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도마복음(42 절): 삶에 초연하라! 본문
도마복음(42 절): 삶에 초연하라!
Jesus said, "Become passers-by."
예수께서 말씀하시길. "지나가는 사람이 되라."
해석
이 짧고 평범한 문장을 통하여 예수는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 실로 당혹스러운 글이다. 예수가 하고자 하는 말은 말 그대로 지나가는 사람 즉 나그네가 되라는 말이다.
걸망 메고 바람처럼 떠돌아다니는 나그네에게 집착의 대상인 사람과 재산에 미련이 쌓이지 않는다. 삶에 너무 집착하지 말고 바람처럼 걸림 없이 초연하게 살아가라는 말이다.
인생은 나그네길이다. 나그네처럼 살아야지 누구말대로 백년도 못사는 주제에 천년만년 살듯 온갖 욕심을 부리며 이 세상에 자신의 왕국을 세우며 살아서는 안 된다. 가진 자나 없는 자나 못난 사람이나 잘난 사람이나, 누구나 사늘한 땅에 묻혀 한줌 흙으로 돌아가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죽음은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라도 되듯이 욕심 부리고 남에게 해를 끼치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 대다수 인간들의 모습이다. 평생 욕 얻어 먹어가며 힘들게 번 돈은 하늘나라에 가지고 갈 수 없다. 사람들은 재산을 하늘나라에 보관해야 함을 잊고 있다. 생전에 착한일 하고 공덕을 쌓는 것이 하늘나라에 재산을 보관하는 일이다.
누가복음(12:33)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너희는 있는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라. 해어지지 않는 돈지갑을 만들고 축나지 않는 재물 창고를 하늘에 마련하여라. 거기에는 도둑이 들거나 좀먹는 일이 없다. “
예수의 지나가는 사람이 되라는 말은 법구경에 나오는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천둥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말과 같다.
또한 이 말은 남의 일에 간섭하기 좋아하고 개입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에 대한 경계의 글이기도 하다. 우리는 자신의 앞가림도 못하면서 직위나 신분, 나이를 이유로 또는 친분관계를 이유로 자신은 실행하지 못하는 일을 남에게 요구하기도 하고 남에 대한 험담이나 가십으로 소중한 시간을 소비한다. 그 시간에 자신을 성찰하는 편이 훌륭한 일이다.
이 구절과 관련하여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생각 지켜보기이다.
대다수 사람들은 생각의 주인이기 보다는 생각의 노예이다. 그것은 생각과 자신을 동일시하거나 생각과 자신(자아)을 분리시켜 지켜볼 수 없기 때문이다. 10분, 아니 1분이라도 아무런 생각 없이 존재할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 것인가? 생각을 하지 않으려 하면 할수록 온갖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난다. 남의 일에 개입하듯 우리는 자신의 생각에 개입하여 생각의 사슬에 매여 버린다. 이러니 마음의 평화는 생각할 수 없다.
생각에 머물지 않는 무심히 지나가는 자가 되어야 한다. 생각에 무심하게 반응할 때 생각의 사슬에서 벗어나 참된 자아와 만나게 된다.
우리는 삶의 나그네가 되어야 한다. 어느 시에 나오는 구절 처럼 구름에 달 가듯이 집착하지 않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 (taucross)
[출처] 도마복음(42 절): 삶에 초연하라! 작성자 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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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나그네가 되어라
인생은 나그네 길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그네가 되십시오.”
Jesus said, "Become passers-by."
Jesus said: Be one of those who pass by.
Jesus says:
"Become passers-by."
