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빛 힘 숨 3 본문
빛 힘 숨 3
머리말
요한복음 강해 서문
제8장 진리란 무엇인가
31. 진리란 무엇인가(요한 8:30~32)
32. 진리와 자유(요한 8:30~36)
33. 하나님: 근거根據의 근거根據(요한 8:37~47)
34. 예수님: 하나님을 나타내는 사람(요한 8:48~59)
제9장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
35.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요한 9:1~7)
36. 안식일의 주인(요한 9:8~17)
37. 메시아(요한 9:18~34)
38. 그이(요한 9:35~41)
제10장 밑힘
39. 목자牧子와 도둑(요한 10:1~6)
40. 제삼第三의 개념槪念(요한 10:7~21)
41. 하나님과 하나(요한 10:22~30)
42. 밑힘(요한 10:31~42)
제11장 인생은 죽음으로부터
43. 관계의 관계(요한 11:1~16)
44. 부활과 생명(요한 11:17~27)
45. 죽음과 삶(요한 11:28~44)
46. 인생은 죽음으로부터(요한 11:45~54)
47. 해방, 독립, 통일(요한 11:55~57)
부록 1 요한복음의 목적
후기
부록 2 차례(제1~2, 4~5권)
찾아보기
김흥호 사상전집 성경강해’ 요한복음 강해 편. 저자는 십자가를 통해서 빛이 되고, 부활을 통해서 힘이 되고, 승천을 통해 숨(생명)을 얻는다고 한다. 그것을 “빛-십자가-본질직관, 힘-부활-근본경험, 숨-승천-인간구원”이란 등식으로 풀어간다.
저자는 요한복음이 우리 동양인을 위한 복음서라고 한다. 동양인이 제일 이해하기 쉬운 복음서라는 것이다. 요한복음이 다른 세 복음서와 다른 것은 “말씀”이라는 것이다. 이 “말씀”은 동양에서는 진리, 도道로 옮겨질 수 있는 것이어서 동양인에게 친근하다.
그런데 그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 “육신”은 세상에 와서 사람의 형상으로 살고 있는 인간을 말한다. 하나님 아들 예수는 사람의 아들이 되어 이 땅에 와서 살았다. 그리고 그는 그리스도가 되었다. 아니 그는 원래 그리스도였다. “말씀”의 “육신”이 된 그리스도였던 것이다. 그리스도는 말씀의 육화, 화신이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아들인 것이다. 이렇게 분명하게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밝힌 복음서는 없을 것이다.
* 본래 신학을 한다고 할 때에는 먼저 과학을 하고, 그다음에 철학을 하고, 그다음에 신학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학문하는 순서이다. 그래서 신학을 하려면 대학에서 과학 학사를 하고, 대학원에서 철학 석사를 하고, 그다음에야 신학을 하도록 되어 있다. 그것이 신학에 들어가는 코스이다.
그런데 요즘은 우리나라에서 이것이 지켜지지 않고 ...
* 본래 신학을 한다고 할 때에는 먼저 과학을 하고, 그다음에 철학을 하고, 그다음에 신학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학문하는 순서이다. 그래서 신학을 하려면 대학에서 과학 학사를 하고, 대학원에서 철학 석사를 하고, 그다음에야 신학을 하도록 되어 있다. 그것이 신학에 들어가는 코스이다.
그런데 요즘은 우리나라에서 이것이 지켜지지 않고 대학만 다녀도 신학교 다닌다고 한다. 미국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미국의 신학도 요즘 굉장히 약하게 되어 버렸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바로 신학교로 간다. 그러다 보니 철학도 없어지고 과학도 없어지고 그냥 신학을 공부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나라 신학의 현실이다. 제대로 신학을 하려면 과학을 하고, 철학을 하고, 그리고 나서 신학을 해야 한다. 그런데 과학도 없고 철학도 없이, 그러니까 도덕이란 것도 없이 신학을 한다고 하니, 그렇게 해서 나온 신학도가 문제가 되는 것이다. 정말 이것이 큰 문제다. ( p.30-1) ![](https://image.aladin.co.kr/img/shop/2012/btn_close2.gif)
* 우리나라의 기독교인이 천만이라고 하는데 그 중에서 과연 문제를 갖고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 몇이나 될지 모르겠다. 문제를 가지고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 진짜 기독교인이다. 그러나 문제없이 교회를 다닌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천만 아니라 수천만의 기독교인이 있다 해도 다 쓸데없는 일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니까 언제나 교회라는 것은 병원...
* 우리나라의 기독교인이 천만이라고 하는데 그 중에서 과연 문제를 갖고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 몇이나 될지 모르겠다. 문제를 가지고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 진짜 기독교인이다. 그러나 문제없이 교회를 다닌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천만 아니라 수천만의 기독교인이 있다 해도 다 쓸데없는 일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니까 언제나 교회라는 것은 병원 같아서 문제를 풀러가야지 그런 것이 없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목사이다. 왜냐하면 병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의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말 의사가 권위가 있어서 자기의 병을 고칠 수 있는 사람을 찾아가야지 아무 의사나 찾아 갈 수는 없는 것이다.
