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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도마복음 37 절 도마복음(37 절): 사람의 태양, 예수 본문

영성수행 비전/도마복음

도마복음 37 절 도마복음(37 절): 사람의 태양, 예수

柏道 2018. 12. 31. 16:42



도마복음 37 절 도마복음(37 절): 사람의 태양, 예수

    

 
His disciples said, "When will you become revealed to us and when shall we see you?" 

Jesus said, "When you disrobe without being ashamed and take up your garments and place them under your feet like little children and tread on them, then will you see the son of the living one, and you will not be afraid"  
  
제자들이 묻기를 “당신은 언제 우리에게 드러낼 것이며 언제 우리가 그런 당신을 볼 수 있겠나이까? 예수께서 말씀하길,  ”그대들이 어린아이처럼 부끄럼 없이 옷을 벗어 집어 들고는 발밑에 두고 밟을 때 그대들은 살아있는 분의 아들을 보게 될 것이며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  
  

해석 

복음서에 보면 예수는 자신이 누구라고 직접 밝히지 않는다. 그리스도나 하나님의 아들, 또는 주라는 말은 하지 않고 자신을 "인자"라는 칭호로 표현하였다. 왜 예수는 인자(人子) 즉 사람의 아들(the Son of man) 이라는 말을 사용하였을까?  
  
예로부터 신은 빛으로 상징 되었고 깨달음을 얻은 사람은 빛을 상징하는 태양으로 불렸다. “사람의 아들”은 "사람의 태양(Sun of man)"을 의미하고 예수처럼 빛이 된 사람을 상징하는 말이었다. 예수는 사람의 태양으로 자신을 칭했을 것이다.  
   

여기서 제자들의 질문 요지는 예수의 참 모습, 정체는 무엇이며 언제 그 참 모습을 볼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이 질문 시점이 언제일까? 여러 독립적이고 단편적 글을 모아 높은 경전이라 사건의 순서를 알 수가 없다. 병자를 고치고 물위를 걷고 수천 명 분의 음식을 만들어 내기까지 한 예수였다. 제자들은 이런 기적을 보고도 질문을 한 것일까?  
   

하여간 제자들은 자신들이 따르고 있는 예수란 사람이 누구인지 궁금하였다. 아는 만큼 이해한다는 말이 있듯이 깨달은 자가 깨달은 자를 알아본다. 제자들은 아직 예수의 참 모습을 볼 수준이 되지 않았다.  
   

예수는 제자들이 자신의 참 모습을 보려면 어린아이처럼 부끄럼 없이 옷을 벗어 집어 들고는 발밑에 두고 밟을 때라고 말한다. 벗는다는 것은 가식을 벗어던지는 것을 말하고 밟는다는 것은 형식이나 명예에 집착하지 않음을 말하는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를 따르면서도 스승에 대한 믿음이 약하여 자주 흔들렸고 위선적 태도를 보였고 명예에 집착을 하고 있었다. 이런 상태의 제자들이 예수를 알아 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제자들의 영적 수준이 문제였다. 그러나 그들은 무지하여 하늘나라가 어디에 있는지, 예수가 자신들을 구원할 구세주인지, 하늘나라에 자신들의 자리가 보장되어 있는지에 관심이 있었다.  
  

마가복음(10: 35~40)에 보면 이런 사실을 추측할 수 있는 내용이 나온다.  
 
제베대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께 가까이 와서 "선생님, 소원이 있습니다. 꼭 들어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은 "선생님께서 영광의 자리에 앉으실 때 저희를 하나는 선생님의 오른편에 하나는 왼편에 앉게 해주십시오." 하고 부탁하였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너희가 청하는 것이 무엇인지나 알고 있느냐? 내가 마시게 될 잔을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을 고난의 세례를 받을 수 있단 말이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이 "예, 할 수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께서 다시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도 내가 마실 잔을 마시고 내가 받을 고난의 세례를 받기는 할 것이다. 그러나 내 오른편이나 왼편 자리에 앉는 특권은 내가 주는 것이 아니다. 그 자리에 앉을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미리 정해 놓으셨다." 

