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도마복음(44 절): 성령에 불경을 저지르지 말라 본문
도마복음(44 절): 성령에 불경을 저지르지 말라
Jesus said, "Whoever blasphemes against the father will be forgiven, and whoever blasphemes against the son will be forgiven, but whoever blasphemes against the holy spirit will not be forgiven either on earth or in heaven."
예수께서 말씀하시길, “아버지에 불경(不敬)을 저지르는 사람은 용서받을 것이며 그 아들에게 불경을 저지르는 사람도 용서받을 것이나 성령에게 불경을 저지르는 사람은 지상에서나 하늘에서 용서 받지 못할 것이다.
해석
하느님이나 예수에게 불경을 저지르는 것은 용서되나 성령에 저지르는 불경은 용서되지 않는다 한다. 성령이 신으로부터 나온 것인데 이것이 가능한 일인가? 구약에 하느님에게 불경을 저질러 그 보복을 받은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사실 구약의 신과 신약의 신은 많이 다르게 표현된다. 같은 하느님인데도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흥미로운 일이다.
하여간 예수는 하느님과 그 아들에게 불경을 저지르는 것은 용서된다하니 사람들이 알고 있는 상식을 깨는 말이 아닐 수 없다. 사람들에게 신은 자비와 사랑의 신인가, 징벌과 심판의 신인가? 엄한 아버지인가 자상한 아버지인가?
카발라에 보면 신을 상징하는 생명나무가 나오고 신의 속성을 나타내는 10개의 광(光, 세피로트)이 이 생명나무를 구성한다. 이 10개 광 중에는 지혜, 지성, 아름다움, 자비(사랑)와 정의(심판) 등이 있다. 그러므로 신의 속성에는 사랑과 정의가 동시에 존재한다. 자비(사랑)가 지나치면 인간은 잘못을 반복하여 교훈을 얻지 못할 것이며 정의(심판)가 지나치면 개선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이 사랑과 정의를 적절히 사용하여 인간의 잘잘못을 저울질 하는 것이 신이기도 하다.
물론 신이 인간의 형태를 하고 하늘나라 옥좌에 앉아 세상을 다스리는 인격체는 아니다. 신은 모든 것에 편재하는 의식이며 우주법칙으로 세상을 다스린다.
삼위일체를 설명하면서 성령을 신의 말씀, 진리로 해석한 적이 있다. 즉 구원, 무지에서 해방은 예수를 통해서가 아니라 예수가 전하는 말을 통하여 가능하다고 앞에서 해석하였다. 비유를 든다면 대통령에 대한 불경은 용서되지만 대통령이 공고하여 시행중인 법에 위반하면 벌을 받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신은 아들을 통하여 자신의 말을 전하였다. 그 말은 우주 법칙이며 변할 수 없는 진리이다. 이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하듯 이 진리에 대한 불경은 우리를 어둠속에 가두어 버릴 것이다.
신의 말씀이 자신들 경전에만 실려 있다고 믿는 종교인들 특히 성경에만 실려 있다고 믿는 기독교인들이 많다. 타 종교 가르침을 사탄의 가르침으로 비난하고 자신들만 진리를 가르친다고 생각한다.
신은 모든 곳에 편재하며 작은 풀잎 하나에도 스치는 바람에도 신의 말씀이 스며들어 있는데 맹목적으로 타종교 가르침을 비하 하는 사람은 진리에 대한 불경을 저지르는 셈이다. 슬픈 일이지만 무지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무슨 죄를 저지르는지 모른다. 무지는 사람을 용감하게 만드나 그 죄는 피할 수 없다. 가장 큰 죄는 진리에 대한 불경(不敬)이기 때문이다.
간디가 "나는 예수를 사랑한다. 그러나 크리스천은 싫어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를 닮지 않았기 때문이다."라는 말을 하였다. 오늘날 일부 근본주의 기독교인들의 행동을 보면 이 말이 맞지 않나 싶다. 그들에게 자신들의 행동은 선이고 그 반대편은 악이라는 이상한 이분법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지하철 선교, 가정방문 선교, 공원이나 캠퍼스 선교를 보면 타인을 배려하는 마음은 찾아볼 수 없다. 그들 마음에는 성경은 최고이고 누구나 믿어야 할 가르침인 것이다. 전도에 대한 치열함은 자신들 가르침에 대한 자부심과 이를 믿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안타까움(?), 그리고 길 잃은 영혼을 하느님에게 인도한다는 사명감의 반영이다. 그리고 이로 인한 자신에 대한 하느님 축복, 그리고 신도 확보를 통하여 얻게 되는 소속교회의 경제적 면도 있을 것이다.