『도마복음』에만 있고, 또 곱트어로 세 단어 밖에 되지 않아 『도마복음』에서 가장 짧은 절이다. ‘나그네’의 의미를 가장 잘 말해주는 것 중의 하나로 “인생은 나그네 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구름이 흘러가듯 떠돌다 가는 길에 정일랑 두지 말자 미련일랑 두지 말자~”하는 최희준의 노래를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오래전 한국에서 독일어 선생을 한 적이 있는데, 교과서에 나오는 나그네 이야기도 인상 깊어 잊혀지지 않는다. 어느 날 나그네가 길을 가다가 날이 저물어 어느 성을 찾아 문을 두드리며 하룻밤 자고 가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주인은 나그네를 보고 여기는 나그네를 위한 여관이 아니니 저 아래 여관으로 가보라고 하며 문을 닫으려 했다. 나그네는 잠깐만 물어볼 것이 있다고 했다. “이 성에 지금 주인 되시는 분 이전에는 누가 살았습니까?”“그야 물론 우리 아버지시지요.”“그 아버지 전에는 누가 사셨나요?”“우리 할아버지시지요.”“그 할아버지 전에는?”“물론 우리 증조할아버지…….”“아, 그러고 보니 이 성에도 이처럼 여러 윗분들이 나그네처럼 잠깐씩 머물다가 가신 집이네요. 그러니 이 성도 결국 나그네를 위한 여관이나 객사가 아니겠습니까?”
‘하숙생’ 노래나 ‘여관’이야기나 이 세상은 잠시 지나가는 나그네의 삶이라는 것, 따라서 삶에 대한 집착에서 해방되라는 이야기라고 볼 수 있다. 제21, 27, 56, 80, 110, 111 절 등에도 비슷한 생각이 되풀이되고 있다. 그러나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 물론 집착하지 않는다고 해서 무조건 염세적이 되어 이 세상이 줄 수 있는 즐거움을 모조리 거부하고 오로지 세상을 혐오하라는 뜻이 아니다. 문제는 세상에서 줄 수 있는 즐거움을 고맙게 여기고 즐기면서 살아가지만, 이 삶이 우리의 궁극 목적지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면서 길을 가느냐, 아니면 갈 길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이 삶에 달라붙느냐 하는 것이다.
사실 ‘길을 떠난다’, 혹은 ‘집을 떠난다’는 것은 세계의 모든 종교에서 강조하는 가르침 중 기본적인 것이라 볼 수 있다. 가장 잘 알려진 예가 이슬람이다. 이슬람은 모든 신자들이 반드시 지켜야 할 다섯 가지 가장 중요한 의무를 ‘다섯 가지 기둥’이라고 하는데, 신자들이 적어도 일생에 한 번은 메카를 다녀오는 ‘순례haji'를 그중 하나로 지정했다. 앞에서도 지적한 것처럼 조셉 캠벨의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이라는 책이나 선불교에서 유명한 「십우도」도 모두 종교적 수행의 시작이 집을 떠나는 것과 같다는 것을 지적하는 예라 할 수 있다. 엄격한 의미에서 성경에 나오는 실낙원, 출애급, 바벨론 포로 등 성경의 큰 이야기들도 모두 떠남과 돌아옴이라는 정신적 순례를 예표하는 것들이라 할 수 있다. 심지어 그리스도교 구속의 전 과정 자체도 하나의 여정으로 표현하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인지 “너희는 너희에게 몸 붙여 사는 나그네를 학대하거나 억압해서는 안 된다. 너희도 이집트 땅에서 몸 붙여 살던 나그네였다.”(출22:21)라는 말에 귀가 기울여진다. “우리는 너나 없는 이방인, 왜 서로를 사랑하지 않나~”하는 노랫가락이 귀에 들리는 것 같다.
물론 집을 떠난다는 것은 물리적ㆍ지리적 이동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인습적이고 일상적이고 관습적인 생활방식이나 사유방식을 뒤로하고 새로운 차원의 삶, 해방과 자유의 삶을 향해 출발함을 상징하는 것이다. 외적 공간에서의 이동이 아니라 내적 공간inner space에서 자유롭게 노니는 것이다. 장자의 표현을 빌리면 ‘북쪽 깊은 바다北溟’에서 남쪽 ‘하늘 못天池’으로 나는 붕새의 ‘붕정鵬程’이요‘소요유逍遙遊’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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