이 대화를 듣고 있던 다른 열 제자가 야고보와 요한을 보고 화를 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들을 가까이 불러놓고 "너희도 알다시피 이방인들의 통치자로 자처하는 사람들은 백성을 강제로 지배하고 또 높은 사람들은 백성을 권력으로 내리누른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사이에서 누구든지 높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몸값을 치르러 온 것이다." 하셨다.  
  

어린아이와 같아야 하늘나라에 갈 수 있다는 예수님 말씀처럼  여기서 예수는 위선과 명예에 대한 집착 등을 버리면 자신을 바로 볼 수 있음을 말한다.      
 
처음 성경을 접하면서 인자(人子, the son of man)를 어진 사람(仁者)으로 이해했었다. 그 복음서는 지금도 가장 많이 사용되고 있는 개역한글판이었다. 지금 한글 성경에는 개역한글, 개역개정, 공동번역, 표준새번역이 있으나 공동번역판만 사람의 아들로 되어있고 다른 성경 판은 인자로 번역되어있다. 인자에 한자가 병기 되어있지 않으면 누가 인자가 사람의 아들인줄 알 것인가? 쉽게 사람의 아들이라 했으면 좋았을 것을, 참으로 어색한 조어(造語)같다. 한자어가 권위가 있었던 시절 성경이 번역된 까닭일 것이다.  
 
그런데 성경은 하느님 말씀이므로 한 자도 고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은 어떤 성경 판을 진짜 하느님 말씀으로 주장하고 있을까?  
  
영어 본만 해도 KJV(King James Version, 1611), NIV(New International Version, 1978), NASB(New American Standard Bible, 1960, 1995년 개정) 등이 있는데 상당히 많은 구절이 다르기 때문에 하는 소리다. 가장 오래되고 권위를 인정받고 있는 킹 제임스 영어 본은 17세기 당시 존재한 그리스 신약성서 사본들을 근거로 번역한 성경이고 1978년에 만들어진 NIV는 17세기 이후에 발견된 5,000개 이상의 파피루스와 사본을 참고하여 장장 20년의 연구, 번역을 통하여 나온 영어 성경 본이다.   
  
킹 제임스 성경이 나온 후에 지금까지 수천 개의 고대 사본이 발견되었고 이들 사본을 반영한 현대 성경들이 원문에 더 가까울 수 있다. 사본마다 내용이 조금씩 다르고 특히 학자들에 따르면 사본 상당수는 조작의 흔적이 있다고 한다. 성경이 필사되어 오는 과정에서 필요에 따라 내용의 삭제나 첨가가 있었음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근본주의자들은 무슨 사본을 하느님 말씀으로 받아들일까? 또한 성경에 따라 병역의무를 거부하는 단체,  혈액 수혈을 거부하는 단체 등이 있는데 이들 단체들이 언어에 매여 예수를 죽이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세계 여러 나라 성경을 떠나서 한글 성경만 해도 개역한글과 공동번역 간에 차이점이 존재하는데 어떻게 맹목적으로 성경은 한 자라도 고칠 수 없는 신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지 놀라울 뿐이다.  예수가 율법에 묶인 바리세인들과 율법학자들의 고지식함과 위선적 태도를 비난하였는데 오늘날  근본주의자들이 바로 예수가 비난하였던 그들과 비슷하지 않는가?  

[출처] 도마복음 37 절 도마복음(37 절): 사람의 태양, 예수 |작성자 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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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부끄럼 없이 옷을 벗어

이분법적 의식의 초월


 

그의 제자들이 말했습니다. “당신은 언제 우리에게 나타나시고, 우리는 언제 당신을 볼 수 있겠습니까?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이 어린아이들처럼 부끄러워하지 않고 옷을 벗어 발 아래 던지고 그것을 발로 밟을 때, 여러분은 살아 계신 분의 아들을 보고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His disciples said, "When will you become revealed to us and when shall we see you?" 
Jesus said, "When you disrobe without being ashamed and take up your garments and place them under your feet like little children and tread on them, then will you see the son of the living one, and you will not be afraid"


His disciples asked him: When will you appear to us? When will we see you? Jesus replied: When you strip naked without shame and trample your clothing underfoot just as little children do then you will look at the son of the living one without being afraid.

