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오쇼 라즈니쉬의 도마복음 강의(The Mustard Seed)-22 본문
오쇼 라즈니쉬의 도마복음 강의(The Mustard Seed)-22
104.그대는 악하기 때문에 균형을 취하려 할 뿐이다.
그대는 악하기 때문에 균형을 취하려 할 뿐이다, 그러나 그대는 그대로 남는다.
나에게 가까이 있는 사람은
불에 가까이 있는 사람이요,
그리고 나에게서 멀리 있는 사람은
왕국으로부터 멀리 있는 사람이다.
어느 곳이든지 불이 있다고 느끼면 결단을 내려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라,
거기가 바로 그대가 가서 뛰어들 곳이다, 어느 곳이라도 위안만이 있다고 느
끼면 거기에서 달아나라, 그곳에는 스승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성직자들이 있
을 것이다, 그들은 언제나 그대를 위안하고 있다, 그래서 그대는 그들에게
마음이 끌리는 것이다.
그대는 위안받기 위하여 성직자를 찾아간다, 삶은 그토록 비참하기 때문
이다, 성직자는 치료법을 안다, 그는 위안자이다, 그는 그대의 이야기를 들
어주고는 말한다, “두려워하지 말라, 하느님은 자비로우시다, 너의 죄는 사
해질 것이다.”
그대가 죽음을 두려워한다면 그는 이렇게 말한다. “두려워하지 말라, 영혼은
영원한 것이며 거기에 죽음이라는 것은 결코 없다.” 그대가 죄책감에 사로잡
혀 있으면 그는 죄책감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알려준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돈을 절에 기부하라, 돈을 교회에 기부하라, 기부는
선한 것이다, 그것을 통해서 그대의 죄는 사해진다, 선행을 하라, 병원을 짓
고 학교를 세우고 사람들에게 봉사하라, 가난한 사람들, 억눌린 사람들, 병
든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라.”
이것들이 그대를 위안하는 방법이다, 그러나 그 속에 변형은 없다, 그대는
그대의 직업을 버리고 사회사업가가 될 수도 있고, 오지의 주민들을 위해 봉
사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대는 여전히 과거와 똑같은 상태로 남아 있다, 그
대의 삶은 봉사하는 생활로 변했다, 그러나 옛 것은 그대로 있다, 그것은 하
나의 연속이다.
그대는 탐욕스러웠고 재산을 축적했다, 이제 그대는 자선 행위를 한다,
그러나 그대는 그대로 남아 있다, 그대는 탐욕에 싫증을 느끼고 이제는 탐욕이
기부로 변했다, 처음에 그대는 다른 사람에게서 빼앗았으나 이제는 주고 있
다, 그러나 그대는 그대로 남아 있고 내면의 그대 존재는 조금도 변형되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대를 인정할 것이고, 사회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당신은 변했다.”
그러나 이것은 변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단지 죄를 던져버리려는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대는 그 동안 너무나 많은 착취의 죄를 저질러왔기 때문이다.
기부는 위안이 된다, 그것은 그대에게 자신이 선한 사람이라는 느낌을 준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느낌일 뿐이다, 그대가 악하기 때문에 균형을 취하려 할 뿐이다, 그러나 그대는 그대로 남는다.
교활한 마음, 타산적인 생각, 균형, 계산 등은 그대로 남아 있다, 그대 안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가? 돈은 전에도 중요했고 지금도 중요하다, 그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그대는 그것을 모아왔다, 그리고 그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그대는 그것을 기부하는 것이다.
전에, 그대는 사업에 성공하고 재산을 축적하면서 자신이 아주 잘해 나가고 있다고 느꼈었다,
왜냐하면 그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대는 돈에 사로잡혀 있었다,
지금도 여전히 그대는 돈에 사로잡혀 있다.
그대는 기부를 한다, 돈을 기부함으로써 사람들에게 봉사를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돈은 여전히 중요한 것으로 남는다, 적극적인 탐욕으로부터 소극적인 탐욕으로,
그렇게 변한 것이다, 그러나 그대 자체는 변하지 않았다, 그대로인 것이다,
-- 적극적이었던 것이 소극적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그대는 섹스 속에서 살아왔다, 그대는 섹스의 생활을 해온 것이다, 이제
그대는 브라마차리, 즉 독신주의자가 되었다, 그대는 여자, 혹은 남자들에게
싫증을 느끼고 이제 모든 관계를 끝냈다, 그러나 정말로 끝났는가?
그것은 소극적인 것으로 되었을 뿐이다.
적극적인 것이 소극적인 것으로 바뀌었을 때 그것은 그대에게 자신이 변했다는 느낌을 준다는 것을 기억하라, 그것은 마치 물구나무서기를 하고 있는 사람과 같다, 그러나 그 사람은 같은 사람이다.
처음에 그는 자신의 발로 서 있었지만 -- 그것은 더 자연스러운 것이다,
섹스는 자연스러운 것이다 -- 이제 그는 자신의 머리로 서 있다,
그는 시르샤산(shirshasan, 요가에서의 물구나무서기)을 하고 있으며,
이제 자신이 변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머리로 서 있다고 해서 그것을 변화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대는 독신주의자가 될 수 있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대는 그대로 남는다,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물라 나스루딘의 친구 중의 하나인 압둘라가 하즈(haj),
즉 메카로 종교적 순례를 떠나게 되었다, 그는 늙은 사람이었지만 얼마 전에
젊은 여자와 결혼을 했다, 그 젊은 여인은 매우 아름다웠다.
물론 그는 순례를 떠났지만 그의 아내가 매우 걱정이 되었다, 그녀가 그에게
충실하지 않을 가능성이 너무나 많았다, 어떻게 할 것인가?
그래서 그는 정조대를 구해 가지고 아내에게 채웠다.
그러나 열쇠를 어디에다 둘 것인가? 그것을 성지순례에 가지고 가자니 보기에 좋지도 않았고 마음에 부담이 되었다, 아내를 믿지 못한다는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열쇠는 그로 하여금 끊임없이 아내를 기억하게 하고 아내가 불륜을 저지를 가능성을 생각하도록 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생각 끝에 그의 친구인 물라 나스루딘을 찾아갔다.
나스루딘은 늙은이였다, 나이가 이제 거의 아흔아홉 살이나 되었다, 그리고 그가 여자 관계를 끝냈다는 것은 누구나가 알고 있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여자 관계가 끝났을 때 브라마차리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그는 언제나 브라마차리에 대하여 이야기했고, 젊은이들을 비난하면서
이렇게 말하곤 했다, “너희들은 인생을 낭비하고 있다, 그것은 쓸모 없는 짓이고 에너지 낭비일 뿐이다, 그것은 정말 무익한 것이다.”
