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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가? 본문

마스터와 가르침/다석

주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가?

柏道 2019. 3. 1. 22:46


주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가?

 

당포

 

예수가 외면한 그 한가지 질문

 

 

저자 : 오강남 (캐나다 리자이나 대학교 비종교학 교수)

 

 

제3부 : 믿음의 길

 

 

오, 주님

 

제가​ 주님을 섬김이 지옥의 두려움 때문이라면

 

저를 지옥 불에 태워버리시고

 

그것이 낙원의 소망 때문이라면

 

저를 낙원에서 쫓아내버리시옵소서

 

그러나 그것이 제가 주님만을 위한 것이라면

 

주님의 영원한 아름다움을

 

제게서 거두지 마시옵소서 (수피의 성녀 라비아)​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사도행전 16:311)'고 한 말씀, 너무나도 귀에 익은 말씀이 아닌가? 지금도 여전한지 모르겠으나, 예전에 한국을 떠나기 전 종로에서 이 말씀을 큰 글씨로 써서 몸에 붙이거나 깃발처럼 들고 다니며 큰소리로 외치던 사람의 모습이 눈에 떠 오른다. 그렇다. 주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는 것,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요한복음 3:16)'되다는 것은 올바로 이해되고 올바로 실천되기만 한다면 더할 수 없이 진실된 말씀임을 많은 사람들이 믿듯이 나도 굳게 믿는다. 그런데 요는 어떻게 하는 것이 '주 예수를 믿는 것'인가 하는 문제다. 이런 말을 꺼내면 믿음이 독실한 분 중에는 '그저 덮어놓고' 혹은 '무조건' 믿으라는 분이 있다. 우리도 덮어놓고 무조건 단순히 믿고 싶지만, 어떻게 해야 하는지라도 알아야 그렇게 할 수 있을 게 아닌가? 덮어놓고 믿기 위해서도 도대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지 좀 생각해보아야 하겠다. 앞에서 제안했듯이 어느 교파가 전통의 공식 입장에 매이지 않고 '우리 나름대로' 허심탄회하게 이 문제를 한번 두드려봄으로써,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우리에게 진정으로 의미 있는 일이 되도록 했으면 한다.

 

 

​(중략)

 

 

하느님의 아들이 인간이 되어 내 죄를 위해 피 흘리심으로 내가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얻는다는 것을, 지금 진정으로 의미 있는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그것은 실로 큰 믿음의 은사다. 이런 믿음을 통해 삶이 바뀌고 삶의 의미와 기쁨과 보람을 찾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면 그보다 다행스런 일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한 사실은 이제 이런 교리가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그렇게 의미 있는 것으로 여겨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실 이런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고 고민할 필요는 없다. 이는 신학자 큉도 지적했듯이 로마시대의 형법 사상을 기초로 성립된 이런 특수 해석을 믿고 안 믿고가 기독교의 핵심 문제도 아닐뿐더러, 성경의 기본 메세지도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완전한 하느님이시고 동시에 완전한 인간이셨다는 교리,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겸유하셨다고 주장하는 ​이른바 양성론이라는 것도 마찬가지다. 4세기 이후 8세기까지의 교회 공의회에서 제정, 공표된 이 같은 고전적 기독론은 그 당시 서양 세계의 가장 보편적인 세계관이었던 그리스 철학의 도움으로 형성된 하나의 역사적 산물이라는 것을, 교리사를 올바로 읽은 사람이면 누구나 알 수 있다. 지금 입장에서 보면 사실 이런 교리는 신약에 나타난 예수님의 본래적 메시지를 그리스적으로 번역한 '빈약한 번역'에 불과하다. 물론 이 교리가 그 당시 제약된 철학적 바탕에서 형성된 것 중 그래도 가장 광범위하게 수용된 형식이겠지만, 이제 그리스 세계에 살지도 않고, 그리스적 사고 양식이나 범주에 의존해 사고하지도 않는 현대인이 이것을 그대로 이해하고 믿으라고 기대하는 것은 무리일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해서도 안된다. 예수를 믿는 것은 이렇게 역사적 조건에 고정된 특수 교리를 받아들이느냐 거절하는냐와는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 역사적인 문맥과 상관없이 이런 교리를 '덮어놓고' 받아들이면 오히려 진정으로 예수님이 오늘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주시는 분인가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게 되는 위험에 빠질 수도 있다.