 

(1) His disciples said: "When will you appear to us, and when will we see you?" 
(2) Jesus said: "When you undress without being ashamed and take your clothes 
(and) put them under your feet like little children (and) trample on them, 
(3) then [you] will see the son of the Living one, and you will not be afraid."



공관복음에는 없는 말이다. 여기서 제자들이 당신은 언제 우리들에게 나타나시겠습니까? 하고 물었다는 사실은, 18절 풀이에서 언급한 것처럼, 제자들이 당시 많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재림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뜻이다. 내 안에 있는 천국이 아니라, 하늘에 떠 있거나 하늘에서 내려오는 외적 천국을 상정하고 이런 천국이 언제 이르는가를 물은 것이다. 이런 통속적이고 인습적인 질문에 예수님은 언제라고 가르쳐주는 대신 전혀 엉뚱한 대답을 하신다. 부끄럼 없이 옷을 벗어 발로 밟으라고 했다. 도대체 왜 이런 엉뚱한 대답을 하셨을까? 화두話頭나 공안公案처럼 충격 요법의 하나로 툭 던져보신 것인가?

 

부끄럼 없이 옷을 벗는다는 것은, 21절에서 언급한 것처럼 옷을 벗고 물에 잠기는 침례를 받는다는 뜻일 수 있다. 또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이 된다는 뜻일 수도 있고, 몸을 벗고 죽는다는 뜻일 수도 있다. 그러나 전후 문맥으로 보아 여기서는 역사적으로 묻은 때를 모두 벗고 에덴동산에서의 타락 이전의 원초적 인간 상태로 되돌아감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순리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특히 옷을 벗고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상태를 회복하라는 말에서 그런 암시를 강하게 받는다. 성경에 보면 아담과 하와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기 전에는 둘 다 벌거벗고 있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다.”(2:25)라고 하고, 그 열매를 먹자 두 사람의 눈이 밝아져서, 자기들이 벗은 몸인 것을 알고, 무화과나무의 잎으로 치마를 엮어서 몸을 가렸다.”(3:7)라고 했기 때문이다.

 

주객을 분리하는 이분법적 의식이 없을 때는 자신을 대상object으로 분리하여 볼 수 있는 자의식self-consciousness이 없기 때문에 벌거벗은 것을 부끄러워할 수 없다. 짐승이나 어린 아이가 벗었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은 그런 까닭이다. 우리도 변화를 받아 이런 이분법적 사고에서 해방될 때 진정한 초월과 자유를 누릴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다시 주의해야 할 것은, 22절 풀이에서 지적한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이분법적 의식이 없던 이전 상태로 퇴행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 스스로 옷을 벗어 던지고 그것을 밟을 수 있다는 것은 이제 육체적으로 갓난아기가 아니라는 뜻이다. 따라서 이분법적 의식을 벗어나는 것은 그것을 초월하는 것이다. , 다시 어머니 뱃속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될 때 살아 계신 분의 아들을 보고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3절에 우리가 깨닫기만 하면 우리가 모두 살아 계신 분의 아들들임을 알게 된다고 한 것을 보면, “살아 계신 분의 아들을 본다.”는 것도 결국 우리의 참된 정체성을 발견한다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참된 정체성을 발견하면 어떤 상황에서도 기절초풍하는 일이 없고 두려움 없는 삶을 살 수 있다. 신과 내가 하나이고, 삶과 죽음이 하나인데 두려울 것이 무엇이겠는가? “내가 너와 함께 있으니 두려워하지 말라.”(43:5)

[출처] 도마복음 제37절|작성자 byunsd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