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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도마의 내한 가능성에 대하여 본문

영성수행 비전/도마복음

사도 도마의 내한 가능성에 대하여

柏道 2018. 12. 17. 10:55

사도 도마의 내한 가능성에 대하여


발제: 윤사무엘 박사


약력과 경력:

경북고, 연세대 및 동대학원 졸, 장로회 신학대학원 및 총신대학원 졸,

미국 하버드 신학부 및 보스톤대 신학부 졸,

신학박사, 철학박사, 교육학박사, 현, 올리벳신학교 총장

 

머리말


예수님의 제자 중 여덟 번째 사도로 알려진 도마(디두모 Thomas, “쌍둥이”)가 AD 41-17년경 아시아의 끝자락인 한국(가야국)에 와서 복음을 전했다고 한다. 도마(아람어로 디두모)는 시리아어로 ‘쌍둥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헬라에서는 그를 디디무스(Didymus)라고도 불렀다. 인도의 사도로 알려져 있다. 도마는 갈릴리의 한 가난한 어부의 가정에서 태어났을 것이라는 설이 오랫동안 전해 내려졌다. 외경 도마복음서나 영지주의 문서 중 하나인 도마행전(The Acta Thomae)에 의하면 예수님이 태어난 후 마리아와 요셉 사이에 태어난 아들로 야고보의 바로 밑의 동생이요, 시몬과 쌍둥이였다고 한다. [“쌍둥이(디두모)라 불리는 유다 도마”]


그는 목공이었고, 쟁기와 낫을 만드는 강철 기술자였으며, 배를 만들고 왕궁을 건축하는 기술자였다고 한다. 흔히 그는 주님의 부활을 의심한 인물로 흔히 말하여지지만 오히려 경험적인 것에 천착하는 매우 이성적인 인물임에 틀림없다.


그는 주님의 부활 소식을 듣고도 믿지 않았으나 주님의 손과 발을 만져 보고 창(槍)자국을 만져본 후에는 즉시로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위대한 신앙을 고백하였다(요 20:28). 이 고백은 주님의 신성에 대한 그의 확고한 믿음에서 나온 것으로 제자들 중 최초로 주님의 하나님 되심을 고백한 것이었다. 그는 동방 기독교의 선교본부인 에데사(Edessa)에서 출발하여 인도를 거쳐 인도양을 통해 동방의 땅끝인 한국에 와서 복음을 전했다는 것이다.


2008년 필자가 JSTV 부산방송국에서 집회를 인도하고 나오니 4명의 사도 도마 연구 전문가들로부터 이 사실을 검증해 달라고 부탁받고 김해와 대구를 방문하기 시작했다. 또한 영주, 서울을 현지방문(탐사)하고 여러 관계자들로부터 이야기를 듣고 나서 생각이 달라졌다. 충분히 검토해 볼 만한 내용이었다. 그 후 이스라엘과 시리아, 인도를 다니며 연구했고, 특히 《아시아 교회사》 3권을 저술하신 마삼락 박사(Samuel Moffett, 1917-2015, 프린스턴 신학교 명예교수, 교회사)와 대화를 해보니, 자세히 연구해 보라고 과제를 주심으로 깊은 관심을 가지셨다.


또한 1990년에 출간된 이장식 박사의 《교회사》에도 이 내용이 포함되어 있어 놀랐다. 정학봉 박사의 도마 연구도 흥미롭게 읽고 직접 만나 자세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1988년부터 도마 연구에 집념하고 계시는 조국현 박사(대구도마박물관, 대구광역시 동구 방촌동 강촌종합상가 2층 말씀장로교회)와의 깊은 교제 속에서 점차 확신이 들었다. 영주 왕유리에 있는 도마상에 가서 자세하게 살펴보았다.


2. 과연 도마가 한국에 와서 선교를 했을까?


이 질문을 가지고 고고학적 시각과 선교사적 관점에서 현장답사와 관련 역사자료들의 검토에 들어갔다. 그리고 교회사 관련 전문학자들의 견해를 듣고 필요한 부분들을 확인하는 형식으로 역사의 진실을 찾아가는 구도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결론은 사도 도마가 주님의 부탁대로 이스라엘에서 가장 먼 땅끝(행 1:8)인 한국에 와서 복음을 전했다는 것이다.


