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왜 사랑이 답인가? 본문
왜 사랑이 답인가?
예수가 가르치려던 사랑
붓다가 말하던 대자비심
노자가 말하던 무위자연
동양철학이 말하는 인(仁)
모두 같은 말입니다.
이는 누군가를 소유하거나
내 사람으로 곁에두려고 하는 소유적 사랑(협애)과는 구분되는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를 판단없이
완전하게 사랑(허용)하는 것을 뜻합니다.
'나'와의 관계에 의존적인 사랑이 아닌 것이죠.
잠시 스쳐가는 사람도 사랑스러운 존재입니다.
사랑.
이 가르침은 무엇을 뜻할까요?
단지 착한사람이 되라는 뜻일까요?
아닙니다.
사랑은 진리의 빛을 보기 위한 '열쇠' 입니다.
진리는 선과악을 초월합니다.
즉, 단지 선한사람이 되라고 말하는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행동에 대한 윤리적 기준이 아닙니다.
사랑은 존재하는 것들 중 한가지 요소가 아니라,
진리이며, 모든 것입니다.
세상은 거울과 같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배우기 위해 이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내가 남을 판단할때,
남에게 판단받는 두려움과 외로움의 속에 살아갈 것이며,
다른 존재를 조건없이 사랑하여 자유를 줄 때,
사랑속에서 자유를 얻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마태복음 7:12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아무리 잘나고 열심히 살고 성공하고 인기인이 되어도
진정한 사랑과 자유는 얻지 못합니다.
이미 대중의 인기를 얻어본 자는 그것을 충분히 공감할 것입니다.
대중의 인기는, 꿀발린 창살과 같이 자유를 억압하는 것입니다.
내가 인생에 있어 어떠한 경험을 선택하는지는 자유 입니다.
성인처럼 살 필요도 없고, 수도자처럼 살 필요도 없습니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궁극적인 것은 선택이 아닙니다.
고통을 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외로움을 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두려움을 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반면에 모두가 원하는 것은 '자유' 입니다.
풍요로움이나 평화의 감정도 결국 '불안으로부터의 자유' 입니다.
지금 내가 돈벌이를 하는 것도 보십시요.
'돈과 시간으로부터의 자유'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다양한 방법으로 우리는 자유를 추구합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진정한 자유를 가져다 주는 것은,
사랑 뿐임을 결국엔 알게 됩니다.
당신이 무엇을 원하든지 상관없이
사랑의 진리를 깨달으면 모두 얻게 되고,
깨달지 못하면 헛수레를 끌고 가는 것입니다.
왜 그런지 설명드릴께요.
아침에 일어날때 기쁨속에서 깨어나십니까?
아니라면, 그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십시요.
어떠한 의무와 역할이 어깨를 누르고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무게는 아침에 일어날때 뿐 아니라,
언제나 무슨일을 하든 무의식에 숨어 있습니다.
의무와 역할은 모두 '관계'로써 발생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관계에서 내가 바라는 것은 궁극적으로
'관심받고 인정받는' 것입니다.사랑받는 것이죠.
심지어 단순히 이익과 목적을 위해 마주치는 관계에서도,
상대방에게 무시받는 것에 상처입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반복되는 상처는 더욱 사랑을 매마르게 합니다.
나는 타인의 관심과 인정을 위해
공부나 일을 잘하거나, 좋은 성과를 내거나,
인정받는 직업을 가지거나, 선행을 과시하거나,
종교적, 도덕적 우월성을 내세우거나,
노래나 춤, 예술적 예민함을 전시하거나,
미모를 가지거나, 멋진 옷을 입거나,
가치를 인정받을 만한 물건을 구입하거나...
인간이 추구하는 가장 숭고한 가치의 것도
그 중심에는 '관심과 인정'의 욕구가 들어 있습니다.
심오한 예술을 하는 예술가도 누군가가 작품을 보아주기를 바랍니다.
판단하는 '내'가 있기 때문에
남들의 판단에 의존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 판단이 무척이나 진지하고 중요한 것임을,
스스로의 내면에서 이미 결정지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저 사람은 별로야" 라고 판단했다면,
저 사람의 존재는 나에게 별로 가치없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너무나 쉽게 나의 편견으로 남을 판단하는 가해자가 됩니다.
겉으로 친절의 위선을 행하는 것은 나의 두려움 때문입니다.
나는 저 사람의 가치를 낮게 평가하지만,
저 사람에게 그것을 들키고 싶지는 않고 싶어 합니다.
나는 쉽게 판단하지만,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존재가치가 부정된다는 것은
무척이나 큰 외로움과 두려움을 가져옵니다.
그래서 우리 사회에 피해자는 넘쳐납니다.
모두가 피해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에게 쪽지로 문의하시는 분들의 사연은 다양합니다.
