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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강남교수의 도마복음 (54절)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니 본문
도 마 복 음
The Gospel of Thomas
오강남교수의 도마복음 풀이
또 다른 예수
Patterson and Robinson Translation
54.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니
청빈의 특권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하늘나라가 여러분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Jesus said, "Blessed are the poor, for yours is the kingdom of heaven."
Jesus said: Blessed are the poor for yours is the Kingdom of Heaven.
Jesus says:
"Blessed are the poor. For the kingdom of heaven belongs to you."
이른바 ‘팔복’중 처음 나오는 복이다. 『누가복음』의 평지 설교에서는“너희 가난한 사람들은 복이 있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눅6:20)라고 되어 있고, 『마태복음』의 산상 설교에서는 여기에다 ‘마음이’라는 말을 덧붙여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5:3)라고 하였다. 『누가복음』은 경제적으로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다고 한데 반해 『마태복음』은 가난을 영적인 것으로 추상화시키고 있는데, 본래 예수님은 경제적 가난을 염두에 두고 말씀하셨으리라 추정하는 것이 보통이다. 주목할 것은 여기 『도마복음』에도 ‘마음이’라는 말은 없다는 것이다.
‘마음이’라는 말이 있든 없든, 가난 자체가 복이 되느냐 아니냐 하는 것보다는 부에 무조건 집착하느냐 하지 않으냐, 지나칠 정도로 돈에 욕심이 있느냐 없느냐가 행복의 조건으로 더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모른다. 이런 집착과 욕심을 도려내는 것이 앞에서 말한 ‘마음의 할례’를 뜻할 수 있다. 이렇게 자기중심주의의 찌꺼기가 말끔히 치워져 없어짐 곳에 ‘하늘나라’가 들어올 자리가 마련된 셈이고, 이로 인해 새로운 삶을 사는 행복을 누릴 수 있다. 유교에서도 소인배가 탐하는 이利가 아니라 군자가 추구하는 의義를 이상으로 삼기 때문에 외적 빈부에 상관하지 않고, 또 어쩔 수 없이 가난해진다 해도 이런 청빈淸貧이야말로 참된 청복淸福의 근원이라 여기면서 살수 있다고 한다.
특히 『도마복음』의 경우 ‘홀로’수행함을 행복한 삶으로 여기고 있으므로, 여기에서 말하는 가난은 ‘자발적 가난’, 곧 재산을 버리고 속세를 떠나 무소유의 삶을 사는 사람이 스스로 선택한 가난일 가능성이 높다. 종교사를 통해서 볼 때 많은 종교에서 재물을 탐하지 않는 것뿐 아니라, 이처럼 있는 재물이라도 뒤로하고 걸식하거나 탁발승으로 천하를 주유하며 살아가는 것을 종교적 삶의 이상으로 삼는 경우가 많다. 부처님이나 성 프란체스코의 경우가 대표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의 경우 본래 재산이 있었는데 스스로 가난해지셨는지 모르지만, 재산이 많은 어느 부자 젊은이에게 “가서 네 소유를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주라.”(마19:21)로 충고한 것을 보면 자발적 가난을 염두에 두신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이와는 대조적으로 요즘 그리스도교에서는 이른바 ‘번영신학prosperity theology’이 한창이다. 우리말로 ‘성공신학’이나 ‘잘살아보자 신학’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잘 믿으면 무엇보다 경제적으로 잘 살게 된다는 생각이다. 이른바 남보란 듯 잘 살려면 잘 믿으라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잘 믿는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부자로 만드실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그것을 후한 헌금으로 표시함을 의미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젠 “예수 믿고 복 받으세요.”하는 말이나 더욱 노골적으로 “예수 믿고 부자 되세요.”라는 말을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좋은 차를 원할 때 그대로 믿고 바라면 하느님이 그 소원을 들어주신다고 하기도 한다. 어쩌면 이런 신학을 받아들인 사람들의 경우“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한 예수님의 말씀은 대실수일 뿐, 지금은 “부자는 복이 있나니”가 훨씬 더 실감나고 현실성 있는 말이라 주장할지고 모른다.
그러나 이런 번영신학에 기초한 신앙을 가질 때 우리도 모르게 빠져들 수 있는 몇 가지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첫째, 우리가 가진 신앙은 나의 경제적 부를 축적하기 위한 한갓 수단으로 전락되고 만다. 하느님도 결국은 우리가 두들기기만 하면 무엇이나 내놓는 복덕방망이나, 카드를 넣고 단추 몇 개만 누르면 곧바로 현금을 내주는 현금 인출기로 둔갑하게 된다.
둘째, 가난은 잘 믿지 못한 결과라는 생각을 가질 수 있다. 정의롭고 의미 있게 사느라 고난 받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어떻게 살든 결과적으로 가난하면 불편함뿐만 아니라 이제 죄책감까지 함께 감내해야만 한다.
셋째, 더욱 문제 되는 것은 부함이 잘 믿은 덕이므로, 일단 부하게 되면 부를 모으면서 있었던 여러 가지 부정한 수단까지 모두 정당화된 것으로 착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누가 뇌물을 주어도 그것이 하느님께서 축복해주시는 특별한 방법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정말 무서운 일 아닌가.
심지어 최근에는 경제 제일주의를 주장하는 그리스도인 지도자도 있다. 경제가 인생사의 모든 것에 우선한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표방하는 사람이라면 그리스도인임을 포기해야 할 것이다. 물론 배고픈 사람들에게 당장 먹을 것을 구해주는 것 같은‘경제 활도’이라면 그것이 최우선의 과제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빈익빈 부익부’, 철저히 천박한 자본주의적 재테크에 따라 땅 투기나 기타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오로지 돈을 모으겠다는 일념으로 살고,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되도록 하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받들고 있는 사람이라면 스스로를 예수님 따르는 사람이라 주장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는 그냥 금송아지를 섬기는 사람일 뿐이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예수님 말씀처럼 “목숨을 부지하려고 무엇을 먹을까 또는 무엇을 마실까 걱정하지 말아야”(마6:25)할 것이다. “나는 어떤 처지에서도 스스로 만족하는 방법을 배웠습니다. 나는 비천하게 살 줄도 알고, 풍족하게 살 줄도 압니다.”(빌4:11-12)라고 한 바울의 말처럼 어떤 경우에도 집착하는 일이 없이 자유롭게 살 줄 알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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