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참전계경 (參佺戒經),8理, 제 23사 自任(자임) 본문
참전계경 (參佺戒經),
8理, 366事를 통한 인생지혜 탐구 31
아름답고 복된 말씀들이
줄줄이 이어진다.
갈 길이 먼 만큼, 누릴 기회도 많이 남아있다.
다음 장을 열어보자.
이번에는 제 23事로 넘어간다.
앞에서 誠의 세번째 줄기인 不忘(불망)에
대한 설명이 있었고, 이제는 1用,
그 첫번째 쓰임으로 自任(자임)에 대한
말씀이다.
誠 3體 1用 (성 3체 1용)
제 23사 自任(자임)
自任者(자임자)는
不由他而(불유타이)
專基自然之誠(전기자연지성)이니
不求而自至(불구이자지)하여
如春秋之代序(여춘추지대서)하며
日月之相替(일월지상체)니라
'스스로 맡는다는 것은
다른 어떤 것에 의지하지 않고
오직 자연스럽게 자신으로부터
일어나는 정성을 말하느니라
구하지 않아도 스스로 이르게 되는 것이
마치 봄과 가을이 번갈아 오며
낮과 밤이 서로 바뀌는 것과 같으니라'
역시 오묘한 말씀이다.
3體 不忘(불망)을 설명하면서도
억지로나 노력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되는 이치를 설명했다.
깨닫지 못하면 수고만 하고 열매가 없다.
아니 도리어 그릇된 힘씀은 좌절과 낙담,
교만과 자랑이라는 악한 열매를 맺는다.
거꾸로 좌절하고 교만한 사람은
도를 따라 행하지 않음을 증거한다.
자연스럽게, 저절로 되는 것을 경험한
사람은 좌절할 것도 없고,
교만할 일도 없다.
그것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한다.
'내가 한 일이 아닙니다.
모두가 하늘의 은덕이요,
부모와 조상, 세상의 도움으로
이룰 수 있었습니다'는 고백이 나오는 것이다.
그런데 참 사람이 간사한 것이
이런 표현은 배워가지고 잘 쓴다.
특히 교회가면 툭하면
'하나님이 다 하셨습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입에 배였다.
그런데 잘 보면 그것은 허울일 뿐이고
'나니까 해냈지'
'은혜도 아무나 받는 것이 아니야'하는
속내가 들여다 보인다.
은근히 교만하고, 또 자주 좌절한다.
도를 껍데기만 배워가지고 써 먹으려
하는데 어림없다.
제대로 깨달음에 이르게 되면
아예 그런 의식도 없다.
여전히 '나'라는 분리된 자아로 생각하니
하나님이 도우셨다, 은혜다는 말이 나오지
'나'라는 자아가 사라진 경우에는
아예 그런 말 자체가 필요 없다.
그냥 이루어진 일이 하늘이 한 일이 되고,
내 안에서 역사하는 신성이
나를 통해 발휘된 것을 아니
이런 말 조차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내가 없는데 무슨 나를 도우는 대상이 있는가?
예수가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한 말의 의미를
사람들은 모른다.
그저 겸손하라는 정도로만 생각한다.
'무주상보시' 즉 보시를 했다는 생각도 없는
보시가 참된 보시라는 불교의 가르침도
겸손으로 해석하는데 미안하지만
그런 겸손을 '거짓 겸손' 혹은
'고차원적인 교만'이라고 한다.
도에 행하면 자신을 높이거나
낮추는 말도 필요가 없다.
그냥 일어난 일이요,
하늘의 때와 시간이 맞아서 이루어진 일일 뿐이다.
그 때 마침 내가 거기 있었던 것을
자기가 대단한 일이나 한 것처럼
떠들어 대면 웃기는 상황이 된다.
빚맞아서 평범한 내야 땅볼이 되었는데
그로 인해 결승점을 얻었다면
그게 자랑할 일인가?
주자가 없었으면 단순히 아웃 카운트 하나
올라갈 일이었을 뿐이고,
병살타나 되었으면 큰 욕을 먹을 수도 있었던 일이다.
제일 어리석은 자가 모든 일을
자기 중심으로 생각하고 해석하는 것이다.
계속해서 '내가, 나는...'이 나오는데
그렇게 천국도 내가 개별존재로 가고싶고,
상도 내가 따로 받고 싶다.
그 자체가 천국이 무엇인지,
구원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증거다.