그의 친구 압둘라가 그에게 와서 말했다. “나스루딘, 고민이 하나 있네,
나의 아내가 젊기 때문에 그녀를 믿을 수가 없네, 그래서 정조대를 사서
아내에게 채웠는데 열쇠를 어디에 두어야 하겠나? 자네는 항상 브라마차리에
대해서 말했고, 자네는 나의 가장 절친한 친구가 아닌가? 그러니 이 열쇠를
좀 보관해 주게나, 나는 3개월 안에 돌아오겠네.”
나스루딘이 말했다. “자네가 그런 고민을 하면서 나를 생각했다니
정말 고맙군, 열쇠는 걱정말게, 자네 부인은 안전할걸세.”
압둘라는 편안한 마음으로 떠났다, 이제 염려하지 않아도 되었다, 나스루딘은 아흔아홉 살이었고, 그는 늘 브라마차리에 대해서 말해 왔으며, 20년 이상을 독신주의를 주장해 왔기 때문이다.
일이 잘 되어 그는 기쁜 마음으로 떠날 수 있었다, 그러나 떠난 지 한 시간
정도 지났을 때, 그는 뒤에서 자신을 향해 급하게 달려오는 당나귀 발굽 소리를 들었다.
그 당나귀가 가까이 다가왔을 때, 거기에는 물라 나스루딘이 타고 있었다,
그는 달려오느라 지쳐 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소리쳤다,
“압둘라! 압둘라, 자네는 다른 열쇠를 나에게 주었네!”
이런 일은 소극적인 마음에게 언제나 일어난다,
만일 그대가 적극적인 마음에서 소극적인 마음으로 바꿀 수 있다면
소극적인 마음을 다시 적극적인 마음으로 되돌릴 수도 있다,
이것들은 같은 마음의 두 극이다.
그래서 그대는 브라마차리, 독신주의자, 승려 들이 끊임없이 섹스를 생각하면서
또 그것을 비난하는 것을 알고는 놀랄 것이다, 양쪽 다 떨쳐버릴 수는 있다,
그러나 하나만을 선택하고 다른 하나를 버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부정하는 사람은 긍정하는 사람이다, 억누르는 사람은 그것을 기르는 사람이다.
그대는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다, 그것은 가능하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그대는 브라마차리도 아니고 성에 탐닉하는 사람도 아니다,
그대는 단지 그 두 가지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그대는 남성도 아니고 여성도 아니다, 예수가 말한 ‘하느님의 독신자’가 바로 이것이다,
양극이 모두 버려진 상태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대는 한쪽 극단에 남아 있게 된다,
탐욕으로부터 자선이나 기부로 옮아갈 수는 있다, 그러나 욕심은 그대로 남는다.
나는 구두쇠들을 많이 보아왔다, 여러 유형의 구두쇠들이 있다, 기본적인
유형은 두 가지, 적극형과 소극형이다, 적극적인 구두쇠는 돈을 모은다,
사회는 그런 사람을 비난한다, 소극적인 구두쇠는 기부를 한다,
사회는 그런 사람을 환영한다, 그러나 구두쇠라는 점에서는 양쪽이 똑같다.
변형이란 과거와의 단절이다, 그것은 부분적인 수정 작업이 아니다,
그대는 완전히 용해되고 어떤 새로운 것이 일어난다,
예수가 말하는 새로운 탄생, 부활의 의미가 이것이다.
옛 것은 가고 새로운 것이 온다, 그리고 새로운 것은 옛 것으로부터 오지 않는다,
그것은 완전히 새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탄생이다,
그것은 단지 수정되어 지속되는 옛 것이 아니다.
아니다! 거기에 더 이상 옛 것은 남아 있지 않고 전에는 결코 없었던 것이
새로 생겨난다, 옛 것은 떨어져 나가고 새것이 오지만, 거기에 인과율적인
고리는 없다, 이것은 이해하기가 매우 어렵다, 왜냐하면 과학적인 정신의
훈련에 의해 우리는 인과율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든 것은 원인이 있다고 생각한다, 붓다조차도 원인이 있다고,
예수 역시 과거로부터 원인이 있어 생겨난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니다! 붓다가 과거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대는 전체를 놓치고 있는 것이다.
과거는 더 이상 없다, 붓다는 완전히 새로운 존재이다, 이 사람은 결코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고타마 싯다르타가 거기에 있었다, 그러나 이 사람 붓다는 결코 거기에 없었다.
옛 것은 무로 돌아가고, 새것이 무로부터 생겨났다, 새것은 옛 것으로부터
생겨나지 않았다, 새것은 옛 것의 자리에 왔을 뿐이다, 왜냐하면 옛 것이
있던 자리가 텅 비었기 때문이다, 새것은 미지의 것에서 온다, 옛 것은
아는 것으로부터 사라지고 새것이 가슴속에 있는 빈 곳을 찾아들어왔다.
그것은 마치 그대의 방이 어두울 때와 같다, 방은 폐쇄되어 있다, 모든 문
들과 창문은 닫혀 있다, 그 방은 밤처럼 어둡다, 그때 그대가 창문을 연다,
갑자기 어두움은 사라지고 밝아진다, 햇빛이 들어온다, 그대는 그 태양 빛이
그곳에 있던 어둠 때문에 생겨난 것이라고 말하겠는가?
어둠이 빛으로 변한 것인가? 아니다! 어둠이 사라지고 빛이 그 방으로 들어
왔을 뿐이다, 이 빛은 어둠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그것은 어둠에 의해서
발생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완전히 새로운 것이다, 그것은 문 밖에서 기다
리고 있다가 문이 열렸을 때 들어왔을 뿐이다, 단지 문을 여는 것만이
필요했을 뿐이다.
명상을 한다는 것은 문을 여는 것과 같다, 그대가 기도할 때 그대는 문을
여는 것이다, 어두운 옛 것은 사라지고 빛이 들어올 것이다, 어둠이 빛과 관
련 없는 것처럼 이 빛은 더 이상 과거와 관련된 것이 아니다.
어둠과 빛은 불연속적인 것이며 전혀 다른 차원, 다른 존재들이다, 이것을
이해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종교가 계속해서 주장해 오고 있는 기적이다,
과학은 이것을 이해할 수 없다, 왜냐하면 과학은 수정과 변화와 연속성의
관계에서만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종교는 불연속과 변형과 전환의 관점
에서 생각한다.