1) 김해(金海 The Golden Sea):


노아홍수 전 온 땅이 하나로 있었을 때 에덴동산의 동쪽이 오늘날 한반도 였을 것이다. 노아홍수 후 오대양 육대주로 나뉘어 졌을 때, 오늘날 김해는 육상 실크로드와 해상 실크로드가 만나는 곳이며, 낙동강과 남해가 만나는 곳에 도마가 배를 타고 도착하여 복음을 전했을 것이다. 가야국이 시작되어 수도로 있었고, 수로 왕, 수로왕비 허왕후, 김해박물관, 패총 등이 남아있다. 김해에 있는 구지봉이 최초의 교회 자리이며, 김수로 왕능에 들어가는 문에 오병이어의 문양이 새겨져 있다. 이는 이스라엘 오병이어 기념교회의 모자이크 그림과 흡사하다.


김수로왕은 AD 42년에 가야국의 초대 왕이 되었다. 《가락국기》에 정확하게 연도가 기록되어 있다. 《가락국기》는 경상남도 김해의 금관 지주사(AD 1075-1082)로 있던 문인이 적은 것을 일연 스님이 《삼국유사》에 베껴 써 넣은 것이다. 수로왕은 구간 등 신하의 왕비 간택 청을 믿음으로 뿌리치고 6년간 총각 왕으로 지내다가 기독교인 허왕후(허황옥)와 결혼했다. 허씨는 모세의 팔을 잡고 함께 기도한 훌(Hur, 유대지파)의 후손으로 벤허(Ben-Hur, 히브리어로 ‘훌의 자손’이란 뜻)의 집안이다.


허왕후는 AD 48년 5월(음력) 인도에서 출발하여 7월 27일(음력) 김해에 도착하였고, 배는 8월 1일(음력) 인도로 돌아갔다. 이 시기는 계절풍과 구로시오 해류를 이용하여 왕래할 수 있을 시기이다. 이 시기가 몇 개월간만 차이가 나도 항해 가능성이 떨어진다.


허왕후능[=수로왕비능]앞에 있는 파사석탑은, 허왕후가 인도에서 올 때 배의 무게 중심을 잡기 위하여 싣고 온 돌 6개로, 후에 불교인들이 석탑 모양으로 쌓아 붙인 이름인데 사실 불교와 관계없다. 오히려 오병이어처럼 쟁반에 떡 5개가 쌓여 있는 모습이다.


가야국이 기독교 국가였다는 사실은 김해 김씨의 제사에서 성찬식이 있었고 김해박물관 2층에 보관된 유물에 성찬기가 있음을 보아 알 수 있다. 이 모든 유물은 무덤 속에서 발견된 것이다. 철기 견본을 본뜬 토기로 만든 다기와 애찬기가 전시되어 있다. 유물에 불교의 흔적이 없다. 김해국립박물관이나 가야 유적지에는 불상이나 불교의 흔적이 전혀 없다. 그래서 우리나라에는 불교보다 기독교가 먼저 전파되었다. 기독교는 AD 41년에, 불교는 고구려에 AD 372년, 신라에 AD 528년에 전파되었다. 또한 사도 도마도 인도(AD 52-72)보다 한국에 먼저 와서 땅끝 선교를 했다. 그래서 한국은 동쪽 아시아에서 복음을 가장 먼저 받은 나라가 된다.


구지봉에 있는 구지가(龜旨歌)는 김수로왕이 토착민에게 부르도록 한 가장 오래된 향가(가요)이면서 동요인데 대왕을 맞이하라는 노래였다.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밀어라
내밀지 않으면 구워서 먹을 테다
구하구하龜何龜何 수기현야首其現也
약불현야若不現也 번작이끽야燔灼而喫也


가야국은 낙동강 주변의 부락들이 기독교로 연맹체가 된 나라이다. 김해를 가락이라 했는데 가락의 동쪽 강이라 하여 낙동강이라 이름을 지었다. 낙동강을 따라 있는 예천, 점촌, 상주, 선산, 구미, 왜관, 대구, 고령, 청도, 밀양, 삼랑진, 김해가 2000년 전 도마가 복음을 전한 곳이다. 도마박물관 관장 조국현 박사는 대왕을 성령으로 해석하여 찬송가 190장(통합 177장) 곡으로 가사를 바꿔서 부른다. “성령이여 강림하사 나를 감화하시고 애통하며 회개할 맘.”