 

 

​(중략)​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교회가 특정 시기에 특정 필요에 따라 채택한 '예수님에 관한 믿음 (faith about Jesus)' 이 아니라 '예수님의 믿음 (faith of Jesus)을 우리가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예수님과 더불어 믿는 것, 예수님을 따라 믿는 것, 예수님처럼 믿는 것, 예수님과 같은 믿음을 갖는 것이다. 그리스도론(Christology)의 문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본받음(imitatio Chisti)'의 문제라는 것이다.

 

 

​사실 공관 복음서(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에 나타난 대로의 예수님은 자기 스스로를 선포하신 적이 없다. 내가 하느님의 아들이요, 하느님이니 너희는 나를 그렇게 믿으라고 하시지 않았다. 공허한 이론을 따지면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형이상학적으로, 본체론적으로 캐고 앉아 있는 것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신 일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결국 '그리스도같이(Christ-like)' 되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도 인간적인 제약을 극복하고 삶에서 승리하셨으니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굳은 믿음을 가지고 그를 따라가는 것, 그리하여 그가 실존의 한계를 초월하여 자유를 얻으신 것처럼 우리도 그 자유의 세계를 향해 나가겠다는 마음이 그 핵심이라고 본다.

 

 

이렇게 말하면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이셨으니까 우리와는 다르지 않는가? 우리가 감히 어떻게 그가 사신 삶의 원리대로 살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은 엄두도 못낼 일이요, 이를 시도하는 것은 우리의 분수를 모르는 교만이라고 생각하며 꽁무니를 빼고 싶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마음을 갖는 것은 예수님이 '참으로 하느님(vero Deus)'이시요. '참으로 사람(vero homo)'이시라는 교리에도 어긋나는 일이고, 예수님은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히브리스 4:15)'라는 성경의 가르침에도 맞지 않는다. 예수님은 '철두철미 완전한 사람'으로서 우리처럼 슬픔과 고독과 절망과 고뇌와 고난과 유혹을 다 당하시고 우리처럼 넘어지고 좌절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서 이것을 이기신 분, 성경의 용어대로 하면 '죄 없으신 분'이었다. 예수님이 철저히 인간적 처지에서 시험을 당하셨다는 것을 부정함은 예수님의 시험이 하나의 우스개거리에 지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블로그 지기 주 : 정확하지는 않지만 언젠가 도올 김용옥 선생의 EBS강의에서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가 "주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라는 마지막 독백이 없었다면 기독교는 종교가 될 수 없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있지만, 그 때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잘 몰랐다. 이제야 만약 예수가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죽으면 곧바로 하느님의 옆자리에 앉아 죽은자를 심판하는 자리에 있을 것이라는 것을 선언하고 행동했다면, 모든 예수의 행적은 사기극에 불과하게 됨을 알겠다. 즉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은 성경의 말씀이 아니라 후대에 기독교의 교리로 자리 잡은 것이라는 사실에 이해가 된다] ​

 

 

