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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강남교수의 도마복음 (36절)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본문
도 마 복 음
The Gospel of Thomas
오강남교수의 도마복음 풀이
또 다른 예수
Patterson and Robinson Translation
36.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육신의 입고 벗음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리고 저녁부터 아침까지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마십시오.”
Jesus said, "Do not be concerned from morning until evening and from evening until morning about what you will wear."
Jesus said: Do not worry from morning to evening or evening to morning about what you are going to wear.
Jesus says:
"Do not worry from morning to evening and from evening to morning about what you will wear."
그리스어 사본 조각에 있는 것을 괄호 안에 덧붙여 번역하면,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리고 저녁부터 아침까지 [먹는 것을 두고 무엇을 먹을까, 입는 것을 두고]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수고도 하지 않고 길쌈도 하지 않는 백합화보다 귀합니다. 여러분에게 입을 것이 없으면 여러분은 무엇을 입겠습니까? 누가 여러분의 키를 더 크게 할 수 있습니까? 바로 그이가 여러분에게 옷을 줄 것입니다.]”로 되어 있다. 그리스어 사본은 공관복음(마5:25, 눅12:22-32)에 나오는 것과 대동소이하다. 그러나 나그함마디 콥트어 사본에는 “무엇을 먹을까를 염려하지 말라.”는 어구는 빠지고 오로지 옷 입는 것만을 강조해서 그것을 염려하지 말라고 했다. 무슨 까닭일까?
『도마복음』 전통에서 옷을 입는다는 것은 육신을 입는다는 뜻이다. 무슨 옷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한 것은 어떤 육신을 가지고 태어났든지, 또 이 육신을 입든지 벗든지 염려할 것이 아니라는 뜻으로 볼 수 있다. 이런 생각을 한다면 문자적으로 우리가 일상으로 착용하는 옷을 입고 벗고 하는 것도 문제지만, 육신의 옷을 입고 벗는 것이 더 큰 문제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이생에서의 옷을 벗고 내생에서 무슨 새 옷을 입을까 그렇게 염려할 것이 아니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야말로 죽든지 살든지 하느님께 맡기고, 그의 뜻과 섭리를 믿고 염려에서 벗어난 삶을 사는 것이 최고라는 것이다.
사실 우리가 많이 쓰는 ‘믿음’이란 말은 결국 이처럼 ‘마음 놓고 턱 맡김으로써 염려에서 벗어남’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잠깐 믿음에 대해 생각해 본다. 복음서에는 믿음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특히 『요한복음』에는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요11:25-26)하는 등 ‘믿음’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교가 결국 ‘믿음의 종교’일 수밖에 없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믿음’이라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
신학자 마커스 보그Marcus J. Borg의 분석에 의하면, ‘믿음’에는 네 가지 종류가 있다고 한다.
첫째, ‘남의 말을 참말이라 받아들이는 것’과 같은 믿음이다. 좀더 거창한 말로 표현하면 ‘우리가 직접 경험하거나 확인할 길이 없는 것에 대한 진술이나 명제를 사실이라고 인정하는 것’이다. 이른바 ‘assensus'로서의 믿음이다. 이 라틴어 단어는 영어 ‘assent'의 어근이다. 우리말로는 ‘승인承認’이라 옮길 수 있다. 이런 믿음의 반대는 물론 ‘의심’이다.
현재 교회에서 의심하지 말고 믿으라고 하는 것은 이런 ‘승인으로서의 믿음’을 가지라는 뜻이다. 교회에서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고 하면,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이면 무조건 모두 사실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을 의미한다.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근대에 와서야 이런 형태의 믿음이 ‘믿음’으로 강조되기 시작하다가, 근래에는 급기야 믿음이라면 이것이 전부인 것처럼 생각되는 경지에 이른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18세기 계몽주의와 더불어 과학 사상이 발전하고, 이와 더불어 진리를 ‘사실factuality'과 동일시하는 경향이 생기게 되었다. 그러면서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 중 창조, 노아 홍수 등 사실이라 인정할 수 없는 것들을 배격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자 그리스도교 지도자들 중 더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성경에 있는 이런 것들을 ‘사실’이라 받아들일 것을 강조하고, 결국 믿음이란 이처럼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 중 사실이라 받아들이기 힘든 것을 사실로, 참말로, 정말로 받아들이는 것과 동일시하게 된 것이다. 엄격하게 말해서 이런 종류의 믿음은 그리스도교에서 가장 중요한 것도 아니고, 또 처음부터 가장 보편적 형태의 믿음으로 내려 온 것도 아니다.