김해평야는 본래 바다였는데, 수로왕이 가져온 철기로 낙동강 주변의 나무를 베어 배를 만들면서 토사가 점차 뒤덮여 AD 3-4세기경 자연적으로 육지가 되었다. 김해평야(오늘날 김해 공항 주변)에는 고층 건물을 짓지 않는다. 그 넓이가 이스라엘의 갈릴리와 비슷하다. 김해평야의 지층에서 패총이 발견되었다. 김해국립박물관에 샘플이 전시되어 있다.


가야금은 본래 하나님을 찬양하던 수금이었다. 12줄은 이스라엘 12지파를 상징하며 12달을 뜻하는 것으로 가야금은 깊은 자연의 소리를 낸다.


중국 한(漢) 나라 때 광무제의 박해를 피해 동이족이었던 수로(首露)라는 사람은 AD 42년 동료들과 함께 한반도 김해에 상륙해 변한 족장의 추대를 받아 가락국을 세우고 김수로왕이 되었다(김유신의 12대 조부). 김수로왕의 가락(가야)국에서 제철산업을 크게 일으켜 해상을 통해 중국과 일본 등지로 철을 수출하는 상선 500척을 보유한 해상왕국을 세웠다.


수로가 가락에 도착한 지 6년 후인 AD 48년에는 지금의 인도 지역인 아유타국의 공주 허황옥이 신하 두 내외와 20명의 선원을 데리고 배를 타고 나타났다. 《삼국유사》에는 허황옥이 불교를 전하기 위해 파사(페르샤)의 석탑을 가지고 온 것처럼 묘사했지만 실상은 다르다. 허황옥은 가야에 도착하여 자신의 신분을 밝히며 자신이 온 목적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금년 5월 제가 본국에 있을 때 부왕이 왕비로 더불어 저에게 말씀하시기를 어젯밤 꿈에 함께 상제[하나님]를 뵈었는데 상제의 말씀이 ‘가락국 왕 수로를 내려 보내 등극하게 하였으니 그는 나의 택함을 받은 사람이다. 그가 새로 나라를 세웠으나 아직 배필을 정하지 못하였으니 그대들은 공주를 보내어 짝을 삼게 하라’ 하시고 말을 마치자 하늘로 올라가셨다고 합니다. 부모님께서 잠을 깬 후에도 상제의 말이 아직 귀에 쟁쟁한지라 저에게 이르시기를 너는 곧 이곳을 떠나 그리로 가라 하시었습니다.” 이종기, 《가야공주 일본에 가다》 유고집, 서울: 기획출판, 2006.에서 발췌


여기에 나오는 상제(上帝)는 전통적으로 하나님을 뜻하는 것으로 불교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 허황옥이 가야에 도착한 AD 46년은 예수님의 제자 도마가 페르시아를 거쳐 인도로 들어가 선교하던 시기이다. 당시 페르시아는 도마를 비롯하여 시몬, 다대오 등 사도들이 활동하던 선교 중심지였다. 외경인 ‘도마행전’에는 사도 도마가 인도에 들어가 처음 전도하여 세례(침례)를 준 사람이 인도의 공주(허황옥)이며, 왕과 왕비도 세례(침례)를 받았다고 되어 있다. 허황옥의 배가 처음 도착한 곳을 가야 사람들은 ‘주님의 포구’라는 뜻에서 주포(主浦)라 불렀다. 《삼국유사》를 쓴 일연(김견명)이 말한 파사의 석탑은 실은 가공한 돌이 아니라 평범한 자연석 6개를 쌓아 놓은 것일 뿐이다. 허황옥이 자신의 배에 돌 여섯 개를 싣고 온 이유는 배의 균형을 잡기 위해 갈릴리의 배 만드는 기술자였던 사도 도마의 충고를 받아들였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김해에 있는 수로왕릉의 납릉 정문에는 석탑 모양의 그릇을 가운데에 두고 두 마리의 물고기가 마주 보고 있는 그림이 있는데, 이 그림은 갈릴리의 오병이어 교회에 있는 모자이크와 같은 형태이다.[두 마리의 물고기 무늬(쌍어문)는 인도의 라마 왕 탄생서원 앞과 일본의 야쓰시로사에도 새겨져 있음]