그대는 예수나 붓다가 될 수 없다--그대 자신이 바로 방해물인 것이다,
그대는 완전히 불태워져야 한다, 그대는 완전히 사라져야만 한다, 예수가
그대 안에 들어올 때 그대는 사라진다, 그러면 그대는 그대의 과거가 마치 꿈
처럼 느껴질 것이다, 그것은 결코 그대가 아니었다, 자기 동일시는 부서져버
렸다.
그러므로 예수는 불과 같다, 그대가 만일 예수에게 가까이 간다면 죽을 준
비를 하라, 예수는 그대에게 죽음만을 의미할 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대
는 오직 죽어야만 다시 태어날 수 있다, 그대가 죽기를 두려워한다면 예수와
같은 사람에게서 달아나라, 그에게 가까이 가지 말라, 그는 위험하다, 그는
하나의 심연과 같다, 그대는 어지러움을 느끼며 그에게로 떨어질 것이다.
예수는 말한다, “나에게 가까이 있는 사람은 불에 가까이 있는 사람이다.”
죽음에 가까이, 점점 더 가까이 가고 있는 것이다, 옛 것은 사라지고, 기본
금속은 용해될 것이다, 그리고 그는 즉시 다른 두 번째 것을 말한다, 그대가
만일 불을 참아낼 수 있다면, 예수나 붓다, 혹은 크리슈나의 불을 참아낼 수
있다면 두 번째 것은 즉시 가능하게 될 것이다.
나에게 가까이 있는 사람은
불에 가까이 있는 사람이요,
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은
왕국으로부터 멀리 있는 사람이다.
그대가 예수의 불을 통과할 수 있다면, 제자가 스승의 불을 통과할 수 있
다면, 즉시 새로운 세계가 그에게 열릴 것이다, 하느님 나라, 불멸의 나라,
불사의 나라, 진정한 생명이 그에게 열릴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는 말한다. “나에게 가까이 있는 사람은 불에 가까이 있는
사람이요, 나에게서 멀리 있는 사람은 왕국으로부터 멀리 있는 사람이다.”
그대가 예수에게서 달아난다면 그것은 곧 그대의 것이 될 수 있는 궁극의 왕
국으로부터 달아나는 것이다, 그것이 문제이다, 왕국에 대해서 매력을 느낄
때면 그대는 스승에게 가까이 가고 싶어한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갔을 때
그대는 뜨거운 불 기운을 느낀다, 그러면 그대는 달아난다.
깨달음을 얻은 사람과 가까이 있을 때에 이것은 언제나 문제가 될 것이다,
가까이 다가가서는 달아날 방법을 생각한다, 스승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그대는 다시 스승과 왕국에 가까이 가고 싶어한다.--그대가 멀리 있을
때 그 불은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대는 다시 왕국에 가고 싶어한다, 그 왕국은 성취되어야만 한다, 그것이
완성이다, 그것 없이 충족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을 것이다, 그것 없이 그대는 불임의 자궁인 채로 남을 것이다, 그 어떤 것에도 생명을 주지 못할 것이다.
그대는 의미를 잃어버린 채로 남아 있을 것이다, 그것 없이는 그대의 전 생애는 단지 하나의 악몽과 같을 것이고, 그대는 아무 데도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빨리 달리고는 있지만 도달할 데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대는 어떻게
자신을 꽃피울 수 있을지 생각하기 시작한다.
그것은 이미 꽃을 피운 스승의 곁에 있을 때만 가능하다, 죽은 껍질 속에서 그대의 씨앗은 불안과 불편함을 느낄 것이다, 그리하여 그 씨앗은 껍질과
싸우기 시작하여 껍질을 깨고 흙에서 나와 태양을 향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 은 그대가 불을 통과할 때에만 가능한 일이다.
이것이 바로 제자들의 문제이다, 스승에게 가까이 가는 즉시 그는 달아날 생각을 하는 것이다, 그는 온갖 달아날 궁리를 하게 된다, 내면에서 그는 어떻게 하면 이 위험한 사람에게서 달아날 수 있을까 하는 것만 생각한다, 그러나 막상 그가 달아났을 때 그는 다시 돌아오고 싶은 욕망을 느끼기 시작한다.
그대는 결정해야만 한다, 결정은 최종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그대는 다시
돌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일단 그대가 불 속에 들어가면 되돌아갈 수 없다, 일단 예수와 친하게 되면 되돌아갈 수는 없다.
되돌아갈 수 없는 지점이 온다, 그 불 속을 지나가면서도 그대는 언뜻 왕국을 보기 때문이다, 그때 그 불은 더 이상 불이 아니고 그대는 기쁨과 축복을 느낀다, 그러면 그대는 그대에게 불이 되어준 그 사람에게 감사하게 된다, 그리고 이제는 언뜻 보았던 왕국이 멀리 있지 않고 가까이에 있는 것이다.
왕국을 언뜻 보기 시작한 그때부터 모든 불은 불이 아니게 된다, 그것은
아주 부드럽게 변한다, 그대는 살아오면서 그처럼 부드러운 것을 느껴본 적
이 없다, 그러나 용광로에 뛰어들기 전, 그 경계 지점에서 도망친다면 그대
는 끊임없이 고통 속에 있게 된다, 그리고 그대들은 지금까지 그렇게 해왔
다.
그대는 이 지구 위에서 전혀 새로운 존재가 아니다, 아무도 새로운 사람은
없다, 그대는 이 지구만큼이나 늙었다, 아니 지구보다 더 늙었을 것이다, 그
대는 다른 별에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대는 이 우주만큼이나 늙었다, 그대는
언제나 존재해 왔다.
왜냐하면 존재하는 모든 것은 존재계 속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빠져나갈 수
는 없다, 그대는 이 존재계의 필수적인 구성 요소이다, 그대는 늘 여기에 존재 해 왔다, 그대는 수많은 붓다들 곁에 있어왔다, 그대는 수많은 예수와 모하메트 곁에 있어왔다, 그리고 이것은 언제나 문제를 일으켰다.
그대가 이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대는 매력을 느꼈다, 그대 가 그들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져 있었을 때 그들은 그대를 끌어당기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대는 그들에게 가까이 가지만 가까이 갈수록 두려 움을 느낀다, 거기에 불이 있기 때문이다.
그대는 달아날 결심을 한다, 그래서 그대는 아직도 방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어느 날엔가는 그 불 속을 통과할 결심을 해야 한다, 다른 방법이
없는 것이다, 그대는 불이 아닌 가짜 스승을 통해 자기 자신을 위안하고
있다.
그대는 사제에게 가고, 사원이나 교회를 찾아간다, 그리고 의식을 행하고
온갖 종류의 거짓들을 행한다, 그것은 예수나 크리슈나로부터 달아나는 행위
이다, 그들과 함께 있으면 진실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 진실이란 오직 불을
통과해야만 나타나는 것이다.