수백명의 피해자가 있을 뿐입니다.
누군가가 나의 마음을 안좋게 한다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하소연하였습니다.
그 사람을 자신의 판단기준에 만족스럽게 변화시키는 방법을 묻는것 같았습니다.
가해자는 언제나 상대방 입니다.
과연 그것이 사실일까요?
우리 카페는 피해자들의 모임일까요?
사실 우리 모두가 가해자 입니다.
판단하려고만 할 뿐, 사랑이 없는 우리 모두가 가해자 입니다.
내가 온전히 사랑하지 않고 판단하는 그들이 피해자인 것입니다.
지금 삶이 어렵고 힘들어
사랑같은거는 중요하지 않아 보일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나를 여기에 옮아매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실체를 보십시요.
왜 나는 내가 싫어하는 이 역할을 참으며 억지로 하고 있습니까?
왜 나는 내가 하고싶어 하는 일을 시작도 하지 못합니까?
바로 타인의 판단에 대한 의식 때문입니다.
의리,도리,책임.
이런 것들은 타인의 판단에 대한 의식 입니다.
당신이 지금 완전한 행복속에 있지 않는한,
그 어떤 의리,도리,책임도 사랑에서 나온것이 아닙니다.
사랑에서 나온것이 아니면 어디서 나온 것입니까?
모든 마음과 생각과 행동의 근원은 두가지 입니다.
사랑 vs 두려움.
사랑에서 나온것이 아니라면 그 책임감은 염려와 걱정,
즉, 두려움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한 책임감은 남을 원망하는 재료가 됩니다.
"너 때문에 내가 속이 썩어!" 라는 마음이 항상 존재합니다.
심지어 사랑한다고 자처하는 가족에게도 그렇습니다.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러한 마음은
"내가 너한테 어떻게 했는데!" 라는 원망이 됩니다.
사랑하는 연인간에도 흔히 발생하는 일이죠.
처음부터 조건이 있던 것으로 진정한 사랑과는 거리가 멉니다.
이러한 책임감은 스스로를 자유롭지 못하게 할 뿐더러,
상대방에게도 갚아야할 부담스러운 짐이며 그 이상은 아닙니다.
내가 배푼 사랑을 '인정받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것은 처음부터 사랑을 주고자 하는 마음이 아닌,
받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주고자 하는 마음과 받고자 하는 마음,
이 두개의 마음이 동시에 존재할 수는 없습니다.
받고자 하는 마음은 남을 돕다가도 상처를 받을수 있습니다.
반드시 사랑이 많은 사람만 도움이 필요한 것은 아니거든요.
사랑을 받고자 하는 마음이 없을 때에
진정으로 조건없는 사랑을 줄 수 있습니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라는 예수의 말에 깊은 지혜가 있습니다.
다시 사랑받고자 하는 마음을 살펴볼까요?
나의 존재가치에 대한 판단은
언제나 상대평가 입니다.
내가 잘생기고 못생기고,
내가 공부를 잘하고 못하고,
내가 돈을 잘벌고 못벌고,
내 물건이 가치있고 가치없고,
모두 남과의 비교에서만 그 가치가 평가됩니다.
절대적 기준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상대평가에서 모든 구성원은 경쟁상대 입니다.
남의 평가에 박수를 쳐줄때의 마음은 진정한 관심과 인정이 아닙니다.
사촌이 땅을 살 때 배아픈 마음으로 치는 박수일 뿐입니다.
상대평가에서 남이 올라가면 나는 내려갈 수밖에 없죠.
즉, 주고 받는 관심은 순간적인 물거품이고,
시기와 질투, 열등감과 허영심이 커지는 것입니다.
그 누구도 행복할 수 없는 무한경쟁의 구조 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발전하여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려 합니다.
모두가 외로운 가운데, 부단히 나의 간판을 만들어 갑니다.
간판이 사람들의 편견으로 가치를 인정받기 쉽기 때문입니다.
간판을 보고 편견으로 판단하는 것을 '속물(Snobbery)'라고 합니다.
내가 속물이기 때문에 속물의 가치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속물들이 인정하는 것은 그 사람 자체가 아닙니다.
그 사람의 능력, 미래의 효용가치, 나와의 관계에서의 이해득실, 부러움.
이 모든 것들은 사랑과 전혀 관계없는 것입니다.
남들이 나를 부러워함으로 얻는 만족감만큼 일시적이고 공허한 것이 없습니다.
상대평가에서의 만족은
"타인의 불행 위에 있는 만족"
이라는 표현과 같습니다.
정작 자신도 남들이 부러워하는만큼 행복을 얻지는 못하죠.
죄의식, 부끄러움은 그러한 마음에서 발생합니다.
타인에게 가치있게 보이려는 마음입니다.
