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삼일신고 풀이 16/단군신화 해설 8 본문
性通功完(성통공완)을 꿈꾸며...
三一神誥(삼일신고) 풀이 16
다음으로 넘어간다.
이번에는 쑥과 마늘, 그리고 100일과
삼칠일 등의 의미를 밝혀내는 일이다.
사람이 되고 싶어 하는 곰과 호랑이에게
환웅이 제시한 조건은 좀 별나다.
'영험한 쑥 한 심지와 마늘 스무개를 주면서
이것을 먹고 100일간 햇 빛을 보지 않으면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풀어야 할 수수께끼들이 제법 많다.
엉터리로 풀면 경박하고
난해하게 풀면 의미가 없다.
이치에 맞게 풀어 공감을 이끌어 내어야 하고
숨은 뜻을 밝혀 감탄과 적용까지
나가도록 에너지를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
먼저 다루어야 할 것은 환웅이 제시한
조건이 실제적인 효력을 내는 비법인지,
아니면 단순한 테스트용 소품이었는지부터
살펴야 한다.
마치 선악과에 대한 해석과도 같은데
그 열매가 진짜 그런 효력을 내는 것인지,
아니면 단순한 나무열매인데
먹지말라는 명령이 주어졌기 때문에
먹지 않는 것이 선이요, 먹는 것이 악이 되는
그런 나무인지를 밝히는 것과 같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쑥과 마늘, 햇볕 안보기가
동물을 사람으로 만드는 비법인지,
아니면 쑥과 마늘, 동굴생활 등은
기질과 순종심을 확인하는 하나의
방편에 지나지 않는 것인지 명확하게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항상 양 극단이 존재한다.
일각에서는 진짜로 짐승을 사람 만드는 것으로는
믿지 않아도 진시황의 불로초 보다
쑥과 마늘이 건강에 좋다며 만병통치약으로 선전하는 사람들이 있다.
반면 쑥이나 마늘, 동굴생활 등은
아무 상관 없고 순종심을 확인하는 방편이니
여기에는 전혀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선악과 시험도 그렇게 나뉘는데
어쨋든 한쪽 극단으로 치우치는 것은 해롭다.
극단을 주장하려면 양쪽을 다 취해야 한다.
'집기양단'이라고 둘 다 취하라는 것이다.
형식과 본질, 이데아와 질료, 물질과 영혼 등
양 극단을 모두 취할 수 있는 수준이
중용의 도를 아는 자요,
이원론을 극복한 수준이다.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니다'로 치닫는 극단은
대립과 분열만 일으켜 결국 다 무너지게 한다.
그러나 의식수준이 이 단계에 이르지 못한
자에게는 이게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된다.
어떻게 하나이면서 셋이고,
신이면서 인간이요,
자유의지와 신의 주권이 조화가 되느냐고
화를 내며 덤벼든다.
자신이 이원론에 갇힌 의식이라는 것 조차
인식 못하면서 진리를 비판하려 드니
스스로 진리를 대적하는 꼴이다.
이런 사람과는 대화 조차 불가능하다.
자기 생각으로 맞으면 옳고 선하며,
어긋나면 틀리고 악하다.
종교인들, 특히 기독교인들 중에
이런 의식으로 사는 사람들이 많다.
가까이 하고 싶지 않은 부류다.
괜히 옆에 있다가 엉뚱한 불똥만 튀어
싸움에 말려들기 일쑤니 피하는게 상책이다.
영험한 쑥과 마늘, 동굴 생활...
그 자체로 의미가 있고, 동시에 그를 넘어서는
메시지가 있다.
그걸 찾아 밝혀야 한다.
본문을 제대로 읽어보면 그냥 쑥과 마늘이
아니다. 영험한 쑥 한심지와 마늘 20개다.
곰이나 호랑이가 쑥과 마늘을 먹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마찬가지로 사람도 그것만 먹고 100일을
살 수 없다.
그러나 '영험'한 것일 경우에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영험하니 그 안에 신비한 효력이 들어있어
안죽게 한다고도 할 수 있지만
그런 영험은 아닌 것 같다.
여기서 성경의 도움이 필요하다.
쑥은 쓴 맛의 대표요,
마늘은 매운맛을 대표하는 식물이다.
우리야 매운 맛을 알지만
재미있게도 성경에는 매운 맛이 안나온다.
그런데 성경에서 마늘은
정력강장제임을 암시한다.