만일 내가 심장에 문제가 있다면 심장전문의에게 찾아가야지 감기 잘 고치는 의사를 찾아가서는 아무런 쓸데가 없다. 그러므로 언제나 우리가 교회를 찾아갈 때에는 목사가 어떤 목사인지가 굉장히 중요하다. 그저 교회만 다니면 된다고 생각하면 잘못이다. 사람이 하는 일에 목적 없는 것이 어디 있겠는가. 반드시 어떤 목적을 가지고 교회에 나가야 한다. 그 목적이란 것이 무엇인가 하면 자기 속에 있는 문제를 갖고서 그 문제를 풀기 위해서 다니는 것이다. ( p.39-40) ![](https://image.aladin.co.kr/img/shop/2012/btn_close2.gif)
* 고민하고 있는 사람은 다 노예처럼 얽매여 사는 것이다. ( p.54)* 고민하고 있는 사람은 다 노예처럼 얽매여 사는 것이다. ( p.54)
* 상대와 절대가 하나가 된 것, 그것이 믿음이란 말이다....
기독교에서는 믿음이라고 하고, 불교에서는 각覺이라고 하고, 유교에서는 그것을 도道라고 한다. ( p.71)* 상대와 절대가 하나가 된 것, 그것이 믿음이란 말이다....
기독교에서는 믿음이라고 하고, 불교에서는 각覺이라고 하고, 유교에서는 그것을 도道라고 한다. ( p.71)
* 요한복음은 특별히 아는 문제를 강조하는 복음이라고 볼 수 있다. 다른 복음인 누가, 마태, 마가에 비해 특별히 지적知的인 복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 요한복음을 동양 사람의 복음이라고 말한다. 누가복음은 로마 사람을 위해 썼다고 하고, 마가복음은 희랍 사람을, 마태복음은 유대 사람을, 그리고 이 요한복음은 동양 사람을 위해 썼다고 말한다.
* 요한복음은 특별히 아는 문제를 강조하는 복음이라고 볼 수 있다. 다른 복음인 누가, 마태, 마가에 비해 특별히 지적知的인 복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 요한복음을 동양 사람의 복음이라고 말한다. 누가복음은 로마 사람을 위해 썼다고 하고, 마가복음은 희랍 사람을, 마태복음은 유대 사람을, 그리고 이 요한복음은 동양 사람을 위해 썼다고 말한다.
동양 사람들은 깨닫는다는 것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우리들에게는 믿는다는 것보다도 깨닫는다는 것이 더 마음에 와 닿는다. 그래서 우리 동양 사람들은 신비하리만큼 지적인 사람들인 것이다. 우리는 역시 지적으로 찾아가는 것이 더 쉽다고 할 수 있다. ( p.89) ![](https://image.aladin.co.kr/img/shop/2012/btn_close2.gif)
* 번뇌요, 고苦가 되는 것이다. 그것이 나를 못살게 구는 악마요, 사탄이다. 그 악마가 눈을 뜨고 보면 하나님으로 보이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눈을 감았을 때는 그것이 악마로 보였지만, 눈을 뜨게 되면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란 것을 알게 된다는 말이다. 그것을 발견하는 것, 그것이 믿음이다. ( p.107-08)* 번뇌요, 고苦가 되는 것이다. 그것이 나를 못살게 구는 악마요, 사탄이다. 그 악마가 눈을 뜨고 보면 하나님으로 보이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눈을 감았을 때는 그것이 악마로 보였지만, 눈을 뜨게 되면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란 것을 알게 된다는 말이다. 그것을 발견하는 것, 그것이 믿음이다. ( p.107-08)
* 정말 깊이 생각해 보면, 과연 나는 내 아내를 정말 아는가, 친구를 아는가, 선생을 아는가, 라 자문해 볼 때 안다고 말하기가 쉽지 않다. 물론 자기의 아내가 몇 살이고, 무엇을 좋아하고, 어떻게 생겼으며 왜 나와 같이 사는가라는 것은 다 알고 있다. 그러나 내 아내 속에 있는 영靈은 알지 못한다. 내 아내 속에 무엇이 들어가 있는지, 더 엄격히 말하면...