'가치있게 보이지 않으면 어쩌지?'라는 마음이 부끄러움을 만드는 것입니다.
옳고 그름의 잣대로 옳은 것, 즉 '선'으로 판단받고 싶어하는 마음입니다.
선악과를 먹은후 아담과 이브가 부끄러움을 느끼기 시작한 이유입니다.
가치를 판단 받는다는 것을 의식할 때, 열등감, 죄의식이 발생합니다.
범죄를 저지르지 않은 사람도 죄의식을 항상 가지고 있습니다.
사랑의 결핍은 죄의식을 만듭니다.
내가 타인에게 관심받고 인정받으려는 것을 그만두고,
다른 존재에 관심과 인정을 쏟기 시작할 때,
즉, 사랑을 주는 존재가 되었을 때 완전한 자유가 됩니다.
사랑이 진리이고 진리가 자유를 주는 것입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니"
이는 남에게 나의 선을 인정받아서가 아닙니다.
세상이 나의 거울인 진리로써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타인이 나를 어떻게 보는지는 상관이 없어 집니다.
다른 사람의 가치판단 기준은 그 사람의 것일 뿐
나의 존재가치와는 전혀 상관없는 것이 됩니다.
이는, 남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써 그 사람의 가치관까지 허용하기 때문입니다.
"
마음대로 짖거리라 그래!
남들이 뭐라하든 상관없어! 나는 나니까!
"
이러한 반항의 마음은 사랑의 허용과 다릅니다.
사랑받지 못해 볼멘소리를 하는것에 불과합니다.
사랑은 에고가 강하여 쉴새없이 판단하는 사람 앞에서도,
"이 사람은 사랑을 요구하고 있구나"
하는 알아차리는 마음 입니다. 어질게 여기는 마음(仁)이죠.
왜냐하면, 판단의 마음은 언제나 불안에서 시작됨을 알기 때문이죠.
불안은 사랑의 결핍에서 시작되는 것이구요.
그 사람의 판단으로부터 나를 보호할 필요는 없습니다.
생각해보십시요. 우리에게 판단이 왜 필요합니까?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불안이 없을 때에는 판단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판단은 고양이의 발톱과 같이 인간의 생존도구일 뿐입니다.
생각해보십시요.
무엇으로부터의 생존입니까?
무엇을 위해 발톱을 내밀고 서로 상처내고 있습니까?
우리는 '사랑의 결핍' 이 두려워 사랑을 실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현존을 할 때 나는 관찰자가 되며,
나의 가치판단 기준은 '없음' 이 됩니다.
모든 존재는 경이롭다는 '절대적 사실'을
이제서야 사실로 알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이 존재할 확률은,
우주의 무한한 시간에서 볼때,
0과 과 같은 기적의 확률입니다.
지금 존재하는 것 자체가 기적입니다.
우리는 상대성의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그 상대성의 기준은 내 의식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습니다.
아프리카의 어떤 부족에서는 입술에 원반을 넣어 입술을 늘립니다.
그리고 더 큰 원반이 들어갈수록 미인이 됩니다.
내가 그 기준에 따르면 입술이 크지 않은 나는 추인이 됩니다.
내가 그 기준에 따를 필요가 없을 때에는 그것이 상관없어 집니다.
마찬가지로 중세시대에는 통통하게 살찐 여인이 아름답게 여겨졌습니다.
중세로 시간여행을 간다면 날씬한 내가 부족함과 열등감을 느껴야 할까요?
그 시대의 가치관에 동일시 된다면 분명 그렇게 될것입니다.
그들의 가치는 거짓이고, 우리사회 우리시대의 가치는 진실일까요?
아닙니다. 모두 다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상대적인 가치일 뿐입니다.
이 모든 가치가 상대적일 뿐임을 앎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이러한 상대적 가치가 힘을 얻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관심받고 인정받고' 싶은 욕구 때문입니다.
특히 한국사회는 그 욕구가 심합니다.
때문에 유행을 많이 따르는 사회가 된 것이죠.
이는 사회에 '관심과 사랑'이 심하게 결여되어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모두가 받고자만 하고, 줄때에는 조건이 까다롭기 때문입니다.
까다로운 조건은 가장 먼저 스스로를 옭아맵니다.
그것에서 자유로워 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내가 사랑을 주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남의 눈에 티끌은 보여도 내 눈의 들보는 안 보인다"
라는 말처럼,
우리는 남의 속물근성을 욕하지만 나의 속물근성을 알지 못합니다.
진정으로 속물근성이 없는 자는,
남의 속물근성이 더이상 그를 억압하지 못합니다.
나는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 집니다.
그 속물근성이 완전히 없어지면
'대자비', '사랑' 의 상태가 됩니다.
판단없이 존재 그 자체를 바라보게 됩니다.