AD 41-47년 사이에 한국에 도착하여 6년간 김해부터 영주에 이르는 낙동강 중심으로 한국에 복음을 전한 도마는, AD 48년에 김수로왕과 인도로부터 온 허왕후와의 혼인을 주선한 것으로 추측된다. 수로왕과 허왕후 사이엔 열 아들과 두 명의 딸을 낳았다. 두 아들은 김해 허씨의 조상이 되었다. 이중 거등왕과 거칠군이 있고, 한 딸은 석탈해 맏아들의 비가 되었다. 다른 딸은 해상대국 가야를 이룬 조상이 되었다. 김수로왕은 국호를 ‘가락국’에서 ‘가야’로 바꾸었는데, ‘가야’는 드라비다어로 물고기를 의미한다. 물고기(IXΘΥΣ)는 초대교회의 기독교인 사이에 사용된 암호였다. 헬라어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며 구세주”라는 말의 첫 글자를 합하면 물고기, 즉 ‘익투스(IXΘΥΣ)’라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신라의 화랑도는 김수로 16대 손인 김유신이 삼촌 춘추가 당나라에서 가져온 성경을 읽고, 고조선부터 있었던 모임을 복원한 것이다. 이들은 메시아를 상징하는 꽃인 무궁화를 머리에 꽂고 다니고, 세속오계(世俗五戒)는 기독교 신앙이 반영되어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1956년 불국사 경내에서 발견된 석재 십자가와 영남대학교 박물관 지하실에 보관된 양을 품고 있는 석상 등이 신라시대 때 경교(Nestorius)가 전파된 사실을 알리고 있다. 사단법인 한국경교역사연구원(원장 이경운 목사)은 경기도 화성시 남양읍 무하호 51번길 한국경교역사박물관 경내에 중국 서안 비림에 있는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敎流行中國碑)의 모조비를 세웠다. 주후 635년 당나라 태종 정관 9년에 중국에 전래된 동방기독교인 경교의 중국선교 역사를 기술한 이 경교비는, 781년 당나라 덕종 건중 2년에 장안(지금의 서안) 대진사에 세워졌다가, 845년 당나라 무종 회창 5년 종교탄압 때에 땅에 묻혔다. 이후 1625년에 발견되어 현재 중국 서안 비림(碑林)에 옮겨져 있다. ‘대진경교유행중국비’의 모조비가 한반도에 세워진 것은 1917년 종교학자 골든 부인(Mrs, E.A Golden)에 의해 금강산 장안사에서 발견된 모조비에 이어 이번이 두 번째이다. 화성시 무하에 있는 한국경교역사박물관에는 한반도에서 출토된 다수의 경교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2) 영주 왕유리(도마 석상)


육로 실크로드의 제일 끝 지점과 해상 실크로드의 제일 끝 지점인 낙동강 상류 경북 영주시 평은면 강동 2리 왕유동(속칭 왕머리) 분처 바위에 있는 도마 석상(당시 여의도 순복음교회 유우식 집사가 기도 중 발견)에 보면 1988년 촬영한 사진에 선명하게 히브리어 글자 타우(⼌)와 멤(⼞)이 적혀 있어 쌍둥이란 뜻인 토마스(디두모)가 기도하는 자세로 무릎을 꿇고 있다. 또한 도마상의 가슴 부위에 양각된 십자가 모양이 있다. 교회연합신문, 2015년 3월 6일자 기사에서 발췌.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행 1:8)는 말씀대로 도마는 가장 먼 땅끝인 한반도에 도착하여 복음을 전했다. 도마상에는 지전행(地全行)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땅 지(地)에 혹이 하나가 더 있어 2000년 전 한나라(BC 202-AD 220) 때의 예서체 글씨임이 확인되었다.


