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도마복음(39 절): 지혜롭고 순수하라! 본문
도마복음(39 절): 지혜롭고 순수하라!
Jesus said, "The pharisees and the scribes have taken the keys of knowledge (gnosis) and hidden them. They themselves have not entered, nor have they allowed to enter those who wish to. You, however, be as wise as serpents and as innocent as doves."
예수께서 말씀하시길, "바리세인들과 학자들이 지식(영지)의 열쇠들을 취하여 감추었느니라. 그들 자신도 들어가지 않으며 들어가기를 원하는 자들도 들어가도록 허용치 않느니라. 그러나 그대들은 뱀들처럼 지혜롭고 비둘기들처럼 순수 하라."
해석
비슷한 구절이 누가복음(11:52)에 나온다.
“너희 율법 교사들은 화를 입을 것이다. 너희는 지식의 열쇠를 치워버렸고 자기도 들어가지 않으면서 들어가려는 사람마저 들어가지 못하게 하였다."
예수 탄생 오래 전에 유대인들은 훌륭한 명상법과 가르침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고대히브리어로 기록되거나 구전되어진 가르침과 명상법은 성직자나 학자들의 전유물이 되어갔다. 왜냐하면 예수가 활동하는 시기에 이미 유대인들은 고대희브리어 대신 당시 유대 지방에 광범위하게 사용되던 아람어를 사용하였고 고대 히브리어는 문서 속에만 존재하는 언어가 되어있었다. 일반인들은 히브리어로 기록된 문서를 읽을 수가 없었다.
대중이 무지할수록 정치지도자나 종교지도자들은 쉽게 대중을 지배할 수 있고 자신들의 가치를 높일 수 있다. 유대 성직자들이나 학자들은 일반인이 알아보기 어려운 히브리어를 사용하여 자신들의 권위를 높였다. 그러나 이들도 의미보다는 의식(Ritual)에만 치우쳤고 유대 고대지혜는 사람들에게 잊혀져갔다. 예수는 당시의 상황을 말하고 있음이다.
이런 위선적인 예를 우리 주변에서도 볼 수 있다. 읽어도 무슨 뜻인지 일 수 없는 어려운 한자로 구성된 법규, 무슨 뜻인지 쉽게 다가오지 않는 성경, 영어로 휘갈겨 쓴 의사 처방전, 신도들의 발길을 돌리게 하는 한자투성이 불경, 등이 그러하다. 자신들의 권위를 높이려는 의도가 숨어있다.
예수는 제자들이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양순하라고 한다. 이 구절은 마태복음(10:16)의 내용과 비슷하다. "이제 내가 너희를 보내는 것은 마치 양을 이리떼 가운데 보내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슬기롭고 비둘기같이 양순해야 한다. “
창세기에서 뱀은 하와를 유혹하여 죄에 빠뜨리는 사악한 존재로 등장한다(창세기 3, 1-24 참조). 마태복음(23:33)에서 예수가 율법학자와 바리새인을 위선자로 비난하는 글에 이런 말이 나오기도 한다. “이 뱀 같은 자들아, 독사의 족속들아! 너희가 지옥의 형벌을 어떻게 피하랴?”
사람들은 창세기 구절 때문에 뱀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가 강한데 여기서 예수는 뱀을 지혜로운 존재로 비유한다. 단어에 여러 의미가 내포되어 있음을 고려하면 이해 못할 것도 없다.
사실 뱀은 옛날부터 여러 문화에서 지혜를 상징하는 동물이었다. 힌두교에서는 뱀은 삶의 지혜와 은혜의 신이다. 인도의 요가 중에 쿤달리니 요가라는 것이 있다. 이 요가는 척추 가장 아래 부위(미절골)에 잠자고 있는 에너지를 끌어 올려 머리 중심으로 가지고 오면 깨달음을 얻는다고 말한다. 이들은 자신들을 각성시키는 이 신성한 쿤달리니 에너지를 상징적으로 또아리를 틀고 있는 뱀으로 표현한다.
인도나 캄보디아 지역의 힌두교나 불교 신전의 조각상에는 뱀 조각이 많이 나온다. 이집트 파라오는 왕의 권위를 나타내는 성스러운 뱀 머리 모양의 장식을 사용하였다. 우주와 영원성을 상징하는 우로보로스(자신의 꼬리를 집어 삼키는 뱀)도 뱀의 형상이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지혜와 순수함을 내세운다. 이 덕목은 무지하고 위선적인 바리세인 그리고 학자와 비교가 된다. 비밀의 열쇠를 가지고 있으면서 비밀을 알려고 하지 않는 어리석음과 커다란 권세라도 가진 듯 대중에게 접근을 허락하지 않는 추한 마음을 본받지 말고 그 반대 덕목인 지혜와 순수함을 지니라는 말이다.