그대는 순수하게 되어야만 한다, 완전하게 녹아 없어져야 한다, 그러면 거기에 하나의 빈 공간이 찾아든다, 그리고 그 공간에 창조의 빛, 신의 빛이 들어와서 그대를 채운다, 그때 거기에 불행이나 두카, 즉 고뇌도 없게 된다.
그대는 영원한 지복 속에 있게 되고 거기에 환희가 찾아온다, 그것은 어떤
다른 것을 통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대의 본질이며, 그대의 존재 자체이다.
만일 그것이 어떤 다른 것을 통해서 일어났다면 그것은 영원한 것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러한 것은 다시 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그것이 외부의 어떤 것에 의해서 생겨난 것이라면 그것은 영원할 수 없다, 그것은 일시적인 것일 뿐이다.
그대가 그대 자신의 존재를 깨달을 때에만 지복과 환희는 영원히 그대와
함께 남아 있을 수 있다, 그러면 아무도 그것을 빼앗아갈 수 없다, 그러나 그
이전에 그대의 존재는 결정화되어야 하고, 순수해져야 하며, 연금술적 변형
을 거쳐야만 한다, 새것이 오기 위해 옛 것은 가야만 하고, 미래가 탄생하기
위해 과거는 죽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제자들이 해야만 하는 결정이다.
105.이것이 예수가 그대에게 약속할 수 있는 모든 것이다
물라 나스루딘이 죽은 지 불과 6개월 후에 그의 아내가 죽어가고 있었다,
그들은 그 마을에서 가장 지독한 구두쇠들이었다, 그의 아내는 이웃집 여자
를 불러 그녀에게 말했다.
“레하마, 내 말을 들어요, 나를 검은 실크 드레스를 입혀서 장사지내줘요,
그러나 그것은 비싼 옷이고 거의 새것이나 다름이 없어요, 그러니 이렇게
해주세요, 나는 관 속에 누워 있을 테니 아무도 내 등을 볼 수는 없을 거예
요, 그러니 내 옷의 등 부분을 오려내서 당신 옷을 해 입으세요.”
그 여자는 그 말을 믿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그녀는 물라 나스루딘의
아내가 그렇게 베푸는 마음을 보인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고, 두 번째는 그
녀의 터무니없는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나스루딘의 아내가 말했다. “떠나기 전에 당신에게 선물을 줄 수 있어서
정말 기뻐요, 이것이 내 선물이에요, 이 옷이 썩게 되는 것이 정말 싫어요,
아주 비싸고, 아름답고, 또 새것이랍니다, 그러니 옷의 등 부분을 오래내세
요, 그러면 아무도 모를 거예요.”
그러자 이웃집 여자가 말했다. “여기서는 사람들이 보지 못하겠지요, 그
러나 저 세상에서 당신과 나스루딘이 천국의 금계단을 밟고 올라갈 때 뒤에
서 천사들이 보고 웃을 거예요.”
나스루딘의 아내가 웃으면서 말했다. “걱정하지 말아요, 천사들은 나를 쳐
다보지 않을 거예요, 왜냐하면 나스루딘이 죽을 때 바지를 입히지 않고 장사
지냈거든요.”
탐욕스러운 사람은 탐욕으로, 분노의 사람은 분노로, 섹스의 사람은 섹스로 남는다, 반대의 극으로 이동한다고 해서 변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래서 그대들은 거짓 종교에 쉽게 끌려가는 것이다.
거짓 종교는 언제나 반대의 극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그대가 화를 잘 내는
사람이라면 거짓 종교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자비를 베풀어라,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 친절하라, 화내지 말라, 그러면 보상받을 것이다.”
그대가 탐욕스러운 사람이라면 거짓 종교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탐욕을 억제 하라, 그러면 저 세상에서 보상받을 것이다.” 이것 역시 탐욕에 바탕을 둔 호소이다, 왜냐하면 보상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부하고 자선을 베풀어라, 그대가 만일 이 세상에서 1루피를 기부하면 저 세상에서는 1백만 루피를 받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거짓 종교가 하고 있는 일이다, 이것은 그대가 반대 쪽의 극으로 움직여가는 것을 도와줄 뿐이다, 그것은 쉬운 일이다.
마음은 언제나 반대 편으로 가는 것을 좋아한다, 왜냐하면 마음은 언제나
한 가지 일에 권태를 느끼기 때문이다, 반대 편의 맛을 본 후에는 그대는 다
시 그쪽으로 이동한다, 너무 많이 먹는 사람은 먹는 것에 싫증을 느끼게 된
다, 음식에 대한 맛을 잃고 배고픔을 잊는다, 그는 음식을 즐길 수가 없게
된다, 그래서 그는 단식에 대해서 생각하기 시작한다.
그가 변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단식은 그에게 다시 맛을 느끼게 하고 배고픔이 돌아오게 할 것이다, 음식에 싫증을 느끼는 사람들에게는 단식이 최고이다, 이틀만 단식을 해보라, 그러면 배고픔이 다시 돌아올 것이고 그대는 다시 열심히 먹어댈 것이다.
여자, 또는 남자와 사랑을 나눌 때마다 육체는 만족을 느낀다, 물론 24시간 동안뿐이다, 육체는 만족을 느낀 다음에는 싫증을 느낀다, 육체적 사랑을
하고 난 후 모든 남자나 모든 여자는 이 난센스 같은 짓을 떨쳐버릴 생각을
한다, 어리석은 일이라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절정은 사라지고 골짜기가 다시 찾아온다, 그때 그대는 자신이 무엇인가 결정
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그것은 틀린 생각이다, 그것은 결정이 아
니다.
24시간 이내에 육체는 다시 에너지를 축적할 것이고, 24시간 이내에 성욕은
다시 생겨난다, 그대는 그 결정을 다시 깨뜨려야만 할 것이다, 24시간은 성욕
이 다시 돌아오는데 필요한 시간이다, 그리고 나이가 들수록 시간은 더 많이
걸린다, 그러나 에너지가 축적되면 그대는 다시 성적인 욕구를 느낀다.
이 극 현상을 보라, 거짓 종교와 참된 종교는 바로 이러한 차이점을 가지
고 있다, 거짓 종교는 그대가 반대 쪽의 극으로 옮겨가는 것을 도와준다, 그
것은 변형이 아니다, 진짜 종교는 그대로 하여금 두 극을 모두 태워버리도록
도와준다, 그렇기 때문에 참된 종교는 진짜 불인 것이다.
