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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三一神誥(삼일신고) 풀이 26 본문

천지인 공부/삼일신고

三一神誥(삼일신고) 풀이 26

柏道 2019. 3. 13. 02:55

性通功完(성통공완)을 꿈꾸며...
三一神誥(삼일신고) 풀이 26 
 
천국에 들어가는 자들...
여전히 논란이 뜨겁다.
기독교 안에서도 '오직 믿음으로만'과
'믿음만 아니라 행함으로'라는 두가지 입장이
팽팽하게 맞서 온지 오래다.
'행함으로 구원을 받을 자는
아무도 없다. 오직 은혜로 주어지는 구원을
우리를 대신하여 친히 성취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입장과 '노력과 선한 행위 없이 믿음의 고백으로만
천국에 들어간다는 말은 거짓이다'는
입장이 여러 종파와 주의를 만들어 내었고
치열한 시비논란과 분쟁, 심지어는 전쟁으로까지
비화되기도 한 것이 기독교 역사의 증언이다.
이 문제의 역사가 오래인데
지금 나서서 해결하겠다고 하는 것은
교만이요, 헛수고이다.
수천년 해결 안된 문제가
어떤 설명, 어떤 인물이 나타난다고 해결이 되겠는가?
내가 또 뭐라고...
공연한 분란만 더할 뿐이다.
그래서 여기에다 또 한 번 같은 소리 반복하는 일은
하고 싶지 않다.
해 봐야 늘 듣던 소리고, 말은 맞지만 효력은 없는
공허한 이론의 재탕이 될테니 말이다.

진리의 생명은 그 생명성, 즉 생명력에 있다.
생명력이 없다면 그 진리는 더이상 진리가 아니다.
늘 들어서, 늘 하는 소리여서 더 이상 도전이
안되고 가슴을 치지 못하는 교리는
잔소리 이상 아무 것도 아니다.
강단 설교를 믿는 자들도 참 답답하다.
오늘날 교회의 위기가 설교의 위기란다.
그러니까 제 딴에는 설교 좀 한다는 자들이
이런 소리를 한다.
설교를 잘하면, 성경을 제대로 잘 풀면
개인과 가정, 교회에 소망이 있고,
세상이 달라진다고 아직도 주장하는
자들이 있는 것을 보면
참 사람은 깨닫는데 둔한 것이 사실이다.
나도 한 때는 그런 줄 믿었다.
성경을 제대로 풀이해서 뜨겁게 확신 가운데
증거하면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그 사람을 바꾸어 놓고,
교회에 부흥을 가져오며,
세상이 달라질 것이라고
확신하고 오직 성경에 매달렸고,
설교에 모든 것을 걸었던
기간이 족히 20년 가까이 된다.
감사하게도 그런 헛된 꿈 속에서 인생이 
끝나지 않도록 일깨움을 얻었다.
설교는 정말 아무 것도 아니다.
경전 잘 푸는 것도 먼 나라 이야기다.
삶과 능력으로 증거하라고 하면
우리 인간에게는 약점이 너무 많아
아무도 자신 없다.
그러다 보니 서로 고민하고 약함과 실패를
나눔으로 위로 받는 집단으로 전락해
버린 것이 오늘날 교회를 비롯한 종교단체이다.
최근 대단하다고 떠들고, 소망이다고
큰소리 치는 신흥 종교나 집단들도 조금만
지나보면 같은 꼴을 하게 될 것은 자명하다.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모든 것은 시간이 지나면서 시들어 가고,
새롭게 나타나는 이론과 지혜도
얼마 못 가 옛 것이 되고 만다.
그래서 솔로몬은 '해 아래 새 것이 없다'고
단정해 버렸다.
그런 차원에서 지금 새로운 시도와
새로운 혁명을 꿈꾸는 것은 어리석다.
순수하거나 지혜로운 것이 아니라
순진하고 어리석은 것이다.
다람쥐 쳇바퀴 도는 것이요,
씨지푸스의 바위 올리기 헛수고다.
그럼 도대체 어쩌란 말인가?
발을 내 딛기 위해 먼저 생각부터 해야 한다. 
 
말 장난 한 번 해보자.
답을 얻지 못한 자는 답을 얻으려 답을 찾는다.
그런데 답을 얻으려 하는 마음은
이제껏 답을 못찾았다는 의식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껏 찾지 못한 답을
지금 찾는다고 찾아질 것이라 생각하는 것은 모순이다.
찾지 못한 답을 찾는다고 오래 헤맨 경력이
답을 찾는데 도움을 줄 수 있겠는가?
오히려 더 헤맬 확률만 높일 뿐이다.
수고는 가상하나 헛수고가 되고,
더 심각한 것은 그런 헛수고의 경력을
자랑하면서 아는체 하게 된다는 점이다.
사실 지금 세상을 혼란하게 하는 자들은
찾지도 못한 답을 오래 헤맸다 해서
권위를 스스로 입은 자들 때문이다.
왜 오래 못찾은 것이 더 어리석음의 증거인데
그런 자들이 득세를 하고, 지도자로 행세하는가? 
 
천국에 들어가는 문제...
핵심은 '어떻게'가 아니다.
'어떻게 해야 들어가는가?'의 문제로 싸우면 끝이 없다.
믿음이니, 행함이니, 심지어 성통공완을 말한다 해서
답은 아니다.
항상 진리가 그렇게 역사하듯이
답은 엉뚱한데서 발견된다.
성통공완은 조건이 아니다.
바로 그 단어 속에 답이 들어 있다.
참, 답이라고 하면 또 모순에 빠진다.
그럼 '답이라고 할 수 없는 답'이라고 하자.
천부경과 도덕경의 지혜를 따라서 말이다.
'시작이라고 할 수 없는 시작'
'도라고 부를 수 없는 도'
그러니 '답이라고 할 수 없는 답' 
 
참 골치 아파서 재미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