물 방울이 바다로 흡수되듯이
자기 개체가 하나님 안으로 사라지는 것이
구원이요, 영생인데...
많은 종교인들이 절대로 그러고 싶어하지 않는다.
'자기'가 가야 하고, '자기'가 누려야 한다.
진정 하나님을 사랑하고,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이 구원임을 안다면
이런 욕심과 착각에서 속히 벗어나야 한다.
이 말씀에서 '스스로 맡는다'는 의미가
기가막히게 풀이 되었다.
가만 있어도 저절로 된다거나
속에서 자연스럽게 나오게 된다는 그런 의미는 아니다.
미혹된 마음을 본성으로 다스리고,
내 안에 계신 성령을 믿고
신뢰하고 있으면 자연스럽게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 사명등이
드러나게 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8理, 366事를 통한 인생지혜 탐구 31
아름답고 복된 말씀들이
줄줄이 이어진다.
갈 길이 먼 만큼, 누릴 기회도 많이 남아있다.
다음 장을 열어보자.
이번에는 제 23事로 넘어간다.
앞에서 誠의 세번째 줄기인 不忘(불망)에
대한 설명이 있었고, 이제는 1用,
그 첫번째 쓰임으로 自任(자임)에 대한
말씀이다.
誠 3體 1用 (성 3체 1용)
제 23사 自任(자임)
自任者(자임자)는
不由他而(불유타이)
專基自然之誠(전기자연지성)이니
不求而自至(불구이자지)하여
如春秋之代序(여춘추지대서)하며
日月之相替(일월지상체)니라
'스스로 맡는다는 것은
다른 어떤 것에 의지하지 않고
오직 자연스럽게 자신으로부터
일어나는 정성을 말하느니라
구하지 않아도 스스로 이르게 되는 것이
마치 봄과 가을이 번갈아 오며
낮과 밤이 서로 바뀌는 것과 같으니라'
역시 오묘한 말씀이다.
3體 不忘(불망)을 설명하면서도
억지로나 노력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되는 이치를 설명했다.
깨닫지 못하면 수고만 하고 열매가 없다.
아니 도리어 그릇된 힘씀은 좌절과 낙담,
교만과 자랑이라는 악한 열매를 맺는다.
거꾸로 좌절하고 교만한 사람은
도를 따라 행하지 않음을 증거한다.
자연스럽게, 저절로 되는 것을 경험한
사람은 좌절할 것도 없고,
교만할 일도 없다.
그것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한다.
'내가 한 일이 아닙니다.
모두가 하늘의 은덕이요,
부모와 조상, 세상의 도움으로
이룰 수 있었습니다'는 고백이 나오는 것이다.
그런데 참 사람이 간사한 것이
이런 표현은 배워가지고 잘 쓴다.
특히 교회가면 툭하면
'하나님이 다 하셨습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입에 배였다.
그런데 잘 보면 그것은 허울일 뿐이고
'나니까 해냈지'
'은혜도 아무나 받는 것이 아니야'하는
속내가 들여다 보인다.
은근히 교만하고, 또 자주 좌절한다.
도를 껍데기만 배워가지고 써 먹으려
하는데 어림없다.
제대로 깨달음에 이르게 되면
아예 그런 의식도 없다.
여전히 '나'라는 분리된 자아로 생각하니
하나님이 도우셨다, 은혜다는 말이 나오지
'나'라는 자아가 사라진 경우에는
아예 그런 말 자체가 필요 없다.
그냥 이루어진 일이 하늘이 한 일이 되고,
내 안에서 역사하는 신성이
나를 통해 발휘된 것을 아니
이런 말 조차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내가 없는데 무슨 나를 도우는 대상이 있는가?
예수가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한 말의 의미를
사람들은 모른다.
그저 겸손하라는 정도로만 생각한다.
'무주상보시' 즉 보시를 했다는 생각도 없는
보시가 참된 보시라는 불교의 가르침도
겸손으로 해석하는데 미안하지만
그런 겸손을 '거짓 겸손' 혹은
'고차원적인 교만'이라고 한다.
도에 행하면 자신을 높이거나
낮추는 말도 필요가 없다.
그냥 일어난 일이요,
하늘의 때와 시간이 맞아서 이루어진 일일 뿐이다.
그 때 마침 내가 거기 있었던 것을
자기가 대단한 일이나 한 것처럼
떠들어 대면 웃기는 상황이 된다.