나에게 가까이 있는 사람은
불에 가까이 있는 사람이요,
나에게서 멀리 있는 사람은
왕국으로부터 멀리 있는 사람이다.
적극적인 욕망과 소극적인 욕망 모두가 사라질 때, 거기에 왕국이 있다,
왕국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대 안에 있다, 오직 욕망들 때문에
그것을 보지 못할 따름이다, 욕망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그대는 그것을 보
지 못하는 것이다.
그대의 눈이 이러저러한 욕망으로 가득 차 있지 않을 때, 섹스를 원하지도
반대하지도 않을 때, 음식을 탐하지도 않고 단식을 행하지도 않을 때, 욕망
이 사라지고 아주 단순한 상태일 때, 그때 그대의 눈에서 안개는 사라지고
두 눈은 명확해진다.
그대의 두 눈은 볼 수 있게 되고 명료해진다, 그 명료함 속에 왕국이 있다,
왕국은 언제나 그대 안에 존재한다, 그러나 그대의 눈은 언제나 욕망들로 채워져 있다, 그리고 욕망은 그대에게 좌절과 눈물을 가져 온다.
욕망은 그대에게 희망과 꿈을 만들어준다, 그대의 눈은 욕망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명료하지가 않다, 눈이 욕망과 희망과 꿈과 고통으로 채워져 있지 않고 단순히 비어있을 때, 그대는 처음으로 언뜻 무엇인가를 볼 수 있다.
예수 가까이에 있으면, 깨달은 사람 가까이에 있으면 그대는 불을 통과해야만 한다, 그 불은 적극적인 것이든 소극적인 것이든 그대가 가진 모든 욕망을 태워버릴 것이다, 이 세상의 것이든 저 세상의 것이든 모두 다, 그대의
희망 또한 태워버릴 것이다.
희망을 통해서 욕망이 살기 때문이다, 그 불은 그대의 모든 과거와 미래를
태워버릴 것이다, 그 불은 단순히 그대를 지금 여기에 남아 있게 할 것이
다, 더 이상 미래도 없고 되돌아볼 것도 없다, 갑자기 에너지는 내부로
방향을 바꾼다, 전환과 변형이 일어나는 것이다.
보아야 할 외부도 없다, 과거는 죽었다, 미래는 오지 않는다, 어디로 갈 것인가? 그대는 내면으로 들어가야만 한다, 외부에는 에너지가 흐를 곳이 없다,
모든 에너지가 내면으로 향한다, 하느님 나라가 거기에 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나에게 오라,
나의 멍에는 가볍고
나의 통치는 부드럽다.
그대는 이것을 아주 깊이 이해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그대를 도울 것
이기 때문이다.
예수와 같은 사람에게 갈 때면 언제나 마음에 의문이 생겨난다, “왜 이 사 람에게 순종해야 하는가? 그것은 노예 같은 짓이다.” 그리고 모든 것이 모순 되어 보인다.
왜냐하면 예수는 “나는 너희들을 해방시키러 왔다, 나는 너희들에게 완전한
자유를 주기 위해서 왔다”라고 말하면서 순종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모순처럼 보인다.
“왜 복종해야 하는가? 내가 왜 다른 사람에게 복종해야 하는가?” 그는
“나는 너희들에게 완전한 자유를 주려고 왔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모순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그는 그 자유를 지금 바로 나에게 주어야 한다, 왜 내가 누구에게 복종해야 하는가? 왜 내가 그를 주님으로 섬겨야 하는가? 왜 그가 나의 스승이 되어야 하는가? 왜 그가 나의 영혼과 존재의 주인이며 스승이 되어야 하는가? 왜 내가 그에게 복종해야 하는가?”
예수는 말한다.
나에게 오라,
나의 멍에는 가볍고
나의 통치는 부드럽다.
예수는 말한다, “그렇다, 나는 너희가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를 알고 있다,
이것 역시 일종의 노예상태이다.” 그러나 예수가 그대를 해방시키지 않는다 면, 어떻게 그대가 그것이 참된 해방인지를 알 수 있겠는가?
그대는 오직 노예 상태만을 배워왔다, 그대가 움직이고 활동하는 모든 곳에서 그대는 노예 상태를 보아왔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노예 상태가 되는
것도 보았다, 사랑은 자유로움을 약속했지만 그러나 그렇게 된 적은 없다.
아내와 남편 들을 보라, 그들은 노예 상태에 있고 그 멍에는 너무도 무겁다,
그대는 자유를 찾아 세상을 돌아다녔지만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간에 그대
는 감옥을 만들었을 뿐이다, 자유의 이름으로 온갖 노예 상태가 존재한다.
국가는 노예 상태를 만들며, 민족도 노예 상태이고, 종교도 노예 상태이다,
소위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 사랑 역시 노예 상태이다, 모든 사람이 너무
많은 노예의 짐을 지고 있다, 그래서 예수가 왔는데 그 역시 순종을 요구
한다, 물론 그대의 마음은 말한다. “이것은 다시 노예가 되는 것이다.”
예수는 그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지금 순간에는, 그런 마음의 상태에서는 자유가 무엇인지 이해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말한다.
“나에게 오라, 나의 멍에는 가볍고......” 이것이 그가 그대에게 약속할 수 있
는 모든 것이다, 그는 “나는 지금 당장 너희에게 자유를 주겠다”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그는 한 가지 약속만을
하고 있다, “나의 멍에는 가볍고 나의 통치는 부드럽다.”
106.스승이란 바로 감옥 밖에 있는 사람이다
삶 속에서 그대의 멍에는 무겁다, 그리고 그대의 주변에는 그대를 지배하고 통치하는 주인이 많다, 그들은 위험하고 사납다, 그들은 마치 그대에게
덤벼들어 그대를 죽이고 있는 사자와도 같다.
예수는 말한다. “지금 내가 너희에게 할 수 있는 말은, 나의 멍에는 힘들지
도 않고 무겁지도 않다는 것뿐이다.”
그대가 “왜 복종해야 하는가?”라고 생각한다고 해서 그대가 자유를 택하는 것은 아니다, 그대는 단지 자유의 이름으로 그대의 옛 노예를 선택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대의 마음 그 자체가 노예 상태이며 그대의 욕망 또한 노예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대는 외부의 도움 없이는 그것을 벗어날 수가 없다.
그대는 감옥에 너무 오랫동안 갇혀 있었기 때문에 그곳을 집으로 착각하고 있다, 그리고 그 감옥은 아주 잘 지켜지고 있기 때문에 감옥 밖에 있는 사람이 그대에게 도움을 주지 않는 한, 감옥을 빠져나가 본 사람이 그대에게 그 방법을 알려주지 않는 한, 그대는 감옥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다.
