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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신고 풀이 15/ 단군신화 해설 7 본문

천지인 공부/삼일신고

삼일신고 풀이 15/ 단군신화 해설 7

柏道 2019. 2. 11. 17:00
性通功完(성통공완)을 꿈꾸며...
三一神誥(삼일신고) 풀이 15 
 
이제 단군신화의 핵심 쟁점인
웅녀 이야기로 가보자.
곰이 사람이 되고
환웅이 또 인간의 몸을 입어
웅녀와 결혼한 결과 우리 민족의 시조인
단군이 출생했다 하니
너무 판타지 소설 같은 느낌이 들어
듣기에 민망함을 느끼게 한다.
특히 '우리의 시조가 곰 새끼란 말이냐?'하고
대들면 대꾸하기 쉽지 않다.
이 때문에 여러가지 시도들이 나왔다.
하나는 일제의 조작설이요,
또 하나는 비유적 표현으로 보는 해석이다.
조작설은 일제가 우리 민족을 폄하하기 위하여
이런 유치한 동화 같은 이야기를
첨가하거나 내용을 변조했다는 주장이고,
비유설은 진짜 곰이나 호랑이가 아니라
웅족과 호족이라는 주위 부족을 가리킨다는
주장이다.
조작설도 염두에 두고
고려를 해 볼 필요는 있다.
그리고 조작된 부분을 찾아 복원하는
작업은 전문가들이 해 주어야 할 책임이다.
하지만 알다시피 아무리 조작을 해도
완전조작은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기록도 다 없애거나 바꿀 수 없거니와
특히 구전으로 내려오는 내용은
작은 수정은 몰라도 근본을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다.
성경도 구전으로 내려오다가
여러 저자들에 의해 예수의 행적이
기록되었는데 그게 복음서다.
4개의 복음서 외에도 여러 복음서들이
존재하고 있다.
그래서 저자에 따라 관점과 경험, 자료 등이
다르다 보니 복음서 안에서도 많은 충돌이
나타난다. 그러나 그렇다고 아무도 그 본질적
메시지를 의심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것은 훼손될 수 없는
수많은 증인들과 기록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아무리 단군신화를
변개 조작하려 해도 그 한계는 분명히
있었을 것이고 원형은 그대로 남아 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따라서 그대로 두고 본질을 찾아 나가보자.
환웅이 하늘에서 내려 온 존재라는 점은
신화적으로 보기보다
영적으로 보는 것이 맞다.
물질의 기원은 영에 있다.
3차원 안에 1, 2 차원이 들어 있고
높은 차원에서 낮은 차원이 나온다는
상식과 과학적 추론으로 물질세계의
근원을 영적 차원으로 보는 것이다.
3차원은 4차원에 속해야 만이
파악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따라서 이 부분은 아무런 문제 될 것이 없다.
우리의 기원이 하늘에 있다는 말은
다른 차원에서 나온 존재라는 말과 같다.
3차원을 인식하는 우리는 4차원 존재여서이다.
3차원 존재는 평면, 즉 2차원으로 밖에
인식할 수 없다.
만일 지금 자신의 인식이
직선적 1차원적이거나
평면적 2차원을 못 넘어선다면
3차원에 매인 존재, 즉 동물 수준임을 증거한다.
과거와 미래, 피상과 본질을
볼 줄 알고 인식한다는 것은
4차원에 속하여 세상과 인생을
3차원 입체적으로 인식하고 산다는 증거이다.
그게 인간이다. 
 
단군신화에 나오는 곰과 호랑이는
바로 3차원에 매인 존재를 의미한다.
시간성도, 공간성도 입체로 보지 못하고
평면적으로 밖에 보지 못하는
동물적 수준에 머물러 있는 당시 사람의
의식수준을 곰과 범으로 비유한 것이다.
이들이 진짜 곰이나 범이 아님은
한 동굴에서 같이 지낸다고 서술한 데서
볼 수 있는데 알다시피 곰과 호랑이는
같은 동굴에서 지낼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이들이 사람되기를 간절히
원했다는 점이다.
동물 수준에 있는 자들이 사람되기를 원하게
되는 이유는 단 한가지 뿐이다.
진짜 사람의 사는 모습을 보고,
자신들의 저급한 수준을 깨달았을 때이다.
상승하고자 하는 의식은 절대로 저절로
생기지 않는다. 무언가 외부적 자극이 있어야
함과 동시에 내부적 충동이 일어나야 한다.
아무리 외부 자극이 있어도
변화의 요인이 내부에 없다면 반응이
일어날 수 없고, 내부 요인이 있어도
외부 자극이 없으면 씨앗 그 자체로
오랫 동안 남아 있게 된다.
어떤 씨앗은 2000년을 그대로 있다가
땅에 심기우자 싹을 냈다고도 하니
이런 내외부의 조화는 생명성장의 필수적이다.
하늘 사람들의 모습은
동물 수준에 있는 웅족, 호족의 관심을
끌었고 그들 속에 심겨진 생명의식이
성장을 향한 욕구로 분출 된 것이다.
이들은 환웅을 찾아 왔고
동물 수준의 삶을 벗어나
인간다운 삶을 살고자 사람되기를
간청하게 되었다. 
 