지금까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께서 삶과 죽음을 통해 몸소 가르치고 실증하신 그 방법, 그 스타일대로 사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이야기를 했는데, 이런 경우 우리가 묻지 않을 수 없는 첫째 질문은 예수님이 가르친 것이 무엇인가, 그가 전하신 복음의 핵심은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복음서의 기록에 의하면 예수님이 가르침을 시작할 때 제일 먼저 외치신 것, 그리고 그의 말과 행동과 생각의 중심을 이룬 것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마태복음 4:17)' 하는 것이었다. 전에도 약간 언급했지만 여기서 '회개'라는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고 고친다' 정도의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누가복음 13:3)'고 하신 말씀처럼 우리의 사할에 관계되는 문제다. 원문의 '메타노이아'가 의미하는 것은 '의식 구조의 개변'이다. 보는 눈이 달라지고 가치관과 세계관이 변화되는 것이다. 실재를 꿰뚫어보는 일이다. 허상을 벗기고 실상을 찾는 일이다. 일상적인 용어를 쓰면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 혹은 '사물의 본성'을 보는 것이요, 성경의 용어로 하면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 (요한일서 3:2)' 혹은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 (고린도전서 13:12)'이다. 예수님의 표현대로 하면 '어린아이처럼 되는 것 (마태복음 18:3)', 마음이 청결해 지는 것 (마태복음 5:8)' 등이다. 심리학적 용어로 하면 '새로운 의식' 혹은 '우주 의식'를 갖게 되는 것이요, 시적으로 표현하면 영국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가 말한대로 '감각의 문들'을 깨끗이 하는 일이다. 너무 많이 늘어 놓았다. 요점은 결국 예수님이 우리에게 전하는 기본 메세지는 참 실재, 참 하느님, 그의 빛, 그의 생명으로 들어가라는 "메타노이아'로의 초청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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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동안 필자는 2000년대 초반 김흥호 목사님의 '생각없는 생각" 이라는 책자를 처음으로 접하면서 종교에 대한 사색을 하고 되었고 선생님의 글들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만 있으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는 생각을 했다. 鉉齋 김흥호 목사님의 스승이신 多夕 유영모 선생님은 '씨알의 소리' 함석헌 선생의 스승이기도 하셨으며 우리나라 최초의 신학자였다고 한다. 도대체 저런 깨우친 분들이 믿는 예수님이라면 나도 한번 믿어보야야 겠다고 기존 교회에 눈길을 던져 보지만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하신 진정한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주장을 먼저 믿는 것이야말로 기독교의 본질인 것 같아 기독교에 대한 거부감만 키우고 있었다. 그러나 오강남 교수의 글을 통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에 관한 믿음 (faith about Jesus)'이 아니라 '예수님의 믿음 (faith of Jesus)'을 우리가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을 알고, 비로써 유영모 선생님과 김흥호 목사님의 글들이 드디어 조금 이해되기 시작했다. 정말 기쁜 날이다.

 

 

이렇게 기쁜 날을 맞이하여 그동안 이해되지 않았던 '생각없는 생각'에 있는 김흥호 목사님의 글을 몇가지 옮겨본다.

 

 

 

아픔

 

복음이 예수의 복음이 되는 동안은 아직 예수의 복음도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도 아니다. 복음은 내 복음이요 내 말씀이 되어야 한다. 내 속에서 나오는 내 복음만이 나의 복음이요, 하나님의 말씀이다. 나의 복음은 내 배 밑에서 나오는 밑소리여야 한다. 밑소리가 믿음이요, 뱃소리가 복음이다. 복음은 참말이요 거짓일 수 없다. 남에게서 들은 소리는 그것이 아무리 주님의 말씀이라도 참말이 아니다. 내 살이 찢기고 내 피가 흐를 때 나오는 소리라야만 참 소리다. 그것은 내 영혼이 깨어나는 소리요, 내 정신이 눈뜨는 소리라야 한다. 비록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해도 그것이 학문이 되고 교리가 되면 그것은 이미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다. 하나님도 하나님이라고 불리는 동안에는 하나님이 아니다. 그것은 개념이요, 말뿐이다. 그리스도도 그것이 교리의 대상이 되는 한 말 뿐이요, 개념뿐이다. 내 살은 먹을 것이요, 내 피는 마실 것이라고 한다. 예수의 살은 먹을 것이요 그리스도의 피는 마실 것이지, 연구하고 생각할 대상이 아니다. 연구와 생각의 대상은 개념뿐이다. 바울은 십자가 외에는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다고 한다. 십자가는 고난이지 개념이 아니다. 기독교가 모든 사상을 능가할 수 있는 것은 모든 개념을 능가하는 고난의 체험을 핵심 내용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난 속에는 싸움이 없다. 그것은 욕심을 낼 대상이 못 되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통일은 고난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고난은 고난을 통해서만 이해된다. 십자가의 이해는 이해이면서 이해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아픔을 가지는 것이다. 사랑의 본질은 아픔을 가지는 것이다. 아픔의 세계만이 참된 세계요, 그 세계만이 나의 세계다. 나다. 나를 낳아야 한다. 생산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아픔이 있고 진통이 있다. 아픔 없는 삶, 그것은 죽은 삶이다.