스승이란 바로 감옥 밖에 있는 사람을 의미한다, 그도 역시 감옥에 있었던 적이 있다, 그대들이 있는 감옥과 같은 곳이었다, 그러나 그는 탈출을 했다,
그는 문을 찾았고 열쇠를 찾았으며 어떤 방법을 알아내어 탈출하였다,
그는 그대를 도와줄 수 있다.
그대가 잠들어 있다면 그대는 잠에서 깨어날 수가 없다, 무언가 외부적인 도움이 필요하다, 자명종 소리라도 도움이 될 것이다, 그것은 밖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자명종 소리도 그대를 속일 수가 있다, 그대가 꿈속의 사원에 있었는데 자명종 소리를 그 사원의 종이 울리는 것으로 듣는 것이다.
그래서 그대는 계속 꿈을 꾸면서 자게 된다, 누군가, 기계장치가 아닌 살아있는 사람이, 스승이 필요하다, 그대가 새로운 꿈을 만들며 잠 속에 빠져 있지 않도록 그대를 흔들어 깨울 수 있는 깨어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예수는 말한다. “궁극적인 자유가 너희에게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오직 이것만을 너희에게 약속할 수 있을 뿐이다, 나의 멍에는 가볍고 나의 통치는 부드럽다.”
그런데 그대는 그대의 주위에서 그토록 무거운 멍에들을 선택해 왔던 것이다.
다음과 같은 일이 일어난 적이 있다, 아주 힘이 없어 보이는 남자가 사무실로 들어왔다, 여위고 병들어 보이는 순한 사람이었다, 그가 말했다, “여기서 야간 경비원을 찾고 있다는 말을 듣고 왔습니다.”
지배인이 의심스러운 눈으로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 “예, 우리는 야간 경비원을 찾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원하는 사람은 특히 밤중에 항상 불안해 하는 사람입니다, 항상 다른 사람을 믿지 못하며 의심이 많은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항상 문젯거리를 찾고 있는 사람, 주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늘 듣고 있는 사람, 신경질이 많고 한 번 화가 나면 악마로 변하는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그 약하고 순해 보이는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말했다. “그렇다면
내 아내를 보내겠소.”
이것은 남편이 아내에 대해서, 그리고 아내가 남편에 대해서 어떻게 느끼고 있는가를 말해 주는 것이다, 그 멍에는 무거운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대가 깨닫기만 한다면, 그대의 모든 욕망이 얼마나 무겁고 헛된 목표를 향하여 그대를 채찍질하고 있는가를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그대가 그 목표를 향해 가지 않으면 문제가 생기고, 가면 좌절이 생긴다,
각각의 욕망은 주인인데 욕망은 수백만이나 된다, 그러므로 그대는 혼란의
와중에 있으며 수백만이나 되는 주인의 노예이다, 그것은 힘든 일이다, 그리
고 모든 욕망은 각각의 목표를 향해 그대를 몰아간다, 그대 자신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는다.
그리고 그대가 가지 않으면 문제가 생긴다, 욕망은 그대에게서 그렇게 쉽게
떠나가지를 않는다, 그것은 통치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대가 가면
거기에는 절망이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그 목표는 욕망의 목표일 뿐이지
결코 그대 자신의 목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대는 자신의 목표를
알지 못한다, 그대는 그대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내맡김’이란 이러한 수백만의 욕망과 본능의 주인들에 대항해서 하나의
주인을 선택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의 통치는 부드럽다, 그것이 부드러운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기본적으로 주인이 하나이기 때문이다.
한 주인만을 가진다는 것은 언제나 좋은 일이다, 주인이 둘밖에 없다 할지
라도 거기에는 싸움이 있기 마련이며 주인이 수백만일 때는 항상 혼란이
있게 된다, 수백만의 명령을 받게 되고 그대는 사방으로 끌려다닐 것이다,
그대는 혼란의 와중에 있게 될 것이다, 그래서 광기가 생기는 것이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누구를 따라야 하고 누구를 따르지 말아
야 할 것인가? 그대의 탐욕은 말한다, “계속해서 돈이나 모으자.” 그대의
섹스는 말한다. “계속해서 성에 탐닉하자.” 그러나 그렇게 되면 문제가 생긴다, 왜냐하면 갈등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만일 그대가 섹스에 너무 탐닉하면 돈을 모을 수 없다, 구두쇠들은 언제나
반섹스주의자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섹스에 탐닉할 에너지가 돈
을 모으는 에너지로 전환되기 때문이다.
구두쇠들은 연인이 되지 못한다, 그들은 반섹스주의자다, 반대로, 섹스에 탐닉
하는 사람들은 결코 돈을 모을 수 없다, 그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들의 조상
이 돈을 모았다 하더라도 그들은 그 돈을 모두 써버릴 것이다, 그들은 돈 쓸데를 찾아내고 또 찾아낼 것이다.
하나의 욕망은 말한다, “돈을 모으라, 돈은 안전을 의미한다, 늙으면 누가
도와줄 것인가? 은행에 저축을 하라, 그것은 그대를 보호해 줄 것이다!”
그리고 섹스는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인생이란 흘러가는 것이다, 무엇 때문에 늙었을 때를 생각할 것인가? 청춘은 덧없이 흘러간다, 청춘이 가버리고
에너지가 없어지기 전에 가서 즐겨라, 에너지를 사용하라, 즐겨라!”
섹스는 말한다, “이 순간을 즐겨라!” 그리고 탐욕은 말한다. “눈앞에 있는 것 을 생각하지 말라, 멀리 있는 목표를 생각하라!” 거기에 갈등이 있다, 이것은 두개의 욕망 사이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욕망이 다른 욕망과 갈등을 일으킨다.
분노는 말한다. “즉시 이 사람을 죽여야 한다!” 그러나 그대의 두려움은
말한다. “그러지 말라, 남을 죽이면 남도 너를 죽일 것이다, 예의를 지키고
미소를 지어라, 너는 착한 사람이다, 너는 살인자가 아니다, 너는 범죄자가
아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주인은 많은데 노예는 하나인 것이
다.
하나의 주인만을 선택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최소한 수백만이나 되는 욕
망의 목소리는 녹아 없어진다, 예수만을 따라야 한다, 그러면 그대는 모든
책임을 그에게 둘 수 있다, 그리고 그는 말한다. “나의 멍에는 가볍다......”
왜 가벼운가? 그가 그대에게 순종을 요구하더라도 그것은 그대를 다른 주인들로부터 행방시켜주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일단 그대가 그대의
욕망들로부터 벗어나면 그 역시 이 멍에를 던져버릴 것이다, 이것은 단지 하
나의 약속일 뿐이다.
