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참전계경 (參佺戒經),8理, 제 35사 放運(방운) 본문
참전계경 (參佺戒經),
8理, 366事를 통한 인생지혜 탐구 43
매일 풍성한 생명의 양식을 주심에
감사하면서 또 한걸음 전진한다.
이번에는 제 35事 誠의 4체 가운데
여섯번째 쓰임(4체 6용) 放運(방운)에 대한 말씀이다.
誠 4體 6用 (성 4체 6용)
제 35사 放運(방운)
放放誠意也(방방성의야)요
運運誠力也(운운성력야)라
放誠意而不息則(방성의이불식즉)이면
黑夜生明月(흑야생명월)하고
運誠力而不息則(운성력이불식즉)하면
隻手擧萬鈞(척수거만균)이라
雖誠有然(수성유연)이나
其或誠意浮沈(기혹성의부침)하며
誠力柔强(성력유강)하면
不能識基果(불능식기과)니라
'방(放)은 정성의 뜻을 넓힘이요
운(運)은 정성의 힘을 움직임이라
쉬지 않고 정성의 뜻을 넓히면
어두운 밤에 밝은 달이 솟고,
쉬지 않고 정성의 힘을 움직이면
한 손으로 삼만근도 들 수 있느니라
비록 정성이 있다 하더라도
혹 정성의 뜻이 떳다 잠겼다 하며
정성의 힘이 약했다 강했다 하면
그 결과는 능히 알 수 없게 되느니라'
참 소중한 권면들이다.
격려를 저절로 받고, 힘을 떠 받치는 은혜를 느낀다.
정성은 단순한 추상적인 용어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실제적 존재와 생명을 가진 삶의 본질이다.
따라서 끊임없이 살피고, 다듬고, 강화하여
하나님의 온전하심에까지 이르도록 해야 한다.
정성의 뜻을 넓히고,
정성의 힘을 움직인다....
참 멋있고 아름다운 말이다.
정성의 뜻이라면 이제껏 공부한 것처럼
하나님을 향한 열정이요, 공경심이다.
그 마음을 그냥 두지 말고 적극적으로 확장해
나가는 마음을 말한다.
더 알고 싶고, 더 깊이 알고 싶어지는 것이
진리의 본성이기에 이러한 권면은
적극적 호응을 얻을 수 밖에 없다.
오히려 지당하신 말씀이라 여기면서 띠를 힘차게 묶게 한다.
바울도 에베소 교인들을 위한 기도 속에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에베소서 3:18-19)고 했다.
그 자신의 마음에 이러한 열정이 있으니
당연히 이런 기도를 드리는 것이다.
'더 멀리, 더 높이, 더 빨리'의 구호로
인류의 축제를 여는 올림픽은
인간 체력의 한계를 도전하게 하지만
'더 넓게, 더 길게, 더 높게, 더 깊게'
진리를 향한 뜻의 확장은
인간 본질의 한계를 도전하게 한다.
정성의 뜻을 확장하게 되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두움 속에서도
밝은 달이 떠오른다.
이 달은 자연의 달이 아니다.
정성의 뜻을 확장함으로 인해 스스로의 마음에
생성시키는 그런 빛이다.
즉 정성이 만들어 내는 빛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보이지 않던 뜻까지 보게 하여
끊임없는 전진을 하도록 이끄는 것이다.
뜻만 가지고 안된다.
정성이 발휘하는 힘도 끌어써야 한다.
정성은 그 자체로 어머어마한 생명에너지를 갖고 있다.
이것을 잘 운행하게 되면
맨손으로도 삼만근의 무거운 것을
드는 것 같은 초인적인 힘을 발휘한다.
여기서 각종 신통력, 초능력 등이
발휘하게 되는 것이다.
이 원리는 자연스러운 원리이다.
정성이 우주를 움직이는 힘을 발휘한다.
그런데 조심해야 하는 것은
자칫 이러한 힘의 마력에 끌려
정성의 뜻과 중심을 놓치는 경우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물론 참된 정성으로 시작한 자에게는
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
그런 미혹 자체가 정성을 막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혹 신통력이나 초능력을 얻고자 하는
욕심으로 애써서 노력하는 자들이 간혹있다.