광야에서 불평을 하면서 애굽에서 먹던
부추와 마늘 이야기를 하는데
단순한 미각문제가 아니다.
정력이 떨어진 것, 그래서 누릴 즐거움을
제대로 못누리는 불평을 한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는 쑥과 같은 의미로
사용된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일부러 구분하지 않고
쑥과 마늘을 하나로 보고 푼다.
쑥은 성경 여러곳에 나오는데
한 마디로 고통을 주는 쓴 맛을 의미한다.
요한계시록을 보면 작은 책을 삼키라고
하는데 입에서는 달지만
배에서는 쓰게 되었다(요한계시록 10:10)
고 나와있다. 진리의 속성이 암시되어 있다.
그리고 성경 여러 곳에서 쑥은 형벌과
고통의 상징으로 나온다 (신명기 28:18,
잠언 5:4, 예레미야 9:15 등).
독초와 같은 단어다.
그럼 대충 감이 잡힌다.
쑥과 마늘은 살도록 주어진 것인 동시에
고통과 죽음을 맛보게 주어진 것이다.
동굴도 마찬가지다.
동굴은 생존을 위한 거주지이지만
빛이 없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한다.
여기에 깊은 뜻이 있다.
생명과 사망이 공존하는데
인간됨의 비밀, 참 사람됨의 비결이 들어 있다.
일단 영험하니 생명이다.
그러나 쑥과 마늘, 어둠은 죽음이다.
하지만 왜 죽음인지 생각해 봐야 한다.
단 것에 익숙한 자, 그러니까 세상에 빠져
그 달콤함에 취한 자에게는 쑥과 마늘은
사망과 같다.
그러나 우리가 어른이 되어 가면서
이상한 미각의 변화를 체험한다.
그 매운 초장이나 고추냉이에 회를 찍어먹고
쓴 술을 마시며, 발효시킨 시큼한 김치,
심지어 썩힌 홍어까지...
물론 욕심의 발전으로 보면 부정적이나
깊은 맛을 알아가는 차원에서는 성숙이다.
마찬가지 원리가 적용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웅족이나 호족 등 동물 수준의
사람들에게는 하고싶은 욕구를 따라 사는 것이
그 특징이었다.
성경의 표현을 빌리면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하는 자를 따라 마음의 원하는 대로
육신의 욕심을 따라 행하는 수준'이라는 것이다.
그런 수준에 매인 자들을 향해
도전을 던진 것이 바로 쑥과 마늘,
어두운 동굴생활이다.
단순한 고통을 참으라는 의미만이 아니라
영적인 양식, 즉 육체의 소욕을 제어하는
계명을 듣고 순종하여 이겨내라는 의미인 것이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에게 10계명을 주신 것과
같은 이치다.
따라서 진정으로 사람이 되기를 원했다면
이러한 시험을 이해하고
인내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고통의 식물인 쑥과 마늘로부터
영험한 생명력을 얻었늘 것이다.
외부의 햇빛을 보지 않아도 죽지 않는
내면의 빛을 받았을 것이다.
곰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진정한 소망이 아니라
단순히 사람됨의 영광만 보고 탐을 냈었다면
이 순종은 불가능하다.
호랑이의 실패는 단순한 인내의
부족이 아니라 그 중심, 즉 사람되고자 했던
소원이 가짜였던 것이다.
오늘날도 같은 원리가 적용된다.
진정으로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
그리스도의 수준에 이르고 싶어하는 자는
그 어떤 도전과 고난이 주어져도
개의치 않고 받아낸다.
그러나 기복신앙으로, 영광 얻고자 하는
얄팍한 심리로 종교에 들어온 자들은
조금 어려운 시험만 닥쳐도 뛰쳐 나가고 만다.
그 자체로 스스로 가짜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예수가 40일을 금식하고도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인간의 생명은
하나님의 말씀에 있다고 강변했다.
아무리 쑥과 마늘 같고,
빛 없는 어둠의 동굴 같은 삶이라 할지라도
진정 하나님의 자녀로 합당한 삶을
추구하는 자들은 십자가 지는 것을
두려워 하지 않는다.
三一神誥(삼일신고) 풀이 16
다음으로 넘어간다.
이번에는 쑥과 마늘, 그리고 100일과
삼칠일 등의 의미를 밝혀내는 일이다.