도마 기념석상에 새겨진 발가락 10은 당시 가죽 샌들을 신고 와서 선교한 흔적이다. 발가락 때문에 불교인들이 제사를 드리지 못했다고 한다. 이스라엘 복장이며 패랭이 모자를 쓰고 있다. 이 두상은 15킬로미터 떨어진 안동의 제비원(연미사)에 보관되어 있다.


3) 도마박물관


 대구광역시 동구 화랑로 80길 8, (방촌동) 강촌종합상가 2층 말씀장로교회(조국현 목사)[동대구 IC에서 시청방향 1Km, 두번째 육교 좌회전, 강촌마을 아파트단지 110동 앞, 강촌종합상가 2층, 도마박물관 자료실]에 도마박물관이 있다(전화, 010-4391-4006). 내비게이션에 ‘우방강촌마을’을 찍으면 된다. 사도 도마에 관한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도마박물관에서는 하브루타 교육 및 영재교육을 안내하고 있다. 하브루타는 ‘짝을 지어 질문하고 대화하고 토론하고 논쟁하는 것’을 의미한다. 유대인들이 아이를 임신했을 때 태아에게 책을 읽어주고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 가정에서 식사를 하면서 아버지와 자녀가 질문하고 답변하는 것, 학교에서 교사가 학생들에게 질문하면서 수업하는 것이 하브루타다. 특히 어떤 명제에 대해 반증을 하며, 같은 주장에 대한 반대 의견을 깊이 생각해 보아 나중에 종합 생각을 만들어 내는 교육방법이다. 조국현 목사는 사도 도마의 한국 선교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출처: cafe.daum.net/thomas7 (도마박물관)


(1) 도마는 언제(When) 어디(Where)에 있었는가? 


 * AD 2-27년: 이스라엘의 갈릴리 티베리아 출생.
 * 목수와 석수 일을 배우며 성장.
 * AD 28-30(전반): 이스라엘에서 예수님의 공생애 3년 동안 제자생활.
 * AD 30(후반)-33년: 에데사(터키의 우르파)에서 전도 및 설교.
 * AD 34-40년: 북인도 탁실라에서 군다포러스 왕궁 건축.
 * AD 41-49년: 땅 끝 나라 한국(가야국)에서 전도.
 * 김수로왕과 허왕후 중매.
 * AD 50-51년: 이스라엘의 예루살렘 회의 참석.
 * 홍해 입구 소코드라 섬에서 전도.
 * AD 52-72년: 인도에서 전도, 인도 첸나이에서 순교.


(2) 도마는 무엇(What)을 하였는가?


 * 유대인 디아스포라에게 가서 부족 단위 전도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마 10:5-8)
 * 하나님 나라의 선포 (천국이 가까이 왔다, 도마복음)
 * 기도, 치유, 귀신 쫓아냄, 구제, 청빈생활 등 (도마행전)
 * AD 42. 3. 15(음) 부활절 날 가야국을 기독교 국가로 건국하도록 도왔다.


(3) 도마는 어떻게(How) 전도하였는가?


 * 바다의 실크로드를 따라 바다와 강에서 배 타고 이동하였다.
 * 목수와 석공의 기술을 사용하여 초청 받으며 다녔다.
 * 성령님의 인도를 받으며 전도하였다(비유: 바울의 환상, 행 16:6-10).


(4) 도마는 왜(Why) 그렇게 하였는가?