혼(자아)의 열정이요, 의지인데
인간의 혼도 하나님의 본성에서 나온 것이기에
엄청난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그 잠재력을 잘 개발하고 발휘하면
상상을 초월한 지식과 능력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목적이 틀리고, 동기가 어긋났기 때문에
결국은 그 얻은 지식과 능력이 파멸로
끌고가게 되어 있다.
하늘이 인정하지 않는 지식과 힘은 불법이다.
성경에 이에 대해서 명확한 판결이 나온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니리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태복음 7:22-23)
드러난 지식이나 능력, 사역으로
진위를 가릴 수 없다는 것이다.
근본 동기와 뿌리를 확인하며,
그 결과 열매를 보겠다는 말씀이다.
참된 동기와 목적을 가지게 되면
이런 말 자체가 나오지 않는다.
자기가 무엇이고, 무엇을 했고
하는 말들이 많은 사람들은 이 부류에 속한다.
참된 정성은 자기가 한 일을 잊어버린다.
아니 생각에 넣어둘 여유도, 마음도 없다.
그저 진리와 하나님을 사랑하여
그리로 가고 또 갈 뿐이다.
이 말씀에서는 정성의 뜻과 힘이 흔들리는 것을 경계한다.
떳다가 가라앉았다가
약했다가 강했다가 하는 기복,
요즘 말로 업 앤 다운(up and down)이
심한 경우는 참된 정성이라 할 수 없다.
그래서 열매가 보장이 되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욕망으로 설정한 목적을
이룰 수단으로 방법론을 찾는데 몰두한다.
그러다보니 결국 자기 욕망만 남고
하나님은 온데 간데 없다.
오래 전에 유명한 프로그램이 있다고 해서
참석해 보았다.
안타깝게도 모인 자들은 제각기 '교회성장'이라는
오직 한 목적 때문에 모였음을 보게 되었다.
본질은 관심이 없었고, 어떻게 해야
교인들을 많이 모으고, 잘 양육하느냐에만
관심을 두고 그 방법을 가르쳐 달라고 한다.
그들에게는 진리는 하나의 방편일 뿐이고,
하나님은 그들의 목적을 이루는데
도움을 주는 존재일 뿐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들은 하나같이 말하기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교회도 키우고, 사람들을 이끌며,
여러 좋은 사업도 한다고 한다.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물었다.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요한복음 6:28)
자기가 정해 놓은 목적에 방법론을 묻는 것이다.
이에 대한 예수의 대답은 완전히 기대에 어긋난다.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29)
방법론을 묻는 질문에, 본질로 답했다.
방법론을 찾지 말고 본질을 회복하라는 말씀이다.
이 말씀을 오해해서 아무것도 안하고
예수만 믿으면 된다는 식의 교리를 주장한다.
답답한 일이다.
당시 헛된 욕망과 꿈에 빠져있는 자들에게
예수는 '네 눈 앞에 있는 자를 보라.
하나님이 보내셔서 진리를 말하고 있지 않느냐
기적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말하는 진리를 통해 하나님을 발견하라'는
의미로 말했는데 꼭 같은 오류에 빠진다.
예수를 믿어서 자기 욕망을 채우고 싶어하는 것이다.
천국에 들어가고 싶어 하는 욕망 자체도
두려움에 매인 자아의 욕구이다.
앞에서 공부한 것처럼
진리, 하나님께 집중하면 이런 욕망 자체가 사라진다.
자신을 돌아보라.
오로지 마음에서 일어나는 관심이
하나님 자신이며, 진리의 말씀 그 자체인가?
아니면 하나님을 위해 무언가 해야 한다는 의무감인가?
진리는 참 놀랍게 역사한다.
민족을 위해, 세계 평화를 위해 무엇인가
하겠다고 나서는 자들을 오히려 책망한다.
오직 진리에 초점을 맞추고,
하나님 자신을 갈망하는 자들을 통하여
그런 일이 일어나게 하신다.
그들의 사역이나 일은 목적이 아니다.
하나님이 하라고 하시고,
지혜와 힘을 주시기 때문에
그러한 일을 즐겁고 영광스럽게 한다.
힘든 일을 하는 것처럼 하지 않고
재미있는 게임을 하는 것처럼 하는 것이다.