[출처] 도마복음(39 절): 지혜롭고 순수하라! |작성자 우타
39. 깨달음의 열쇠를 감추고
뱀과 비둘기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깨달음에 이르는 열쇠들을 가져가 감추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는 사람도 들어가지 못하게 했습니다. 여러분은 뱀같이 슬기롭고 비둘기같이 순진하십시오.”
Jesus said, "The pharisees and the scribes have taken the keys of knowledge (gnosis) and hidden them. They themselves have not entered, nor have they allowed to enter those who wish to. You, however, be as wise as serpents and as innocent as doves."
39a. Jesus said: The pharisees and the scribes have taken the keys to knowledge and have hidden them. They did not go in and they did not permit those desiring to go in to enter.
39b. You should be as clever as snakes and as innocent as doves.
Jesus says:
(1) "The Pharisees and the scribes have received the keys of knowledge, (but) they have hidden them.
(2) Neither have they entered, nor have they allowed to enter those who wish to.
(3) You, however, be as shrewd as serpents and as innocent as doves!"
『마태복음』(23:13)과 『누가복음』(11:52)에도 나오는 말이다. 단, 이 두 복음에는 바리새인들, 서기관들 혹은 율법 교사들을 향해 ‘화 있을진저’하면서 그들을 정죄하는 데 치중하고 있는 반면, 여기 『도마복음』에는 제자들에게 이들을 조심하라고 경고하는 어조가 더욱 강하다.
여기서 ‘깨달음의 열쇠’라고 옮긴 말을 한글개역이나 표준 새번역에는 ‘지식의 열쇠’라고 번역했다. 물론 ‘그노시스gnosis'를 ‘지식’이라 번역할 수 있지만, 우리가 『도마복음』 풀이를 통해 계속 강조한 것처럼, 여기 언급하는 그노시스는 보통의 지식이 아니라 통찰, 예지, 직관, 꿰뚫어봄 등이다. 따라서‘깨달음’이나 ‘깨침’이 원의에 더 가까운 번역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깨달음에 이르는 열쇠를 종교 지도자들이 가지고 있으면서도 감추었다니, 무슨 뜻인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혹은 율법 교사들은 이런 깨침의 진리에 무지하거나, 비록 무지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이런 깊은 차원의 진리를 짐짓 외면하거나 다른 이들에게 가르치려 하지 않았다. 심지어 이런 ‘깨침’의 진리를 이야기하거나 사람들을 그리로 인도하려는 이들을 방해하거나 박해하기도 했다. 이들은 이런 ‘깨침’의 가르침보다 사람들이 쉽게 받아들일 수 있고, 또 그것으로 사람들을 좌지우지하여 자기들의 세속적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무조건 율법에 순종하면 복을 받는다는, 단순하고 기복적인 외형적 차원의 종교만 가르치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들에게 이른바 ‘사회적 통제social control' 수단으로서의 종교가 무엇보다 중요했다. 이처럼 ‘깨침’의 열쇠를 자기들도 사용하지 않으니 자신들이 들어가지 못하는 것은 물론, 이런 열쇠가 있는 줄을 모르는 일반인들도 들어 갈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런 이들을 조심하라고 한 것이다.
어떻게 조심해야 하는가?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진하라.”고 했다. 구체적으로 무슨 뜻일까? 뱀과 비둘기는 서로 양립 불가한 반대 개념이 아닌가? 아니다. 이 복음서가 씌어질 당시 뱀과 비둘기가 무엇을 상징하고 있었는가를 알아보면 어느 정도 감을 잡을 수 있다. 뱀은 일반적으로 배로 땅을 기는 형태를 가졌을 경우 사람의 발꿈치나 무는 불길한 것, 사악한 것으로 여겨지지만, 머리를 하늘로 향해 올라가는 모양을 가지고 있을 경우 그것은 의식의 변화와 치유를 상징하는 좋은 동물이었다. 특히 뱀은 허물을 벗는 특성 때문에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으로 태어나는 변화, 좀더 구체적으로는 신체 최상층부의 에너지 근원chakra이 열리면서 이분법적 의식이 초이분법적 의식으로 바뀌는 변화를 상징한다. 이집트 왕들이 머리에 뱀의 모양을 달고 있는 것이나, 아담과 이브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게 한 뱀이 “주 하느님이 만드신 모든 들짐승 가운데 가장 지혜로웠다.”라고(창3:1) 한 것이나, 이스라엘 사람들이 사막에서 십자가에 달린 뱀을 쳐다보고 병고침을 받았다고 하는 것이나, 지금도 의사협회 문양에 뱀이 그려져 있는 것이 모두 그 이유이다.
