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오강남교수의 도마복음(11절) 하늘은 사라질 것이고 본문
도 마 복 음
The Gospel of Thomas
오강남교수의 도마복음 풀이
또 다른 예수
Patterson and Robinson Translation
11. 하늘은 사라질 것이고
죽음을 이김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하늘은 사라질 것이고, 그 위에 있는 하늘도 사라질 것입니다. 죽은 사람들은 살아 있지 않고, 산 사람들은 죽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죽은 것을 먹는 날 여러분은 죽은 것을 살아나게 합니다. 여러분이 빛 속에 있으면 여러분은 무엇을 하겠습니까? 여러분이 하나였을 때 여러분은 둘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둘이 되면 그때 여러분은 무엇을 하겠습니까?”
Jesus said, "This heaven will pass away, and the one above it will pass away. The dead are not alive, and the living will not die. In the days when you consumed what is dead, you made it what is alive. When you come to dwell in the light, what will you do? on the day when you were one you became two. But when you become two, what will you do?"
11a. Jesus said, "This sky will cease to be and the sky above it will cease to be.
11b. The dead do not live, and the living will not die.
11c. When you ate dead things you made them alive. When you arrive into light what will you do?
11d. When you were one you became two. When you become two what will you do?
Jesus says:
(1) "This heaven will pass away, and the (heaven) above it will pass away.
(2) And the dead are not alive, and the living will not died.
(3) In the days when you consumed what was dead, you made it alive.
When you are in the light, what will you do?
(4) on the day when you were one, you became two.
But when you become two, what will you do?
오리무중이다. 지극히 이해하기 힘든 절이다. 몇 개의 생각들이 총알처럼 빠르게 하나씩 튀어나오고 있다. 더구나 그 생각들 사이에 내적 연관성을 찾기가 힘들다. 어쩌면 이런 불가사의한 말을 마구 쏟아내고 있는 자체가 우리의 안일한 사고를 뒤흔들어 정신을 차리게 해주려는 일종의 ‘충격요법’이나‘화두話頭’인지도 모른다. 아무튼 천천히 음미해보자. 화두는 일부러 의미를 찾으려 하면 안 된다고 하기는 하지만-----.
우선 하늘과 그 위에 있는 하늘이 없어질 것이라고 한다. 유대인들은 고대 문화 일반에서 보듯, 하늘에 여러 층이 있다고 보았다. 히브리어로 ‘하늘’이라는 말은 언제나 복수형으로 쓰이고 있다. 그래서 창세기 1장 1절의 영어 번역도 “In the beginning, God created the heavens and the earth."이다. 바울도 자기가 ‘셋째 하늘’에 끌려갔다가 왔다(고후12:2)고 했다.
유대 전통에서 일반적으로 하늘과 땅은 없어지거나 변하지 않는 것을 대표한다. 『도덕경』의 표현으로 “천장지구天長地久”이다(7장). 그렇게 변하지 않는 하늘도 사라진다니,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뜻인가? 부처님의 ‘제행무상諸行無常, anitya'이나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Herakleitos(기원전 544~488)의 ‘만유유전萬有流轉, panta rhei'과 같은 세계관을 반영하는 것인가? 이처럼 변하는 현상세계의 허망함이나 덧없음을 이야기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시편』에 보면 “하늘과 땅은 모두 사라지더라도 주님 만은 그대로 계십니다.”(시102:26)라고 하고, 『마가복음』에도 “하늘과 땅은 없어질지라도 나의 말은 절대로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막13:31)라고 했다. 주님 자신이나 예수님의 말씀의 항존성을 강조하기 위해 하늘과 땅의 항구성을 강조한 셈이다. 그렇다면 『시편』이나 『마가복음』에서 하늘과 땅에 대해 언급하면서 주님이나 예수님의 말씀이 없어지지 않을 것임을 강조한 것처럼 여기 『도마복음』에서는 하늘도 없어질 수 있지만 “죽은 사람들은 살아 있지 않고 산 사람들은 죽지 않는가.”라는 사실만은 절대로 변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한 셈인가?