정성의 힘이 움직이니
어두운 곳에서도 잘 보고,
무거운 것도 거뜬히 들 수 있으니
그게 뭐가 힘들겠는가? 재미있지...
8理, 366事를 통한 인생지혜 탐구 43
매일 풍성한 생명의 양식을 주심에
감사하면서 또 한걸음 전진한다.
이번에는 제 35事 誠의 4체 가운데
여섯번째 쓰임(4체 6용) 放運(방운)에 대한 말씀이다.
誠 4體 6用 (성 4체 6용)
제 35사 放運(방운)
放放誠意也(방방성의야)요
運運誠力也(운운성력야)라
放誠意而不息則(방성의이불식즉)이면
黑夜生明月(흑야생명월)하고
運誠力而不息則(운성력이불식즉)하면
隻手擧萬鈞(척수거만균)이라
雖誠有然(수성유연)이나
其或誠意浮沈(기혹성의부침)하며
誠力柔强(성력유강)하면
不能識基果(불능식기과)니라
'방(放)은 정성의 뜻을 넓힘이요
운(運)은 정성의 힘을 움직임이라
쉬지 않고 정성의 뜻을 넓히면
어두운 밤에 밝은 달이 솟고,
쉬지 않고 정성의 힘을 움직이면
한 손으로 삼만근도 들 수 있느니라
비록 정성이 있다 하더라도
혹 정성의 뜻이 떳다 잠겼다 하며
정성의 힘이 약했다 강했다 하면
그 결과는 능히 알 수 없게 되느니라'
참 소중한 권면들이다.
격려를 저절로 받고, 힘을 떠 받치는 은혜를 느낀다.
정성은 단순한 추상적인 용어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실제적 존재와 생명을 가진 삶의 본질이다.
따라서 끊임없이 살피고, 다듬고, 강화하여
하나님의 온전하심에까지 이르도록 해야 한다.
정성의 뜻을 넓히고,
정성의 힘을 움직인다....
참 멋있고 아름다운 말이다.
정성의 뜻이라면 이제껏 공부한 것처럼
하나님을 향한 열정이요, 공경심이다.
그 마음을 그냥 두지 말고 적극적으로 확장해
나가는 마음을 말한다.
더 알고 싶고, 더 깊이 알고 싶어지는 것이
진리의 본성이기에 이러한 권면은
적극적 호응을 얻을 수 밖에 없다.
오히려 지당하신 말씀이라 여기면서 띠를 힘차게 묶게 한다.
바울도 에베소 교인들을 위한 기도 속에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에베소서 3:18-19)고 했다.
그 자신의 마음에 이러한 열정이 있으니
당연히 이런 기도를 드리는 것이다.
'더 멀리, 더 높이, 더 빨리'의 구호로
인류의 축제를 여는 올림픽은
인간 체력의 한계를 도전하게 하지만
'더 넓게, 더 길게, 더 높게, 더 깊게'
진리를 향한 뜻의 확장은
인간 본질의 한계를 도전하게 한다.
정성의 뜻을 확장하게 되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두움 속에서도
밝은 달이 떠오른다.
이 달은 자연의 달이 아니다.
정성의 뜻을 확장함으로 인해 스스로의 마음에
생성시키는 그런 빛이다.
즉 정성이 만들어 내는 빛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보이지 않던 뜻까지 보게 하여
끊임없는 전진을 하도록 이끄는 것이다.
뜻만 가지고 안된다.
정성이 발휘하는 힘도 끌어써야 한다.
정성은 그 자체로 어머어마한 생명에너지를 갖고 있다.
이것을 잘 운행하게 되면
맨손으로도 삼만근의 무거운 것을
드는 것 같은 초인적인 힘을 발휘한다.
여기서 각종 신통력, 초능력 등이
발휘하게 되는 것이다.
이 원리는 자연스러운 원리이다.
정성이 우주를 움직이는 힘을 발휘한다.
그런데 조심해야 하는 것은
자칫 이러한 힘의 마력에 끌려
정성의 뜻과 중심을 놓치는 경우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물론 참된 정성으로 시작한 자에게는
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
그런 미혹 자체가 정성을 막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혹 신통력이나 초능력을 얻고자 하는
욕심으로 애써서 노력하는 자들이 간혹있다.