사람이 되고 싶어 하는 곰과 호랑이에게
환웅이 제시한 조건은 좀 별나다.
'영험한 쑥 한 심지와 마늘 스무개를 주면서
이것을 먹고 100일간 햇 빛을 보지 않으면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풀어야 할 수수께끼들이 제법 많다.
엉터리로 풀면 경박하고
난해하게 풀면 의미가 없다.
이치에 맞게 풀어 공감을 이끌어 내어야 하고
숨은 뜻을 밝혀 감탄과 적용까지
나가도록 에너지를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
먼저 다루어야 할 것은 환웅이 제시한
조건이 실제적인 효력을 내는 비법인지,
아니면 단순한 테스트용 소품이었는지부터
살펴야 한다.
마치 선악과에 대한 해석과도 같은데
그 열매가 진짜 그런 효력을 내는 것인지,
아니면 단순한 나무열매인데
먹지말라는 명령이 주어졌기 때문에
먹지 않는 것이 선이요, 먹는 것이 악이 되는
그런 나무인지를 밝히는 것과 같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쑥과 마늘, 햇볕 안보기가
동물을 사람으로 만드는 비법인지,
아니면 쑥과 마늘, 동굴생활 등은
기질과 순종심을 확인하는 하나의
방편에 지나지 않는 것인지 명확하게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항상 양 극단이 존재한다.
일각에서는 진짜로 짐승을 사람 만드는 것으로는
믿지 않아도 진시황의 불로초 보다
쑥과 마늘이 건강에 좋다며 만병통치약으로 선전하는 사람들이 있다.
반면 쑥이나 마늘, 동굴생활 등은
아무 상관 없고 순종심을 확인하는 방편이니
여기에는 전혀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선악과 시험도 그렇게 나뉘는데
어쨋든 한쪽 극단으로 치우치는 것은 해롭다.
극단을 주장하려면 양쪽을 다 취해야 한다.
'집기양단'이라고 둘 다 취하라는 것이다.
형식과 본질, 이데아와 질료, 물질과 영혼 등
양 극단을 모두 취할 수 있는 수준이
중용의 도를 아는 자요,
이원론을 극복한 수준이다.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니다'로 치닫는 극단은
대립과 분열만 일으켜 결국 다 무너지게 한다.
그러나 의식수준이 이 단계에 이르지 못한
자에게는 이게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된다.
어떻게 하나이면서 셋이고,
신이면서 인간이요,
자유의지와 신의 주권이 조화가 되느냐고
화를 내며 덤벼든다.
자신이 이원론에 갇힌 의식이라는 것 조차
인식 못하면서 진리를 비판하려 드니
스스로 진리를 대적하는 꼴이다.
이런 사람과는 대화 조차 불가능하다.
자기 생각으로 맞으면 옳고 선하며,
어긋나면 틀리고 악하다.
종교인들, 특히 기독교인들 중에
이런 의식으로 사는 사람들이 많다.
가까이 하고 싶지 않은 부류다.
괜히 옆에 있다가 엉뚱한 불똥만 튀어
싸움에 말려들기 일쑤니 피하는게 상책이다.
영험한 쑥과 마늘, 동굴 생활...
그 자체로 의미가 있고, 동시에 그를 넘어서는
메시지가 있다.
그걸 찾아 밝혀야 한다.
본문을 제대로 읽어보면 그냥 쑥과 마늘이
아니다. 영험한 쑥 한심지와 마늘 20개다.
곰이나 호랑이가 쑥과 마늘을 먹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마찬가지로 사람도 그것만 먹고 100일을
살 수 없다.
그러나 '영험'한 것일 경우에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영험하니 그 안에 신비한 효력이 들어있어
안죽게 한다고도 할 수 있지만
그런 영험은 아닌 것 같다.
여기서 성경의 도움이 필요하다.
쑥은 쓴 맛의 대표요,
마늘은 매운맛을 대표하는 식물이다.
우리야 매운 맛을 알지만
재미있게도 성경에는 매운 맛이 안나온다.
그런데 성경에서 마늘은
정력강장제임을 암시한다.
광야에서 불평을 하면서 애굽에서 먹던
부추와 마늘 이야기를 하는데
단순한 미각문제가 아니다.
정력이 떨어진 것, 그래서 누릴 즐거움을
제대로 못누리는 불평을 한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는 쑥과 같은 의미로
사용된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일부러 구분하지 않고
쑥과 마늘을 하나로 보고 푼다.