가장 바람직한 전도는 자신의 조화로운 삶으로 주변 사람들을 감응시키는 것이다. 말과 행동이 다르면서, 남을 배려하는 사소한 예의도 지키지 않으면서 입으로만 천국을 부르짖는 위선자는 되지말아야 한다. (taucross)
[출처] 도마복음(44 절): 성령에 불경을 저지르지 말라 |작성자 우타
44. 성령을 모독하는 사람은
에바다(열려라)!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를 모독하는 사람도 용서를 받을 수 있고, 아들을 모독하는 사람도 용서를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사람은 이 땅에서도 하늘에서도 용서를 받을 수 없습니다.”
Jesus said, "Whoever blasphemes against the father will be forgiven, and whoever blasphemes against the son will be forgiven, but whoever blasphemes against the holy spirit will not be forgiven either on earth or in heaven."
Jesus said: Whoever blasphemes against the father will be forgiven. Whoever blasphemes against the son will be forgiven. But whoever blasphemes against the Holy Spirit will not be forgiven, neither on earth nor in heaven.
Jesus says:
(1) "Whoever blasphemes against the Father, it will be forgiven him.
(2) And whoever blasphemes against the Son, it will be forgiven him.
(3) But whoever blasphemes against the Holy Spirit, it will not be forgiven him, neither on earth nor in heaven."
공관복음에서도 어구는 약간 다르지만 대략 같은 내용을 이야기하고 있다(막3:28-29, 마12:31-32, 눅12:10). 모두 ‘성령을 모독하면’용서받을 수 없다고 하는 부분에서 일치하고 있다. 다만 『도마복음』서의 특징이라면 아버지를 모독하는 사람마저도 용서받을 수 있다고 한 점이다.
<대장금> 같은 TV 사극史劇을 보면 임금이 신하를 보고 “네가 지금 나를 능멸凌蔑하는 것이냐? 네 죄를 용서치 않으리라!”하며 호통을 치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 『도마복음』에 의하면 한갓 임금을 능멸한 죄는 물론이고 심지어 하느님 아버지를 능멸했어도 용서받을 수 있지만, 성령을 거스르는 것은 용서받을 수 없다고 했다. 도대체 성령을 모독하는 것이 무엇이기에 그리도 엄중하여 결코 용서받을 수 없다는 것일까?
성령을 모독한다는 것, 혹은 성령을 거스르는 것은 우리 속에 역사하시는 성령의 세밀한 소리를 거절한다는 뜻이 아닌가? 내면의 미세한 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내적 성장에 절대적으로 중요한 일이다. 이런 성령의 속삭임을 외면하는 것은 영적 성장을 거부하는 것과 같다. 영적으로 성장하기만 하면 아버지를 모독한 것, 아들을 모독한 것, 그 외에 어떠한 잘못도 모두 스스로 깨닫고 그것이 얼마나 잘못되었던가,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던가, 또 얼마나 한심한 것이었던가를 알게 되어 고치며 계속 성장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모든 것이 가능하기 위한 전제 조건은 우리 속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세세한 움직임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다. 이런 전제 조건을 거부하는 데에선 더 이상 어떠한 가능성도, 희망도 없다는 것이다.
문제는 ‘여는’것이다. 귀를 열고 마음을 여는 것이다.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에 의하면, 진리는 ‘열어놓음’이다. 예수님이 귀먹은 사람을 보시고 안타까운 마음, ‘탄식’하시는 마음으로 그를 향해 “에바다(열려라)!”라고 하셨다는데(눅7:34), 영적으로 귀가 먹은 상태, 아니 마음이 강퍅한 상태에 있는 우리가 이런 상태에서 해방되기 위해 먼저 해야 할 일은 바로 ‘여는 것’이다. 『도마복음』에서 계속 강조하듯, 우리에게 들을 귀가 있는가?
<참고>
여기 이 절에 ‘아버지’, ‘아들’, ‘성령’이 함께 언급된 것으로 보아 예수님의 직접적인 말씀이라 할 수 없고, 예수님 이후 삼위일체 사상이 태동한 후의 사정을 반영하는 것이라 보아야 할 것이다. 『마태복음』(28:19)에서 예수님이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라 한 말씀이 아직 삼위일체 사상이 생기기 전 시대에 사신 예수님 자신의 말씀이라 보기 어렵다고 하는 이유와 같은 맥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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