“죽은 사람들은 살아 있지 않다.”라고 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말이다. 이렇게 당연한 말을 그 귀한 파피루스 종이를 허비해가면 새삼스럽게 써놓았을 리는 없을 것이다. 약간 억지라 여겨질 위험을 안고라도 나름대로 의미를 찾아본다면, ‘우리가 영적으로 새로 태어나 새로운 의식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면 우리는 죽은 사람들이다. 우리가 이렇게 영적으로 죽은 상태로 살아간다면, 비록 산다고 해도 진정으로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니다. 영적으로 죽은 사람은, 육신적으로 살아 있다 하더라도 살아 있지 않다’하는 식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이해하면 다음에 나오는 “산 사람들은 죽지 않는다.”는 말은 쉽게 풀린다. ‘지금까지 허상과 욕심을 가지고 살아가던 옛 내가 죽고 참나를 깨달아 영적으로 새로 태어나 새 삶을 사는 사람은 이제 육신적으로 죽어도 죽지 않는다.’대략 이런 말이라 풀 수 있을 것이다. “죽기 전에 죽으면, 죽어도 죽지 않는다if you die before you die, you will not die when you die." 라는 말이 있는데, 이런 문맥에서 더욱 실감나는 것 같다.
우리가 ‘죽은 것을 먹는 것은 죽은 것이 살아나게 하는 일’이라는 생각은 앞서 제7절에서 “사람이 사자를 먹으면 사자가 사람이 된다.”라고 하는 말과 궤를 같이하는 것과 같다. 우리가 깨침을 통해 새 사람이 되었을 경우, 우리가 죽은 것을 먹어도 그 죽은 것이 우리의 생명에 새롭게 동참하므로 되살아나게 되는 셈이다. 그러나 좀 더 깊이 들어가, 우리의 옛 사람이 죽고 새 사람으로 살아나는 것을, 죽은 상태에 있던 옛 사람을 먹고 그것이 다시 새 생명으로 살아나는 것으로 표현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요한복음』에서 ‘살과 피’를 먹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말씀과 같다.(요6:50-58)
다음에 이어지는 본문은 우리가 빛 속에 거하면 무엇을 하겠는가 묻는다. 이 질문은 이제 빛 속에 거하게 되었으니 빛을 비추거나 나누어주는 등 뭔가 행동이 따라야 하지 않겠는가라는 뜻으로 풀 수 있고, 이제 빛 속에 거하게 되었는데 그 빛을 따를 뿐 다시 더 무슨 할 일이 있겠는가 하는 뜻으로 읽을 수도 있다. 양쪽 모두 가능한 해석이다.
첫째 해석은 종교적 체험에는 반드시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하는 등 동료 인간들을 위한 행동이 뒤따르게 마련이라는 생각을 반영하는 것이다.
둘째 풀이는 깊은 종교적 체험을 가지게 된 사람은 나서서 설치는 대신 자신은 그저 ‘도구’로 쓰일 뿐‘무위無爲의 위爲’를 실천하는 사람이 된다는 생각과 맞닿는 것을 말한다. 이런 면에서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두 가지 모두 가능한 셈이다.
이어서 우리가 “하나였을 때 둘이 되었다.”고 선언하고, “둘이 되면 무엇을 하겠는가?”하고 다시 묻는다. 그 당시 사상계를 풍미하던 우주론cosmology에 기반을 둔 이야기를 하는 것이라 여겨진다. 고대 사상가 상당수는 태초에 분화되지 않은 완전한 ‘하나’가 있었는데, 이 하나가 분화되어 둘이 되고 셋이 되고 만물이 되었다고 보았다. “이제 완전했던 하나가 둘이 되어 불완전 상태로 떨어졌으니 너희는 어떻게 하는 것이 마땅하뇨? 하고 물어보는 것이라 풀 수 있다.
『도덕경』에도 “도가‘하나’를 낳고, ‘하나’가 ‘둘’을 낳고, ‘둘’이 ‘셋’을 낳고, ‘셋’이 만물을 낳았다.”고 하는 분화 과정을 이야기하고 있고(42장), 우리가 근원으로 되돌아가면 고요와 쉼을 찾을 수 있다고 했다(12장). 신플라톤주의 철학에서도 이 현상세계는 ‘하나hen, 일자一者’에서 유출流出되었고, 지금 이 상태에서 우리가 할 것은 다시 하나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본다.
본문에서 “무엇을 하겠는가?”물어보는 것은 이렇게 ‘둘’이 된 비본연의 상태에서 ‘본래의 순일성Primordial simplicity으로 돌아가라.’, ‘본래의 근원으로 되돌아가라.’,‘원시반본原始返本’하라고 촉구하는 말이라 할 수 있다. 『도덕경』에도 “되돌아감이 도의 움직임”(40장)이라 하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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