* 정말 깊이 생각해 보면, 과연 나는 내 아내를 정말 아는가, 친구를 아는가, 선생을 아는가, 라 자문해 볼 때 안다고 말하기가 쉽지 않다. 물론 자기의 아내가 몇 살이고, 무엇을 좋아하고, 어떻게 생겼으며 왜 나와 같이 사는가라는 것은 다 알고 있다. 그러나 내 아내 속에 있는 영靈은 알지 못한다. 내 아내 속에 무엇이 들어가 있는지, 더 엄격히 말하면, 내 아내 속에 하나님이 들어가 있는데 그 하나님을 보았는지, 보았다면 내 아내를 존경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진짜 아내를 존경할 수 있는 사람, 그 사람이 아내를 아는 사람이다. 그저 아내를 사랑하는 것 가지고는 안 된다. 아내의 존엄성을 알게 될 때 그것이 진짜 아내를 아는 것이다. 그렇게 될 때 하나님도 믿게 될 수 있는 것이지, 하늘에 있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 반드시 믿음이라고 할 수 없다. 내 아내 속에 있는 하나님을 믿을 수 있을 때 그것이 진짜 믿음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 p.185-86) ![](https://image.aladin.co.kr/img/shop/2012/btn_close2.gif)
* 나나 유영모 선생의 신앙을 철학적 신앙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그것은 생각을 깊이 하는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을 말한다. 나는 기도를 밤새도록 하다가 성령을 만났다든지 봉사를 열심히 하다가 성령을 만났다든지 하는 것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 p.208)* 나나 유영모 선생의 신앙을 철학적 신앙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그것은 생각을 깊이 하는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을 말한다. 나는 기도를 밤새도록 하다가 성령을 만났다든지 봉사를 열심히 하다가 성령을 만났다든지 하는 것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 p.208)
* 하여튼 우리에게는 희망이 없다는 것이다. 다르게 말하자면 이상이 없다는 것이다. 무엇인가 우리도 이상을 가지고 살게 되어야 하는 것이다. 꼭 물질적인 이상만 찾을 것이 아니라 정말 정신적인 이상을 가지고 살아야 할 것이다. 유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태극의 원리를 가르쳐 주었지만, 그 원리를 가지고 이상을 찾지 못하고 누가 옳고 누가 그르다를 가지고 싸...
* 하여튼 우리에게는 희망이 없다는 것이다. 다르게 말하자면 이상이 없다는 것이다. 무엇인가 우리도 이상을 가지고 살게 되어야 하는 것이다. 꼭 물질적인 이상만 찾을 것이 아니라 정말 정신적인 이상을 가지고 살아야 할 것이다. 유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태극의 원리를 가르쳐 주었지만, 그 원리를 가지고 이상을 찾지 못하고 누가 옳고 누가 그르다를 가지고 싸움만 하게 된 것이다. 이퇴계의 이발기발理發氣發이 옳다, 이율곡의 기발이승氣發理乘이 옳다, 그렇게 300여년을 싸우다가 세월만 허송하고 만 것이다. 그 원리를 가지고 더 깊이 생각하여 그 원리대로 살아가야 하는데 시비만 따지고 싸움만 하는데 써 먹고 만 것이다.
아까도 말했지만 불교도 일즉일체一卽一切, 일체즉일一切卽一의 소위 화엄법계라고 하는 그런 큰 이상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고, 그래서 여기저기에 화엄사니 해인사니 해서 큰절들이 많이 생겨났지만 그러한 이상을 자기 것으로 만들지 못하고 그곳에 가서 절만 하는 절간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런 큰 이상을 자기에게 구체화 시켜야 하는데 그 이상 앞에 절만 하는 것이 되고 말았다는 말이다.
기독교도 마찬가지이다. 기독교도 우리에게 큰 이상을 가르쳐 주었는데 그러한 이상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의 이상은 하늘나라이다. 그런데 기껏해야 기독교인들이 하는 일이 교회당 짓는데 세월을 다 보내고 있다. 어떤 목사가 큰 예배당 지었다고 하면 그것이 대 성공인양 야단이다. 이 근방에 있는 대신교회도 지금 큰 2층 교회가 있는데 그것도 부족해서 9층짜리로 짓는다고 한다. 우리의 이상인 하늘나라는 다 집어치우고 교회당 건물 짓는데 골몰하는 것이다. 여기저기에 대형교회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나서 신도가 만 명이니 몇 십만이니 하고 자랑한다. 우리 민족 전체가 이상을 제대로 갖지 못하고 자꾸 현실주의로만 흐르게 되고 마는 것이다. 그렇게 큰 집단이 되어서는 결국은 요사이 말하는 집단이기주의로 빠지게 되고 만다. 그래서 교인들이 내는 헌금은 거의 그 집단의 이기주의에 다 쓰고 말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니까 교회가 대형화되는 것이 큰 문제가 되고 마는 것이다. ( p.247~48) ![](https://image.aladin.co.kr/img/shop/2012/btn_close2.gif)
* 부활이란 이천 년 전에 예수가 사흘 만에 살아났다는 그것이 부활이 아니다. 내가 지금 부활이 되어야 그것이 부활의 참 뜻이다. 내가 바로 부활이요가 되어야지 이천 년 전에 예수가 부활한 것이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내가 부활이 되어야 예수의 부활도 나에게 의미가 있는 것이지, 내가 부활되지 않고는 예수의 부활은 나에게는 의미가 없는 것이다. ( ... ![](https://image.aladin.co.kr/img/shop/2012/btn_more3.gi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