한편, 비둘기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순결, 순진, 평화, 전령을 상징한다. 그러나 성경이 쓰일 당시 더욱 중요한 의미는 그것이 성령을 상징하는 것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예수님이 침례를 받을 때 ‘성령’(눅3:22)이, 혹은 ‘하느님의 영’(마3:17)이 ‘비둘기’의 모양으로 내려왔다고 하는 이야기에서 잘 나타나 있는 바와 같다. 오늘 우리가 보통 쓰는 말로 하면 비둘기는 초이분법적 의식을 상징하는 것이다.
따라서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진하라는 말은 모순되는 개념이 아니라, 둘 다 우리의 의식이 바뀌는 ‘깨침’의 체험을 하라는 말과 다름이 없다. 깨침의 비밀을 감추고 있는 바리새인과 서기관 같은 종교 지도자들, 장님이 장님을 인도하는 격의 그런 사람들을 의존하지 말고, 제자들이 직접 초이분법적 의식, 곧 깨침의 경지로 들어가라는 말이라고 볼 수 있다.
지금 우리는 어떤가? 오늘 그리스도교 지도자들 대부분은 이런 ‘깨침의 열쇠’를 감추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그런 것이 있는 줄도 모르는 것이 현실 아닌가.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그 동안 너무 오래 감추다가 이젠 아주 잊어버리거나 잃어버린 셈이다.
나그함마디 문서에 속하는 『빌립복음』을 보면, 농사를 지어 추수를 하려면 토양과 물과 바람과 빛이라는 네 가지 기본 요소가 필요한 것처럼, 하느님의 농사에도 믿음, 소망, 사랑, 깨침이라는 네 요소가 있어야 한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믿음은 우리의 토양, 우리가 거기에 뿌리를 내리고;
소망은 물, 우리가 그것으로 양분을 얻고;
사랑은 공기, 우리가 그것으로 자라고;
깨침gnosis은 빛 우리가 그것으로 익게 됩니다.”(『빌립복음』 79:25-31)
122. The cultivation in the world (is) thru four forms°— (crops) are gathered into the barn thru soil and water and wind and light. And the cultivation by God is likewise thru four: thru trust and expectation° and love and recognition.
Our soil is the trust in which we take root,
the water is the expectation thru which we are nourished,
the wind is the love thru which we grow,
yet the light is the recognition thru which we are ripened.
(Ph 116; cp. Clement of Alexandria, Stromata V.3: ‘An ignorant man has sought; and having sought, he finds the teacher; and finding, has believed; and believing, has hoped; and henceforward, having loved, is assimilated to what was loved— such is the method Socrates shows’; interlinear)
https://web.archive.org/web/20050213205329/http://www.metalog.org:80/files/philip2.html
The Gospel of Philip, part I (sayings 1-100)
The Gospel of Philip, part II (sayings 101-143 &Ph Notes)
115. Farming in this world requires four essences: water, earth, air, and light. In the same way, the farming of God consists of four essences: faith, aspiration, love, and knowledge.
Our “earth” is faith in which we are deep-rooted;
“water” is aspiration that carries us;
“air” is love thanks to which we live; and
“light” is knowledge that allows us to mature.
바울은 『고린도전서』(13:13)에서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가운데서 으뜸은 사랑입니다.”라고 했다. ‘깨침’은 어디에 간 것인가? 바울 당시에도 그것이 감추어져 있었을까?
『도마복음』 전체를 통해 강조하는 ‘깨달음’이나 ‘깨침’의 진리는 일반 사람들이 이해하거나 실천하기에 힘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중국 화엄불교 전통에 의하면, 부처님도 깨침을 얻어 부처님이 된 다음 그 깨침의 내용을 사람들에게 가르쳐보았는데, 사람들이 전혀 이해를 못해 마치 ‘귀머거리나 벙어리’같이 아무 반응이 없었다고 했다. 그리하여 일단 그 가르침을 옆으로 하고 『아함경』에 나오는 가르침같이 아주 단순하며 기본적인 것을 가르치기 시작했다고 한다. 사람들의 이해 정도가 깊어지면서 점점 어려운 가르침들을 가르치고, 처음에 가르쳤던 심오한 진리는 제일 마지막에 가서 가르쳤는데, 그 가르침이 바로 『화엄경』에 포함된 진리라는 것이다.
어는 종교에서나 이런 신비적 차원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의 수는 적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런 깊은 차원을 아예 배척하거나 말살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적어도 틈새시장이 있듯, 이런 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그런 데 관심을 갖도록 하는 일은 허용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여기 도마복음의 가르침에서 뭔가를 얻을 수 있다면, 오늘날 그리스도교에서 해야 할 가장 시급한 일도 이처럼 종교 지도자들이 감추거나 잃어버린 ‘깨침의 열쇠’를 다시 찾아 활용하라는 권고 같은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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