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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전계경 (參佺戒經),8理, 제 53사 迅命(신명) 본문

천지인 공부/참전계경

참전계경 (參佺戒經),8理, 제 53사 迅命(신명)

柏道 2019. 3. 13. 18:45


참전계경 (參佺戒經),
8理, 366事를 통한 인생지혜 탐구 61
 
참전계경과 함께 새로운 눈이
열리기 시작한다.
성경도 새롭게 이해하게 되고
폭넓은 의식으로 변화를 추구해 나간다.
한 걸음, 한 걸음이 감사하고 소중하다.
이번에는 제 53事 誠의 6체 大孝(대효) 중
여섯번째 쓰임(6체 6용) 迅命(신명)에 대한 말씀이다.
 
誠 6體 6用 (성 6체 6용)
제 53사 迅命(신명) 
 
迅速也(신속야)요
命父母之命也(명부모지명야)라
父母有命(부모유명)이어든
子必奉行然(자필봉행연)이나
父母之命(부모지명)은
是慈愛之命故(시자애지명고)로
嚴托督囑(엄탁독촉)이
未有於慈愛之間(미유어자애지간)이니
若先後相左(약선후상좌)하여
緩急失當(완급실당)이면
口雖不言(구수불언)이나
意思則新(의사즉신)이라
是以大孝(시이대효)는
隨命無遺(수명무유)니라 
 
'신(迅)은 빠름이요
命(명)은 부모의 명령이라
부모의 명이 있으면
자식은 반드시 받들어 행하여야 하느니라
부모의 명령은
본래 자애로운의 고로
엄하고 독촉함에 자애로움이 없어 보인다고
먼저 할 것과 나중 할 것의 순서를 바꾸거나
천천히 해야 할 것과
급하게 할 일의 시기를 놓치면
비록 말씀을 않지만 생각이 달라지느니라
그러므로 큰 효도는
부모의 명을 잘 받들어서 하나도
남김없이 행하는 것이니라' 
 
 
여전히 같은 맥락의 말씀이다.
부모의 명령에 즉각 순종하는 것,
그리고 엄하다 하여 거역하거나 함부로 하는 것
등은 자식의 도리가 아니다.
일단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같은 의문과 문제가 발생한다.
과연 부모의 명령이라고 무조건 다 순종해야 하는가?
만일 그 명령이 천리에나 인간의 도리에 어긋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본문에서도 '부모의 명령은 자애롭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맞다. 어느 부모가 자식 잘못되라고
명령을 내리는 부모는 없다.
다들 그렇다고 큰소리 치며 부모 말들어서
잘못되는 일 없다고 자신을 한다.
과연 그럴까?
엊그제도 사업에 실패를 비관한 부모가
15세, 12세 된 두 딸과 함께 동반 자살을 한
소식이 전해졌다.
그럼 부모가 죽으라는 명령도 따라야 하는가?
부모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이 떠나면
그 뒤에 남을 아이들을 걱정해서 함께 가는 길을
택했다고,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었다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누가 봐도 그것은 천리에 어긋난다.
만일 그렇게 말하려면
결혼도 하지 말고, 자식도 낳지 말아야 한다.
아니 아예 세상에 태어난 것 자체를 부정해야 한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랬을까? 하는 식의 동정은
오히려 그런 행위를 조장할 위험이 있다.
어릴 때 부모의 말씀을 신속하게 순종하는 훈련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교육이 자녀로 하여금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게 하고,
자기 성장에도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단계 나아가면 이제 부모가 생각을 달리해야 한다.
이런 말씀들을 인용하여 자녀들에게
'왜 빨리 말 안들어?'
'잔소리 말고 하라면 하라는대로 해'
하는 식으로 무턱대고 명령하거나
순종을 강요한다면 이미 부모 스스로
이 말씀에서 이탈한 것이 된다.
자애로움을 벗어났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말씀을 받으면 얼른 자녀들에게
던져 줄 것이 아니라 먼저 자신에게 적용을 해야 한다.
나의 명령은 자애로운가?
진정 이것이 자식을 위한 것인가?
혹시 내 욕심이나 불안이 반영되어 있지 않을까?
부모가 먼저 심각하게 자신들을
돌아보는 것이 어쩌면 이 말씀의 숨은 의도인지 모른다.
재미있는 것이 만일 부모가 이런 의식을 가지고
자기를 돌아볼 정도라면
이미 그 자체가 합리적이고, 타당한 명령을 내릴 줄 아는
부모라는 것이 증명되기 때문에 자녀들이 즐겨
따르고 싶어할 것이다.
만일 자식이 짧은 생각으로 일시 반항하거나
거부한다고 해도, 부모의 자애로움은 자식의 마음을
바꾸어 놓고 말 것이다.
이래서 말씀이 재미있다.
분명히 효도에 대한 말씀을 하고
자식의 도리를 강조하고 있는데 정작 그 깊은 의미는
부모에 대한 말씀이 된다.
성경도 그렇게 풀 수 있어야 한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명령을 받을 때
그 말씀에 순종한다고 노력하는 것은
착한 마음이기는 하지만 지혜롭지 못하다.
이 말씀을 받으면 먼저 이렇게 적용해야 한다.
'하나님에게는 내가 잘못하고 거역하는 것이
원수같을 것인데 그렇다면 하나님은 그런 원수같은
나라도 사랑하신다는 말씀이구나.
나 같은 원수라도 사랑하시니
나를 보고도 그러시는구나.
하나님은 나에게 잘해 주셔도
내가 원수처럼 거역했는데
그런데도 나를 사랑하신다고 한다.
반면 내가 맺은 원수는 대개 상대방
잘못만 있는 것이 아니다.
내 잘못도 다소간 들어있다.
그렇다면 나 같은 원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나도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해야겠구나'
모든 말씀이 다 그렇다.
세리나 창기, 죄인들, 사마리아 여인,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 등
이들이 놀란 것은 자기들 같이 더럽고 추한
죄인들을 비난하거나 정죄 않으시고 사랑하시는
그리스도를 만난 것 때문에 그들은 감격했고
급기야 삶의 변화를 이루었다.
단순히 옳다고 지시하는 것으로는
사람이 듣고 바뀌지 않는다.
먼저 자신에게 적용하여, 변화를 보이는 것이
우선이다. 효도에 대한 말씀을 한다고 해서
부모가 '나한테 효도해라'고 요구하는 부모는
어떻게 보면 바보다.
스스로 효도가 일어나게끔 처신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모가 먼저 자신들의 부모에게
잘해야 하고, 근원되신 부모, 즉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보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옳고 지당한 진리를
말한다 해도 이미 그 효력은 상실되고 없다.
진리는 참 오묘하다.
지혜있는 자는 진리의 본 뜻을 깨닫고 적용할 줄 안다.
어리석은 자는 자기 욕심대로
여기서 이 말씀, 저기서 이 말씀 갖다 붙여
요구하고 강요하며 윽박지름으로
스스로 자신의 그릇됨을 드러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