빚맞아서 평범한 내야 땅볼이 되었는데
그로 인해 결승점을 얻었다면
그게 자랑할 일인가?
주자가 없었으면 단순히 아웃 카운트 하나
올라갈 일이었을 뿐이고,
병살타나 되었으면 큰 욕을 먹을 수도 있었던 일이다.
제일 어리석은 자가 모든 일을
자기 중심으로 생각하고 해석하는 것이다.
계속해서 '내가, 나는...'이 나오는데
그렇게 천국도 내가 개별존재로 가고싶고,
상도 내가 따로 받고 싶다.
그 자체가 천국이 무엇인지,
구원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증거다.
물 방울이 바다로 흡수되듯이
자기 개체가 하나님 안으로 사라지는 것이
구원이요, 영생인데...
많은 종교인들이 절대로 그러고 싶어하지 않는다.
'자기'가 가야 하고, '자기'가 누려야 한다.
진정 하나님을 사랑하고,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이 구원임을 안다면
이런 욕심과 착각에서 속히 벗어나야 한다.
이 말씀에서 '스스로 맡는다'는 의미가
기가막히게 풀이 되었다.
가만 있어도 저절로 된다거나
속에서 자연스럽게 나오게 된다는 그런 의미는 아니다.
미혹된 마음을 본성으로 다스리고,
내 안에 계신 성령을 믿고
신뢰하고 있으면 자연스럽게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 사명등이
드러나게 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태어나면서부터 부여받은 재능이나 은사,
그리고 성격 등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를
알고 자연스럽게 그 길로 감으로
하늘의 명을 성취하게 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거나
압력에 의하여 원치 않고,
잘 하지도 못하는 일에 매여 살지 않는다.
하늘이 주신 임무와 사명을
깨닫고 남들이 뭐라고 하든지
자연스럽게 그 일을 열심히, 재미있게
행하는 것이다.
그 자연스러운 모습이 사계절이
바뀌는 것과 같고, 낮 밤이 부드럽게
순환하는 것과 같아서
인생도 각 단계별로 무난하게
성장을 이루고, 성취도 내게 되는 것이다.
바울이 자신의 복음 전파 사명에 대해서
자신을 가지고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된 바울은...'
(갈라디아서 1:1)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1:12)
이런 확신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런 확신은 내가 가지자고 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내 본성을 발견하고, 성령의 빛을 따라
나의 임무와 사명을 깨달음으로 일어나는 것이다.
자신의 삶을 잘 돌아보라.
하는 일이 재미가 없고, 고달프며
발전도 열매도 잘 없다면
무엇이 근본적인 문제인지를 생각해 보라.
외부의 권면이나 압력 등으로
억지로 그 일을 하기 때문에 그럴 수 있다.
혹은 먹고 살아야 하기에
어쩔 수 없이 해야 한다고 여길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살아서는 인생이
무의미하다.
지금 당장이라도 가는 길을 멈추고
진지하게 하나님께 물어보라.
그리고 하나님이 내게 주신 사명을
발견하고, 그 임무를 기쁨으로 완수하는
인생을 살라.
거기에 당당함과 보람이 있다.
저절로 정성이 생기고, 지극해진다.
그 외에는 재물과 인기, 권력이
아무리 주어져도 아무런 의미를 못준다.
잠시 잠깐 남들의 칭찬과
부러움의 눈길 때문에 일시 기쁠 줄 모르지만
곧 허무에 빠지게 된다.
그런 삶을 청산하고,
내 안에서 솟아나는 생명의 능력으로 살라.
예수는 그것을 '나를 믿으면 얻게 되는 성령'이라고
했다. 그리고 '뱃속에서 영원히 솟아나
목마르지 않는 생수의 강이 된다'고 했다.
일년을 살고, 단 하루를 살아도
이런 삶을 살다가 가도록 이 땅에 왔다.
'천지인 공부 > 참전계경' 카테고리의 다른 글
1. 참전계경과 을파소(乙巴素) 선생 (0) | 2019.02.18 |
---|---|
참전계경(叅佺戒經) 개요 (0) | 2019.02.18 |
참전계경 (參佺戒經),8理, 제 22事 誠 3體 不忘(불망) (0) | 2019.02.16 |
참전계경 (參佺戒經),8理, 제 21사 默安(묵안) (0) | 2019.02.16 |
참전계경 (參佺戒經),8理, 제 20사 斥情(척정) (0) | 2019.02.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