 * 주님의 전도 명령에 순종하였다.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막 16:15)


(5) 결론


 * 도마가 땅 끝 나라인 한국(가야국)에 와서 전도한 것은 온전히 확실하다. (비유: 거시경제, 나무도 보고 숲도 봐야 한다)


AD 48년 인도에서 공주로 있다가 사도 도마의 중매로 가락국(지금의 김해) 김수로왕에게 시집온 허왕후는 대엽종 차(茶)씨를 가지고 왔다. 허왕후의 군락지가 발견되고 낙동강 주변에 대엽종 차가 자라고 있다. 본래 밥그릇 옆의 국그릇은 찻그릇이었다. 밥을 먹을 때 차와 함께 먹으면 무병장수했다는 것이다. 차는 중국에서 몇 천 년 전부터 재배되어 왔지만, 약효가 알려진 시기는 AD 635년 당나라 태종 때 경교(景敎,Nestorius, 동방기독교)의 의학기술이 전해지면서부터였다. 이전까지는 육식과 우유가 주식이던 히말라야 산맥의 유목민들에게도 차의 약효가 알려지지 않았다. 그들이 차를 전쟁에서 빼앗아 갔지만 차의 효능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차를 사용하지 못하고 비타민 결핍증과 비만이 심했다. 히말라야 산맥의 유목민인 토번국 왕에게 당태종의 양녀인 문성공주가 AD 641년 시집가면서 비로소 차의 효능과 용도를 알게 되었다. 이때부터 “3일 식량이 없으면 살아도 하루도 차가 없으면 못 산다”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로 필수품이 되었다. 또한 차와 말을 바꾸는 차마교역이 시작되었고, 차마고도(茶馬古道)가 생겨나게 되었다. 도마박물관에서는 허왕후가 인도에서 가져와 낙동강변에 자라고 있는 대엽종 차를 제공한다.


3. 맺는 말


오스로외네 왕국 에데사를 중심으로 일찍이 도마기독교(Thomas Christianity)의 전통이 성립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후대에 대중적 인기를 얻은 마태기독교나 베드로기독교와는 다른 또 하나의 전통인, 야고보기독교나 도마기독교의 전통이 에데사와 관련돼 보존되었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4세기 초의 교회사가 유세비우스는 이미 예수 당대에 에데사의 왕 아브가르와 역사적 예수 본인 사이에 구체적 서한의 왕래가 있었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는 것이다. 아브가르왕은 질병과 정신적 고통으로 시달리고 있었으며, 예수가 행하는 기적을 소문으로 익히 알고 그에게 구원의 손길을 뻗쳤던 것이다(요 12:20-24 배경). 유세비우스는 에데사의 문서 보존 창고에서 아브가르왕과 예수 사이에 오간 편지를 기록한 시리아 문서를 찾아내는 데 성공했다고 자랑하면서, 그것을 시리아어로부터 다음과 같이 희랍어로 번역해놓았다. 전령(courier) 아나니아스(Ananias)를 통해 예수에게 보내진 아브가르의 편지는 다음과 같다.


“나 아브가르 우카마, 에데사의 군주, 예루살렘 지역에 나타난 훌륭한 구세주 예수에게 문안하오. 나는 당신과 당신의 치료에 관하여, 특별히 마약(pharmakn)이나 약초(botann)를 쓰지 않고 잘 고친다는 이야기를 들어왔소. 더욱이 장님에게 시력을 회복시키고, 절름발이가 걷도록 하며, 문둥이를 깨끗이 하고, 더러운 악령과 악마를 몰아내며, 고질병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을 고쳐주며, 심지어 죽은 자를 다시 일으키는 경지에까지 이르렀다는 소식을 익히 들었소. 이 모든 이야기를 듣고 나는 당신에 관하여 다음 둘 중 하나일 수밖에 없다는 판단에 이르렀소. 당신은 이런 일을 하기 위하여 세상으로 하강한 하나님(Theos)이거나 하나님의 아들( Son of God)일 수밖에 없소. 이러한 이유로, 나는 당신이 빨리 나에게로 와서 나의 고통을 해방해 주도록 탄원하는 편지를 보내는 바이외다. 더구나 유대인들이 당신을 조롱하고 박해한다고 들었소. 나는 작지만 오랜 전통을 지닌 훌륭한 도시를 소유하고 있소. 당신이 지내기에 이상적인 곳이라 생각되오.” 이 편지를 받은 예수는 아나니아스를 통해 다음과 같은 답장을 보냈다.