그대가 통과해야 할 과정일 뿐인 것이며, 일단 모든 욕망에서 벗어나면 이러
한 순종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스승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제 이 순종도 버려라, 너도 네 자신의 빛과 능력으로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나의 입으로부터 마시는 사람은
나와 같이 될 것이며
나 자신은 그가 될 것이다,
그러면 감추어진 것이 그에게 드러날 것이다.
이 ‘내맡김’은 제자가 스승이 되기 위한 통과의례이다, 그대가 그대 자신
을 스승에게 완전히 내맡기면 그대는 그 순간부터 스승과 하나가 될 것이다,
거기에 더 이상 갈등은 없기 때문이다, 거기에 더 이상 에고는 없다.
에고의 여정은 끝이 났고, 그대는 그것을 떨쳐버렸다, 그리고 그대가 존재하지 않을 때, 그것이 바로 내맡김의 의미이다, “나는 없습니다, 당신이 있습니다, 그리고 나를 어느 곳으로라도 이끌어 주십시오, 나는 결정하지 않겠습니다, 당 신이 결정하십시오.
나는 그저 그림자처럼 따르겠습니다, 나는 믿음 안에서 장님이 되겠습니다,
당신이 ‘뛰어내려 죽어라!’ 하고 말하더라도 나는 그렇게 하겠습니다, 나는
더 이상 어떤 부정도 하지 않겠습니다, 나의 긍정은 최종적이고 전체적이며
절대적인 것입니다.” 이러한 완전한 긍정이 바로 내맡김이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이제 그대 안에서 에고가 더 이상 고집부리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 에고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고 에고를 기르는 일도 없다, 만일 이런 일이 한순간이라도 일어난다면 그때 문이 열리고 예수가 그대 안에 들어올 것이다, 붓다의 빛이 그대를 관통할 것이다.
왜 그대는 내맡김을 두려워하는가? 문이 열리면 그대는 상처를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외부 세계에 대해 두려움을 갖고 있다, 그대는 그대의
어두운 방에서 살아왔다, 너무 오랫동안 그 속에 갇혀 있었기 때문에 그대는
그 어둠에 익숙해 있다.
그대는 어둠과 하나가 되었다, 그대는 빛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문을
열면 그대는 빛을 전혀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 빛이 그대의 눈을 너무 부시
게 하기 때문에 눈을 감아야 할지도 모른다, 만일 그대 자신을 내맡기게 되면 그대는 미지의 길에 들어서는 것이다.
그리고 마음은 언제나 미지의 것을 두려워한다, 그런데 그 미지의 것이란
바로 신이다, 그 미지의 것은 바로 예수이다, 그는 미지의 것을 전하는 메신저이다, 단지 태양의 한 빛살이다, 태양은 아주 먼 곳에 있지만 그 빛살이 그대의 문을 두드린 것이다, 내맡김이란 문을 여는 것을 의미한다.
107.그대는 스승이 되기 이전에 완전한 제자가 되어야만 한다
누구든지 나의 입으로부터 마시는 사람은
이것은 매우 상징적이며 의미 있는 말이다, 연인들은 서로의 입을 마신다,
그것이 키스이다, 깊은 키스란 상대방 육체의 포도주를 서로의 입으로부터
마시는 것이다, 그것은 가장 취하게 하는 것 중의 하나이다, 어떤 종류의 술도 그것과 비교할 수 없다.
같은 현상이 정신적인 차원에도 존재한다, 제자들은 스승의 입으로부터 마신다, 그것은 육체적인 현상이 아니다, 그것은 가장 깊은 핵심에 있다,
거기에서 제자는 스승의 존재를 만나고, 거기에서 그들은 서로 포옹하며,
거기에서 그들은 서로 키스한다, 예수가 말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누구든지 나의 입으로부터 마시는 사람은
나와 같이 될 것이며
나 자신은 그가 될 것이다,
그러면 감추어진 것이 그에게 드러날 것이다.
예수는 먹고 마시는 것에 대해 상징적인 용어들을 많이 사용해 왔다,
그는 말한다, “나를 먹고 마셔라, 그래서 그대 안으로 나를 완전히 흡수해라.” 먹고 마신다는 것의 의미는 바로 이것이다,
“나를 너희 안으로 가져오고 완전히 소화시켜서 너희 존재의 일부가 되게 하라.”
거기에 더 이상 제자도 없고 스승도 없다, 구별이란 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주인도 없고 노예도 없다, 그때 제자가 스승이 된다, 그때 ‘나’는 그대이고,
그때 예수는 그대이다, 구별은 존재하지 않는다, 구별은 결코 예수가 한 것이 아니다, 구별은 그대 쪽에서 했었다.
내맡김이란 그대가 그 구별을 용해시키는 것을 말한다, 그대는 만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연인들과 같다, 보통의 육체적 사랑이라 할지라도 그대는 자신의 에고를 내던져야 한다, 비록 잠시 동안일지라도
그대는 그렇게 해야만 한다, 잠시 동안이지만 그대는 연인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
잠시 동안 그대들의 육체는 둘이 아니라 하나이다, 하나의 원이 된다,
잠시 동안 그대들의 육체는 서로 만나서 엉키고 서로에게 녹아들어간다,
그것은 두 개의 분리된 존재가 아니다, 잠시 후에는 그들은 분리된 존재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육체는 영원히 만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혼은 영원히 만날 수 있다, 육체는 고체이다,
그것들은 끝없이 다가갈 수는 있다, 그러나 진정으로 녹아들지는 못한다.
영혼은 물질이 아니며 고체가 아니다, 그것은 마치 그대의 방 안에 촛불을
켰을 때의 빛과 같다, 방 안은 빛으로 가득 찬다, 방 안에 또 하나의 촛불을 켠다, 방 안은 더 많은 빛으로 가득 찬다.
그대는 첫 번째 초의 불빛이 끝나는 곳과 두 번째 초의 불빛이 시작되는 곳을 구별할 수 있는가? 그것을 구별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빛들은 만나서 서로 섞이고 하나가 된다, 영혼은 마치 빛과 같은 것이다.
제자가 스승이 자신에게 스며들어오는 것을 허용하는 것은 마치 높은 수준의
성적인 현상과 같다, 제자가 여성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내맡김이 바로 이것이다, 왜냐하면 여성은 그녀가 완전히 내맡길 때에 절정에 이르기 때문이다,
그녀가 완전히 내맡길 때에 그녀는 사랑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공격적이지 않다, 그녀는 수동적인 극이다, 그리고 남성은 공격적이다,
그는 도달해야 하고 뚫고 들어가야만 한다, 그래야만 만남이 가능하다,
제자는 여성처럼 되어야 한다, 수동적이고, 허용적이며,
어떠한 장애도 일으키지 않고 내맡겨야만 한다.