혼(자아)의 열정이요, 의지인데
인간의 혼도 하나님의 본성에서 나온 것이기에
엄청난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그 잠재력을 잘 개발하고 발휘하면
상상을 초월한 지식과 능력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목적이 틀리고, 동기가 어긋났기 때문에
결국은 그 얻은 지식과 능력이 파멸로
끌고가게 되어 있다.
하늘이 인정하지 않는 지식과 힘은 불법이다.
성경에 이에 대해서 명확한 판결이 나온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니리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태복음 7:22-23)
드러난 지식이나 능력, 사역으로
진위를 가릴 수 없다는 것이다.
근본 동기와 뿌리를 확인하며,
그 결과 열매를 보겠다는 말씀이다.
참된 동기와 목적을 가지게 되면
이런 말 자체가 나오지 않는다.
자기가 무엇이고, 무엇을 했고
하는 말들이 많은 사람들은 이 부류에 속한다.
참된 정성은 자기가 한 일을 잊어버린다.
아니 생각에 넣어둘 여유도, 마음도 없다.
그저 진리와 하나님을 사랑하여
그리로 가고 또 갈 뿐이다.
이 말씀에서는 정성의 뜻과 힘이 흔들리는 것을 경계한다.
떳다가 가라앉았다가
약했다가 강했다가 하는 기복,
요즘 말로 업 앤 다운(up and down)이
심한 경우는 참된 정성이라 할 수 없다.
그래서 열매가 보장이 되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욕망으로 설정한 목적을
이룰 수단으로 방법론을 찾는데 몰두한다.
그러다보니 결국 자기 욕망만 남고
하나님은 온데 간데 없다.
오래 전에 유명한 프로그램이 있다고 해서
참석해 보았다.
안타깝게도 모인 자들은 제각기 '교회성장'이라는
오직 한 목적 때문에 모였음을 보게 되었다.
본질은 관심이 없었고, 어떻게 해야
교인들을 많이 모으고, 잘 양육하느냐에만
관심을 두고 그 방법을 가르쳐 달라고 한다.
그들에게는 진리는 하나의 방편일 뿐이고,
하나님은 그들의 목적을 이루는데
도움을 주는 존재일 뿐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들은 하나같이 말하기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교회도 키우고, 사람들을 이끌며,
여러 좋은 사업도 한다고 한다.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물었다.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요한복음 6:28)
자기가 정해 놓은 목적에 방법론을 묻는 것이다.
이에 대한 예수의 대답은 완전히 기대에 어긋난다.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29)
방법론을 묻는 질문에, 본질로 답했다.
방법론을 찾지 말고 본질을 회복하라는 말씀이다.
이 말씀을 오해해서 아무것도 안하고
예수만 믿으면 된다는 식의 교리를 주장한다.
답답한 일이다.
당시 헛된 욕망과 꿈에 빠져있는 자들에게
예수는 '네 눈 앞에 있는 자를 보라.
하나님이 보내셔서 진리를 말하고 있지 않느냐
기적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말하는 진리를 통해 하나님을 발견하라'는
의미로 말했는데 꼭 같은 오류에 빠진다.
예수를 믿어서 자기 욕망을 채우고 싶어하는 것이다.
천국에 들어가고 싶어 하는 욕망 자체도
두려움에 매인 자아의 욕구이다.
앞에서 공부한 것처럼
진리, 하나님께 집중하면 이런 욕망 자체가 사라진다.
자신을 돌아보라.
오로지 마음에서 일어나는 관심이
하나님 자신이며, 진리의 말씀 그 자체인가?
아니면 하나님을 위해 무언가 해야 한다는 의무감인가?
진리는 참 놀랍게 역사한다.
민족을 위해, 세계 평화를 위해 무엇인가
하겠다고 나서는 자들을 오히려 책망한다.
오직 진리에 초점을 맞추고,
하나님 자신을 갈망하는 자들을 통하여
그런 일이 일어나게 하신다.
그들의 사역이나 일은 목적이 아니다.
하나님이 하라고 하시고,
지혜와 힘을 주시기 때문에
그러한 일을 즐겁고 영광스럽게 한다.
힘든 일을 하는 것처럼 하지 않고
재미있는 게임을 하는 것처럼 하는 것이다.
정성의 힘이 움직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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