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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의 큐복음서 이야기【 Q34 】주기도문 본문

영성수행 비전/큐복음서

도올의 큐복음서 이야기【 Q34 】주기도문

柏道 2018. 12. 9. 21:46

도올의 큐복음서 이야기

【 Q34 】주기도문 

 


 章

                                           말                                          씀

 Q 34

어느날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었다.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기도를 어찌할지 가르쳐 주옵소서. "

예수께서 응(應)하시되, "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말하라: ' 아버지여!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당신의 나라가 임하옵시며,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용서하여 주옵소서. 그리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 "

마태  6

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10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11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누가 11

1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3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4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소서 하라


 

예수는 제자들에게 " 랍비 " 의 모습으로도 비친다. 랍비가 특별한 기도문을 작성하여 제자들에게 가르치는 것은 유대교의 흔한 관례였다.

 

첫말, " 아버지여 " 는 매우 충격적이다. 구약에서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아버지로서 호칭한 예는 없지 않으나, 그 아버지와 여기 아버지는 전혀 다르다. 구약의 아버지는 민족의 아버지며, 율법과 권위와 징벌의 상징이다. 그러나 여기 아버지는 개인의 아버지며, 사랑과 해방과 용서의 상징이다. 여기 쓰인 희랍어 " 파테르 " (Πατερ)아람어 " 아바 " (Abba)에서 온 것이다. " 아바 " 는 우리말의 " 아빠 " 와 같이 매우 개인적이고 구체적이고 친근한 뜻을 담은 말이며, 하나님을 아바로 지칭한 용례는 예수 이전에는 전혀 없다. 그것은 예수만의 유니크한 용법이다.(막 14:36, 마 11:15, 26:39, 42, 눅 23:34, 요 11:41, 12:27, 17:1~26). 주기도문을 아바로 시작했다는 것 자체가 가히 혁명적인 발상이며 새시대의 도래를 의미하는 것이다.

 

셈족어에서 " 이름 " 은 인격과 존재를 의미한다. 하나님의 이름은 실제로 하나님 자신을 뜻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름이 사람들에 의하여 거룩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이미 거룩한 것이다. 따라서 예수의 뜻은 이미 거룩한 아버지의 이름이 사람들에 의하여 거룩하게 취급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 이름이 경멸의 대상이 될 수 없으며, 인간들의 생각과 행동에 의하여 오염될 수 없는 것이다. 이 말은 곧 예수님이 선포하는 천국의 주체인 하나님의 이름을 당대의 사람들이 더럽히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예수에 대한 오해요, 예수의 아빠에 대한 곡해였다.

 

우리말 개역판 번역, " 나라이 임하옵시며 " 는 나쁜 번역이 아니다. 옛말에는 " 가 " 라는 주격토씨가 없었다. 천국은 반드시 이 땅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 날마다 일용할 양식 " 이란 시내광야에서 날마다 먹을 만큼의 만나가 주어졌던 유대인의 기억을 반영할지도 모른다. 만나가 즐비하다고 다 욕심낼 수는 없다. 음식은 천국선포 내용의 가장 본질적인 부분이다. 그러나 음식은 우리 신체의 최소한의 요구의 대상이지 욕심의 대상이 아니다. 모두가 다 같이 날마다 일용할 양식이 있는 사회, 예수시대의 사회경제사적 여건으로 볼 때, 그것은 천국 이상의 그 무엇이었다. 예수의 기도는 매우 소박한 현실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는 식탁교제라는 삶의 자리(Sitz im Leben)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에 관하여 매우 낙관적인 믿음을 가진 사람이었다.

 

예수의 " 용서신앙 " 이 강조되고 있다. 하나님에게 용서받는 유일한 길은 끊임없이 내 이웃의 인간적 과오를 용서하는 것이다. 타인의 나에 대한 과오는 어떠한 경우에도 나의 하나님에 대한 과오에 비하면 아주 사소한 것이다. 그러나 인간적 용서의 축적이 하나님의 용서를 보장받는다는 뜻은 아니다. 인간에 대한 용서를 통하여, 우리는 그러한 실존적 고뇌 속에서 하나님의 전적인 용서를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용서는 " 도덕적 개선 " 이 아니라 자신이 " 새 사람이 되는 체험 " 을 의미하는 것이다.

 

" 시험 " 은 " 유혹 " 뿐만 아니라 " 시련, " " 수난, " " 박해, " 를 의미할 수도 있다. 그러나 종말론적 박해상황은 " 페이라스모스 " (peirasmos)란 단어의 함의로부터 배제된다. " 시험에 들게하지 마옵소서 " 라는 말이 근원적으로 " 시험으로 이끌지 말아달라 " 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시험에 들지 않고 평화롭고 조용한 인생을 살게 해달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결국 인간에게 유혹이나 시련은 끊임없이 닥치게 되어있다. 어떠한 유혹이나 시련에도 굴복하지 않고 진리를 향해 살 수 있는 힘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의 기도는 곧 제자의 기도다. 제자의 기도는 바로 모든 시련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의 갈구로써 끝난다. 더 이상 구질구질한 언어가 요구되지 않는다. 주기도문은 예수의 천국사상의 핵심이며 요체이며 실천강령이다.   

 


출처: 큐복음서 도올 김용옥 / 통나무