스승은 남성 역할을 해야 한다, 여자 스승이 적은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런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런일이 있었다 하더라도,
- 남성이 역사 속에서 한 번 아니면 두 번, 혹은 세 번 쯤 있었을 것이다
- 그런 여성들은 전혀 여성답지가 않았었다.
캐쉬미르에서 있었던 일이다, 한 여인이 있었는데 그녀의 이름은 랄라(Lalla)였다, 캐쉬미르에는 격언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캐쉬미르 사람들은 오직 두개의 이름, 즉 알라(Allah)와 랄라만을 알고 있다는 격언이다.
그녀는 매우 드문 여인이었다, 그대는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 그녀는 벌거벗고 살았다, 평생 동안 그녀는 벌거벗고 돌아다녔다,
일반적으로 여자는 숨기고, 부끄러움을 타고, 수동적이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녀는 대단히 공격적이었다, 그녀는 여성의 육체 속에 남성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에게는 제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런 일은 극히 드물다.
여성이 스승인 경우는 드물다, 그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성이 제자인 경우는 남성이 제자인 경우의 4배가 된다, 그 비율은 4대 1이다.
마하비라는 5만 명의 수도승을 거느리고 있었다, 그 중에서 4만 명은 여자 비구니였고, 만 명이 남자 수도승이었다, 그리고 여성 제자들을 비교할 수는 없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남자는 절대로 여자처럼 그렇게 순종적으로 될 수가 없다.
남성의 모든 정신과 형태는 공격적이기 때문이다, 여성의 마음은 쉽게 순종한다, 내맡김이 쉽게 이루어진다, 그것은 여성이 가진 특성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성 제자보다 훌륭한 제자를 발견할 수가 없고, 남성인 스승보다 훌륭한 스승을 발견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그럴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각각의 수준에 극의 성질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대는 육체적인 수준에서 연인을 만난다, 여자는 받아들인다, 그녀는 결코
주도권을 갖지 않는다, 여성이 주도권을 갖는다면 그녀는 여성답지가 않다,
그런 여성을 사랑하는 남자는 없을 것이다,
여자가 와서 프로포즈를 한다면 그대는 당황할 것이다.
여자는 기다린다, 여자는 생각하고 꿈을 꾸지만 기다릴 것이다, 프로포즈는
남성에게서 와야 하는 것이다, 그가 먼저 제안해야 하고 시작해야 한다,
그가 공격해야 한다, 그리고 그녀는 완전히 순진한 것처럼 행동할 것이다,
그대가 말하는 것에 관해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행동할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끊임없이 계획해 왔고 그가 와서 프로포즈 하기만을 기다리고
또 기다려왔던 것이다.
물라 나스루딘이 아내와 함께 종려나무 가지에 가려져 있는 벤치에 앉아 있었다, 그때 갑자기 종려나무 뒤편의 벤치에 젊은 커플이 와서 앉았다,
남자는 즉시 아주 낭만적으로, 아주 시적으로 이야기하기 시작하였다.
물라 나스루딘의 아내는 안절부절하며 불안해 하게 되었다, 그녀는 나스루딘의 귀에 대고 말했다, “젊은이는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을 모르고 있는 것 같아요, 그러니 휘파람을 불어서 우리가 있다는 것을 알려줘요, 그리고 젊은이는 사랑에 푹 빠져 있어서 이제 막 프로포즈를 할 것 같아요.”
나스루딘이 말했다, “내가 왜 휘파람을 불어야 하지? 내가 프로포즈를 할 때는 아무도 휘파람을 불어서 놀라게 하지 않았어.”
여성은 하나의 기다림이다, 그녀는 자궁이다, 그녀의 육체, 그녀의 존재는
인내와 수동의 상태이다, 높은 정신적 수준에서도 같은 현상이 일어난다,
거기에서도 그녀는 기다리는 것이다.
제자는 여성과 같이 되어야 한다, 그는 스승과 깊은 사랑에 빠져야 한다,
그러면 거기에 높은 정신적 존재에 녹아드는 만남이 이루어진다, 그것은 마치
성적인 현상과 같은 합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육체적이지 않고 아주 존재적이다, 그 만남에서 제자는 새롭게 태어난다, 그 만남에서 그는 임신을 한다.
자기 자신을 임신한다, 자신의 자궁 속에 새로운 자신의 존재를 지니는 것이다, 제자로서의 기간 즉, 그가 스승 가까이에 있는 시간은 임신을 하기 위한 시간이었다, 그것은 오직 깊은 믿음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의심을 가지면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렇게 되면 자신을 방어하게 되고 자신을 무장해서 보호하려 하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나의 입으로부터 마시는 사람은
나와 같이 될 것이며
나 자신은 그가 될 것이다.
그러면 감추어진 것이 그에게 드러날 것이다.
일단 완전히 내맡기면 스승은 그대의 문이 된다, 그러면 완전히 다른 세계,
생명과 축복의 문이 열린다, 힌두교에서는 그것은 사치타난다라고 부른다,
진정한 존재, 진정한 의식, 진정한 지복, 사치타난다가 그대에게 가능하게 된다.
스승은 문이 된다, 그리고 그대가 이것을 얻는 즉시 그대는 깨달음을 얻게 된다, 그대는 이제 다른 사람들이 불을 통과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다,
이제 그대는 다른 사람들이 그 절대적인 것을 언뜻 볼 수 있도록,
혹은 궁극적인 것에 도달하여 그 속에 녹아들 수 있도록 도울 수가 있다.
그러나 그대는 스승이 되기 이전에 완전한 제자가 되어야만 한다, 가르치기 전에 배워야 하고, 도움을 주기 전에 도움을 받아야만 한다,
누군가 그대에게 깊은 도움을 주는 것을 허용해야 한다,
그 깊은 도움은 그대가 존재하지 않을 때만 가능하다.
왜냐하면 ‘그대’는 혼란이며, 장애물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미지의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그대의 성장을 방해하는 장애물을 끊임없이 만들어내고 있다, 그대는 아는 것에만 집착하고 있다, 그러면 만남은 이루어지지 못한다.
스승은 미지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그대가 아는 세계, 과거에 머물러
있고 스승은 미지의 것에 존재한다, 두 점이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은 있다,
미지의 것이 과거를 만나면 과거는 녹아들고 타버릴 것이다, 마치 태양이
어둠 속에 들어가면 어둠이 사라지는 것처럼, 과거는 더 이상 발견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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