“나를 보지도 않고 나를 믿는 그대여, 복이 있도다. 나에 관하여 이미 기록된 바, 나를 본 자는 나를 믿으려 하지 않고 나를 보지 않은 자가 오히려 나를 믿고 생명을 얻는다 하였도다. 그대가 나에게 왕진을 요청하며 쓴 것에 관하여, 나는 먼저 이곳에서 내가 보내진 사명을 완수해야만 한다는 것을 알리노라. 이곳에서 나의 임무가 완수되면, 나는 나를 보낸 그이에게로 다시 들리우리라. 내가 들리울 때 나는 나의 제자 중 한 사람을 그대의 고통을 고치기 위해 파견하리라. 그는 그대와, 또 그대와 같이하는 모든 사람에게 생명을 주리라.”


그 편지 말미에 시리아어로 예수 사후에 실제로 벌어진 일들이 매우 상세하게 기술돼 있다고 한다. 도마(쌍둥이)인 유다는 아브가르왕에게 70제자 중 한 사람인 다대오(Thaddaeus)를 보냈는데, 그는 에데사에서 토비아스(Tobias)의 아들, 토비아스의 집에 머물면서 이적을 행한다. 결국 다대오는 아브가르왕을 대면하기에 이른다. 다대오를 대면한 아브가르왕은 이와 같이 말한다,: “나는 그대의 스승 예수에게 무한한 신념을 품었노라. 로마제국의 권세가 나를 방해하지 않았다면, 나는 그를 십자가에 못 박은 유대인들을 군대를 보내어 쳐부쉈을 것이다.”


다대오는 말한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그대 머리 위에 손을 얹노라.” 그 순간 그가 가지고 있었던 모든 질병과 고통이 사라졌다. 마약과 약초를 쓰지 않는 다대오의 치유와 선교는 계속된다. 드디어 전 국민과 왕이 모여드는 광장에서 그는 설교한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혔고, 부활하셔서 500명 성도들이 보는 자리에서 하나님 아버지께로 다시 올라간 사건을 선포한다. 이 일들은 에데사 기원 340년(AD 30)에 일어났다.


이 자료는 우리가 4세기 초의 기독교인들이 인식하고 있었던 예수에 대해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고 있다. 쾨스터는 도마기독교가 에데사에 일찍 정착된 것은 역사적 사실이지만, 에데사 도마기독교(Edessene Thomas Christianity)가 2세기에 마르시온파를 포용하는 등 로마 정통기독교와 대항하는 세력으로 성장하자 에데사를 견제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따라서 그 원조인 도마의 족보를 폄하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팔루트(Palut)가 에데사의 비숍(bishop.감독)으로 임명되면서 그는 에데사의 도마기독교를 서방 정통교회(Western orthodoxy)로 전향시켰고, 그에 대한 반발로 도마기독교 신봉자들의 상당수가 마니교로 흡수되었다고 본다. 하여튼 이러한 서방화의 과정 속에서, 아브가르의 전설도 원래는 도마가 주인공이었으나, 도마가 탈락되고 다대오로 대치되었다고 본다.


역사의 진실은 계속 밝혀져야 한다. 카톨릭 관점에서 쓴 교회사를 한국 대부분 신학교에서 교재로 사용하는데, 카톨릭 교도들이 8000만 여명의 기독교인들을 죽인 이야기는 삭제되어 있다. 초대교부들에 대한 잘못된 정보와 신학을 가르치고 있다.


아시아 대륙의 땅끝인 한국에 복음이 사도 도마에 의해 전해졌다는 가설이 많은 자료들에 의해 증명이 되고 있고, 수많은 외국 학자들과 해외 성도들이 성지순례를 하고 있으며, 국내 성도들이 지금도 성지순례를 하고 있다. 더 이상 불교인들이 허황후나 수로왕릉 앞에서 제사를 드리지 않는다. 그들도 가야국은 불교가 내한하기 훨씬 오래전의 일이라 인정한다. 그리고 한국이나 일본에 차 전통(tea ceremony)에 성찬식이 있었다고 알려지면서 수많은 불교인들이 기독교로 개종했다. 이런 사실을 인식하면서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사도 도마의 한국 선교 이야기는 계속 탐구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