나의 의식은 내가 관찰하는 대상 그 자체가 됩니다.
멀리있는 아프리카의 난민을 찾아가 사랑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 사랑에 '가난하고 불쌍해야지 된다' 라는 조건이 따를 필요는 없습니다.
조건 없는 사랑은,
지금 이 순간 내 눈앞의 사람에게 적용되며,
확장되어 동물과 식물, 사물에까지 적용됩니다.
내가 사랑의 실천을 위해 무엇을 열심히 해야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선 내가 사랑이 되는것이 중요합니다.
마음과 행동과 말은 같습니다.
행동은 자연스러운 열정에 맡기세요.
부자이든 가난한 자이든,
어떠한 직업을 가졌든, 어떠한 외모를 가졌든,
상관없이 모두 사랑스럽게 보입니다.
결국 세상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세상은 나와 나누어져 있지도 않습니다.
'사랑받고자 하는 나'는 소멸되고
'사랑으로 바라보는 자'가 되어 있으니까요.
진정한 사랑이 된 자의 의식은 관찰하는 대상과 하나가 됩니다.
여기에 진리가 있는 것입니다.
필연적으로 내가 사랑으로 관찰하는 대상은
나를 사랑하게 되기 쉽습니다. 이는 동물에게도 통하는 것입니다.
나를 판단없이 사랑스럽게 보아주는 자보다 매력있는 자는 없거든요.
사랑받고자 하는 것은 모든 존재의 근원적인 소망이니까요.
그럼 내가 '사랑받는 존재'가 될까요?
아니요,
"나를 사랑스럽게 보는 대상을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존재'가 됩니다.
여전히 나는 사랑을 주는 자로 머물러 있습니다.
사랑은 나가기만 하는 것입니다.
나갈때, 나 스스로 사랑이 되기에,
사랑을 받고 못받는 것은 의식하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천국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완전한 자유가 됩니다.
아침에 일어날 때 부터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두려움과 외로움이 근원적으로 소멸되어 버립니다.
저도 직접 경험하기 전에는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현존을 처음 경험한지 6개월이 넘도록,
매일 기쁨으로 일어나고,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많은 상황속에 있어보았지만,
단 한순간도 불쾌한 감정에 있어본 적이 없습니다.
일, 생활, 여행, 인간관계 모든 것이 완전합니다.
스트레스는 원래 어느정도 있는거야.
라는 말을 진리처럼 들어왔지만,
이런 지속되는 평화와 기쁨 상태,
완전한 자유속에 있는 것이 가능하다고는
그 누구도 말해주지 않았습니다.
아니, 수천년 전부터 많은 성인들이
이미 말해왔었으나 믿지 못했죠.
지금 생각해보니,
그 성인들의 모두 거짓을 말할리도 없는데도 말이죠.
그 자유가 밥을 먹여 주느냐?
의문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그 자유는 모든 것을 줍니다.
당신이 선택한 어떠한 경험도 훨씬 쉬워지며,
삶은 가벼워지며, 새로운 경험은 기쁨이 됩니다.
'도전'이라는 비장한 개념을 쓰지 않더라도
나는 염려없는 상태에서 새로운 일을 해 가고 있습니다.
'열정'이라는 격양되는 개념을 쓰지 않더라도
나는 이미 기쁨속에서 행동하고 있습니다.
'희생'이라는 숭고한 개념을 쓰지 않더라도
나는 이미 남을 즐겁게 하는 일을 의미를 의식않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기적같은 일들이 많이 일어나는데,
사랑이 주는 축복은 놀라운 일들을 만들어 냅니다.
이러한 차이는 극명하여,
천국과 지옥과 같습니다.
지옥에서는
두려움과 외로움속에
아둥바둥하며 염려하며 어렵게 살지만,
절대 얻지 못하는 것을 얻고자 헛수레를 돌리는 삶입니다.
천국에서는
기쁨과 평화 속에서
사랑의 관계 속에서 이미 얻은 상태로써,
모든 것이 쉽고, 힘을 빼고 경험하는 삶 입니다.
문제의 해결도 마찬가지 입니다.
"큰일났다!" 라고 생각하는 일도 모두 녹아없어집니다.
사실 세상에 큰일은 없습니다. 크게 생각하는 마음이 있을 뿐입니다.
사랑은 억지로 나오는것이 아닙니다.
먼저 나의 '판단'의 습을 없애면
자동으로 생기는 것입니다.
사랑이 되는법,
그 방법은 역시,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하는 것 입니다.
지금 이 순간,
세상이라는 거울에 당신을 '사랑을 주는 자'로 비춰보십시요.
당신을 자유케 하는 진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출처]왜 사랑이 답인가? (비욘드 더 시크릿 Beyond the secret)|작성자트왈라잇
[출처] 왜 사랑이 답인가?|작성자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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