쑥은 성경 여러곳에 나오는데
한 마디로 고통을 주는 쓴 맛을 의미한다.
요한계시록을 보면 작은 책을 삼키라고
하는데 입에서는 달지만
배에서는 쓰게 되었다(요한계시록 10:10)
고 나와있다. 진리의 속성이 암시되어 있다.
그리고 성경 여러 곳에서 쑥은 형벌과
고통의 상징으로 나온다 (신명기 28:18,
잠언 5:4, 예레미야 9:15 등).
독초와 같은 단어다.
그럼 대충 감이 잡힌다.
쑥과 마늘은 살도록 주어진 것인 동시에
고통과 죽음을 맛보게 주어진 것이다.
동굴도 마찬가지다.
동굴은 생존을 위한 거주지이지만
빛이 없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한다.
여기에 깊은 뜻이 있다.
생명과 사망이 공존하는데
인간됨의 비밀, 참 사람됨의 비결이 들어 있다.
일단 영험하니 생명이다.
그러나 쑥과 마늘, 어둠은 죽음이다.
하지만 왜 죽음인지 생각해 봐야 한다.
단 것에 익숙한 자, 그러니까 세상에 빠져
그 달콤함에 취한 자에게는 쑥과 마늘은
사망과 같다.
그러나 우리가 어른이 되어 가면서
이상한 미각의 변화를 체험한다.
그 매운 초장이나 고추냉이에 회를 찍어먹고
쓴 술을 마시며, 발효시킨 시큼한 김치,
심지어 썩힌 홍어까지...
물론 욕심의 발전으로 보면 부정적이나
깊은 맛을 알아가는 차원에서는 성숙이다.
마찬가지 원리가 적용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웅족이나 호족 등 동물 수준의
사람들에게는 하고싶은 욕구를 따라 사는 것이
그 특징이었다.
성경의 표현을 빌리면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하는 자를 따라 마음의 원하는 대로
육신의 욕심을 따라 행하는 수준'이라는 것이다.
그런 수준에 매인 자들을 향해
도전을 던진 것이 바로 쑥과 마늘,
어두운 동굴생활이다.
단순한 고통을 참으라는 의미만이 아니라
영적인 양식, 즉 육체의 소욕을 제어하는
계명을 듣고 순종하여 이겨내라는 의미인 것이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에게 10계명을 주신 것과
같은 이치다.
따라서 진정으로 사람이 되기를 원했다면
이러한 시험을 이해하고
인내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고통의 식물인 쑥과 마늘로부터
영험한 생명력을 얻었늘 것이다.
외부의 햇빛을 보지 않아도 죽지 않는
내면의 빛을 받았을 것이다.
곰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진정한 소망이 아니라
단순히 사람됨의 영광만 보고 탐을 냈었다면
이 순종은 불가능하다.
호랑이의 실패는 단순한 인내의
부족이 아니라 그 중심, 즉 사람되고자 했던
소원이 가짜였던 것이다.
오늘날도 같은 원리가 적용된다.
진정으로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
그리스도의 수준에 이르고 싶어하는 자는
그 어떤 도전과 고난이 주어져도
개의치 않고 받아낸다.
그러나 기복신앙으로, 영광 얻고자 하는
얄팍한 심리로 종교에 들어온 자들은
조금 어려운 시험만 닥쳐도 뛰쳐 나가고 만다.
그 자체로 스스로 가짜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예수가 40일을 금식하고도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인간의 생명은
하나님의 말씀에 있다고 강변했다.
아무리 쑥과 마늘 같고,
빛 없는 어둠의 동굴 같은 삶이라 할지라도
진정 하나님의 자녀로 합당한 삶을
추구하는 자들은 십자가 지는 것을
두려워 하지 않는다.
[출처]삼일신고 풀이 16/단군신화 해설 8 |작성자 푸른 오솔길
'천지인 공부 > 삼일신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삼일신고 풀이 18/ 단군신화 해설 10 (0) | 2019.02.11 |
---|---|
삼일신고 풀이 17/ 단군신화 해설 9 (0) | 2019.02.11 |
삼일신고 풀이 15/ 단군신화 해설 7 (0) | 2019.02.11 |
삼일신고 풀이 14/ 단군신화 해설 6 (0) | 2019.02.11 |
삼일신고 풀이 13 / 단군신화 해설 5 (0) | 2019.02.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