 

 

 

터져 나옴

 

부활은 터져 나옴을 말한다. 기쁨이 터져 나오고, 웃음이 터져 나오고, 말씀이 터져 나오고, 불이 터져 나오고, 물이 터져 나오고, 싹이 터져 나오고, 꽃이 터져 나오듯 생기가 차고 넘쳐서 터져 나옴을 부활이라고 한다. 부활이 없다는 사두개파 교인이 예수에게 "부활한 후에는 어떤 사람 같이 사느냐"고 물었을 때 예수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한 채 "부활이란 시집가고 장가드는 그런 문제가 아니다. 부활이란 영원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터져 나옴을 말하는 것이다"라고 대답했다. 옛날 모세가 미디안에서 양을 치고 있을 때 가시덤불에서 하늘의 소리가 터져 나왔다. "모세야, 모세야. 여기는 거룩한 땅이니 네 신을 벗어라." 모세가 꿇어 엎드려 "누구십니까'하고 물었다. 그때 소리의 주인공은 "나는 있고 있는 자'라고 대답했다. 마치 바닷물이 넘치고 넘쳐 둑을 터뜨리고 밀려오듯이, 현상계를 터뜨리고 들려오는 영원한 목소리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있고 있다는 존재는 넘치고 넘치는 생명의 풍성이요, 터지고 터지는 부활의 기쁨이다. 때가 찼다고 하든, 때가 익었다고 하든, 무르익은 과일이 터져 나오듯 터져 나오는 생명이기에 그들은 살아 계신 하나님이라고 소리질렀다. 살아 계신다는 것은 죽지 못해 살아 있다는 말이 아니다. 죽음을 넘어서 지옥을 터뜨리고 살아온다는 말이다. 부활은 생명의 본질이요, 핵심이다. 넘쳐 나오는 생명이 아니면 그것은 이미 생명이 아니다. 바울은 다메섹 길 위에서 터져 나오는 그리스도를 만나게 된다. 그 순간에 바울은 자기 속에서 터져 나오는 생명의 기쁨을 견딜 수가 없어, 그 기쁨을 전하기 위하여 밤낮으로 뛰어다닌다. 수많은 박해가 그를 막았고 환난과 곤고와 핍박과 기근과 헐벗음과 위험과 사망과 권세와 현재와 장래와 높음과 깊음과 그밖에 모든 피조물이 그를 막으려 했으나 터져 나오는 하나님의 사랑을 막을 도리는 없었다.

 

 

 

기쁨

 

