 모든 것을 걸어야 할 때다.
아내와도 27년 살았으면 많이 살았고,
아이들도 다 커서 막내가 16살이 넘었으니
할 도리도 다 했다.
그래서 자꾸 나 자신을 다그친다.
진리와 하나님을 향한 열정을 더 불태우라고...
그래서 오늘 죽어도 여한이 없을 정도의 삶을 살라고...
오늘 갑자기 개들에게 먹힌
6마리의 병아리들이 내게 큰 교훈을 주고 떠났다.
'주인님 생명이라는 것이 그런 겁니다.
그동안 잘 먹여주시고 돌봐주신 것 감사를 드립니다.
아픈 것도 살펴주시고
죽을 고비를 넘기게 해 주신것도 진정 감사합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우리는 떠납니다.
누구의 잘못이라고 할 수 없는 상황을 맞이하니
우리도 후회가 없습니다.
그저 3주간의 삶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좋은 주인 만나 충분한 사랑과 돌봄을 받고 떠나니
아무런 여한이 없습니다.
어차피 가는 길인데 길고 짧은 것이 무슨 의미겠습니까?
그래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주인을 만나
그 손길에 보살핌을 받은 것이 너무 감사합니다'
흔적 없이 떠난 병아리들의 송사다.
우리는 적어도 이 병아리들 보다는
멋진 유언을 남길 수 있어야 한다. 


 -푸른오솔길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