둘째, 성경에서, 그리고 17세기 계몽주의 이전에 강조된 믿음이란 ‘턱 맡김’이다. 내가 곤경에 처했을 때 내가 하느님을 향해 “나는 하느님만 믿습니다.”할 때의 믿음과 같은 것이다. 이때 믿는다는 것은 성경 이야기나 교리 같은 것을 참말로 받아들인다는 것과는 거의 관계가 없다. 이런 식의 믿음은 어떤 사물에 대한 진술이나 명제, 교리나 신조같이 ‘말’로 된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신의와 능력을 믿는 것이다. 전문 용어로 ‘fiduncia'로서의 믿음이다. 영어로 ‘trust'라는 말이 가장 가까운 말이다. 우리말로 하면 ‘신뢰로서의 믿음’, ‘턱 맡기는 믿음’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믿음은 실존 철학자 키에르케고르가 표현한 대로, 천만 길도 더 되는 깊은 바닷물에 나를 턱 맡기고 떠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잔뜩 긴장을 하고 허우적거리면 허우적거릴수록 더욱 더 빨리 가라앉고 말지만, 긴장을 풀고 느긋한 마음으로 몸을 물에 턱 맡기고 있으면 결국 뜨게 되는 것이다. 하느님을 믿는 것은 하느님의 뜨게 하심을 믿고 거기에 의탁하는 것이다.
이러한 믿음의 반대 개념은 의심이나 불신이 아니라 바로 불안, 걱정, 초조, 두려워함, 안달함이다. 우리에게 이런 믿음이 있을 때 우리는 근심과 염려, 걱정과 두려움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장 강조해서 가르치려 하신 믿음도 바로 이런 믿음이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우리에게 “공중의 새를 보아라. 씨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곳간에 모아 들이지도 않으나, 너희의 하늘 아버지께서 그것들을 먹이신다……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살펴보라”(마6:25-32)하며 하느님의 무한하고 조건 없는 사랑을 믿고“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다.
오늘처럼 불안과 초조, 근심과 걱정, 스트레스와 긴장이 많은 사회에서 우리에게 이런 신뢰로서의 믿음, 마음 놓고 턱 맡김으로서의 믿음은 어떤 진술에 대한 승인이나 동의로서의 믿음보다 더욱 중요하고 필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하느님에 대한 이런 믿음은 그렇기에 우리를 이 모든 어려움에서 풀어주는 해방과 자유를 위한 믿음이다. 『도마복음』에서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할 때도 우리에게 이런 믿음을 가지고 살라는 충고라 받아들이라는 뜻이 아니겠는가.
말이 나온 김에 다른 두 종류의 믿음에 대해 이야기하면 셋째, ‘믿음직스럽다’거나 ‘믿을 만하다’라고 할 때의 믿음이다. 내가 믿음을 갖는다고 하는 것은 내가 믿음직한 사람, 믿을 만한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라틴어로 ‘fidelitas'라 한다. 영어로 'faithfulness'라 옮길 수 있다. ‘성실성’으로서의 믿음이다. 이런 믿음을 갖는다는 것은 하느님께만 충성을 다한다는 뜻으로, 이런 믿음의 반대는 우상숭배이다.
넷째, ‘봄으로서의 믿음’이다. 이른바 ‘visio'로서의 믿음이다. 이런 믿음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봄seeing things as they really are'이다. 좀 어려운 말로 하면 사물의 본성nature이나 실재reality, 사물의 본모습, 실상, 총체적인 모습the whole, totality을 꿰뚫어봄에서 생기는 결과로서의 믿음이다. 이런 믿음은, 말하자면 직관, 통찰, 예지, 깨달음, 깨침, 의식의 변화 등을 통해 자연스럽게 얻어지는 확신conviction 같은 것이다. 일종의 세계관이나 인생관이나 역사관같이 세계와 삶에 대한 총체적 신념 같은 것이다. 『도마복음』‘믿음’을 강조하지 않지만, 이런 ‘봄’으로서의 믿음이 『도마복음』에서 말하는 ‘깨침’과 같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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