오늘날도 여전히 이런 일들이 일어난다.
아직 동물의식 수준에 머물러 있는 자들이 많다.
그저 물질세계의 것을 전부로 보고
오직 더 잘 먹고, 더 큰 힘을 가져
주위 사람들의 부러움을 받으며
사는 것이 오로지 인생의 목표로 삼고
살아가는 자들이 많다는 것이다.
그들의 의식을 들여다 보면 오직
생존본능이 삶을 주도하고,
무지와 두려움과 매인 자아의 충동에
따라 행동한다.
물론 후회도 하고, 부끄러움도 알아
반성과 돌이킴의 노력도 있지만
결국 돌이켜 봐야 이 세상에서 더 나은 삶이
목표이다 보니 별 의미가 없다.
그러나 다른 부류의 사람들도 많다.
인간의 한계와 세상살이의 무상함을
절감하고 더 나은 세계, 천국이든 영적세계든
물질세계의 한계를 넘은 차원이
존재함을 들음으로 그 세계에 대한 간절한
소망을 가지는 것이다.
그런 중에 경전을 만나고, 초월한 삶을 사는
사람을 보게 될 때 그의 열망은 강렬한
불이 붙는다.
그런 자들에게는 이이상 이 땅의 부와 명예,
권력 등이 의미가 없다.
그것들이 참 만족을 줄 수 없음을 절실히
깨닫고 다 버리든지, 다 투자하든지 해서
영원한 생명길을 찾게 되는 것이다. 
 
웃기는 일은 세상에서 실패하고
적응하지 못해 다른 차원을 기웃 거리던
자들이 어디서 줏어 들은 말과
얄팍한 수고로 얻은 환상 따위를 가지고
영적세계 장사를 하다가
세상에서 좀 이름도 나고 힘도 생기고 하니
홀랑 그것에 빠져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마구 끌어 모으려 하는 자들도 더러 많다는 것이다.
소위 타락한 종교지도자들의 모습이다.
아니 타락한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그 세계에 대한 의식이 없는
자들이라 해야 맞다.
빌빌하다가 어디서 짝퉁을 발견하고
그것으로 장사를 하니 남들에게는 진짜라고
소개하지만 본인은 안다.
그러니 결국은 물질세계의 것을 탐하는
꼴로 거짓됨과 저급한 의식을 스스로
폭로하고 마는 것이다.
그런데 우습게도 이런 자들이
곰이 사람되는 이야기 나온다고
신화니, 유치하다느니 난리를 부린다.
사람이 되고자 하려면 적어도 곰이나
호랑이 정도 의식수준은 되어야 하는데
개, 돼지 의식수준에 있는 자들이
이를 비웃고 있는 것이다.
한 때 민중을 개, 돼지 취급했다고
난리가 났는데 오히려 그런 격한 반응을
보이는 것이 더 당혹스럽다.
그게 왜 기분 나쁠까?
본인이 그런 수준이 아니라면
웃고 넘길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리고 그 말을 들었으면 혹시
나는 어떤가 하고 돌아보는 것이 적절한
반응이 아닐까?
물론 뭐 눈에 뭐만 보인다고
그런 말 한 당사자도
그 수준 밖에 안되니 그런 소리 했겠지만
그 말 들었다고 저 난리를 치면
그 또한 수상한 일이다. 
 
신화 속에 나오는 곰과 호랑이를
짐승이라고 우습게 보지 말라.
그래도 그들은 사람 되고자 하는 열망이라도
있었다. 그런데 수천년이 지난 지금도
짐승이기를 포기하기 싫어하는 자들이 많다.
더 안타까운 것은 그들이 각 분야의
지도자로 활동하며 쎈 짐승 우상화를
주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요한 계시록에 나오는 짐승을 잘 연구해 보면
그 정체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
내 안의 탐욕, 그것도 허망한 세상적인 것이
전부인줄 알고 목숨을 걸고 추구하는
멈추지 않는 갈망...바로 그것이 짐승이 내는
거친 숨소리요, 울부짖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