기독교의 본질은 한마디로 기쁨이다. 복음이라는 유엔게리온의 의미는 기쁨을 전한다는 말이다. 성경은 기쁨이라는 말로 가득 차 있다. 동방박사의 기쁨, 마리아의 기쁨, 천사들의 기쁨, 하나님의 기쁨, 별들의 기쁨, 목자들의 기쁨, 땅의 기쁨, 자연의 기쁨, 사람의 기쁨 등, 기독교는 인간의 본질을 기쁨으로 본다. "이는 내 사랑하는 자요, 내 기뻐하는 자다" 하는 것이 인간에 대한 신의 계시다. 예수도 자기 제자들에게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라고 말씀하셨고, 성령의 열매도 사랑과 기쁨이요, 바울이 교인들에게 전한 것도 넘치는 기쁨이다. 바울은 옥중에서 죽음을 기다리면서도 끓어오르는 기쁨을 어쩔 수가 없어서 넘치는 기쁨을 나눠주기 위하여 붓을 들어 이렇게 썼다.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 그리고 항상 기뻐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생활이라고 못을 박는다. 기쁨은 물론 피상적인 기쁨이 아니다. 깊은 곳에서 솟아오르는 기쁨이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에서 터져 나오는 기쁨이다. 그 기쁨은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라 오직 깊은 곳에서 터져 나오는 의로운 것이다. 태초에 기쁨이 있었다. 기쁨이 하나님과 같이 있었다. 기쁨이 곧 하나님이다. 만물이 기쁨으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어느 것 하나도 기쁨 없이는 된 것이 없다. 이 우주에 꽉 차 있는 것이 기쁨이다. 이 기쁨을 사는 것이 믿음이요, 이 기쁨을 보여주는 것이 사랑이며, 이 기쁨을 전하는 것이 복음이다

 

 

스승

 

죽음은 학교의 스승과 같다. 스승과 부딪칠 수 있는 학생은 스승을 사랑하는 학생이요, 스승을 사랑할 수 있는 학생은 학문이 무엇인지 아는 학생이다. 인생을 아는 사람은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는다. 도리어 죽음을 넘어서서 죽음이 되어버린다. 마치 실력 있는 학생이 선생을 넘어서서 선생이 되어버리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죽음을 이기는 길은 죽음이 되는 길밖에 없다. 무를 없애는 길은 무가 되는 수밖에 길이 없다. 무의 무화, 이것이 허무를 극복하는 길이다. 죽는 것이 아니라 죽음이 되고 마는 것이다. 선생이 되고 말듯이 죽음이 되고 마는 것이다. 선생이 되는 길은 이치를 깨치는 길밖에 없고 죽음이 되는 길은 진리를 깨치는 길밖에 없다. 진리를 깨친 사람만이 죽음에 뛰어들 수가 있다. 수영할 줄 아는 사람만이 물에 뛰어들 수 있는 것처럼 인생을 깨친 사람만이 죽음에 뛰어들 수 있다. 선생을 만나는 길이 학문에 있는 것처럼 죽음에 뛰어드는 길은 진리에 있다. 진리가 죽음으로부터 자유케 하는 것이다. 죽음을 넘어서는 길은 죽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진리에 있고, 존재에 도달하는 길은 존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시간에 있다. 시간이 존재에 도달하는 길이다. 시간이라는 것은 철이나 마찬가지다. 철이 들어야 감이 익듯이 철이 들어야 사람이 되는 것이다. 죽음을 넘어서서 사는 사람이 산 사람이요 자유의 사람이다. 죽음은 우리의 원수가 아니다. 죽음은 은인이요 스승이요 나를 나답게 해주는 존재이다. 스승 없이는 학생이 없듯이, 죽음 없이 인생은 없다. 죽음을 무서워하느냐, 죽음을 사랑하느냐에 따라 어리석은 사람과 깬 사람의 차이가 생긴다. 죽음을 사랑하는 사람은 깬 사람이다. 죽음은 스승이기 때문이다. '사'는 '사'이다. 정말 스승은 죽음뿐이다. 죽음을 사랑하는 사람이 곧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철학은 죽음의 연습이다.

 

 

* 김흥호 목사님의 글은 정말 가슴을 파고든다. 그러나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 부분들이 너무 많다. 김흥호 목사님은 30대 시절에 유영모 선생님을 따라 다닌지 삼년이 지난 어느날, 삼각산 보헌봉 폭포가 있는 곳으로 야외 예배를 가서, 요한복음의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 이라는 제목의 강의를 듣고 깨닮음을 얻었다고 한다. 그리고 50에 예수를 만나고 60에 그리스도를 만났다고 했다. 그리고 얼마전 93세에 돌아가셨다. 나는 60이 되었는데 언제쯤 이런 깨닮음을 만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