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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강남교수의 도마복음 (31절) 예언자가 고향에서는 본문
도 마 복 음
The Gospel of Thomas
오강남교수의 도마복음 풀이
또 다른 예수
Patterson and Robinson Translation
31. 예언자가 고향에서는
선입견의 힘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언자가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하고, 의사가 자기를 잘 아는 사람들은 고치지 못합니다.”
Jesus said, "No prophet is accepted in his own village; no physician heals those who know him."
Jesus said: No prophet is accepted in his own village. No physician heals the people who know him well.
Jesus says:
(1) "No prophet is accepted in his (own) village.
(2) A physician does not heal those who know him."
문맥과 사용된 낱말들은 조금씩 다르지만 4복음서 모두에 나오는 이야기이다(막6:4, 마13:57, 눅4:24, 요4:44). 이것들과 비교 해보면 『도마복음』에 나오는 말이 가장 간결하다. 학자들 중에는 이런 이유로 『도마복음』의 상당 부분이 다른 복음서에 나오는 것들보다 더 오래된 전승을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예언자/선지자가 누구인가? 우리는 예언자 혹은 선지자라고 하면 미래를 미리 알고 말해주는 사람이라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영어로 ‘prophet'이라 할 때 그 그리스어 원어의 어근이 ‘pre+phetes(미리+말하다)’가 아니라 ‘pro+phetes(위하여+말하다)’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선지자 혹은 예언자는 ‘미리 말하는 자’가 아니라 ‘위하여 말하는 자’, 곧 하느님을 위하여 하느님의 말씀과 뜻을 전달하는 사람을 일컫는다. 물론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다 보면 앞날에 대해 이야기할 수도 있지만, 그 본업은 점쟁이처럼 미래를 알아맞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맡겨주신 말씀, 하느님이 일어주신 삶의 원칙을 사람들에게 말해주는 사람이다. 따라서 요즘은 ‘미리 아는 사람’이라는 오해를 가져다주는 ‘선지자’라는 말보다 ‘예언자’라는 말을 선호하고, 표준새번역에서도 ‘예언자’라는 말을 쓰고 있다. ‘예언자’를 한문으로 쓸 때도 미리 예豫를 써서 ‘豫言者(예언자)’라 하지 않고 맡길 예預를 써서 ‘預言者(예언자)’라 하는 것이 옳다.
예언자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는 것은 ‘하느님의 영이 내게 임하시매’의 경험을 전제로 한다. 의식의 전환을 통해 ‘특수 인식 능력의 활성화’를 체험한 사람, 일상에서 쓰는 말로 ‘깨친 사람’이라야 가능하다는 뜻이다. 마틴 루터는 그 당시 신부들만이 맡아 하던 제사장직 제도에 반대하고 이른바 ‘만인 제사장직’을 주장했다. 우리 모두가 하느님께 직접 나갈 수 있는 제사장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제 ‘만인 예언자직’을 제창할 수는 없을까? 우리 모두 ‘깨침’을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우리 모두는 적어도 잠재적 ‘예언자’인 셈이다. 예언자에게서 기대할 수 있는 것은 불의에 항거하는 ‘예언자적 사명’이나 ‘예언자적 통찰’같은 것이 아니겠는가.
사람의 말이 설득력을 갖기 위해서는 보통 세 가지 요소가 갖추어져 있어야 한다.
첫째는 ‘로고스logos'-말하는 내용이 논리적이고 합리적이어야 한다.
둘째는 ‘파토스pathos'-말하는 방법이 정열적이고 힘차야 한다.
셋째는 ‘에토스ethos'-말하는 사람의 됨됨이가 신뢰를 받을 만큼 그럴듯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느 한 가지도 결여되면 듣는 사람을 설득시키기 곤란하다. 그런데 선지자/예언자가 되었어도, 고향에서는 옛날 그 코찔찔이, 발가벗고 개울에서 물장난이나 하고 뛰놀던 개구쟁이, 기껏해야 아버지 엄마를 도와 집안일이나 거들던 착한 아이 정도로만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이미지에 ‘에토스’적 요소가 갖추어질 수가 없다. 에토스적 요소가 없으면 ‘콩으로 메주를 쑨다’해도 곧이 듣지 않기 마련이다.
물로 예언자, 혹은 영적으로 깨친 이들은 변화된 사람들이다. 조금만 주의 깊게 보면 이들은 보통 사람들과 확연히 다름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예언자의 어릴 때를 생각하는 사람들은 머리에 박힌 선입견 때문에 그런 것이 보이지 않고, 자기들이 과거에 알고 있던 이미지를 새로 찾아온 고향 출신 예언자에게 투영하고 마는 것이다.
한편, 많은 정신적 영웅들이 영적 모험을 감행하고 고향에 돌아왔을 때 이처럼 냉대나 심지어 박해까지 받을 수 있는 또 다른 이유를 생각해볼 수 있다. 정신적 영웅들이 천신만고 끝에 발견한 진리를 고향 사람들에게 전하면, 고향사람들은 이 고매한 진리를 이해할 수가 없다. 이런 ‘엉뚱한’ 혹은 ‘뒤집어 엎는’ 파격적인 말을 하는 사람들을 기존의 질서를 파괴하는 사람으로, 심지어 미친 사람으로 볼 수도 있다. 이는 리처드 바크Richard Bach가 쓴 『갈매기의 꿈』에 나오는 주인공 갈매기 ‘조나단 리빙스턴’의 경우와 같다. 그는 비상飛翔의 비밀을 터득하고 그 황홀한 즐거움을 자신의 형제들과 나누기 위해 찾아 가지만, 어선 뒤를 따라다니며 버린 생선이나 주워 먹는 것을 삶의 전부라 믿고 사는 그들은 조나단에게 갈매기 형제단의 질서와 평화를 교란한다는 죄목을 씌워 그를 추방하고 만다.
사실 부처님들 깨침을 얻고 나서 그가 깨친 바를 사람들에게 가르칠까 말까 망설였는데, 그 이유가 바로 자기가 깨달은 진리를 일반인들이 알아들을 수 있을까 하는 염려 때문이었다. 그러나 부처님은 처음부터 선교에 성공적이었고, 고향으로 돌아가서도 크게 환영을 받았을 뿐 아니라, 아버지, 계모, 전 부인, 아들, 사촌들, 친구들을 많이 불가에 귀의하게 했다는 점에서 볼 땐 세계 종교사에서 이례적인 예라 할 수 있다.
“의원이 자기 아는 사람을 고치지 못한다.”고 한 구절은 『도마복음』에만 나오는 것이다. 『누가복음』에도 의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지만 약간 다른 맥락에서 쓰였다. 공관복음에 의원에 관한 이야기가 없어진 것은 초대교회에서 예수님을 이해할 때 더 이상 병을 고치거나 기적을 행하는 분으로 여기기보다는 예수님의 예언자적 기능을 더욱 중요시하게 되었기 때문이 아닌가 짐작할 수 있다.
[출처] 도마복음 제3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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